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安芸]의 산골에 있던 미력(微力)한 소영주(小領主)에서 출발하여, 실로 10개 쿠니[]에 걸친 거대 다이묘우[大名]로 성장한 모우리 모토나리. 그는 자신의 생애를 시종일관 철저한 모략가(謀略家)로 살았다. 그의 고독한 성장 과정이 원인이었다.

 1558 8월에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5살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10살에 아버지와 사별(死別)하였다. 오로지 형 오키모토[興元]만을 의지하였지만 이 형도 내가 19살 때 죽어버렸다. 이후로는 부모형제도 없고 백부, 조카 등 친척 중에서도 도와주는 친척이 없어, 단지 혼자서 오늘날까지 어떻게든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고 술회하였다.


 모토나리는 모우리 씨[毛利氏]의 본거지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당주 히로모토[弘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때까지 코오리야마의 서쪽에 있는 타지히[多治比] 루가케 성[猿掛城]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모우리 가문의 부하 격인 이노우에[井上] 일족의 힘이 강하여 그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그대신 모토나리의 땅을 횡령 당하거나 하였다. 모토나리는 이때부터 20여 년간, 이노우에 씨()의 세력 아래서 인종의 나날을 보내었다. 이런 인종의 나날 속에서 옆 군()의 호족 킷카와 쿠니츠네[吉川 国経]의 딸 묘우큐우[妙玖]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1523년에는 장남 타카모토를 얻었다. 모토나리는 27살이 되어 있었다. 이해의 여름이 끝날 즈음 모토나리의 환경이 급변하였다.


 모우리 종가(宗家)인 형 오키모토가 24살에 죽고(1516), 그 뒤를 이은 오키모토의 아들 코우쇼우마루[幸松丸]도 불과 9살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임 자리를 두고 내란이 일어났다.

 모토나리와 배다른 동생인 모토츠나[元綱[각주:1]]를 축으로 가문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내란 때 이노우에 일족의 도움으로 모토나리가 상속자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이때 라이벌 모토츠나를 죽였다[각주:2].

 조연에서 단번에 주연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된 모토나리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옹립해 준 이노우에 일족에게는 또다시 갚아야 할 빚를 만들고 말았다. 때문에 모토나리는 여전히 긴 인종의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그의 고독하고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이때 배양된 것이다. 후에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 가문이 잘 되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있을지언정, 이 나라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모토나리의 소위 네거티브한 면인데, 포지티브한 면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13살 때였다. 가신과 함께 이츠쿠시마 신사[(神社]에 참배한 후 모토나리는 가신에게 무엇을 빌었는지를 물었다. 가신은 우리 주군이 츄우고쿠[国]의 큰 영주가 되게 해달라 빌었다고 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몽둥이만큼 빌어도 바늘 정도밖에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빌 거라면 어째서 천하를 잡게 해달라고 빌지 않은 것이냐?”

 기개와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각주:3].


 또한 17살 때 중국 명()나라 사람들이 모우리 가문에 들렸는데, 그 일행 중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모토나리의 얼굴을 살펴보고서는,

 너는 고조, 태종의 관상을 겸비하고 있다. 장래 반드시 위세를 사방에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모토나리가 당시 직면하고 있던 츄우고쿠[国]의 정세를 말하자면, 산인[山陰] 지방에는 아마고 씨[尼子氏]가 패권을 쥐고 있었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에 걸쳐서는 오오우치 씨[氏]가 세력을 뻗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에 끼인 소영주(小領主) 모우리 가문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1531.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4]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지만, 1537년에 결별하고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에게 적자인 타카모토를 인질로 받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1541년 가을.

 아마고 씨()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모우리의 본거지 코오리야마[郡山]로 진격해 왔을 때 오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에게 1만의 군세를 주어 구원하도록 하였다. 아마고 군세는 이때 큰 눈을 만나 보급선이 끊겨 참패를 당하였다. 오오우치 군세도 아마고 군세를 이즈모[出雲]까지 깊숙이 추격하였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 양 세력의 약체화는 모우리 가문이 바라던 바였다. 모토나리는 곧바로 아키 슈고[安芸守護] 타케다 씨[武田氏]를 멸하여 아키[安芸]에 군림한 것이다. 또한 이 지배 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해서 모토나리는 세토 내해[瀬戸內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과 산인[山陰]국경에 있는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모략을 이용해 탈취하여,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셋째인 타카카게[隆景], 킷카와 가문에는 둘째인 모토하루[元春]를 각 가문의 당주 자리에 앉혔다.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어디까지나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 세상에서는 이를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5]'이라고 불렀다.


 양 가문을 손에 넣자, 모토나리는 지금이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중신 이노우에 일족의 숙청이었다. 20년간 모토나리는 그들의 전횡(專橫)을 참아왔던 것이다. 그 숙청은 철저의 극에 달하여 일족의 장로 모토카네[元兼] 이하 30명 이상을 죽였다. 이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가문 내의 공포는 굉장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일거에 장악하여 가신들에게 복종을 맹세시켰던 것이다.


 이 결집된 힘을 이용하여 모우리 가문은 유명한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에 돌입하게 된다.

 츄우고쿠[国]의 명문 오오우치 가문[内家]을 격퇴하여 더욱 크게 웅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오오우치 가문은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 요시타카를 자살로 몰아 넣고, 그 자리에 요시나가[義長]를 앉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략전에서 모토나리는 진가를 발휘하였다.

 오오우치 씨()의 거점인 야마구치[山口]에 모우리의 밀정들을 잠입시켰다. 모토나리는 그들에게 스에[]의 부하인 용장() 에라 후사히데[江良 房栄]가 모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유포시키게 하였다. 작은 의혹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결국 하루카타도 그런 소문을 믿고 후사히데를 죽여버린 것이다.


 1555년 봄.

 모토나리는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츠쿠시마 섬[島]에 미야오 성[宮尾城]을 쌓았다. 적의 대군을 작은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성을 쌓으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완성할 때까지 스에[陶] 군이 쳐들어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적측에 새어 나갈 수 있도록 모토나리를 손을 써 두었다. 하루카타가 조금 찔러보자 이외로 세찬 반응이 일어났다. 모우리의 숙장(宿) 중의 한 사람이 내응을 약속해 온 것이다.

 모든 것은 모토나리가 놓은 덫이었다.

 결국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의 유인에 넘어왔다. 하루카타는 2만의 대군을 500척의 군선에 태워서는 이츠쿠시마에 상륙시킨 후 토우노오카[岡]에 본진을 두고서는, 모우리의 미야오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555 9 21일이었다.

 30일 아침, 모우리 군은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비바람 세찬 날,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100척의 배로 이츠쿠시마[]로 건너 가서는 기습한 것이다.

 스에 군 2만은 4천의 모우리 군에 참패. 총대장 하루카타는 겨우 도망쳤지만 결국 섬의 서안 오오에[大江]의 바위 그늘에서 배를 갈랐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토나리는 여세를 몰아 빙고[備後], 아키[安芸],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를 손안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죽은 후의 것까지 절치부심하였다.

 3명의 아들에 대한 교훈장[三子],

 '너희 셋 중에 조금이라도 사이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셋 다 멸망 당한다고 생각할 것'

 이라 써서 일치단결의 중요성을 말했으며, 세 아들에게서 서약서까지 받아 두었다.

 2차 대전 전의 일본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세 대의 화살 교훈]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대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가 있지만, 세 대를 합치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깨닫게 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한다. 이것은 위의 교훈장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각주:6]

 

 1570, 손자인 테루모토[輝元]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를 공략하러 보낸 모토나리는 그 보고를 듣지 못하고 다음 해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년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지토우[地頭]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에 속하였고, 후에 오오우치[内] 휘하가 된다. 킷카와-코바야카와 가문을 손에 넣은 다음부터 차츰 세력을 넓혀, 스에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패권을 확립. 후에 츄우고쿠[国] 10개 쿠니[国]와 부젠[豊前]이요[伊予]의 일부를 영유하는 거대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71 6 14일 죽었다. 75.

  1. 가지고 있던 영지(領地)가 아이오우[相合]에 있었기에 풀네임은 ‘아이오우 모토츠나[相合 元綱]’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때 모토츠나는 아마고[尼子]의 푸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과 멀어지게 된다. [본문으로]
  3. 여담으로 나이를 먹고 죽기 전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아무리 영화를 자랑하더라도,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쇠하게 되어 자손까지 그 영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일본을 다섯으로 나눠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잘 보전하여 자자손손까지 이 위세를 남겨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小早'川']든 킷카와[吉'川']든 성에 내 천川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 [본문으로]
  6. 이 이야기가 이어져 예전 노정윤이 뛰었던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サンフレッチェ広島]의 ‘산프레체’는, 일본 말로 3을 의미하는 ‘산(サン)’과 화살들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체(frecce)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살무사 도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사이토우 도우산의 평판은 굉장히 안 좋다.

 타이라노 마사카도[門][각주:1],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등과 함께 악인(惡人)의 전형적인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같은 시대에도 도우산을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낙서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인을 베고, 사위를 죽이는 것은 몸의 파멸. 옛날엔 오사다, 지금은 야마시로

主を斬り、聟を殺すは身のおわり、昔はおさだ、いまはやましろ

 미노오와리(()のおわり)미노[美濃]오와리[尾張]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 토키 요리요시[土岐 芸]가 도우산에게 추방 당하여 미노에서 오와리로 쫓겨난 것을 말하며, ‘오사다 [헤이지의 (平治)]에서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각주:2]를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 忠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야마시로는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도우산[斎藤 山城守 道三]을 말한다. 어느 쪽이건 주군을 배신한 극악인(極惡人)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잔혹한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도우산은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으며, 혹은 솥에 죄인을 넣어 그의 부인이나 부모형제에게 불을 피우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삶아 죽이게 하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기름 상인에서 미노[美濃] 일국(一国)의 태수로 출세했을 만큼 젊었을 때부터 두뇌의 명석함은 발군이었다.

 쿄우토[京都]의 묘우카쿠 사[妙覚寺]에서 수행할 때는 '배움은 부처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변설(辯舌)부루나(富樓那 석가의 제자로 변설가)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내외(內外)를 잘 깨닫고 있으니 훗날 굉장한 명승(名僧)이 될 것이다'고 촉망 받았다. 묘우가쿠 사()에서는 호우렌보우[法蓮坊]라는 이름이었다. 이 시절에 알게 된 난요우보우[南陽坊]가 훗날 도우산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난요우보우는 미노의 호족 나가이 토시타카[長井 利隆]의 동생으로, 후에 미노[美濃]명찰(名刹) 죠우자이 사[常在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이라 불리게 된다.


 도우산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쿄우토[京都]의 교외에 있는 니시노오카[西]의 낭인 마츠나미 모토무네[松波 基宗]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마츠나미 가문은 대대로 '북면의 무사(北面武士 상황(上皇)의 거처를 지키는 무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호우렌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름 상인이 되었다. 나라야[奈良屋]데릴사위로 들어가, 야마자키야 쇼우고로우[山崎屋 庄五郎]라는 이름을 칭었다.


 미노[美濃]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서 기름 행상을 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기름을 에 담아 손님의 항아리에 옮기는데 깔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일문전(一文銭[각주:3])의 구멍을 통해서 흘려 넣은 것이었다. 한 방울도 구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멍 주위에 한 방울이라도 묻는다면 공짜로 주겠다고 하였기에 그에게는 손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퍼포먼스를 미노[美濃]의 호족 나가이 토우자에몬[長井 藤左衛門]의 가신 중에 한 명이 보게되었다.

 굉장한 기술이군. 저 묘기를 무예로 살린다면 필시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가이 가문의 무사가 한 말이 도우산을 무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우산은 기름 상인을 관두고 창()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3간반(間半=약 6미터40센티[각주:4])이라는 굉장히 긴 창(=나가야리(長槍))을 만들어, 그 창 끝에 바늘을 달아서는 대나무 가지에 매단 일문전의 구멍을 뚫는 연습을 하였다. 필사의 수련 끝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이어서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야리[長槍]는 센고쿠[戦国]전투에는 필수인 것이 되었는데 도우산이 그것의 발명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철포()의 실력도 또한 굉장했다고 한다[각주:5].
 이리하여 무예가 숙달된 도우산은 예전 묘우가쿠 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난요우보우=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의 연줄로 나가이 토우자에몬 나가히로[長井 藤左衛門 長弘]를 섬기며, 마츠나미 쇼우고로우[松波 庄五
郎]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우산이 가진 다른 매력적인 면으로 나가이 씨()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다. 기름 상인이라고 하여도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야마자키 하치만 궁[山崎八幡宮]전매권(專賣權)을 가진 기름 조합(油座)에 속해있던 상인으로 대단히 큰 규모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름 조합의 상인은 관소(關所[각주:6])를 통과할 때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상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도우산은 미노 슈고[美濃守護] 토키 모리요리[土岐 盛頼][각주:7]의 동생인 요리요시[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야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요리요시를 꼬드겨 자신을 멀리하고 있던 당주인 모리요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주가 된 요리요시는 도우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애첩 미요시노[深芳野]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독선적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노신(老臣)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도우산을 천거했던 나가이 토우자에몬이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도우산은 은혜를 입었던 이 토우자에몬을 모살(謀殺)해 버린다. 이미 나가이 신쿠로우 토시마사[長井 新九朗 利政]로 이름을 바꾸고 있던 도우산은 이렇게 나가이 가문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나가이 일족의 반발을 사 공격을 받아, 주군 요리요시 밑으로 도망쳤으나 오우미[近江]의 슈고다이묘우[守護大名] 사사키 씨[木氏][각주:8]의 중재로 겨우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후 도우산은 또다시 성()을 바꾸어 사이토우 성[姓][각주:9]을 칭하였다. 쇠약해져 있던 사이토우 씨()의 양자로 들어가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藤 山城守 秀竜]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착실히 그는 출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망은 끝없이 커져만 갔다. 다음 목표는 미노[美濃]의 주인 자리였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이 또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노의 호족들이 반 히데타츠 연맹군을 조직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운 좋게 오우미[近江]의 사사키 씨(),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중재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화해하였다. 이때 히데타츠는 그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이때부터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우산의 덫이었다.

 15425. 갑자기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거성 오오가 성[大桑城]을 습격하여 주군을 추방하여 명실공히 미노[美濃]의 태수(太守)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도우산은 곧이어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딸인 노히메[]를 노부히데의 적자 노부나가와 결혼시켜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얼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받고 있던 노부나가를 한번 보자마자,

 안타깝게도 이 얼간이 집 앞에 내 자식들은 말을 메게 되겠구나[각주:10]

 라고 탄식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이 즈음의 일인데, 도우산은 멍청함을 가장한 노부나가의 얼굴에서 일찍부터 후년 천하의 패자(覇者)가 가진 재능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역시 예언은 적중하여,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興] 때가 되어 사이토우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멸문 당해 버린다[각주:11]

 

 도우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주군 요리요시의 복수를 받게 된다. 그의 부인이 된 미요시노는 도우산에게 왔을 때 이미 요리요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도우산의 적자 요시타츠[]였다. 이 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도우산의 애정은 이 장자에게는 박했고, 둘째인 마고시로우[孫四郎], 키헤이지[喜平次]에게만 쏠려 있었다.

 

 도우산은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킨카잔 성[金華山城][각주:12]에 있게 하고, 자신은 나가라가와[長良川] 강 건너편에 있는 사기야마 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

 요시타츠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65(195cm)이라는 큰 키였으며 성격도 굉장히 과격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아 날이 갈수록 험악해 져 갔다. 도우산은 요시타츠를 없애고 둘째인 마고시로우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은밀히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요시타츠가 선수를 쳤다. 꾀병을 부려 숨이 있는 동안 유언을 하고 싶다고 하여 두 동생을 성에 불러들여 죽인 것이다.

 도우산은 격노하였다. 두 아들을 단번에 잃은 실망도 컸다.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이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 4.

 결국 둘은 전쟁을 벌인다. 도우산은 63세가 되어 있었다. 젊은 요시타츠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패하여 키다이 사[城田寺]로 도망치던 도중, 요시타츠의 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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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가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이토우 가문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은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567년이었다.

 

[사이토 도산(藤 道三)]
이름은 토시마사[利政], 후에 히데타츠[竜]. 말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을 칭했다. 미노 슈고[守護] 토키 씨[土岐氏]의 가신이 되었고, 1542년 주군 요리요시를 추방하여 미노 슈고가 된다. 1556 4 20일 적자 요시타츠와 싸워 전사(戰死).

  1. 939년에 칸토우(関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텐노우(新皇)]를 자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일본 3대 원령(怨靈)] 중의 하나.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바쿠후[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부친. [본문으로]
  3. 우리 나라의 엽전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본문으로]
  4. 아시가루(足軽)가 아닌 일반 무사의 창은 1간반(약 2.7~3미터)~2간(약 3.6~4미터)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이라고 하니 이 당시는 아직 철포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말년(도우산 1556년 몰) 즈음의 이야기 일 것이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각 지방의 실력자(영주, 절, 신사 등)들이 재정 확충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領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곳이 많았다. [본문으로]
  7. 요리타케(頼武), 마사요리(政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보통 롯카쿠[六角]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9. 사이토우 씨(氏)는 대대로 미노[美濃]의 슈고다이[守護代]였다. [본문으로]
  10. 얼간이 집 ‘가서’ 인사를 올리거나 지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 [본문으로]
  11. 멸문은 당했지만, 도우산의 막내 아들인 사이토우 토시하루[利治]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 부속 가신 되어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때, 노부타다와 함께 싸우다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죽게 된다. [본문으로]
  12. 이 시대에는 이리 불렸다 한다. 후에 이나바야마[稲葉山]를 거쳐 노부나가 시대에 기후[岐阜]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또한 이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일본판 北条早雲

  소우운은 센고쿠 다이묘우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들 한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낭인에서 칸토우[東]를 제패하는 거대 다이묘우까지 성장한 것이었다.

 

 아사쿠라 소우테키[朝倉 宗滴] 아사쿠라 토시카게[朝倉 敏景]의 아들]는 소우운을 평하며,

 창고에 바늘을 모으는 듯이 인색하게 모으면서막상 싸울 일이 있으면 귀중한 보석이라도 깨부숴 사용하는 듯 하였다
 고 말하였다.

 

 소우운은 '소우운님 이십개조[早雲寺殿二十箇]'라는 가훈(家訓)을 남기며, 여기에서 '밤에는 저녁 8시에 취침하고 아침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몸가짐을 가다듬도록……'이라고 일상의 세세한 점까지 배려하고 있다. 소우운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노력가로 늙어서도 여전히 눈과 귀가 건강하였고, 이빨도 빠지지 않아 장년기(壯年期)와 변함없는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45살까지의 전반생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가
시나노[信濃]의 오가사와라 사다모토[小笠原 定基]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오가사와라의 가신 세키 우마노죠우[ 右馬允]가 자신과 같은 이세[伊勢] 출신으로 동족(同族)이라 말하였다. 처음에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는 이름을 썼던 소우운의 출신에 대해서 이것이 가장 유력한 근거라 평해지고 있다.

 

 또 하나 유력한 것이 쿄우토[京都] 출신이라는 것이 있다.

 아시카가 막부[足利 幕府]의 요직(要職)을 역임하는 쿄우토[京都] 이세 씨[伊勢氏]의 사다후지[貞藤]의 아들이라고 하며, 사다후지는 쇼우군[軍] 요시마사[義政]의 분노를 사서 낭인이 되었으며 '오우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세[伊勢]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빗츄우[備中]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빗츄우에서 쿄우토[京都]로 갔고 이어서 스루가[駿河]로 내려갔다고 한다.

 사서에 따르면 빗츄우[備中] 시츠키 군[後月郡] 에바라[江原]타카고에야마[高越山] 성주(城主) 이세 스루가노카미 사다미치[伊勢 駿河守 貞通]의 양자(養子)가 소우운으로, 키비츠 다이묘우진[吉備津 大明神]의 계시를 받아 주변 명가(名家)의 자제들과 함께 큰 꿈을 품고 동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현지에는 이에 관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아시카가 바쿠후의 기록 중에는 빗츄우 출신의 이세 카몬노스케 모리요리[伊勢 掃部助 盛頼]의 이름도 보인다.

 

 어찌되었든 출신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지만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소우운은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타다[今川 義忠][각주:1]의 측실이 된 여동생의 신세를 지기 위해서 스루가로 왔다고 한다. 이 때 행동을 함께 한 6명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소우운을 포함한 7명의 사무라이는 함께 칸토우[東]로 무사(武者) 수행을 하러 갔는데, 그 출발에 앞서 신수(神水)를 나누어 마신 후, “ 7명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싸우지 않겠으며, 이 중 한 명이 다이묘우[大名]라도 된다면 나머지 6명은 그의 부하가 되어 돕자는 약속을 맺었다고 한다.

  6명은 후에 '소우운님 초창기의 가로중[(早雲)寺殿草創御家老衆]'으로, 호우죠우 일족에 준하는 '어유서가(御由)'라 불리며 존중 받았다.

 

 소우운이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이마가와 가문의 내분(內紛)이었다.

 1476 2.

 이마가와 요시타다는 쇼우군[軍] 요시히사[尚]의 명령으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시바 씨[斯波氏]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서 출진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시바 씨의 잔당에게 습격 받아 죽음을 당했다. 남아 있는 아들 타츠오우[龍王=후에 우지치카[氏親][각주:2]]가 아직 어려 가신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타츠오우는 난을 피하여 모친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타츠오우는 소우운의 여동생 키타가와도노[北川殿]의 아들로 소우운의 조카였다.

 

 내란 진압을 위해서 호리고에 쿠보우[堀越公方]인 마사토모[政知]에게서 우에스기 마사노리[上杉 政憲], 오오기가야츠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에게서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이 파견되었고, 소우운은 이 둘에게 중재안을 제안했다.

 이마가와의 가신들이 둘로 나뉘어 싸워서는 가문 멸망뿐 아니라 주변으로 전쟁이 확대될 뿐이다. 우선 오시카 노리미츠[小鹿 範満][각주:3]가 당주가 되고, 후에 타츠오우가 성인식을 치렀을 때 가독을 물려받게 해 달라

 도우칸도 마사노리도 이치에 맞는 이 제안에 찬성하여 중재는 성공되었다.[각주:4]

 소우운은 이 공로로 인하여 후지[富士郡] 시모카타[下方] 장원의 13고을을 하사 받아 코우코쿠지 성[城]의 성주가 되었던 것이다.

 

 소우운은 민심을 잡는데 뛰어났다.

 코우코쿠지 성주가 되자 곧바로 영내(領內)의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에게 이 영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받칠 수 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존경 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소우운은 제2의 찬스를 맞이하게 된다.

 1491년에 일어난 호리고에 쿠보우의 내란이었다.

 당주 마사토모가 죽어 챠챠마루[丸]가 뒤를 이었지만, 배다른 동생인 쥰도우지[潤童子][각주:5]와 그 모친을 한꺼번에 죽인 것이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즈[伊豆] 혼란에 빠졌다.

 

 호시탐탐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소우운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스루가[駿河]의 무사들을 이끌고 질풍과 같이 이즈를 침공하여 챠챠마루를 죽이고 순식간에 이즈를 점령해 버렸다.

 침공에 앞서 소우운다운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병(病)을 가장하여 이즈[伊豆] 쥬센 사[修善寺] 온천에 머물면서 나무꾼들을 불러 소문을 청취하고, 이즈[伊豆]의 지리나 무사들의 재정 상태 등 모든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것이 이즈 공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점령 후의 행정에도 소우운의 탁월한 수완이 발휘되었다.

 난을 피해 산 속으로 도망친 무사나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던 것을 그대로 허용한다고 하는 한편 만약 이렇게 해주는데도 나오지 않으면 논과 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집도 불태운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또한 소우운은 과감한 선정을 펼쳤다. 연공(年貢)을 사공육민(四公六民)으로 해서, 수확량의 40%를 세금으로 받고 나머지 60%는 백성이 가지게 한 것이다. 당시의 세율로는 오공오민(五公五民)이라도 대단히 기뻐들 하였기에 얼마나 이즈[伊豆]의 백성들이 기뻐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우리 지역도 신쿠로우 님의 지역이 되었으면……”하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이즈를 수중에 넣은 소우운의 다음 표적은 칸토우[東]였다.

 소우운의 칸토우 제패의 야망을 알려주는 일화로써 미시마 묘우진[三島 明神]에게 참배를 가 꾼 영몽(靈夢)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 2일의 새해 첫 꿈이었다.

 넓은 들판에 두 그루의 큰 삼(杉)나무가 치솟아 있었다. 어디선가 쥐새끼 한 마리가 조르르 달려 나와 큰 삼나무의 뿌리를 갉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쥐새끼가 점점 커져 커다란 호랑이로 변했다. 그때 꿈에서 깼다

 소우운은 이 꿈을,
 “
두 그루의 큰 삼()나무는 칸토우[
東]를 지배하는 두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6]을 뜻할 것이다. 나는 쥐띠니까 두 그루의 삼나무를 갉은 쥐는 나 자신이다. 이것은 소우운의 자손이 우에스기 씨[上杉氏]를 멸하고 칸토우[東]의 지배자가 된다는 굉장히 경사스러운 꿈이다
 
하고 점쳤던 것이다. 이것은 소우운이 꿈을 빌어 가신들에게 말한 장대한 포부였던 것이다.

 

 칸토우 진출의 시작은 오다와라[小田原] 공략이었다.

 이 작전에 앞서 소우운은 교묘한 계략을 생각해 내었다. 오다와라 성의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 藤頼]에게,
 “
우리 영지(領地)에 있는 산에서 사슴 사냥을 하였더니, 사슴들이 모두
하코네[箱根] 을 넘어 도망간 듯 합니다. 그래서 몰이꾼을 오오모리 님의 영내(領內)로 들여보내어 이즈[伊豆] 쪽으로 사슴을 몰고 싶습니다만……”

 하고 몰이꾼을 오다와라 영내(領內)로 들여보내는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사실 이 몰이꾼들은 젊고 건장한 젊은 무사들이었다. 소우운은 수백 명을 몰이꾼으로 변장시키고, 거기에 또 수백 명을 개 몰이꾼으로 보이게 하여 은밀히 죽창 등의 무기를 가져가게 하였다.

 

 1495 2.

 심야가 되어 어둠이 짙어지자 오다와라 성 밑이 내려다 보이는 이시가키야마 산[石垣山][각주:7] 하코네야마 산이 한 순간에 밝아졌다. 불이었다. 그 불이 순식간에 오다와라 성 밑까지 다가왔다. 마치 불의 파도가 덮치는 듯 했다. 이는 소우운 측이 횃불을 달아 풀어놓은 소()들이었다. 그 뒤 몰이꾼으로 변장한 무사들이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이 기습 전법으로 오다와라는 눈깜짝할 사이에 함락되었다.

 

 소우운은 오다와라를 손에 넣자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사가미[相模]를 시작으로 칸토우[東] 각지를 차츰 제압해 갔던 것이다.[각주:8]

 

[호우죠우 소우운( 早雲)]

1432년에 태어났다. 처음엔 이세 신쿠로우 나가우지[伊勢 新九朗 長氏]라 칭하였고, 후에 불문에 들어가 소우운안소우즈이[早雲庵宗瑞]라는 호를 칭하게 된다. 1519년 이즈[伊豆] 니라야마[韮山]에서 죽었다. 88.

  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죽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할아버지 [본문으로]
  2. 요시모토의 아비. [본문으로]
  3. 요시타다와는 사촌지간. [본문으로]
  4. 결국 타츠오우가 15살이 되어 우지치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성인식을 치렀음에도, 가독을 물려받지 못했기에 소우운은 병사를 모아 노리미츠를 죽이고 우지치카를 이마가와 당주로 세웠다 [본문으로]
  5. 이 쥰도우지가 2대 호리고에 쿠보우로 결정되어 있었다. [본문으로]
  6. 야마노우치[山内]와 오오기가야츠[扇谷]의 우에스기 가문. [본문으로]
  7. 당시는 카사카케야마(笠懸山)라 하였다. 1590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豐臣 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때 이 산에 하루밤만에 이 산에 성을 쌓을 때 이시가키[石垣]를 가진 성을 쌓았다고 해서 이시가키야마[石垣山]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문으로]
  8. 거성은 니라야마 성[韮山城]이었다. 오다와라로 본거지가 옮겨진 것은 아들 우지츠나(氏綱) 때. [본문으로]

 오오타 도우칸은 에도성을 축성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원래 에도성은 주가(主家)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의 거성인 카와고에 성[川越城]의 지성(支城)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후년의 에도성(지금의 황거(皇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소규모 성이었지만 자성(子城), 가운데 성(中城), 외성(外城)이라는 삼중으로 되어있고 주위에는 깊은 해자(垓子)가 둘러쳐 있었다고 한다.

 도우칸은 이곳을 30년간 거성으로 했지만 한 번도 공격 당한 적은 없었다. 성내의 저택을 죠우쇼우켄[勝軒]이라 이름 지어 여기서 자주 와카(和歌)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도우칸은 문무겸비의 명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젊었을 적에는 무()에만 열중했었다고 한다.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그 유명한 [황매화 마을(山吹)]의 고사이다.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도우칸이 한 민가(民家)에 가서 도롱이[각주:1]를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소녀가 황매화 한 송이를 내민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도우칸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 꽃을 받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노신 중에 한 명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황매화는 열매[각주:2]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후습유화가집(後拾遺和歌集)]에 있는 카네아키라 친왕[兼明 親王],

일곱 겹 여덟 겹 꽃이 피지만 황매화는, 열매가 하나도 없으니 슬프구나

七重八重花けども山吹みのつだになきぞしき

라는 옛 시를 이용하여 소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한 것이었다. 도우칸은 이 때 소녀의 풍부한 문학적 소양에 놀라고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각주:3]. [각주:4] [각주:5]

 이로부터 도우칸은 문학의 길에도 힘을 써 ()도 발전했던 것이다. 역사서, 와카선집(和歌選集), 기록, 의서(醫書), 병서(兵書) 등 수천 권을 에도성 죠우쇼우켄에 모았다.

 

 전투에서도 와카로 인해 크게 덕을 보았다.

 1483 10.

 바야흐로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의 군세가 한밤 중에 해안에 이르러 절벽아랫길을 지날 때였다. 그러나 밀물인지 썰물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적의 복병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알아보려 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도우칸이 가보지 않고 맞춘 것이다.

 옛 시에,

멀리서건 가까이서건 우는 바다의 물떼새의 노래 소리에 물이 차고 빠진 것을 안다

遠くなり近くなるみの浜千鳥、潮の干をにてぞ知る

 가 참고가 되었던 것이다. 물떼새(浜千鳥)의 울음이 멀리서 들렸기에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거슬러, 당시 칸토우[]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칸토우 쿠보우[東公方 칸토우()를 지배하는 아시카가 씨[足利氏]를 지칭][각주:6]코가[古河][각주:7]호리고에[堀越][각주:8] [각주:9]로 나뉘어져 대립하였고, 코가 쿠보우[古河公方]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 成氏]와 칸레이[管領 쿠보우의 보좌][각주:10] 가문인 우에스기 가문[上杉家[각주:11]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内上杉][각주:12]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扇谷上杉][각주:13]의 두 가문]이 계속 싸우고 있었다. 칸레이 가문의 실권은 가재(家宰[각주:14])의 손에 있어 야마노우치는 나가오 카게노부[長尾 景信], 카게하루[景春] 부자(父子), 오오기가야츠는 오오타 스케키요[太田 資清], 스케나가[資長]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이 스케나가가 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칸[道灌]이라는 호를 칭하게 되는 것이다.

 

 1476.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 나가오 카게하루가 주가(主家)에 반기를 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더구나 이를 공격한 우에스기가 패배를 당한 것이다. 여기서 도우칸은 두 우에스기 가문[각주:15]을 도와 나가오 가문[長尾家]와 싸우게 되었다. 도우칸은 많은 전투를 경험하지만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었다. 도우칸의 가신들은,

 우리 주군은 제갈 공명의 환생이다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무패의 전력을 자랑하는 도우칸에게도 검은 음모의 그림자가 다가오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야마노우치-오오기가야츠 양 우에스기 가문의 대립이 깊어지던 중, 도우칸의 주군인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사다마사[扇谷 上杉 定正]가 도우칸의 명성을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 上杉]의 당주 아키사다[]에게서 모략의 손길이 뻗쳐왔다. 아키사다는 사다마사에게 밀사(密使)를 보내어 도우칸을 없애면 손을 잡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도우칸이 주군 사다마사에게 암살당한 곳은 사가미[相模]카스야[糟屋]에 있는 사다마사의 저택에서였다. 초대되어 목욕을 하던 중에 자객에게 습격 당한 것이다. 칼질을 당했을 때 도우칸은,

 당가(當家 - 오오기가야츠 가()) 멸망!”

 이라 외치고 쓰러졌다고 한다.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1432년 태생. 첫 이름은 스케나가[資長], 후에 모치스케[持資]로 바꾸었다. 24살에 정오위하(正五位下) 빗츄우노카미[備中守]에 서임.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로 에도성의 축성자. 암살당한 것은 1486 7 26. 55.

  1. 일본 발음으로 ‘미노[みの(蓑)]’라고 한다. [본문으로]
  2. 일본어 발음으로 ‘미[み(実)]’라고 한다. [본문으로]
  3. 열매[実]와 미노[みの]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했다는 말. [본문으로]
  4. 이 이야기는 후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도우칸은 어렸을 때부터 ‘카마쿠라 오산[鎌倉五山 – 유명한 절 다섯 개]’에서 수행을 한 천재로, 특히 도우칸의 아버지 또한 굉장히 시에 관심을 갖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를 맺었기에 그런 환경에서 자란 도우칸에게 문학적 소양이 없을 리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노사어록(老士語録)]이라는 책에 와카가 뛰어난 늙은 여자와 도우칸 과의 이야기가 있어, 이것을 후에 유아사 죠우잔(湯浅 常山)이 자신의 저서 [상산기담(常山紀談)]에서 재미있게 각색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将軍)은 종가(宗家), 카마쿠라 쿠보우는 분가(分家)가 되겠다.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 尊氏]의 셋째 모토우지[基氏]의 자손이 대대로 카마쿠라 쿠보우를 이어받았다. 독립지향이 강하여 자주 종가인 쇼우군 가문에게 개겼고, 이것이 후에 칸토우 분란의 원인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리지날 카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즉 칸토우쿠보우[関東公方]. 대대로 카마쿠라에 거점을 두었다. 카마쿠라 쿠보우의 보좌역인 칸토우 칸레이(関東 管領)가 쇼우군 가문 편을 들었기에 카마쿠라 쿠보우와는 자주 다투었다. 이러다가 5대 쿠보우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당시의 칸토우 칸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 憲忠, 야마노우치 가문 출신]를 죽인 것을 발단으로 쿄우토쿠의 난[享徳の乱]이 일어나고,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측은 시게우지의 부당함을 막부에 일러, 이에 바쿠후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노리타다[今川 範忠]에게 칸토우 평정을 명하자 노리타다는 카마쿠라로 침공하여 함락시켰다. 이때 다른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카마쿠라를 비워 두었던 시게우지는 카마쿠라를 탈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시모우사[下総]의 코가[古河]를 본거지로 삼아 이때부터 [코가 쿠보우]를 칭하게 된다. [본문으로]
  8. 카마쿠라에서 카마쿠라 쿠보우(즉 칸토우 쿠보우)를 쫓아낸 바쿠후 쇼우군(당시 아시가 요시마사[足利 義政]는, 그 자리에 개김성이 강해진 먼 친척보다 자신의 동생을 임명하고자, 승려였던 마사토모[政知]를 환속시켜 정식으로 칸토우 쿠보우로 임명하여 내려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강성한 시게우지 세력과 그 시게우지와 싸웠던 칸토우칸레이 우에스기 가문 내에서조차 마사토모를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異論) 등으로 인해서 카마쿠라까지 가지 못하고, 이즈[伊豆]의 호리고에[堀越]에 머물렀다. [본문으로]
  9. 이로 인해 이 당시는 칸토우 쿠보우가 둘이 생기는 결과가 되었다. 빽으로 바쿠후가 있는 호리고에 쿠보우, 여전히 칸토우에서 끗발이 날리는 코가 쿠보우. 둘 다 칸토우 쿠보우를 자칭했기에 구별을 위해서 ‘코가 쿠보우’, ‘호리고에 쿠보우’라 지칭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10. 카마쿠라 쿠보우를 보좌하기 위해서 바쿠후에 칸레이[管領]가 있듯이, 칸토우[関東]에도 칸레이[管領]가 두어져, 이를 칸토우 칸레이[関東管領]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1. 우에스기 씨는 무로마치 바쿠후를 세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 尊氏]의 외가. 초대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인 우에스기 노리아키[上杉 憲顕]는 타카우지와 외사촌지간. [본문으로]
  12. 거처가 카마쿠라의 야마노우치[山内]라는 곳에 있었기에 야마노우치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초기를 제외하곤 대대로 칸토우 칸레이 직을 세습하였다. [본문으로]
  13.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먼 친척. 그래서 부하. 거처가 카마쿠라의 오오기가야츠[扇谷]라는 곳에 있었기에 오오기가야츠 가문이라고 일컬어졌다. ‘우에스기 젠슈우의 난[上杉禅秀の乱]’ 때를 제외하곤 야마노우치 가문의 부하였으나, 오오타 도우칸의 활약으로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지게 된다. [본문으로]
  14. 그 가문의 필두 중신. [본문으로]
  15.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와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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