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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

1610 8 20일 병사 77

1534~1610.

탄고(丹後)() 타나베(田辺)성주.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소개하여 쇼우군()으로 옹립하였으며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섬겼다. 세키가하라(ヶ原) 전투를 앞두고 서군의 공격을 받지만, 코요우제이(後陽成)텐노우(天皇)가 개성(開城)을 알선.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가인(歌人)으로도 유명.







칙명(勅命)으로 목숨을 건지다.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는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목표로 거병(擧兵)하였다. 세키가하라(ヶ原) 싸움의 전초전(前哨戰)으로 미츠나리는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가 지키는 탄고(丹後) 타나베(田辺)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유우사이, 타다오키(忠興) 부자(父子)가 이에야스에게 가담하였고 거기에 타다오키의 부인 가라샤가 미츠나리의 인질 정책에 응하지 않고, 오오사카(大坂) 저택에서 자살하였기 때문이다[각주:1]. 이것은 미츠나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해였다.

 미츠나리는 탄바(丹波) 후쿠치야마(福知山) 성주 오노기 키미사토(小田木 公鄕) 등의 무장과 군세 1 5천을 타나베성으로 향하게 했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원정 중이었기에 유우사이는 5백명의 병사들과 농성했다. 유우사이는 이들을 지휘하며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낙성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유우사이는 텐노우(天皇)의 동생인 토시히토(智仁) 신노우(親王 = 하치죠우미야(八条宮))에게 고금집오의(古今集奧義)를 전수하고자 하였다. 놀란 토시히토 친왕은 비밀리에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에게 유우사이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하였고[각주:2], 텐노우는 오오사카 성과 타나베 성 양 쪽에 칙사(勅使)를 파견하여 정전(停戰)시킨 것이다.

 [칙명을 받들며 감읍할 따름이다. 옥명(玉命)에 따라 구질구질한 목숨을 더 이어가겠다]며 유우사이는 개성(開城)한 후 일시적으로 카메야마(亀山)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곧이어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싸움에서 이긴 이에야스에게서 타지마(但馬)가 더해져 쿄우토(京都) 요시다(吉田)에 은거하였다.


노래와 함께 여생을 보내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싸움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의 패권을 손에 넣긴 했지만 바쿠후(幕府)의 의식(儀式[각주:3])은 전혀 몰랐다. 그래서 한 때 아시카가 쇼우군가()를 섬긴 적이 있는 유식(有識[각주:4])한 유우사이에게 부탁하여 무가(武家)의 의식(儀式)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그 중에는 유우사이 자신이 정한 예식도 많았다고 하며 이것을 [무로마치 바쿠후의 가식(室町殿御家式)]이라고 불렀다.


 한편 이에야스 쪽에 선 타다오키는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37만석이라는 큰 영지를 받았다. 메이지(明治) 시대까지 이어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55만석으로 전봉()된 것은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이다. 할아버지인 유우사이의 덕()에 의한 것이 컸다.


 이에야스는 유우사이에게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한 지방()을 주려고 하였으나 완고히 거절하고 대신 6천석의 은거료(隱居料[각주:5])를 받았다. 유우사이는 쿄우토(京都) 요시다(吉田)산에 살며 제자인 마츠나가 테이토쿠(松永 貞德[각주:6]) 등의 시를 봐주면서 평온한 생활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후 노령 때문인지 몸 상태가 나빠져 1609 11 29일자의 [智仁親王御記[각주:7]]에는 유우사이가 방문했지만 굉장히 쇠약해진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해인 1610년 여름에 병이 났고 이 병이 악화되어 8 20일 새벽, 쿄우토(京都) 산죠우 쿠루마야쵸우(車屋町)에서 죽었다. 77살이었다. 유우사이는 문인(文人)으로도 이름 높지만, [호소카와 유우사이 비망록(細川幽斎覚書)]을 보면 일류의 검법가(劍法家)인 것도 알 수 있다.

[쿄우토(京都市)사쿄우쿠(左京区)텐쥬인(天授院)]에 있는 유우사이의 묘.

  1. 천주교도였기 때문에 자살은 못하고 대신 가신에게 창으로 자신을 찌르게 하여 죽었다. [본문으로]
  2. 유우사이 같은 옛 것을 잘 아는 사람이 죽는 것은 너무 아깝다며. 이에 대한 이야기는 '토요토미 가의 사람들'의 '하치죠우노미야' 7편을 참고해 주시길... [본문으로]
  3. 여러 행사를 치르는 방법 등 [본문으로]
  4. 여기서는 옛 일, 의식, 의례에 밝은 사람을 이름 [본문으로]
  5.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6.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손자라고 한다 [본문으로]
  7. 토시히토 친왕의 일기 [본문으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

1600 10 1일 참수 41

1560~1600.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秀吉]를 가까이서 섬겼다.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에서는 오봉행(五奉行)중의 한 사람으로 문리파(文吏派) 다이묘우[大名]의 리더로 인식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꾀하여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서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 河原]에서 참수당했다.









태합(太閤)의 넘버 원 총신(寵臣)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일했던[각주:1] 이시다 미츠나리가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태합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아래서 봉행에 임명되어 오우미[近江] 사와야마[佐和山] 19 4천석(쿠라이리치[入地[각주:2]]를 포함하면 약 30만석)을 영유하면서 부터이다.

 히데요시는 말년에 정권 집행을 미츠나리에게 맡겼으며, 이런 미츠나리에게는 아무리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라도 미츠나리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권세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598 8 18 히데요시가 죽으면서부터이다.
[이타자카 보쿠사이 비망록(板坂)]에 따르면, 오대로(五大老)[각주:3]와 오봉행(五奉行)[각주:4] 제도는 이 해(1598) 7 13일에 정해졌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예감하여 자신의 유언을 법규로 삼아 자신의 사후에도 토요토미 정권의 안정을 꾀하려 하였다. 히데요시의 뇌리에는 토요토미 가의 존속(存續밖에 없었다. 정권을 히데요리[秀頼]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은 뒤 천하를 거머쥐는 것은 이에야스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의 보좌를 맡은 코이데 히데마사[小出 秀政][각주:5]와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각주:6]에게는,

내 가문을 끊기게 하고 싶지 않으면 절대 이에야스에게 반항해서는 안 된다. 조심 또 조심스럽게 이에야스를 섬겨 히데요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하여라. 그러면 우리 가문이 끊어지는 일은 없다.

 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총애하는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에게는 일시적이나마 정권을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에게 맡기지만, 히데요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히데요리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꾀하라고 히데마사와 카타모토와는 정반대의 명령을 내린 것이다.


타도 이에야스


 미츠나리는 융통성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려고 하였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막역한 친구였기에 히데요시의 유언을 잘 지켰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야망은 천하를 잡는데 있었다. 곧바로 토오토미 가문을 멸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미츠나리는 그런 이에야스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암살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거기에 더 귀찮은 일이 생겼는데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武功派)와 알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1599년 윤3 3 히데요리의 후견인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으로 죽는 것과 동시에 미츠나리를 습격했다. 이것을 중재한 것이 이에야스였다. 대신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 칩거 당하게 되었다.


 대로, 봉행 제도를 무시한 이에야스 독재 정치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상경명령에 응하지 않던 같은 대로(大老직급인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치기 위한 아이즈 원정[津遠征]에 아무도 반대의 뜻을 표하지 않고 이에야스를 따라간 것도 이에야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정 뒤에는 미츠나리의 거병(擧兵)을 유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곶감을 거절하다.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틈을 노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

 맹우(盟友)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는 무모하다고 반대하였지만, 태합 히데요시에 대한 보은(報恩)이라는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야스의 유언 위반을 지탄하는 격문(檄文)을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날리며 선전포고하였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에야스였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7])의 토자마 다이묘우[外大名[각주:8]]를 거느리고 미츠나리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말머리를 서쪽으로 향했다. 미츠나리는 만전의 태세로 미노[美濃] 세키가하라[ヶ原]에 포진하여 동군(東軍)을 유격하려 하였다.


 1600 9 15일 이른 아침. 천하를 가름하는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서군을 표방한 많은 무장들이 싸우지 않는 와중에서도 선전하였다. 그러나 미츠나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등 다섯 무장[각주:9]이 싸움 중에 서군을 배신하고서는 공격해 왔다. 무방비의 등 뒤를 총에 맞은 것과 같이 충격과 혼란 속에서 서군은 완패하였다.


 미츠나리에게는 이에야스 타도의 대의(大義)가 있었다.

 울분을 삼키고 이부키[伊吹]산 속으로 도망쳤지만, 패배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인정은 종이보다 얇은 법. 밀고에 의해 숨어있던 곳이 밝혀져 이에야스 앞에 잡혀왔다. 미츠나리의 행위를 문책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 편에 선 무장 중에도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미츠나리는 잡힌 몸이면서도 비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직했다. 창피한 행위는 아니었다고 후회하는 안색조차 띄우지 않았다.


 쿄우토[京都] 로쿠죠우 강변[六河原]의 형장으로 향할 때, 갈증을 느낀 미츠나리가 따스한 물을 원하자 경호하던 무사가 따스한 물은 없으니까 대신하라며 곶감을 권했다. 이에 미츠나리는 곶감은 담()에 나쁘다고 거절했다. 경호하던 무사들은 비웃었지만 "큰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생명을 아끼는 법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미츠나리가 포진했던 사사오 산[笹尾山](기후 현[岐阜県] 세키가하라 정[関ヶ原町])

  1. 당시엔 입을 줄이기 위해서 아이를 절에 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히데요시도 어렸을 땐 절에 맡겨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직할령을 말하며, 미츠나리는 이 직할령의 대관(代官 – 주인을 대신하여 관리함)을 맡았다. [본문으로]
  3.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4. 일반적으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본문으로]
  5. 히데마사의 부인은 히데요시의 모친 오오만도코로[大政所]의 동생. 즉 히데요시의 이모부. [본문으로]
  6.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 중 한 명. [본문으로]
  7.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가지고 있거나 직접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들 [본문으로]
  8. 직속 부하가 아닌 동맹격인 다이묘우 [본문으로]
  9. 이 중 넷은 히데아키의 배신을 대비하여 요시츠구가 배치한 무장들이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서'만' 명장 취급을 받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도 있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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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화 국회 해산

일본서적 번역/총리대신織田信長 2007. 3. 3. 18:25 Posted by 발해지랑









가끔 한국의 국회도 해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일 때는 제외~)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95 2 7일 병사 40

1556~1595.

오우미[近江] 히노[日野] 성주 가모우 카타히데[蒲生 賢秀]의 아들. 크리스트교를 믿어 세례명은 레오(는 레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겼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공적으로 인하여 아이즈[津] 와카마츠[若松] 성주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에는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출진하지만 갑자기 병을 나서 급사.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명장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오우우[羽] 지방의 통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처음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아이즈를 맡긴다고 하자 타다오키는 이런 큰 일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사퇴하였다.

 오우우에는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등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호족들이 많았다. 아이즈 쿠로카와[川] 42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것은 이런 호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검은 손길이 오우우에 미치지 않게 한다는 숨겨진 임무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선정된 것이 가모우 우지사토였다.

 이세[伊勢] 마츠자카[松板]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많은 전쟁을 경험한 명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姬]의 남편이라는 신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외경심(畏敬心)을 품게 하였다.


 또한 우지사토만큼이나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주인도 흔치 않았다. 주된 가신들을 모아서는 술자리를 열 뿐만 아니라, 가신들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직접 뗄감을 집어 넣으며 물을 끓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충성스런 신하가 많았다.


오우우 평정에 조력


 히데요시는 이런 우지사토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택하였다. 처음엔 타다오키처럼 사퇴하였지만 히데요시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우지사토는 아이즈 쿠로카와 42만석을 받아 들인 거실의 기둥에 기대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본 야마사키 우콘[山崎 右近]이 많은 영토를 가진 높은 신분으로 출세하여 기쁜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요? 하고 묻자 우지사토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낮은 신분이나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더라도 쿄우[] 근처에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천하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을.... 아무리 높은 신분에 많은 영토라고 하여도 쿄우[]에서 먼 곳에 있다면 그런 바램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나도 모르게 분한 눈물을 흘렸다"

 고 대답했다지만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로 향하기 전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여 입었다. 오우우 부임은 히데요시를 대리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두려웠기에 오우슈우[奧州]로 쫓아 보냈다고 근신(近臣)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는 둘째치고 라도 우지사토는 천하인(天下人)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재능을 오우슈우[奧州] 통치에 이용하려고 한 히데요시의 날카로운 안목을 칭찬해야만 할 것이다.


 우지사토의 말년은 오우우 통치에 전력을 쏟는 시기였다. 카사이-오오자키의 난[葛西大崎一揆]을 진압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야망을 좌절시켰으며,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처리하였다. [우지사토 기[氏鄕記]]에 따르면, 이때 우지사토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군법에 따라 군율을 엄격히 했다고 한다.


최후와 죽을 때 읊은 시


 여기서 하나의 일화가 태어났다.

 군감(軍監)으로 참전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히데요시에게,
 [
우지사토의 진영을 보니 예사 인물이 아닌 듯 합니다. 타이코우[太閤] 전하에게 딴 마음을 품는다면 이 이상 두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일찍 죽여야만 합니다]
 
고 진언하여 독을 먹였다고 한다.
이야기로써는 흥미 깊지만 우지사토 독살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지사토가 발병한 것은 1593년의 히젠 나고야 출진 중이었다. 몇 월 몇 일인가는 특정할 수 없지만 하혈(下血)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의 일화에 나오는 듯이 히데요시나 미츠나리가 짐독(鴆毒)을 먹게 하였다면 그해 안에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 중국산의 독조(毒鳥[각주:1]) 날개를 술에 담근 후 마시게 하면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지사토가 죽은 것은 1595 2 7일로 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필시 하혈은 암()의 징조였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사카이[]의 의사 소우슈쿠[宗叔]의 진찰과 투약으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달증상을 띠며 말라갔기에 히데요시도 걱정하여 당대의 명의였던 마나세 겐사쿠[曲直 玄朔][각주:2]에게 진찰시켰더니 [배에 물이 차거나 손발에 종기가 생기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1594년. 히데요시는 또 다시 9명의 명의에게 우지사토를 진찰시켰다. 안타깝게도 명의들 대부분이 포기할 정도로 상태는 악화되어 40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당시의 의학에선 어떻게 판단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직장암(直腸癌)의 병상(病狀)과 비슷하다.


 그의 사세구()가 물의를 빚었다.

 りあればかねどるものをみじかき山嵐
 끝이 있으니 (바람)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지는 것을 마음도 급하구나 꽃샘바람

누군가에게 독살되어 수명이 짧아졌다는 설이 태어났지만 명백한 오해이다. 현대의 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암의 질환이다. 우지사토는 그런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 것이라 생각한다.

코우토쿠 사(興徳寺)에 있는 우지사토의 묘

  1. 가상의 새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의 양자. [본문으로]

제 1화 정권탄생

일본서적 번역/총리대신織田信長 2006. 12. 4. 10:38 Posted by 발해지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