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가 만약 이에야스[家康]의 아들이라는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면, 어엿한 센고쿠[戦国]의 영웅으로 한자리를 차지하며 찬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뛰어난 자질을 가졌으면서도 그 핏줄로 인하여 결국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고 일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히데야스의 자질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이라는 큰 영지에 봉해졌을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방문해서는,
 “만약 천하에 이변이 일어났을 시에 소인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의 눈으로 보건 동생인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보다 히데야스의 기량이 뛰어나 보였던 듯 하다. 아비 이에야스조차 히데야스를 두려워 했던 듯한 흔적이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결전에 참가시키지 않으려고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봉쇄하는 임무를 주며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한 것은, 행여 히데야스가 세키가하라에서 전공이라도 세워 쇼우군 히데타다를 능가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1]. 히데야스라면 이런 혼란을 틈타 천하를 취할법한 실력을 가졌다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히데야스의 생모는 이름을 오만[お万]이라고 하며 미카와[三河] 치리후[池鯉鮒[각주:2]]에 있던 신사에 근무하던 신관[각주:3]의 딸이었다고 한다[각주:4]. 이에야스의 정실 츠키야마도노[築山殿]의 시녀였던 것을 이에야스가 미카와 오카자키 성[岡崎城]의 목욕탕에서 손을 대어 히데야스를 낳게 했다고 한다. 오만이 임신한 것을 알아챈 츠키야마도노는 질투를 증오로 바꾸어 오만의 옷을 모두 벗겨 나무에 매달아 채찍질했다고 한다.[각주:5] [각주:6] [각주:7]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히데야스는 그 용모가
동자개[ギギ – 매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고기]와 닮았다 하여 ‘오기마루[於義丸]’ 라고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을 혼다 사쿠사에몬 시게츠구[本多 作左衛門 重次]나 이에야스의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꾀를 내어 대면시켜 결국엔 이에야스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기마루에 대한 이에야스의 애정은 박했다. 그리고 히데야스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 이에야스의 애첩 오아이노카타[お愛の方]에게서 히데타다[秀忠], 타다요시[忠吉]가 태어나자 한층 더 히데야스의 존재감은 엷어져 갔다.

 11살 때, 오기마루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에야스가 바친 인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의 호탕한 기질을 사랑했다. 이름을 자신의 ‘히데[秀]’와 이에야스의 ‘야스[康]’를 따 ‘히데야스[秀康]’로 지은 것도,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명족(名族) 유우키 씨[結城氏[각주:8]]를 계승하게 한 것도 히데요시의 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전[九州の役] 때, 히데야스가 후방에 있어 공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에 눈물 흘린 것을 보고,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가 히데요시에게,
 “역시 토쿠가와 님의 기풍을 물려받으신 듯”
 하고 말하자 히데요시가,
 “그렇지 않네. 히데야스는 이제 내 아들이니 무(武)에 관해서는 이 히데요시를 닮은 것일세”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히데요시가 히데야스에게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가졌었는지를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히데야스가 16살 때의 일이라 하는데, 히데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있는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을 때, 승마장 관리인이 경주라도 하려는 듯이 히데야스의 옆으로 달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것이다. 히데야스는 그 무례에 분노하며 단칼에 베어 죽여버렸다. 관리인의 죽음에 승마장에 있던 관리인의 동료들이 살기를 띠며 히데요시에게 히데야스를 벌 주라고 간청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내 아들에게 무례를 범한 승마장 관리인이야말로 죽어 당연하다”
 고 말하며 히데야스의 호방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히데요시가 죽은 뒤,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응어리져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무공파 장수들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 관료들의 알력이 표면화 되었다. 결국 카토우 등이 이시다 미츠나리 습격을 꾀함에 이르자 미츠나리는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하였고 그 후 목숨을 건지는 대신 사와야마[佐和山]에 은거 당하게 된다. 사와야마로 향하는 미츠나리의 안전을 위해서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에게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와 함께 호위를 맡도록 지시하였다. 히데야스는 그때 병사[足軽]들에게는 철포의 화승에 불을 붙인 채 경계하면서 행군하도록 하였으며[각주:9], 무사들에게도 갑주를 두르게 하여 완전 무장한 채로 행군하는[각주:10] 등 히데야스는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데야스는 에치젠[越前] 후쿠이[福井[각주:11]]로 이봉(移封)되어 마츠다이라 성[松平姓]를 칭하였는데[각주:12], 1605년 히데타다가 쇼우군[将軍]이 되자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님이었기에 히데야스의 에치젠 가문은 “제도 밖의 에치젠 가문[制外の越前家]’이라고도 일컬어지며 남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데야스가 에도[江戸]에 올 일이 있을 때에는 쇼우군 히데타다가 일부러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왔고,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향하는 길에서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아랫자리에 위치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히데야스의 행렬이 에도로 가기 위해서
우스이 고개[碓氷峠]]의 관문소[関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이때 에치젠 가문은 철포 10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도 에도로 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 천하의 법도였다. 당연히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철포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보고 히데야스가 말했다.
 “그것은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3]]에게나 적용되는 법도일 것이다. 내가 에치젠 츄우나곤 히데야스[越前 中納言 秀康]임을 알고 막는 것인가?”
 히데야스가 이렇게 말하자 관문소의 하급 관리들은, 츄우나곤이건 다이나곤[大納言]이건 법도는 법도올시다. 통과시킬 수는 없소 하며 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시팔시팔댔다. 히데야스는 격노했다.
 “관문소의 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욕설들과 츄우나곤 다이나곤하며 운운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 뒤, 부하들을 향해서,
 “저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버려!”
 하고 명령한 것이다.
  에치젠 가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창을 꼬나 쥐고 칼을 칼집에서 뽑았다. 하급 관리들은 놀라 모두 도망쳤다.
 이것이 에도에 전해지자 히데타다는,
 “관리들이 도망친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도다. 아무리 관리들이 죽더라도 함부로 츄우나곤(히데야스)에게 벌을 내릴 수는 없는 법”
 이라 말하며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히데야스의 마음 속에 배다른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 날, 후시미[伏見]에서 오쿠니[阿国]를 불러 그 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오쿠니의 춤을 보면서 히데야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천하에는 수천 만의 여성이 있겠지만 이 오쿠니를 천하 제일의 여인이라 한다. 하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남자가 될 수 없으니 여자인 오쿠니에게조차 이르질 못하는구나. 이 어찌 분하지 않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한다.

 히데야스는 동생 히데타다가 쇼우군이 된지 2년 후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
1574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둘째 아들. 1584년 코마키-나카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의 강화 교섭 후 인질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었고, 1590년 시모우사[下総]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의 양자가 되어 10만 1천석을 상속.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마츠다이라 성[松平姓]으로 복귀하여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67만석에 봉해졌다. 1607년 죽었다.

  1. 우에스기 정벌을 앞두고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되는 오야마 평정[小山の評定] 후 약 1개월 간은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후 히데타다는 후방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를 정벌하러 떠나고 대신해서 그제서야 그 임무를 맡게 된 것이 히데야스이다. 그 사이 미노[美濃]의 기후 성[岐阜城]이 너무도 단기간에 함락되어 상황이 변화되자 히데타다는 급히 세키가하라로 향하게 된다....한줄 요약하면 히데야스가 공 세울 것을 두려워 하여 처음부터 우츠노미야에 남긴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현 치류우 시[知立市]. 당시 연못[池]에 잉어[鯉]와 붕어[鮒]가 많이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신사(神社)의 말단 사무를 보는 직책인 샤닌[社人]이었다 한다. [본문으로]
  4. 나가미 시마노카미 요시히데[永見 志摩守 吉英]의 딸. 혹은 셋츠[摂津]의 의사인 무라타 이치쿠[村田 意竹]의 딸(또한 나가미 시마노카미가 나중에 셋츠로 가서 무라타 이치쿠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5. 그렇게 매달린 오만을 혼다 시게츠구[本多 重次]가 구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낳게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6. 또는 오만이 매질을 맞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친척인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집으로 도망갔으며, 한에몬은 시게츠구에게 이런 일을 보고하여 시게츠구가 양육을 담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에치젠 가문의 가전[越前家伝]에 따르면 –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이에야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혼다 한에몬[本多 半右衛門]의 큰엄마(伯母)에게 와서 도망치겠다고 하자 한에몬의 큰엄마는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오만은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한다. 이 한에몬의 큰엄마는 과거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 시중 들던 여성이라 한다. 한에몬의 큰엄마 다음 날 입성하여 이에야스를 만나 오만에 대해 보고하였지만 이에야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냥 한에몬 큰엄마 집에서 머물다 30일 뒤 쌍둥이를 낳았다 한다. 한 명은 곧바로 죽었으며 나머지 한 명이 히데야스라고 한다....(여담으로 쌍둥이 중 하나가 죽지 않고 나가미 사다치카[永見 貞愛]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당시는 동물이나 한꺼번에 여럿 낳지 사람은 한 명씩만 낳기에 쌍둥이는 사람 취급을 안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의 할머니부터 9대 쇼우군 이에시게[家重]의 생모에 이르기까지 에도 막부의 역대 쇼우군의 생모, 정실, 애첩, 측실 및 유모를 기록함과 동시에 그녀들의 출신 가문들을 기록한 [옥여기(玉輿記)]에 따르면, 유우키 가문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초대 쇼우군[将軍]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셋째 아들인 유우키 토모미츠[結城 朝光]를 시조로 하며 - 공인된 요리토모의 아들은 2대 쇼우군 요리이에[頼家], 3대 쇼우군 사네토모[実朝]로 두 명뿐. - 히데야스의 양아버지가 되는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는 토모미츠의 19대손이라 한다. 참고로 유우키 토모미츠는 그 어미가 요리토모의 씨를 품은 상태로 요리토모가 오가와 토모미츠[小山 朝光]에게 하사하였고 그 후 태어난 것이 유우키 토모미츠라 한다....근데 이걸 믿으면 질 확률이 높다. [본문으로]
  9. 오발의 위험과 화승을 아끼기 위해서 막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본문으로]
  10. 갑옷과 투구 무게도 무시할 수 없는 터라 행군 시에는 상체 갑옷과 투구를 따로 챙겨서 이동하였다. [본문으로]
  11. 이때까지는 아직 키타노쇼우[北ノ庄]. 후쿠이[福居]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 3대이며 히데야스의 차남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松平 忠昌] 때. 키타노쇼우[北ノ庄]의 키타[北]가 패배(敗北)와 글자가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에 후쿠이[福井]로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바뀌게 된다. [본문으로]
  12. 위키에 따르면 확실히 마츠다이라 성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세키가하라 이후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가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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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죽고 나서 100년 뒤, 에도 시대[江戸時代] 중기의 학자 겸 정치가 아리이 하쿠세키[新井 白石]는 야스마사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役] 이후 소극적이 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이에야스[家康]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막정(幕政)의 중추가 되어 활약하였기에 그런 마사노부와 대립하면 주가(主家)인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그 마음 속을 헤아리며, 
 ‘그 당시의 무장으로서는 특별한 일이었다’
 고 야스마사라는 인물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성실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미카와[三河] 무사로, 같은 나이의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토쿠가와 군단의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었다.

 야스마사는 미카와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에 16살의 나이로 데뷔전을 치렀고, 이때 무공을 세운 덕분에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어 이에야스의 이름글자 중 ‘야스[康]’를 하사 받았다. 이후 이에야스가 출진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직속군[旗本] 선봉을 맡았으며, 1566년에는 혼다 타다카츠와 함께 '직속군 선봉부대 부대장[御旗本先手侍大将]'이 되어 토쿠가와 군단을 지휘하여 그 용장()을 전쟁터에 드러내게 되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秀吉]와 싸운 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 때 야스마사는 적의 기세를 죽이기 위해서 격문(檄文)을 만들어 히데요시에게 욕설을 선사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덕분에 출세한 가신[家臣] 주제에 지금은 그 주군의 아들을 상대로 활을 쏘고 있다. 이야말로 팔역의 죄[각주:2]에 해당하는 것이다. 비도(非道)한 히데요시와 같은 편에 서는 자에게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군의 아들’이란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로, 이에야스는 노부카츠를 맹주로 하여 히데요시와 싸웠던 것이다.
 야스마사의 격문을 본 히데요시는 분노하였다.
 “코헤이타[小平太]를 산 채로 잡아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은상은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
라고 사졸들에게 말했을 정도로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히데요시의 분노도 세월과 함께 사라졌다. 이유 중 하나는 이에야스에 대한 야스마사의 충성스런 성격이 히데요시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1586년의 일이다. 코마키-나가쿠테가 끝난 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강화를 맺었다. 히데요시는 토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姫]를 이에야스에게 시집 보냈다. 그때 함을 가지고 온 사자로 온 것이 야스마사였다. 히데요시에게 알현하였을 때 히데요시는,
 “여어 야스마사 왔는가. 코마키 전투 때는 자네의 잘린 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네의 충성을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네”
 하고 가볍게 언급하였을 뿐이었으며, 거기에 함을 가지고 온 중요한 사자가 관직이 없어서는 안 된다며, 같은 해 11월 9일에 종오위하(従五位下) 시키부노타이후[式部大輔]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날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로 불리는 동료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혼다 타다카츠도 서임되었다. 토쿠가와 가신 서임의 시초였다.

 세키가하라 결전 시에 야스마사는 히데타다[秀忠 – 후에 에도 막부 2대 쇼우군[将軍]]에 속해 있었다
 히데타다 군은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간 이에야스의 본군과 다른 길을 취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서상(西上)하였다. 야스마사 외에 혼다 마사노부,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 등이 속해있었다. 양군은 미노[美濃]에서 합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행군 도중 강적이 나타나 히데타다 군의 서상을 막았다.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부자였다.

 기략을 연발하는 사나다 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히데타다 군은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굉장히 불쾌해 했다. 히데타다가 겨우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에 도착했을 때도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3일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히데타다는 안절부절 못했다. 히데타다 진중은 침묵이 지배하였다. 이때 결심한 야스마사가 밤에 이에야스를 찾아갔다. 야스마사는 우선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사죄한 뒤 이어서 소신을 당당히 말하였다.
 “주군의 분노가 만약 세키가하라 결전에 시간 맞추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이라면 주군에게도 잘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자가 함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물리치고자 했으면 어째서 사자를 보내 빈번히 연락을 취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고 이에야스에게 따지며,
 “언젠가는 천하인(天下人)이 되실 히데타다 공이 무공 부족으로 인하여 부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무시한다면 이는 히데타다 공만의 치욕이 아니라 주군 자신에게도 그 비웃음이 쏟아질 것입니다”
 고 논리 정연히 설득하였다. 야스마사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분노를 풀고 다음 날에는 히데타다와 대면하고 격려하였다.
 히데타다의 한없이 기뻐하였다. 자신의 가문이 있는 한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야스마사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야스마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미담과 같은 이야기 외에 야스마사에게는 이에야스에 대한 반골심을 나타내는 일화도 전해진다.
 1606년 4월, 야스마사의 병이 중하여 이에야스, 히데타다의 병문안 사자로 사카이 타다요[酒井 忠世], 도이 토시카츠[土井 利勝]가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사자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이불 안에서,
 “저도 장(臟)이 썩어 이렇게 추해졌습니다”
 고 빈정대며 말했다. 예전 작전회의에서 혼다 마사노부가 발언하였을 때 마사노부를 향해서 야스마사는,
 “된장이나 소금이 늘고 주는지만 신경쓰는 장이 썩은 사람이 전투에 관해서 무엇을 안다고 말을 하는가?”
하고 매도한 적이 있었다.
 병상에서의 말은 마사노부 등을 중용하는 이에야스를 비난하는 것이고 하였으며, 평화로운 시대에 들어와 잊혀져 가는 존재인 예전 전쟁터 용사의 자조(自嘲)이기도 했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 중 한 명. 1581년 토오토우미[遠江] 타카텐진 성[高天神城]를 공격하였을 때 적의 수급 40을 취했다 한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미요시 히데츠구[三好 秀次 – 후에 칸파쿠[関白]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군을 물리쳤다. 1590년 토쿠가와 에야스[徳川 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이봉(移封)되자 코우즈케[上野] 타테바야시[館林] 10만석에 봉해졌다. 1606년 악성 종양을 앓아 5월에 죽었다. 59세.

  1. 잇코우 종[一向宗 - 정확히는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 반란. 미카와 잇코우잇키[三河一向一揆]는 세금을 내지 않던 미카와의 혼간지 계열의 절에 세금 징수하려 하다가 그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 [본문으로]
  2. '八虐'라고도 쓴다. 율령제 시대에 가장 무거운 죄. 기본 사형이며 감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텐노우[天皇]에 살해에 관한 모반(謀反), 황거나 황릉에 관한 불경인 모대역(謀大逆), 일본 국가에 관한 반란획책인 모반(謀叛), 신사에 관한 불경인 대불경(大不敬), 존속살해인 악역(悪逆), 대량 살인죄인 부도(不道), , 존속살인 이외에 존속에 관한 죄인 불효(不孝), 주군에 관한 배신인 불의(不義)...인 여덟가지 죄. 여담으로 이중 존손에 관한 악역, 부도, 불효의 경우 당시 일본에 유교논리가 없었기에 사법(死法)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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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

 세간에게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
)란 육체가 없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자질과 성격을 가진 젊은이인지를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 그 모친과 시녀들 등 극소수의 측근들을 제외하고는 – 알 방도가 없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 분께서는 어떻게 자라셨나?"

 라는 질문을 오오사카(大坂)에서 사람이 오면 꼭 물어보았지만 천편일률적인 것밖에 듣지 못하였다.
 - 똑똑한가? 바보인가?
 라는 것 하나만은 이에야스가 꼭 듣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노골적으로 그렇게 물을 수 없기에 더더욱 없는 재료에서 억측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똑똑하다면 일찌감치 난을 일으켜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바보라면 – 역시 죽일 수 밖에 없지만, 단지 죽인다는 것을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에야스가 마지막으로 히데요리를 본 것은 히데요리가 만 10살 때인 1603년 2월 4일이었다.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전쟁이 3년 전 과거였으며 이에야스는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이기는 했지만 아직 쇼우군(軍)이 되어 있지는 않았던 상태로, 이때 이에야스는 직접 오오사카로 내려가 가신의 신분으로 새해 인사를 올렸다. 그때도,
 '극히 평범한, 뭐 하나 볼 것 없는 아이군'
 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안심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둔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피부가 희멀건 하며 아래쪽이 큰 입술을 새빨갛게 칠하였고, 정신상태가 축 처졌는지 10살이나 되었으면서도 알현의 자리에서 위엄을 지키지 못하여 걸핏하면 유모의 무릎에 파고들려고 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 알현을 마지막으로, 바로 이 해의 바로 같은 달[각주:1]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軍)이 되어 명실공히 지배자의 자리에 앉았다. 거기에 이 해의 7월, 이에야스는 6살 난 손녀딸 오센(於千)을 오오사카로 내려 보내 히데요리와 결혼시켰다[각주:2]. 센히메(千)의 결혼은 굳이 이에야스가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고(故) 히데요시(秀吉)가 임종의 자리에서 남긴 유언으로, 이 유언을 지키지 않으면 히데요시의 휘하에 있던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고 히데요시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들이 어쩌면 동요할지도 몰라,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막 태어났을 뿐인 토쿠가와 정권의 안정과 그들 토자마다이묘우(外大名)의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 소년과 꼬마숙녀의 결혼을 진행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해의 3월.
 이에야스는 후시미(伏見)에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제 자신이 세이이타이쇼우군인 이상 오오사카로 가서 신년인사를 하는 통례대신,

 "그쪽에서 신년인사를 하러 오게"

 라는 뜻을 토요토미 가문에 넌지시 비쳤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선 과거가 어찌되었건 현재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자신의 주인인 히데요리에게 알려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연히 오오사카는 놀랐다. 아무리 세키가하라 이후 이쪽 토요토미 가문의 영지가 불과 70여만석이라는 일개 다이묘우정도로 봉토가 깎였을지언정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의 신하인 것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가 고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님을 보살펴 키우겠습니다'라고 맹세한 쿠마노 서약서(熊野誓紙[각주:3]
)의 서약은 아직 살아있다. 거기에 관위(官位)라는 점에서도 히데요리, 이에야스에게는 상하가 없었다. 그러한데 어째서 히데요리가 이에야스를 알현하기 위해서 후시미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주인이 가신에게 알현한 예가 일본 밖의 나라들은 몰라도 일본에는 있을 턱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고 요도도노(淀殿)는 가로(家老)인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향해서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그렇게는 안 된다. 토쿠가와님이야말로 이쪽으로 오시라고 하게, 그렇게 전하게, 라고 말했다.

 "말씀대로 하게"

 하고 요도도노의 늙은 시녀들도 달린 입마다 요도도노와 같은 뜻의 말을 했다. 카츠모토는,
 '이렇게 몰라서야'
 하고 거의 절망했다. 여성에게 가장 이해시킬 수 없는 것이 정치일 것이다.

 "물론 도리로 따지면 진정 하시는 말씀대로 일 것이옵니다만"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이치는 물론 그러하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옵니다, 하고 현실을 턱이 빠질 정도로 설득하였건만 끝내 여성들은 납득하지 못하여 결국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히데요리의 대리인이라는 형식으로 사자(使者)가 되어 후시미(伏見)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신년인사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자네가 대리인으로 가는 것이라면 좋네"

 하고 요도도노(히데요시가 죽은 뒤 다이구인(大虞院)이라는 호로 불리고 있었지만)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긍했다. 이런 면에서도 도리 운운하며 떠벌리는 것치고는 논리의 개념이 요도도노에게 부족한 점이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체면론을 강행하려고 하는 이상 아무리 대리인이라도 히데요리의 굴욕인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요도도노는 히데요리의 안전을 너무도 걱정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오오사카성에서 후시미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뿐 단지 그뿐이었다. 요도도노는 다른 수많은 모친과 마찬가지로 자기 몸의 연장으로서의 히데요리만을, 오직 그 안전 하나뿐으로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질 않는 듯했다.

 카츠모토는 후시미로 올라가 이에야스를 배알하고 신년인사를 올렸다.

 "히데요리님은 어떻게 되셨는가?"

 하고 이에야스는 배경이 알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카츠모토도 모나지 않도록,

 "죄송합니다만 감기이옵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야스는 아무 생각 없다는 듯 끄덕이며,

 "그거 걱정되는먼. 그러나 그 감기도 내년에는 낫겠지? 내년은 쿄우(京)에서 만나고 싶구나"

 하고 말했다. 즉 내년에는 꼭 오게, 라는 뜻일 것이다. 카츠모토도,

 "내년에는 꼭"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는 다짐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크게 끄덕였다.

 그 내년(1605년)이 왔다. 이 해 4월, 이에야스는 자신의 적자 히데타다(秀忠)에게 세이이타이쇼우군을 계승시켜 정권을 더 이상 히데요리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천하는 토쿠가와 가문이 세습한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히데타다는 쿄우(京)에 올라가 취임 인사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입궐하였고, 만천하의 다이묘우들은 모두 쿄우로 몰려들어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에게 축하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우다이진(右大臣) 토요토미노 히데요리만은 쿄우(京)에 가지 않았고, 이에야스 부자에게도 축하를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조바심이 났다. 히데요리를 자신 쪽으로 오게 함으로써 토요토미 가문도 이젠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고, 토요토미 가문에게도 이 새로운 관계를 인정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쿄우(京)에 살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히데요시가 죽은 뒤 정식 명칭은 코게츠니고우(湖月尼公))를 움직여 그녀에게서 오오사카(大坂)로 사자(使者)를 보내게 하였다. 키타노만도코로는 명목상 히데요리의 공식 모친이기에 그런 점에서 가장 권위가 있을 터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는 주둥이를 앙 다문 조개와 같이 그 권고를 묵살했다.

 다음 해인 1606년도 쌍방은 만나는 일 없었고, 그 다다음 해 2월에 히데요리는 천연두를 앓아 한때는 사망설조차 퍼졌다. 이에야스는 이 시기 에도(江)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히데요리는 죽은 건가? 히데요리는 죽지 않은 것일까?"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죽는 것이 천하를 위해서일 것이다. 살아있으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이를 죽이기 위한 싸움을 걸어 멸하여 자기 후손들에 대한 후환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분의 죽음을 기도하고 싶을 정도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의 늙은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는 말했다. 일찍부터 마사노부는 토요토미 가문을 조기에 멸해야 한다는 주장론자로, 지난 1604년 히데요리가 감기를 이유로 상경 거부를 했을 때도 그것을 이유로 싸움을 일으키면 좋지 않습니까? 하고 이에야스를 꼬셨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세간의 반응이 두려웠다. 고 히데요시의 무덤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도 히데요리를 죽여버리면 세간의 평판은 어찌될까? 지금은 좀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기에 서쪽으로 보낸 다이묘우들이 토쿠가와 가문에 굴복했다고는 해도 본심은 몰랐다. 특히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이르러서는 히데요리에게 은밀히 안부를 묻는 사자를 보낸다고 하며, 그 중에서도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은,
 -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고 히데요리나 요도도노에게 속삭이고 있다고도 한다. '때'라는 것은 이에야스가 늙어 죽을 때를 기다리라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히데요시의 옛 은혜를 기억하는 다이묘우들을 규합하여 정권을 에도에서 오오사카로 옮기겠다 – 고 말한다는 것이다. 마사노리가 말하길,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은 다른 다이묘우들도 이에야스를 겁내 필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나 키요마사도 이에야스에게는 은혜를 입고 있어 그를 상대로 싸움을 걸 마음도 생기지 않지만, 그러나 히데타다의 대가 된다면 더 이상 지킬 의리도 용서도 없다. 그런 것이었다......
 마사노리는 그런 것을 말하며 요도도노와 그녀의 측근들이 경거망동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정보가 이에야스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정보의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저 경솔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라면 할 듯한 말이며 다른 토자마다이묘우(
外様大名)들도 크건 작건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문제는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나이였다. 이에야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늙고 약해지는 반면 히데요리는 시간이 갈수록 성인이 되어간다.

 "이외로 히데요리님이 천연두로 돌아가시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은 오히려 카토우, 후쿠시마 패거리들이지 않겠습니까?"

 하고 마사노부는 말했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자들이지만 세키가하라에서는 이에야스 측에 서(이유는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에 대한 증오와 그 이상으로 자기 가문에 대한 보신 때문이었지만), 후쿠시마는 전쟁터에서 선봉이 되었으며 카토우는 큐우슈우(九州)에서 서군의 코니시(小西), 시마즈(島津)를 틀어막아 각각 토쿠가와의 천하 수립에 다대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남들보다 배는 더 애증이 깊은 성격인 만큼 토요토미 가문의 쇠퇴에 마음을 아파하여 히데요리에게 자기 가문에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존재나마 지키고자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여기서 히데요리가 자연사라도 하면 그들의 감정은 해방되어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사노부는 그 낌새를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에게는 불행하게도 히데요리는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졌다. 이에야스는 실망했지만, 그러나 그러는 사이 그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정보가 귀에 들어왔다. 히데요리가 생사를 왔다갔다하는 동안 그 어느 다이묘우도 그에게 병문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를 두려워하는 다이묘우의 마음이 그렇게 강하였고, 토쿠가와 정권의 견고함과 지속성을 그렇게 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것은 이에야스에게 있어서도 이외였다.

 참고로 이런 정보들은 오오사카성 안에서 보내지고 있었다. 정보제공자는 하나하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히데요리의 친위군[각주:4] 부대장 7명 중 2명(아오키 카즈시게(青木 一重), 이토우 탄고(伊藤 丹後))은 이에야스의 프락치였으며, 거기에 고 히데요시의 오토키슈우(御伽衆[각주:5])였던 오다 죠우신 뉴우도우(織田 常真 入道=노부나가(信長)의 둘째아들[각주:6])는 나이차이가 나긴 하여도 요도도노의 외사촌이었기에 오오사카성 안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히데요시 사후엔 뭐든 칸토우()를 위해서 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이에야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다.
 히데요리의 회복은 이에야스와 그의 측근에게 속으로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이제 이 젊은이를 이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는 확고한 정략과 군사밖에 없다는 것을.

 사실상 오오사카성의 실권자는 요도도노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라는 것을 이에야스도 혼다 마사노부도 알고 있었다. 마사노부는 여러 사람을 거치는 방식으로 칸토우의 사주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능숙히 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에게 하나의 공포심을 심었다. 지금 당장 신사불각(神社佛閣)을 세우지 않으면 히데요리님이 죽는다 - 는 것이었다. 히데요리가 이번에 천연두를 앓은 것도 원령(怨靈)의 저주 때문이다 – 고 하였다. 고 히데요시공은 그 생애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전쟁터에 나가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 원령들의 저주가 앞으로도 히데요리님을 괴롭힐 것이다. 천하에 쓰러져가는 신사불각이 많은데 그런 것들을 재건하면 악령들은 물러갈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남들에게 들은 그대로 요도도노에게 전했다. 요도도노는 전율했다.

  1. 정확히는 1603년 2월 12일. [본문으로]
  2. 센히메의 모친 오고우(小督)는 요도도노의 막내동생. 따라서 히데요리와는 외사촌지간이다. [본문으로]
  3. 쿠마노는 일본의 거대한 신사(神社)가 있던 곳으로, 여기서 발행되는 부적과 같은 서약서 뒤에 서로 약속한 것을 쓰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를 어기면 하늘의 벌을 받아 반드시 죽는다고 믿었다. [본문으로]
  4. 명칭은 나나테구미(七手組). 7개의 부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5. 히데요시의 말상대. 히데요시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지식을 늘려갔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즉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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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

 그 다음 해 7월. 미츠나리[三成]가 오오사카[大坂]에서 거병하였다. 이에야스의 죄상을 열거하고, 그를 물리쳐 히데요리[秀頼]의 정권을 보전한다 – 는 것이 거병의 명목이었다.
 이 때 이에야스는 칸토우[関東]의
오야마[小山]에 있었다. 히데야스[秀康]의 거성인 유우키[結城]에서 가깝다. 불과 2리[각주:1] 정도일 것이다. 이에야스[家康]는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물리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를 정벌하려는 이에야스의 공식적 위치는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대로(大老)로서이며, 이 출정은 공공을 위한 싸움이었다. 이 때문에 토요토미 가문의 여러 수 많은 다이묘우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에야스로서는 이들을 가지고 오오사카의 반란 다이묘우 무리들을 물리치면 좋았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도 의향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의향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 옛 성터가 있는 이 오야마 언덕에 다이묘우들을 모아 거취를 결정케 하였다. 운명의 선택에 주저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에야스 측에 서는 것을 소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곧이어 모두 그 자리의 분위기에 물들여져,
 - 이의 없사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2]]
와 운명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고 모두 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이에야스가 생각하던 대로 되었다. 이에야스는 만족했다. 이에야스에게 부여된 이 이후의 모든 운명은, 이 7월 25일 오야마 군의(軍議)의 성공이 기초가 되었다 – 고 말해도 좋았다.

 회의는 곧바로 미츠나리 토벌을 위한 작전회의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선봉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등 토요토미 계의 다이묘우들로 편성되어 곧바로 서쪽을 향해서 출발했다. 이에야스는 일단 에도[江戸]로 돌아간 후, 토쿠가와 군(軍)을 이끌고 토우카이도우[東海道]로 나아가기로 하였고, 적자(嫡子) 츄우나곤[中納言] 히데타다[秀忠]에게는 토쿠가와 제2군을 이끌게 하여 나카센도우[中仙道]를 이용하게 하였다.

 문제는 히데야스였다.
 전투에는 참가시킬 수 없다 – 는 방침을 이에야스는 세웠다. 이에야스가 보건대 히데야스는 필시 전쟁터에서 용맹할 것이다. 만약 큰 공을 세우기라도 한다면 크게 상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렇게 되면 히데야스의 존재가 커져 적자 히데타다와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히데야스와 함께 야전을 하고 성을 공격하며 고락(苦樂)을 함께 맛보게 될 토쿠가와 휘하의 장졸들은 어느덧 히데야스를 따르게 되어, 온화하기만 한 것이 장점인 히데타다를 능가하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음 대는 히데타다 – 라고 정하고 있던 토쿠가와 가문의 통제가 그로 인해 흔들릴 것이며, 히데야스 자신도 자신감을 팽창시켜 동생의 영화를 시기하고 모반할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히데야스를 잔류군의 장수로 하였다. 우에스기 군(軍)의 견제로써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을 지키게 하고 칸토우[関東]의 동북변에 머물면서, 먼 에도 성(城)의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 뜻을 히데야스의 진영에 사자를 보내 알렸다. 사자는 일족인 마츠다이라 겐바노카미 이에키요[松平 玄蕃頭 家清]였다.

 히데야스는 사자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듣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의 기세로,

 “말도 안돼!!”

 하고 성을 내며 소리질렀다. 무문(武門)에서 태어나 이렇게 큰 전투를 앞두고 잔류군을 맡으라니 말이 되느냐? 나는 따르지 않겠다. 오늘 밤에라도 진을 거두고, 선봉이 되어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올라갈 생각이다, 그렇게 아버님에게 전하도록……

 사자인 이에키요는 새파래져서는 오야마의 이에야스에게로 돌아왔다.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한 후,

 “알았다. 히데야스를 곧바로 여기로 오라고 전하도록”

 라고 말했다. 저런 기세가 센 젊은이에 대해서는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다. 이에키요는 그것을 몰랐다. 히데야스가 오야마의 언덕으로 올라왔다. 이에야스는 일부러 일어서서 히데야스를 진영의 현관에서 직접 맞이하여 별실로 안내했다. 마치 높으신 분을 접대라도 하는듯한 정중함이었다. 자리에서 이번 전투의 전략을 설명하며,

 “지금 동쪽의 적인 우에스기 씨(氏)를 남겨 놓은 채 서쪽의 적을 치려고 한다. 토쿠가와 가문이 죽느냐 사느냐다. 만약 서쪽의 미츠나리와 교전 중에 배후의 우에스기가 들고 일어나서 아이즈[会津] 분지에서 뛰쳐나와 칸토우 평야에 난입하여 그 기세를 타 에도를 등뒤에서 공격해 오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가문은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
 심각한 전략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이에야스는 그 문제를 해결해 놓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에 대해서는 다테 씨[伊達氏]와 모가미 씨[最上氏] 등의 걸림돌을 배치시켜 놓았으며, 또한 우에스기 씨(氏)는 칸토우[関東]를 절대 습격하지 못한다.

 이에야스는 그리 내다보고 있었다. 우에스기 씨(氏) 100만석의 병력으로는 아이즈 분지에서의 방위선이 한계이며, 밖으로 싸우러 나갈 정도의 능력은 없다.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미치지 않는 한, 그들 우에스기 병사가 칸토우 평야로 출격해 오는 일은 우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우키 히데야스에게는 그렇게 속 편히 말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 사태는 비통한 일이 아니면 안 되었다. 이에야스는 위기를 과장하고, 히데야스가 가진 젊은이의 비장감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에스기 가문은 켄신[謙信] 때 부터 천하를 떨치는 강호(强豪)이다. 카게카츠는 켄신이 남긴 법을 잘 지키고 있으며, 그 가로(家老) 나오에 야마시로노카미[直江 山城守]의 무략은 당대에 비견되는 이 없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인물로는 안되므로 고심 끝에 소장(少将)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맡아주겠는가?”

 하고 말했다. 히데야스는 사람이 달라지기라도 한 듯 기뻐하며 이 임무를 받아들였다. 이에야스는 거기에 전술상의 조언도 덧붙였다.

 “노림수는 이렇다”

 하고 이에야스는 짐짓 세세하게 말했다. 우에스기 세(勢)가 칸토우에 출격해 온다. 그것을 우츠노미야 성(城)에서 방어하며 싸우려고 생각하지 마라. 성을 버려라.

 “성을 버리는 것입니까?”

 “버리는 것이다”

 우츠노미야 성(城)은 평지에 있는 평성(平城)으로, 농성한다고 하여도 그다지 방어가 되지는 않는다. 그보다 야외에서 결전을 벌여라. 야외에 진을 치고 적이 토네가와 강[利根川]을 다 건너면 멀리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기세를 보여라. 적은 그것을 보고 당황해서는 아이즈[会津]로 돌아갈 것이다. – 고 이에야스는 말했다. 전술로써 이 이상 멋진 것은 없을 것이다. 우에스기 씨(氏)가 칸토우[関東]로 나왔을 경우, 그 너무도 장대한 원정이기에 후방에 대한 위험을 계속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약점을 자극하면 반드시 이긴다 – 는 것이었다.

 히데야스는 더욱 더 기뻐했다. 일단 거부했던 것이 얕은 생각이었다고 후회했다. 이번 전란(戰亂)에서 이보다 화려한 전선(戰線)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 토쿠가와 군단 속에서 히데타다, 히데야스, 타다요시[忠吉]라는 이에야스의 세 아들에 대해서 정곡을 찌르듯이 비평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이에야스의 직속 신하[旗本] 중 하나인 나가이 나오키요[永井 直清]가 글로 써 남겼다. 이 미츠나리 거병이라는 소식이 오야마 진영에 도착하였을 때,

히데타다 님은 무언가 걱정하는 듯 하셨고, 미카와노카미(=히데야스) 님은 히죽히죽 웃으셨다. 사츠마노카미[薩摩守=타다요시] 님은 흥분하여 명성을 높일 기회라고 기뻐하셨다
라는 것이었다. 히데야스가 히죽히죽 하고 있었던 것은 운만 좋으면 이 난을 틈타 천하를 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적자 히데타다는 모처럼 이에야스에게 물려받을 예정인 천하를 미츠나리의 거병으로 인해 놓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 는 것이었다. 이 비평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히데야스와 히데타다의 성격론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정곡을 꿰뚫고 있었으며, 이에야스도 그런 점을 염려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투는 이에야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아무런 전공도 없었다. 우에스기 씨(氏)는 결국 아이즈[会津]에서 나오지 않았고, 히데야스는 우츠노미야 성(城)에서 머물기만 하면서 단 한발의 총탄을 쏠 기회조차도 없었다. 잉여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젊은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제비만을 항상 뽑는 운명이 부여된 것 같았다.

 덧붙여 말하면 적자인 히데타다는 제2군을 이끌고 나카센도우[中仙道]를 나아가, 미노[美濃]에서 이에야스의 토우카이도우[東海道]를 거슬러 온 제1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시나노[信濃]에서 서군(西軍)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에게 방해 받아 결국 세키가하라의 일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히데타다는 성실했지만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조금 기분 나쁜 것을 표시했을 뿐으로, 싸움이 끝난 후에도 히데타다에게서 세자의 자리를 뺏지 않았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히데야스는 자신의 패기와 의욕이 덧없었다. 자신에게 나카센도우의 군을 이끌게 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이 일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일개 다이묘우의 위치로 전락하였고 이에야스는 천하를 얻었다. 다이묘우들을 재배치하고, 만들고, 폐하는 것이 행해졌을 때 히데야스를 북국(北国)에 봉했다.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北ノ庄= 현 후쿠이 시[福井市])를 거성(居城)으로 삼았고 에치젠[越前] 전체와 와카사[若狭], 시나노[信濃]의 일부를 합하여 75만석이라는 거대한 영지(領地)를 히데야스는 얻었다. 하지만 어느 곳이건 겨울에는 눈 때문에 중원으로 나올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눈의 감옥에 갇힌 것 같다”

 고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파견되어 온 부속가로[付家老] 하세가와 우네메[長谷川 采女]에게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도에서는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어 토쿠가와 막부(幕府)를 성립시켰으며, 2년 후에 쇼우군 자리를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순푸[駿府]에 은거하였다.

 히데야스는 쇼우군의 형이면서 일개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다. 성(姓)은 토쿠가와 가문의 별성(別姓)인 마츠다이라[松平]로 복귀하였지만, 세간에서는 유우키 소장[結城 少将]이라 통칭되며 조금 음습함을 띠운 존숭(尊崇)을 그에게 보냈다.

 소년일 즈음부터 그의 특징이었던 천부(天賦)의 위엄 – 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너무 예리했던 듯하지만 – 은 나이와 함께 더욱더 농후한 색채를 더했다.
 1604년 7월, 이에야스가 후시미[伏見]에 체재하고 있었을 때 히데야스는 자택에서 스모우[相撲] 대회를 열어 부친 이에야스도 초대했다. 자연히 여러 다이묘우나 이에야스의 직속 신하[旗本]들이 따라왔다. 곧이어 동과 서로 나뉜 스모우 꾼들이 14시합을 마친 후, 메인이벤트로 동서(東西)의 오오제키[大関[각주:3]
]인 '아라시옷테[嵐追手]'와 '쥰레이[順礼]' 양 선수가 모래판[土俵]에 오르게 되자 온 마당이 들끓었다.

 ‘아라시옷테’는 에치고[越後] 출신으로 쿄우토[京都]에서 활약하고 있으면서, 어느 상급 귀족[公卿]의 후원을 받으며 당대 천하제일이라 평판이 높았다.

 ‘쥰레이’는 카가[加賀] 출신으로 마에다 가문[前田家]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예전에 쿄우[京]의 키타노텐만[北野天満]에서 모금을 위해 개최된 스모우 대회에 나가 7일간 33번의 시합에서 연승하여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쥰레이[각주:4]’라고 개칭한 인물이었다.

 구경꾼들은 이 시합에 열광하며 다이묘우들도 모두 일어섰고 직속 신하들도 환호성을 질러,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이 때, 히데야스는 모래판 정면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섰을 뿐이었다. 한 마디도 안하고 서서는 천천히 마당을 둘러보았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도 모래판 주위의 모든 건물과 온 마당이 깊은 산속에 있는 양 정적에 휩싸였다.
 이에야스는 몹시 놀라며 감탄했다. 후에,

오늘의 구경, 흥이 있었지만
히데야스의 위엄이 놀랍도다.
  고 주위에 말했다. 이 천부의 위엄은 전쟁터에서 쓰여야 했지만 결국 그 기회가 그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를 두려워했다. 그를 에치젠 75만석에 봉한 뒤, 비와고 호수[琵琶湖] 동쪽 호숫가에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다시 세워,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믿을 수 있는 나이토우 씨[内藤氏]에게 지키게 하였다. 만약 오오사카의 토요토미노 히데요리가 난이라도 일으킨다면, 그의 형뻘인 에치젠의 히데야스가 이에 호응할지도 모른다 – 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오우미[近江]의 나가하마는 에치젠과 쿄우[京] 근방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으로, 히데야스가 오오사카와 합체하기 위해 남하해 왔을 때 나가하마에서 이를 막는다 – 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오사카 성(城)의 히데요리와 에치젠의 히데야스가 한편이 되었을 경우 에도의 토쿠가와 히데타다가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지 어떤지가, 이에야스에게는 의문이었다.

 실제로 소문마저 돌았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가 히데야스의 저택에 방문하였을 때 술에 취해서는,

 “만약 천하에 큰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소인는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 의미는 오오사카에서 토요토미노 히데요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약 히데야스가 형제의 정으로 히데요리 편에 선다면, 이 마사노리는 아무 생각할 것 없이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 그것을 약속한다 – 는 것으로, 에도 정권이 가장 위험시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위험한 시기도 공허해졌다.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이 소위 겨울-여름의 싸움을 일으키기 이전인 1607년에 히데야스는 병이 들어 자기 영지(領地)에서 죽었다. 34살이었다. 사인은 악성 매독과 이상쇠약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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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야스는 살아있을 때 무언가를 일으킬 거라 여겨졌다. 그가 에도에 왔을 때, 토쿠가와 가문의 접대 태도는 도를 넘어설 정도로, 쇼우군[将軍] 히데타다는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 나와,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가는 도중 히데타다는 자신의 가마를 히데야스보다 뒤에 놓으려고 할 정도였다. 히데야스는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두 가마가 나란히 하여 가는 방식이 되었다. 히데타다의 이 과도한 마음씀씀이는 필시 이에야스에게서 나온 지시였을 것이다. 히데야스에 대한 예의를 과도하게 함으로서 그의 웅대한 기상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런 주도면밀한 배려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히데야스가 태어나면서부터 그 생애는 공허하였다. 드라마틱한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그 생애는 아무 드라마틱한 요소도 가지지 못했고,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았으며, 또한 일어나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자신은 태어났는가? – 히데야스가 에치젠[越前] 키타노쇼우 성[北ノ庄城]에서 마지막 숨을 들이켰을 때, 문득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다.

=====================================================================了==================

  1. 약 7.8km [본문으로]
  2. 이 당시의 이에야스의 관직이 '나이다이진[内大臣]'으로 그 나이다이진을 중국식(唐名)으로 나이후[内府]라 불렀다. [본문으로]
  3. 지금과 달리 최고위는 요코즈나[横綱]가 아닌 오오제키였다. [본문으로]
  4. 성지'순례’의 그 ‘순례’의 일본 발음이 '쥰레이'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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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히데요시[秀吉]도 그렇게 생각한 듯 했다. 실은 이 히데야스가 마장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던 해에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태어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는 그렇게 많이 양자를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히데야스가 가지고 있던 ‘인질’로서의 정치적 효용도 과거의 것이 되고 있었다.
 - 이을만한 명문가가 있다면……
 하고 히데요시는 양자 히데야스를 다른 가문에 보내기로 마음먹기 시작했다. 후년, 같은 양자인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를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낸 것과 같은 것을 –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마장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 칸토우[関東]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에게서 이야기가 왔다. 유우키 씨(氏)라고 하면 카마쿠라 시대 때 부터의 명문가로, 센고쿠[戦国] 때 갑자기 생긴 벼락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현 당주는 하루토모[晴朝]라고 하며, 이 해 – 1590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공격했을 때, 하루토모는 내속(來屬)해서 토요토미 가문의 산하에 들어왔다. 그때 그는 히데요시와의 유대를 강하게 하기 위해,

 “소인에게는 아이가 없어 유우키 가문은 졸자의 죽음과 함께 끊어지게 생겼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가 누군가 정해주시면 그 사람을 상속자로 하겠습니다”

 하고 부탁해 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기특함을 기뻐하며,

 “그러고 보니 알맞은 사람이 있네”

 하며 곧바로 히데야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유우키 가문이라면 카마쿠라 때부터 무문(武門)의 명문가로 일본에서 유명했다.

 이 오다와라의 진(陣)에 이에야스[家康]도 참가하고 있었다. 부르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올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항상 가신으로 대하지 않고 객장(客將)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성의를 보여 일부러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에는 이런 종류의 용무에 항상 얼굴을 내미는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 ]를 선택해 알선을 맡겼다. 요시타카는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귀가(貴家)에 있어서 정말로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고 요시타카는 말했다.
 정말 그러할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이 오다와라 정벌의 종결과 함께 칸토우 250만석 이봉(移封)의 내락을 받고 있었다. 새로 이전할 곳의 수도는 꼭 에도[江戸[각주:1]]
로 하시길 – 이라는 조언까지 히데요시에게 받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낳은 히데야스가 유우키 가문을 상속받아 유우키 성(城)의 성주가 된다고 한다. 유우키 성(城)은 칸토우의 북동에 위치하며, 오우슈우[奥州]에서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새(要塞)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땅에 히데야스를 둔다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의 방위에 있어서 이 보다 고마운 일은 없었다.

 “예. 이보다 고마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는 감격하여 졸자에게 있어선 아무런 이의도 없다는 뜻의 대답을 했다.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곧바로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라는 자격으로 칸토우로 내려가, 에도에서 진짜 아비인 이에야스와 대면을 한 후 거기에서 오우슈우 가도(街道)를 거슬러 올라가 유우키 성(城)에 들어갔다. 거기서 처(妻)를 얻었다. 처는 유우키 가문의 당주 하루토모의 손녀로 사쿠코[咲子]라 하였다.
 히데야스는 이때부터 ‘
유우키 히데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석고는 5만석이었다. 전 당주인 하루토모는 은거하였고,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따로 은거료(隱居料)를 하사하였다.

 득을 보았다 – 는 것이 이에야스였다. 인질인 히데야스를 실질적으로 되돌려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더구나 그를 위해서 따로 영지(領地)를 떼어 줄 필요도 없이, 다른 가문의 땅을 상속받아서 돌아온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히데야스는 복을 가져다 주는 자식일 것이다.

 하시바 성[羽柴姓]에서 유우키 성(姓)을 이은 히데야스는 다이묘우(大名)로서의 입장도 바뀌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토쿠가와 가문에 속한 다이묘우였다.
 - 격이 떨어졌다.
 는 감정이 히데야스에게는 있었다. 거기에 조금 맘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동생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보다 끗발이 낮아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이런 노골적인 감정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있을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저 자존심 강한 히데야스의 기상으로 보건대, 이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불운한 환경에 만족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히데야스는 참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오만[おまん]의 자식은 굉장히 참을성 있는 사나이로 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런 만큼 장래가 두려웠다.

 가문을 상속한 뒤 히데야스는 그에 대한 보고 겸 인사를 하기 위해서 에도에 왔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크게 환대하라고 시켰고 아예 날을 잡아서는 이 자기 아들과 대면하였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굉장히 정중하게 히데야스를 대했다.
 - 유우키 쇼우쇼우님(結城 少将殿 –
이하 ‘쇼우쇼우[少将]를 ‘소장’으로 씀 – 역자 주).
 이라는 호칭으로 이 아들을 불렀으며, 무언가를 물어볼 때도 항상 미소를 띄웠다. 조심함이 있었다. - 라기보다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히데야스가 태어났을 때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대면을 꺼렸고 그 후 토요토미 가문에 양자로 주고 말았다. 더욱이 토쿠가와 가문의 자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가문을 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고 생각하여, 그렇게 생각하면서 히데야스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이 혈색이 좋고 눈이 큰 젊은이는 이에야스에 대해서도 히데타다에 대해서도 공손하여 조금도 그러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젊은이를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하여, 말 그대로 종기가 난 곳을 건드리는 듯이 조심조심하였다.
 - 소장님께 예의를 다할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도 머리에 새겨질 정도로 말해두었으며, 특히 세자인 히데타다에 대해서는 그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성격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만 채워 주면 되었다. 만약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히데야스의 자존심에 상처라도 주는 행태를 보인다면 이 젊은이는 필시 이에야스가 죽은 후 히데타다를 멸하고 토쿠가와 가문을 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남이 띄워주면, 지 잘난 줄 아는 병진은 아닌 듯 하구만’
 이라고도 이에야스는 관찰했다. 이 점이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다소 안심이기는 했다.

 그런데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이에야스와 만남을 가진 후 자기의 영지(領地)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상경해서는 후시미[伏見]를 떠나지 않았다. 후시미에 있는 히데요시의 의향이었다. 히데요시는 히데야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으며, 어디까지나 후시미의 궁중 안에서 근시(近侍)시키고자 있었다. 히데야스도 히데야스로 칸토우에 있는 것보다 히데요시의 슬하에 있는 쪽이 편했으며 마음도 흥겨운 듯 했다.

 이후, 히데야스는 예전 양아비인 히데요시의 죽을 때까지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1592년의 조선 침략 때는 히데요시를 따라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의 대본영까지 따라갔으며, 히데요시가 후시미로 돌아오면 그림자와 같이 호종하며 후시미[伏見]로 돌아왔다. 한시도 히데요시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토요토미 가문 양자들 중에서는 가장 충실한 양자였을 것이다. 하기사 히데요시가 놓지 않았다.

 “소장님은 내 곁을 떠나지 마시게”

 하고 히데요시는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끝에 꼭 이 말을 붙였다. 노인이 되어 심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소장 히데야스라는 젊은이가 그렇게나 귀여웠던 것인지 혹은 정치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 필시 이유는 그것들이 전부 섞여 있을 것이다.

 정치상의 이유라는 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긴 것이다. 히데야스의 존재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눈에 복잡미묘하게 비쳐져 왔다.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과 토쿠가와 가문을 잇는 가교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히데요시는 죽는다. 히데요리는 남는다. 천하의 권력은 이에야스의 손에 쥐어질지도 모른다. 히데요리의 앞날은 예전 오다 가문 공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죽을까, 쫓겨날까, 약소 다이묘우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때야말로 유우키 히데야스가 일어나 히데요리의 좋은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기대했다.

 어쨌든 히데야스는 칸토우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우키 성(城)은 가신에게 맡겨둔 채 그 자신은 오오사카[大坂]와 후시미에 저택을 지어 거기에 상주했다. 매일 후시미 성(城)에 등성하였다. 히데야스의 모습은 항상 궁중의 대기실에서 볼 수 있었으며, 히데요시는 그런 것을 노옹(老翁)의 천진난만함으로 기뻐했다.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히데요시가 기쁘다고 하면, 그리고 그것이 이에야스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히데야스는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말년, 병으로 인해 눕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때때로 히데야스에게 허리를 주무르게 하거나 했다. 어느 때인지,

 “이것이 늙어서의 즐거움이란다”

 하고 히데요시는 누워서 말했다. 젊을 때는 분골쇄신하며 일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몸의 뭉친 곳을 주무르게 한다. 이승에서 이보다 행복한 것은 없다 –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야스의 손바닥이 스쳐가고 있는 히데요시의 몸은 더 이상 육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정도로 말라 삐들어져 있었다. 히데야스는 그것에 슬픔을 느꼈다.

 “오히로(お拾=히데요리)는 너의 동생이다. 오랫동안 잘 돌보아 주렴”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검게 변색된 피부가 이제는 종이와 같아, 생기가 없었다. 그 건조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말을, 히데야스는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동생이다’
 라는 말을 들어도, 솔직히 말해 히데야스에게는 그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히데요리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천하의
숭경(崇敬)을 모으고 있었으며, 관위는 정사위(正四位)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였고, 양자이지만 형이라고 하는 히데야스는 아주 멀치감치 떨어져서밖에 배알(拜謁)할 수 없었다.

 동생이라고 하면 한 명 더 있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 히데타다였다. 그는 틀림없이 피가 이어진 동생이었지만, 그러나 이쪽의 동생도 이미 종삼위(従三位) 츄우나곤[中納言]이며, 형인 히데야스는 그 가신 격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히데야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동생은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에 비해 형이라고 하는 자신은 현실의 위세가 너무나도 낮았다. 히데야스는 지금도 여전히 유우키 5만석의 영주이며 불과 200명 정도의 무사[侍] 밖에 거느리지 못하였다. 이것이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자신의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자신이 너무 비참했으며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히데요시라는 양아비에 대해서 골육의 정과 같은 마음을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즈음엔 함께 욕실에도 들어갔으며, 욕실뿐만 아니라 히데요시는 불이 붙은 선향(線香)을 들고 손수 히데야스의 피부를 태우며 뜸을 떠준 적도 있다. 그런 기억은 진짜 아비 이에야스와는 한번도 없었다. 이에야스라는 아비의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그 몸과 스친 적은 없었다.

 지금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지금 손에 느껴지는 이 노인 쪽이 훨씬 육친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수년이 지나 히데야스가 28살 때 히데요시가 죽었다. 1598년 8월 18일이었다. 그날 밤 이후 정세는 불안정이 이어져 후시미 성(城) 밑은 밤마다 소란스러웠으며, 유언비어가 날라 다녔고, 3일이 지나지 않아 시민들은 가재를 짊어지고 도망치기 위해 거리를 내달렸다.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의 권위에 의해 억제되어있던 토요토미 가문의 파벌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공공연해졌다. 그들은 무력으로 대항하며 싸우고자 했다. 다이묘우끼리 성 밑에서 싸운다는 소문이 자주 돌았으며 더구나 이는 뜬소문이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질서가,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질서를 재건할 수 있는 인물은 어린 주군 히데요리가 아닌 이에야스여야만 한다는 자연스런 기대가 그에게 모였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정권하에서 가장 큰 다이묘우이며, 오다 가문 때부터 이어진 그 역사적 명성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가라앉히는데 충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겐키-텐쇼우[元亀-天正][각주:2]의 혼란이 다시올 것이라는 바램이나 견해가 세상의 밑바닥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1. 현 토요쿄우[東京] [본문으로]
  2. 각각 일본의 연호로 1570년~1591년까지를 지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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