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최종화에서 타이겐 셋사이[太原 雪斎]가 어렸을 적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타이르는 장면이 있다. 말하길,
 “난세에서 살기 싫다면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정점에 서서 난세를 끝내거라” 

 이는 아사쿠라[朝倉] 5대 100년의 번영을 쌓은 중흥조(中興祖)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의 [아사쿠라 소우테키 말씀집[朝倉宗滴話記]]에 나오는 말이 출처이다. 소우테키는 1477년생이며 셋사이는 1496년생. 기이하게도 아사쿠라 소우테키와 타이겐 셋사이는 같은 1555년에 죽는다. 그야말로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인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소우테키는,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이기는 것이 최고다

 라고 하였다. 아사쿠라 가문[朝倉家]의 군사 책임자[軍奉行]로 생애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무장의 말이다. 그것은 소빙하기로 인한 기근에서 살아남은 중세인(中世人)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있다.

 소우테키는 간단하게 무자(武者)의 마음가짐을 말한 거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하는 무자란 기본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여도 재지영주(在地領主)이다. 자립한 센고쿠의 마을=총촌(惣村)의 영주는 그 마을 내의 재판권과 징세권[徵稅權]을 가진다. 그 영주들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살아 남는다”를 규범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거기에는 조정(朝廷)도 막부(幕府)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 행간에서 “나에 대한 것은 내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냉철한 사상이다. 철포나 칼로 무장하는 것도 자력(自力). 어떤 영주에게 붙는가도 자력. 전투에 참가하는 것도 자력. 물길 싸움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도 자력. 중세인은 모름지기 자력(自力)이었던 것이다. 이를 역사용어로 “자력구제(自力救濟)”라고 부른다. 글자 그대로 ‘자력’으로 ‘구제’한다는 사상이다.

 이 자력구제가 인정되는 아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중세에는 전쟁이 필요했으며 전쟁이 분쟁해결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4권에서 언급했듯이 “약탈[乱取り]’이라는 ‘전쟁작법(戦争作法)”에 따라 전투 그 자체가 국가 운영의 한 수단으로 변해간다.

 이 자력구제를 확실히 명문화(明文化)하여 법제도로 확립시킨 것이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지 않을까? [이마가와 법률 추가[今川仮名目録追加]]에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내 영국[国]에 법도를 반포
(自らの力量を以って、国の法度を申しつけ)

함으로써,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이 ‘자력’으로 재판권, 징세권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즉 ‘자력구제’를 ‘영국[国]’ 단위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렇게 세력을 확대하여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가 되어, 마침내 오와리[尾張]에 침공하지만 도중에 쓰러진다. 그러나 ‘영국을 자력구제’한다는 사상은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之次第]] 등 각 가문의 분국법(分国法)[각주:1]에 영향을 끼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오다 정권[織田政権]이 어떠한 천하통일을 구상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정권을 이은 토요토미 정권[豊臣政権], 토쿠가와 정권[徳川政権]을 보면 ‘자력구제’를 어떻게 하면 배제하느냐가 정치과제가 되어 간다.
 토요토미 정권은 ‘태합검지[太閤検地]’로 석고(石高)를 명확히 하고, ‘칼사냥[刀狩り]’으로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다툼 정지령'[喧嘩停止例]’으로 총촌(惣村)의 전투를 금지하였고, ‘총무사령(惣無事令)’으로 다이묘우[大名]’간의 다툼을 중재하였다. 이는 전부 ‘자력구제’의 부정이었다. 자력구제를 뼛속까지 이해하며 하극상(下剋上) 최대의 구현자인
히데요시[秀吉]가 이런 것들을 전부 규제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그리고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들어서게 되자 전일본의 재판권, 경찰권을 막부가 장악하게 되어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보게 된다. 유일하게 신고제에 따른 ‘복수[仇討]’만이 허용되게 되지만, 이는 더 이상 ‘자력구제’라고 볼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렸을 적 셋사이와 요시모토에게 교육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살아가며 그야말로 ‘개처럼이건 축생처럼이건’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그리고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스스로의 역량을 가지고 영국[国]에 법령을 반포’,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어 난세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가 자신의 영지에 반포한 법.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행해진 전투[合戦]에 대해서는 굉장히 복합적인 연구가 다수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런 다채로운 세계가 우리들을 매료하고 있다. 이번에는 작중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전시약탈[乱取り=乱妨라고도 한다]이라는 단어를 축으로 당시의 전투 풍경에 대해 추구하고자 한다.

 [갑양군감[甲陽軍鑑]]에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한 말로 유명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전투에서 이기려는 목적은 남의 영지를 점령하여 자국의 영지를 확대하는 것에 있다. 영지를 확대해야만  자국의 사람들은 은상을 얻어 기뻐한다. 때문에 소령(所領)을 얻고 거기에 또 가증을 받아 입신출세하는 것이 사무라이[侍]의 본망인 것이다.
  즉 “창 한 자루로 무공을 세워 언젠가는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다”는 사상이며 지금까지의 센고쿠 시대 전투 이미지는 이 말에 다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당시의 전투를 묘사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각서[日本覚書]]의 기사를 살펴보자. 일시를 보면 ‘1585년 6월 14일’이라고 한다. 전 661항목 중 3개 항목을 소개한다.

一. 우리들(유럽인)에게는 하사관, 소대장, 십인조장(十人組長), 백인대장(百人隊長) 등 (계급이) 있다. 일본인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一. 우리들의 국왕이나 대장은 병사에게 보수를 준다. 일본에서는 병사들 각각이 종군하면서 먹거나 마시거나 입는 것들을 전부 자비로 해야만 한다. 
一. 우리들은 토지나 도시, 촌락 및 그곳의 부(富)를 빼앗기 위해 다툼이 일어난다. 일본의 전투는 언제나 대부분이 밀, 보리, 쌀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일본 군대는 지휘계통을 가진 계급제도가 없고, 병사들은 종군 중에 식사나 의복도 전부 자비로 준비하며, 토지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쌀이나 보리 등의 식량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한다.
 프로이스는 일본 무사의 군대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핀 [갑양군감]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과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다시 [갑양군감]을 보면 이런 기사가 눈에 띈다. 텐분11년[각주:1]에 행해진 [다이몬 고개 전투[大門峠合戦]]의 한 구절이다.
10월 7일에 코우후[甲府]를 출진했다. <중략> 25일에는 우미지리[海尻=현 미나미사쿠 군[南佐久郡]]로 출진하시는 것이 결정되자 주민의 가옥을 부시고[小屋落し][각주:2], 약탈[乱取り], 전답에 남아 있던 농작물 약탈[刈田働き]를 행하는 잡병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중략> 약탈이 3일간 밤낮에 걸쳐서 행해졌다. 내일부터는 조금 멀리 약탈하러 나가고자 하여 아침에 출발 저녁에 본진에 돌아왔다.
 여기서 나오는 약탈[乱取り]이라는 것은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납치, 물건의 약탈 등을 말하는 단어다. 전쟁하러 간 곳에서 먹을 수 있는 것, 사용할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등 모든 것을 빼앗았다는 묘사다. 
 결국 4일 후 신겐은 스와 대명신[諏訪大明神]에게서 신탁을 받았다는 형식으로 약탈을 정지시킨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은 프로이스가 기록한 것을 방불케 하여 군단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잡병의 약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이 당시 전쟁터 약탈[乱取り]의 실태가 아닐까? 앞서 본 ‘입신출세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약탈[乱取り]을 위한 전투'인 것이다. 유추해 보자면 신겐이 주창한 ‘사무라이의 본망’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부대를 이끄는 무장(武將)의 마음가짐이지 적장의 목을 베어 은상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잡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 4권 19화에 등장하는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13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도 ‘약탈[乱取り] 당하였다. 1550년 미요시 나가요시[三好 長慶]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카오 성[中尾城]에서 농성하던 요시테루는 미요시 군의 공세에 결국 철퇴. 성을 넘겨 주고 도망쳤다.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를 살펴보자. 

오늘 밤(11월 21일), 히가시야마[각주:3] 무가[東山武家=요시테루[義輝]]의 성이 함락되었다. 스스로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중략> 그저께 불타고 남은 건물에 다시 불을 질러 약탈했다고 한다. 히가시야마 무가의 성 오늘 미요시 군세 약탈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미요시 군은 공성전에서 승리한 후 철저하게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쇼우군의 권위도 잡병들의 약탈[乱取り]를 막지 못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잡병들의 약탈[乱取り]을 묵인했다. 약탈이 전투에 참가시키는 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투가 보다 합리화된 텐쇼우 연간[天正年間] 즈음이 되자 ‘약탈[乱取り]’은 주로 인간을 납치하는데 의미가 좁혀진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전투의 상태를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은 전투의 작법을 볼 수 있다. 
 ①. 출진한 군단은 야전이나 공성 등의 전투를 행한다. 
 . 승패가 결정된 뒤 또는 전투가 행해지던 중에도 잡병들은 약탈[乱取り]을 한다. 쌀이나 일용품 등(또는 인간)을 약탈한다. 사무라이 타이쇼우[侍大将]나 다이묘우는 그런 약탈[乱取り]을 묵인한다. 
 . 전투에 승리하여 약탈[乱取り]이 행해지는 기간(3~4일간) 후에 푯말을 세워 [약탈 금지] 등의 명령을 내린다. 
 . 다이묘우는 점령한 영지(領地)의 지배권, 잡병은 빼앗은 쌀이나 일용품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기근에서 탈출하기 위한 전투 – 라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신장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노부나가[信長]가 특별히 귀여워하던 하얀 매(鷹)에게 ‘란토리[乱取り] – 즉 약탈 –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란토리가 나오는 매사냥을 보기 위해서 군중이 모일 정도로 인기를 떨쳤다고 한다. 우뢰와 같은 갈채를 받으면서 사냥감을 잡는 ‘란토리’. 센고쿠 시대의 세상을 잘 표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1542년. [본문으로]
  2. 진영에 세우는 가건물을 세울 때, 나무를 베어 가공을 하면 시간이 걸리기에 주변 가옥을 부셔서 세웠고 이것을 小屋落し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3. 아시카가 쇼우군의 정무소가 있던 지역 이름.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ndd247.tistory.com BlogIcon needled247 2011.08.01 16: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대가 많이 다르지만, 갈리아 정복 당시의 카이사르는 항복하는 이민족에게는 매우 관대했으나, 반대로 항복 약속을 깨고 배신하거나 끝까지 저항한 경우에는 가혹한 처사를 지시했습니다. 약탈은 물론, 성인 남자들을 다 죽이고 남은 여자 어린이 노인은 노예로 팔아버린 사례도 있죠.

    그만큼 약탈은...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끝까지 저항한 적에게는 일종의 징벌, 그리고 힘겨운 전투를 앞두거나 치룬 아군에게는 원초적인 방법으로 사기를 올릴 수 있는 방법으로 묵인되었을 겁니다. 하물며, 일본전국시대는, 반대로 농민들이 무기와 갑주를 노리고 낙오된 무사를 사냥하는 무사 사냥이라는 것도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말도 못하겠죠.ㅎㅎ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8.04 1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늦어 실례했습니다. 몇 일간 몸이 안 좋아서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만)

      그렇습죠.
      전쟁에 약탈은 항상 붙는 법입지요.

      센고쿠 시대 당시에도 약탈은 농한기에 들어서 따로 투잡을 뛰어야 했던 농민병사(잡병)들을 위한 처치였다고도 하더군요.

출처: http://www.asahi.com/international/update/1114/TKY201011130389.html

 한국 이명박 대통령과 후나바시 요우이치(wiki_jp)[船橋 洋一] 아시히 신문 주필의 인터뷰 일부를 발췌하는 기사들은 있으나 전문은 게재한 곳이 없기에(...있으면 대략 시간낭비) 번역해 올립니다.

- 는 후나바시 요우이치 씨의 질문.
굵은 글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답변입니다.




- G20 의장국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G20을 앞으로 어떻게 키워나가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의장으로서 이번 회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 G20이 모인 것은 2008년 11월 워싱턴. 그때는 (금융)위기였기에 선진국, 신흥국 등 대륙을 대표하는 나라들이 모였습니다. 지금은 회복기에 들어섰습니다만 걱정은 남아있습니다. 위기 때는 단결하지만 회복기가 시작되면 나라마다 각각의 사정이 다르기에 과연 한마음이 될 지 걱정입니다. 그 고비가 된 것이 서울에서의 회의입니다. 앞으로도 G20이 계속 이어질 것인가, 서울에서 합의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회의에는 없었을 듯한 부담감을 크게 느꼈습니다. 서울 회의로 인해서 G20 역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입니다.[각주:1]

 결과적으로 G20에 속한 나라들은 세계의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로써 앞으로도 G20을 대신할 포럼이 없다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회의 마지막에는 모든 정상들이 G20이야말로 세계적으로 어려운 때 문제 해결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인식을 같이 하였습니다. G20을 대신할 상설 채널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G20 멤버 이외에도 개발문제가 있기에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2개국을 초청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까지 G20이 앞으로도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최선진국, 신흥국, 가장 가난한 나라까지 모두가 G20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 한국은 세계의 글로벌 파워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는 14년전에 가입한 선진국입니다. 한국이 G8에 들어가 G8을 강화하는 시대가 온 것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직 세계 경제문제가 주된 관심사인 G20입니다만 이번 토론에서는 기후변동에서 개발도상국 개발문제까지 다양한 토의를 하였습니다. G20에서 함께 연구하는 편이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 한국은 환태평양 파트너십 협정(TPP)에 어떤 방침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까?

 상징적인 효과는 있습니다만 실질적 효과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내의 APEC 국가들이 역내에서 자유무역을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어 어느 나라건 (TPP를) 검토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한국도 그러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 한일 자유무역협정(FTA)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요?

 제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일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많은 나라와 FTA를 맺고 있습니다. 비관세 장벽을 없애는 것만으로 자유무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세 장벽과 비관세의 장벽을 없에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당 부분이 일본 측 의사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의 어려움 중 하나는 농업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압력입니다만 그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를 연달아서 성사시키고 있습니다. 어떻하면 농촌, 농민의 반발, 불안감, 반대 등을 극복하고 FTA 쪽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까?

 농민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이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TA를 체결하려면 많은 농민을 설득해야만 합니다만 반대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도 깃발을 휘날리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가가 그런 반대들을 극복하여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든 분야가 국제적인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농업도 국제경쟁력을 가져야만 하는 점이 중요하며, 농민도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농민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하면 외국과 경쟁해가면서 잘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제 생각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가 전제이며 그 다음이 경제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협력이 실현되면 자연히 통일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고 북의 비핵화라는 커다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저는 언제라도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취임했을 때부터 일관되게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정상회담을 국내의 정치적인 목적때문에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반도의 남북전체를 위한 길을 탐색하기 위한 회담을 해야만 합니다.

- 저는 북한이 권력계승기에 진입하고 있으며, 불안정하게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미리 상정하여 한국의 대응, 한미, 한미일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냐고 생각합니다.

 삼대세습은 일반적,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납득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대세습했다고 해서 곧바로 북한이 위험해 진다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항상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체, 동아시아 전체의 정세를 보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협력할 것이며, 지금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이며 미국과 한국도 동맹관계이기에 자연히 말씀하신 것은 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은 예전에 비해 더욱 국제무대에서 상호간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이 있던 때도 국제연합에서 일본이 앞서서 잘 협력해 주었습니다. 그렇 것을 통해서 상호 신뢰가 깊어지기에 북한 정세가 위험하다거나 위험하지 않다거나에 관계없이 앞으로도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 한일 안전보장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우리는 자연스럽게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강화한다고 하면 주변 나라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볼 지도 모르기에, 반대로 그런 의심을 강하게 받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서로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 간다면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번 한국에서 대량파괴병기 확산방지구상(PSI)의 훈련이 있었을 때 일본에서도 왔습니다. 훈련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참관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면 다음에도 또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해 나가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 자체가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 한미의 군사연습을 예전에 했을 때, 일본 해상자위대를 옵저버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미일간 훈련할 때 한국도 옵저버로 올 수 있습니까?

 참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히.

- (한국이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문화재 인도 서명이 한일간에 행해집니다. 연내에 1205점을 인도할 때 대통령 스스로 한 번 더 일본에 오셔서 가져가시는 것도 가능할까요?

 그런 문제는 일본 국회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통과된 다음부터 생각하겠습니다.

-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어떤 행동, 태도로 나올 필요가 있을까요?

 간단한 일입니다. 과거를 되돌아 보면 6자회담을 하고 있는 도중에 적절한 보상을 주더라도 그들은 핵실험을 하여 망친 다음 또 (회담에) 나오거나 하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전략에는 6자회담을 열더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핵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사를 전제로 회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과 한국은 같은 생각이며, 중국도 어느 정도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러시아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미국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회담을 위한 회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북한이 만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면 핵을 포기하는가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대화하는 자세를 가지고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에 대해서 언제나 중국을 모델로 하라고 말해 왔습니다. 중국정부에 대해서도 북한을 중국과 같이 해 주길 바란다고 말햇씁니다. 우리들이 개방하시오, 변하시오 라고 하여도 그들은 오해하는데, 중국이라는 성공사례도 있으며 체제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직역 반, 의역 반. 제 실력이 딸릴 수도 있겠지만 좀 중구난방한 느낌이 있습니다. 일본어 가능하신 분은 링크를 직접 참고하시고 보시는 편이 좋을 듯.
  1. 아마도 서울 회의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면 G20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으셨다고 말씀하시는 듯.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10.11.17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홋카이도만 해도 농업 아니면 맥주공장류 제외하면 취직할데가 별로 없어서 다른곳보다 공무원으로 몰리는 인구가 훨씬 많은데(.....) 식량 자급율도 그렇다지만 당장 협정체결로 지역사회구조가 위협받는 자유무역협정이라면 글쎄요(....뭐 맺지 말라는 것은 또 아닙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17 16: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귀가 얇은 편이다 보니, FTA 찬성파의 말을 들어 보면 그게 맞는 거 같고, 반대파의 말을 들어 보면 또 역시 맞는 거 같고... 개인적으로는 6.5대 4.5 정도로 찬성쪽으로 기운 쪽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

      개인적으로 이 인터뷰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후나바시 씨가 언급한 G8에 한국이 가입하면 어떻게느냐는 말. 어떤 생각에서 나온 말인지가 궁금하더군요.(단순한 예의 상??)

이 글은 학습연구사[学習研究社, Gakken] [역사군상-유럽전사 시리즈 Vol.12 독일장갑부대전사2]의 p134~p139에 실린 군사평론가 노기 케이이치[野木 恵一]씨의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또한 사진등은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의 것을 참조하였습니다.

연비가 좋고 피탄 당하여도 폭발할 위험이 적은 디젤 엔진. 이렇게 전차(戰車)에 적합한 동력기관의 발명자는 독일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독일은 전차에 폭발하기 쉬운 가솔린 엔진을 계속 사용했다. 이런 기술사(技術史)적 의문에 다가서 보자.

발명가의 죽음

 1913년 9월 29일 밤.
 벨기에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배에서 한 사람의 독일인이 사라졌다.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좌절과 인간관계, 빚 문제와 같은 스트레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을 거라 추측된다. 그러나 그의 발명이 타국의 손에 건네지는 것을 막고자 독일 정보기관이 살해했다고 추리하는 사람도 있다.

 발명가 루돌프 디젤. 그의 발명품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디젤 엔진이다.
 확실히 디젤의 엔진은 그가 죽은 다음 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U보트에 사용되어 그 우수성을 알렸기에, 그의 조국 독일은 디젤 엔진의 기술이 가상적국 영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일정부가 암살하려고 할 정도로 루돌프 디젤의 발명을 높게 평가했다면 그가 스트레스 받을 정도로 몰리지 않았을 것이며 일부러 외국까지 자신의 발명품을 팔러 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암살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디젤 암살설은 경향 신문의 이 기사를 참조)

 디젤의 죽음(향년 55세)은 너무 빨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71살에 죽은 부친만큼 살았다면 자신의 발명품이 잠수함이나 기관차, 자동차나 비행기에 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디젤의 엔진은 그의 사후 20여 년 지나자 전차에도 실리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한 것은 조국 독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실현시킨 것은 그의 조국과 싸우게 되는 소련이었으며, 먼 동양의 나라 일본이었다. 그의 모국 독일이 디젤 엔진을 사용한 제식 전차는 2차대전이 끝난 후인 레오파르트 1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디젤의 모국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하지 않았는가? 이는 이외로 맹점을 찌른 의문일지도 모른다.

열효율을 추구하며

 루돌프 크리스티안 칼 디젤(Rudolf Christian Karl Diesel)의 조부나 부친은 제본공(製本工)이었다. 부친 테오도르(Theodor) 때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테오도르는 파리에서 독일상인의 딸 엘리세(Elise)와 만나 결혼해서 루돌프와 두 딸을 두었다.

 디젤 일가는 187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외국인이라 추방된다(프랑스와 프로이센간의 전쟁이 원인). 루돌프는 가족과 떨어져 아우크스부르크의 친척집에 맡겨져 독일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모국 독일에서 그는 엔지니어가 되는 꿈을 꾸며 우수한 성적으로 뮌헨 공과대학에 진학, 1880년에는 뮌헨 공과대학 사상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다.

 처음에는 은사의 추천으로 냉장고 회사에 취직하였고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 지점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83년 파리에서 살던 독일여성 마르타(Martha Flasche)와 결혼. 이를 계기로 회사를 관두고 발명가, 기술 컨설턴트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디젤은 대학시절부터 효율이 좋은 내연기관 발명에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연기관의 이론적 근거는 1824년 프랑스의 니콜라 레오나르 사디 카르노가 발표하였다. 또한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는 1876년에 카르노가 제시한 기관(4사이클 엔진)을 실제로 제작하였다. 1883년 독일의 고틀립 다임러빌헬름 마이바흐가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에 개량을 더하고 연료에는 가솔린을 채용하였다. 이것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엔진의 원형이 되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오토의 엔진은 14%의 열효율(발생한 전 에너지 중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비율)밖에 발휘하지 못하였고, 다임러의 엔진조차 효율 18~19%로 낮았다(가솔린을 연소시켜 얻을 수 있는 열에너지 중 80%이상을 버리는 엔진. 현대의 엔진 효율은 40%정도).

 디젤이 제작한 엔진은 혼합기 대신에 공기만을 압축하여 거기에 연료를 내뿜어 연소시키는 구조였다. 단열압축하면 보일의 법칙샤를의 법칙에 따라 공기는 섭씨 수 백도의 고온이 되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연료를 내뿜는 것만으로도 점화기 없이 연소, 폭발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디젤 엔진을 ‘압축점화기관’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엔진은 디젤 이전부터 연구되었으나 실제로 제작에 성공한 것은 루돌프 디젤이 처음이었다. 그는 1893년에 ‘합리적 열기관의 이론과 설계’를 간행하였고, 같은 해 독일정부에서 특허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엔진이 완성된 것은 1897년의 일이었다. 완성될 동안 그는 고압축비(高壓縮比)나 연료분사(고기압 하의 실린더에 연료를 넣기 위해서는 가솔린 엔진처럼 부압을 이용한 카브레터가 아니라 연료를 분사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 인젝션이라도 부르는 장치가 디젤 엔진 개발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었다)에 따른 기술적 문제 해결에 고심하였으며, 덤으로 특허소송에도 연루되었다.

 디젤의 발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를 이끌고 있던 하인리히 폰 부츠(Heinrich von Buz)였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원래 인쇄기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계 메이커였지만, 디젤이 아우크스부르크 출신 제본공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면 일종의 동류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우크스부르크 기계제작소는 1898년에 뉘르베르크 기계제작소와 합병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기계제작소(약칭
MAN)가 되는데, 흥미롭게도 디젤의 모친은 뉘른베르크 출신이었다.
 MAN사(社)와 더불어 디젤을 지원한 것이 독일을 대표하는 철강, 병기 회사인
크룹(wiki_en)사(社)였다. 즉 디젤의 발명은 실용화 되기도 전부터 강력한 지원자를 얻었다는 것이 된다. 디젤은 엔진을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젤은 기업 경영감각이 떨어졌고 상업적인 재능도 없었다. 거기에 아직 디젤의 엔진은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어 그다지 팔리지 않아 특허가 실효되는 1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연간 판매대수는 200~300대뿐이었다. 디젤은 이상가에 완고하였고 사교성이 없는 독불장군이었기에 1906년에는 MAN사(社)와 결별하고 자신이 만든 디젤사(社)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거기에 더해 특허수입으로 부동산에 투기하여 거액의 빚을 지게 된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소식불명이 된 만큼 자살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죽자 차츰 디젤 엔진 보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특허실효 후에 영국을 시작으로 한 각국이 독자적으로 디젤 엔진을 개량한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정을 보아도 디젤 엔진 보급에 디젤 개인의 존재는 절대적 요건이 아니었고, 기술이 영국에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 한 독일 정보기관이 그를 암살하였다는 추측도 난센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젤 엔진의 장점

 디젤 엔진의 장점 특히 가솔린 엔진(니콜라스 오토의 엔진)과 비교할 경우 장점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디젤 엔진의 장점은 다음 세가지가 있다.

 (1). 열효율이 높다.
 즉 같은 출력이라면 연료소비율이 낮다(연비가 좋다 = 항속거리가 길다).
 디젤 엔진의 이론적인 열효율은 50%~60%나 된다. 가솔린 엔진으로는 기껏해야 40%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론대로의 열효율이 나올 순 없었지만, 실제로 디젤 엔진은 같은 양의 연료로 가솔린 엔진보다 1.5배 더 이동할 수 있었다.

 (2). 경유 등 저가의 연료를 사용할 수 있기에 경제성이 높았다.
 가솔린 엔진은 가솔린 밖에 쓸 수 없었지만 디젤 엔진은 연료의 융통성이 높아 가솔린은 물론 알코올도 쓸 수 있었다. 루돌프 디젤은 입도가 0.5mm 이하인 석탄가루를 연료로 할 생각까지 하였다(물론 실용화되지는 않았지만).

 (3). 구조가 단순하고 튼튼하여 내구성이 높다.
 디젤 엔진은 압축비가 20전후(통상기압의 20배)나 달하기에 처음부터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루돌프 디젤이 실용화하기까지 많은 실패를 거듭했던 것도 엔진 부품을 튼튼하게 제작하고 결합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장점을 뒤집어 보면 디젤 엔진은 무겁고 부피가 커진다는 단점이 된다.

 디젤 엔진을 전차에 채용할 경우 (1)열효율이 높다는 점은 이동거리 연장으로 이어진다. 즉 같은 양의 연료통 용적이라면 연료소비율 에 반비례하여 이동거리가 길어진다. 전차가 보병의 동반병기였을 즈음이라면 몰라도 전차가 집단으로 질주하게 되자 1회의 연료보급만으로 오래 가는 편이 좋았다.

 (2)는 연료비의 저하는 물론이고 가솔린보다도 쪽이 확보하기 쉽기에  전쟁 때도 쉽게 연료가 부족해지는 일은 가솔린에 비해 덜했다. 전쟁 때 가솔린은 항공기의 연료로 우선적으로 배당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경유라면 확보하기 쉽다.
 또한 디젤 연료(경유)는 인화점이 높아 가솔린과 같이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전차가 피탄 당했을 시의 생존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T-34 등 소련 전차는 후부에 드럼통처럼 생긴 예비연료통을 외부에 대놓고 탑재하였다. 이는 디젤 연료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만약 안에 가솔린이 들어있었다면 피해가 더 늘었을 것이다.

전차와 디젤

 처음으로 전차용 디젤 엔진을 설계한 곳은 영국의 리카도 사(社)(wike_en)이다. 4기통 액냉 슬립 밸브로 90마력의 엔진이 비커스 중전차용으로 설계되어 1927년에 탑재되었다.
 그 후
A-12 마틸다 보병전차, 발렌타인 보병전차 등에 AEC(wike_en), 레이랜드(wike_en), 제너럴 모터스(GM) 제작의 디젤 엔진이 탑재되었지만 영국 전차의 주력은 항공기용에서 전용된 가솔린 엔진이었다.

 미국에서도 M4A2 셔먼이 GM의 디젤을 탑재하였지만 대부분은 무기대여법에 따라 소련으로 보내졌고, 미육군 자신들은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2차대전 중 본격적으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한 나라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소련과 일본이었다.
 소련은
피아트제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을 연구하여 V형 12기통의 BD-2를 개발. 1933년에 BT-5 쾌속전차(wike_en)에 탑재하여 테스트하였다. BD-2엔진은 V-2엔진으로 발전하여 1939년에는 표준엔진으로 제정. KV-1 중(重)전차, T-34 중(中)전차, 스탈린 중(重)전차 등에 탑재되었다. V-2 시리즈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197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012

 그러나 가장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가솔린 확보의 불안, 화재 위험 등을 고려하여 디젤 엔진 개발을 단행하였다. 또한 중국대륙에서의 작전 중 냉각용수 확보의 어려움(냉각수에는 칼슘 등 미네랄이 적은 물이어야 했다. 우물이나 강물은 부적절)이나 냉각계통이 얼어붙을 위험(극한의 중국 동북부에서 작전행동을 고려했기 때문) 등도 감안하여 1932년부터 공냉식 디젤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세계적으로도 공냉식 디젤 엔진 모델이 없어 독자적인 개발이 되었지만, 우선 직열 6기통 4사이클 디젤 엔진이 1936년 제식 채용되어 89식 중전차(을형)에 탑재되었다. 이어서 일본은 동일 실린더의 조합을 바꾸어 각종 사이즈의 엔진을 만드는 – 모듈러 사상의 선구자와 같은 4사이클 디젤 엔진 개발에 착수했다.

 통제 디젤(100식 엔진)(wiki_jp)이라 부르는 보아(내경)120mm, 스트로크 160mm의 배기량 1.8리터의 실린더를 1단위로 하고, 이것을 4본(직렬4기통)에서 최대 12본(V형 12기통)으로 조합함으로써 배기량 7.2리터에서 21.6리터의 디젤 엔진을 만드는 것이다. 최대 V형 12기통 과급기 내장 엔진의 최대출력은 300마력으로 공냉식 외에 수냉식도 있었다. 통제 엔진은 1식 중전차(치헤) 이후의 전차에 탑재되었다.

 패전으로 인해 일단 일본은 병기개발에서 손을 떼지만 자위대의 발족과함께 전차 개발을 재개. 2차대전 후 첫 번째인 61식 전차에는 2차대전 때의 기술을 살려 공냉식 4사이클 디젤이 탑재되었다. 그 후에도 74식 전차(공냉 2사이클), 90식 전차(공냉 2사이클)에 디젤 엔진을 탑재하였다. 즉 일본은 반세기에 걸쳐 일관되게 전차용 디젤 엔진을 계속 추구한 것이다. 전차용 디젤 엔진은 2차 대전 이전부터 이후까지 기술을 계속 발전시켰던 일본의 병기개발사상 드문 예가 되었다.

012

가솔린 엔진을 채용한 독일

 디젤 엔진의 원조 독일에서는 2차대전 중 전차에 가솔린 엔진을 계속 탑재했다.
 디젤 엔진을 탑재한 시작전차라 하면 판터의 다임러 벤츠의 시작차(VK3002DB)에 동사(同社)의 디젤 엔진을 탑재하긴 했지만 저 시작차는 채용되지 않았다. 제식전차는 I호 전차 B형 이후 전부 마이바흐 사(社)의 가솔린 엔진을 탑재하였다. 마이바흐 사(社)는 비행선이나 철도차량용 디젤에서 실적이 있던 회사였던 만큼 독일이 디젤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은 수수께끼다.

 또한 디젤의 발명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MAN 사(社)나 크룹 사(社)도 2차대전 중에 전차의 생산이나 설계에 관여하였다. MAN 사(社)나 크룹 사(社)에서 디젤 엔진을 탑재한 전차가 등장하여도 이상하지 않았음에도 실제로 전차에는 마이바흐 제의 엔진을 탑재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독일육군의 기술정책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한 디젤 엔진이라 아울러 말하지만 잠수함, 기관차용과 자동차, 전차용은 설계 자체가 많이 달랐다. 잠수함이나 기관차용은 대형대중량으로 저회전인 소위 저속디젤이며, 자동차용과 전차용은 소형경량의 고속디젤이 요구되었다. MAN의 특기인 U보트 용 디젤 엔진 기술은 기관차에 적용할 수 있었지만 그 상태대로 차량용에는 전용할 수 없다.

 디젤 엔진의 소형경량화에 공헌한 기술은 연료의 공기분사에서 무기분사로의 전환이었다.
 디젤이 설계한 시작 엔진이나 1920년대까지의 실용 디젤 엔진은 대부분이 연료를 압축공기와 혼합하여 실린더 내에 분사하는 방식을 채용하였다(공기분사).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연료를 단독으로 깨끗한 안개 상태로 뿜어내는 노즐, 고압연료 펌프 등을 제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기압축기는 부피가 커 필연적으로 엔전 전체도 크고 무거워졌다.

 1927년 독일의 로베르토 보슈 사(社)가 무기연료분사 펌프 개발에 성공한다. 덕분에 1930년대가 되자 차츰 무기분사 디젤 엔진이 보급되었다. 이와 함게 디젤 엔진의 신뢰성도 눈에 띄게 향상되어 갔다.
 흥미롭게도 1930년대에는 열강들이 경쟁하듯 항공기용 디젤 엔진 개발에 분주하였다. 디젤 엔진은 가솔린 엔진보다도 필연적으로 무겁기에 항공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좋은 연비율과 내구성은 장거리용 항공기에게 있어서는 무게에 관한 문제를 고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엔진이 무거워도 필요한 연료가 적다면 차감하여 엔진 중량이 무거워도 연료를 적게 실으니 가벼워 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긴다.

 실제 디젤 엔진은 우선 1930년대에 비행선용으로 확고한 지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MAN, 다임러 벤츠, 피아트, 롤스로이스, 융커스(wike_en), 리카도 등 유명한 회사가 대형 항공기용 디젤 개발에 매진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실용의 영역에 달한 것은 융커스 사(社)의 유로204/205/207 시리즈가 유일했다.
 융커스의 항공기용 디젤 엔진은 긴 기통의 양측에 크랭크 샤프트가 있어 두 개의 피스톤 사이엔 연소실을 형성하는 대향(對向) 피스톤이라는 특이한 형식을 채용하였다. 이 엔진은 종전 후 영국의
치프틴, 소련 T-64의 디젤 엔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석유를 갈구하며

 지금은 디젤 엔진을 탑재한 승용차나 트럭이 널리 보급되어 있지만 독일이 전차 개발을 재개한 1920년 말 즈음은 디젤 엔진 차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디젤 연료(경유)보다 가솔린을 구하기 쉬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 침공한 독일 육군의 장갑부대는 길가에 있던 주유소에서 연료를 약탈하여 사용하였다. 경유라면 현지조달이 어려웠을 지도 모르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나폴레옹 전쟁 때라면 모르겠지만 근대적인 군대에서 연료나 식량을 현지조달 하겠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연료를 최전선까지 보낼 수 있는 보급체재가 만들어지지 않는 한 전쟁은 시작할 수도 없다.

 연료(석유자원) 확보에 관해서는 독일군 수뇌부보다도 히틀러 쪽이 확실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권을 잡기 전인 1932년 6월 히틀러는 독일의 석유화학기업 I.G.파르벤(wike_en)과 손을 잡고 보호를 약속하였다.
 I.G. 파르벤은 석탄을 원료로 하는
석탄액화연료를 개발하고 있었다.
 석탄을 석유로 만드는 합성에는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수소 첨가법(wike_en)과 석탄을 일단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분해해서 재합성하는 피셔 트로프슈 공법(wiki_en)이 있는데, 파르벤의 방법은 베르기우스의 수소 첨가법으로 이는 항공기용 가솔린을 합성하는데 적합했다.

 히틀러는 강박관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항상 석유자원 확보에 신경썼다. 그가 말하는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생존권)에는 식량산지와 더불어 유전지대도 포함되어 있다. 루마니아를 동맹국에 끌어들여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확보했으며, 1941년 소련침공 때는 장군들을 물리치고 주공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로 돌렸다. 그는 장군들에게 “자네들은 전쟁의 경제적 측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독일군은 카프카스 산맥 앞에 도달하여
바쿠의 유전지대가 보이는 곳까지 육박했지만,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프랑스 전선과는 정반대인 일이 러시아 전선에서 일어난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보급기지를 점령하지만 비축되어 있던 연료는 디젤 용의 경우로 독일군의 전차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42년 공세에서도 카프카스의 유전지대를 목표로 하였다. 바쿠 유전을 점령하면 독일은 그리도 바라던 석유자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소련의 전쟁유지 능력을 뺐어 패배로 몰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점령한 유전을 복구하기 위한 석유기술여단까지 재빨리 편성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42년 공세도 역시 기상악화와 보급선의 한계로 실패했다. 독일육군은 다시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추었기에 공세에서 수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기대했던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는 1944년 초반에는 석유공급의 54%를 점할 정도가 되었고, 항공 가솔린은 92%나 석탄액화연료에서 만들어졌다.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 옆에 I.G. 파르벤의 석탄액화연료 고장이 건설되어 유대인 수용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연료생산에 종사했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의 1/3은 이런 강제노동의 산물이었다.

 연합국 공군은 1944년 5월부터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공장을 공격하였으며 또한 플로이에슈티의 유전을 폭격하였다. 독일의 석탄액화연료 생산은 곧바로 1/10이하로 떨어져 항공기는 날 수 없게 되었고 전차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독일은 운명은 석탄액화연료와 함께 다한 것이다.

 이제 여기서 서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독일은 어째서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지 않았을까?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독일육군 수뇌부가 주로 유럽 안에서만 작전을 상정하였기에 연료 확보를 문제시 하지 않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전차는 보병의 동반병기라는 개념을 계속 가지고 있어 그다지 긴 작전행동을 요구하지 않음 점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디젤 엔진을 전차에 탑재하기에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점도 있었을 테지만 그 정도라면 독일의 기술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 전차가 디젤 엔진을 채용했다고 하더라도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석유생산의 근원을 파괴당하면 디젤 연료(경우)건 가솔린이건 부족하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디젤 엔진이라면 독일 전차의 이동거리가 좀 더 길어졌을 것이며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을까? 연료부족으로 진격을 멈춘 몇몇 국면에서는 좀 더 유리하게 진행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루돌프 디젤의 모국 독일이 전차용 디젤 엔진을 개발하고자 하지 않았던 점은 기술사적으로 기묘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차대전 서적을 읽다가 삘받아서 번역하긴 했습니다만 제가 2차대전과 이런 기계에 관한 것은 무지에 가까우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가차없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Gyuphi IV 2010.10.10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나 지금이나 공돌이가 이래저래 현실에서 몰리는건 변함이 없는듯(..이 아니라 글의 주제에서 묘하게 벗어나 있긴 합니다만...;;;;)

    그러고보면 그렇군요. 그 히틀러의 갈곳잃은 진격이 저는 스벤 헤딩의 이론에서 나온 '세계의 중심'을 제패하려는 전략에서 나온줄 알았는데 유전을 확보하고자 하는 측면도..

    허허.. 사실 전쟁사에서 탱크나오고 나면 좀 긴박감이 떨어진다고 할까요. 그런점에서 사실 1차대전 후의 전쟁사는 찾아보려니 영 근성부족이었습니다만 이렇게 번역해주신 덕에 잘 읽고 갑니다(__)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10 19: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것 같습니다. 거의 연구실이나 공구실에서 인생을 보내다 대박을 친들 사회경험의 없음으로 인해 실패를 맛보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 합니다. 처음으로 비행했다는 라이트 형제도 특허 소송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예전에 읽은 책에서 히틀러의 전략에 반대하던 OKW 참모들의 의견을 물리치며 히틀러가 '자네들은 전쟁경제를 모르네'라고 본문에서 나오는 말과 비슷한 말을 했었다는 것이 생각나는군요. 어쨌든 모스크바보다 곡창지대와 유전이 더 중요하다고.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같은 경우 2차대전에 관심은 좀 있는 편입니다만 그에 상응하는 지식도 없고(...무엇보다 영어, 독어, 러시아어를 못하다 보니 일본을 거쳐오는 것들만 취해서요...^^; ) 해서 잘 알진 못합니다.

  2. 우독사 2011.03.21 2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평소 디젤엔진에 관심이 많았는데
    좋은정보주셔서 고맙습니다~

  3. 울프 독 2011.06.13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군도 휘발유 엔진을 사용했는데 이유는 디젤 엔진이 고가이고 정밀 제조도 힘들며
    대형 전쟁이 되면 미숙 노동력으로 대량 생산해야 되는 소모품 전차 엔진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글을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디젤 생산 기술이 시원치 않았던 3-40년대의
    개념이 적용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서 모두 디젤 엔진으로 제작되고 있습니다.

  4. 배고픈팬더 2013.04.05 2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퍼가도 될까요?

  5. 라군 2013.06.25 1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독일이 가솔린 엔진을 사용한 것은 진동 문제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외에도 당시 전차는 기동중 사격이 불가능하여 기동 중 정지하여 사격하였는데, 가솔린 엔진이 진동이 적고 재기동시 이점이 있어 채택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6. 라군 2013.06.25 1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독일이 가솔린 엔진을 사용한 것은 진동 문제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외에도 당시 전차는 기동중 사격이 불가능하여 기동 중 정지하여 사격하였는데, 가솔린 엔진이 진동이 적고 재기동시 이점이 있어 채택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7. 디젤라 2014.07.28 01: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벤츠디젤엔진 내구성등 모두따져도 참좋져

  8. 나그네 2014.12.10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성능이 좋은 커먼레일 엔진생산까지 긴 세월이 흘렀군요.

  9. 디젤킹 2015.05.05 1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번역해주신 거였군요. 부드럽게 잘 읽히고 기계 용어도 이질감없이 부드럽게 읽혀 전혀 몰랐네요
    과제 하는데 유용하게 참고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10. KD 2016.03.07 2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장 유력한 것은 경유확보의 어려움이라고 본적 있습니다. 1936년 상용 디젤 승용차를 개발하고 디젤 인젝터 펌프와, 그 어렵다는 초정밀 인젝터 노즐도 개발한 독일이기에 40년대 디젤엔진 개발에는 기술적 어려움은 없었을 겁니다. 저소음, 저배기량 대비 고출력, 범용성 높은 휘발유가 더 적합했다고 여겼겠지요. 융커스의 jumo205 엔진만해도 항공용 엔진치고는 극히 소형인 16리터로 880마력으로 너무 고성능이었습니다. 40리터나 되는 t-34보다 콤팩트하고 훨씬 고성능이죠.

  11. Kurfurst 2017.03.18 1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일이 가솔린 엔진을 쓴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건 가솔린을 즐겨쓴 미국과 영국도 공통되는 얘기.

    1. 미개척 영역이었던 디젤 엔진에 비해 기존의 가솔린 엔진은 철저히 검증된 엔진이며, 기술력 축적도 충분히 되어있었다.

    2. 수요와 공급이 많아 디젤보다 생산비가 저렴했다.

    3. 현장에서는 생각보다 그리 큰 성능차를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유지보수 측면에서는 정비병들에게 친숙했던 가솔린 쪽이 더 나았다.

    이상의 3가지 이유로 독일(그리고 영국과 미국)은 가솔린 엔진을 즐겨썼다고 보는게 적절합니다. 사실은 미국의 사례(포드 GAA)만 들고와도 설명이 끝납니다만 :-)

  12. 알자스 토카이 2019.09.13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리친구들 애초에 노획한 소련제 디젤엔진 카피에 실패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정신구조인 ‘하극상(下剋上)’이 “아래(下)가 위(上)를 이긴다(剋)”는 주종역전이라는 것을 본 작품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가사회(武家社会)의 주종관계(主従関係)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 정신적인 면에 주안을 두며 살펴보자.

 중세의 주종관계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맘에 안 들면 주인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 요시나가[可児 才蔵 吉長 - 1554년~1613년]’는 그 대표적인 무사라 할 수 있다. 그의 과거을 살펴보면 엄청나다. 사이토우 타츠오키[斉藤 龍興][각주: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2],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로 주군을 바꾸었다. 센고쿠의 시대를 질주한 사나이로서 떳떳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에게 “아래가 위를 먹어 치운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위를 존중하지 않는 정신구조는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종관계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막부(幕府)를 연 ‘쇼우군[将軍]’은 휘하에 가신(家臣)을 두었다. 이를
고케닌[御家人]이라 한다. 이 고케닌은 쇼우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지두(地頭-じとう)에 임명 받았다. 이는 어느 일정한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 지배권을 침해 당할 때에는 쇼우군이 나서서 권리를 부활시켜 주었다. 이것이 ‘본령안도(本領安堵)’. 쇼우군에게서 받은 ‘어은(御恩)’이다.

 대신 고케닌은 쇼우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이 ‘봉공(奉公)’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출진하였다. 목숨을 바쳐 자기 영지[本領]를 안도 받으려 노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종관계 즉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어디까지나 상호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쇼우군이 ‘어은’을 해주지 않는다면 ‘봉공’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적인 ‘절대복종’이 아니라 ‘give and take’에 가까웠던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라면 ‘어은’을 받지 못했기에 당신에게는 ‘봉공’할 수 없습니다 – 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신을 가졌던 고케닌은 발생 당시 숫자가 얼마큰 있었을까?
 1185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요시츠네[義経]를 토벌하기 위해 모은 15개 쿠니[国]의 고케닌은 2096명이었다고 한다. 즉 ‘무사(武士)’는 1 쿠니[国] 당 13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즈음의 전투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경제력(병력동원력)을 과시하며, 실제의 전투는 일기토[一騎打ち]에 의한 것이었기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말하자면 병기가 되는 철(鉄)이 귀중품이었기에 일반병사들에게까지 병기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무사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국(東国)에서 이 숫자인 것이다. 이외로 무사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소빙하기가 무가사회(武家社会)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30년, 여름에 이상기온이 찾아왔다. 6월9일에
무사시[武蔵] 카네코 장[金子荘]과 미노[美濃] 마키타 장[蒔田荘]에 눈이 내렸다. 이 보고를 받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동요했다. 이상기온은 곧바로 벼농사의 괴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7월에 들어서자 여러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
 ‘이본탑사장첩(異本塔寺長帳)[각주:3]’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겨울과 같아 매우 추웠다”는 상태였던 것이다. 쿄우토[京都]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확실히 비상사태였다. 이때 막부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장치를 만들었다. 이즈[伊豆]와 스루가[駿河] 지역의 예를 살펴보자. 막부가 보증하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도록 도소우[土倉]에 명령하였다. 만약 백성이 쌀을 변상하지 못하더라도 막부가 대신해서 변상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이 연도에 덕정령(徳政令)을 취한 다음에도 약 9000여 석의 비축미를 방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몇 백 년 정도 이어진 것이다. 비축미도 바닥을 보였다. 막부는 점점 체력을 잃었고 그에 따라 군사력도 저하되었다. 이젠 ‘본령안도(本領安堵)’같은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막부의 승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막부가 아무리 ‘본령안도’를 하더라도 기근으로 인해 마을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다. 그렇게 점차 일본인의 정신구조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제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에서, “또 쌀을 달라고”라는 억지스런 요구로, 나중에는 “어째서 막부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냐!?”라는 원망으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총촌(惣村)=센고쿠(戦国)의 마을’이 출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주종관계를 몰랐다. 원래 고케닌[御家人]과는 혈연관계도 아니었다. 새로운 ‘자칭’ 무사(武士)’가 태어났다. 그들이 바로 ‘코쿠진[国人]’이며 ‘재지령주(在地領主)’로 그야말로 쿄우토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미천한 자들이었다. 최대로도 하나의 쿠니[国]당 130명밖에 없었던 과거의 무사계급이 센고쿠 시대에 볼 수 있는 대군단을 편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에 쐐기를 박듯이 1450년대의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하여 막부의 통치능력 결여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없었다. 즉 ‘위(上)’는 없었다. 새로운 무사단이 ‘아래(下)’라고 한다면 통치능력이 없는 막부, 슈고[守護] 등 ‘위’를 물리치려는 사상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극상의 행동규범이 없었다면 센고쿠 시대를 살아서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3권속에서 ‘오다 야마토노카미 노부토모[織田 大和守 信友]’[각주:4]가 “신하를 지키지 않는 주인은 주군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오와리 슈고[尾張守護]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를 쓰러뜨린 것은 센고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에 넣은 ‘서바이벌 방식’이 아니었을까?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의 손자. 미노[美濃]의 영유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3. 주로 아이즈[会津]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마타다이[守護又代 - 슈고다이[守護代]의 대리].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織田 信長]의 가문인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의 주가(主家)였다. 1554년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의 아들 시바 요시카네[斯波 義銀]가 가신들을 이끌고 낚시하러 간 사이에 슈고[守護]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 [본문으로]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jane 2010.10.02 0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발해지랑님 돌아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ㅠㅠ 항상 발해지랑님 홈페이지에선 뭔갈 배우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s://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2 0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실례했습니다. 이제부터는...아니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ps;처음 뵙는 아이디시군요.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