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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11.01 무라카미 요시키요 8
  2. 2004.12.24 아나야마 바이세츠
  3. 2004.12.23 오부 토라마사 1
  4. 2004.12.02 사토미 요시타카
  5. 2004.12.02 오오타 도우칸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1573 1 1 병사(病死) 73

1501 ~ 1573.

시나노(信濃) 카츠라오(葛尾)성주(城主). 맹장으로 이름 높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싸워 토이시(戶石)성 합전(合戰)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부 시나노(信農), 에치고(越後)로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후에 신겐에게 패해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도망. 이후 객장(客將)이 되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합전 등에 참가하였다.

(그림은 태합입지전V에서)






신겐(信玄)에게 두 번 패배를 안기다.


 전성기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는 대단히 강했다.

 부와 북부 시나노(信濃)일대의 장병을 이끌고 사카키(坂城)의 카츠라오(葛尾) 성을 본거지로 삼아 타케다 하루노부(武田 晴信 = 信玄)와 승부를 벌였다.

 1548 2월 우에다하라(上田原)의 전투에서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 등을 패사(敗死)시켰을 뿐 만 아니라 신겐에게도 심한 부상을 입힐 정도로 대승하였으며, 1550년의 토이시(戶石)성 합전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신겐에게 [토이시 붕괴(戶石崩れ)]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따라 붙게 할 정도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 온 요시키요의 무운(武運)도 여기까지였다. 신겐의 사키카타슈우(先方衆) 사나다 유키타카(真田 幸隆)에게 토이시성을 빼앗기자 유력한 휘하의 무장들이 계속해서 신겐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본거지인 카츠라오 성의 방어 체제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나노(信濃)의 용장 요시키요도 어쩔 수 없이 1553년 4월 9 카츠라오성을 버리고 8살의 외아들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 =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도망가게 된다.


에치고(越後)의 객장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망명한 목적은 켄신(謙信)의 원조를 받아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의 원인이 되었는데, 카츠라오 성을 뒤로한지 14일 후인 4 23일에는 켄신의 원군을 얻어 카츠라오성을 탈취하였고 치이사가타(小県)()의 시오다(塩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확고한 신겐의 영지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에치고(越後)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후 요시키요는 옛 영토회복의 꿈을 계속 가슴에 품으며 도합 5회에 이르는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4번 참가하였다. 1561 9월의 네 번째가 되는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사투[각주:1]에서는 시나노(信濃)의 병사 2000여기()를 이끌고 처음 전쟁터에 나서는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선봉으로써 용감히 싸웠는데 이때 요시키요의 나이는 이미 61세의 나이였다.


 고향 사카키(坂城)로의 복귀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1562년.

 신겐의 친족중(親族衆)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사자라고 하는 승() 쿠우안(空庵)이 길보(吉報)를 카스가야마(春日山)성에 가지고 왔다.

 신겐이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를 폐하고 서자 카츠요리(勝頼)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니 만약 켄신이 요시노부를 양자로 삼는다면 바이세츠도 켄신을 따르겠으며 곧바로 시나노(信濃)는 켄신(謙信)의 것이 되고 요시키요도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요시키요는 맘 속으로 크게 기대하였으나 쿠우안(空庵)의 이야기를 들은 켄신은 크게 화를 내며 쫓아버렸다고 한다.[名将言行錄]


 1564 5회째가 되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합전에 63세라는 고령으로 참전하지 못하였고 대신해서 아들인 쿠니키요(国淸)가 출진하였다. 이 즈음의 일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上杉将士書上]에는 요시키요를 지칭해 [우에스기(上杉)()에서 그렇게 뛰어난 활약도 하지 못한다]며 호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요시키요는 켄신에게 객장(客將)으로써 계속 대우받았다.


 소령(所領)은 칸바라(蒲原)군(郡)의 야마우라(山浦)와 우오누마(魚沼)() 내에 가지고 있었으며 켄신이 만들어 준 나오에츠(直江津)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켄신은 다음해인 1565 3월 그다지 활약도 하지 않는 요시키요를 네치(根知)성주로 앉히고, 쿠니키요(国淸)를 토쿠아이(德合) 성주로 발탁하였다. 네치(根知)성은 엣츄우(越中)와 시나노(信濃)의 국경 사이에 있는 성으로, 그 성의 관할로 마츠모토(松本)가도(街道)라던가, 치쿠니(千国)가도가 있어 옛날부터 소금의 운송로이면서 또한 군사상의 요지이기도 했다. 켄신이 65세라는 말년의 요시키요에게 네치성을 맡긴 것도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 신겐에 대한 대비와 함께 세이와겐지(淸和 源氏) 무라카미(村上)씨의 후예이며 시나노 명문족(名門族)인 무라카미의 명예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켄신은 요시키요에게 네치(根知)의 경비를 엄중히 할 것을 명령하며 어류나 소금을 네치를 통해 시나노로 운송시켰다. 요시키요는 이런 중요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1568 68세가 되자 스스로 노령을 이유로 켄신에게 가증(加增)받은 야마우라(山浦)와 오야마(飯山)의 소령(所領)을 쿠니키요(淸国)에게 물려준 후 다음 해인 1569년에 중이 되었고 70세에는 은거. 1572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인 1573년 정월 두 번 다시 고향의 땅을 밟아 보는 일 없이 네치 성에서 죽었다. 73세였다. 원수인 신겐(信玄)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아들 쿠니키요의 그 후


 요시키요가 남긴 야마우라 4만관() 등은 1573 12 쿠니키요에게 안도(安堵)되었다.

 쿠니키요도 켄신과 그 후계자인 카게카츠(景勝)에게 중용되어 카게카츠가 시나노의 북부를 진압한 1583 8 카이즈(海津)성의 성주 대리(城代)가 되었다. 여덟 살에 부친 요시키요의 손에 이끌려 에치고로 도망 친 후 3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제 4차를 말하다. [본문으로]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

1581 6 2 객사(客死) 42

1541 ~ 1582.

이름은 노부키미(信君). 친류중(親類衆[각주:1])필두로써, 타케다 가문(武田家)내에서도 발언권이 강했다. 타케다씨가 멸망할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항복하여 타케다씨 친족중에선 유일하게 살아 남지만, 혼노우(本能)()의 변이 일어나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에서 토민에게 살해당했다.










배신의 배경


 어느새 이 인물의 마음에는 암암리에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결별할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이 주가(主家)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는 것 이외에 카이 겐지(甲斐 源氏)의 명문 타케다 가()의 이름을 남길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배신], [배반]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망상을 품은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라는 인물이 원래부터 주가(主家) 타케다 씨에 대한 충성심이 적었냐 하면 반대였다.


 바이세츠는 타케다 일문(一門)의 필두격으로 카이(甲斐) 남부의 후지가와(富士川) 천 유역에 펼쳐진 카와치(河內)령을 지배했던 아나야마 노부토모(穴山 信友)의 장남이었다.

 부친 노부토모의 부인이자, 바이세츠의 어머니인 난쇼우인(松院)은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 신겐의 부친)의 둘째 딸로, 노부토모는 자신을 [타케다 이즈노카미 노부토모(武田 伊豆守 信友)]라고 자칭할 정도로 타케다 일문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 노부토모의 적남(嫡男)인 바이세츠는 아명을 카츠치요(勝千代), 성인식(元服)을 치른 후에는 노부키미(信君)라 했으며 후에 신겐(信玄)의 딸인 켄쇼우인(見性院)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기에 신겐은 외숙부이면서 장인이므로 혈통상으로도 아주 가까웠다. 당연히 부친 노부토모처럼 타케다 일문 필두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1562년.

 약관 21세로 망부(亡父)의 뒤를 이은 바이세츠는 이후 신겐의 측근으로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를 시작으로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 전투[각주:2]에 출진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신겐이 병으로 죽고서 카이슈고쇼쿠(甲斐守護職)를 시로우 카츠요리(四郞勝頼)가 상속한 후에도 젊은 카츠요리의 후견인격이 되어 타케다가()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1575 5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長篠)합전에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 대패했을 때 역전(歷戰)의 중신과 여러 무장들이 계속해서 죽는 것에 흥분한 카츠요리가 여기서 죽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것을 칼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로 말의 엉덩이를 때려 철퇴시킨 것도 후견인이라는 것을 자부했기 때문이다.


배반의 대가


 패전 후.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스루가(駿河)의 에지리(江尻)성을 지키며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침공에 대비했다. 최전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에지리(江尻)의 성장(城將)이 된 것이 바이세츠의 운명을 크게 변화시킬 줄은 카츠요리도 그리고 바이세츠 본인도 예상못했다.


 1579 9월.

 토쿠가와군()이 스루가 침공을 개시. 이미 타카텐진(高天神)성을 타케다군()에게서 탈취한 상태였으므로 그 다음이 카이(甲斐)가 될 것임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노부키미가 중이 되어 [바이세츠사이후하쿠(梅雪斎不白)]라 칭하게 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탄생으로 40세가 된 그가 타케다가()의 장래를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증거이기도 했다.


 1581년.

 오다(織田)()의 침공에 대비하여 카츠요리(勝頼)가 신푸(新府)성을 축성했을 때에도 바이세츠는 일문(一門) 필두로써 거액의 건설자금을 기부하였기에 아직 이 시점까지는 여전히 후견인으로서 강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다음해 1582년 다시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이 카이 공략을 개시하자, 바이세츠는 타케다 가의 운명에 내일이 없다고 판단하여 카츠요리와 결별을 결의. 곧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그는 카츠요리보다도 타케다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 자부하는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 - 카츠요리를 대신할 명문 타케다가()의 총수로 삼아 명문 타케다의 이름을 존속시키려 한 것이다.

 바이세츠는 우선 코우후(甲府)에 인질로 가 있던 처와 자식을 시노비노모노(忍の者 = 닌쟈)를 이용하여 탈출시킨 후 이에야스에게 에지리 성을 넘겼다. 이 부분을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아나야마 겐바(穴山 玄蕃) 카이(甲斐)()부츄우(府中)에 인질로 두고 있던 처자식을 2 25일 비오는 밤을 틈타 빼내어]로 기록하고 있다.

 카츠요리는 [바이세츠 배반]을 알게 되자 오다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나노(信濃)에서 신푸(新府)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지만 믿고 있던 중신(重臣)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 信茂)에게도 배반당하여 텐모쿠(天目)산에서 자살한다.


 한편 토쿠가와군()을 길안내하며 후지가와 천을 거슬러 올라 코우후(甲府)로 침공한 바이세츠는 노부나가(信長)에게 자신의 아들 카츠치요(勝千代)를 타케다 가의 후계자로 허락 받는 등,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함께 아즈치(安土)성을 방문하여 노부나가에게 환대 받고 돌아가던 중에 구경하러 들린 사카이()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혼노우지(本能寺)의 변(]이 일어난다. 귀국하던 도중 야마시로(山城)국 우치다하라(宇治田原)부근에서 야도(野盜)에게 습격 받아 죽임을 당했다. 향년 42.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배반자의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1. 일족 친척들을 지칭함.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공포로 몰아넣어 똥을 지리게 했다는 전투. [본문으로]

오부 토라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2. 23. 02:06 Posted by 발해지랑

오부 토라마사(飯富 虎昌)

1565 8월 모일 할복 나이 불명.


생년 불명 ~ 1565.

타케다(武田)후다이(譜代)의 신(). 노부토라(信虎), 신겐(信玄)을 섬겼으며 시나노(信濃) 우치야마(內山)성주를 역임했다. [아카조나에(赤備え)[각주:1]]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여겨지며 맹장으로서 유명했지만 신겐의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가 세운 모반(謀叛)에 관련되어 할복하였다. 신겐의 중신 야마카타 마사카게(山県 昌景)는 동생.









영광스런 전력(戰歷)


 오부 효우부쇼우유우 토라마사(飯富 兵部少輔 虎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영광스러운 타케다 가문(武田) 중진(重鎭)으로서의 위엄있고 중후한 모습이었다.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휘하에서 갑옷과 투구는 물론 무구 일체를 붉은 색으로 통일한 소위 [오부의 아카조나에(飯富の赤備え)]라는 이름으로 적에게 공포를 안겨준 기마병단(騎馬兵団)을 조직해서는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 氏綱), 시나노(信濃)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등과 싸워 승리하는 화려한 전력의 소유자였다.

 거기에다 1541년에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와 함께 노부토라(信虎)를 순푸(駿府)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로 축출하여 하루노부(晴信 = 신겐(信玄))의 정권을 세운 일등공신인 것이다.

 [갑양군감(甲陽軍鑑)]에서도 오부 효우부를 평하길 [지략발군(智略拔群)의 효장(驍将)]이라 기록하고 있다.


 누구나가 그의 말년은 온갖 영광과 함께 흔들림 없는 중진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그가 하루노부(晴信)의 장남 타로우(太郞) 요시노부(義信)의 후견인 겸 스승에 임명되었기에 한층 더 그러한 생각을 강하게 가지게 했었을 것이다.

 타로우 요시노부가 16살에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섰을 때(初陣) 그에게 갑옷을 입힌 것이 오부 효우부였으며, 하루노부 즉 신겐은 오부 효우부 및 하라 미노(原 美濃), 오바타 야마시로(小幡山城), 야마모토 칸스케(山本 勘助) 네 명에게 손수 술을 따라주었기에 부하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일이 없었다며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후일의 비극을 암시하는 듯한 사건이 발생한다.


반란일으키다.


 사건의 발단은 타로우 요시노부가 1561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 부친 신겐(信玄)의 전술을 비판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를 불쾌히 여긴 부친과 비판한 것을 당연히 여기는 아들 사이의 틈은 벌어져만 갈 뿐이었다.

 사태를 걱정한 코우후(甲府)의 다이센(大泉)()의 주지 코우덴(高伝)과 시나노(信濃) 이와무라타(岩村田)의 홋코우(払口)화상(和尙)이 부자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 없이 불화는 심각해져만 갔다.

 더구나 신겐은 요시노부를 약이라도 올리 듯이 측실 스와고료우진(諏訪御料人)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시로우 카츠요리(四郞 勝頼)를 이나군다이(伊那郡代) 겸 타카토오(高遠)성주에 임명하여 아토베 시게마사(跡部 重政)등을 포함한 믿을 수 있는 8명의 무장을 부속시켜 주었다. 이것을 보고 요시노부는 어떤 생각을하였을까?


 요시노부에 관해 [갑양군감(甲陽軍鑑)]너무 똑똑한 젊은 주군이라 기록하고 있듯이, 부친은 후계를 시로우 카츠요리에게 물려줄 생각인가? 고 나름 억측하여 자신의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더욱이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신겐은 스루가(駿河)로 진공(進攻)을 기도했다. 1560 5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오케하자마(桶狹間)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패사하였고 그로 인해 이마가와 가문(今川)이 약체화 된 지금이야 말로 바라 마지않던 스루가(駿河)를 탈취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 신겐의 생각이었다.

 요시모토의 부인은 신겐의 누나이기에 이마가와 가문을 상속한 것은 외조카인 우지자네(氏真)였다. 더구나 요시노부의 부인도 우지자네의 여동생이었기에 요시노부는 스루가 침공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나 영토욕(領土欲)에 불타는 부친 앞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요시노부는 어두운 얼굴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리고 [1564년 7월 15]이라고 [갑양군감(甲陽軍鑑)]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요시노부가 나가사카 겐고로(長坂 源五郞)와 메노토소네 수오우(乳母曽禰 周防) 두 사람과 함께 등롱(燈籠) 구경이라는 명목으로 오부 효우부의 저택을 방문하여 새벽 2 즈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이것을 목격한 밀정이 다음 날인 16 요시노부에게 수상적은 행동이 있다고 신겐에게 보고했다.


 그 때 신겐은 [오야마(御山)]에 있었다.

 오야마라는 곳은 목욕탕에서 사용한 물을 이용하여 더러운 것을 치울 수 있게 한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여기서 신겐은 향을 피워놓고 여러가지 생각에 몰두하거나 서장을 읽고 밀정의 보고를 받았다. 물론 경계는 엄하였고 방문 뒤에는 하라 하야토(原 隼人), 오부 겐시로우(飯富 源四郞 =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등 믿을 수 있는 부하들을 항상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때마침 방 문 뒤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오부 효우부의 동생인 겐시로우가 품안에서 요시노부가 직접 반역의 뜻을 적은 편지, 즉 오부 효우부에게 보내진 편지를 꺼내어 신겐에게 받쳐 신겐 추방의 쿠테타가 밝혀지게 된다. 이는 효우부 자신이 희생하여 죄를 뒤집어 씀으로써 쿠테타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하는 형제공모설도 있지만 사실일지 어쩔지 어쨌든 영광스러운 말년이 준비되어 있던 듯이 보였던 오부의 말년은 일순간에 할복의 지옥으로 바뀌었다.

  1. 무구 일체를 붉은색으로 칠한 부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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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

1574 6 1 병사(病死)


1507 ~ 1574.

호우죠우(北条)씨의 원조를 얻어 숙부 요시토요(義豊)를 무너뜨리고 아와(安房)를 장악하였다. 후에 카즈사(上総)에 진출하여 쿠루리(久留里)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바다를 건너 카마쿠라(鎌倉)미우라(三浦)를 침공하는 등 호우죠우(北条)씨와 대립. 미후네야마(三船山)합전(合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카즈사(上総)를 확보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호우죠우(北条)씨에 철저항전


 센고쿠(戦国) 초기의 칸토우(関東)의 무장들 사이에는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있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원군을 요청 받아 에치고(越後)에서 곧잘 코우즈케(上野),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등 칸토우(関東)로 진공(進攻)해 오면 호우죠우(北条)씨를 따르고 있던 무장들도(領內)를 통과하는 동안만은 켄신(謙信)에게 신종(臣從)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을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 했다.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나 우지마사(氏政)도 켄신(謙信)과 직접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하여 퇴각하는 일도 많아 결국 켄신은 커다란 수확을 올리는 일 없이 에치고(越後)로 돌아갔다. 그 후 칸토우(関東)는 다시 원래대로 호우죠우(北条)씨의 세력하(勢力下)에 두어졌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졌다. 그러한 주변 정세 속에서 어디까지나 호우죠우(北条)씨에게 끝까지 항전을 계속 한 것이 보우소우(房総 아와(安房)과 카즈사(上総)의 양지방을 이름)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였다.


 그런 요시타카(義堯) 1534년 부친 사네타카(実堯)의 원수인 숙부 사토미 요시토요(里見 義豊)를 물리치고 사토미가()의 당주(当主)가 되어 아와(安房) 일국(一国)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는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 氏綱 우지야스의 부친)의 원군에 의지했었다.


 그러나 3년 후.

 호우죠우(北条)씨가 보우소우(房総)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뒤로는 약 40여년에 걸쳐 일관돼게 호우죠우씨를 적대하며 싸웠다.

 호우죠우씨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진공(進攻)을 경계하면서도 뒤로는 언제나 사토미 요시타카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토미 요시타카가 적자(嫡子) 요시히로(義弘)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준 것은 1561년으로 요시타카 55, 요시히로는 32살 때였다. 이 해의 3 우에스기 켄신은 호우죠우 우지야스의 오다와라(小田原)성을 2개월간에 걸쳐 포위하였는데 사가미(相模)를 제외한 칸토우(関東) 7개국의 무가(武家) 250여 가문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참가한 요시히로도 있었다. 보우소우(房総) 사토미(里見)씨의 통솔자로서 대외적인 요시히로의 데뷔 무대였지만 사토미씨의 실권은 이후로도 카즈사(上総) 쿠루리(久留理)성에 있던 요시타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평온한 은거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투를 벌이는 사토미(里見), 호우죠우(北条)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와 몇 번이고 싸웠다.

 그중에서도 중대한 전투가 세번있었다. 1538년과 1564년 두번에 걸친 시모우사(下総) 코우노다이(国府台)의 싸움에서는 두번이나 대패하여 아와로 도망쳐 돌아왔다.

 두번째 때에는 우지야스()이 카즈사(上総)까지 공격해 들어와 한때는 요시타카의 거성(居城) 쿠루리성도, 요시히로의 사누키(佐貫)성도 점령당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세력을 되찾는다.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사토미씨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카즈사로 침공하여 1566년 미후네야마(三船山)에 요세를 쌓았다. 요시히로의 사누키성에서 북쪽으로 불과 4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음해 우지야스는 우지마사(氏政), 우지테루(氏照)에게 3만의 병사를 주어 사누키성, 쿠루리성의 공격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쿠루리성에서 아들인 요시히로에게 기동전(機動戰)을 명했다. 8천의 병력으로 선수를 쳐서 미후네야마(三船山)의 호우죠우군()을 남과 북에서 협격했다. 호우죠우군 3만은 산 위에 있었기에 잘 움직이질 못하고 밀려 무너지는 형태로 서쪽의 쇼우지(障子)계곡으로 내려갔으나 그곳은 땅이 물렁물렁해 발이 빠져 전투태세를 취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사토미군의 맹공을 받았다. 호우죠우군은 2500여의 사상자를 내고는 패주했다.

 사토미 요시히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선(兵船)을 보내어 미우라(三浦) 반도의 키쿠나우라(菊名浦)까지 계속 항해하여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수군(水軍)을 물리쳤다. 호우죠우씨의 사토미 공략은 대패로 끝나 번 다시 보우소우(房総)로 침공하지 않았다.


무너진 호우죠우 협격책(挾擊策)


 미후네야마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요시타카는 이미 61.

 계속해서 호우조우씨 토멸(討滅)에 의욕을 보이며 시모우사(下総)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569 지금까지 함께 호우죠우씨를 협격하고 있던 우에스기 켄신이 호우죠우와 동맹을 맺어버렸다. 타케다 신겐의 스루가(駿河) 침공과 서진(西進)에 따른 결과였다.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를 칠 절호의 기회를 잃었고 켄신의 배반에 격노하며 반대로 신겐과 동맹을 맺어 호우죠우씨 협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2년 후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켄신과 절교하며 타케다 신겐과 재동맹을 맺었기에 요시타카, 효시히로 부자는 다시 우에스기 켄신과 반()호우죠우의 공투(共闘)동맹을 맺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상경(上京)으로 인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의 행동이 크게 변화할수 밖에 없던 것이 보우소우(房総)의 사토미 요시타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1574년 6월 1일.

 요시타카는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의 산과 들이 내려다 보이는 쿠루리성에서 반()호우죠우의 불길을 계속 지펴온 68년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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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 도우칸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2. 2. 06:19 Posted by 발해지랑

오타 도칸[太田 道灌]

1486 7 26 모살(謀殺) 55


1432 ~ 1486.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씨를 섬겼으며, 에도[江戶]에 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오우기가야츠,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 씨간의 대립에서 주가(主家)를 위해서 무공을 세웠지만, 주군인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살해당한다. 학문, 문예를 좋아했으며, 와카[和歌] 또한 뛰어났다











잠깐 동안의 평화


 오오타 도우칸은 1485 9월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에도 성[江戶城]으로 초대하였다.

 반리[万里]는 린자이 종[臨濟宗] 소우코쿠 사[相国寺]()의 승려로 한시인(漢詩人)으로 높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을 피해 미노[美濃]에 살고 있었다.

 도우칸은 이때 54세였다. 반리[万里] 4살 연상인 58세로 두 사람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약 10개월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시가(詩歌)를 함께 만들었다. 도우칸에게 있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을 것이다.


 도우칸은 24살에 아버지 도우신[道真]에게 가독(家督)을 물려 받은 이래 30년간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의 가재(家宰[각주:1])로써 정무와 군사로 쉴 틈 없는 세월을 보내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454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각주:2]]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憲忠]가 카마쿠라 쿠보우[鎌倉 公方[각주:3]]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에게 모살(謀殺)되었고 이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4]]가 된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칸토우[関東]의 무사들을 둘로 나누어 25년간 싸웠다.

 1476년에는 우에스기 아키사다의 중신(重臣) 나가오 카게하루[長尾 景春]가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도우칸은 30차례가 넘는 야전, 공성전을 사가미[相模], 무사시[武蔵], 코우즈케[上野], 시모우사[下総]에서 전개하여 쿄우토쿠의 난[享德の乱]을 종결시켰다.


 이즈[伊豆]에서는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이 태두하여 호시탐탐 사가미, 칸토우[関東]평야를 노리고 있었다. 칸토우의 무가(武家)들 사이에서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나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上杉 定正]에게 실망을 느끼는 반면 그에 비례해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그리고 칸토우에 겨우 평화가 방문했다. 도우칸은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와의 싸움에서 최전선기지이며 당시 비할대 없이 견고한 성이었던 에도 성[江戶城]성에서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것이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와의 시가(詩歌)


 도우칸은 어렸을 적에 카마쿠라[鎌倉] 고잔[五山[각주:5]]에서 학문을 배워 학자로서도 전도가 유망했다. 그 후 무사(武事)에 골몰하는 날들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책을 가까이 두며 시가(詩歌)를 만드는 즐거움을 잊으려 하지 않았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다음해 봄.

 55세를 맞이한 도우칸은 카마쿠라에서 켄쵸우 사[建長寺], 엔카쿠 사[円覚寺]의 시승(詩僧)들을 초대하여 반리[万里]와 함께 수미다 강[隅田川]에 몇 척의 배를 뛰어놓고 시가(詩歌)의 연회를 개최하였다. 도우칸은 또 6월에 반리와 함께 무사시[武蔵] 오고세[越生]의 산촌에 칩거하고 있는 부친 도우신[道真]을 방문해 몇 일을 함께 보냈다.

 도우신[道真]은 예전 카와고에 성[河越城]에 소우기[宗衹], 신케이[心敬]를 초대해서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河越千句]를 남길 정도인 무장 가인(武将 歌人)이었다. 은거소(隱居所) '지토쿠켄[自得軒]'에서 도우칸 부자와 반리는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시로 서로의 마음을 통하였다.


 다음달인 7월.

 반리 슈우쿠와 여전히 문()의 세계를 즐기고 있던 도우칸은 주군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초대를 받게 되었다. 도우칸은 아무 의심도 없이 에도성을 출발하여 26일에는 사가미[相模] 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암살당했다.


주군(主君)에 의한 모살(謀殺)


 도우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살해 장소도, 이유도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반리 슈우쿠 14일 후의 기일(忌日)에 기록한 제문(祭文)에는

도우칸 공()은 사가미 카스야에 있는 주군의 저택에서 칼로 인해 쓰러졌고, 혼은 날라갔다.
 고 기록되어 있어 방문한 당일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 의해 살해 된 것을 알 수 있다.


 후년(後年).

 도우칸[道灌]의 손자의 손자인 오오타 스케타케[太田 資武]가 오오타 가및 널리 전해지고 알려진 것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정설(正說)은 목욕탕 건물의 입구로 나왔을 때 소가 효우고[曾我 兵庫]라는 자가 휘두른 큰 칼[太刀] 맞았고, 쓰러지면서 '당가멸망[当方滅亡]'이라고 마지막에 외쳤다.

 도우칸이 주군의 계략에 빠져 [당가멸망]이라고 최후에 외쳤다는 것을 보면 도우칸이 평소부터 주군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 후.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가 소가 붕고노카미[曾我 豊後守]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우칸은 에도, 카와고에성을 굳건히 하며 종가(宗家)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山內 上杉 顕定]를 쓰러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꾸짖었으나 결국 역심을 일으켰기에 주살하였다.
고 자기 변호하고 있다.


 도우칸이 죽은 후 오우기가야츠[扇谷],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上杉] 세력은 리더쉽의 결여로 인하여 칸토우[関東]의 여러 무장들의 지지를 잃었고, 이즈[伊豆]에서 침공해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에 위해 도우칸의 말대로 쇠망하게 된다.

  1. 가신(家臣) 중 No.1 [본문으로]
  2.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를 보좌하는 신하 필두.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가 칸토우(関東)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자리. 대대로 아시카가(足利) 일족이 맡았다. [본문으로]
  4. 카마쿠라 쿠보우는 바쿠후에 개김성이 짙었기에 바쿠후는 이때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시게우지 정벌을 명하였고 당시 시게우지가 다른 전투로 본진 카마쿠라를 비워두었던 틈을 타 점령. 이후 돌아 갈 곳이 잃은 시게우지는 코가[古河]로 자리를 옮겼다. [본문으로]
  5. 카마쿠라에 있는 절 중 가장 격이 높은 다섯 곳을 말함. 서열은 차례대로 - 켄쵸우 사[建長寺], 엔가쿠 사[円覚寺], 쥬후쿠 사[寿福寺], 죠우치 사[浄智寺], 죠우묘우 사[浄妙寺]. 당시 칸토우 학문의 본산이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