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1578 3 13 병사 49

1530~1578.

에치고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의 아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이어서 마사토라(政虎), 테루토라(輝虎)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불문에 귀의한 후 켄신(謙信).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온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를 보호하여, 우에스기의 성()과 칸토우칸레이의 역직(役職[각주:1])을 물려받았다.








다섯 번에 걸친 카와나카지마(川中島)합전


 1553 4월.

 북부 시나노(北信濃) 카츠라오(葛尾)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쫓겨 와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된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유도 없이 타국을 침략하는 신겐의 무법자적인 행동에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겠다고 일어선 우에스기 켄신(이 때는 아직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이 이후 12년간에 걸쳐 다섯 번 싸운 것이[카와나카지마 전투]이다.


 1차는 이 해인 1553 8월. 우에스기 군()은 젠코우지(善光寺)분지로 진출하지만 신겐은 시오타(塩田)성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켄신의 전력을 관찰하는 듯이 후세(布施)와 오미(麻績)에서 자그마한 전투를 하는 정도로 끝났다. 이후 2차는 1555 7, 3차는 1557 8월에 행해졌지만 두 번 다 작은 전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1561 9월. 역사상 유명한 제 4차를 맞이한다. 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하치만바라(八幡原)에서의 전투가 유일한 격전이었다.

  5차는 1564 8월에 이루어졌는데 사실상 카와나카지마의 네 개 군(郡)을 지배하고 있던 신겐은 자웅을 겨루려는 켄신의 시도를 무시하며 한달 가량 대치만 한 후 9월 중순 서로 물러난 뒤, 다시 카와나카지마에서 대결하는 일은 없었다.


정의를 위하여 동분서주


 제1차 카와나카지마 합전이 일어나기 전년인 1552년.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보호를 청하며 에치고로 온 것을 계기로 켄신은 1552 8월에 처음으로 산코쿠토우게(三国峠) 고개를 넘어 칸토우에 출진하여 누마다(沼田)성으로 입성했다. 이후 주가(主家)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14번이나 칸토우로 출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1560년부터 1571년에 걸친 12년간은 8번이나 칸토우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해를 칸토우에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면 우지야스가 농성을 풀고 칸토우로 출진하여 시모츠케(下野)의 사노 마사츠나(佐野 昌綱)나 오야마 히데츠나(小山 秀綱), 히다치(常陸)의 오다 우지하루(小田 氏治), 무사시(武蔵)의 나리타 우지야스(成田 長泰)들이 호우죠우 측으로 돌아 섰고, 켄신이 오오타 스케마사(大田 資正),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 사타케 요시아키(佐竹 義昭), 사타케 요시시게(佐竹 義重)들의 요청을 받아서 칸토우로 출진하면 우지야스는 또다시 물러나 농성을 했고 배반했던 호족들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어 진전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나 빙고(備後)() 토모()로 물러나 있던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를 협격(挾擊)하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노부나가로 돌아선 노토(能登) 하타케야마(畠山) 씨의 중신(重臣) 쵸우 츠나츠라(長 綱連)가 농성하는 나나오(七尾)성을 공략하였고, 오다의 구원군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군을 카가(加賀)의 테토리가와(手取川) 강에서 물리친 기세로 쿄우()로 진격하려 했지만,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 제패를 노리고 있다며 출진 요청을 해왔기에 우선 귀국하여 칸토우를 진정시킨 뒤 상경(上京)하기로 하였다.


최후의 대동원령


 하지만 카스가야마(春日山)성으로 돌아온 켄신에게 호우죠우 우지마사로부터 평화롭게 지내자는 요청서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를 통하여 도착했기에, 켄신은 칸토우로의 출진을 상경 원정으로 전환하여 휘하 장수의 명부를 작성하였다. [上杉謙信自筆将士書上]이라 불리는 것으로, 우에스기 군단 39명의 무장에 코우즈케(上野), 엣츄우(越中), 노토, 카가의 여러 장수를 합친 81명의 무장의 이름이쓰여 있다. 마지막에 [天正五年(1577년)十二月二十三日法印大和謙信]이라 서명되어있기에, 이것은 명백히 우에스기 군단 동원 명부라 할 수 있다. 켄신은 다음해 1 19일. 명부에 기재된 여러 장수들에게 대동원령을 내리며 눈이 녹는 3 15일을 출진하는 날로 정했다.


 그러나 출진의 날이 다가 온 3 9일 켄신은 돌연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뇌졸중이라 한다. 의원들이 열심히 고치려 했지만 보람도 없이 켄신은 혼수 상태인 채로 13일 죽었다. 향년 49. 장의는 출진의 날로 정해졌던 15일 행해졌다.

  1. 무로마치 바쿠후의 관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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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lsndmsrud BlogIcon 키르엘린 2007.07.30 1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데려가겠습니다//ㅅ/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07.30 12: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크프리이니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paxkore BlogIcon 포증 2008.04.28 0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 그의 죽음은 대략 어이가 없지만 마지막 대동원령은 비장미까지 감도는군요.
    필자의 문장력이 좋은 것인지 발해지랑님의 해석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제가 너무 겐신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ㅎㅎ
    그런데... 요즘에는 마지막 대동원령이 상경이 목표라기보다는 간토가 목표였다는 시각이 중론이라는데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상경이 목표라는 주장은 당연히 요시아키의 명령을 받들어 가쓰이에를 격파하는 등 서진했기 때문이라는걸테지만 간토가 목표라는 주장은 아직 근거를 못본지라...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30 0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증님의 켄신을 좋아하셔서 일 것입니다. ^^

    본문에 언급된 호우죠우 우지마사의 편지를 인정하느냐 인정 못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칸토우는 칸토우칸레이라는 역직에 있고 또한 그런 면에서 보수적인 켄신에게는 칸토우의 무장들이 요청이라도 해 오면 될 수 있는한 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즈음해서 사타케, 유우키 등의 출진 요청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쪽에 무게를 실리는 것인가 봅니다....
    켄신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이것도 조금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kumkang1471 BlogIcon 지족자부 2008.08.17 1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켄신의 임종전의 멋찐 시 한수가 생각하네요. ㅎㅎ "영원토록 영번하는 한잔의 술, 생을 모르고 죽음또한 모르니 세월또한 꿈과 같구가" 무장다운 시 라고 볼수 잇습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18 2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기 한 달 전 쯤에 그냥 만든 시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저도 멋진 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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