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님의 흑색 화살막이[黒母衣]였던 사람이다. 이 목은 니가 죽을 때까지 세운 무공 중 가장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어서 나를 죽이고 수훈을 세우거라”


1569년. 1월 3일.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는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마지막 거점 토오토우미[遠江]의 카게가와 성[掛川城] 공략을 위해 8000의 군사를 이끌고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출발.

이에야스는 토오토우미를 가로질러 가며 호족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 같은 달 17일 카게가와 성 북쪽에 진을 치고 공성 시작.

18일. 우지자네 부하이며, 노부나가의 미노[美濃] 침공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미노 출신 히네노 빗츄우[日根野 備中]의 급습으로 이에야스 측 전선기지 중 하나인 카나마루 요새[金丸山砦] 함락. 이에야스는 지원군으로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은 토오토우미의 호족 오가사와라 우지오키[小笠原 氏興], 본거지 미카와[三河]의 군사들까지 보냈으나 다 패배하고 퇴각함. 이에야스 이에 엄청 분노.

20일. 이마가와 측. 또다시 성밖으로 나와 개김. 오가사와라 요격하러 나섰으나 패퇴. 이에야스 다시 미카와 군세를 파견하여 농성군을 패퇴시켜 성 안으로 몰아넣음.

22일 저녁. 이마가와 측. 토구가와 진영에 야습을 가하나, 토쿠가와 측은 미리 알아채고 매복을 펼쳐 큰 승리를 거둠.[각주:1]

23일 새벽. 패퇴하는 이마가와 야습군을 뒤쫓아 토쿠가와 군 성내로 돌격. 혼전.

혼전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다 죽어 가던 이토우 부헤에[伊藤 武兵衛] 앞에 무쿠하라 지에몬[椋原 冶右衛門]이라는 이에야스 부하가 다가와 창을 들이대자, 앉아 있던 부헤에는 벌떡 일어나,

“나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님의 흑색 화살막이[黒母衣]였던 사람이다. 이 목은 니가 죽을 때까지 세운 무공 중 가장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어서 나를 죽이고 수훈을 세우거라”

라고 외치며 칼을 던져버리고 목을 길게 내밀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같은 해 같은 달 6일.

이토오 부헤에가 죽는 순간까지 인정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미노[美濃]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옹립한 15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머무는 혼코쿠 사[本圀寺]에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신들에게 동원령을 내리면서 자신은 단기(單騎) 출격하였다.


카게가와 성은 그 후에도 버텨 같은 해 5월 6일 우지자네의 안전을 조건으로 개성.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장인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가 있는 사가미[相模]로 향했다.


이에야스의 직속부하[旗本]였던 무쿠하라 지에몬은 후일 토쿠가와 사천왕의 한 명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에게 파견된 가로[御附家老][각주:2]가 되어 대대로 이이 가문[井伊家]을 섬겼다. 상기의 이야기는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진 선조의 무공담이라 한다.


이토우 부헤에[伊藤 武兵衛]. ?~1569.
武兵衛는 ‘타케베에’, ‘무헤에’라고도 읽는 듯.
사가미[相模] 출신이라고 한다. 일찍부터 노부나가를 섬기다 그에게 인정받아 엘리트 친위부대인 ‘흑색 화살막이 군단[黒母衣衆]’에 발탁되었으나, 동료를 죽이고 오다 가문[織田家]을 떠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를 섬긴다. 1569년 1월 23일. 카케가와 성[掛川城] 전투에서 토쿠가와의 무쿠하라 지에몬[椋原 冶右衛門]에게 죽었다.

  1. 여담으로 이때 공적을 세운 사람 중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노부나가를 섬기기 이전에 속해 있었던 마츠시타 카헤에[松下 嘉兵衛]도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다이묘우[大名]에게 막부에서 파견된 가로[御附家老]로, 격으로 따지면 동격이었다. 가문에 따라서는 막부가 파견한 감시역이기도 했다. 때문에 후대로 갈 수록 다이묘우와 동격이라 우기는 파견가로와 자신의 가신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는 다이묘우[大名] 간에 불화가 생기기도 하였으며, 직접 막부에 주청하여 벗어나길 바라는 파견가로 가문도 있었다. [본문으로]

 혼다 헤이하치로우 타다카츠[本多 平八郎 忠勝]는 가문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을 섬겨온 무공파(武功派)에 사천왕(四天王)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전형적인 센고쿠[戦国] 무장이다. 사서(史書)가 전하는 타다카츠는, ‘어려서부터 전쟁터에 향하길 50여 번에 이르렀으며, 뛰어난 무공에 공적이 많았음에도 한번도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다’는 용장이다.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중국산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각주:1]
 이도 타다카츠의 무공을 전하는 말로써 유명하다.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合戦] 후 카이[甲斐]의 타케다[武田]군이 타다카츠의 활약을 보고 절찬한 문구이다.

 타다카츠는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전을 치렀고[각주:2], 15살 때 미카와[三河] 나가사와 전투[長沢合戦][각주:3]에서는 적의 수급을 거두었다.[각주:4] 이때 숙부인 타다자네[忠真]는 타다카츠의 그릇이 크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며, 이에야스[家康]도 이에 동감하였다고 한다.

 소년시대의 타다카츠가 씩씩한 면목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1561년, 타다카츠 14살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동맹을 맺기 위해 백여 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키요스[清洲]로 향했다.
 키요스 성 주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한때 오와리에 인질로 와 있던 미카와의 이에야스 행렬을 구경거리 삼아 몰려들어 시끌벅적거리며 떠들어댔다. 이에야스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동행했던 타다카츠는 그런 구경꾼들을 닥치고 못 본체 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가 탄 말 앞에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장도(長刀)를 양 손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어찌 이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 계시는 분은 미카와의 이에야스 공이시다. 노부나가 공과 친선을 맺기 위해 먼 길을 오신 분에게 이 무슨 무례란 말인가!?”
 어린 소년의 이 위풍(威風) 앞에 수 많은 구경꾼들도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 전투 때, 타다카츠는 25살이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대군에 맞서 토쿠가와 군은 대패를 당하고 거성(居城)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하게 되는데[각주:5], 이럴 때는 적의 추격을 막는 후군[殿]의 역할이 중요하며 또한 어려웠다. 타다카츠가 이 어려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타다카츠는 적과 아군 사이의 한가운데에 말을 타고 가 적진을 노려보며 아군의 퇴각을 성공시켰다. 후에 타케다 측의 하지카노 덴에몬[初鹿野 伝右衛門][각주:6]이 회고하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때 후군의 타다카츠를 추격하고자 했지만 타다카츠의 공포스러운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톤보키리[蜻蛉切り]라는 창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저승사자와 같은 형상으로 노려보았기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야스도,
“오늘 헤이하치로우는 평소보다 더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는 필시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각주:7]이 우리 편을 들어서일 것이다”
 고 하며 그 분전을 칭송했다고 한다.

 참고로 타다카츠의 창은 창신이 길어 2장(약 6m)정도 되었고, 잠자리[각주:8]가 창 날에 부딪혀 두 동강이가 난 다음부터 ‘톤보키리’[각주:9]라는 이명을 얻게 된 명창이었다. 타다카츠는 그런 창을 가볍게 휘두를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
 나중에 늙어서의 일이다. 거성(居城)이 있는 이세[伊勢] 쿠와나[桑名]에서 아들인 타다토모[忠朝]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다 타다토모에게 배의 노로 물가에 있는 갈대를 베어 보라고 하였다. 타다토모가 한 손으로 노를 들고 휘둘렀다. 갈대는 약 5.4미터정도 쓰러졌다. 하지만 타다카츠는, “정말 힘이 약하구나”라고 웃으며 말한 뒤 이번엔 자신도 한 손으로 노를 들고 휘둘렀다. 그러자 갈대는 마치 낫으로 벤 듯이 깨끗이 절단되었다고 한다. 그 노는 보통 사람 둘이서도 쉽게 들어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1582년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은 미카타가하라의 패전에 버금가는 이에야스 생애에서 잊지 못할 큰 위기였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한 이 6월 2일, 이에야스는 사카이[堺]에 있었다. 전날 아즈치[安土]의 노부나가를 방문한 뒤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쿄우토[京都] 근방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쿄우토는 이미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아케치의 제압 하에 있었다. 흉보는 토쿠가와 가문의 어용상인 챠야 시로우지로우[茶屋 四郎次郎][각주:10]를 통해 사카이에 있던 이에야스에게 전해졌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이때는,
 “이리 된 이상 배를 갈라 오다 님의 뒤를 따르겠다”
 라면서 까지 각오를 정했지만, 타다카츠가 이를 말렸다고 한다.
 “오다 님의 후은에 응하려 하신다면 오히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본국 미카와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뒤 군세를 이끌고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치는 것이 돌아가신 오다 님을 위한 공양이 될 것입니다”
 라는 타다카츠의 진언에 오카자키[岡崎] 귀성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일행은 이가[伊賀]의 산길을 통해 지역민들의 회유하면서 귀국에 성공한 것이다.

 1584년 3월,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와 손 잡고 히데요시[秀吉]와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타다카츠는 코마키야마[小牧山] 산을 지키고 있었는데, 거기에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강의 북편을 건너는 것을 보고 불과 800[각주:11]의 병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후방의 이에야스가 부대를 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과감히 히데요시 군에 철포를 쏘아대며 공격하였다. 그 호담함에는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감탄했다고 한다.[각주:12]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이후, 토쿠가와 가문이 패권을 확립하는데 활약한 무공파의 면면들은 차츰 활약할 장소를 잃어갔다.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를 대표로 하는 행정사무의 관료파(官僚派)가 대두한 것이다. 그런 풍조를 타다카츠는 참을 수 없었다. 세키가하라 후 이세 쿠와나에 봉해진 타다카츠는 에도[江戸]에서 사자(使者)를 맞이하였을 때,
 “답례로 에도에 오르고 싶으나 요즘 허리가 빠져서 갈 수가 없사옵니다[각주:13]"
 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소 ‘사도의 겁쟁이[佐渡の腰抜け]’라고 경멸하던 혼다 사도노카미 마사노부[本多 佐渡守 正信]를 빈정대며 한 말이었다.

 또한 타다카츠는 늙어서,
 “문치파의 행정관[代官]은 연극에서 다이묘우[大名狂言] 역을 하는 배우들 같은 자들이다[각주:14]
 고 비판하며 막부의 중추 각료들을 계속 비판하였다.

 예전 전쟁터에서의 영광이 아무리 시간이 흘른 뒤라도 타다카츠의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을 것이다.

[혼다 다다카쓰(本多 忠勝)]
1548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헤이하치로우 타다타카[平八郎 忠高]의 아들. 이에야스[家康]가 칸토우[関東]로 영지를 옮겼을 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10만석에 봉해진다. 1598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었을 때 유품으로 칼을 한 자루 받았다. 1601년 이세[伊勢] 쿠와나[桑名] 15만석[각주:15]에 봉해졌지만 1610년 죽었다. 63세. 여담으로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와는 같은 일족이지만 계통이 다르다[각주:16].

  1. 家康に過ぎたるものが二つあり、唐の頭に本多平八. 중국산 투구[唐の頭]는 티벳 근처에서 서식하는 소과의 야크(Yak)라는 축생의 꼬리털로 장식한 투구로, 당시 이에야스뿐만 아니라 미카와 무사들도 수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타케다 측 군기물인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미카와 무사 10명 중 7,8은 이 당나라 투구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1560년 오오타카 성[大高城] 군량 반입 때. [본문으로]
  3.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부하로 미카와 요시다 성[吉田城]의 성주 오하라 시게자네[小原 鎮実]와의 전투. 요시모토가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미카와의 호족들이 이마가와 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하자 우지자네는 시게자네에게 그런 호족들의 정벌을 명해 벌어진 전투. 단 이에야스 측과 이때 싸웠는지는 미묘. [본문으로]
  4. 처음엔 숙부 타다자네가 조카인 타다카츠에게 공적 세울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자신이 쓰러뜨린 적을 타다카츠에게 목만 베라고 하였다. 타다카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적진에 돌진하여 직접 수급을 취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확히는 이에야스가 똥을 지렸다는 미카다카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가 아닌, 그 전에 일어난 후타마타 성[二俣城]의 전초전 히토코토자카 언덕 전투[一言坂の戦い] 때의 일. 이에야스는 타다카츠 등 3000을 이끌고 정찰 나갔다 타케다 군과 조우. 이 책의 저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라 여기고 대패라고 하였으나, 이 히토코토자카 언덕 전투에서는 포위 당할 낌세를 보자 냅다 퇴각. 즉 대패는 아님. [본문으로]
  6. 이름은 마사츠구[昌次] [본문으로]
  7. 무가(武家)의 수호신. [본문으로]
  8. 일본말로 잠자리를 톤보[蜻蛉]라고 한다. [본문으로]
  9. 창 날 끝에 앉았는데 그 날카로움에 미끌어져 반토막이 났다고도 한다...오히려 이쪽이 더 유명한 듯. [본문으로]
  10. ...여담으로 이때 이에야스의 목숨을 구한 초대 챠야 시로우지로우의 둘째 아들 3대째 챠야 시로우지로우(2대는 장남이나 요절)는 이에야스에게도미 튀김을 강추하여 죽게 만든다. [본문으로]
  11. 300이라고도 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2. 또 다른 이야기로는 사이에 흐르는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 등 대담한 행동을 하였기에, 죽여 버리자는 히데요시 측 무장들의 말을 물리치며 히데요시는 "저런 용사는 나중에 내 편이 될 수 있으니 살려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본문으로]
  13. 일본말로 겁쟁이를 코시누케[腰抜け]라고 하는데 이는 허리[腰]가 빠진다[抜け]는 말을 합친 것이다. 앞에 적을 앞에 두고 쫄았을 때 허리가 뒤로 빠지는 모습에서 따온 말. [본문으로]
  14. 아마.. 겉만 그럴 싸 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비유한 것 같음...大名狂言은 멍청한 다이묘우가 바보짓 하는 것을 비웃는 내용의 연극 종류를 말한다고 함. [본문으로]
  15. 10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16. 마사노부의 7대조, 타다카츠의 8대조는 혼다 스케마사[本多 助政]로 같다. 여담으로 타다카츠는 마사노부를 혐오하여 같은 혼다긴 하여도 같은 핏줄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다. [본문으로]

 196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두 명이었다는 놀랄만한 이설(異說)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사의(史疑)라는 책을 저술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이다. 토우카이 지방[東海地方]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중 미카와[三河]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년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세라타 모토노부[世良田 元信]라는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의 부하가 되어 불시에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이런 이설이 나올 정도이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선조 역시 확실치 않다. 닛타 겐지[新田源治][각주:1]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지만 이는 나중에 날조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토쿠가와 가문의 시작은 코우즈케[上野] 닛타 군[新田郡]에 살던 토쿠아미[徳阿弥]라는 행각승()으로, 이 스님은 떠돌던 중 미카와에 와서 서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의 호족 타로우사에몬[太郎左衛門]의 사위가 되어 환속, 이름을 마츠다이라 타로우사에몬 치카우지[松平 太郎左衛門 親氏]라고 했다 한다.[각주:2]
 후년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겐지[足利源氏][각주:3]의 명문 키라 씨[吉良氏][각주:4] [각주:5]의 족보를 물려 받은 것[각주:6]도 이런 애매한 선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족보사칭이다.

 

화제를 돌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는 두견이[ほととぎす]에 비유하여,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가 노부나가[信長], ‘울게 만들겠다’가 히데요시[秀吉],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식으로 정권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 턴포우[天保] 연간[각주:7]에 그려진 풍속도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들이 떡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 있어, 절구공이를 들고 막 찧으려고 하는 것이 노부나가, 그 옆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 그리고 최상석에 가만히 앉아서 떡을 먹는 것이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를 비꼰 그림으로 그 때문에 만든이인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 芳虎]는 막부(幕府)에 체포되어 60일간 수갑이라는 형(刑)과 절판이라는 벌에 처해졌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이라 알려진[각주:8]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가 그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보다 8살, 히데요시보다는 5살 어리다. 조부 키요야스[清康]의 시대부터 미카와 오카자키[岡崎] 성주가 되었지만, 동쪽의 이마가와[今川], 서쪽의 오다[織田]라는 강력한 세력에 끼어 약소세력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조부 키요야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마츠다이라 가문은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린 이에야스는 인질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에야스와 마츠다이라 가문은 인종의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2년간 마츠다이라 주종(主從)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참을성 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1560년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의 전격작전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어, 덕분에 이에야스도 인질생활에서 해방된다. 이에야스는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끊고 오다와 동맹을 맺어 미카와 통일을 이룬다. 1563년, 그때까지 모토야스[元康]에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한다.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본거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봉기한다. 영내에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9]가 봉기한 것이다. 미카와에 있던 이마가와 잔당에 더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들까지도 반기를 들었다.
 이를 반년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는데, 강화 조건의 실시에서 이에야스는 일찌감치 후년의 뻔뻔한 정치성을 발휘한다. 잇코우 종[一向宗][각주:10] 사원의 안전을 보장했으면서도 막상 반란이 진정되자 잇코우의 절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약자와 맺은 약속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지만, 강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의리를 지키는 정책이 일찍이도 이때부터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즈음 강자 노부나가에게는 자신의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에게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켜 충성의 뜻을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그 노부나가가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 노부야스를 죽이기까지 한다.(이 부분은 졸역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처자식을 죽였다?"를 참조 삼아 보시길.)

 이에야스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그의 호방함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1572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2만 군세와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그런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는 센고쿠 최강인 코우슈우[甲州]의 군세가 상대. 더구나 상경(京)하려는 대군이었다. 이에야스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서 싸워 실제로 참패하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해 온 이에야스는 일부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안팎으로 화톳불을 대낮같이 밝히게 하였다. 적에게 공격해 볼 테면 하라는 대담한 전술이었다. 뒤를 쫓아 온 코우슈우의 병사들은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공격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은 뜨슨 물에 밥을 말아 세 그릇을 비우고는 코를 크게 골며 잤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타케다의 맹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는, “토쿠가와 군의 전사자는 모두 우리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고 신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야스는 패하기는 했지만, 토우카이 No.1 무장[각주:11]이라고 일컬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전쟁터에서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처음엔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먹을 쥐고 말 안장 앞부분을 두드리며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너무도 세게 두드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다고 한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 이에야스의 마음 속에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각주:12] 때부터 일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태두로 그 꿈은 잠시 접어 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대놓고 정권획득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서약서를 어기고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 보냈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여러 다이묘우의 영지를 가증시켜 많은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에게 보낸 편지는 실로 179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을 격파하였고,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확인 사살하여 토쿠가와 정권을 반석에 올려 놓은 것이다.

 말년의 이에야스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50세 전후부터 비만 체형이 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혼자서 훈도시를 조이지 못하여 시녀(侍女)에게 조이게 할 정도였다. 신장은 5척 1~2촌(약 155~158)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굉장히 건강을 생각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매사냥이 이에야스 건강의 원천인 듯 죽을 때까지 매사냥을 행한 횟수는 천 번을 넘는다.

 이에야스의 측실은 10명 이상 있는데 다이묘우 등 고귀한 집안의 딸들을 동경했던 히데요시와는 반대로 이에야스의 측실에는 하층계급의 딸이나 미망인이 많았다. 말년까지 정력은 절륜했던 듯 소위 토쿠가와 어삼가(御三家)[각주:13]의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9남 요시나오[義直]는 59살 때, 키이 가문[紀伊家]의 10남 요리노부[頼宣]는 61살 때, 미토 가문[水戸家]의 11남 요리후사[頼房]는 62살 때의 아들이다. 

 건강을 소중히 한 이에야스는 의사 이상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제국방(和剤局方)[각주:14]’이라는 의학서를 항상 옆에 끼고서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만병원(万病圓)’이라 이름 지은 약을 특히 잘 만들었다고 한다.[각주:15]

 1616년 4월. 죽음을 앞둔 이에야스는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할 일을 세세히 지시하였다. 유체나 위패의 위치는 물론 닛코우[日光]에 작은 묘소를 세우는 것까지 지시하였다. 죽기 이틀 전에는 죄인(罪人)을 시험 삼아 베게 한 명도(名刀) 미이케덴타[三池典太]를 베갯머리에 가지고 오게 한 뒤, 이불에서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공을 내리쳤다. 그리고 당장 죽을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확실한 말투로, “나는 이 칼을 가지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그 다음 날, 신류우인 본슌[神流院 梵舜]을 불러 “쿠노우[久能山]의 내 묘소에, 내 몸을 서쪽으로 향하게 해서 안치하라”고 했다고 한다. 즉 서방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6] 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대로(大老)를 불러, “히데요리[秀頼]를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고 유언한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실로 냉정한 최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2년생.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적자. 아명 타케치요[竹千代], 이름이 처음엔 모토노부[元信], 다음엔 모토야스[元康]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전사를 기회로 독립하자, 1568년 즈음 미카와[三河]를 평정.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후 미카와,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남반부를 영유. 히데요시[秀吉]와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결전을 피해 화해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7] 후인 1590년 칸토우[関東] 6개 지역에 242만석을 하사 받아 에도 성[江戸城]를 거성(居城)으로 하였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1616년 4월 7일 죽었다. 75세.

  1. 오우슈우[奥州]를 무대로 펼쳐진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대활약한 미나모토노 하치만타로우 요시이에[源 八幡太郎 義家]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義国]의 첫째가 코우즈케[上野]의 닛타[新田]라는 곳을 영유하면서 닛타라는 성을 썼다. [본문으로]
  2. ...는 에도막부가 편찬한 책(朝野旧聞褒藁)에 따른 말이고, 후세 아직까지 권위를 인정 받는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라는 사람의 논문에 따르면 - 토쿠아미에게 조상을 묻자, 토쿠아미는 "뭐 우리네라고 하는 것들은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행하는 사람들로, 어디건 상관없이 유랑하는 자이기에 그런 것을 물으면 창피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무사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떠돌이라는 것이 창피하다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닛타 겐지와 마찬가지로 요시쿠니[義国]가 아시카가 장[足利庄]을 영유하며 그의 둘째 아들 요시야스[義康]가 영유하며 이후 아시카가 씨가 된다. 사족으로 닛타와 아시카가 양 쪽의 선조인 요시쿠니는 아시카가 시키부다이후[足利式部大夫]라고 칭한 것을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 중 적류는 아시카가 인 듯. [본문으로]
  4. 아시카가 씨 3대 당주 요시우지[義氏]가 카마쿠라 중기 미카와의 키라 장[吉良荘]을 하사 받아, 아시카가의 땅을 물려 준 적남 야스우지[足利 泰氏]를 제외한 서장자 나가우지[吉良 長氏 - 사족으로 이 나가우지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선조이다], 셋째 요시츠구[吉良 義継]에게 부터 시작하는 가계. 키라 장은 야하기가와 강[矢作川]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형인 나가우지는 서쪽을 영유하여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를 칭했다. (동생 요시츠구는 처음엔 동쪽인 토우죠우 키라시[東条吉良氏]가 되나 후에 오우슈우[奥州]의 남조 측을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로 가 오우슈우 키라 씨[奥州吉良氏]의 선조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초기 잠깐 활약하나 몰락). [본문으로]
  5. 후에 나가우지의 손자 미츠요시[吉良 満義] 때 미츠요시와 그의 적남 미츠사다[吉良 満貞]가 무로마치 막부 초반 혼란기에 각지를 전전하여 비운 사이 본거지인 키라의 동쪽을 미츠사다의 동생 타카요시[吉良 尊義]가 횡령하여 토우죠우 키라 씨[東条吉良氏]가 성립. 후에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이 토우죠우 키라 씨의 5대 당주 키라 요시후지[吉良 義藤]가 동족이며 예전 종가집인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와 싸우다 전사. 그 뒤를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5대 당주 나가치카[松平 長親 - 이에야스의 고조부가 된다]의 셋째 아들 마츠다이라 요시하루[松平 義春]가 잇고 이때부터 토우죠우 마츠다이라 씨[東条松平氏]가 된다. [본문으로]
  6. 센고쿠 시대 키라 씨는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양 가문은 키라 요시야스[吉良 義安] 때 합병. 요시야스의 부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 또한 요시야스는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포로가 되어 있던 시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7. 1830~1844년 사이. [본문으로]
  8. 이 말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어떤 놈(이케다 마츠노스케[池田 松之介])가 이에야스의 글을 흉내 낸 것을 또 딴 놈(타카하시 테이슈우[高橋 泥舟])가 각지의 이에야스 사당[東照宮]에 바친 것이라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9.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10. 혼간지[本願寺]의 종파인 쟁토진종(浄土真宗)의 별칭. [본문으로]
  11. 海道一の弓取り. [본문으로]
  12.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살해한 사건. [본문으로]
  13.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본문으로]
  14. 중국 북송(北宋) 휘종 대에 만들어진 중국의 의약서.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죽기 전 이에야스는 이 만병원에 굉장히 의지하였다. 이에야스의 전의(典醫)인 카타야마 소우테츠[片山 宗哲]가 말리자 신경질내며 그를 시나노[信濃]의 타카시마[高島]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까지는 토쿠가와의 부하가 아니었던 가문. [본문으로]
  17.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한 1590년의 전쟁. [본문으로]

 시코쿠(四) 전역을 정복한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이지만 시작은 토사(土佐) 오코우(岡豊) 3000관의 호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던 군소호족이 한때는 츄우고쿠(中)의 모우리(毛利),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島津)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일본 삼대세력 중 하나로 커졌는데 그 원동력이 된 것은 토사(土佐)의 독특한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 불리는 민병조직에 있었다.

 [이치료우구소쿠]는 평소엔 농업에 종사하는 지역 무사(士)의 무리들이다. 그들은 밭이나 논으로 나갈 때 창 끄트머리에 짚신이나 갑옷, 식량을 매달고 나가 그것을 한 켠에 놓았다가 전투 참가의 군령을 받으면 낫이나 괭이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서 창을 메고 모여들었다. 즉 갑옷(具足) 한 벌(一領), 말 한 마리로 집합했기에 [이치료우구소쿠(一領具足)]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6000~9000평의 토지를 소유한 묘우슈(名主 – 부유한 농민) 계급으로 몇 명 정도 부하를 데리고 있었다. 이것이 우수한 쵸우소카베 군단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쵸우소카베 씨의 선조는 시나노(信濃)의 하타 씨(秦氏)로 백제에서 온 도래인(渡[각주:1])이었다. 처음엔 '소카베(宗我部)'라고 하였지만 토사에 또 다른 소카베 씨가 있었기에 앞에 '쵸우(長)'를 붙였다고 한다.[각주:2]
처음엔 시코쿠 탄다이(
探題)인 '호소카와 씨(細川氏)'의 중신이었다. 그 호소카와 씨가 미요시(三好) 일족에게 멸망 당하자 차츰 자력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1508년 당주 카네츠구(兼序)가 모토야마 씨(本山氏)등에게 공격받아 살해당하자 아직 꼬꼬마였던 센유우마루(千雄丸[각주:3])는 토사(土佐)의 코쿠시([각주:4]) 이치죠우 후사이에( 房家)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센유우마루'가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이다. 쿠니치카는 후사이에의 보호 속에 오코우 성(岡豊城)으로 돌아오자 옛 영지(領地)를 회복하여 토사 제패를 목표로 세력을 확대해 갔다.

 이야기를 바꾸어 보자. 어렸을 적 쵸우소카베 모토치카의 외모를 전해주는 사료에 따르면, [키가 크고 흰 피부에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가신들은 '어린 아씨(若子)'라 부르며 뒤따마를 깠다]고 한다. 후년 시코쿠의 패왕이라는 이미지와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내성적인 청년이 데뷔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데뷔전은 1560년 5월 22살 때였다.
 쿠니치카 부친(즉 모토치카의 할아버지)의 원수인 모토야마 시게토키(
本山 茂辰)와의 전투에서 모토야마의 거성 나가하마 성(長浜城)을 점령한 후 도망친 시게토키를 우라토 성(), 아사쿠라 성(朝倉城)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투가 한창 행해지던 도중 부친 쿠니치카가 급사하는 바람[각주:5]에 가독을 이은 22살 모토치카의 양 어깨에 쵸우소카베 가문의 운명을 달리게 된 것이다. 평소 가신에게 경시 받던 선이 가는 젊은이가 이 순간부터 당당한 무장으로 변신을 이루게 된다.

 쿠니치카의 죽음이 알려지자 역시 모토야마 세력은 역습으로 나섰다. 2천여의 대군이었다. 쵸우소카베는 500여[각주:6]. 중과부적으로 무너지려는 찰나에 모토치카가 용감히 나서,
 "물러서지 마라!"
 라며 창을 직접 휘둘러 곧바로 적 두 명을 죽였다. 그 모습에 쵸우소카베의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해서 기세에 탄 쵸우소카베는 단번에 모토야마의 군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투에서의 모습으로 모토치카의 평가가 180도 변한다.
 [지모용(
智謀勇) 겸비]
 라며 가신들의 신뢰를 손에 넣은 것이다.
 그 후 상승기류를 탄 모토치카는 각지를 전전하여 1570년 즈음에는 이치죠우 가문(
)의 하타(幡多), 타카오카(高岡) 2 군()을 제외한 토사 전역을 손에 넣었다.

 이치죠우 가문은 선조에 칸파쿠() 노리후사([각주:7])가 있을 정도인 토사 제일의 명문가였다. 더군다나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는 이치죠우 가문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쵸우소카베 가문에게 있어 큰 은인인 가문이었다. 모토치카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였지만 그러던 중 평소 소행에 문제가 많던 당주 카네사다(兼定)가 가중에서 가장 인망 높던 가로(家老)[각주:8]를 직접 베어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토치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이치죠우 가문의 가신들을 소집하여 카네사다를 은거시키고 적자에게 당주자리를 물려주도록 꾀하였다. 라기보다 그 자리에 드센 가신들을 대기시켜두었기에 오히려 쿠데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모토치카는 이렇게 카네사다를 이요(伊予)로 추방하고 카네사다의 적자 킷포우시(吉房子)[각주:9]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이치죠우 가문의 당주로 앉혔다. 이로써 토사 전역은 모토치카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각주:10]

 다음 목표는 시코쿠() 전역의 정복이었다. 이 즈음 모토치카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교류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가신 사이토우 토시미츠( 利三)의 딸이 모토치카의 부인이었던 것이다.[각주:11]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 우호관계도 무너진다. 모토치카가 아와(
阿波)를 시작으로 차츰 지배영역을 넓혀가자 천하통일을 목표로 하는 노부나가에게 있어 방해물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라는 이대 거물이 죽어 후방이 안정되자 곧이어 노부나가는 시코쿠 정벌을 진행시키려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원정군이 배를 타고 떠나려 하는 때[각주:12]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각주:13]이 일어나 노부나가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모토치카는 지금이야말로 시코쿠 제패의 호기라 보고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아와를 침공한 사누키()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각주:14])를 공격하여 쇼우즈이 성(勝瑞城)을 함락하고 이와쿠라 성(岩倉城)을 손에 넣어 아와를 통일한 후 사누키의 소고우 성(十河城)까지 하락하였다. 도망칠 곳을 잃은 소고우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에게로 도망쳐 원조를 청했다.

 당시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쳐 주군 노부나가의 원한을 갚았고 시즈가타케 전쟁(い)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쳐 천하인(天下人)으로 향하는 길을 파죽지세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과 싸우고 있던 중이라 소고우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 틈에 모토츠카는 시코쿠 전역을 자신의 세력하에 둔 것이다.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군이 출진한 것은 1585년 6월이었다. 이에야스, 노부카츠와 평화협정을 맺고 키이(紀伊)를 평정한 지금 그 여력을 몰아 시코쿠로 달려든 것이다. 총 12만 3천이라는 대군이었다.
 아무리 모토치카라도 이런 대군에는 개길 수 없어 인질로 셋째 아들인 치카타다(
親忠)를 바치고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그리고 아와(阿波), 사누키(), 이요(伊予)의 반환을 명령 받았지만 토사(土佐)만은 안도받았다. 히데요시는 반항했던 모토치카에게 관대했다. 모토치카가 본령 안도의 인사를 올리러 상경하자 큰 환대와 함께 비젠나가미츠(備前長光)의 이름난 칼, 황금 100매, 말 한 마리, 화려한 장식의 안장과 일본식 등자()를 히데요시에게 하사 받았다고 한다.

 이 다음 해.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 정벌에 종군하여 붕고(豊後) 방면의 적을 – 예전에는 적이었던 소고우 나가야스(十河 存保)와 함께 공격하였다. 시코쿠의 군세는 이요의 이마바리(今治)를 출발하여 붕고에 상륙하자마자 시마즈(島津)의 성들을 계속해서 낙성시켜 나가다가 헤츠키가와 강(戸次川)에서 시마즈 군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파견지휘관(
軍目付)인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는 막무가내였다. 곧바로 결전을 벌이자고 나댔다. 그러나 모토치카와 나가야스는 신중했다. 시마즈가 얼마나 강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치카는 주력군을 기다린 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지만 센고쿠 히사히데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2월 12일 결전을 벌인다. 시마즈 군은 일부러 지는 척하고 퇴각하였다. 센고쿠 히사히데는 여기에 낚였다. 참담한 패배였다. 소고우 나가야스는 전사하였으며, 모토치카의 적자 노부치카(信親)도 죽었다.

 노부치카는 당시 22살로 한번에 여덟 명을 상대하여 더구나 그들을 이길 정도로 무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모토치카는 이 노부치카의 죽음에 너무 낙담한 나머지 자신도 적진에 돌격하여 죽으려 하였지만 말리는 가신들과 애마 '나이키구로()'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쵸우소카베 가문은 7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 전사자의 위패는 지금도 코우치 시(
高知市)의 하다 신사(秦神社)에 모셔져 있다.

 이 패전이 모토치카의 말년을 꼬이게 만들어 둘째 치카카즈(親和), 셋째 치카타다(親忠)를 제쳐두고 넷째 모리치카(盛親)를 세자로 정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가신과 친족들까지 죽이고 병으로 누워있는 둘째 치카카즈의 병간호도 하지 못하게 한 채 유폐시켜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후에 모리치카는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에 섰기에 영지(領地)를 몰수당하였고 낭인이 된 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이 끝난 후에 잡혀 죽었다. 명문 쵸우소카베 가문의 멸망이었다.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
1538년생. 1560년에 가독을 이어 토사(
土佐)의 여러 호족들을 거느리고 1583년에 시코쿠() 전역을 평정하지만 히데요시(秀吉)의 시코쿠 정벌군에 항복하여 토사만 허락 받았다.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 종군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 1599년 5월 19일 죽었다. 60세.

  1. (일본으로 바다) 건너(渡) 온(来) 사람(人)이란 뜻. 보통 중국계나 한국계를 말한다. [본문으로]
  2. 나가오카 군('長'岡郡)에 있었기에 쵸우(長)를 붙였으며, 또 다른 소카베 씨는 카미 군('香'美郡)에 있었기에 코우소카베 씨('香'宗我部氏)가 되었다. 후에 모토치카의 부친 쿠니치카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치카야스(親泰)를 양자로 들여보내 가문을 탈취. 치카야스는 형인 모토치카의 시코쿠 제패를 도왔다. [본문으로]
  3. '치오우마루'라고도 읽는 듯 하다. [본문으로]
  4. 조정의 관직. 그 지역(国)의 행정과 사법 등 모든 것을 관장. 보통 '***노카미'라 불리는 직책. [본문으로]
  5. 실은 전투가 끝난 후에 사망. 전투는 1560년 5월 28일. 쿠니치카의 사망은 6월 15일. [본문으로]
  6. 1000이라고도 2500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7. 오우닌의 난(應仁の亂) 때 토사로 피신하였다. [본문으로]
  8. 도이 소우산(土居 宗珊)을 말한다. 사족으로 신장의 야망-혁신 PK의 튜더리얼에서 나오는 그분이다. [본문으로]
  9. 실제로는 '만치요(万千代)'라고 한다.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 [본문으로]
  10. 사족으로 [신장공기]나 [타몬인 일기(多聞院日記)]에 따르면 수도권 근방(上方)에서 보는 모토치카의 인식은 이치죠우 정권(大津御所 - 킷포우시 즉 이치죠우 타다마사(一条 内政)가 있던 곳 '오오츠'를 따서)의 보좌역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실제로 모토치카가 노부나가와 연락을 할 때는 자신이 부하가 아닌 이치죠우 가문의 부하 '카쿠미 이나바노카미(加久見 因幡守)'를 통해서 였을 정도였다. [본문으로]
  11. 토시미츠의 형이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친위군사조직인 호우코우슈우(奉公衆) 멤버인 이시가이 미츠마사(石谷 光政)씨의 사위로 들어갔고(이시가이 요리토키(石谷 頼辰)), 그 이시가이 미츠마사에게 또 딸이 하나 있어 그녀가 모토치카의 부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토시미츠와 피가 이어져 있지는 않다. [본문으로]
  12. 예정은 6월 3일. [본문으로]
  13. 6월 2일. [본문으로]
  14. 이 즈음은 미요시 나가야스로 불렸다. [본문으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소위 기독교 다이묘우(大名)는 많이 있지만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보다 독실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伴天連追放令)를 선포하지만 이때도 우콘은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비호를 받으며 쇼우도시마(小豆島) 섬에서 우콘과 함께 몸을 숨이고 있던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우콘에 관해,
 "우콘님(右近殿)의 용기 있고 굳건한 신앙에는 놀랄 따름이다"

 며 예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581년 우콘의 영지인 셋츠(津) 타카츠키(高槻)에는 20개의 교회가 세워져 영민(領民) 2만5천 중 1만8천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기독교 왕국이었다[각주:1].
 우콘의 부친 히다노카미(飛
守)[각주:2]도 세례명을 '다리오'라고 하는 성실한 신자였다. 텐쇼우(天正) 연간[각주:3]에 가독을 우콘에게 물려주고 오로지 포교에 헌신하였다[각주:4].
 선교사 프로이스(Luís Fróis)가 기록한 일화에 따르면 히다노카미의 신앙도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성내를 순시하다 추위에 떨고 있던 하급병사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새로 맞춘 고가의 옷을 벗어주고는 헌 옷으로 갈아있었다고 한다. 성으로 돌아온 남편을 보고 이상히 여긴 부인 마리아(세례명)가 묻자 히다노카미는
"나는 그 옷을 주님께 바쳤다오"
라 말했다고 한다.

 타카츠키 영내(領內)에서는 장례식 때 빈부의 차가 없었다고 한다.
 영내의 가난한 기독교도가 죽었을 때 우콘 부자는 사제(司祭)를 맡았으며 장례행렬이 묘지로 옮겨질 때는 다리오와 우콘도 그 관을 짊어졌다. 더구나 최하층 천민의 역할인 묘를 파는 것마저 하였다. 그것을 보고 모두 괭이를 들고 함께 구멍을 팠으며 중신의 부인들도 맨손에 흙을 닮아 파묻는데 힘을 보탰다고 한다.

 1576년 가을. 셋츠(津) 아리오카(有岡) 성주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갑자기 모우리(毛利)-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반기를 들었다. 무라시게에게 배속된 장수였던 우콘은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무라시게는 듣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우콘을 빼내오기 위해 수 차례 선교사를 파견하여 설득하였다[각주:5].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최후의 카드로 꺼내어 들었다. 아군이 되지 않는다면 선교사들을 모두 십자가에 꺼꾸로 메달아 창으로 찔러 죽일 것이며 교회도 파괴할 것이다. 반대로 오다 진영에 참가한다면 셋츠(
津)의 반을 하사할 것이며 기독교 보호에도 만전을 기한다고 하였다. 하필이면 그때 부친 히다노카미가 아라키 군에 참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육친을 선택할 것인가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 우콘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영주의 지위를 부친에게 되돌리고 자신은 은거한다며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으로 인해 죽은 노부나가의 장례식에서도 우콘은 기독교도라는 입장을 내세워 참가한 수 많은 다이묘우(大名)들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향도 피우지 않았다.

 1587년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함에 따라 우콘의 운명은 어둠으로 변한다. 후나게 성(船上城)을 몰수 당한 뒤에는 코니시 유키나가를 의지하였으며 나중에는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비호를 받았다[각주:6].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토시이에의 아들 토시나가(利長)와 함께 동군에 속하여 서군과 싸웠지만 1613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기독교 금교령이 반포되자 결국 국외로 추방당한다.

 다음 해인 1614년 9월 24일. 부인을 포함한 백여 명의 교도들과 함께 필리핀 루손 섬으로 가 그 다음 해인 1615년 마닐라에서 죽었다.

[다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1552년생. 이름은 나가후사(長房), 시게토모(重友) 혹은 토모나가(友
)[각주:7]. 세례명은 동 유스토[각주:8].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모반을 일으킨 다음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배속된 다이묘우[각주:9]가 되지만 미츠히데가 모반하자 1582년부터 히데요시(秀吉)의 휘하[각주:10]가 된다. 마닐라에서 죽었을 때는 63세.

  1. 여담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곳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카야마 토모테루(高山 友照). 히다노카미(飛騨守)는 자칭. 또한 '즈쇼(図書)'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1574~1593년 사이. [본문으로]
  4. 우콘에게 기독교 신앙을 권한 것이 이 부친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처음엔 무라시게의 반란에 참가하였지만 상기의 언급된 오르간티노 신부의 말을 듣고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코쿠다카는 약 3만석. 우콘은 많은 영지 대신 교회를 세울 수 있게만 해달라고 하였고 토시이에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토모요시'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8. Dom Justo [본문으로]
  9. 코쿠다카(石高)는 약 4만석. [본문으로]
  10. 이때 받은 영지는 아카시(明石) 6만석.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