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년 9월 12일 병사(病死) 69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에서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 1]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활약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平定], 조선침략[朝鮮の役 2]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참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이요[伊予]
마츠야마[松山], 이어서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를 영유(領有)했다.
영광의 시즈가타케 칠본창
카토우 요시아키는 어렸을 적부터 기마술(騎馬術)이 뛰어났기에,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자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측근인 카토우 카게야스[加藤 景泰]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83년 4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분전하여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이 되어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秀吉子飼いの武将] 3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천하 평정이나 조선 침략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요 마츠야마 시대
수많은 전공을 세워 1595년 아와지[淡路]의 시치 성[志知城] 1만5천석에서, 이요[伊予] 마사키[正木=마츠마에[松前]] 6만석에 봉해져 7월에 마사키에 입성했다. 그 후 조선에서의 공적을 평가받아 가증(加增)되어 10만석을 영유(領有)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에서는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로서 동군에 참전하여 활약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인 11월에 이요 마츠마에 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1603년 마츠야마 평야의 카츠야마 산[勝山]에 성을 쌓아 이전(移轉)하였다. 카츠야마를 마츠야마로 개명하고 번도(藩都 4)에 어울리는 성 밑 마을[城下町] 경영에 힘썼다.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冬の陣],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의 승리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세상이 되었다. 1622년 9월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 이에미츠[家光] 5가 처음 갑옷을 걸치는 의식[具足始め]을 집행하였고, 1626년에는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가 상경하였을 때 함께 따라가 지쥬우[侍従]에 임명받았다. 요시아키는 노련한 무장이었기에 쇼우군 가문[将軍家]도 그를 우대하였다.
말년에 아이즈[会津] 영전(榮轉)
요시아키는 성 밑 마을 마츠야마의 기초를 쌓았지만, 마츠야마로 이전한지 25년 후인 1627년 2월 10일(3월이라고도 한다), 므츠[陸奥] 아이즈[会津] 43만 5천석으로 영전하게 된다. 아이즈는 오우슈우[奥州 6]의 요충지였기에 지용겸비의 무장을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쇼우군[将軍]이 중의(衆議)를 모으자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변경의 중요지인
아이즈를 맡길만한 인물은 요시아키 이외에는 없습니다”
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모우 타다사토[蒲生 忠郷]가 죽은 뒤 아이즈의 영주(領主)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노신(老臣)들이 모인 회의 석상에서 요시아키를 추천한 것인데,
타카토라와 요시아키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유명했기에 그 이유를 묻자 타카토라는, 7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적인 일, 아이즈에 관한 것은 공적인 일이다.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 요시아키 이외의
적임자는 없다”
고 말했다고 한다. 요시아키도 타카토라의 이 추천에 감격하여 그 후론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이때 요시아키는 아이즈가 오우우[奥羽] 2주 8의 요충지이며, 자신은 늙었고 또한 가신들도 노련했던 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도저히 그런 중책(重責)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완고히 사퇴(辭退)했지만, 쇼우군은 요시아키와 같이 군법(軍法)과 민정(民政)에 밝은 노련한 용장이야말로 적임이라고 말하자 요시아키도 그 명령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막부의 온미츠[隠密 9]의 보고에 따른 전봉(転封)이라는 설도 있다.
온미츠를 이요[伊予]에 파견하여 마츠야마 성을 조사하였고, 또한 마츠야마 번(藩)의 동향 및 농민의 피폐(疲弊)한 모습 등을 보고받은 막부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마츠야마 번(藩)의 확립에 계획적인 정책을 실시해 왔던 요시아키에게 있어서는 지금껏 노력이 공염불이 되었다.
1627년 5월 4일.
아이즈 와카마츠 성에 입성하여 시라카와[白川] 가도를 고치는 등 도로, 교통망을 정비 하였고, 산업을 육성하여 아이즈누리[会津塗]라고
하는 칠기(漆器)나 아이즈혼고우야키[会津本郷焼] 10 등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시모리[石盛]의 금산(金山)이나 카루이자와[軽井沢]의 은산(銀山) 정비를 시작으로 광산(鑛山) 개발 등을 양성하여 번정(藩政)의 기초를
쌓기 위해 힘썼다.
요시아키는 몸소 아이즈 외곽으로 나가 농지를 돌아보았고 또한 농민들에게 정보를 모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렇게 번정 확립에 힘 쏟은 요시아키는 1631년 9월 12일에 에도 사쿠라다[桜田]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 그 무장이 어렸을 적부터 키운 무장. 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이를 때는 반드시 붙는 대명사와 같은 존재. [본문으로]
- 번의 수도. [본문으로]
- 에도 막부 3대 쇼우군[将軍] [본문으로]
- 므츠(陸奥)의 별칭. [본문으로]
-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손자. [본문으로]
- 즉 므츠(陸奥)와 데와(出羽). [본문으로]
- 첩보활동을 하던 하급 무사. [본문으로]
- 아이즈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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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만석이나 되는 영지를 얻은 걸 보면 바쿠후와 별다른 말썽 없이 오랜 기간 충성심을 발휘했었던 것 같네요...
원래 그는 미카와(三河) 출신이고, 그의 아비 또한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던지라(미카와 잇코우잇키(一向一揆)때 이에야스의 반대편에 섰기 때문에, 패배 후 방랑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출신지에 따른 우대도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요시아키의 자식이 후에 아이즈 가토번을 말아먹는 가토 요시나리 인가요? 그 전설의 가신이 말을 안들어서 가신과 싸우다가 결국 1만석으로 삭봉되었다는...
맞습니다만, 미묘하게 이름이 틀리네요. 카토우 아키나리(加藤 明成)입니다. 전설의 가신?? 혹시 반 단에몬(塙 団右衛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싸운 사람은 호리 몬도(堀 主水)라는 가신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와이쥬엠 야규우 인첩법](http://book.naver.com/search/book_search.php?squery=%BE%DF%B1%D4%C0%CE%B9%FD%C3%B8) 이라는 만화가 그 때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더군요.
임진왜란에 수군으로 와키자카,구키랑 같이 참여햇다가 와키자카가 단독으로 한산도로 출전하는 바람에 이순신의 조선수군에게 개발릴뻔햇다가 와키자카의 단독으로 개발릴뻔한건 면한인물 하지만 후의
전투에서 조선수군에게 개발리는 요시아키...
반대로 생각해보면... 요시아키라가 한산도에 참여했다면 미끼부대에 안 낚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뭐 그때는 또 이순신 장군도 다른 계책을 준비하셨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