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

1574 6 1 병사(病死)


1507 ~ 1574.

호우죠우(北条)씨의 원조를 얻어 숙부 요시토요(義豊)를 무너뜨리고 아와(安房)를 장악하였다. 후에 카즈사(上総)에 진출하여 쿠루리(久留里)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바다를 건너 카마쿠라(鎌倉)미우라(三浦)를 침공하는 등 호우죠우(北条)씨와 대립. 미후네야마(三船山)합전(合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카즈사(上総)를 확보했다.

(그림은 태합입지전 V에서)






호우죠우(北条)씨에 철저항전


 센고쿠(戦国) 초기의 칸토우(関東)의 무장들 사이에는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있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원군을 요청 받아 에치고(越後)에서 곧잘 코우즈케(上野),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등 칸토우(関東)로 진공(進攻)해 오면 호우죠우(北条)씨를 따르고 있던 무장들도(領內)를 통과하는 동안만은 켄신(謙信)에게 신종(臣從)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것을 카이도우히칸(海道被官)이라 했다.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나 우지마사(氏政)도 켄신(謙信)과 직접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피하여 퇴각하는 일도 많아 결국 켄신은 커다란 수확을 올리는 일 없이 에치고(越後)로 돌아갔다. 그 후 칸토우(関東)는 다시 원래대로 호우죠우(北条)씨의 세력하(勢力下)에 두어졌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졌다. 그러한 주변 정세 속에서 어디까지나 호우죠우(北条)씨에게 끝까지 항전을 계속 한 것이 보우소우(房総 아와(安房)과 카즈사(上総)의 양지방을 이름)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囯 大名) 사토미 요시타카(里見 義堯)였다.


 그런 요시타카(義堯) 1534년 부친 사네타카(実堯)의 원수인 숙부 사토미 요시토요(里見 義豊)를 물리치고 사토미가()의 당주(当主)가 되어 아와(安房) 일국(一国)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는 호우죠우 우지츠나(北条 氏綱 우지야스의 부친)의 원군에 의지했었다.


 그러나 3년 후.

 호우죠우(北条)씨가 보우소우(房総)에 탐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뒤로는 약 40여년에 걸쳐 일관돼게 호우죠우씨를 적대하며 싸웠다.

 호우죠우씨는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진공(進攻)을 경계하면서도 뒤로는 언제나 사토미 요시타카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토미 요시타카가 적자(嫡子) 요시히로(義弘)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준 것은 1561년으로 요시타카 55, 요시히로는 32살 때였다. 이 해의 3 우에스기 켄신은 호우죠우 우지야스의 오다와라(小田原)성을 2개월간에 걸쳐 포위하였는데 사가미(相模)를 제외한 칸토우(関東) 7개국의 무가(武家) 250여 가문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요시타카를 대신하여 참가한 요시히로도 있었다. 보우소우(房総) 사토미(里見)씨의 통솔자로서 대외적인 요시히로의 데뷔 무대였지만 사토미씨의 실권은 이후로도 카즈사(上総) 쿠루리(久留理)성에 있던 요시타카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평온한 은거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투를 벌이는 사토미(里見), 호우죠우(北条)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와 몇 번이고 싸웠다.

 그중에서도 중대한 전투가 세번있었다. 1538년과 1564년 두번에 걸친 시모우사(下総) 코우노다이(国府台)의 싸움에서는 두번이나 대패하여 아와로 도망쳐 돌아왔다.

 두번째 때에는 우지야스()이 카즈사(上総)까지 공격해 들어와 한때는 요시타카의 거성(居城) 쿠루리성도, 요시히로의 사누키(佐貫)성도 점령당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세력을 되찾는다.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사토미씨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해 카즈사로 침공하여 1566년 미후네야마(三船山)에 요세를 쌓았다. 요시히로의 사누키성에서 북쪽으로 불과 4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다음해 우지야스는 우지마사(氏政), 우지테루(氏照)에게 3만의 병사를 주어 사누키성, 쿠루리성의 공격을 명했다.

 요시타카는 쿠루리성에서 아들인 요시히로에게 기동전(機動戰)을 명했다. 8천의 병력으로 선수를 쳐서 미후네야마(三船山)의 호우죠우군()을 남과 북에서 협격했다. 호우죠우군 3만은 산 위에 있었기에 잘 움직이질 못하고 밀려 무너지는 형태로 서쪽의 쇼우지(障子)계곡으로 내려갔으나 그곳은 땅이 물렁물렁해 발이 빠져 전투태세를 취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사토미군의 맹공을 받았다. 호우죠우군은 2500여의 사상자를 내고는 패주했다.

 사토미 요시히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선(兵船)을 보내어 미우라(三浦) 반도의 키쿠나우라(菊名浦)까지 계속 항해하여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수군(水軍)을 물리쳤다. 호우죠우씨의 사토미 공략은 대패로 끝나 번 다시 보우소우(房総)로 침공하지 않았다.


무너진 호우죠우 협격책(挾擊策)


 미후네야마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요시타카는 이미 61.

 계속해서 호우조우씨 토멸(討滅)에 의욕을 보이며 시모우사(下総)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569 지금까지 함께 호우죠우씨를 협격하고 있던 우에스기 켄신이 호우죠우와 동맹을 맺어버렸다. 타케다 신겐의 스루가(駿河) 침공과 서진(西進)에 따른 결과였다.


 요시타카는 호우죠우씨를 칠 절호의 기회를 잃었고 켄신의 배반에 격노하며 반대로 신겐과 동맹을 맺어 호우죠우씨 협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2년 후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켄신과 절교하며 타케다 신겐과 재동맹을 맺었기에 요시타카, 효시히로 부자는 다시 우에스기 켄신과 반()호우죠우의 공투(共闘)동맹을 맺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상경(上京)으로 인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의 행동이 크게 변화할수 밖에 없던 것이 보우소우(房総)의 사토미 요시타카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1574년 6월 1일.

 요시타카는 카즈사(上総), 시모우사(下総)의 산과 들이 내려다 보이는 쿠루리성에서 반()호우죠우의 불길을 계속 지펴온 68년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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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 도우칸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2. 2. 06:19 Posted by 발해지랑

오타 도칸[太田 道灌]

1486 7 26 모살(謀殺) 55


1432 ~ 1486.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씨를 섬겼으며, 에도[江戶]에 성을 축성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오우기가야츠,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 씨간의 대립에서 주가(主家)를 위해서 무공을 세웠지만, 주군인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살해당한다. 학문, 문예를 좋아했으며, 와카[和歌] 또한 뛰어났다











잠깐 동안의 평화


 오오타 도우칸은 1485 9월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에도 성[江戶城]으로 초대하였다.

 반리[万里]는 린자이 종[臨濟宗] 소우코쿠 사[相国寺]()의 승려로 한시인(漢詩人)으로 높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을 피해 미노[美濃]에 살고 있었다.

 도우칸은 이때 54세였다. 반리[万里] 4살 연상인 58세로 두 사람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약 10개월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시가(詩歌)를 함께 만들었다. 도우칸에게 있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을 것이다.


 도우칸은 24살에 아버지 도우신[道真]에게 가독(家督)을 물려 받은 이래 30년간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씨[扇谷 上杉氏]의 가재(家宰[각주:1])로써 정무와 군사로 쉴 틈 없는 세월을 보내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1454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각주:2]]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憲忠]가 카마쿠라 쿠보우[鎌倉 公方[각주:3]]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에게 모살(謀殺)되었고 이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4]]가 된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칸토우[関東]의 무사들을 둘로 나누어 25년간 싸웠다.

 1476년에는 우에스기 아키사다의 중신(重臣) 나가오 카게하루[長尾 景春]가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도우칸은 30차례가 넘는 야전, 공성전을 사가미[相模], 무사시[武蔵], 코우즈케[上野], 시모우사[下総]에서 전개하여 쿄우토쿠의 난[享德の乱]을 종결시켰다.


 이즈[伊豆]에서는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이 태두하여 호시탐탐 사가미, 칸토우[関東]평야를 노리고 있었다. 칸토우의 무가(武家)들 사이에서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 顕定]나 오우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上杉 定正]에게 실망을 느끼는 반면 그에 비례해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의 명망은 높아만 갔다.


 그리고 칸토우에 겨우 평화가 방문했다. 도우칸은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와의 싸움에서 최전선기지이며 당시 비할대 없이 견고한 성이었던 에도 성[江戶城]성에서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것이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와의 시가(詩歌)


 도우칸은 어렸을 적에 카마쿠라[鎌倉] 고잔[五山[각주:5]]에서 학문을 배워 학자로서도 전도가 유망했다. 그 후 무사(武事)에 골몰하는 날들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책을 가까이 두며 시가(詩歌)를 만드는 즐거움을 잊으려 하지 않았다.


 반리 슈우쿠[万里 集九]를 맞이한 다음해 봄.

 55세를 맞이한 도우칸은 카마쿠라에서 켄쵸우 사[建長寺], 엔카쿠 사[円覚寺]의 시승(詩僧)들을 초대하여 반리[万里]와 함께 수미다 강[隅田川]에 몇 척의 배를 뛰어놓고 시가(詩歌)의 연회를 개최하였다. 도우칸은 또 6월에 반리와 함께 무사시[武蔵] 오고세[越生]의 산촌에 칩거하고 있는 부친 도우신[道真]을 방문해 몇 일을 함께 보냈다.

 도우신[道真]은 예전 카와고에 성[河越城]에 소우기[宗衹], 신케이[心敬]를 초대해서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河越千句]를 남길 정도인 무장 가인(武将 歌人)이었다. 은거소(隱居所) '지토쿠켄[自得軒]'에서 도우칸 부자와 반리는 렌가회[連歌会]를 열어 시로 서로의 마음을 통하였다.


 다음달인 7월.

 반리 슈우쿠와 여전히 문()의 세계를 즐기고 있던 도우칸은 주군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게 초대를 받게 되었다. 도우칸은 아무 의심도 없이 에도성을 출발하여 26일에는 사가미[相模] 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을 방문하였고 거기서 암살당했다.


주군(主君)에 의한 모살(謀殺)


 도우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살해 장소도, 이유도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반리 슈우쿠 14일 후의 기일(忌日)에 기록한 제문(祭文)에는

도우칸 공()은 사가미 카스야에 있는 주군의 저택에서 칼로 인해 쓰러졌고, 혼은 날라갔다.
 고 기록되어 있어 방문한 당일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에 의해 살해 된 것을 알 수 있다.


 후년(後年).

 도우칸[道灌]의 손자의 손자인 오오타 스케타케[太田 資武]가 오오타 가및 널리 전해지고 알려진 것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정설(正說)은 목욕탕 건물의 입구로 나왔을 때 소가 효우고[曾我 兵庫]라는 자가 휘두른 큰 칼[太刀] 맞았고, 쓰러지면서 '당가멸망[当方滅亡]'이라고 마지막에 외쳤다.

 도우칸이 주군의 계략에 빠져 [당가멸망]이라고 최후에 외쳤다는 것을 보면 도우칸이 평소부터 주군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 후.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 定正]가 소가 붕고노카미[曾我 豊後守]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우칸은 에도, 카와고에성을 굳건히 하며 종가(宗家)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山內 上杉 顕定]를 쓰러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꾸짖었으나 결국 역심을 일으켰기에 주살하였다.
고 자기 변호하고 있다.


 도우칸이 죽은 후 오우기가야츠[扇谷], 야마노우치[山內]의 양 우에스기[上杉] 세력은 리더쉽의 결여로 인하여 칸토우[関東]의 여러 무장들의 지지를 잃었고, 이즈[伊豆]에서 침공해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에 위해 도우칸의 말대로 쇠망하게 된다.

  1. 가신(家臣) 중 No.1 [본문으로]
  2.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를 보좌하는 신하 필두.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가 칸토우(関東)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자리. 대대로 아시카가(足利) 일족이 맡았다. [본문으로]
  4. 카마쿠라 쿠보우는 바쿠후에 개김성이 짙었기에 바쿠후는 이때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시게우지 정벌을 명하였고 당시 시게우지가 다른 전투로 본진 카마쿠라를 비워두었던 틈을 타 점령. 이후 돌아 갈 곳이 잃은 시게우지는 코가[古河]로 자리를 옮겼다. [본문으로]
  5. 카마쿠라에 있는 절 중 가장 격이 높은 다섯 곳을 말함. 서열은 차례대로 - 켄쵸우 사[建長寺], 엔가쿠 사[円覚寺], 쥬후쿠 사[寿福寺], 죠우치 사[浄智寺], 죠우묘우 사[浄妙寺]. 당시 칸토우 학문의 본산이었다. [본문으로]

호조 우지야스(北条 氏康)

1571 10 3 병사(病死) 57

1515 ~ 1571.

후 호우죠우(後北条) 3대 당주(当主). 우지츠나(氏綱)에게 가독(家督)을 상속 받은 후 오다와라(小田原)성을 본거지로 삼아 사토미 씨(里見氏)나 이마가와 씨(今川氏)와 다투며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카와고에(河越)전투에서 쓰러뜨렸다. 또한 타케다 씨(武田氏), 이마가와 씨와 삼국동맹을 맺고, 네가와(利根川) 강 이남의 칸토우(関東)를 영국화(領国化)했다.











소우에츠(相越[각주:1])동맹에 숨겨진 계산


 1568 11월 말.

 카이(甲斐)국의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갑자기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영국(領国)스루가(駿河)로 침공을 개시했다. 은밀히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동맹을 맺었던 신겐의 움직임이었다. 코우소우순(甲相駿[각주:2]) 삼국동맹을 맺고 있던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 우지마사(氏政) 부자는 이런 갑작스런 동맹파기에 놀랐고 신겐의 배신에 분노하여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지원할 것을 표명하곤 곧바로 스루가 방면으로 진출했다.


 이 신겐의 행동에는 우지마사의 부인 오우바이인(黃梅院) 1566 6월에 죽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오우바이인은 신겐의 딸로 코우소우순(甲相駿) 삼국동맹 체결의 결과로 오다와라(小田原)성으로 시집왔었다.

코우소우순 삼국동맹이 붕괴되자 호우죠우 우지야스는 에치고(越後)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동맹을 맺고 신겐의 스루가 침공을 저지하는 방침을 세웠다. 소우운(早雲) 이래 칸토우(関東) 평정을 진행시켜 온 호우죠우 씨(北条氏)와 이에 대항하는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씨(上杉氏)의 종가 격인 켄신(謙信)과는 그야말로 앙숙이었다. 이런 앙숙과의 동맹에 대해서 우지야스는 어떠한 정치적 계산을 가지고 임했을까?


 우에스기 켄신은 이미 1561 4월 오다와라성을 공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카마쿠라(鎌倉)의 츠루오카 하치만 궁(鶴岡 八幡宮)의 신사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에게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의 직책을 물려 받았으며 무로마치(室町)바쿠후(幕府)도 이를 공인 하고 있었다.

 한 쪽인 호우죠우 우지야스도 코가 쿠보우(古河 公方[각주:3]) 아시카가 하루우지(足利 晴氏)와 인척관계로 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우지(足利 義氏)는 완전히 우지야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켄신도 장년에 걸친 신겐과의 항쟁에 결착을 지을 기회가 왔다며 이 소우에츠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부(祖父)때 부터의 숙적인 호우죠우씨와의 정치적 관계를 어떻게 유리하게 전개시켜 갈 것인가를 충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호우죠우 씨에게 공격받고 있던 북 칸토우(北関東)의 호족들은 1561년 가을에 칸토우(関東)에서 에치고로 귀국해 버린 켄신에게 실망하여 대부분의 호족들은 켄신의 칸토우 통치가 좌절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우지야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력 호족들을 지배하에 거두어 칸토우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하극상(下剋上)이 활발한 칸토우 지방이긴 하였지만 아직까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나 코가쿠보우(古河公方)의 권위는 인정받고 있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지야스는 생각했다. 켄신은 독신이기에 친아들이 없다. 그 켄신에게 양자를 보내면 언젠가 켄신이 죽은 뒤에 그 양자가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를 이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아들인 우지마사(氏政)의 대()가 되었을 때는 코가쿠보우(古河公方)와 칸토우칸레이쇼쿠(関東管領職)의 두개의 커다란 전통적 권위가 호우죠우씨의 수중에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지야스의 최후


 예상대로 소우에츠(相越)동맹을 쌍방의 계산이 얽혀 체결이 늦춰지고 있었다.

 켄신에게 보낼 양자의 인선에서도 우지야스와 아들인 우지마사 사이에서 엇갈리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우지야스의 숙부 호우죠우 소우테츠(宗哲 = 겐안(幻庵))의 셋째아들인 사부로우(三郞) 후에 우에스기 카게토라(上杉 景虎)가 되었다.


 소우에츠 동맹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한 후 우지야스가 병중(病中)에 있던 1569년 가을 체결되었다. 우지야스는 이 때 이미 많이 병들어 있어 다음해인 1570년 여름에는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 해의 8월에 켄신의 사자로서 오다와라성에 와 있던 오오이시 요시츠나(大石 芳綱)는 본국의 야마요시 모리요시(山吉 盛吉)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지야스는 자식들의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가 되어 타케다 신겐이 오다와라로 공격해 오는 것도 모를 정도이다](上杉文書)고 전하고 있다.

 확실히 우지야스의 싸인이 들어간 편지는 같은 해인 1570년 6월 29 호우죠우 우지쿠니(北条 氏邦)에게 보낸 것 이후에는 확인할 수 없게 되어 병 상태가 상당히 진행되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중병(重病)으로 자신의 싸인을 쓸 힘도 없었을 것이다.


 1571년 4월 15 켄신에게 보낸 우지야스의 편지(上杉文書)에는 싸인 대신 그 위치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도장이 찍혀 있어 병 상태가 더 악화되었다고 생각된다.


 1571년 10월 3.

 우지야스는 오다와라성에서 죽었다. 향년은 57세였다.

[大聖寺殿東陽宗岱公大居士]라고 법명을 받고 하코네(箱根) 소우운(早雲)()에 안장되었다다고 하지만 이바라키(茨城)() 코가(古河)시의 절이라는 설도 있어 묘소(墓所)는 확실하지 않다. 바로 그날로 난죠우 시로우사에몬(南条 四郞左衛門)이 코우야(高野)산의 코우시츠인(高室院)에게 우지야스 죽음의 보고가 전해져 극락왕생을 비는 법회를 빌어 달라는 의뢰가 왔다. 유언장은 발견 되지 않았으나 소우에츠(相越)동맹을 관두고 역시 신겐과의 소우코우(相甲)동맹을 부활시키도록 우지마사에게 유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 사가미(相模)와 에치고(越後)의 머릿 글자를 따서. [본문으로]
  2. 카이(甲斐), 사가미(相模), 스루가(駿河)의 머릿글자를 따서. 각각 타케다 가문, 호우죠우 가문, 이마가와 가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칸토우 쿠보우(코가 쿠보우)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칸토우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곳의 책임자를 높이는 말. 코가(古河)는 당시 쿠보우가 있던 지역(처음엔 카마쿠라에 있었으나 혼란을 거듭하는 시기에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칸토우칸레이는 이 쿠보우를 보좌하는수상 격. [본문으로]

호우죠우 소우운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4. 11. 26. 04:14 Posted by 발해지랑

호조 소운[北条 早雲]

1519 8 15 병사(病死) 64.

1456 ~ 1519.

처음은 이세 신쿠로우[伊勢 新九郞]라는 이름을 칭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외척(外戚)이 되어, 스루가[駿河] 코우코쿠지 성[興国寺城]의 성주가 되었다. 이즈[伊豆]를 장악한 후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서 사가미[相模]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탈취하여 후 호우죠우 씨[後北条氏] 발전의 기초를 쌓았다.








[祿寿応穏]의 도장


 1518년 10월 8자로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에서 이즈 국[伊豆国] 키쇼우[木負]에 있는 오오카와 가문[大川家]에 한 통의 문서를 가진 사자(使者)가 도착했다. 편지를 본 오오카와 가문의 당주(当主)는 처음 보는 모양을 신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편지의 날짜가 써 있는 행에는 가로, 세로 7센티 정도의 크기의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 인주로 찍혀 있는 글자는 [祿寿応穏 녹수응은]이라 쓰여 있었는데, '인민이여, 모두 함께 평온히 살자'라는 뜻이라 여겨진다. 이 글자의 상부에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 조각되어 있어 '호랑이 주인장(朱印狀)'이라 불리고 있다. 현재 '호랑이 주인장'은 약 천 통 이상 발견되어 역사연구자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호랑이 주인장]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것이 바로 이 오오카와 씨에게 보낸 것이다.


 호우죠우 소우운[北条 早雲] 즉 이세 모리토키[伊勢 盛氏] 후에 입도(入道[각주:1])하여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 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들인 우지츠나[氏綱]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주면서 함께 물려 준 것이 '호랑이 주인(朱印)'이었다. 이후 호우죠우 씨[北条氏] 4대에 걸친 가인(家印 가문의 도장)으로 1590 7월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다.


 호우죠우 소우운은 빗츄우[備中] 타카코시 성[高越城]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때 쿄우[京]에 가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서 일하였고,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 義澄]의 명령으로 이즈[伊豆]를 침공하였다. 이즈 평정에는 5년간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5년째인 1498년 8월 25 토우카이오키[東海沖]를 진원지로 하는 토우카이오키 대지진이 발생하여 이 때의 대해일로 인해 이즈 반도 서해안의 어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계속되는 전란과 거대 지진, 대해일의 습격으로 이즈의 사람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즈의 주민들은 지배자의 통치력이 부족하기에 이러한 재해를 불러왔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지배자를 강력히 원했을 것이다.


연공(年貢)을 내린 영주(新領主)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소우운은 1498 9월에 아시카가 챠챠마루[足利 茶丸]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이즈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소우운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우선 해일로 인한 어촌의 병자들의 치료를 지원하고, 옛 지배자가 부과했던 연공을 낮추어 사공육민(四公六民[각주:2])으로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신영주에게 감사하고 기뻐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앞에서 언급한 1518 10 8일자의 [호랑이 주인장]에는 향촌에 부과했던 대나무나 목재, 어패류의 납입에는 반드시 이 [호랑이 주인]을 찍은 문서로 명령하며, 호우죠우 씨 이외에는 멋대로 물품을 부과시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 이 규칙을 어겨 불법을 행하는 무장이 있으면, 주민의 대표자가 그 무장의 이름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오다와라 성[小田原]의 관청에 직소(直訴)해도 좋다고 하였다. 소우운은 주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어서 직소를 인정한 것이다.


 소우운은 쿄우토[京都]에 있을 때 다이토쿠 사[大德寺]에 들어가 수행할 정도로 불교를 신앙했으며 신불(神仏)을 숭배하였다. 거성(居城)인 니라야마 성[韮山城]에노시마벤텐[江ノ島弁財天][각주:3]을 모시고 신앙하였다. 소우운이 자손에게 남긴 문서의 첫번째가 신불을 경애하라고 할 정도로 소우운의 깊은 신앙심은 오늘날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소우운의 사망연령


 소우운은 64세가 되자 이제는 죽음이 가까워 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1519년 4월 28에는
사남인 키쿠슈우마루[菊寿丸][각주:4]에게 자기의 소령분(所領分) 4465관이라는 광대한 향촌(鄕村)을 물려주고 하코네곤겐 사[箱根權現社]의 사령(社領)도 확정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미우라[三浦] 반도의 끄트머리인 미사키[三崎]를 유람하던 중 소우운은 감기에 걸려(塔寺八幡宮長帳), 8 15일 니라야마성에서 죽었다. 향년은 88세라고 유포되고 있다.


 유포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만들어진 군기물(軍記物)에 쓰여져 있는 것으로 그것이 통설이 되어 유포되었다는 의미이다. 최근의 연구성과로는 이 88세 사망설은 소우운의 부친이라 전해지고 있던 이세 사다후지[伊勢 貞藤] 실은 소우운의 외할아버지인 이세 사다쿠니[伊勢 貞囯]의 차남. 즉 외삼촌- 가 태어난 1432년을 소우운이 태어난 년도와 헷갈린 것으로 실제로 소우운이 태어난 해는 1456년으로 64세에 죽은 것으로 수정되고 있다.(小田原市史)


 소우운의 유체는 슈우센 사[修禅寺]에서 화장되어 하코네[箱根]의 소우운 사[早雲寺]에 안장되었다.
 
법명(法名) [早雲寺殿天岳宗瑞]가 되었다.


 1519 9 15일.

 소우운이 죽은 후 1개월째에 이세(후에 호우죠우[北条]) 우지츠나[氏綱] 자택에 많은 손님을 초대하여 제사를 지냈다. 여기에 출석한 호우린칸도우[芳琳乾幢]는 제문을 통해서,
 '
소우운은 천하의 영웅으로 좋은 부인을 만나 자손도 많으며 조부의 유업(遺業)을 이었고 덕은 만고(萬古)에 빛나평화속에 칸토우를 정복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 불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전체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60%를 농민이 소유함. 당시 대부분 육공사민이었으며, 좋아야 오공오민이었다고 함. [본문으로]
  3. 칠복신 중 하나, 음악과 지혜, 변설, 복덕의 신. [본문으로]
  4. 후에 호우죠우 겐안(北条 幻庵) [본문으로]

나오에 가네쓰구[直江 兼続]

1619 12 19 병사(病死) 60


1560 ~ 1519.

에치고[越後] 요이타[与板] 성주 히구치 가문[樋口家] 출신.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중신 나오에 씨[直江氏]를 이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섬겨, 죠우다이카로우[城代家老][각주:1]로써 정무을 도맡아 보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손을 잡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타도를 계획. 그 때에 이에야스에게 보낸 '나오에장[直江状]'은 유명.










굳은 결속으로 맺어진 주종(主從)


 카네츠구[兼続]의 성은 나오에 가문[直江家]에 사위로 들어간 다음부터 성(姓)을 '나오에'라 칭한 것으로, 생가(生家)는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태어난 가문인 우에다 나가오 가문[上田 長尾家]의 구신(舊臣)이다. 키소 요시나카[木曽 義仲][각주:2]의 사천왕 중의 한 명인 '히구치 지로우 카네미츠[樋口 次郞 兼光]'의 후예로 일컬어지는 나오미네[直峰] 성주 '히구치 이요노카미 카네토요[樋口 伊予守 兼豊]'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요로쿠[与六]라 했다.
 1560
년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의 양자가 된
카게카츠
를 근시(近侍)하였다. 우에스기 켄신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급사했기 때문에 두 명의 양자인 카게카츠[景勝], 카게토라[景虎] 사이에서 후계다툼이 일어났고, 그때 19세의 요로쿠[与六] 5살 연상의 주군 카게카츠를 위해 분투하였다.


 카게카츠의 시대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1582 10월. 후다이[譜代[각주:3]]의 중신으로 요이타[与板] 성주인 '나오에 요헤에 노부츠나[直江 与兵衛 信綱]'가 카스가야마 성[春日山城]에 있을 때, '모우리 나사에몬 히데히로[毛利 名左衛門 秀広]'의 칼에 죽는 바람에 명문가의 단절을 아쉬워한 카게카츠의 명령에 따라 3살 연상인 노부츠나의 부인[각주:4]에게 장가를 가서 이때부터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 가네츠구[直江 山城守 兼続]'라는 이름을 칭하게 된다.


 이후 마지막까지 카게카츠에게 반항하던 아가키타[揚北]의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 重家] 4년의 시간을 들여 멸망시키거나 사도[佐渡]를 평정. 히데요시[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참전하여 호우죠우[北条]의 하치오우지 성[八王子城]을 함락시키는 등 대활약을 펼친다.


 인재 욕심이 많은 히데요시는 그러한 카네츠구에게 반하여, 카게카츠를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会津] 120만석으로 이봉(移封)할 때 그 중 데와[出羽] 요네자와[米沢] 30만석을 배신(陪臣[각주:6])인 카네츠구에게 하사하여 명목상 직신(直臣)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카네츠구는 어디까지나 카게카츠의 신하라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이에야스[家康]에게 도전장


 히데요시가 죽은 뒤 잠시 동안은 평화로웠지만 반년이 지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병으로 죽자 오대로(五大老)의 필두 이에야스의 전횡이 눈에 띠게 늘어났다. 카게카츠 - 카네츠구 주종은 신영토 관리라는 이유로 영지 아이즈[会津]로 돌아 와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아이즈 츄우나곤[中納言 - 카게카츠의 관위]에게 모반의 징조'

 라는 고소를 받은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변명과 굴종을 위한 상경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기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힐문했는데, 카네츠구의 달변에 아무 것도 못하고 돌아 왔다. 이때 사자는 카네츠구의 오랜 친구인 승() 죠우타이[承兌] 카네츠구에게 보낸 서장(書狀)을 지참하고 갔었다. 그 내용은 사자의 힐문 내용을 각 조에 걸쳐서 글로 쓴 것으로 옛 친구를 걱정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에야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쓴 것이라 간파한 카네츠구는 죠우타이[承兌]에게 답서를 썼다. 이것이 후에 [나오에장(直江状)]라 불리는 도전장이다. 하나하나씩 구체적으로 대응한 후에,

참소(讒訴)를 믿고 있는 나이후님[內府様 이에야스의 관위] 옳은지, 상락[上洛 상경(上京)을 뜻함]을 거부하고 있는 카게카츠가 옳은지는 세상의 평판을 기다려 보자

 고 세간의 여론을 들어보자는 태도를 표명한 후에,

, 나이후 사마가 허튼 소리를 받아들여 계속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다. 맹세도 서약도 거기서 끝이다.

 고 대놓고 큰소리를 쳤다. 그야말로 선전포고였다.


우에스기(上杉)()의 존속을 위하여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대승(大勝)한 이에야스는 패권을 쥐자 전후 처리에 착수하였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항복을 신청한 후 카게카츠와 함께 다음해 7월 상락한 카네츠구는 이에야스를 만나서,

 "나이후 사마에게 거역한 것은 이 야마시로[山城 = 카네츠구] 혼자서 한 일이오니 마음대로 처분해주시길 바랍니다."

 고 사죄도 하지 않고 당당했다.

 카게츠구의 소령(所領)인 요네자와[米沢] 30만석은 몰수되어 대신 대감봉(大滅封)된 주군 카게카츠가 이봉해 와서막번체제(幕藩體制)에서 요네자와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네츠구는 카게카츠 6만석 지급하려는 것을 거절하고 5천석만 받아 세키가하라[関ヶ原] 때의 책임을 졌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으로 '헤이하치 카게아키[平八 景明]'가 있으면서도 동생인 '오오쿠니 타지마노카미 사네요리[大国 但馬守 実頼]'의 딸을 양녀로 삼아 1604 8월 전후처리의 교섭으로 친밀해진 이에야스의 총신(寵臣)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에게 부탁하여 그의 둘째 아들 사헤이지[左平次][각주:7]를 데릴사위 겸 양자로 맞아들여[각주:8] 이름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카츠요시[直江 大和守 勝吉]'로 칭하게 했다.
 우에스기 가문의 가명을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 카츠요시[勝吉] 1611 5월 에도[江戶]에 돌아가서는 다음해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섬겨버리고, 친자식 카게아키[景明] 1615 18살에 병으로 죽는다. 4년 후인 1619년 12 19 에도에 있던 카네츠구도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역자 가필: 카네츠구가 죽었을 때, 주군인 카게카츠

주군보다 먼저 죽는 놈이 있을까”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1. 참근교대로 성주가 에도에 갔을 때 영지에 남아 영지를 다스리던 가로. 한 마디로 No.1 가로.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노토 요리토모[源 頼朝]와는 사촌지간이다(부친끼리 배다른 형제. 사족으로 요시나카의 부친은 요리토모의 큰형[悪源太]에게 살해당했다). 겐페이 쟁란기(源平爭亂) 때 토벌 명령이 내려진 헤이케[平家]를 누구보다도 빨리 쿄우[京]에서 몰아냈다. 키소[木曽]는 묘우지[苗字]이며 본성(本姓)은 미나모토[源]. 보통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 義仲]'로 알려져 있다. 요리토모의 부하뻘이었지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나대다가 그 꼴을 못 본 요리토모가 정벌군을 파견하자 정치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코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협박하여 쇼우군이 되었다. [본문으로]
  3. 대대로 신하인 집안 [본문으로]
  4. 오센노카타(お船の方). 그녀가 나오에 씨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7. 혼다 마사시게[本多 政重] [본문으로]
  8. 이것은 두번에 걸친 결혼으로, 첫번째는 카네츠구의 친딸인 오마츠[於松]와 결혼시켰고, 그녀가 죽자 동생의 딸인 아토라[阿虎]를 양녀로 들여 그의 후실로 보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