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

1636 12 30일 병사(病死) 81.

1559 ~ 1638.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적남(嫡男).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를 섬기며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데뷔전. 시코쿠[] 공략의 전공(戰功)으로 아와[阿波] 일국()을 하사 받았다. 조선 침략 시에는 위기에 빠진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를 구출하는 활약을 하였고 은거 후에도 적자 요시시게[鎮]를 보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과 이에마사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토요토미 계[豊臣系]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의 유력 무장으로 여겨지던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 아직 14살인 적자 요시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동군에 종군시키는 한편 자신은 영지를 히데요리에게 반환하고 아와[阿波]를 나와서 은거. 머리를 깎고 '호우안[蓬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올랐다[각주:1].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아와[阿波] 일국은 요시시게에게 새로이 주어졌다.[각주:2]

 

 이에마사는 아와[阿波]로 돌아와서 카츠우라 군[勝浦郡] 나카다 촌[中田村]의 은거소(코마츠시마 시[小松島市])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센고쿠(戦国).

 1605년 아와 군[阿波郡] 이치바 쵸우[市場町]에 호우안의 서명으로 마을 법률을 반포하는 등, 요시시게의 뒤에서 번()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秀忠]나 이이 가문[井伊家] 등 -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중신(重臣)과 연락을 자주 하여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과 토쿠가와 막부(幕府)와의 파이프를 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614 8월.

 은거소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데요시의 목상(木像)을 받든 호우코쿠 신사[神社]를 세웠다. 이 해 10월에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 冬の陣]이 일어났기에 이 사실은 이에마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었서 굉장히 흥미롭다.

 

편히 쉬려던 여생이……

 

 어쨌든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 씨가 멸망하여 천하가 토쿠가와의 것이 되자, 요시시게는 전공(戰功)에 의해 아와지[淡路] 일국()이 더해져 25 7천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618년.

 요시시게도 착실히 성장하여 농민정책을 중심을 한 '벽서 23개조[壁書二十三条][각주:3]라는 국법을 제정하여 번정(藩政) 확립에 힘썼다.

 이에마사도 안심했을 것이다. 번정은 전부 요시시게에게 맡기고 편히 여생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에마사를 쉬게 나두질 않았다.

 1620 2 26일.

 하치스카 요시시게가 35살이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토쿠시마 성[城]에서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4월에 그 뒤를 센마츠마루[千松丸 = 타다테루[忠英]]가 이었지만 아직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에마사는 나카다 촌()의 은거소에서 토쿠시마 성의 서측 성곽[西丸][각주:4]으로 옮겨 와, 어린 번주(藩主)를 후견하여 1629년 병으로 누울 때까지 사실상 이에마사가 통치를 계속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가노(家老)[각주:5]나 모노가시라[物頭][각주:6] 등 주요 가신들에게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번주가 어린 동안에는 모노가시라가 모든 것을 처리할 것.

 주인이 어린 동안에는 각자가 자기 할 일은 확실히 할 것.

 공공(公共)의 일은 밤낮없이 봉사할 것.

 어떤 일이건 사사로운 감정을 넣지 말 것.

 

 등의 지시를 내렸다.

 또한 에도[戸] 루스이야쿠[留守居役][각주:7]에게도 에도 저택의 운영에 대해서 4개조의 지시를 내렸다.

 

 이에마사는 하세가와 에치젠[長谷川 越前]이나 외손자인 하치스카 야마시로[蜂須賀 山城][각주:8]를 가로(家老)로 삼아 센마츠마루를 보좌시켰다.

 참근교대(交代)[각주:9] 할 때에도 이에마사가 같이 갔다.

 이에마사는 번정의 확립에 큰 역할을 이룸과 동시에 노련함을 무기로 바쿠후가 흠잡을 만한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1623년에는 쿠니부교우[奉行]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정비를 꾀했고,

 1627 7월에는 요시시게의 '벽서 23개조'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이서 7개조(裏書七)'를 제정하였다.

 센마츠마루는 1623년에 아와노카미 타타시게[阿波守 忠鎮]라 이름을 바꾸고, 다음 해 봄에는 타다테루(忠英)라 고쳤다.

 

 그 후에도 이에마사는 신전(新田)개발이나 염전(鹽田)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매년 에도에 가서는 막부와의 파이프를 더욱 강고히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이에마사가 가신들에게 영지를 배분하는 문서를 쓰는 등 번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에마사의 언행을 기록한 [존어집(尊語集)]에는,

 어린 타다테루의 늦잠을 고치라고 한 말이나, 가신들이 타다테루가 자신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상담하러 왔을 때, '어렸을 때는 그런 법이다'라며 타다테루를 감싸는 듯 하다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에 인사를 올리러 온 타다테루에게 정원에 있는 개나 참새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것을 보여준 뒤 새나 동물도 이렇게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으니 부하에게 정을 주고 위엄을 가지고 가르치면 충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한 부분이 보인다.

 

 1638 12 23일.

 토쿠시마 성[城] 서측 성곽에서 죽었다 81.

 번정의 확립을 자신의 눈으로 끝까지 지켜본 일생이었다.

코우겐 사[興源寺]에 있는 이에마사의 묘 - 토쿠시마 시[徳島市]


  1.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겠다는 의미. [본문으로]
  2. 이에마사는 서군 편에 섰다, 혹은 병에 걸렸었기에 오오사카[大坂]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문으로]
  3. 벽서(壁書)란 법령을 적은 종이나 나무를 벽에 붙인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에도시대 때. 보통 서측 성곽[西の丸]은 다이묘우[大名]가 은거하며 머무는 곳이었다. [본문으로]
  5. 가문의 수상(首相) 격 [본문으로]
  6. 중급 관리자. [본문으로]
  7. 에도[江戸]에 있는 번(藩)의 저택의 책임자. [본문으로]
  8. 하치스카 야마시로의 증조부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죽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이다. [본문으로]
  9. 참근(参勤)은 쇼우군에게 봉사한다는 의미, 교대(交代)는 봉사를 쉬고 자기 영지로 돌아가 정무를 맡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토를 왔다 갔다 했으며 처자식은 인질로 에도에 항상 남겨 두었다. [본문으로]

깃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1586 11 5일 병사(病死) 57.

1530 ~ 1586.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상속하였다.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나 아마고 가문[尼子家] 평정 등에서 공을 세웠다.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1]]'이라 일컬어 졌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요청으로 큐우슈우[九州]로 출전하지만 코쿠라[小倉]에서 죽었다.








무패의 명장


 킷카와 모토하루는 센고쿠[戦国] 굴지의 실전적(實戰的)인 명장(名將)이다.

 1530년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둘째 아들로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태어나 1541 12살의 나이에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와의 코오리야마 농성전(籠城戰)에서 처음 데뷔전을 치뤘다. 이후 싸움터를 내달리길 80회에 가까웠고 그 중 64번의 싸움에서는 승리했다[각주:2].


 명장(名將)은 명장을 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晴賢]와는 의형제의 맺을 정도의 사이였다.

 아키[安芸] 신쇼우[新荘]에 입성하여 킷카와 가문 중흥(中興)의 시조가 되어서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더불어, () '카와[川]'를 짊어지고 모우리 양 천[毛利両川]의 일익을 담당하며 모우리 종가(宗家)의 융성(隆盛)을 위해 분주한 일생이었다그런 모토하루이기에 말년이 한가롭고 평온할 턱이 없었다.


은거를 바라는 나날들


 모토하루가 은거를 결심한 것은 그때까지 항상 공세에 서서 전쟁을 벌였던 것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둘러싼 히데요시 군()과의 대결에서는 항상 수세로 돌아서 버린 때부터이다. 공격형인 모토하루로서는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것에 정신적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알지 못한 채(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료도 있다), 감쪽같이 히데요시의 술책에 넘어가 싸움을 멈추고 타카마츠 성장(城將)시미즈 무네하루[清 宗治]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의 실책이 모토하루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 넣었다.


 1582 12 20일.

 "늙었기에 가문을 모토나가[元長]에게 물려준다"(江譜拾遺)고 하고선 곧바로 은거해 버렸다. 모토하루 53,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은거 후, 일본의 중앙에선 노부나가[信長] 사후의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나 히데요시 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등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때 히데요시, 카츠이에 쌍방에서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모토하루는 신중히 양 진영(陣營)을 관찰했다. 결국 히데요시의 확고한 자신감과 실행력이 가득 쓰여진 편지를 보고 이후는 히데요시 편에 서기로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와의 영지(領地) 문제에서 코지마 반도[児 半島][각주:3]를 빼앗겼고, 거기에 모토하루가 가장 귀여워하고 있던 셋째 아들 츠네노부[経信]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養子)인 모토사토[元総][각주:4]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치는 등 굴욕적인 타협을 참으며 모우리 종가의 안태(安泰)를 위해 노력하였다.

 참고로 츠네노부는 후에 이와쿠니[岩国] 킷카와 가문의 시조(始祖)가 되는 히로이에[広家][각주:5] 그 다음 해에는 귀국을 허락 받았다. 모우리 안태를 위한 인질을 바친 셈으로 모우리 종가의 테루모토[輝元]는 츠네노부에게 오키[隠岐] 일국(一国)를 하사하는 등 공로를 인정하여 모토하루의 마음 고생에 보답하였다.


 히데요시는 키이[紀伊] 공략을 끝내자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長宗我部] 공략에 임하여 모토하루에게도 출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의 뜻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여 은거인 몸이라는 이유로 큰 아들 모토나가를 대신하여 보냈다. 모토하루를 대신한 킷카와 가문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모우리 양 천[毛利両川]은 시코쿠[四国]를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쵸우소카베[長宗我部]와 싸우던 1585 7월에는 난죠우 모토츠구[南条 元続]에게 시코쿠[四国] 침공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호우키[伯耆] 카와라야마 성[河原山城]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지만 노련한 모토하루는 곧바로 배다른 동생인 스에츠구 모토야스[元康][각주:6]에게 명령하여 이를 탈환케 하였다.


모토하루 최후



 그 후도 모토하루가 바라는 편온한 은거 생활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일 없이 결국 모토하루의 마지막 출진의 날이 다가온다.


 1586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는 큐우슈우[九州] 통일을 목표로 붕고[豊後]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을 공격하였다. 히데요시는 시마즈를 토벌하기 위해 모우리 테루모토를 대장으로 삼아 백전연마의 노장 모토하루에게도 출진을 지시하였다. 동생인 타카카게에게 이요[伊予]를 하사한 것처럼, 출진만 한다면 모토하루에게 치쿠젠[筑前] 일국(一国)을 주겠다고 하였다.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모우리 종가를 위해서는 출진할 수밖에 없었다.


 1586 8 19일.

 모토하루는 모토나가, 츠네노부를 거느리고 아키[安芸] 신쇼우를 출발하여 사에키 군[佐伯郡]의 오가타[小方]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코쿠라 성[小倉城]을 공략했다. 모우리가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마즈는 어쩔 수 없이 공격 중이던 치쿠젠[筑前] 타치바나야마 성[立花山城] 포위를 풀고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농성하고 있던 타치바나 성주(城主)인 타치바나 무네토라[立花 統虎 = 후의 무네시게[宗茂]]는 성을 나와 시마즈 군()을 추격하여 치쿠젠의 타카토리이 성[高鳥居城]을 공략하고, 이와야 성[岩屋城]과 호우만 성[宝満城]을 탈회하였다.


 이때 모토하루는 부스럼(통증이 심했다고 하며 경과를 봐서는 피부암이라 추정된다)이 나서 코쿠라 성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아들인 모토나가는 쾌유를 바라며 사찰에 명해 기도를 올리게 하였고, 테루모토도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를 하게 했지만 낫는 일 없이 11 5일 코쿠라 성()에서 죽었다. 향년 57.

  1. 모토나리가 구축한 모우리 가[毛利家]의 군사-정치 조직. 모토나리의 둘째와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킷카와나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카와[川]'라는 글자가 들어갔기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 따르면 76전 64승 12무승부 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당시는 간척 사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코지마 섬이었다. [본문으로]
  4. 모우리 모토나라의 9번째 아들. 후에 모우리 히데카네[毛利 秀包]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에서 모우리 군단의 움직임을 막아 동군을 유리하게 한 인물. [본문으로]
  6. 모우리 모토나리의 8번째 아들 [본문으로]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625 4 27일 병사(病死) 73.

 

1553 ~ 1625.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의 장남. 할아버지인 모토나리[元就]가 죽은 뒤 가독 상속. 츄우고쿠[国] 지방에 120여 만석을 영유(領有)하며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오대로(五大老)[각주:1] 중 한 명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이 되지만 패하여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 국[]으로 감봉(滅封). 쵸우슈우 번[長州藩]번조(藩祖)가 되었다.

 

 




 


은거와 오오사카[大坂]의 전투

 

 테루모토는 1553 1 20일에 아키[安芸]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모우리 타카모토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타카모토의 급사(急死)로 인하여 할아버지인 모토나리의 후견(後見)을 받아 11살에 성인식을 치렀다.

 젊어서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등을 상대하며 성장했다.

 

 히데요시의 말년에는 오대로(五大老)라는 중직에 임명되어 츄우고쿠[国] 지방 9개국() 1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군림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의 총사령관이면서도 중요한 때 움직이지 않았다.

 

 테루모토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지자마자 머리를 깎고 '겐안소우즈이[幻庵宗瑞]'라는 호를 칭하였다.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 되어, 번(藩)의 수도를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북쪽 해변의 땅 하기[萩]로 하는 이봉(移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테루모토의 말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쉬기에는 일렀다.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는 토쿠가와 씨[徳川氏]에 대한 충성과 히데요시가 죽을 때 말한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라는 유언 사이에서 고심한 끝에 토요토미 가문[徳川家]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의미로 극비리에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 秀頼]에게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을 파겼하였다.

 사실 사노 도우카라는 것은 위명(僞名)으로 정체는 필두(筆頭) 노신(老臣)인 시시도 모토츠구[宍戸 続]의 동생인 나이토우 모토모리[藤 元盛]였다.

 테루모토는 도우카에게 병량(兵糧) 1만석()[각주:2]을 대신한 황금(黃金) 500매를 주고서는 그의 가족과 자손은 확실히 뒤를 돌보아 줄 테니 걱정 말라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입성시켰다.

 , '만약 토요토미 쪽이 이겼을 때는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10개국()을 줄 것'이란 약속을 히데요리와 맺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측이 패배하여 오오사카 성이 낙성(落城)되고,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도 도우카가 살아 남았기에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도우카가 모우리의 가신(家臣)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테루모토는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쿄우토[京都]에 숨어있던 도우카를 잡아서는 할복(割腹)시키고, 목을 이에야스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테루모토가 뒤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도우카의 장남인 모토요시[元珍]와 둘째인 아와야 모토토요[粟屋 元豊]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는 두 아들까지 죄를 주고 싶지 않다며 귀국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테루모토는 둘 다 아비 도우카와 마찬가지로 배를 가르게 하여 막부(幕府)에게 자신은 무죄라는 것을 주장했다.

 충신을 죽여서 가문을 지킨다.

 모우리의 그런 전통으로 이후에도 바쿠후에게 카이에키[改易][각주:3]당하는 일 없이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를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테루모토도 그다지 위기감 느끼는 일 없이 - 은거생활은 주로 모우리 종가(宗家)안태(安泰)를 위해 힘썼다.

 

 우선은 1616.

 테루모토의 딸과 킷카와 히로마사[吉川 正][각주:4]와의 결혼이었다. 킷카와 가문[吉川家]에 시집 보내기에 앞서 테루모토는 제멋대로이고 성질이 급한 딸에게,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가문과의 강한 유대를 위해서이니 불만이 있더라도 뭐든 참아야 하느니라 

 라고 아비답게 간절히 타이르고 거기에 결혼 지참금[化粧料]으로 5천석을 주어서 시집 보냈다. 

 결혼으로 인해 이와쿠니 령[領] 킷카와 가문과의 결속이 두터워지자, 1617년에는 둘째 아들인 나리타카[就隆]에게 스오우[周防] 토쿠야마[山] 3만석을 나누어 주어 '토쿠야마 번[徳山藩]'을 만들었다.

 

 1600년에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의 '쵸우후 번[長府]' 3 6천석을 창설.

 나중의 일이지만 1653년에 히데모토의 둘째 아들 모토토모[元知]의 '키요스에 번[藩]' 1만석이 세워져, 종가(宗家) 보좌를 맡는 모우리 삼가(三家)가 만드는 등 영국(領國) 경영을 강화해 갔다.

 

 1617년에는 쵸우후의 모우리 히데모토의 딸 쇼우키쿠코[松菊子]를 토쿠야마의 나리타카와 결혼시켜 쵸우후 번[長府藩]과 토쿠야마 번[徳山]의 결속도 강화시켰다.

 

 1619.

 2대 쇼우군[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川 秀忠]의 상락(上洛)[각주:5]이 있었다.

 테루모토는 히데타다와 만나기 위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락.

 간신히 히데타다의 숙소인 니죠우 성[城]에 입성했다. 테루모토의 몸을 걱정한 히데타다의 배려로 가마를 타고 현관까지 왔고,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 카미오 모리요[神尾 守世], 전의(典醫)[각주:6]인 마나세 마사츠구[曲直瀨 正紹] 등의 도움으로 입장하여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손에 이끌려 겨우 히데타다와 대면할 수 있었다. 

 전 병이 들어 약해졌습니다. 앞으로 모우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뜻을 전한 후 영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테루모토의 큰 아들로 초대 하기 번주(藩主)인 모우리 히데나리[秀就]에게 가문의 번영과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타이르고 20개조에 이르는 유훈(遺訓)을 남겨 히데나리에게 반성과 자숙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쇠약한 몸을 쉬는 일 없이 1625 4 27일.

 향년 73세로 하기 성[萩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옛 텐쥬 원[天樹院]에 있는 테루모토 부부의 묘 - 하기 시[萩市]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1석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약 150Kg. 즉 1만석이면 쌀 1500톤. [본문으로]
  3.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 때 서군이던 모우리 가문을 혼란에 빠뜨려 전후 감봉으로 몰아 넣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의 아들. [본문으로]
  5.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궁중 의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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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정권탄생  (4) 2006.12.04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571 6 14일 병사(病死) 75


1497 ~ 1571.

아키[安芸]의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원래는 지방 호족(国人)으로, 오오우치 씨[氏]신종(臣從)하였지만,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 스오우[周防],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이와미[石見]를 평정(平定).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씨[尼子氏]를 멸망시켜 츄우고쿠[国] 지방 10개 국을 지배. 큐우슈우[九州]에서 오오토모 씨[大友氏]와도 싸웠다.






진두(陣頭)에 선 노장(老將)


 모우리 모토나리가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가독을 큰 아들인 타카모토[隆元]에게 물려주고 은거한 것은 오오우치 씨()를 멸망시킨 1557년으로 그의 나이 60세일 때였다. 그 이후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문서에는 타카모토의 후견인이라는 입장으로 서명(署名)을 함께 쓰게 되었다.


 그러나 들불처럼 영지를 넓혀가 아키[安芸], 빈고[備後],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의 맹주(盟主[각주:1])가 된 모우리 일족이다. 그로 인해 타카모토에게는 자신이 그것을 지키기엔 부담이 크다며 아비 모토나리의 편안한 은퇴 생활을 허용할 턱이 없었다. 정신차려 보니 은거는 커녕 타카모토의 책략에 말려들어 그 후에도 여전히 진두에 서서 전장(戰場)을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의 은거 선언


 이 상태로는 모우리 가문융성(隆盛)은 전적으로 자기 혼자만의 위업이라고 인식되어, 세간에는 가독을 이은 타카모토의 위엄이 서질 않게 된다. 상대 성을 탈취하는 데는 쿠니[国]와 구니[国]간에 정신적인 우열이 크게 좌우한다.

 타카모토도 이제는 35. 지금 모우리 가문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보는 타카모토의 두령(頭領)으로서의 위엄이다. 모토나리는 굴지의 지장(智將)으로 물러날 때를 판단할 수 있는 위대한 현자(賢者)이다. 물러날 때는 지금밖에 없다. 더군다나 조금씩 피로도 느끼기 시작했다. 아키[安芸] 사토우[佐東]에라도 은거시켜 달라는 말을 꺼내 보자[毛利家文書]


 이제는 완전히 쉬고 싶다는 이야기는 카츠라 모토타다[桂 元忠]에서 타카모토에게 전해졌다.

 타카모토는 깜짝 놀라, 그거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고 침을 튀기며 되받아 쳤다. 우선 문서로 동생들이며 모우리 양천[毛利 [각주:2]]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에게 모토나리 은거 반대 의사를 전하고 이어서 모토나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


 (타카모토)에게 모우리 가문을 짊어질 만한 역량 따위 있을 턱이 없으며 아버지가 은거하신다면 저 또한 함께 은거하겠습니다. 아키[安芸]와 빈고[備後]만으로도 어깨가 무거운데 거기에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라면 더 이상 무리입니다. 부친이란 살아 있을 때는 자식의 뒤를 돌봐주어야만 하며,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도 두령(頭領)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만약 될 수 있다면 저도 은거해서는 코우츠루마루[幸鶴丸=테루모토(輝元), 5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싶습니다[毛利家文書]"


 그러나 모토나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타카모토의 애절한 바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타카모토는 최후의 결의문을 보냈다.


 아버님이 그렇게까지 은거를 하시고자 한다면 저 타카모토는 한 가지 결심을 하겠습니다. 즉 제가 죽으면 아버님도 은거하여 편안히 살고 싶다는 말씀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은거하시지 않고 가문을 다시리실 테니 모우리 가도 무너질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모토나리라도 은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타카모토가 단순히 제멋대로인 아들이었는지, 부친을 뛰어 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국 모토나리는 '마음은 은거, 몸은 현역'이라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거 소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채 스에 씨[氏] 잔당(殘黨)을 진압. 그 후에도 쉴 틈 없이 이즈모[出雲], 이와미[石見], 빗츄우[備中], 분고[豊後], 부젠[豊前], 치쿠젠[筑前] 등에서 모우리 일족(一族)분전(奮戰)이 계속 되었다.


 1563 8 3.

 타카모토는 모토나리에게 원군을 요청받아 이즈모[出雲]로 향했다. 도중에 빈고[備後]의 와치 사네하루[和智 誠春]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타카모토는 그 날 밤부터 격심한 복통(腹痛)이 찾아와 다음 날 아침 죽었다(향년 41).


 모토나리는 와치 씨가 타카모토를 암살한 것이라 의심하여 6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와치 씨와 관계가 있던 아카가와 모토야스[赤川 元保] 일족의 뿌리를 뽑고 결국에는 와치 사네하루를 죽였버렸다. 그러나 후에 아카가와의 무죄가 판명되어 모토나리는 크게 후회했다.


 이제는 어린 손자인 테루모토[輝元]의 뒤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어 은거는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모우리의 안태(安泰)를 기원하며


 이 즈음 사방에서 영토 침입의 위협이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북으로는 이즈모[出雲]의 아마고 요시히사[尼子 義久[각주:3]].

 동으로는 비젠[備前]의 우라카미 무네카게[浦上 宗景].

 서로는 분고[豊後]오오토모 요시시게[大友 義[각주:4]].

 남으로는 이요[伊予] 노시마 수군[能島水軍]무라카미 타케요시[村上 武吉] 등이었다.


 모토나리는 건강에 대해서는 남보다 배는 더 신경을 쓰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1566년 결국 간헐적으로 발병하는 학질에 걸려, 재발이 계속 이어지던 1571 6 14일.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죽었다.

 향년 75.

 

묘소(墓所)는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의 토우슌 사[洞春寺]터에 있는데, 진기하게도 야마구치 현[山口県] 슈우난 시[周南市] 미츠오[三丘] '모토나리 이빨 사당[元就歯廟]'이 있다.

 이것은 미츠오 성주(城主)였던 모토나리의 7번째 아들인 아마노 모토마사[天野 元政] 부적으로 가지고 있던 모토나리의 이빨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1. 모우리 씨(氏)는 지방 호족 연맹의 맹주 격이었다. 즉 지방 호족들은 신하라기 보다는 대등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모토나리가 구축한 모우리 가문의 군사-정치 조직. 모토나리의 둘째와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킷카와나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카와(川)라는 글자가 들어갔기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3.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증손자. 아마고 씨(氏)는 요시히사 대(代)에 망했다. [본문으로]
  4.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을 말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