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말하는데 있어 그의 부인인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를 빼놓을 수 없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셋째 딸로 이름은 타마[玉], 절세의 미녀였다. 타다오키는 이 가라샤에 관계된 일이라면 질투심이 특히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정원사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가라샤에게 계절이 어떠네 날씨가 어떠네하며 인사를 했다고 한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는데도 타다오키는 이 정원사를 직접 칼을 뽑아 죽였다.

 부친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에게 물려받은 재능으로 각종 예도[藝道]에도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트 디자이너적인 재능이 풍부하였던 듯 자기 부인의 옷도 스스로 옷감을 고르고, 색이나 모양까지 디자인했다고 한다. 갑주(甲胄)나 갑옷에 걸쳐 입는 동의(胴衣), 큰칼[太刀]의 디자인 등도 직접 고안하였고, 다른 다이묘우[大名]에게서도 의뢰 받아 투구 등을 만들었다.
 어느 날 의뢰 받아 제작한 투구의 뿔을 진짜 물소의 뿔이 아닌 가벼운 오동나무로 만든 적이 있었다. 의뢰한 다이묘우가 완성품을 보고 이래서는 부러지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자, 타다오키는 “투구의 뿔이 부러질 정도로 활약하는 것이야말로 무사의 본분일 것이오”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질투 심한 격정(激情)인 성격이 플러스로 작용하여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활약을 하였다.
 1577년 10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장남 노부타다[信忠]를 따라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의 속성 카타오카 성[片岡城]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15세에 선두에 서서 분전하여 수급을 베었지만, 이때 돌에 머리를 맞아 상처가 나 늙어서도 그 상처자국이 지워지질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는 노부나가에게서 자필 표창장[感状][각주:1] 를 받았다.[각주:2]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전인 같은 해 3월의 사이가 정벌[雑賀征伐] 때는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혈기에 날뛰어 명성이 자자하던 사이가의 철포대에게 돌격하려 한 것이다. 적들이 총을 쏘고 난 간격에 맞추어 돌진하려다 부하가 막은 덕분에 탄환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했다. 이때의 경험이 머리에 새겨졌는지 노년(老年)에 들어서도 자주 입에 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구요]

그런 용맹한 활약들이 노부나가를 흡족하게 하여 노부나가는 타다오키를 시동[小姓]으로 삼았다. 유명한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문장(家紋)이 구여(九曜)로 정해진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노부나가의 칼을 받들고 있던 타다오키가 그 칼의 칼자루에 새겨져 있던
구요의 장식에 반하여 곧바로 이를 자신이 입는 옷에 새겨 입자 이를 본 노부나가가 “멋진 문양이구나”고 칭찬한 것이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부친 유우사이[幽斎]까지 호소카와 가문의 문장은 오동나무[桐] 혹은 ‘원 안에 두 줄[二つ引両]'였지만 타다오키의 대가 되어 구요의 문장으로 바뀌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타마(후의 가라샤)와 결혼한 것은 1578년의 일로 타다오키 16세였다.
 그러나 이 결혼이 1582년 호소카와 가문에 생각하지도 못했던 위기를 가져다 주게 된다. 이해의 6월 부인 가라샤의 부친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우 사[本能寺]에 머물던 주군 노부나가를 죽이고, 호소카와 부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야말로 호소카와 가문은 운명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타다오키의 부친 유우사이는 노부나가를 죽인 미츠히데의 천하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때까지 친구였던 미츠히데의 권유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인 타다오키와 함께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하였다[각주:3].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아케치 토벌전인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가 시작되자, 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미츠히데의 영지인 탄바[丹波]에 침공, 성 2개를 공략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더구나 미츠히데의 딸인 가라샤를 탄고[丹後]의 미토노[味土野]의 산속에 유폐하여 미츠히데와 연을 끊었다는 것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렇게 노력한 것이 효과를 보아 호소카와 부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요시에게서 탄고 영유를 그대로 인정받는 서장을 얻었고 가라샤 부인의 유폐도 풀리게 되었다[각주:4].

 그 후 타다오키는 히데요시의 천하평정 전쟁에 참가하여 유우사이와 함께 히데요시 정권하에서 확고한 지위를 쌓아가지만 1595년에 큰 재난에 휩싸이게 된다. 관백(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실각사건이 그것이다.
 히데츠구는 잔혹한 행동 때문에 할복을 명령 받고 그의 처첩, 가신들까지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하였는데, 그 중에 타다오키의 인척이 있었다. 타지마[但馬] 이즈시[出石]의 영주 마에노 나가야스[前野 長康]의 아들 나가시게[長重]의 부인이 타다오키의 장녀였던 것이다. 더구나 운 나쁘게도 타다오키는 히데츠구에게서 황금 100매를 빌리고 있었다. [각주:5] 그러한 일로 타다오키 역시 히데츠구의 일당이 아닌가 하는 혐의가 받게 된 것이다.

 타다오키는 곧바로 근신을 명령 받았다. 히데요시 측근의 말에 따르면, 오봉행(五奉行)[각주:6]의 의향은 타다오키를 할복시키려는 의향이라고 하였다.
 타다오키는 분노했다. 이는 평소부터 사이가 나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讒言)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락호락 누명을 쓰고 죽을 바에는 미츠나리를 죽이고 후시미[伏見][각주:7]에 불을 질러 화려하게 끝을 장식하겠다”
 고까지 생각하였다. 아예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려고 여러 준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열심히 변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히데요시는 딸을 인질로 바칠 것, 히데츠구에게 빌린 황금 100매를 반납할 것을 조건으로 타다오키의 결백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타다츠구에게는 당장 황금 100매라는 거금이 없었다. 온갖 방법을 쓴 끝에 겨우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빌려 반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은의(恩義)로 인해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와 친교를 맺기 시작하여 히데요시가 죽은 뒤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차츰 토쿠가와 측이라는 자세를 확실히 나타내게 된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정한 법도를 계속해서 어겨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이시다 미츠나리 등 사대로(四大老), 오봉행(五奉行)들과 험악한 대립관계에 들어갔다.
 타다오키는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인척관계였다. 적자 타다타카[忠隆]의 부인이 토시이에의 딸이었던 것이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 대한 은의와 토시이에와의 인척관계 사이에 끼어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타다오키와 친한 토시이에의 장남 토시나가[利長]가 타다오키에게 놀랄만한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이에야스 암살계획이었다. 타다오키는 기겁했다. 그것은 마에다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시나가를 설득하여 함께 토시이에를 만나 이에야스와의 화해를 권고하자, 토시이에는 오히려 바닥을 내려치고 격노하면서 이에야스의 약속위반을 하나하나씩 거론하였다. “이래서는 히데요리[秀頼]공에게 해가 될 뿐.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에야스를 죽이고 말겠다!”고 외쳤다.
 타다오키는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겨우 토시이에가 재고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토시이에는 타다오키에게 이에야스와 화해하는데 중개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 후 타다오키는 이에야스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에야스도 깜짝 놀라며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타다오키의 노력으로 인하여 양자는 화해하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토시이에가 죽자 타다오키를 포함한 무공파 장수들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계획하여 미츠나리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야스에게 은퇴 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이번엔 타다오키가 새빨간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마에다 토시나가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가 공모하여 이에야스의 암살계획을 세웠고, 타다오키도 토시나가와 인척관계인 만큼 여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였다.
 놀란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곧바로 부친 유우사이와 타다오키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겠다는 맹약서를 이에야스에게 제출하였고, 이에야스의 요구대로 마에다 가문과의 인척관계를 끊고 에도[江戸]에 셋째 아들인 타다토시[忠利]를 인질로 보냈다[각주:8]. 즉 호소카와 가문은 이걸로 완전히 이에야스에게 복종을 맹세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 정벌[会津征伐][각주:9]에 참가하는데, 그가 출진한 사이 오오사카[大坂]의 저택에서 가라샤 부인이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은 거병하자 오오사카에 있던 동군(東軍) 무장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잡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라샤 부인은 용감히 이를 거부하고 가노(家老)에게 자신을 찌르게 하여 마지막을 장식하고 화약에 불을 붙여 저택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였던 가라샤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기에 그러한 수단을 취한 것이다.

 타다오키는 부친 유우사이에 뒤지지 않는 굴지의 다인(茶人)으로 또한 그런 방면의 서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1563년 나가오카 후지타카[長岡 藤孝=유우사이[幽斎]]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칭 요우이치로우[与一郎]. 호는 산사이[三斎]. 탄고[丹後] 미야즈[宮津] 성주. 임진왜란 때는 2년 동안 재진하였고, 진주성(晋州城) 공격에도 참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豊前] 코쿠라[小倉]에 봉해졌다. 1632년 아들 타다토시[忠利] 때 히고[肥後] 55만석으로 전봉되었다. 센노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0]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1645년 12월 2일 죽었다. 83세.

  1.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는 노부나가의 거의 유일한 자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었는지 전해준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도 ‘이 표창장은 노부나가님이 직접 쓰신 거임’이라고 첨부한 편지에 쓸 정도였다. [본문으로]
  2. 표창장을 받은 이유는, 타다오키가 그의 동생 호소카와 오키모토[細川 興元]와 함께 카타오카 성을 가장 먼저 침입해 들어갔다[一番乗り]. [본문으로]
  3. 타다오키의 경우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었던 듯, 죽을 때까지 매달(!) 노부나가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챙겼다 한다. [본문으로]
  4. 그러나 그녀는 이때 받은 타다오키에 대한 불신감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당시에는 이렇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빌린 사람을 자기 부하로 만들거나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한다. 히데요시의 동생 히데나가[秀長]도 다른 다이묘우들에게 돈을 마구 빌려주어 형인 히데요시를 화나게 한 적도 있다 한다. 즉 현대의 감각처럼 단지 돈을 빌려주고 빌렸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다. 타다오키가 히데츠구와 주종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6.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를 지칭. [본문으로]
  7. 히데요시가 쥬라쿠다이[聚楽第]를 히데츠구에게 물려주고 은거해 있던 곳. [본문으로]
  8. 타다토시는 인질로 에도[江戸]에 가서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은 덕분에 후에 폐적된 첫째 형과 둘째 형을 제치고 타다오키의 세자가 된다. [본문으로]
  9.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상경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복하고 그렇게 꼬우면 현피뜨자는 편지까지 받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정벌하려 감. [본문으로]
  10.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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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동희 2010.10.07 1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사에서 이래 저래 요리 조리 잘 빠져 나가서 성공한 인물 중 하나죠
    다다오끼는 전공도 많이 세우고, 큰 영지로 얻고, 오래 살기도 하고 재주도 많고
    암튼 여러가지로 다재 다능 했던 인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다오끼의 성공은 대부분 그 아버지(후지타카)의 은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다오끼야 말년에 뭐 지가 전국의 난세을 헤쳐 나온 불세출의 인물이라고 생각 했겠지만
    그래도 쇼군 업고 이찌노다니에서 빠져나와 노부나가를 의지하게 한 후지타카에 비할까 싶습니다
    이른바 양조택목(良鳥擇木)이 전국시대에서는 제 일의 덕목이라 생각하는데
    후지타카가 그걸 참 잘 했죠(그닥 비굴하지 않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정동희님. ^^

      제가 가진 이미지도 비슷합니다.

      다만 세키가하라 즈음부터는 타다오키의 의견이 아비의 그것보다 더 중했던 듯 싶습니다.

      확실히 타다오키가 아비만 못한 듯 합니다만, 이런 무장의 일화를 소개하는 책들에 부자(父子) 이대가 한 꺼번에 실린 것을 보면 타다오키도 부친의 그늘에 가려지기만 할 정도는 아닌 듯 합니다.

      참 타다오키에 관해서 이 글도 함 보시길.

      http://blog.naver.com/nagoomo/140056207097

      타다오키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 같더군요.

  2. 정동희 2010.10.07 1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가 히데쓰꾸 실각에 얽혀서 그렇게 고생한 줄은 저도 처음 알았네요
    이에야스 암살 건은 이에야쓰가 충성 맹세 하라고 얽은 느낌이 드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땐 그렇게 돈을 빌려 준 뒤 고리로 매달 이자를 받았다고 하더군요(예나 지금이나 돈으로 묶이면 아무래도 따를 수 밖에 없는지라). 히데츠구 실각에는 그런 고리대금에 관한 문제도 있었던 듯 합니다.

      아사노 나가마사와 토시나가, 타다츠구는 말씀하신대로 이에야스의 책략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표는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었다곤 해도 여전히 No.2였던 마에다 가문으로 흔들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 정동희 2010.10.08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사노나 마에다는 도요토미에 정말 큰 은혜를 입은
      가문인데요...
      그럼에도 그렇게 쉽게 이에야쓰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솔직히 나머지 도요토미계 다이묘들이 이에야쓰에게 붙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
      결국 미쓰나리만 동분서주...
      요시쓰구는 친구 따라 저승 갔고
      모리, 우에스키는 나름 야심을 품다 망했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대세'란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한번 휩쓸리면 다시 되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요.

  3. 정동희 2010.10.07 1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다나베성 건은 저도 전에 읽어 봤는데요
    그걸 읽으면서도 역시 다다오끼는 좀 과격하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뭐 조선 가서 고생도 하고 나름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긴 했지만
    여러가지로 후지타카의 노련함에는 못 미치는 인물이 아닌가...
    그래도 뭐 결국 이에야쓰한테 고개 숙이고 잘 살았으니 성공한 인생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7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여담으로...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라는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가 주인공인 만화에서 타다오키는 후지타카의 1/10에도 못 미치는 인물로 그려지더군요. 뜬금없는 짓을 벌이다 아비에게 뒷목을 맞고 기절하여 끌려가는 역으로 나옵죠. ^^
      (참고로 후지타카는 그의 후손인 전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 護煕]의 얼굴로 그려져 있습죠)

    • 정동희 2010.10.08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소카와 가문이 막말까지 아주 잘 살았죠
      사실 호소카와번은 무로마치 시대의 간레이 호소카와 하고는 상당히 먼~~~ 호소카와인데... 어쨌든 전국난세를 거쳐 명문 호소카와의 대표 주자가 됐으니 참...
      호소카와 총리가 기자 출신인데 특종을 그렇게 잘 잡았답니다 이유인 즉슨... 당시 경시총감인가 암튼 경찰 고위직이 호소카와 가문의 하급 무사 집안이었다네요
      (새 모이 주는 무사...)
      암튼 그래서 옛 주군가를 섬기는 마음으로 모리히로에게 특종을 많이 줬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리히로 총리의 기자시절 에피소드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

      요즘 한국에 그런 일이 있었음..
      '막부가 없어졌는데도 아직도 주종 운운하는 더러운 세상~'....했을지도.

  4. jane 2010.10.08 0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다오키 저 친구 그래도 전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 다재다능하고 성격도 불 같고 의외로 순정-_-파고...

  5. Gyuiphi IV 2010.10.08 1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센덕후 열이 좀 식은 지금에 와서 다시 보자면 공과를 떠나서 이사람 성격 자체는 센고쿠에서나 먹힐만한 성격이지 지금 생각하면 막장에 다름아니다 싶긴 하더군요.

    뭐 교양인에 용맹했고 대세를 파악하는 눈도 뛰어났던건 재능이긴 합니다만 그 외의 부분에서(-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8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시대가 다르다 보니.. ^^

      사족으로 시이나 타카시[椎名 高志]의 만화 "미스터 지팡구"에서 노부나가는 어느 상인을 베어 죽인 후 히데요시에게,
      "지금은 봉건시대고 나는 전제군주다. 틀렸음 '아~ 미안'하면 될 일이야"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뜻이었을 듯)

      뭐 비슷한 일들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랫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지금과 비교하면 막장이지만 당시는 그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였으니까요.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부하들은 수틀리면 칼 뽑아 칼질하는 나오마사[별명:人斬り兵部!!] 때문에 출사하기 전에 조상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설 정도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비단 타다오키만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는 이름을 후지타카(藤孝)라고 한다. 센고쿠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단정지어도 좋다. 고전(古典)을 산죠우니시 사네에다(三西 枝)와 쿠죠우 타네미치(九 種道)에게 배워 고금전수(古今授), 중세 시학(歌) 등을 집대성하였다.

 태어나 자란 환경이 좋았다. 모친은 역사상 굴지의 석학 키요하라 노부카타(原 宣賢)의 딸로, 표면적인 부친으로는 미츠부치 하루카즈(三淵 晴員)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12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 義晴)라고 한다. 쇼우군이 코노에 히사미치(近衛 尚通)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기에 이미 요시하루의 애를 배고 있던 모친은 미츠부치 가문에 하사된 것이다.

 후지타카는 미츠부치 가문(三淵家)에서 태어났지만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의 양자가 된다[각주:1]. 자란 것은 모친의 친정 키요하라 가문으로 거기서 후년의 와카(和歌), 문학적 소양 등을 기초를 길렀을 터인데 달리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후지타카가 시에 눈을 뜬 것은 어느 전투에서 함께 있던 무사가 옛 시(古歌)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적을 쫓다가 도중에 놓쳐서 포기하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이 무사가,

당신은 아직 멀리 안 갔을 거요 내 옷깃에,
눈물도 아직 식지 않았으니
君はまだ遠くは行かじ我袖の、
も未だ冷かならねば
라는 옛 시를 읊으며 적이 타다 버린 말을 조사한 것이다. 안장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 무사는 적이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한 증거라고 후지타카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말을 듣고 더 추격해서 적병의 모습을 발견하여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후지타카는 시에 뜻을 두었고 후에 결국 달인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지타카가 처음으로 섬긴 주군은 13대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후지(足利 義藤[각주:2]=후에 요시테루(義輝)이다. 13살 때였다. 아시카가 바쿠후의 쇠망기로 1554년에는 쇼우군 요시테루 자신이 미요시 쵸우케이(三好 長慶)에게 쫓겨나 오우미(近江) 쿠츠키(朽木)로 도망쳤다. 이때 후지타카도 그를 따르며 쓴맛을 맛보았다. 이 쿠츠키 계곡(朽木谷)에서 후지타카는 책을 읽기 위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어 가까운 신사(神社)의 등불에서 기름을 훔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68년 이 요시테루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와 미요시 일당에게 살해당했을 때는 영지(領地)인 야마시로(山城) 쇼우류우지 성(勝寺城)에 있었기에 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가 32살이었다. 이때부터 고난의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요시테루의 동생으로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사(寺) 이치죠우(一)원(院)의 몬제키(門跡)였던 카구케이(慶=후에 요시아키(義昭))를 옹립하여 쇼우군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사이를 돌아다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만나 요시아키를 15대 쇼우군 자리에 앉히는 것에 성공한다. 이때 후지타카는 노부나가에게 야마시로 나가오카(長岡)를 하사 받아 성(姓)을 '나가오카'로 바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타카는 쇼우군 요시아키에게 불신감을 품기 시작한다. 노부나가의 괴뢰에 지나지 않는 쇼우군 자리가 불만인 요시아키는 은밀히 반오다(反織田) 세력과 손을 잡았고 결국에는 모반까지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후지타카의 날카로운 정치적 감이 빛난다. '요시아키는 망하고 천하는 노부나가의 것이 된다' - 후지타카는 그리 확신하여 요시아키가 모반을 꾀한다는 사실을 예전 함께 요시아키를 섬겼고 지금은 양다리로 노부나가까지 모시고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전하여 노부나가 측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1582년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일어났을 때도 이 정치적 감이 빛을 발한다.
 그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츠히데의 능력으로는 천하를 유지시킬 수 없을 거라 판단하였다. 이 때문에 평생의 친구인 미츠히데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때 미츠히데의 딸 타마(たま=가라샤(ガラシャ))를 부인으로 둔 아들 타다오키(忠興)에게,
 "나는 노부나가의 은혜를 입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그러나 너는 미츠히데와 사위-장인이라는 사이. 아케치에게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너의 마음대로 하여라"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결국 타다오키도 부친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밀고 노부나가에 대한 조의를 표해 미츠히데의 요청을 물리쳤다.

 머리를 민 후지타카는 가독을 타다오키에게 물려주고 자신 본래의 문화인적인 특질을 발휘하게 된다. 유우사이(幽)라는 호는 이 시점에서의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유우사이는 항복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를 위해 따스한 온정을 베풀었다.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쳐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亀寿)를 유우사이가 노력하여 가족들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유우사이와 요시히사가 귀여운 딸에 관한 시를 지어 서로 받고 보낸다는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가 그 모습에 감동하여 카메쥬를 인질인 신분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히데요시의 황금시대. 고전파 지식인으로서 유우사이는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새로 지은 쥬라쿠테이(聚
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의 행행(行幸)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전년도의 키타노 대다회(北野大茶)와 마찬가지로 토요토미 정권의 여러 다이묘우들에 대한 거대 정치 이벤트였다. 유우사이는 이때 와카(和歌)의 자리에서 조정의 예법에 맞추어 예식을 거행하고 대표로서 와카 몇 수를 헌상하는 등 고전의 교양 없이는 불가능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런 행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유우사이 자신은 그런 화려함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소 그는 어디까지나 옛 전통에 따라 의상 같은 것도 검은색 일색이었다고 한다.

 유우사이의 고전에 대한 조예는 전쟁에서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
 천하가 둘로 나뉜 세키가하라(
ヶ原) 때의 일이다. 아들인 타다오키는 이에야스를 따라 칸토우(東)로 내려가 있었기에 아들을 대신해서 탄고(丹後) 타나베 성(田城)에서 농성전을 치르게 된다. 후쿠치야마(福知山)성주 오노기 누이노스케(小野木 縫殿助)를 시작으로 한 1만5천여의 서군이 포위한 타나베 성에는 불과 500여의 수비병밖에 없어 낙성은 시간문제라 여겨졌다. 유우사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유우사이가 죽게 됨으로써 옛 것들이 끊기는 것을 안타까워해 유우사이에게 개성을 권한 것이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이를 정중히 거절. 다만 고금전수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기에 이들 전부를 텐노우(天皇)의 동생 하치죠우노미야 토모히토(八宮 智仁)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조정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텐노우의 칙령으로 서군에게 타나베 성의 포위를 풀게 하였고 대신 유우사이는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山城)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말년의 유우사이는 쿄우토 닌나(仁和)사() 주변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호소카와 유사이(細川 幽斎)]
1534년생.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가 된다. 효우부다이후(兵部大輔)에 서임받았다. 처음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에 속해있었지만 1573년 오다 노부나가로 말을 갈아타 1580년 탄고(丹後)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 후에 가문을 타다오키(忠興)에게 물려주었고 1589년 타다오키의 영지(領地)와는 별도로 미야즈 성(宮津城) 4만석을 받는다. 1610년 8월 20일 77살로 죽었다.

  1. 유우사이의 부친 미츠부치 하루카즈는 호소카와 가문의 서류 이즈미 슈고가문(和泉守護家) 출신으로, 하루카즈의 모친의 친정인 미츠부치 가문에 아들이 끊겼기에 양자로 들어갔으며, 유우사이는 다시 후계자가 없던 큰아버지 호소카와 모토츠네(細川 元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본문으로]
  2.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의 '후지'는 이 요시테루의 전 이름의 글자를 하사받은 것(一字拝領)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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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2.04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킨텐슈 그러니 처음 산죠니시 사네에다를 봤을때, 에? 산죠 니시사네에다 아닌가?..로 착각했던 추억이 떠오르는군요; 산죠니시라는 성이 따로 있을줄이야(;)

    닌나지는 쿄토에 갔을때 스쳐 지나갔었습니다만.. 하긴, 쿄토의 버스 정류소는 죄다 절이름 투성이니(;)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역사적으로 공부할만한 사적이 많다는 증거이겠죠. (이름 있는 유적만 가더라도 이틀씩이나 걸리는 쿄토니;) 개인적으로는 아쉽습니다만 뭐 나고야가 싸니; 음, 아시가루는 싼맛에 쓰는 것 처럼 역시 싼게 좋은게죠(머엉;)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7 20: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성 읽기 어렵죠... 위키는 그런 면에서 정말 좋습니다.

      일본 개그맨 하나와의 "SAGA"라는 노래를 보면 사가현(佐賀県) 지역은 버스정류장이 "**씨 집 앞"...이라고 하더군요...^^

      천하인을 둘이나 배출한 지역!!!
      어디든 근성만 있으면 됩니다. 멋진 근성 발휘를 기대하겠습니다.

  2. 朴先生 2009.04.13 1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덕후는 아니지만 왠지... 古今傳授어택을 시전하는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모습이
    G건담의 도몬이 샤이닝 핑거를 쓸 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군요

    "나의 고전이 빛나며 울부짓는다! 포위를 풀라고 찬란하게 외친다! 必殺!! 고오그으으음저어언수우우우어태에에엑!!!"

    결론은... 아무튼 이래서 인문학이 완전히 쓸모없진 않나보다라는 겁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08 11: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건담G무투전을 아시면 훌륭한 건덕후십니다.
      (저는 아무로 팬이라 아무로 나오는 건담만 보고 그 이후는 아예 무시하는 편입죠)

      예전에 소문으론 저 성우가 용산인지에 나타나 저 대사를 외치자 덕후들이 따라 외쳤다는 전설이 있던데...

      유우사이야 잘 하니까 그랬겠죠... 어중간 했으면 그냥 戰死!...였지 않을까요.

五.

 이 1586년 12월에 칸파쿠(関白) 히데요시는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하사 받음으로써 타이라 씨(平氏), 미나모토 씨(源氏), 후지와라 씨(藤原氏)라는 고귀한 성(姓)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본 귀족으로서의 위치와 체면을 확립하였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궁중에서의 예식이나 축하연회 등으로 쿠게(公家) 사회에서의 사교로 매우 바빴다. 쿄우(京)에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주거하고 있었다. 쥬라쿠테이는 이 해의 2월에 완공되었고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와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2])도 불려와 그대로 쿄우(京)에 있었다.


 오오사카(大坂)에는 챠챠(茶々)가 있었다. 챠챠에게는 토요토미 가문 일족의 쿠게(公家) 사교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입으로 쥬라쿠테이의 화려함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 한번 보고 싶구나
 하고 유모에게도 말하였지만 이것만은 유모도 어찌 해 줄 수 없었다. 쥬라쿠테이는 친왕, 상급귀족(公卿), 몬제키(門跡[각주:3]) 그리고 위계가 높은 무장들의 사교 장소이기에 아무런 위계도 가지지 못한 몰락 다이묘우(大名)의 고아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정말 화려하겠구나”

 챠챠는 동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위계를 가지고 계신가?”

 “칸파쿠의 부인이시니까요.”

 여성이면서 종이위(從二位)였다. 다이나곤(大納言) 등보다도 상석이었다.

 굉장히 화려할 것이다. 챠챠는 쿄우(京)의 번화함을 상상하였다.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피여서는 저마다의 미를 자랑하는 화원을 연상했다. 쥬라쿠테이 주변에는 끊이지 않고 음악이 울려 퍼지며 시회(詩會)나 다회(茶會)가 열리고 항상 그 중심에 히데요시와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갑자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내려왔다. 성안은 북새통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챠챠의 유모를 불렀다. 유모는 서둘러 수 많은 복도와 복도를 가로질렀다. 히데요시는 이외로 혼자 있었다.

 “여어~”

 하고 히데요시는 유모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쓰윽 쓰다듬었다. 식초라도 마신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더구나 쪽팔리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알겠나? 이 얼굴”

 히데요시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도 보지 않고 아는 것 같았다. 이 얼굴을 보아라, 이 얼굴로 추측하라, 쪽 팔려서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 – 고 말했다. 유모는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유모는 이해했다. 챠챠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답답하여 참지 못하고 이렇게 오오사카로 돌아왔네. 알겠나? 내일은 쿄우(京)로 돌아간다”

 ‘내일은 쿄우에?’
 그렇다면 오늘 밤만이 기회였다. 이렇게 경황없는 명령이라니……

 “허락하마. 그 편지상자를 열어보아라”

 히데요시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유모는 눈 앞에 편지상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송해하며 그것을 열어 안에서의 한 장의 시가 적힌 종이를 꺼냈다. 놀랍게도 연애시였다. 히데요시는 요즘 시에 열심으로 또한 현실적인 필요로 인해 쿠게(公家)의 습관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모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애에 대해서까지 쿠게(公家) 풍으로 흉내 내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사람을 꼬시는 데 있어서의 천재가 챠챠에게만은 이렇게 고풍스런 수단을 이용함으로써 챠챠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익살꾼의 단순한 장난인가?

함께 자고픈 마음이 오오사카에 다녀온 듯하다
팔베개하며 꾼 오늘 밤의 꿈.
想い寝の心や御津に通ふらむ
今宵逢ひみる手まくらの夢

 음률도 갖추어져 있었다. 히데요시 시의 첨삭은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가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시도 그런 것일까?

 “내가 만든 시다”

 히데요시는 일부러 말했다. 유모는 황송해하며 그것을 편지상자 집어넣어 뚜껑을 덮고 보라색 끈을 묶어 머리 위로 공손히 들어올렸다.

 “오늘 밤 술시(밤 여덟 시)에 건너가겠다. 이불에 있으라고 하라, 누워 있으라고 전해라”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이런 것은 쿠게(公家) 풍이라기 보다는 말 위에서 천하를 획득한 무사 정권의 우두머리다웠다.
 유모는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불러 멈추게 하고는 시동(児小姓)을 불렀다. 시동은 흰 나무로 된 작은 상을 머리 위로 받쳐들고 와서는 유모 앞에 내려 놓았다. 하사품이었다. 더구나 황금이었다. 유모는 물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모는 히데요시의 방에서 나와 긴 복도를 건너면서 생각하였다.
 ‘전하는 3년이나 공들이셨다’
 라는 실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유모도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좋은 도우미가 되어 있었다. 다른 오우미 사람(近江人) – 예를 들어 이시다 지부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등에게서도 유모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어서 와야 함에 대해 음습한 기대가 담긴 말로 들은 적도 있었다. 어쨌든 챠챠가 가지고 있는 히데요시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도록 얼마나 신경을 쓰며 얼마나 손을 써 왔는지 몰랐다. 그것은 우선 성공하였다. 유모에게 있어 적어도 운이 좋았던 것이 챠챠는 그녀의 모친인 오이치(お市)처럼 도리가 명쾌한 뚜렷한 성격이 아닌 감정적으로 무엇이든 그렇게만 사물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점에서 유모는 제대로 처리해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이기에 막상 그 때가 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해’
 유모는 혼잣말하며 스스로를 고무하였다. 그것이 결국 챠챠에 대한 충성이 되는 것이며, 결코 꿈에서라도 – 챠챠를 황금에 판 것은 아닌 것이다.

 이날 밤.
 술시. 히데요시는 챠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에 있어라, 누워 있으라고 유모에게 명령해 두었는데도 챠챠는 옷을 입은 채 촛대에 둘러싸여 앉아있었다.

 “여어~ 이 향은?”

 하고 히데요시는 순간적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자신을 쪽팔림에서 건져 올리려 하였다. 방에는 향이 피워지고 있었다. 향이 피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히데요시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향은 여러 종류가 섞인 혼합 향(組香)인 듯 했다. 그런 쪽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코로 하나하나 맞출 수 있다.

 “향의 이름은 무엇인고?”

 히데요시는 턱을 들어 콧구멍을 벌름거렸지만 이제 막 쿠게(公家) 문화를 배우기 시작한 히데요시가 맞추기에는 무리였다.

 “어린 나물(若菜)의 향이옵니다”

 하고 챠챠는 희미하게 듣기도 힘들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답하였지만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 눈은 거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 챠챠는 히데요시에 대해서 그다지 예의가 바르지 못하였고 때때로 존대하기까지 하였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허용했다. 챠챠에 한해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만났을 때부터 계속 그런 태도를 허용해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남성이건 여성이건 히데요시는 그런 태도를 허용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없었다.
 히데요시의 측실은 많았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방계 출신인 히메지도노(姫路殿),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명문가인 쿄우고쿠 씨(京極氏) 출신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여동생 산죠우노츠보네(三条局) 등 많은 명문가 출신들이 있었지만 모두 히데요시 앞에서는 숨죽이고 그의 심기를 민감하게 살피며 열심히 섬겼다. 히데요시도 역시 그녀들에게 상냥하였으며 오히려 너무 상냥할 정도였다. 그녀들 또한 히데요시의 그런 상냥함에 감동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섬겼다. 하지만 이 챠챠만은 달랐다. 그 제멋대로인 성격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 같았지만 히데요시 만큼이나 사람의 심성에 대해 정통한 사람도 그리 생각하지는 못하고 이 아가씨는 자신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어딘가에 항상 품고서는 계속 원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반해있었던 것이다. 그 반해있음이 히데요시의 태도를 약하게 하였다.

 “이 향은 히메가 피운 것인가?”

 하고 히데요시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 말했다.

 “아니요”

 하고 챠챠는 말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챠챠라는 아가씨에게는 혼합 향을 조화시킬 수 있는 듯한 재주가 없었다. 이는 유모가 피웠다. 피웠을 뿐만 아니라, 아씨 잊지 마시옵소서. 이 혼합 향은 ‘어린 나물’이라고 하옵니다. 어린 나물이옵니다. 이와 연관된 옛 시(古歌)는 이것과 이것입니다, 하고 쪽지에 적어서는 하나하나 가르쳐갔다. 그랬을 뿐인 장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오해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것은 챠챠의 겸손함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 교양의 깊음에 탄복하였다. 이런 점 -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향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른단다. 이 봄나물에는 어떠한 옛 시가 있는고?”

 “몇몇이 있사옵니다”

 하고 챠챠는 매우 부드럽게 답했다. 유모가 가르쳐 주었듯이 ‘어린 나물’에 연관된 옛 시 중 다음과 같은 것은 읊조렸다.

내일부터는 어린 나물을 캐자고 약속한 들에
어제도 오늘도 눈은 계속 내리고
明日よりは若菜摘むとしめし野に
昨日も今日も雪は降りつつ

 히데요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 내리는 눈’이라는 것은 거부하는 ‘수수께끼’인 것 같았다. 적어도 무언가의 사정으로 오늘은 어린 나물을 캘 수 없습니다, 고 챠챠는 말하는 듯했다.

 "허어~ 캘 수 없나?”

 히데요시는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쿠게(公家)의 귀공자라면 아니 적어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무렵의 도련님들이라면 이렇게까지 수수께끼가 던져지면 여성의 방에서 물러나 나중에 시를 보내는 것이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같은 귀족이라도 말 위에서 검을 쥐고 칸파쿠(関白)의 의관을 쟁취한 전쟁터의 사나이였다. 물러나지 않았다.

 “히메! 기왕 이렇게 된 것이다”

 하고 히데요시는 오른손을 뻗쳤다. 행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뻗친 손으로 청자(靑磁)로 된 향로를 집어서는 뚜껑을 거칠게 열고 피워져 있는 불에 물통의 물을 부었다. 재가 일고 향기가 사라지며 동시에 ‘어린 나물’도 옛 시도 수수께끼도 사라졌다.
  키득, 하고 히데요시는 웃었다.
 ‘앗’
 하고 챠챠가 놀랄 정도로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에는 흠뻑 빠져버릴 듯한 애교가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곧바로 그 웃는 얼굴을 지웠다.
 곧이어 챠챠를 노려보았다.

 “귀족놀이는 이제 그만하자”

 그것은 선언이었다. 무문(武門)에는 무문만의 사랑에 대한 작법이 있을 것이다.

 “오른손을 나에게 맡기라”

 위엄을 가지고 명령했다. 항복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무문의 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오히려 히데요시에게는 더 나았다. 챠챠는 순종적이 되었다. 그 하얀 오른 손을 히데요시 쪽으로 내밀었다. 마음이 멍해지며,
 ‘무엇을 하려고?’
 하고 챠챠가 생각할 여유도 없이 히데요시는 그 손을 잡았고 잡자마자 챠챠를 무릎 위에 눕혔다.

 “챠챠야”

 하고 히데요시가 ‘히메’라는 존칭을 버렸을 때는 이미 챠챠의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자그마한 남자의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일까? 그대로 이불 위로 옮겨졌다. 그러나 거기서 히데요시의 힘이 다했다. 히데요시는 OTL이 되어 거친 숨을 토했고 토하고는 들이마셨다.

 “나도 늙었다”

 히데요시는 자조적이 되고 싶었을 터이지만 젊은 챠챠에게 허세도 부려야 했기에 무턱대고 큰 소리로 웃었다. 사냥감은 바로 앞에 뉘여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숨이 진정될 때까지 뭔가를 떠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난 몸은 작지만 다할래야 다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남들과는 다른 뛰어난 체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었지. 그러나 천하를 갈고 닦기 위한 큰일을 하다보니 조금 피곤해졌다. 옛날이라면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들었을 텐데……”

 ‘거짓말
 하고 챠챠는 엎드려 있으면서도 저 초로를 훨씬 넘긴 남자의 허풍이 웃겼다.

 “챠챠야 내 아이를 낳아라”

 히데요시는 OTL인 채로 고개만 쳐 들고 말했다.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의 아이를 낳으라고 거듭 말했다. 히데요시가 이럴 때 쓰는 상투적인 문구였으며 어느 여성에게건 그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어느 여성도 그 명령에 따르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아기씨가 드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석녀(石女)들과만 조우하였는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챠챠는 히데요시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세가 취해졌다.
 받아 들였다.
 이 순간만큼 거대한 사건은 토요토미 가문 역사 속에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자연적인 – 챠챠의 옷이 펼쳐지고 히데요시가 그 육체를 꽉 껴안았을 뿐인 단지 그랬을 뿐의 자연적인 행위가 이 순간부터 토요토미 가문의 체질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좋았다.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이 이불 속에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의 이 상냥함이란…… 그것이 끝났더라도 챠챠를 놓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였다. 이 가련한 이를 위해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성(城)을 갖고 싶지 않은가?”

 하고 히데요시는 챠챠의 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히데요시는 말했다. – 바다 건너온 비단이나 면으로 된 옷 같은 것을 사라, 시녀의 수도 늘려라, 그러나 챠챠가 가져야 할 것은 성이다. 성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성을?”

 챠챠는 놀람과 동시에 자신의 정부(情夫)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천하의 지배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천하인의 선물이라는 것은 당연 성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저는 여자이기에 성은 필요 없사옵니다.”

 “사양하지 마라”

 히데요시는 말했다. 꼭 성을 주고 싶다. 그 이유로 히데요시는 쿄우(京)와 오오사카(大坂)를 왕복하니 그 중간인 요도(淀) 근방에 휴식을 위한 성을 하나 두고 싶었는데 그것을 쌓아 챠챠를 살게 하면 그녀도 기쁘고 자신도 편리했다.
 ‘단 다른 여성들에게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안 되지’
 다른 측실들은 모두 오오사카 성에서 살고 있는데 챠챠만이 [성주]가 된다면 대부분 질투할 것이다. 무엇보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가 심술내지 않도록 이것저것 이유를 만들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히데요시의 버릇으로 생각나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빨랐다. 그날부터 몇 일 내에 동생인 야마토 다이나곤 히데나가(大和大納言 秀長)를 불러,

 “요도에 성을 쌓아라”

 고 명령했다. 장소는 카츠라가와 강(桂川)과 우지가와 강(宇治川)이 합류하여 요도가와(淀川)가 되는 합류점으로, 거기에는 예부터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将軍家)의 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불과 보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폐허인 성을 부활시켜 작지만 견고한 성을 만들어라, 건물을 화려하게 지어라, 귀부인을 위한 건물로 해라, 여성 침실의 앞마당에는 꽃나무를 잊지 말도록, 화장실도 특별히 생각을 해서 만들라고 명했다.

 요도 성(淀城)은 5개월 만에 만들어져 챠챠는 오오사카에서 거기로 옮겼다. 아자이 씨(浅井氏) 일족이나 시녀를 포함하면 이 새로운 성에서 생활하는 사람 수는 남녀 200이 넘을 것이다. 챠챠는 세간에게 ‘요도도노(淀殿)’라 불렸으며 히데요시에게는 ‘요도노모노(淀の者)’, ‘요도노뇨우보우(淀の女房)’ 등으로 불리거나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도도노는,
 - 어머님(お袋様).
 이라고 세간에서 불리게 되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첫아들 츠루마츠(鶴松)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이 츠루마츠는 2년 후에 죽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낙담하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에 대한 애정은 더욱더 깊어졌다. 곧이어 조선침략이 시작되어 그 대본영인 치쿠젠(筑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도 그녀를 데려갔다. 이 나고야의 행궁에서 요도도노는 또다시 임신했다. 히데요시는 춤을 추며 기뻐했다.
 - 남자아이를 낳아라
 고 히데요시는 요도도노의 배에 손을 대고는 굉장히 진지하게 빌었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를 낳는다는 기적을 요도도노는 별 힘 안들이고 실현해 주게 되었다. 그 해 – 1593년 8월 3일. 요도도노는 이미 요도 성(淀城)에 돌아와 있었다. 이날 히데요시의 희망대로 남자아이를 낳았다. 


 히데요리(秀頼)였다.

  1. 히데요시의 부인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모친 [본문으로]
  3. 거대 사찰 혹은 그런 사찰의 주지가 된 황족이나 상급귀족의 자제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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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이 일행이 에치젠(越前)을 떠나 오오사카(大坂)에 들어섰을 땐 이미 히데요시가 각별한 건물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그 건축 완성의 빠름으로 추측하건데,

 “아씨를 만나기 전부터 오오사카에 부하를 보내어 지시해 놓으셨나 봅니다”

 하고 유모는 또다시 히데요시(秀吉)를 칭찬하였다. 챠챠(茶々)는 여태껏 이렇게 훌륭한 건물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의미에서는 만족하였다. 유모는 말했다.

 “히데요시님이 얼마나 마음씀씀이가 좋은 분이신가 하면, 망부이신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님, 망모이신 오이치 마님(お市御料人)의 기일(忌日)에는 스님을 불러 재를 올리라고 일부러 말씀해 주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호의 이상인 것이옵니다.”

 하고 유모는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 중요한 것으로,

 “아자이님 일족의 여성들을 불러도 괜찮네”

 라고도 히데요시는 말해주었다. 노부나가(信長) 시대의 아자이 가문은 천하의 대역죄인 이었다. 노부나가는 다년간 악전고투하며 아자이 가문을 멸하자마자, 자신의 매제인 나가마사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고 금가루를 입혀서 그것을 잔으로 해서는 술을 마셨고 부하들에게도 파도타기를 시켰다. 그럴 정도로 굉장히 증오하였다. 그의 일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들 중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사람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런 금제(禁制)를 풀어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도,

 - 능력에 따라서는 거두어들이겠다.

 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옵니까?”

 유모는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치고는 평소 신앙하는 아타고(愛宕)의 승군지장(勝軍地藏) 쪽을 향해서 감사하였고, 챠챠에게도,

 “아씨 기뻐하십시오. 이리 되어야만 가문의 영령들 한 분 한 분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이리 기쁠 수가”

 하고 말했다. 하지만, 챠챠는 그다지 감동도 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고 끄덕였을 뿐이었다. 딴 뜻이나 반감이 있어서 무감동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가문의 영령들이 기뻐한다고 해서 유모와 같이 박수를 칠 마음은 나지 않았다. 챠챠는 항상 이러했으며 항상 말이 없었다. 이런 말없음이 챠챠라는 소녀를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마음이 굴절된, 상대하기 어려운 소녀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유모조차 이 소녀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으로 애태우는 일이 많았다.

 이 히데요시의 허가로 인해, 여기저기 숨어있던 아자이 가문의 일족들이 기어 나왔다. 낙성 후 타오 모에몬(田尾 茂右衛門)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있던 아자이 마사타카(浅井 政高), 거기에 아자이 오오이노스케(浅井 大炊助), 더욱이 아자이 나가마사 첩의 자식인 아자이 이요리(浅井 井頼)라는 자까지 나타났다. 챠챠에게 있어서는 배다른 동생이지만, 챠챠는 그 얼굴을 보는 것조차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어~ 아자이의 핏줄들 왔는가? 반갑구먼. 모두 미노노카미(美濃守=히데나가(秀長))의 휘하로 들어가시게”

 라며 히데요시는 그렇게 조치해주었다.

 챠챠들은 오오사카 성안에서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 주인이시옵니다.
 라는 히데요시의 챠챠들에 대한 존경 – 어느 정도 히데요시다운 과장이 들어있기는 하더라도 그 뜻이 성안 구석구석 수만 명의 남녀들에게까지 철저히 지켜져, 이 떠돌이 자매들로서는 결코 살기 힘든 장소는 아니었다. 거기에 챠챠나 동생들과 그 시녀들이 오오사카 성(城)에 와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 성안에 아자이 가문의 옛 신하들이나 그 방계(傍系), 혹은 아자이 가문과 연이 있던 오우미(近江)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님의 직속 신하 10명중 3명은 오우미 사람이 아닐까요?”

 하고 유모도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아자이 가문이 망하면서부터 노부나가에게 아자이 가문의 영토 – 북 오우미(近江)의 3군(郡) 중 20만석을 얻어 처음으로 오다(織田) 가문 휘하의 다이묘우(大名)로 출세하였다. 오다니(小谷)성(城)을 거성(居城)으로 삼아야 했지만 산성(山城)이라는 불편함도 있고 영내(領內)의 인심을 새로이 한다는 이유도 있어, 호숫가에 새로이 성을 쌓아 ‘나가하마(長浜)성(城)’이라 이름 지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20만석이라는 갑작스러운 신분에 필요한 만큼의 군용(軍容)을 갖추기 위해서 사졸(士卒)을 대량으로 모집하였고, 모집에 응한 사람들 대부분이 영내(領內)의 사람들이었기에 자연히 아자이 가문의 가신이나 백성이 많았다. 히데요시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다이묘우(大名) 급으로는 미야베 젠쇼우보우 케이쥰(宮部 善祥坊 継潤) 등이 있고, 실력 있는 야전가(野戰家)로서는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가 있으며, 관료로서의 재능이 있는 자로서는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조금 신분은 떨어지지만 다른 사람을 보좌하는데 있어서는 천재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高虎), 그 외에 오우미 출신의 소규모 다이묘우(大名)로서는 오가와 스케타다(小川 祐忠), 쿠츠키 모토츠나(朽木 元綱),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카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 아카자 나오야스(赤座 直保), 키무라 히타치노스케 시게모토(木村 常陸介 重茲) 등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로 있었다. 중급 이하의 부하에 대해서는 세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이다.

 다만 통틀어 오우미(近江) 사람이라고 하여도 아자이 씨(氏)와 연이 깊은 것은 북부 3군(郡)만으로, 중앙부는 이미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하여 흔적도 없는 롯카쿠(六角)씨(氏)의 옛 영토였고, 남부의 코우가(甲賀) 지방은 예부터 지역 무사들의 자립지역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와(琵琶) 호수 서안 산악지대의 쿠츠키(朽木)씨(氏) 등은 그다지 아자이 씨(氏)와 연이 없었다. 하지만 오우미(近江) 중에서도 성안에 가장 많은 것은 북부 오우미(近江)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 오다니(小谷=아자이 씨(氏))의 아씨께서 계시다.
 
라며 챠챠들이 있는 건물에 그리움, 반가움에 더해 각별한 경의를 치렀고, 옛 주인에 대하는 예를 취했다. 그 중에서도 이시다 미츠나리는,

 “어떤 일이건 불편한 것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꼭 말씀해 주시길”

 하고 유모에게 몇 번이나 힘주며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향당의식(鄕黨意識)은 이 챠챠가 사는 건물을 중심으로 뭉쳐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오와리(尾張)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고 유모는 챠챠에게 일러주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출신이 오와리(尾張)였기 때문에 이 성안에서 기세가 등등한 사람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억양이 억센 오와리 사투리를 쓰고 있다고 말해도 좋았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히데요시의 나가하마 성(城)시대부터 섬긴 오우미(近江) 사람들은 어떤 일이건 결속하려 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어 그 마음의 오갈 데를 챠챠들에게 향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챠챠 모친의 친정인 오다 가문 사람들 중 몇 명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었다. 노부히데(信秀[각주:1])의 12번째 아들인 오다 우라쿠(織田有楽)도 그러하여, 성안에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중개(仲介)하거나 차(茶) 놀이로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오다 우라쿠도 챠챠의 외숙부이기에,

 “뭐 불편은 없느냐?”

 등등으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찾아 주었던 것이다. 단지 우라쿠는 그녀를 이용하려 하는 마음 같은 것이 없었다. 또한 다인(茶人)이기에 성안의 뒷세계에도 정통하여, 일부의 오우미(近江) 사람들처럼 자신의 조카들에게 음습한 정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저 아이를 빨리 시집 보내는 편이 좋을 터인데”

 하고 은밀히 친구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斎)에게만은 말하였다. 우라쿠 나름의 이 신흥정권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걱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히데요시다. 그는 저 아이에게 빠굴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것이었다. 만약 챠챠의 방에 히데요시가 들락날락해버리기라도 한다면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생길 것이다. 오우미 사람들이 측실인(아직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챠챠를 중심으로 붕당을 만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 정권에는 오우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거기에 각각 실력을 가졌으며 또한 세력도 있었다. 그들이 챠챠라는 여성과 결속하여 한 덩어리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오우미 사람들에게 농단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유우사이는 일소에 부쳤다. 유우사이만큼이나 그런 감각에 날카로운 인물조차, 우라쿠의 걱정이 너무 기우인 생각이라고 여겼다.

  1.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 노부나가의 부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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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

 하치죠우노미야토모히토 친왕[八宮智仁親王]이 가진 히데요시에 대한 추억은 그 정도밖에 없다. 미야[宮]는 너무 어렸다. 히데요시가 지혜를 뽐내며 기운이 넘칠 때의 미야는 꼬꼬마나 소년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력이 풍부해지기 시작할 즈음의 그 히데요시는 노쇠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하지만 미야의 정신은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미야의 마음 속에 있는 히데요시도 그의 사후 쑥쑥 성장하기 시작한 듯 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이 시작된 것은 미야가 24살 때이다.
 -
이에야스[家康]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라는 것은 궁정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이전부터 명확한 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 휘하의 일개 다이묘우[大名] 주제에 단독으로 궁정에 접근하여 금은(金銀) 등을 헌상하였다. 그 꿍꿍이는 장래에 무언가 일으켰을 경우를 상정하여 미리 궁정의 호의를 얻어두기 위함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 사이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율법을 어기며 자주 오오사카 정부[大坂公儀]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 감정을 대표해서 일어선 것이 오봉행(五奉行)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로, 이에야스의 죄를 꾸짖고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이에야스가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천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동서(東西) 어느 쪽에건 속하게 되었다.

 미야의 시학(歌) 스승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탄고[丹後] 타나베 성[城]에 머문 채 이에야스에 속했다. 유우사이는 자기 가문의 생존을 이에야스 측에 걸었다. 도박은 결과로써 성공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궁지로 몰렸다. 왜냐면 서군의 대군단이 이 타나베 성을 포위하였기 때문이다.
 
서군의 병사수는 1만 5천이었고, 농성하는 유우사이 측은 불과 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우사이의 아들인 타다오키[忠興]가 호소카와 가문의 주력을 이끌고 칸토우[東]에 있었기 때문에 유우사이 아래에 남아있던 병사는 그것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만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잘 싸웠다.

 “도저히 유우사이는 이길 수 없겠지. 유우사이는 죽을 것이다”

 하고 세간의 누구나가 생각했다.
 
하지만 유우사이에게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를 경탄케 할 정도의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 이상으로 이 인물에게는 지모(智謀)가 있었다. 이 사지(死地)에서 자신의 목숨을 탈출시키는 한편 세상의 비웃음 받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를 이 노인은 가지고 있었다.

 하치죠우노미야[八宮]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우사이는 재작년이래 고요우제이[後陽成]와 이 미야를 위해서 옛 시집 전체[古今集全巻]에 걸쳐서 주석을 강의하여 작년에 완료하였다. 제1회는 70여 일을 필요로 했으며, 제2회는 40여 일을 필요로 했다. 그걸로 전부강의한 것이 되었는데, 남은 것은 거기에 ‘비전(秘傳)’이라 부름직한 것이었다.
 [
고금전수(古今)]
 
라고 세상에서는 일컫는 것으로, 옛 시집(古今集) 해석의 비전이며 게임에서 말하는 필살기이다. 이것은 문외불출(門外不出)로 만약 유우사이가 전사라도 한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소멸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유우사이의 지모가 노리는 바였다.

 “나의 죽음은 가볍다. 그러나 고금전수(古今)는 중하다. 내가 죽기 전에 그것을 하치죠우노미야에게 물려드려서 후세에 전하고 싶다”

 며 쿄우토[京都]에 있는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 밀사(密使)로서 유우사이의 가신(家臣)이 포위을 돌파하여 하치죠우노미야의 저택에 도착하였다.

 미야는 경악했다.
 
곧바로 입궐하여 형인 텐노우[天皇]를 배알하고서는 탄고의 전황을 알리면서 고금전수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유우사이는 황상께 전수해 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사옵니다”

 하며 다소 왜곡하였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전수받는다 하더라도 천하는 신경도 쓰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텐노우[天皇]가 전수를 받는다고 한다면 칙명으로 정전(停戰)을 시킬 수 있고, 칙명이라면 유우사이의 목숨도 떳떳하게 구할 수있게 된다. 유우사이는 미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야라면 그렇게 말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텐노우[天皇]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칙사를 오오사카의 히데요리[秀頼]에게 보내어 탄고 방면의 서군(西軍)에게 정전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 칙사로서 시에 밝은 산죠우니시 다이나곤 사네에다[三西 大納言 実条], 나카노인 츄우나곤 미치카츠[中院 中納言 通勝],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烏丸 頭弁 光広] 등 3명이 내려갔다. 히데요리는 승낙했다. 칙명을 황송해하며 받드는 것이 토요토미 가문의 가법이었다.

 현지에 칙사로서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가 임명되어 떠났으며,히데요리에게서는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前田 主膳正 義勝 – 토요토미 가문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아들)] 사자로 임명되었다. 이들보다 한발 앞서 미야의 개인적인 사자로서 가신 오오이시 진스케[大石 甚助]라는 자가 탄고 타나베로 급행하여 양측에,
 -
칙사가 내려오신다.
 
는 뜻을 알리고 또한 유우사이와 만나서는, 미야가 유우사이의 말과는 달리 ‘고금전수’를 자신이 아닌 텐노우[天皇]가 받는 것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렸다.

 유우사이는 복잡한 연기를 하였다.
 
칙사가 성안으로 들어서자 처음엔 그 정전권고의 칙명을 사양했다. 목숨을 아쉬워하는 것 같이 보여 무도(武道)의 길을 가는 자로서 수치스럽사옵니다 – 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는 한편 칸토우[東]의 이에야스에게도 사자를 보냈다. 이에야스에게도 이에 대한 사정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나중을 위해서 좋지 않았다.
 
설왕설래 끝에 겨우 개성해서는, 그 성을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에게 맡긴다는 명목으로 성을 나왔다. 동시에 포위군도 진을 풀고 떠났다.
 
유우사이는 전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城]으로 몸을 피했고, 곧이어 싸움이 동군(東軍) 측의 승리로 끝나자 우선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이에야스를 배알했다.

 이어서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미야에게 ‘고금전수’를 전수하기 위해 하치죠우노미야 저택에 들렸다. 미야는 이 날의 의식을 위해서 일부러 저택 내에 방 하나를 따로 만들어 전수를 받는 곳으로 하였다. 전수의 내용은 특별한 것도 없었다. 옛 시집(古今集) 중 난해한 몇 개소나 구절 등에 대해 하나하나 메모지를 끼워 넣으며 구전(口傳)하는 것으로, 내용보다도 오히려 권위를 신비화시키기 위한 종교의례였다. 미야는 전해 내려오는 작법대로 유우사이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서약서에는 [천지신명에게 맹세컨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음. 만약 어기는일이라도 있을 때는 어떠한 신벌불벌(神罰佛罰)이건 달게 받겠음]이라고 쓰여있었다.

 이에야스의 천하가 되었다.
 
히데요시에 대한 빠심이 있었던 고요우제이[後陽成]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불과 3년 만에 찾아온 이 변화에 실망하여 텐노우[天皇]인 것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퇴위하여 뒤를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그의 관료들이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 시대의 히데요시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궁정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퇴위는 토쿠가와 가문[川家]에 대한 비꼼과 같은 것이며 그러한 제멋대로인 행동은 용서할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신다는 것은 특히 적절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미야는 한때 히데요시의 유자였던 분으로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황위에 오르시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시대와는 달랐다. 히데요시가 있을때 설치되었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은 어디까지나 궁정본위인 - 궁정의 아래에서 용무를 원활하게 하는 기관이었지만, 이에야스의 치세가 되어 설치된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는 궁정의 감시역[目付]으로, 때로는 검단관(檢斷官)과 같은 위압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 때문에 텐노우[天皇] 이하 여관(女官)에 이르기까지 일상이 어두워졌다.
 -
태양이 저문 것입니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天皇]를 위로하였다. 태양은 히데요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궁정에게 있어서 히데요시의 출현은 태양이 솟아오른 것과 같았으며, 그가 살아있을 때 궁정에는 하루 종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그늘이 졌다.
 -
이에야스는 원래부터 토요토미 씨와는 다르옵니다.
 
라고도 미야는 말했다. 미야가 이에야스의 얼굴을 본 것은 몇 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나 모습은 결코 시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시인이었다. 시인이 아니기에 궁정의 고상함과 아름다움, 예술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면 궁정에 대한 애정도 생길 턱이 없었다.

 그 후 십 년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황위를 유지하였으며 이어서 황위를 세자인 코토히토 친왕[政仁 親王]에게 물려주었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이다. 1615년 이에야스는 소위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陣]’ 을 일으켜, 히데요리를 포위해서는 불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쿄우토[京都]에 사람들을 보내어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봉우리에 있는 히데요시의 묘소(墓所)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그에게 내려진 호칭인 [호우코쿠다이묘우진[大明神]]을 박탈케 하였다.
 -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미야는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이에야스는 궁정도 그 활동을 궁궐 안으로 제약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 속박했다. [공가법도(公家法度)]가 그것이다.

 미야는 모든 것에 실망했다. 결국 쿄우토를 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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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
 미야는 카츠라가와 강[桂川] 근처에 오이구경(瓜見)을 하러 간다. 그러다 거기에 살 장소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 별장을 만들어 거기에 살고 그러면서 일본 시의 아름다움 속에서 몰두하다 죽고자 하였다.
 
이 미야는 후세에 말하는 ‘카츠라 별궁(桂離宮)을 만들었다. 현재 있는 별궁의 모든 것을 만들지는 않았고 그는 원형만을 만들어 나머지는 늦은 결혼으로 태어난 적자(嫡子) 토모타다친왕[智忠 親王]에 의해 완성되었다.
 
미야가 만든 별장은, 미야의 표현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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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 밭의 아담한 찻집[瓜畑のかろき茶屋]
 
이었다. 아담하기는 하였어도 궁정에서 그 아름다움은 평판이 자자하였다. 미야는 이 별장의 설계에 있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 ‘일본 시집(古今和歌集)거기에 미야가 좋아한 ‘백씨문집(白氏文集)등에서 발상(發想)하여, 그런 시들의 마음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여름 달이 오이 밭 위로 떠오르는 밤에는 이 별장에 히데요시를 되살려서 초대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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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는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치세인 1629년에 50살의 나이로 죽었다. 미야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모츠케[下野] 닛코우[日光]에 이에야스의 묘소인 토우쇼우 궁[東照宮]을 조영(造營)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후년 사람들은 토우쇼우 궁(宮)에서 볼 수 있는 토쿠가와 가문의 미의식과 쿄우토(京都) 교외에 있는 이 카츠라 별궁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 극과 극이라며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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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9.30 0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성을 내어준 것은 모양새가 어찌되었든 무사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해서 그 아들은 아버지와 대면하는것도 수년간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이래서야 연기를 한 것도 허사가 되었달지(웃음).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9.30 0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에 대해 "와카 한 수 제대로 지을 줄 모르는 놈은 죽어버려"
    라고 '문학소년 미야'는 생각했을지도...^^;
    어느덧 마지막까지 달려오셨네요
    늦어도 좋으니 마지막 편도 부탁드립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9.30 02: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후지타다.ㅋㅋㅋㅋ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zardizm BlogIcon zardizm 2008.09.30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화도 잘 보았습니다.
    미야는 히데요리도 좋아했으려나요... 특별히 교류 같은게 없어 보이는듯 하기도 하고...
    음..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부담 가지시마시고 작업하세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9.30 14: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봤습니다. 박선생님 너무 웃겨요. 문학소년 미야 ㅋ 풍신가의 사람들 마지막은 요도도노와 히데요리 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30 15: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천하로 따지면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쿄-는 미야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갔다랄까..하는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군요.
    하긴 정치의 중심이 에도로 넘어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려나..;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30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볼리바르님//왠지 타다오키라면 능히 그랬을 것 같군요 ^^

    박선생님//'죽어버려~!!'라는 장면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허공님//섬긴 주군들이 다 멸망하는데도 끝까지 살아 남았으니 [역시]의 칭호를 붙여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zardizm님//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땠을까요.... 히데요리에 대해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히데요시'만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상의 미야는 '시(歌)'를 우선시하다 보니, 히데요리의 시를 보아야 그에게 호불호를 느끼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본다충승님//예.... 꽤 두껍고 빽빽하게 글자가 들어서있습죠.

    다메엣찌님//좀 이야기가 새지만....'風光る'라는 신선조가 중심인 만화에서 히지카타 토시조우가 말하는 것인데...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게 한 다음에 떨어뜨려야 제대로 된 절망을 맛보지'(뭐 대충 이런 뉘앙스)...
    라는 대사가 있습죠...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만나 몇 백년 동안 잊고 있었던 양지를 맛보다, 히데요시가 죽고 이에야스라는 놈을 곧바로 만나 버로우 할 수 밖에 없었던 쿠게(公家) 측 사람들의 실망은 정말 컷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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