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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豊臣家의 사람들"의 책표지..
매주 월요일에 업데이트 하기로 했지만...
현 상태에서 그래도 꽤 많이 번역한 편이지만...
주석다는 것이 넘 귀찮아서 올리지 않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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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간지 겐뇨(本願寺 顕如)
1592년 11월 24일 병사 49세
1543년~1592년.
쟁토진종(爭土真宗 1) 혼간 사(本願寺)의 승(僧) - 이하 혼간지로 통일 -. 제 11세 종주(宗主)가 되어 혼간지를 세습하였다. 이시야마(石山) 혼간지에서 물러나길 원하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충돌. 후에 키이(紀伊)국(国) 사기노모리(鷺森)로 물러났다. 제 12세 쿄우뇨(教如)와 의절한 것이 후에 혼간사(寺)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노부나가와의 10년전쟁
[켄뇨(顕如)]는 법명(法名)으로 이미나(諱 2)는 코우사(光佐)로 일반적으로는 [혼간지 켄뇨(本願寺 顕如)]라 불리고 있다.
1559년.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즉위 비용을 헌상하여 승정(僧正 3)이 되어 몬제키(門跡 4 )에 준하게 되었다. 뇨슌니(如春尼) - 그녀의 언니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인 – 와 결혼하여 쿄우뇨(教如)나 쥰뇨(准如) 등의 아이들을 얻었다.
1570년. 오오사카(大坂) 이시야마에 있는 혼간지에서 퇴거(退去)를 요구하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이후 10년에 걸친 싸움에 도전하여 자주 노부나가를 고난에 빠뜨렸다.
이때 철저항전을 주장하는 첫째 아들인 쿄우뇨와 대립하여 부자(父子) 관계를 의절했다.
혼간지 재흥(再興)과 발병
노부나가가 죽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켄뇨에게 접근하여 문도 집단의 회유(懷柔)를 꾀했다. 히데요시는 우선 켄뇨를 이즈미(和泉) 카이즈카(貝塚)로 옮긴 후 키이의 사이카(雑賀)중(衆)을 공략하여 혼간사지 세력이 강한 땅을 빼앗았다.
이시야마 혼간사(寺)가 있던 곳에 오오사카 성(城)을 쌓은 히데요시는 텐마(天満)에 절터를 주어 혼간지를 재흥시켰다. 켄뇨와 그의 부인인 뇨슌니는 히데요시나 키타만도코로(北政所) 5에게 때때로 다회(茶會)에 초대받는 등 친교를 맺었다.
텐마의 혼간사(寺)는 예전과 같이 슈고(守護)의 힘이 미치지 않는 등 6의 특권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히데요시 정권의 지배 아래 놓여졌다. 켄뇨도 히데요시 권력의 비호(庇護) 아래 들어가는 감으로써 혼간사(寺)의 존립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그 동안 켄뇨는 자주 병에 걸려 아리마(有馬)의 온천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 병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절에 대한 사무를 보는데 지장은 없었던 듯하다.
혼간사(寺), 동서(東西)로 나뉘다.
1592년 11월 20일.
켄뇨는 새벽 수행을 끝내고 불전 청소를 끝낸 후에 갑자기 쓰러졌다.
켄뇨와 친했던 쿠교우(公卿)인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 言継)의 일기 [토키츠구 경기(言繼卿記)]에는,
며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병한지 4일 후인 24일. 명의들의 치료도 보람 없이 [우(牛)시에 죽다](言繼卿記)고 쓰여있는 것을 보면 점심 지나서 죽은 듯하다. 향년 49세.
12세 종주의 자리에는 장자(長子)인 쿄우뇨가 계승하지만 곧이어 뇨슌니가 '켄뇨는 셋째인 쥰뇨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양도장(讓渡狀)을 히데요시에게 제출함에 따라 사태는 급변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의 판정에 따라 쿄우뇨는 은거의 몸이 되었고 17살인 쥰뇨가 혼간지의 법주 자리를 잇게 되었다.
이 판정에 불만을 품은 쿄우뇨와 문도들은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 후에 권력을 장악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접근하여 그 비호 아래서 카라스마루(烏丸) 로쿠죠우(六条)에 절(현재의 히가시혼간(東本願寺))를 건립하게 된다.
켄뇨는 혼간사(寺)의 분열을 우려하여 쿄우뇨와 화해했지만 이시야마 혼간사(寺)의 퇴거를 둘러싼 싸움은 켄뇨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후에 교단을 둘로 나뉘는 대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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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8년 8월 11일 병사 35세
1549년~1584년.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 성주. 부친인 쥰쇼우[順昭]가 죽자 2살에 가독을 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대립하자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도와 마츠나가를 멸망시켜 야마토를 영유(領有). 야마자키 전투[山崎 合戦]에서는 미츠히데를 버리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측에 섰다.
승의(僧衣)의 무장
츠츠이 쥰케이의 부친인 쥰쇼우는 나라[奈良]의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이었다. 쥰쇼우는 소에시모 군[添下郡]의 츠츠이 성[筒井城]을 본거지로 삼고, 야마토 지역에서 최강인 무사단을 이끌고 야마토 전역을 거의 평정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551년, 아직 쥰케이가 2살일 때 쥰쇼우가 병으로 죽었다.
주변 가신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여 18세에 코우후쿠 사[興福寺] 세이신 원[成身院]에서 득도(得度)하여 '요우슌보우 쥰케이[陽舜坊 順慶]'라는 이름을 자칭하였다. 승의의 무장이 된 쥰케이는 쇼우죠우히[猩々緋] 1로 물들인 두건을 쓰고 금색의 가사(袈裟)를 걸치고 출진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시기산 성[信貴山城]에 웅거하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여러 번 압박 받던 중 아케치 미츠히데의 주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히사히데보다 쥰케이를 신뢰하여 야마토를 맡긴 것이다. 2이에 불만을 품은 히사히데는 돌연 시기산 성에서 모반을 일으켜 자멸하였다.
1580년.
쥰케이는 성을 야마토[大和]의 코오리야마[郡山]에 축성한다. 미츠히데가 성의 건물 배치를 맡았다고 하니 둘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3
갑자기 찾아온 복통(腹痛)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츠히데가 싸운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출진 요청에도 불구하고 '호라가토우게 고개[洞ヶ峠]'에서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데, 실제로는 출병하지 않고 코오리야마 성(城)에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후 곧바로 히데요시의 진(陣)으로 달려가 천하의 명기(名器)인 이토 차완[井戸茶碗]을 헌상하고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내어 야마토 일국(一国)의 영유를 허락받았다.
1548년 1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히데요시에게 신년인사를 한 후 후나바[船場]의 자택에서 체재하고 있던 2월 중순. 쥰케이는 갑자기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수반하는 복통을 일으켰다. 소강상태를 지나 3월 2일에 코오리야마 성(城)에 돌아와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히데요시에게서 출진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가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와 손을 잡고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이 전쟁은 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이라 불리게 되는 전쟁이 된다.
히데요시에게 충심을 나타낼 절호의 기회로 본 쥰케이는 병든 몸을 이끌고 3월에 오우미[近江]로 출진하였고, 거기서 이세[伊勢] 마츠가시마[松ヶ島]에서 싸운 후 쉴 틈도 없이 6월에 미노[美濃]의 타케노하나[竹ノ鼻]로 이동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상태가 된 7월이 되자, 복통은 더욱 심해져 제대로 먹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에 더해 한 여름의 더위까지 겹쳐 몸은 갈수록 말라 갔다.
명의(名醫)의 치료도 보람없이
코우후쿠 사(寺)의 중도(衆徒)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인 호우인 소우토[法印 僧都]가 되어 있던 쥰케이의 병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코우후쿠 사(寺),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는 여러 가지 기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효과는 없어 결국엔 쿄우토[京都]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쿄우토에는 오오기마치 텐노우[正親町天皇]의 병을 고친 명의(名醫)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우산의 치료에도 진전이 없어 격통이 멈추지는 않았다. 쥰케이의 병은 요즘으로 말하면 악성 위궤양 혹은 위암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회복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코오리야마 성(城)으로 돌아왔다.
코우야 산[高野山]에 있는 쥰케이의 묘.
흔들리는 가마에 타고 오기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고 오는 도중 우치[宇治]나 나라[奈良]에서 정양(靜養)해 가면서 귀성한 것은 8월 7일이었다. 그 동안에도 쥰케이는 계속 고통을 느꼈다. 또 다시 코우후쿠 사(寺)나 카스가 대사[春日 大社]에서 기도가 행해졌지만 역시 효험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쥰케이도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10일에는 머리맡에 일족들과 중신들을 불러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모친 오오이카타 토노[大方殿] 등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35세.
쥰케이는 츠츠이 가문의 앞날을 걱정하였지만 뒤를 이은 사다츠구[定次] 4, 죠우케이[定慶] 5 둘 다 뛰어나지는 못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카이에키[改易] 6, 단절(斷絶) 7 당하게 된다.
사다츠구는 이가[伊賀] 우에노[上野]로 영지가 옮겨져 20만석을 영유하고,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쪽에 속했으나 후에 카이에키가 되어 이요[伊予]로 유배당한다.
또한 그 다음 대인 죠우케이[定慶]에게는 코오리야마 성(城) 1만석이 주어졌지만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에서 오오사카 측에 너무도 간단히 성을 빼앗긴 일로 무가(武家)로써 어울리지 않다하여 가문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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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
1615년 5월 28일 병사 60세
1556년~1615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七本槍]' 중 1 한 사람이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역(後見役)이 되어 토쿠가와[德川] 측에 대한 연락창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내통자로 오해 받아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떠났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후에 죽었다.
우직한 카츠모토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6살 때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카츠모토를 히데요시는 곁에 두고 길러 키워 가신(家臣)으로 삼았다.
1583년 4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칠본창'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공을 세워 3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과 비교하면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 히데요시 말년인 1595년이 되어서야 겨우 셋츠[摂津] 이바라키[茨木]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그 전 해인 1594년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신하로 선택되었다. 히데요리의 여러 신하들, 특히 측근을 감찰(監察)하는 지위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다음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오오사카 성에 입성해서는 히데요리 곁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그런 우직함을 신뢰하여 1601년 카츠모토에게 야마토[大和] 헤구리 군[平郡郡] 1만8천석을 가증하여 히데요리의 가로(家老)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카츠모토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하여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는 뭐든지 미묘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카츠모토에 대하여 요도도노[淀殿]를 필두로 한 오오사카 성내의 반토쿠가와파는 무엇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카츠모토를 보게 되었다 2. 토요토미-토쿠가와 양 가문의 중개자로써 쌍방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심하는 카츠모토는, 언제부턴가 오오사카 성내의 혼란과 이간을 꾀하는 이에야스의 교묘한 술책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호우코우 사[方広寺] 종명(鐘銘) 사건
1602년 4월.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통해 히데요리 모자(母子)에게 쿄우토[京都] 호우코우 사[方広寺] 대불전(大佛殿)의 재건을 권유하였다. 히데요리도 요도도노도 죽은 히데요시의 공양과 토요토미 씨(氏)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를 따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성(城)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금은을 쓰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츠모토가 조영(造營) 책임자라는 큰 임무에 임명받았다. 그는 이에야스와 빈번한 연락을 통해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사업을 진행해갔다.
호우코우 사(寺) 대불전은 1614년 4월에 준공.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개안공양을 눈 앞에 두고 이에야스가 불만을 표했다. 종에 새겨진 '国家安康'이 '칸토우[関東]를 저주하는 말'이고 3, [君臣豊樂子孫殷昌]이 토요토미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말이라며 개안공양의 연기를 명령했다.
라는 어느 것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해 왔다. 대불전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정치적 난제를 껴안게 된 카츠모토는 크게 놀랐다.
한편 요도도노도 따로 이에야스에게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와 쇼우에이니[正栄尼] 7를 파견하였다 8. 이에야스는 이 둘에게 종명 문제 등 난제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환대하며 히데요리 모자의 안부에 신경 썼기에 당연하게도 오오사카로 돌아온 쌍방의 보고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분열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오오사카 성내에는 '카츠모토는 칸토우[関東]에 알랑거리는 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곧이어 그 목소리는 '배신자 카츠모토를 죽여야 한다'로 변했다.
충신인가 역신(逆臣)인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신뢰를 잃은 지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기에 카츠모토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오오사카 성(城)을 탈출하여 이바라키 성(城)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칸토우[関東]에 대한 오오사카 측의 선전포고라 여기고 오오사카 정벌을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1614년 10월 11일. 이에야스는 순푸를 출발하여 이로인해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 이에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이 없다.
11월 4일.
쿄우토[京都]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곧바로 카츠모토를 불러 오오사카 성(城) 공략에 대한 이야기 나누었다. 카츠모토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바이며 어쩔 수 없던 선택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오오사카 성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카츠모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바라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다.
12월 16일.
시작된 공성 측의 대포 공격 중 한 발이 요도도노가 거주하던 곳에 떨어졌다. 거기에 다음해 여름의 싸움 때 야마사토[山里]의 성곽에 있는 히데요리 일행의 소재를 확인하여 히데타다[秀忠]에게 고한 것도 카츠모토라고 한다.
토요토미 가문 멸망으로부터 20일 후.
카츠모토는 쿄우토[京都]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상은 깊은 죄와 자기 혐오에 빠져 자해(自害)를 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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