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재판火起請

일본사 이것저것 2024. 2. 29. 15:16 Posted by 渤海之狼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의 고향으로 유명한 일본 가모우군蒲生郡 히노日野에서 1619년 하나의 재판이 행해짐.

 

히노 산日野山의 이용을 두고 동측 9개 마을과 서측 9개 마을이 오랫동안 다툼. 오랫동안 다투다 보니 권리관계가 꼬이고 꼬였는지 에도 막부江戸幕府도 어떻게 확정을 짓지 못한 듯 타툼의 시간만 흐름.

 

이때 서쪽 마을 측의 카쿠베에角兵衛라는 사람이 한 제안을 함.

 

그것은 불재판火起請.

불에 달군 철편을 들어 화상이 적은 쪽이 승자, 심한 쪽이 패자가 되는 것.

신이 굽어 살피어 죄가 있는 쪽에 화상을 더 많이 입게 한다는 논리.

 

'카쿠베에'라는 인물은 서쪽 마을 사람들이 먹여 살리고 있던 낭인이었다 함. 나름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던 이 사람은 불재판 제안뿐만아니라 서쪽 마을에 은혜를 입었다며 스스로 서쪽 마을의 대표로 철편 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함.

 

이 제안이 동쪽 마을에 전해지자 동쪽은 패닉.

거절하면 지들이 권리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신이 보기에 켕기니까 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으니. 그러나 졸라 겁나서 우짜나~ 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한다며 손을 듬.

 

그러나 서쪽과 동쪽이 불재판에 관해 이러저러한 교섭하던 중에 서쪽이 동쪽의 촌장庄屋 중 하나인 키스케喜助에게 겁쟁이라는 소리를 했나 봄. 키스케는 분노하여 자신이 한다고 하여 동쪽 대표로 촌장 키스케가 대표로 나섬.

 

재판당일.

에도 막부에서 심판으로 파견된 무사들의 입회하에 불재판이 행해짐.

 

도가니에서 도끼 모양을 한 철편을 빨갛게 될 때까지 달구고 그걸 도가니에서 약 9미터 앞에 있는 선반에 올려 놓는 것.

 

, 부정을 막기 위해 서쪽이 가져온 철편은 동쪽이, 동쪽이 가져온 철편은 서쪽이 들기로 함.

 

서쪽의 카쿠베에, 동쪽의 키스케 둘 다 새하얀 옷을 입고 준비.

특히 동쪽 키스케의 모친은 아들이 병신짓을 하면 그자리에서 죽이겠다며 언월도를 들고 옆에서 지켜봄.

 

시작 소리가 울림.

 

동쪽 키스케는 들고서는 달려나갔으나 역시 너무나 뜨거웠는지 약 5.5미터 정도 갔을 때 선반을 향해 도끼를 내던짐. 너무 달궈졌던지 나무로 된 선반이 타서 구멍이 뚫릴 정도 였다 함.

 

제안자이기도 했던 서쪽 카쿠베에는 너무나 뜨거웠는지 들자마자 떨굼. 한발자욱도 떼지 못한 채.

 

도끼를 떨군채 눈치만 보던 카쿠베에는 곧바로 도망치려했으나 막부의 무사들이 붙잡음. 다음 날 카쿠베에는 조리돌림 당한 뒤 십자가형에 쳐해짐.

 

후에 조사한 바로는,

카쿠베에는 불에 달구면 빨갛게 되긴 하는데 그다지 뜨거워지지 않는 철편을 준비했으나, 당일 공정을 위해 바꾸게 된 것이 패착.

 

그리하여 히노산은 동쪽 9개 마을의 소유가 되었고, 키스케는 넓은 땅을 얻을 수 있었으며 키스케 보다 먼저 입후보 했던 사람에게도 작지만 역시 땅을 얻었다고 함.

 

일본 신의 재판의 역사日本神判史, 시미즈 카츠유키清水克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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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리尾張의 한 마을에 진베에甚兵衛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옆 마을에 사스케佐介라는 사람이 삼. 둘은 친구였음.

 

근데 진베에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 날 밤에 사스케가 진베에의 집에 물건 훔치러 감. 그러다 진베에의 부인이 잠에서 깨서 싸움을 벌임. 진베에의 부인이 더 쎘는지 사스케 도망. 도망치다 사스케는 칼집을 진베에의 부인에게 빼앗김.

 

진베에 측은 칼집이란 증거를 가지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관청에 신고를 했지만, 하필 사스케는 노부나가의 젖형제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의 부하였음.

(노부나가는 애기 때 이빨질이 심해서 유모의 유두를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는데 츠네오키 모친에게만은 얌전히 젖을 빨았다 함)

 

어찌보면 친형제보다 더 대우받는 젖형제이다 보니 노부나가의 부하들도 츠네오키에게 일해라절해라 하질 못함.

 

결국 불재판하기로 함.

노부나가의 부하들의 입회하에 양측의 인원들이 모여서 불재판을 행하여 사스케가 짐. 그러나 이케다 츠네오키 무리가 사스케를 감싸며 소란을 부림.

 

이렇게 소란이 나자 매사냥 나갔다 돌아오던 노부나가가 이들을 보고 시끌시끌하니 들림.

 

뭔 일인데 서로 활과 창에 갑옷까지 입고 소란인고?

하며, 양측의 주장을 들음.

 

노부나가 안색 변함.

 

불재판을 어떻게 했냐? 철편은 어느 정도 달구었나? 똑같이 달구어라.

 

내가 이 달구어진 철편을 들고 똑같이 할 것이고 그렇게 내가 성공하면 저 사스케는 내 맘대로 할 것이다.

 

라고 하고서는 빨갛게 달구어진 철편을 들고 3보 걸어 선반에 올려놓고는,

 

보았느냐!

 

라 외치고는 사스케를 죽임.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卷首 불재판 행하신 것에 대해火起請御取候事

 

 킷포우시 님[吉法師殿]이 13살 되셨을 때, 하야시 사도노카미[林 佐渡守][각주:1], 히라테 나카츠카사[平手 中務][각주:2], 아오야마 요소우에몬[青山 與三右衛門][각주:3], 나이토우 쇼우스케[内藤 勝介]를 거느리시어, 후루와타리 성[古渡の御城]에서 관례식을 치르시고는, 오다 사부로우 노부나가[織田 三郎 信長]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셨다. 주연과 축하연이 무척이나 성대히 치러졌다.

 다음 해[각주:4], 오다 사부로우 노부나가는 성인이 된 기념으로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때 히라테 나카츠카스노죠우[平手 中務丞][각주:5]가 여러 준비를 해 주었는데, 그 모습은 빨간 줄이 그어진 두건, 하오리[각주:6], 말에도 갑옷을 걸친 모습이었다.

 (노부나가는) 스루가[駿河]의 군세가 배치된 미카와[三河]의 키라[吉良]와 오오하마[大浜]에 병사를 보내어 이곳저곳에 불을 지르게 한 후, 이날은 야영을 하셨고, 다음 날 나고야[那古野]로 귀성하셨다.

  1.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 [본문으로]
  2. 히라테 마사히데[平手政秀] [본문으로]
  3.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 秀勝]. 위키에서는 아오야마 노부마사[青山信昌]로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라는 기록만 있다고 하니, 이 블로그에선 아오야마 히데카츠[青山秀勝]로 한다 사족으로 아오야마는 1544년 9월,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織田信秀]의 미노[美濃] 이나바야마[稲葉山] 공격 때 전사. 노부나가가 13세가 되는 해는 서력으로 1546년으로 이때는 이미 사망한지 2년이 지난 후로. 이는 작자 오오타 큐우이치[太田牛一] 착각으로 여겨지고 있음. [본문으로]
  4. 1547년 [본문으로]
  5. 상기의 '히라테 나카츠카사[平手中務'와 동일인물. [본문으로]
  6. 갑옷 위에 입는 조끼같이 생긴 옷. [본문으로]

 ‘성격 자체가 장난꾸러기’라고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사서(史書)에 쓰여있듯이, 마에다 케이지로우 토시타카[前田 慶次郎 利太=토시오키[利大], 토시마스[利益]라고도 전해진다 [각주:1]]는 기행(奇行)으로 유명하다.


 카가[加賀] 100만석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조카이다. 그러나 조카이긴 하지만 피가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휘하였던 오와리[尾張] 아라코 성[荒子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히사[前田 利久]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기에, 토시히사는 자기 마누라의 오빠인 타키가와 기다이유우 마스시게[滝川 義太夫 益重][각주:2]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각주:3]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이 양자로 들어온 인물이 바로 케이지로우[慶次郎]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토시히사의 셋째 동생인 토시이에를 가문 당주로 앉혀버린 것이다.[각주:4] 그리고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의 가신으로 편입된다.


 무용(武勇)도 뛰어났지만 가무음곡(歌舞音曲)도 좋아하였다. 그런 케이지로우를 토시이에는 ‘세상을 얕보는 녀석’이라며 엄히 질책하였다. 케이지로우는 그런 잔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자리였을 지도 모를 당주자리에 앉아있는 삼촌이 맘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이거 떠나야 겠구먼”
 이렇게 맘을 정했지만, 그냥 나가기에는 재미가 없었다. 케이지로우는 궁리하였다.


 어느 날인가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에게 다도(茶道)의 자리에 초대하고 싶으니 부디 참석해 주시기를 바란다며 요청하였다. 토시이에는 ‘허허~ 이제 케이지로우도 맘을 고쳐 잡았나 보군’이라며 기쁜 마음으로 케이지로우의 저택으로 갔다. 케이지로우는 겨울이니 우선 뜨거운 물로 목욕부터 하라고 토시이에에게 권했다. 추위에 떨던 토시이에는 케이지의 마음씀씀이가 더 맘에 들었다.      
 하지만 케이지로우는 한 번 맛 좀 보라는 심산이었다. 욕조에는 냉수로 채우고 욕실에는 누가 보아도 물이 뜨거운 듯이 보이기 위해서 김이 나오도록 욕실 주변에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을 여러 개 두었다. 그렇게 김이 가득 차 있기에 속은 토시이에는 욕조로 풍덩하고 몸을 던진 것이다.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든 토시이에는,
 “네 이놈 케이지로우!!”
 하고 화냈지만, 그런 토시이에를 무시한 채 뒷문에 메어두었던 명마 마츠카제[松風]에 올라타자 마자 곧바로 말달려 떠난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였다. 하지만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로 지장(智將)으로 이름 높은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우정을 맺은 뒤[각주:5]에는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기게 된다. 이때 케이지로우는 코쿠조우인 횻토사이[穀蔵院 ひょっと斎]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기묘한 옷을 입고 카게카츠를 알현했다고 한다. 기인(奇人)으로 이미 유명했기에 우에스기 가문에서는 2000석[각주:6]을 하사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케이지로우는 나오에 카네츠구를 따라 데와[出羽]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공략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당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루가 붉은 색인 창을 들고 ‘대 후헨모노[大ふへん物]’라 쓰여진 큰 깃발을 등에 지고 전투에 나선 것이다. 우에스기 가문은 유명한 무사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이들은 케이지로우의 이 등깃발[旗指物]을 보고 화를 냈다.
“신참주제에 대무변자[大武辺者=다이부헨모노[だいぶへんもの]]라는 것을 메다니 무슨 생각이냐”
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케이지로우는 낄낄대더니,
“이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하는군요. 여러분들은 시골뜨기다 보니 글자의 촉음(濁音)도 모르나 보네요. 이는 ‘대 불편자[大不便物=다이후헨모노[だいふへんもの]]’라 읽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낭인생활을 하여 가난하기에 이리 썼을 뿐이외다”
고 놀렸다고 한다.

굉장히 궁핍하여 불편하게 산다[だいふへんもの]고 쓰인 등깃발

 이때 입은 옷들도 눈에 띄었다. 검은 갑옷에 새빨간 전포[羽織], 황금색 염주를 목에 걸고, 금칠을 한 표주박을 옷깃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자신과 타는 말에는 자신과 똑같은 두건[頭巾]을 씌었다고 한다.


 나중에 주군 카게카츠[景勝]를 수행하며 에도[江戸]에 갔을 때, 또다시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 훈도시의 옆에 작은 칼[脇差]를 차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을 보고 같이 입장하려던 사람들도 따라서 작은 칼을 찬 채 들어갔다. 케이지로우는 욕탕에 들어갔다 나온 뒤 차고 있던 작은 칼을 꺼내어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작은 칼은 사실 대나무로 된 때주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작은 칼을 차고 온 사람들은 칼자루도 젖고 쇠에 습기가 차 고생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쟁 뒤 우에스기 가문은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 되었기에 가신들 중에는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우에스기 가문의 기풍을 사랑했던 케이지로우는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마에다 게이지로[前田 慶次郎]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는 엣츄우[越中] 아오 성[阿尾城]에 있었지만[각주:7], 1590년[각주:8] 아이즈[会津]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겼고, 말년에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강의하거나 하였다. 카게카츠[景勝]의 아들 사다카츠[定勝] 때 요네자와[米沢]에서 죽었다.[각주:9]

  1.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따라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는 주로 토시사다[利貞]라는 이름을 썼던 듯. 이 ‘토시사다’를 새긴 표주박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함 [본문으로]
  2. 마스우지[益氏]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또는 마스시게의 부인으로 이미 마스시게의 자식을 임신했던 여성을, 토시히사가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 여성과 결혼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1569년의 일. 사족으로 아라코의 마에다 토시히사는 후년 노부나가에게 과거 반항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당하는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노부나가에게 개기는 히데사다의 의향에 따라 자주 노부나가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기에, 그런 반항적인 토시히사를 경질하여 노부나가의 측근인 토시이에[前田利家]를 마에다 가문의 당주로 앉혔을 가능성도 크다. 단 이는 역자인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일본에선 아직까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는 없으니 주의요망. [본문으로]
  5. 대략 1597년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라는 승려의 소개로 묘우신 사[妙心寺]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단 현재 남아있는 사료(慶長五年会津御在城分限帳=1600년 아이즈에 거주하는 가신 명부) 에는 외인부대[組外衆]의 필두 1000석이라 함. [본문으로]
  7. 이 당시 아오 성의 성대[城代]로 약 6000석의 지행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에 카네츠구와 만난 것이 1597년이라 하니 1598년이 맞을 듯. [본문으로]
  9. 생몰년에 대해서 마에다 가문의 자료에 따르면 생년은 1533년이고 야마토[大和]에서 1605년에 73세로 죽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 사료에 생년은 1541년이며 요네자와[米沢]에서 1612년에 70세로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신슈우 우에다 성[信州上田城]은 검은 판자벽[黒板壁]의 망루와 함께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성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의 역사를 보면 사나다 가문의 재성 기간은 마사유키[昌幸]와 그의 장남 노부유키[信之]를 합쳐도 40년에 불과하며[각주:1], 그 뒤를 이어 들어온 센고쿠 가문[仙石家][각주:2]은 85년이며[각주:3], 그 다음을 이은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각주:4]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160년이라는 오랜 기간 이 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현재 남아있는 우에다 성[上田城]의 망루는 센고쿠 가문이 있을 때 세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에다 성[上田城]과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연결성은 역사적 시간상으로 보면 가장 짧지만,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상에는 센고쿠 가문이나 마츠다이라 가문의 이름이 우에다 성과 연결되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즉 불운하게도 센고쿠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은 사나다의 이름에 가려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정도로 사나다와 우에다 성의 이름을 높인 사실은 어떤 것인가?

 사나다라는 명성만으로 보자면, 그것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사나다 일본 제일의 무사[真田日本一の兵]」라며 칭송 받았던 유키무라[幸村]가 그 중심일 것이다. 그러나 유키무라의 명성은 우에다 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유키무라의 부친이며 축성자인 마사유키가 이 성의 주역이다. 사실 사나다의 위명(威名)이라는 것도 마사유키가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후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목전으로 다가왔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마사유키와 함께 서군 측에 섰기에, 전쟁이 끝난 후 키이[紀伊]의 쿠도야마[九度山]로 유배 당했던 사나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 성[大坂城]에 입성하였는데, 그 소식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전해졌다. 이때 이에야스는 “아비냐 아들이냐?”라며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었으며, 더구나 그때 문을 손으로 잡고 있었는데 그 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었다. 입성한 것이 유키무라라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떨림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 즈음 마사유키는 이미 죽어 이 세상에는 없었지만, 이에야스는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서도 혼란에 빠져 몸을 떨 정도였던 것 같다.

 상기의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야스가 이리도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찾자면 이에야스는 두 번이나 우에다 성의 마사유키를 공격하여 두 번 다 격퇴 당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실이 이에야스에게는 사나다 마사유키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패배자 근성에 가까운 심리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의 부친 유키타카[幸隆] 때부터 옆 나라 카이[甲斐]의 주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을 섬겼다. 마사유키는 유키타카의 셋째 아들로 코우후[甲府]에서 태어나, 소년일 즈음부터 신겐의 측근 시동[小姓]이 되었으며, 카이의 명문 무토우 가문[武藤家]을 이어, 무토우 키헤에[武藤 喜兵衛]라는 이름으로 신겐의 곁에서 활약하였다. 신겐은 그런 마사유키를,
 “무토우 키헤에와 소네 타쿠미[曽根 内匠][각주:5]는 내 양 눈과 같다”
 라 평했다. 이런 마사유키가 신겐의 외교, 군략(軍略), 전법을 배우지 않을 턱이 없다. 또한 부친 유키타카는 신겐 휘하의 모장(謨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부친의 지모도 마사유키에게 흐르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1582년. 주가(主家)인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오다 가문[織田家]에게 공격 당한 끝에 도망치다 텐모쿠 산[天目山]에서 죽자, 마사유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따랐으며,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횡사하자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에 속하였고 이어서 토쿠가와[徳川] 그리고 우에스기[上杉] 식으로 주가(主家)를 바꾸어, 어떻게든 하나의 세력으로 열강들 사이에 존재감을 발휘해 갔는데, 이 수완은 주군 신겐, 부친 유키타카에게 물려받은 재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요시[秀吉]도 이러한 마사유키를 ‘종잡을 수가 없어 얕잡아 볼 수 없는 자[表裏比興の者]’라고 평할 정도였다.

 어쨌든 이야기를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사유키와의 싸움으로 되돌리자.
 1584년. 마사유키는 이 즈음 이에야스에 속해있어, 이에야스는 적대관계였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손을 잡고 있던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에 대항하기 위해 우에다 성[上田城]을 쌓았지만, 그 다음 해 이에야스가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 화의(和議)를 맺으면서 사나다의 영지 코우즈케[上野] 누마타 지방[沼田地方]을 호우죠우 가문에 넘긴다는 방침을 정하고는 마사유키에게 통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사유키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 누마타는 이에야스에게 받은 것이 아니오. 우리들의 힘으로 손에 넣은 것이외다.”
 며 거절하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런 마사유키의 반항에 격노하며 토리이 모토타다[鳥居 元忠],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 忠世] 등에게 8000의 병력[각주:6] 을 거느리게 하여 우에다 성을 공격시켰다.
 대군을 자랑하는 토쿠가와 군[徳川軍]은 단번에 성 밑 마을을 돌파하여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사유키의 책략이며 바라던 바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유유히 바둑을 두고 있던 마사유키는 적을 충분히 끌어들였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명령을 내려, 성안에서 철포를 일제히 발사하게 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대군인 만큼 한번 혼란에 빠지자 헤어나오질 못했다. 성 밑 마을에서 갈팡질팡 도망치는 토쿠가와 군을 목표로 이번엔 복병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토쿠가와 군은 총붕괴 상태가 되었다.
 토쿠가와 군은 결국 3개월에 걸쳐 우에다 성과 대치했지만, 토쿠가와 가문의 중신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가 히데요시에게로 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다시 공격하지 못하고 병사를 물렸다.
 
이로 인해 사나다 마사유키의 무명(武名)은 천하로 퍼졌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히데요시 조차 이기지 못했던 토쿠가와 군세를 작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다음으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1600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였다. 잘 알려졌듯이 사나다 가문은 마사유키와 그의 둘째 아들 유키무라[幸村]가 서군(西軍)에 속하였고,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동군(東軍)에 속하였다.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각주:7] 도중 노부유키와 헤어져 시모츠케[下野]에서 거성 우에다 성으로 돌아 온 마사유키-유키무라 부자는 여기서 나카센도우[中山道]를 거슬러 서상(西上)하려는 토쿠가와 군의 발을 묶고자 하였다.

 9월.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가 거느리는 3만8천이 코모로 성[小諸城]에 착진. 곧바로 우에다 성을 개성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사유키는 순순히 알았다고 대답하였다. 머리까지 밀고는 공순(恭順)의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증거가 되는 서약서를 제출하는데 시간을 끌었다. 히데타다는 초조해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마사유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사실은 농성 준비를 위해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제야 군량 반입도 끝나, 무기나 장비류도 제대로 갖추어졌으니 한번 싸워보자 합니다”
 히데타다는 분노하였다. 지금 여기서 단번에 물리쳐주마 - 하고 우에다 성을 공격하였다. 토쿠가와 군은 15년 전과 똑같은 전법을 취하여 그때와 똑같이 총격을 받고 복병에 당하는 등 전투를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했다. 히데타다는 이 우에다 공성에서 몇 일이나 소비하였지만 세키가하라로 서둘러야 했기에, 끝내 이루는 일 없이 샛길을 이용하여 전쟁터로 향했지만 결국 세키가하라 결전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이에야스의 역정을 사게 된다.

 이렇게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름은 두 번이나 토쿠가와 군을 쳐부순 사나이로 만천하에 그 무명(武名)을 떨치게 되지만, 불운하게도 세키가하라에서의 결전에서 서군은 패하였다. 
 이렇게 되면 다른 서군의 제장들처럼 참수죄에 처해질 터였지만, 동군에 속해있던 장남 노부유키가 필사적으로 조명탄원하였기에, 죽음만은 면하여 유키무라와 함께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유배 당하게 되었다.
 
유배에 앞서 마사유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나이후[内府=이에야스][각주:8]야말로 이러한 처지로 만들고 싶었는데…”
 하면서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유배지의 마사유키에게는 노부유키를 시작으로 사나다 가문의 사람들은 일족이건 가신이건 예를 다하여, 편지도 끊임없이 주고 받았고 금전 등도 계속 보냈다. 그러나 마사유키는 유배당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16명의 가신이 따라붙었으며 다이묘우[大名]였을 때의 격식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그랬던 만큼 드는 돈도 많았을 것이다.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 등에게 돈을 보내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언젠가 사면 받을 날이 올 거라 기대하여, 이에야스의 측근인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활발히 청탁하거나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마사유키라도 늙어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611년, 6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545년생. 두 명의 형 –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가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하였기에 사나다 가문[真田家]의 당주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9]에 종군하였을 때 히데요시[秀吉]가 여러 무장들 앞에서 마사유키에게 전략을 물어보는 등 영예(榮譽)와 면목을 세우게 된다. 장남 노부유키[信之]가 이에야스[家康]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유키무라[幸村]가 히데요시의 봉행(奉行)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딸과 결혼하여[각주:10] 토쿠가와 - 토요토미 양측과 연을 맺었다. 또한 마사유키의 부인은 우타 요리타다[宇田 頼忠]의 딸로,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부인과는 자매지간이었다. 

  1. 우에다 성 축성한 1583년~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이봉한 1622년까지. [본문으로]
  2. 만화 센고쿠로 유명한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아들 센고쿠 타다마사[仙石 忠政]가 입봉. [본문으로]
  3. 1622년~ 1706년. [본문으로]
  4.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 중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藤井松平家]. [본문으로]
  5. 타케다 24장[武田二十四将] 중 한명인 소네 마사타다[曽根 昌世]. [본문으로]
  6. 토쿠가와 막부가 대패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병력을 적게 기록하였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이에야스는 카게카츠에게 상경하라고 명령하나 카게카츠의 가로(家老)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의 편지에 빡쳐 정벌하러 간다. [본문으로]
  8. 당시 이에야스의 관직 나이다이진[内大臣]을 중국풍으로 부른 것. [본문으로]
  9.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0. 사위 유키무라와 장인 요시츠구의 나이차이가 최소 2 ~ 최대 11살 차이라 아마 조카나 친족의 여성을 양녀로 삼은 뒤 시집 보낸 듯, [본문으로]

 쿠키 요시타카[九鬼 嘉隆]는 히라도[平戸]의 마츠라 가문[松浦家]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수군(水軍) 대장이다. 요시타카의 선조는 키이[紀伊] 무로 군[牟婁郡] 쿠키 포[九鬼浦] 출신으로, 요시타카의 조부 즈음부터 시마[志摩]에 살았으며, 요시타카는 시마 7개 섬[志摩七島]의 수군을 휘하에 둔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게 되었다.

 쿠키 수군의 위력은 뭐라 해도 유럽에서 전래한 화포중심의 새로운 장비였다.
 1578년 6월. 요시타카는 거함 7척을 이끌고, 키이의 사이가 포[雑賀浦] 앞에서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 측에 선 키이 사이가[雑賀]의 수군 500척을 ‘유럽의 화술[蛮国之火術]’로 격파하였다. 사이가의 고전적 해적(海賊)의 전법으로는 신병기 화포를 장비한 쿠키 수군에 승리할 방도가 없었다.

 7척의 거함은 폭 약 13m, 길이 약 22m로, 당시의 상식을 깨는 거대함선이었다. 더구나 선체는 철을 두른 철갑선이었다.
당시 일본에 와 있어 이 배를 목격한 포르투갈의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 전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우리 왕국(포르투갈)의 배와 닮았다…”고 하며 배에는 대포 3문이 장착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해의 9월. 오다 노부나가도 이 7척의 신예전함을 보기 위해 친히 사카이[堺]로 향할 정도였다. 이후 11월, 쿠키 수군은 이 신예함을 거느리고, 혼간지[本願寺]로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오오사카 만[大阪湾] 키즈 강[木津川] 앞에 나타난 모우리 수군[毛利水軍] 60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요시타카는 이 전공으로 시마와 이세[伊勢]의 각지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새로이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이 일본 해군 역사상 획기적인 전함건조자의 명예는 임진왜란 때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 요시타카는 수군의 총사령관적인 역할로 출진하였지만, 일본수군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연전연패한 것이다.
 요시타카는 그 책임을 전가 받아 1597년 은퇴를 명령 받고 가독(家督)을 차남 모리타카[守隆]에게 물려주었다. 모리타카는 토바 성 3만 석을 영유하였고, 요시타카는 은거료(隠居料)로 5천 석이 주어졌다.

 그러나 요시타카의 운명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암전한다. 아들인 모리타카를 토쿠가와[徳川] 측에 서게 하고, 요시타카 자신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권고에 응하여 서군(西軍)에 선 것이다.
 처음에 요시타카는 아들인 모리타카가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을 떠나는 토쿠가와 군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미츠나리의 사자를 두 번 거절하였지만, 쿠마노 신쿠우 당[熊野新宮党]의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 氏善]가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요시타카] 님만 응해주신다면 곧바로 쿠키 님 밑으로 달려가겠다.”는 것을 전해 듣고, 결국 서군 가담을 수락한 것이다.
 
또한 다시 한번 자신의 힘으로 화려한 영광의 쿠키 수군을 다시 만들고 싶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인 모리타카는 아비가 서군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그것을 이에야스[家康]-히데타다[秀忠]에게 보고하여 자신에게 딴 마음이 없음을 맹세하였다. 이에야스는 그 뜻을 기뻐하며 모리타카에게 귀국하여 시마-쿠마노의 수군을 복속시키라 명령하였다.

 모리타카가 귀국하자 이미 토바 성은 요시타카의 손에 떨어져 있어, 본뜻과는 다르게 부자지간에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역시 서로 배려하며 자그마한 싸움만 있었을 뿐이었다.
 세키가하라 결전은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모리타카는 서군 선박의 통행을 막은 공적으로 5만5천 석으로 가증되었다.

 한편 패한 측인 요시타카는 아고[英虞]의 와구 포[和具浦]에 숨어있었지만 곧이어 자살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모리타카의 가로(家老) 토요타 고로우에몬[豊田 五郎右衛門][각주:1]이 독단으로 요시타카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모리타카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조명탄원이 성립된 것도 모른 채. – 때문에 토요타는 후에 모리타카의 명령으로 참수 당했다고 한다.[각주:2] 

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542년생.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 처음엔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 휘하였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속하여 혼간지 공략[本願寺攻め]에 참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하여 1600년 10월 자살. 59세.    

  1. 토요타의 부인이 요시타카의 장녀인 것을 보면 가신들 중 필두의 위치에 있었던 듯. [본문으로]
  2. 일설에 따르면, 토요타 고로우에몬은 몸을 땅에 묻고 머리만 남겨놓은 채 옆에 톱을 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토요타의 목을 톱으로 베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