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인(商人)출신으로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까지 승진한 인물. 그리고 기독교도.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는 센고쿠 무장으로서 이색적인 존재이다.  
 상인으로서의 특질은 언변이 뛰어난 외교관, 경제감각을 갖춘 행정관으로 발현되었다. 거기에 무인으로서도 재능도 상당하여, 히데요시를 섬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582년 히데요시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에 수공(水攻)을 결행하였을 때, 유키나가는 물 위에 배를 띄어 놓고 타카마츠 성에 포격을 하는 활약을 보였다.[각주:1]
 “힘이 굉장히 셌고, 지모는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으며, 흰 피부에 키가 커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는 소리를 들은 유키나가는 역시 평범한 상인이 아니었다.

 200석으로 히데요시를 섬긴 것이 1579~80년[각주:2] [각주:3], 나이는 21~2세 즈음이라고 하는데, 10년도 지나지 않은[각주:4] 1588년에는 히고[肥後] 절반인 24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발탁되었다. 이례적인 스피드 출세로, 유키나가의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유키나가가 확실한 기독교도로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1583~84년 즈음으로 경건한 기독교 무장인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과 친교를 맺으면서 부터이다. 유키나가의 양친은 예전부터 기독교도였기에 유키나가도 어려서부터 세례를 받아 ‘아고스티뉴(Agostinho)’라는 세례명이 있었지만 형식적인 것으로 신앙은 그다지 깊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타카야마 우콘과 친해지면서 유키나가는 그때까지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져,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 신앙도 깊어져 오오사카[大坂]에 한센병 병원을 세우거나, 고아원 사업에 힘썼다.

 하지만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중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갑자기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한 것이다. 이로 인해 타카야마 우콘도 다이묘우에서 추방의 몸이 되었다.
 유키나가는 이때 선교사나 우콘이 숨을 수 있는 집을 준비해 주었으며, 큐우슈우[九州]의 기독교 다이묘우들에게도 선교사 보호에 힘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미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히데요시에게 알려져 추방당한다면 순교(殉敎)하려고까지 생각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힐문하자 유키나가는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역설하였다.[각주:5] 그 때문인지 히데요시의 기독교 탄압은 완화되었다. 거기에 다음 해인 1588년 유키나가는 히고 절반 및 예부터 기독교의 아성인 아마쿠사 지방[天草地方]까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히고의 나머지 절반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에게 주어졌다. 창 한 자루로 출세한 전형적인 무공 다이묘우이다. 이러한 인간은 보통 유키나가처럼 머리를 쓰는 능력으로 출세한 자에 대해 세찬 반감을 품고 있다. 한편 유키나가 역시 키요마사와 같은 무장을 ‘머리가 없는 녀석’이라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이 둘, 키요마사는 열렬한 법화종(法華宗) 신자였으며 유키나가는 경거한 기독교도였다. 서로 사이가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양자의 반목은 조선침략에서 함께 선봉을 서게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 침략에서 유키나가는 시종 화평교섭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키요마사는 끝까지 주전론자였다. 이 대립은 일본군의 작전에 지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유키나가와 친한 감찰[軍監]의 불리한 보고로 인해 키요마사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귀국하게 되어 질책을 받은 것이다. 키요마사의 유키나가-미츠나리에 대한 증오는 참기 어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決戦]은 천하제패의 야망에 불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이러한 키요마사를 대표로 하는 무공파(武功派)와 미츠나리-유키나가 등 봉행파(奉行派)의 대립을 이용해 일으킨 것이다. 패한 유키나가는 이부키야마[伊吹山] 산중으로 도망쳤지만, 몇 일 뒤 근처의 마을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동군(東軍)의 진영으로 데려가게 만들었다. 기독교도인 유키나가는 자신의 신앙상 자살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사카이[堺]의 약종상(藥種商)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아들.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상인 가문의 양자가 되어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히데요시[秀吉]의 츄우고쿠 공략[中国攻略] 때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외교관으로 히데요시에게 접근,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와 함께 로쿠죠우 강변[六条河原]에서 참수되었다.

  1. 히데요시[秀吉]의 일생을 다룬 군기물 태합기(太閤記)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이 당시는 아직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어용상인 아부라야[油屋]의 양자였는데, 유키나가의 뛰어난 능력을 눈여겨 본 우키나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히데요시로 보내는 사자로 유키나가를 보냄으로 히데요시와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는 당시 히데요시의 참모로 사카이[堺]의 유력자 중 하나였던 유키나가의 애비 코니시 류우사[小西 隆佐]의 존재도 영향을 끼쳤던 듯 하다. [본문으로]
  3. 이전까지 우키타 가문의 가신이었던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직신이 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81년 히데요시의 명령을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에게 전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 즈음 무로츠[室津]를 관리한 이 즈음부터가 아닐까 한다. 그후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야마자키 전투[山崎の合戦] 후인 1582년 히데요시에게 세토 내해[瀬戸内海]의 쇼우도 섬[小豆島]의 관리권과 3000석의 녹봉을 받으며 수군의 장수로 세토 내해[瀬戸内海]를 장악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런 그를 '바다의 사령관'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중간인 1585년 히데요시의 키이 정벌[紀伊征伐] 때의 공으로(기록으로는 패했다는 것만 있음 - 프로이스의 일본사) 3000석에서 1만석으로 봉록이 가증됨과 동시에 관리만 하던 쇼우도 섬[小豆島]를 영지로 받게 됨. 일설에는 10만석을 영유했다고도 함. [본문으로]
  5. 사실 처음에는 도움을 청하는 선교사들을 '내 사정도 있잖아~'하는 식으로 쫓아내거나 잠시동안 단교하였지만 오르간티노 신부에게 설득당하여 타카야마 우콘이나 기독교 신부들을 영지인 쇼우도 섬[小豆島]에 숨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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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11.10.13 15: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달만의 글이라 매우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이웃국가나 이웃영지에 대한 반감과 증오는 참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진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히고를 나눠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졌을 증오는 오랜 기간 쌓여서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겠지요. 도도 다카토라나 가토 요시아키라 역시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만 서로를 인정하는 상태는 있었을텐데 과연 기요마사와 유키나가는 그러한 수준까지는 유지했었던걸까요? 흥미롭네요.

    유키나가가 죽은 이후 고니시 가문이 유지는 되었습니까? 하타모토로도 남아있지 못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3 2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자주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아무래도 그렇죠. 지금도 가까운 나라 사람들과는 사이가 안 좋듯이 당시도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나 유키나가는 그래도 많은 외교적 절충(이게 전투에서 활약보다는 훨씬 높게 쳐주는 편입니다)이나 수송 등의 임무를 맡은데 비해, 키요마사는 정말 시즈가타케 칠본창 때의 얻은 영지(이전 1000+시즈가타케 3000) 총 4000석에서 단번에 히고 반국 19만여석 + 히데요시 직할지 3만석 대관으로 총 23만석의 다이묘우로 단번에 출새합지요.

      그래도 노력한 만큼 출세한 유키나가에 비해, 히데요시와 동향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출세한 키요마사는 안 좋을 수 밖에 없었겠지요. 거기에 키요마사는 틈만나면 유키나가가 무가 출신이 아닌 상인 출신이라고 깠다고 하니까요.

      유키나가가 죽은 뒤 코니시 가문은 멸문됩니다.
      장남[코니시 효우고노카미小西 兵庫頭]은 세키가하라 당시 오오사카 성[大阪城]에 (아마도) 인질로 있다가 싸움에서 졌다는 소식에 당시 오오사카 성을 수비하고 있던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지레 겁먹고 죽였다고 합니다. 이에야스는 너무한 처사라며 엄청 화냈다고 하던데... 음...

      아들 '아사야마 야사에몬[浅山 弥左衛門]'은 실제로 코니시의 아들인지 불명이나, 쿠로다 가문[黒田家]의 가신들 선조를 기록했다는 '쿠로다 가문 가신 선조 유래기[黒田家御家人先祖由来記]'에 따르면 유키나가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쪽은 야사에몬 손자 이후에는 기록에 없다고 합니다.

      또 하나 측실의 자식이라고 하는 '코니시 히데사다[小西 秀貞]'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인물은 우키나 가문[宇喜多家]에 맡겨졌다가 (역시 인질??) 싸움에 패했다는 소식에 시코쿠[四国]의 사누키[讃岐]로 도망쳐 중이 되어서는 세이렌 사[西蓮寺]를 세워 초대 주지가 되었고, 이후 그 자손들이 사누키에 대대로 살았다고 하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딸이며 대마도주 종의지(소우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시집간 딸(코니시 마리아[小西マリア])은 세키가하라 후 이혼 당하고 나가사키에서 숨어살다가 죽었습니다.
      종의지와 코니시 마리아 사이에 생긴 아들(그러니까 유키나가의 외손) 만쇼 코니시[マンショ 小西]는 에도 막부의 기독교추방령으로 인해 마카오로 추방당한 뒤 로마에 가서 사제의 직위를 얻고 일본에 돌아와 포교활동을 하나 잡혀서 처형(일본인으로서는 마지막 사제였다고 합니다.)

  2. 본다충승 2011.10.13 1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쿠사... 아마쿠사 시로? ^^; 세키가하라에서 고군분투 한 보람도 없이 한방에 훅 갔죠. 공명의 갈림길에선 조선에서 막 돌아온 기요마사&마사노리가 미츠나리한테 죽빵 날리려던걸 유키나가가 말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3 2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그 아마쿠사 시로우 토키사다[天草 四郎 時貞]가 나온 땅입지요.
      이곳은 유키나가 영지였던 만큼 기독교도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그런만큼 막부의 감시와 탄압도 심하여 1613년 추방당한 기독교 선교사 마르코스 페라로는 추방당하면서 "앞으로 25년 뒤 신동이 나타나 하느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고, 실제로 25년 뒤인 1637년 아마쿠사 시로우를 대장으로 한 잇키[一揆]가 막부의 대관(代官)을 죽이면서 시마바라의 난이 시작됩지요.

    • 본다충승 2011.10.13 2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예언은 마치 영화나 소설에 나올법한 이야기 네요.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처참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4 0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죠. 예언이란게 무책임해서 그럴 듯하게 만들다 보니 거기에 혹한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이게 하여 피도 더 많이 흐르게 만들죠.

  3. Gyuphy IV 2011.10.13 2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엔도 슈사쿠 선생님의 '숙적'에서 아주 인상깊게 그려진 무장이라 기억에 오래 남았다죠. (소설 결말부에서 딸내미와 부인이 '무려' 카토 키요마사를 독살(..;;)하는 듯한 암시를 넣어둬서 어린마음에 아주 흥미깊었습니다만..)

    사실 종교인이 저정도로 살며 저정도로 출세하기도 힘든데 다카야마 우콘처럼 마닐라오쿠리(..)되는것 보다는 나름대로 삶의 한 궤적을 남기고 갔으니 괜찮은 삶이었다 보여집니다. 뭐 국내입장에서는 임진왜란(..) 탓에 좋게 볼래야 좋게 볼수 없다쳐도 천연기념물 잡아간 키요마사보다는 낫다 싶긴 하덥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4 0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숙적이라는 소설에서 나카우라 쥬리안[中浦ジュリアン]이 죽는 장면이 쓰여있나요? '이 남자가 죽을 때'에 써먹으려고 했는데, 어디선가 엔도 슈우사쿠 선생이 그 '숙적'이라는 곳에 나온다고 하여서요.

      뭐.. 어떤 성격의 기록인지 잘 모르겠지만 豊臣秀吉九州下向記라는 책에는 조선에서 파죽지세로 진격 중인 유키나가를 히데요시가 "문무천하제일이며 충절은 비할데 없다. 조선이라면 1/3, 대명을 손에 넣었을 때는 50개국을 줄테다"고 할정도로 히데요시에게 인정받던 인물이니 기독교도라 하여도 어느 정도는 눈 감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4. Gyuphy IV 2011.10.14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게 꽤 오래전에 본 책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마지막 장면이 니죠성 회견 마치고 뱃편에서 키요마사가 혀꼬이고 엎어져서 바로 죽는 장면(..-_-...)이었으니 나카우라 쥬리안의 몰년을 생각해보면 아마 안나왔었던듯 싶은데 집에 책을 두고온바람에 확인이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

  5. 정동희 2011.10.18 1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도라노스케나 이치마스도 히데요시와의 인척 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까지 출세하지는
    못했을 텐데요...
    쵸닌의 자식이었던 유키나가쪽이 능력은 더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암튼 이게 다시 히데요시 때문이고... 조일전쟁 때문이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10.18 22: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키요마사나 마사노리도 나중에 나름 행정력을 갖추었다곤 하지만 말씀대로 그들이 오와리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출세하기도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요시의 통일전에 유키나가는 다방면으로 활약하더군요. 주로 수군으로 활동하는 한편 군수물자 수송이나 하카타[博多]의 재건 등 동시기 키요마사가 3~400명 이끈 소부대의 지휘관(뭐 큐우슈우 정벌 시 군량 쪽 회계담당이었다고도 합니다만)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둘 사이에 차이는 꽤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소위 기독교 다이묘우(大名)는 많이 있지만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보다 독실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伴天連追放令)를 선포하지만 이때도 우콘은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비호를 받으며 쇼우도시마(小豆島) 섬에서 우콘과 함께 몸을 숨이고 있던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우콘에 관해,
 "우콘님(右近殿)의 용기 있고 굳건한 신앙에는 놀랄 따름이다"

 며 예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1581년 우콘의 영지인 셋츠(津) 타카츠키(高槻)에는 20개의 교회가 세워져 영민(領民) 2만5천 중 1만8천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기독교 왕국이었다[각주:1].
 우콘의 부친 히다노카미(飛
守)[각주:2]도 세례명을 '다리오'라고 하는 성실한 신자였다. 텐쇼우(天正) 연간[각주:3]에 가독을 우콘에게 물려주고 오로지 포교에 헌신하였다[각주:4].
 선교사 프로이스(Luís Fróis)가 기록한 일화에 따르면 히다노카미의 신앙도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성내를 순시하다 추위에 떨고 있던 하급병사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새로 맞춘 고가의 옷을 벗어주고는 헌 옷으로 갈아있었다고 한다. 성으로 돌아온 남편을 보고 이상히 여긴 부인 마리아(세례명)가 묻자 히다노카미는
"나는 그 옷을 주님께 바쳤다오"
라 말했다고 한다.

 타카츠키 영내(領內)에서는 장례식 때 빈부의 차가 없었다고 한다.
 영내의 가난한 기독교도가 죽었을 때 우콘 부자는 사제(司祭)를 맡았으며 장례행렬이 묘지로 옮겨질 때는 다리오와 우콘도 그 관을 짊어졌다. 더구나 최하층 천민의 역할인 묘를 파는 것마저 하였다. 그것을 보고 모두 괭이를 들고 함께 구멍을 팠으며 중신의 부인들도 맨손에 흙을 닮아 파묻는데 힘을 보탰다고 한다.

 1576년 가을. 셋츠(津) 아리오카(有岡) 성주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가 갑자기 모우리(毛利)-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반기를 들었다. 무라시게에게 배속된 장수였던 우콘은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무라시게는 듣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우콘을 빼내오기 위해 수 차례 선교사를 파견하여 설득하였다[각주:5].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최후의 카드로 꺼내어 들었다. 아군이 되지 않는다면 선교사들을 모두 십자가에 꺼꾸로 메달아 창으로 찔러 죽일 것이며 교회도 파괴할 것이다. 반대로 오다 진영에 참가한다면 셋츠(
津)의 반을 하사할 것이며 기독교 보호에도 만전을 기한다고 하였다. 하필이면 그때 부친 히다노카미가 아라키 군에 참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육친을 선택할 것인가 신앙을 선택할 것인가? 우콘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영주의 지위를 부친에게 되돌리고 자신은 은거한다며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으로 인해 죽은 노부나가의 장례식에서도 우콘은 기독교도라는 입장을 내세워 참가한 수 많은 다이묘우(大名)들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향도 피우지 않았다.

 1587년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함에 따라 우콘의 운명은 어둠으로 변한다. 후나게 성(船上城)을 몰수 당한 뒤에는 코니시 유키나가를 의지하였으며 나중에는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비호를 받았다[각주:6].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토시이에의 아들 토시나가(利長)와 함께 동군에 속하여 서군과 싸웠지만 1613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기독교 금교령이 반포되자 결국 국외로 추방당한다.

 다음 해인 1614년 9월 24일. 부인을 포함한 백여 명의 교도들과 함께 필리핀 루손 섬으로 가 그 다음 해인 1615년 마닐라에서 죽었다.

[다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1552년생. 이름은 나가후사(長房), 시게토모(重友) 혹은 토모나가(友
)[각주:7]. 세례명은 동 유스토[각주:8].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모반을 일으킨 다음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배속된 다이묘우[각주:9]가 되지만 미츠히데가 모반하자 1582년부터 히데요시(秀吉)의 휘하[각주:10]가 된다. 마닐라에서 죽었을 때는 63세.

  1. 여담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곳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카야마 토모테루(高山 友照). 히다노카미(飛騨守)는 자칭. 또한 '즈쇼(図書)'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1574~1593년 사이. [본문으로]
  4. 우콘에게 기독교 신앙을 권한 것이 이 부친이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처음엔 무라시게의 반란에 참가하였지만 상기의 언급된 오르간티노 신부의 말을 듣고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코쿠다카는 약 3만석. 우콘은 많은 영지 대신 교회를 세울 수 있게만 해달라고 하였고 토시이에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토모요시'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8. Dom Justo [본문으로]
  9. 코쿠다카(石高)는 약 4만석. [본문으로]
  10. 이때 받은 영지는 아카시(明石) 6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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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05.31 0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국시대에 파란만장한 인생을 안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우콘의 삶은 그야말로 고뇌의 연속이더군요. 그 고뇌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독교도건 뭐건 아니지만, 저런 사람을 보면 감격스러워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5.31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독교 작가로 유명한 엔도 슈사쿠옹이 쓰신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인공인 숙적이란 물건을 읽다가 처음 알게된 다이묘군요(생각해보면 90년대에 접했으니 제법 저와 관계가 깊다면 깊은 사람입니다;)

    거친 항해로 마닐라에 닿자마자 객사한 점이 참 안타깝더군요. 코에이에서는 기독교도를 별로 안좋아하는지라 능력치가 좀 형편없는점이 아쉬웠습니다마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1 1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최상급이었나 봅니다.

      아케치 토벌전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선봉(...뭐 미츠히데 휘하 다이묘우였다는 정치적 이유도 있겠지만요)에 임명될 정도의 뛰어난 전술 능력.

      아카시로 영지가 옮겨졌을 때 절을 파괴하여 스님들이 불상을 이고지고 히데요시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거긴 우콘의 영지니까 지가 맘대로 해도 괜찮아'할 정도로 히데요시에게 인정받을 정도이니까요.

      후에 히데요시가 큐우슈우에서 기독교도들이 절 파괴하는 것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우콘을 얼마나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만이라도 "안 믿으면 되잖아요~"라는 것을 못해서 영지에서 추방당한 후에도 마에다 토시이에가 거두어 거성인 카나자와 성(金沢城)를 시작하여 자기 영지의 여러 성을 축조케 한 것을 보면 두루두루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다메엣찌님 말씀 들어보니 그렇군요.
      코에이가 기독교 무장에게 능력치가 짠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등청정의 경우 그 축성 능력(쿠마모토 성~)은 월등하겠지만 소서행장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소서행장이 더 뛰어난 부분..특히 전술적인 면에서는 소서행장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게임 상에서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Bolivar 2009.06.02 01: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친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나오는 "너희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에게 해 주는 것이.." 를 연상케 하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2 04: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성경을 안 읽어 보아서요. ^^;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했다는 말씀인가요?...검색해 보니 비슷한 것이 보여서요)

      예수님의 말씀이 현재 가장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그 가르침이 그 만큼 알기 쉽고 공감 가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4. 朴先生 2009.06.02 2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요시 큐슈 정벌 때 꽤 타카야마 우콘과 그 가신들은 꽤 큰 활약했다고 하지요
    히데요시의 명령 때문이 아니더라도 큐슈가 기독교 신자도 많고해서
    우콘에게는 그 곳이 예루살렘이었을지도...
    "성지를 탈환하자!!!" "성전이다!!!"라는 십자군같은 기분으로 원정을 떠나지 않았을까싶습니다

    결론... 이렇게 신의 가호를 받고있다고 믿는 군대가 제일 무섭습니다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처럼 말이죠)
    정신력으로 당시 일본 최강의 군대는 아니었을란지요 ㅎㄷㄷ 그냥 저의 허접한 감상일 뿐입니다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3 1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콘이 큐우슈우 정벌에서 활약을 했나 보군요.
      아직 그 부분은 잘 아는 편이 아니라..

      어쨌든...
      저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계시군요~
      무섭죠...종교라는 갑옷으로 무장하 군대는..
      각종 서적이나 지역마다 최강의 군대를...
      사츠마 하야토(薩摩隼人)라던가, 타케다 기마 군단이라던가, 우에스기 군단이라던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혼간지(本願寺)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극락정토라고 하며 닥돌하는 무리들이야 말로 등 뒤에 지켜야 할 땅과 가족들이 있는 무사단보다는 몇 배나 강하다고 생각합지요.

      기독교 교인의 군대도 강했을 것 같습니다.
      이에야스가 금교령을 내린 배경 중에 하나로 그들이 오오사카(히데요리)를 지원할지도 모른다는데 공포를 느낀 것에 있다고도 하니까요.

  5. 朴先生 2009.06.03 22: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현실에서도 그렇게 독실히 믿는 신자들을 보면 경건해지면서도 뭔가 무섭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에이에서는 앞으로 종교라는 요소를 넣으면 어떨까싶습니다
    세례를 받고 안 받고의 유무에 따라 가신이나 타 다이묘와의 관계라던가
    전투에 나가면 무조건 사기치가 +20이 된다던가하는..
    태합같은 경우에는 켄뇨나 우콘한테 신겐의 '풍림화산' 처럼 '신불의 가호'나 '천주의 은총'같은 사기커맨드를 넣어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
    오히려 밸런스 붕괴의 요소가 되려나요~??
    제가 코에이 쪽 게임을 전부 접해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미 이런 요소가 한 번은 나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6.06 0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혁신에서...처럼 한 부대에 여러 명이 속할 경우 그런 식으로 하는 것도 좋겠죠. 단 한 유니트에 전부 같은 종교만 있고 만약 다른 종교일 경우 오히려 혼란 걸리기 쉽다던가 하는 식의 페널티도 있어야 겠고요.

      비슷한 것으로는...
      천하창세에서 영지 내에 혼간지의 御坊가 있을 경우 수비시 플러스 효과가 있더군요.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87 4 17일 병사(病死) 55


스미타다의 사인[花押]

1533 ~ 1587.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城主) 아리마 하루즈미[有馬 晴純]의 아들.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서로 싸우던 양 가문의 화해(和解)를 위해서 오오무라 스미사키[大村 純前]의 양자가 된다. 또한 영내(領內)를 방문한 선교사(宣敎師)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가문[大村家] 18대 당주인 스미타다는 1563년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사실 스미타다는 히노에 성주인 아리마 하루즈미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伊][각주:1]의 딸이었다.

  17대 당주 스미사키에게는 타카아키[貴明]라는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타케오 성[武雄城]의 고토우 씨[後藤氏]를 잇게 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일부러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하였다. 이 때문에 오오무라 가의 가신들은 분열되어 오오무라 가문 아래에 있던 열 여덟 가문이 타카아키를 따랐다.

 

 이 타카아키를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정실(正室) 부인 오엔[おえん]의 친정이며 이사하야[諫早]에 본거지를 둔 사이고우 씨[西氏], 히라도[戸]의 마츠라 씨[松浦氏] 등 주변 영주(領主)에게 공격 받는 등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위협에서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들을 인질로 받치는 등 말년에 이르러도 스미타다의 기반은 굉장히 약했다.

 

 이 약소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스미타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였고, 1569년 포르투갈의 배를 요코세[横瀬] 포구에 입항시켰다. 또한 다음 해 31살이 된 스미타다는 이 곳에서 선교사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세례를 받고 돈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주변 호족 연합은 이런 오오무라 씨의 이권을 뺏고자 요코세 포구를 공격하고 불을 질러 없애고, 스미타다도 일시적으로 거성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예수회 선교사, 포르투갈 상인과 끊임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이 영토 안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미타다가 세례를 결의한 배경에는 포르투갈에게 기대어 부와 무기를 얻고자 하는 흑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차츰 기독교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 성을 지키다

 

 그러한 스미타다의 후반생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미타다에게는 4명의 측실(側室)이 있어 세자인 요시아키(善前)도 측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로 측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타다는 이를 무시하고 측실을 계속 두었다.

 한 편 정실 오엔은 남편이 측실을 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처음엔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은 지 7년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때 38살이 되어있던 스미타다는 오엔과 기독교의 서약에 따른 결혼식을 하였다. 이는 오엔의 희망에 따라, 처는 오엔 한 사람이며 측실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스미타다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1573.

 스미타다는 주변 호족 연합에게 거성인 산죠우 성[三城城]까지 공격당하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빠진다. 이때 선교사는 어떠한 때라도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미타다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목에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를 선교사와 교환하였다. 여기서도 신앙을 선택한 스미타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미타다는 과감히 성을 나와 돌격하는 등 적은 인원으로 성을 사수하여, '산죠우 칠기 농성[三城七騎籠もり]'[각주:2]이라 일컬어지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 스미타다는 6만의 오오무라 영민(領民)봉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1580년 오오무라를 방문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나가사키[長崎]와 모기[茂木]의 땅을 예수회에 기증했다. 나가사키는 이후 세계로 열린 항구로써 각광을 받게 된다.

 

하늘로 날려진 작은 새

 

 말년.

 스미타다는 사가[佐賀]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압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세자인 요시아키를 사가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요시아키가 인질이 된 2년 후, 동생 두 명도 인질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강압적인 타카노부가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함으로 인해 스미타다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이 51살 때이다.

 

 히데요[秀吉]가 시마즈 토벌의 군을 큐우슈우[九州]로 보낸 것은 15873월이었다. 오오무라 씨는 이 때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는데 스미타다는 종군(從軍)하지 않고 아들인 요시아키가 대신해서 출진했다. 왜냐면 이때 스미타다는 후두암폐결핵을 앓고 있어, 몸이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은 신을 받아 들여 아름답게 빛났다고 기독교 사료는 말한다.

 

 스미타다는 의사가 하는 미신(迷信)에 바탕을 둔 치료를 원치 않았고, 신부에게 천당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길 원했으며 그것을 들으면서 대단히 만족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카구치[坂口]의 은거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미타다는 영내(領內)구류(拘留)되어 있던 포로 200명을 석방했다. 마지막으로 새장에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4 17일. 반년에 걸친 투병 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 나중에 양아비가 되는 스미사키의 부친. [본문으로]
  2. 1500명을 상대로 7명의 무장과 70명의 여자들로 성을 지켰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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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07 1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우린과는 다른 말년이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07 1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우린은 죽을 때 대부분을 잃은 상태이긴 했지만, 스미타다는 그렇진 않았을 테니... 적어도 죽을 땐 정말 행복하게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한 달뒤에 있을 격변을 모른 채 죽을 수 있었을테니까요..

    (여담이지만, 히데요시가 선교사들을 쫓아보낸 계기가 되는 것도 저 나가사키와 모기가 일본인의 땅이 아닌 남만인들의 땅이라는 것과 그 지역 주민들이 신사를 깨부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니까요. 일본은 다 자기 것이며, 죽어서 신으로 떠받들여지길 원했던 히데요시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니까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1.11 0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텐노 다음가는 위치에 있던 히데요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군요;;

마쓰라 시게노부[松浦 信]

1614 5 26일 병사(病死) 66

 

1549 ~ 1614.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役][각주:1]에서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히라도[戸]이키[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각주: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각주:4]와 함께 칭송받았다.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각주:5]에 전념했다.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각주: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각주:7]로 이전되기 전까지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각주:8]들에 더해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각주: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 10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각주: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 오오츠츠[大筒][각주:11]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1.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2. 마지막에 동군에 서게 됨. [본문으로]
  3. 가독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선 용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 [본문으로]
  4. 가라샤는 세례명, 타마코는 이름. [본문으로]
  5.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을 말함. [본문으로]
  6. 시게노부의 손자와 부친의 이름이 똑같이 타카노부(隆信)이다. [본문으로]
  7. 에도 시대에는 네덜란드만이 나가사키에서 일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8. 유럽인들을 말함. [본문으로]
  9. 쿄우토[京都]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을 지칭. [본문으로]
  10. 보통 히라도 성[平戸城]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11. 대포를 말한다고 하지만, 구경이 큰 철포를 지칭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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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4 17: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타깝네요;;
    소우린에 비하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드는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4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임진난때 건너온 사람이니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죠.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16 1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데 수군이었으면 신나게 깨졌겠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6 2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군이라고 해도 코니시 휘하의 1군단으로 함께 행동했을 테니, 이순신 장군과 싸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평양까지 함께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수군이라고 해도, 대마도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병력 수송 선단을 호휘하는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설마 일본도 경상도 수군이 그렇게 자멸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16 2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역 안당했으니 쇼린보다는 나은걸려나요(ㅎㅎ)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17 0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명(家名)을 남기는 것이 의무로 생각하던 시대의 사람이기에 소우린 보다는 훠~씬 성공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마츠라 가문의 핏줄은 현재의 일본 황실과 연결되어 있을 정도니까요.(9대 번주 마츠라 키요시(松浦 清)의 손녀가 코우메이 텐노우(孝明 天皇)와 결혼해서 메이지 텐노우(明治 天皇)를 낳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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