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이로부터 몇 년이 흘러 토쿠가와 가문의 가정에도 많은 변동이 있었다. 변동 중에 최대의 흉사(凶事)는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기후[岐阜]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지시로 인하여 그 생모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자결를 강요 받아 죽은 것이다.
 1579년이었다.
 이유는 노부야스와 관련된 정치상의 의혹이었다. 비밀리에
카이[甲斐]의 타케다 가문[武田家]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았다. 당시 토쿠가와 가문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았지만, 그러나 노부나가는 믿었다. 이에야스에게 처와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노부나가는 토쿠가와 가문 적자의 기량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듣고 오다 가문 장래에 불안을 느꼈다. 그를 죽이는 것으로 노부나가는 자기 자손의 안전을 꾀했다 – 는 설도 있다.

 노부나가의 진짜 의중은 모르겠지만 그 명령은 명쾌했다. 그의 산하(傘下) 다이묘우[大名]인 이에야스에게 있어 따르던지 반항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반항하기에는 이에야스가 너무 약소했다. 동쪽에는 타케다 씨(氏)가 있어 그 무력이 여전히 토쿠가와 가문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타케다 씨(氏)의 군사적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종전대로 오다 가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가문을 보전해 가기 위해서는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죽였다. 그들을 죽인 것은 부친이며 남편인 이에야스의 마음이 아니라, 이에야스가 필사적으로 키우고 있던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이었다. 그 권력의 의지에는 이에야스 자신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노부야스의 죽음은 1579년 9월 15일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二俣]에서 행해졌고, 그의 모친이 죽은 것은 그 전달 25일 토오토우미 토미츠카[冨塚]에서 행해졌다. 노부야스 21세였다. 미카와[三河]의 백성들은 이 불행에 통곡하며,

[참으로 분하고 억울한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또 나오기 어려우니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
 라고 쑤군대며 자해한 젊은 주군을 아쉬워했다.

 이때 얻은 이에야스의 상심은 천하를 얻은 말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물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다만 이에야스의 성격은 참을성이 매우 깊기에 이런 슬픔을 충분히 견뎠다. 비통한 나머지 흐트러지는 일 없이 평소대로 군무(軍務)도 정무(政務)도 막힘이 없었다. 죽이라고 명령한 노부나가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견딘 이 인물 쪽이 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는 순서를 가지고 말하자면 오기마루(於義丸)가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이에야스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오기마루가 장래 토쿠가와 가문을 짊어질 정도로 똑똑한가, 아니면 우둔(愚鈍)한지를 판별해 보려는 것 조차 이에야스는 흥미가 없는 듯 했다. 때때로 사쿠자[作左]가 이에야스 앞으로 나아가서는 - 오기마루님의 일상을 지켜보건대 필시 뛰어난 명장이 되실 기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 말을 해보곤 했지만 이에야스는 말려들지 않았다.

 “여섯 일곱 먹은 아이의 행동으로 장래의 기량을 점칠 수는 없다”

 고 말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키우며 교육하고 있는 사쿠자에게는 그렇게 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사쿠자가 보건대 결국은 히데야스의 생모 오만[おまん]에게 문제가 있는 듯했다. 이에야스는 그 부자대면 후 오만을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불러들여 방을 하나 내 주었지만, 그러나 오만과 다시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와의 애정을 이어갈 정도의 매력이 오만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배에서 나온 아이에게도 정이 잘 가지 않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실은 어린 과부를 사랑하고 있었다. 오아이[お愛]라는 이름이었다. 그 오아이가, 노부야스가 죽은 해의 8월. 눈썹이 엷은 남자 아이를 낳았다. 모친인 오아이는 그래도 18살로 젊었으며,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에야스는 그녀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 자연히 그 핏덩이에게도 깊은 정을 보냈다. 아기이름을 나가마루[長丸]라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는,

 “타케치요(竹千代)라고 불러라”

 고 말했다. 이것로 사태는 매듭지어졌다. ‘타케치요’라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 대대의 관례로써 후계자인 아이에게 붙이는 아기이름이었다. 이에야스도 꼬꼬마일 즈음은 타케치요라 불렸으며, 먼저 죽은 노부야스도 꼬꼬마일 때는 타케치요였다. 그렇다고 하면 이 핏덩이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世子)라는 것이 될 것이다.

 다섯 살 연상의 형 오기마루는 무시되었다.
 - 동생을 세우고, 형을 무시하면 나중에 가문 내란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하고 그리 속삭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모르는 척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러한 것에 가장 신경을 쓰는 인물이였기에 은밀히 여러모로 궁리하여 오기마루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음 해, 또 오아이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셋째이면서도 오츠기마루[於次丸[각주:1]
]라고 이름 지었다. 세자의 다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장남일 터인 오기마루는 또다시 무시되었다.

*********************************************************************************************************

 세월이 흘렀다.

 이에야스의 운명이 180도로 변한 것은 1582년 6월 오다 노부나가가 쿄우[京]의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자신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살해 당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의 머리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사라졌다. 남겨진 오다 정권을 이을만한 인물은 자기라고, 이에야스는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더 빨리 미츠히데를 물리친 것은 오다 가문의 엘리트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였으며, 히데요시는 그 기세를 타고 정권을 손에 넣으려 했다. 당연 그 반대파와의 사이에서 권력 쟁탈의 내홍(內訌)이 일어나 히데요시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싸웠고, 결국에는 오다 가문의 호쿠리쿠[北陸] 총독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침으로 인해 정권 탈취 전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이 쟁란(爭亂)의 밖에 있었다. 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밖에 두었다. 이에야스는 오히려 이 난을 틈타서 자기 영지(領地)를 늘리는 것에 방침을 두고 토우카이[東海] 지방의 이삭줍기에 전념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때 이에야스는 본국인 미카와 말고는 불과 토오토우미를 가진, 양 지역을 합쳐 60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 눈깜짝할 사이에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세 지역을 주워 총 130만 석으로 땅을 늘렸다. 그 동원병력은 가볍게 3만4천을 넘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토우카이의 패왕(覇王)’이라 말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정권을 확립하였다. 그 지배영역은 킨키[近畿], 호쿠리쿠[北陸], 산인[山陰], 산요우[山陽]의 일부를 포함한 6백30만석에 가까웠다.

 당연히 양자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信雄]에게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의 동맹자가 되어 히데요시를 고발(告發)하는 입장으로 도전했다.
 히데요시야말로 오다 정권을 도둑질한 자이다 – 라는 입장이었다. 명분으로써는 유리했다. 곧이어 양군은 노우비[濃尾[각주:2]]
평야에서 대치하였고, 1584년 늦은 봄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군의 이동을 탐지하여 그것을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크게 물리쳤다. 하지만 기껏해야 국지적 승리로 전쟁 자체에는 영향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이루어가는 과정 중이었기에 여기서 이에야스와 결전을 벌이기 보다 오히려 외교로 꼬셔서 자신의 막하(幕下)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우선 오다 노부카츠를 회유(懷柔)하였다. 이에야스는 고립되었다. 거기에 그 이에야스를 히데요시는 회유했다. 이에야스는 그 권유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상 싸우면 압도적 다수인 히데요시의 군세에 멸망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9월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사이에 강화(講和)가 성립되었다. 히데요시가 내민 조건 중에 하나는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받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질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 고 이에야스는 처음에 그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전투의 승리자가 인질을 받치고 적에게 평화를 구걸하는 것은 고금동서에 예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곧 그 말을 고쳤다.
 - 양자를…
 이라는 것이었다. 인질이건 양자건 자신의 아이를 받친다는 그 내용에 변함은 없었지만, 그러나 양자 결연이라고 한다면 세간에 대해 이에야스의 체면이 선다. 이에야스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거기서 이에야스는 오기마루를 토요토미 가문에 바치기로 한다. 타케치요는 그 동생이면서 세자이기 때문에 보낼 수 없었다.
 - 이제서야 오기마루의 쓸모가 생겼군.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오만이 낳은 오기마루는 이러한 외교상의 재료로 사용되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에서 키워진 듯한 것이었다. 나이도 11살이 되어 있었다.

  1. ‘츠기(次)’는 ‘다음’이라는 뜻. 이에야스의 네째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본문으로]
  2. 미노(美'濃')와 오와리('尾'張)에 걸쳐있기에 이런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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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우 요시토시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1. 12. 22:42 Posted by 渤海之狼
소 요시토시(宗 義智)

1615 1 3일 병사(病死) 48.

 

1568 ~ 1615.

큐우슈우[九州] 평정을 끝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쓰시마[馬] 일국()를 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지휘 하에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지만 용서받아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썼다.

 

 

 



바쁜 말년

 

 쓰시마의 도주(島主) 소우 요시토시[宗 義智]는 임진, 정유의 난 때는 청년 무장으로 바다를 건너가 분전하는 한편, 명 왕조 정복의 야망을 품고 있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와 명-조선과의 사이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처 마리아의 부친 코니시 유키나가의 제 1군에서 선봉으로 싸우는 몸이면서, 대륙 정세에 어두운 히데요시의 명 정복 계획을 억지(抑止)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소우 씨[宗氏]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그에게서 주어지는 무리한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바탕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쓰시마의 도주로써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섬의 사활(死活)에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일찌감치 싸움을 막을 수 있는 길을 탐색한 것이다.

 

 그러한 미묘한 입장에 있었던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 측에 섰다.

 () 히데요시에게서 사츠마[薩摩] 이즈미 군[出水郡] 중에 1만석을 가증(加增)받았던 고마움 장인인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패전 후. 장인 유키나가의 목은 베어졌지만 요시토시는 용서받았다. 그는 마리아와 이혼하여 코니시 가문과의 연을 끊었다. 이 때가 요시토시 33살 때였다.

 

 그때부터 요시토시는 이에야스[家康]의 지시를 받으며 명과 일본의 관계 수복, 조선과의 국교 회복과 무역 협정 체결에 노력하다 48살 때 죽는다.

 그 노력은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조일(朝日) 외교의 기초를 쌓은 것이기에, 외교-절충으로 바뻤던 이 15년의 세월이 그의 너무 빨랐던 '말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일 국교 회복에 조력

 

 쓰시마 번[対馬藩]의 조일 강화교섭(講和交涉)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퇴한 다음 해인 1599년에 이미 착수되고 있었다.

 쓰시마는 돌이 많고 거친 땅이기에, 섬에서는 거의 쌀을 얻을 수 없어 조선과의 무역으로만 섬을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빨리 무역을 재개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아직 무역에 대해서까지는 생각이 없었지만, 쓰시마 번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 교섭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요시토시는 이 해와 다음 해(1600)에도 강화 교섭의 사자(使者)를 조선으로 보냈지만, 그들은 잡힌 후 아직 조선에 머물고 있던 명군에 넘겨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명군이 일본에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일어날 즈음 귀국한 후부터 또다시 강화 교섭을 진행시켰지만 사태는 호전되지 않은 채 1604년을 맞이한다. 이 해에 부산에서의 무역을 허가하는 사승(使僧 유정(惟政)손 문욱(孫 文彧)이 일본 국내의 상황을 살핀다는 숨겨진 임무를 가지고 조선에서 파견되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秀忠]가 - 요시토시와 함께 상경(上京)한 이들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회견한 것은 다음 해인 1605 3월이다. 후에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국교를 담당하는 입장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막부(幕府)에 인정받아 히젠[肥前] 내에 2800석을 따로 하사 받았다. 이를 보면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관계 수복에 차츰 적극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는 사이 1607 1월.

 조선 사절단(정사 여우길(呂 祐吉), 부사 경 섬(慶 暹), 서장관 정 호관(丁 好寬)) 460명이 파견되어 요시토시와 함께 쓰시마에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히데타다를 만났다.

 외국 사절단(使節團)이 에도로 온 것은 획기적인 것으로, 토쿠가와 막부의 위세를 일본 국내에 알릴 수 있는 효과도 가져다 주었다. 히데요시로 인해 무너진 조일 관계는 이렇게 겨우 수복되어 국교가 회복된 것이다.

 

조선 무역을 재개

 

 사실을 말하자면, 요시토시는 조선 사절과 이에야스 사이에서 이에야스의 국서(國書)와 조선의 국서를 위조했던 것이다. 이유는 길어지기에 생략하지만 그런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무엇보다 쓰시마를 위해서 조일 무역 회복을 너무 갈망(渴望)한 나머지 그랬던 것이다.

 조일 무역은 1609기유약조(己酉約條)로 재개되었다. 조선과 쓰시마 번[対馬藩] 사이에서 맺어진 이 무역협정은 예전과 비교하면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요시토시는 완전 부활을 목표로 노력하던 중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 직전에 쓰시마에서 죽었다.

반쇼우 원[万松院]에 있는 요시토시의 묘(墓) - 나가사키 현[長崎県] 이즈하라 정[厳原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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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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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631년 9월 12일 병사(病死) 69세.

1563년 ~ 1631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에서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활약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平定], 조선침략[朝鮮の役[각주:2]]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참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이요[伊予] 마츠야마[松山], 이어서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를 영유(領有)했다.



영광의 시즈가타케 칠본창

 카토우 요시아키는 어렸을 적부터 기마술(騎馬術)이 뛰어났기에,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자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측근인 카토우 카게야스[加藤 景泰]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83년 4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분전하여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이 되어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秀吉子飼いの武将[각주:3]]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천하 평정이나 조선 침략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요 마츠야마 시대

 수많은 전공을 세워 1595년 아와지[淡路]의 시치 성[志知城] 1만5천석에서, 이요[伊予] 마사키[正木=마츠마에[松前]] 6만석에 봉해져 7월에 마사키에 입성했다. 그 후 조선에서의 공적을 평가받아 가증(加增)되어 10만석을 영유(領有)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에서는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로서 동군에 참전하여 활약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인 11월에 이요 마츠마에 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1603년 마츠야마 평야의 카츠야마 산[勝山]에 성을 쌓아 이전(移轉)하였다. 카츠야마를 마츠야마로 개명하고 번도(藩都[각주:4])에 어울리는 성 밑 마을[城下町] 경영에 힘썼다.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冬の陣],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의 승리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세상이 되었다. 1622년 9월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 이에미츠[家光[각주:5]]가 처음 갑옷을 걸치는 의식[具足始め]을 집행하였고, 1626년에는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가 상경하였을 때 함께 따라가 지쥬우[侍従]에 임명받았다. 요시아키는 노련한 무장이었기에 쇼우군 가문[将軍家]도 그를 우대하였다.

말년에 아이즈[津] 영전(榮轉)

 요시아키는 성 밑 마을 마츠야마의 기초를 쌓았지만, 마츠야마로 이전한지 25년 후인 1627년 2월 10일(3월이라고도 한다), 므츠[陸奥] 아이즈[会津] 43만 5천석으로 영전하게 된다. 아이즈는 오우슈우[奥州[각주:6]]의 요충지였기에 지용겸비의 무장을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쇼우군[将軍]이 중의(衆議)를 모으자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
변경의 중요지인 아이즈를 맡길만한 인물은 요시아키 이외에는 없습니다”
 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모우 타다사토[蒲生 忠郷][각주:7]가 죽은 뒤 아이즈의 영주(領主)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노신(老臣)들이 모인 회의 석상에서 요시아키를 추천한 것인데, 타카토라와 요시아키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유명했기에 그 이유를 묻자 타카토라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적인 일, 아이즈에 관한 것은 공적인 일이다.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 요시아키 이외의 적임자는 없다”
 고 말했다고 한다. 요시아키도 타카토라의 이 추천에 감격하여 그 후론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이때 요시아키는 아이즈가 오우우[奥羽] 2주[각주:8]의 요충지이며, 자신은 늙었고 또한 가신들도 노련했던 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도저히 그런 중책(重責)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완고히 사퇴(辭退)했지만, 쇼우군은 요시아키와 같이 군법(軍法)과 민정(民政)에 밝은 노련한 용장이야말로 적임이라고 말하자 요시아키도 그 명령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막부의 온미츠[隠密[각주:9]]의 보고에 따른 전봉(転封)이라는 설도 있다.
 온미츠를 이요[伊予]에 파견하여 마츠야마 성을 조사하였고, 또한 마츠야마 번(藩)의 동향 및 농민의
피폐(疲弊)한 모습 등을 보고받은 막부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마츠야마 번(藩)의 확립에 계획적인 정책을 실시해 왔던 요시아키에게 있어서는 지금껏 노력이 공염불이 되었다.

 1627년 5월 4일.
 아이즈 와카마츠 성에 입성하여 시라카와[白川] 가도를 고치는 등 도로, 교통망을 정비 하였고, 산업을 육성하여
아이즈누리[会津塗]라고 하는 칠기(漆器)나 아이즈혼고우야키[会津本郷焼[각주:10]] 등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시모리[石盛]의 금산(金山)이나 카루이자와[軽井沢]의 은산(銀山) 정비를 시작으로 광산(鑛山) 개발 등을 양성하여 번정(藩政)의 기초를 쌓기 위해 힘썼다.

 요시아키는 몸소 아이즈 외곽으로 나가 농지를 돌아보았고 또한 농민들에게 정보를 모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렇게 번정 확립에 힘 쏟은 요시아키는 1631년 9월 12일에 에도 사쿠라다[桜田]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3. 그 무장이 어렸을 적부터 키운 무장. 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이를 때는 반드시 붙는 대명사와 같은 존재. [본문으로]
  4. 번의 수도. [본문으로]
  5. 에도 막부 3대 쇼우군[将軍] [본문으로]
  6. 므츠(陸奥)의 별칭. [본문으로]
  7.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손자. [본문으로]
  8. 즉 므츠(陸奥)와 데와(出羽). [본문으로]
  9. 첩보활동을 하던 하급 무사. [본문으로]
  10. 아이즈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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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우치 가즈토요[ 一豊]

1605 9 20일 병사(病死) 61.

 

1546 ~ 1605.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아네가와 강 전투[姉川の戦い] 등을 경험하였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휘하에서 토오토우미[遠江] 카케가와[掛川] 성주(城主)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토사[土佐] 일국을 하사 받아, 토사 번[土佐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카즈토요에게 말을 살 수 있는 돈을 건 낸 부인과의 일화가 유명.

 

 

 




세키가하라[ヶ原]와 카즈토요

 

 [쌈짓돈]으로 남편에게 명마(名馬)를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었고 그 명마 덕분에 전공을 세워 출세한 일화가 유명해져 내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부인 치요[千代 와카미야 토모오키[若宮 友興]의 딸, 후의 켄쇼우인[見性院]].

 그런 현모양처가 이목을 끌기에 그다지 눈에 띄는 무장이 아니라 여겨지는 야마우치 카즈토요이지만, 수많은 전공을 세워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가로(家老)에 임명되었으며 1590년 오다와라[小田原]평정된 다음에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지(要地)인 카케가와 성[掛川] 5만석이 주어졌다.

 

 그렇게 히데요시에게 중용(重用)받은 카즈토요였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이에야스[家康]에게 접근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 비축한 식량뿐만 아니라 아예 카케가와 성을 동군에게 통채로 바쳤다.[각주:1] 이것을 계기로 다른 다이묘우[大名]들도 앞다투어 성을 받쳤다고 한다. 더구나 조카인 마사토요[政豊]를 오다와라에 인질로 입성시키고는 출진하였다.

 이런 카즈토요의 행동에는 처 치요의 조언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치요는 오오사카[大坂]에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동향과 여러 다이묘우[大名]부인이나 자녀의 정세 등을 기록한 밀서를 남편에게 보내면서, 밀서를 전하는 전령의 입을 통해서 봉투를 열지 않은 채 이에야스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토사[土佐]의 태수(太守)

 

 세키가하라[ヶ原]에서의 전공으로 토사[土佐] 20만석으로 가증(加增)된 카즈토요는 1601년 우라토[浦戸]에 입성했다.

 카즈토요는 영국(領國) 통치의 상징으로써 같은 해 10월에 오오타카사카 성[大高坂 - 후에 코우치 성[高知城]]으로 개명 - 의 축성과 성 밑 마을[城下町]의 경영에 착수했다. 이 배경에는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 체제를 불식(拂拭)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배경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쵸우소카베 유신(遺臣)의 습격을 경계해가면서 축성을 감독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각주:2]. 한편 이 축성과 성 밑 마을 경영은 야마우치 가문을 결속시켜 가신단 편성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코우치 성이 굉장히 실전적인 성곽인 것을 보면 카즈토요는 쵸우소카베 유신의 반란을 염두에 두고 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카즈토요는 우라토 반란[浦戸 一揆][각주:3]나 타키야마 반란[一揆]의 평정에 고심했다.

 

 1603 3 25일.

 종사위하(四位下) 토사노카미[土佐守]가 되었지만 영내(領內)에는 여전히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 11월에는 타카이시 사마노스케[高石 左馬助] 등이 타키야마 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타키야마 잇키이다. 야마우치 나이키[ 記], 야마우치 카몬[ 掃部]을 파견하여 이를 간신히 처리했다.

 

 카즈토요는 성 밑 마을의 건설과 함께 도로의 정비, 중신(重臣)을 각지에 배치한 지배 체제의 강화, 검지([각주:4]), 인구 조사 등 농촌 지배, 법제의 시행 등 영국 지배의 확립에 정력을 쏟았다.

 1601년에는 가신의 적극적인 등용, 지배의 조직화를 꾀함과 동시에 영내(領內)순시하며 지형(地形), 풍토, 사람, 산업 등의 실정을 파악하는데 힘썼다.

 

카즈토요의 후계자

 

 카즈토요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자로 동생 야스토요[康豊]의 아들 즉 카즈토요에게는 조카가 되는 쿠니마츠[松]를 양자로 삼았다. 쿠니마츠는 1605 5월에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를 알현했을 때 '타다[]'라는 이름 글자를 하사 받아 타다요시[忠義]라 개명했다.[각주:5]

 

 그 이전인 4 17일.

 쿠니마츠(후의 타다요시)가 후시미[伏見]의 저택에서 이에야스의 양녀 쿠마히메[이에야스의 이부제(異父弟) 마츠다이라 사다카츠[松平 定勝]의 둘째 딸)와의 혼약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결혼식은 안타깝게도 카즈토요가 죽은 뒤인 1606 4 17일에 행해졌지만 타다요시는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서임되어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임관된다.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인척 관계를 맺는 것에 성공한 카즈토요는 야마우치 가문[山内家]의 장래를 걱정했던 만큼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안심하여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5개월 뒤인 1605 4 20(21일이라는 설도 있다) 죽었다. 향년 61(60세라는 설도 있음). 너무도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지주막하출혈의 가능성이 있다.

 

 여담이지만 카즈토요의 처가 쌈짓돈을 주어서 명마를 사게 했다는 내조의 공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하지만, [야마우치 가문 사료 카즈토요공 기록(山内家史料一豊公記)]에는 실려 있지 않다. 당시의 사료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실인지 어떤지 판단할 순 없지만,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6]]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7]], 무로 큐우소우[室 鳩巣[각주:8]]가 쓴 [큐우소우 소설(鳩巣小說)], 유아사 죠우잔[ 常山] [죠우산 기담(常山紀談)] 등에는 기록되어 있기에 에도 시대 중기 즈음에는 이 이야기가 유명했을 것이다.

  1.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의 번안보[藩翰譜]에 따르면, 이에야스에게 성과 쌀을 바치는 것은 원래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의 아들이며 당시 하마마츠 성[浜松城]의 성주였던 호리오 타다우지[堀尾 忠氏]가 친했던 카즈토요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카즈토요가 타다우지가 말하기 전에 말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디어 도용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항상 똑같은 복장을 한 다섯 명의 카게무샤[影武者]와 함께 움직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즈토요가 토사[土佐]로 입국하기 전에 토사[土佐]의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들이 우라토 성의 개성을 거부. 개성 조건으로 그때까지의 주군인 모리치카[盛親]에게 토사[土佐] 반국(半国)의 할양을 요구하다 몰살된 사건. [본문으로]
  4.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5. 상기에 세키가하라 때 인질로 받쳐진 마사토요(政豊)의 형이다. [본문으로]
  6.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7. 에도 막부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 번주[甲府藩主]로 있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 가(家)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8. 에도 시대 중기의 유학자, 8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의 브레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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