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죽고 나서 100년 뒤,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의 학자 겸 정치가 아리이 하쿠세키[新井 白石]는 야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役] 이후 소극적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이에야스[家康]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막정(幕政)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였기에 그런 마사노부와 대립하면 주가(主家)인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그 마음 속을 헤아리며, 
 ‘그 당시의 무장으로서는 특별한 일이었다’
 고 야스마사라는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성실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미카와[三河] 무사로, 같은 나이의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쿠가와 군단의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었다.

 야스마사는 미카와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에 16살의 나이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때 무공을 세운 덕분에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어 이에야스의 이름글자 중 ‘야스[康]’를 하사 받았다. 이후 이에야스가 출진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직속군[旗本] 선봉을 맡았으며, 1566년에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직속군 선봉부대 부대장[御旗本先手侍大将]'이 되어 토쿠가와 군단을 지휘하여 그 용장()을 전쟁터에 드러내게 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秀吉]와 싸운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 때 야스마사는 적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 격문(檄文)을 만들어 히데요시에게 욕설을 선사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덕분에 출세한 가신[家臣] 주제에 지금은 그 주군의 아들을 상대로 활을 쏘고 있다. 이야말로 팔역의 죄[각주:2]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도(非道)한 히데요시와 같은 편에 서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군의 아들’이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로, 이에야스는 노부카츠를 맹주로 하여 히데요시와 싸웠던 것이다.
 야스마사의 격문을 본 히데요시는 분노하였다.
 “코헤이타[小平太]를 산 채로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은상은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
라고 사졸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히데요시의 분노도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이유 중 하나는 이에야스에 대한 야스마사의 충성스런 성격이 히데요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1586년의 일이다. 코마키-나가쿠테가 끝난 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맺었다. 히데요시는 토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냈다. 그때 함을 가지고 온 사자로 온 것이 야스마사였다. 히데요시에게 알현하였을 때 히데요시는,
 “여어 야스마사 왔는가. 코마키 전투 때는 자네의 잘린 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충성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네”
 하고 가볍게 언급하였을 뿐이었으며, 거기에 함을 가지고 온 중요한 사자가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같은 해 11월 9일에 종오위하(従五位下) 시키부노타이후[式部大輔]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로 불리는 동료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도 서임되었다. 토쿠가와 가신 서임의 시초였다.

 세키가하라 결전 시에 야스마사는 히데타다[秀忠 – 후에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에 속해 있었다
 히데타다 군은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간 이에야스의 본군과 다른 길을 취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서상(西上)하였다. 야스마사 외에 혼다 마사노부,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 등이 속해있었다. 양군은 미노[美濃]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행군 도중 강적이 나타나 히데타다 군의 서상을 막았다.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부자였다.

 기략을 연발하는 사나다 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히데타다 군은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굉장히 불쾌해 했다. 히데타다가 겨우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에 도착했을 때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3일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히데타다는 안절부절 못했다. 히데타다 진중은 침묵이 지배하였다. 이때 결심한 야스마사가 밤에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야스마사는 우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죄한 뒤 이어서 소신을 당당히 말하였다.
 “주군의 분노가 만약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 맞추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주군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물리치고자 했으면 어째서 사자를 보내 빈번히 연락을 취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고 이에야스에게 따지며,
 “언젠가는 천하인(天下人)이 되실 히데타다 공이 무공 부족으로 인하여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이는 히데타다 공만의 치욕이 아니라 주군 자신에게도 그 비웃음이 쏟아질 것입니다”
 고 논리 정연히 설득하였다. 야스마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분노를 풀고 다음 날에는 히데타다와 대면하고 격려하였다.
 히데타다의 한없이 기뻐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있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야스마사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야스마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미담과 같은 이야기 외에 야스마사에게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골심을 나타내는 일화도 전해진다.
 1606년 4월, 야스마사의 병이 중하여 이에야스, 히데타다의 병문안 사자로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가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사자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이불 안에서,
 “저도 장(臟)이 썩어 이렇게 추해졌습니다”
 고 빈정대며 말했다. 예전 작전회의에서 혼다 마사노부가 발언하였을 때 마사노부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된장이나 소금이 늘고 주는지만 신경쓰는 장이 썩은 사람이 전투에 관해서 무엇을 안다고 말을 하는가?”
하고 매도한 적이 있었다.
 병상에서의 말은 마사노부 등을 중용하는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것이고 하였으며, 평화로운 시대에 들어와 잊혀져 가는 존재인 예전 전쟁터 용사의 자조(自嘲)이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중 한 명. 1581년 토오토우미[遠江] 타카텐진 성[高天神城]를 공격하였을 때 적의 수급 40을 취했다 한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 – 후에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군을 물리쳤다. 1590년 토쿠가와 에야스[徳川 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졌다. 1606년 악성 종양을 앓아 5월에 죽었다. 59세.

  1. 잇코우 종[一向宗 - 정확히는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 반란. 미카와 잇코우잇키[三河一向一揆]는 세금을 내지 않던 미카와의 혼간지 계열의 절에 세금 징수하려 하다가 그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본문으로]
  2. '八虐'라고도 쓴다. 율령제 시대에 가장 무거운 죄. 기본 사형이며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텐노우[天皇]에 살해에 관한 모반(謀反), 황거나 황릉에 관한 불경인 모대역(謀大逆), 일본 국가에 관한 반란획책인 모반(謀叛), 신사에 관한 불경인 대불경(大不敬), 존속살해인 악역(悪逆), 대량 살인죄인 부도(不道), , 존속살인 이외에 존속에 관한 죄인 불효(不孝), 주군에 관한 배신인 불의(不義)...인 여덟가지 죄. 여담으로 이중 존손에 관한 악역, 부도, 불효의 경우 당시 일본에 유교논리가 없었기에 사법(死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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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11.10 0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쌍류의 게임에서는 언제나 클론장수(..;)의 안습함에 사실 신장의야망류에서도 전용 전법도 없고 참 어정쩡하다 싶었는데.. 에, 역시 게임은 게임이니까요. 실제론 역시 4천왕 다운 대인배스러움을...

    여담이지만 암이란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수년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아.. 역시 문제는 세키가하라였으려나(..;)

    그나저나 그저께 하마마츠도 지나갔었는데 왜 이에야스가 떠오르지 않았는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천왕 중 하나가 클론이란 말입니까!!!
      ...하긴 사천왕 중 No.1격인 사카이는 나이도 나이니 만큼 별개로 치고, 톤보키리라는 전용무기를 장착한 혼다 타다카츠나, 적비대[赤備え]를 둔 나오마사와 비교하면 좀 임팩트가 딸리긴 하는 편인 듯.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하니...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개연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타다 군의 실질 No.1 참모 격(경험이나 명성에 더해 동원한 군사도 히데타다 직속군 15000을 제외하곤 토쿠가와 가문에서는 최다인 3000)이었을텐데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없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존경하지만 아산 지날 때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괘의치 마시길...

  2.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0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휘관들을 많이 보유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면에서 항우나 유비, 제갈량이 결국 천하를 못 잡은 것은 그런 인재의 폭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요.

    ( 아, 물론 촉나라는 인재가 넘쳐도 국력이 부족해서 졌겠지만 )

    대망팬들에게는 야스마사보다도 고헤이타가 더 익숙하다는 점에서 대망은 획기적 문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인재도 인재지만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시스템(보급, 행정, 의사결정에 필요한 소통 등등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달리(그러니까 대망이 나왔던 시대) 요즘 소설류는 통칭보다는 이미나[諱]를 주로 쓰는 것 같더군요. 제가 읽은 같잖은 소설만 그렇게 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개인적으로도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보다는 시바타 곤로쿠[柴田 権六]가 아직은 더 익숙하더군요. ^^...저도 대망이 첫 일본 소설이거든요.

  3. 골룸 2009.11.10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다다카츠와 더불어 전란의 시기에 용감히 싸운 무사였죠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도도다카토라 처럼 변화무쌍한 사람도 있는데 말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1 1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근데 주석 단 거 다 날라가고, 나름 교정했던 것도 그대로군요... 초벌 올려서 실례했습니다....그럼에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다다카츠나 야스마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 한 인간의 인성이 크게 변하게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좋은 말씀이십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이에야스 탓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타다카츠나 야스마사가 전쟁터만의 인물로 인식되긴 하지만...

      후년 에스파니아의 돈 로드리고가 오오타키 성의 거대한 모습에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마사가 왕인 줄 알았다는 것이나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여러 장수들에게 수 많은 편지를 보내며 동군 측으로 끌어 들인 것을 보면 타다카츠의 정치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야스마사도 또한 이에야스가 행한 칸토우 다이묘우 배치의 틀을 제시한 인물인 것을 보면 그 역시도 야전공성만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력과 실적있는 인물들에게 아무런 상이나 영지 가증도 없이, 거기에 정치 중추에서 쫓아낸 이에야스를 아무리 주군이라곤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유교의 '충'이란 논리가 도입 이전이었기에 더욱 그럴 수 있었을 것 같구요.

    • 골룸 2009.11.12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찌 보면 매정하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2대째로 넘어가는데 좀 부담이 될만한 인물들을 사전에 정리 한 것도 같고
      아무튼 그런 와중에도 도쿠가와 가문내에 큰 문제 없이
      혼다나 사카키바라 가문이 계속 됐던 걸 보면
      가문내의 결집이나 충성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뭐 이에야쓰 입장에서야 쓸만큼 다 쓰고 어느 정도 포상도 한거니까요
      계속해서 느끼는거지만 이에야쓰는 참 짠 사람인거 같아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 사극 용의 눈물....인가에서 태종 이방원이 공신들을 내치면서 하는 말이....
      "저들이 기세등등하여 세자를 업신여길 것이 두렵소이다"....비슷하진 않지만 저런 뉘앙스였을 것입니다.

      공신들을 토사구팽하는 제왕들의 맘은 저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련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이에야스는 천하인의 그릇이 아니라며...
      "그는 가신들에게 영지를 아낌없이 나눠줄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를 잡진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짠 사람이긴 했나 봅니다.(...무엇보다 우지사토가 실제로 저런 말을 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4. 나라 2009.11.11 2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의 최대의 잘못은 히데타다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야스의 중뿔난 마음도 이해할만 합니다. 결과적으론 세키가하라 결전에 승리했지만, 히데타다군이 제대로 오지 못한 것은 확실히 불안 요인이었으니까요. 히데타다군이 제 시간이 왔으면 완승을 쉽게 보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2 0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다만 잘 나가는 부잣집 도련님, 말 좀 듣게 하기는 엄청 힘들 듯 싶습니다.

      사족으로....세키가하라 때 토쿠가와 가문의 실질적 전투집단은 이에야스 휘하에 있던 토우산도우[東山道] 방면군이 아니라, 히데타다가 이끌던 나카센도우[中仙道] 방면군이라 하더군요. 전투에 적합한 토쿠가와 가문 내의 만석 이상을 가진 무장들은 타다카츠와 나오마사를 제외하곤 히데타다 휘하에 속했다고 합니다.

      만약 세키가하라 본전에서 히데타다 군이 있던 전쟁터에 있던 상태였다면 후쿠시마 마사노리, 쿠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토쿠가와 군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합니다.

      또한 나중에 후쿠시마, 쿠로다 등에게 전공에 따른 막대한 영지를 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요.

  5. 나라 2009.11.12 1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나중에 후쿠시마에겐 제대로 엿을 먹이지 않습니까;;;
    히데타다가 제 시간에 오고 서군이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 항상 그게 궁금하더군요. 만약 미츠나리가 이겼으면 가마쿠라 시대의 싯켄 같은 사람이 되었을까나;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3 1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이에키[改易]라는 손이 한번 더 가면 그 만큼 위험도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에도가 아닌 자기 영지에 있을 때 카이에키 영이 떨어졌다면 과연 역사처럼 순순히 응했을지는 궁금합니다만...

      뭐 그래서 참근교대라던가 일국일성령이라는 보험이 있었긴 합니다만, 이외로 히데요시 은고 다이묘우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면 서국에 몰려 있었던 만큼 다시 전화의 시대로 돌아갈 확률이 0%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든 불씨를 세키가하라에서 히데타다가 늦음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로 배반하지 않고 결전이라...개인적으로는 서군이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미 서군은 높은 곳을 전부 제압하여 동군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포위하고 있었고, 동군은 전부 그 아래 혹은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던 입장인지라...
      (포진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ja/0/05/Sekigahara.png )

      장기전으로 가면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군사들이 동군 후방 보급을 끊을 수 있는 반면 서군은 바로 뒤편이 이시다 미츠나라의 영지인지라 보급면에서는 서군이 비교적 자유롭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미츠나리...는 어땠을까요...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나중에 정쟁에 패하여 한때의 인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6. dsfsd 2012.03.23 04: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츠나리 - 서군 - 시마즈 모리 - 임진왜란의 주역들일 뿐 아니라 나중에 도쿠가와 막부 전복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조선을 다시 쳤던 그 뿌리 아닙니까 과거의 일이지만 고소하다는 얘기밖에 안나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3.24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댓글 늦어 죄송합니다. ^^;

      ...근데 본문글과 리플은 좀 매치가 안 되는군요. 단지 이름이 거론되어서인가요?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알기 힘들군요. 인과응보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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