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

1642 11 25일 병사(病死) 76.

 

1569 ~ 1642.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중신 타카하시 죠우운[高橋 紹運]의 아들. 타치바타 도우세츠[立花 道雪]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야나가와[柳川] 13만석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카이에키[改易][각주:1] 당했지만 후에 옛 영지(領地)를 회복. 이후는 막부(幕府)에 충성을 다했다.

 

 

 





야나가와-시마바라[島原]의 난

 

 1620 8 7일.

 치쿠고[筑後]의 영주 타나카 타다마사[田中 忠政][각주:2]가 에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36세. 세자가 없었고, 형인 야스마사[康正][각주:3]오우미[近江]로 이동, 배치되었기 때문에[각주:4], 치쿠고[筑後] 야나가와가 주인 없는 빈 땅이 되었고, 8 20일에는 나이토우 마사나가[ 政長] 등의 막부(幕府)의 사자(使者)들이 야나가와 성[柳川]을 접수하러 왔었다.

 그 후 후임 다이묘우[大名]가 임명되기까지 치쿠고[筑後]의 행정은  미노[美濃] 부교우[奉行][각주:5] 오카다 젠도우[岡田 善同] 붕고[豊後] 후나이[府内]의 영주인 타케나카 시게요시[竹中 重義]히젠[肥前]시마바라[島原]의 영주인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가 위임 받았다.

 

 6개월간의 대관(代官)[각주:6] 지배 시기인 1620년 가을에 연공() 징수가 있었다.

 1655년에 쓰여진 시모츠마 군[下妻郡] 나카지마 촌[中島村]의 쇼우야[庄屋][각주:7] 이치로우베에[兵衛]의 기록에 의하면, 

붕고[豊後]마츠쿠라 붕고노카미 시게마사[松倉 豊後守 重政]은 자신이 담당한 곳 백성들이 (세금 내기가) 힘들다고 하여도, 집에 강제로 들어가서는 가마니에 담긴 것은 뭐든 싹 쓸어갔으며,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노오도리[蓑踊り] – (미노[蓑]란 비를 피하기 위한 짚 같은 것으로 엮은 도롱이이다. '미노오도리'란 사람에게 그 도롱이를 입히고 풀지 못하도록 줄로 묶은 상태에서 불을 붙여 고통으로 날뛰는 것을 춤이라 표현한 것으로 고문의 일종이다. – 역자 주)를 하게 만들었다. 우네메[采女]- 타케나카 우메노카미 시게요시[竹中 采女正 重義] 과 쇼우겐[監]- 오카다 쇼우겐 젠도우[岡田 監 善同]의 담당지역은 별로 심하지 않았고 느슨한 편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젠[肥前] 시마바라 성주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지배하고 있던 대관 지역의 연공 징수는 가혹했으며, 미납한 백성에게는 도롱이를 씌우고 거기에 불을 붙여 '미노오도리'를 시켰다고 한다


 시마바라 성주는 1616년부터 1630년까지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재임. 그 후 1638 4 12일까지 아들인 시게츠구[重次]가 이었다.

 그 사이 1637년 가을부터 1638 2 28일까지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天草島原の乱]의 난이 일어났다.

 발발 원인 중 하나로 번주(藩主)가 기독교 농민에게 '미노오도리' '모쿠바세메[木馬責め][각주:8]', '꼬챙이 꿰기[さし][각주:9]', '지옥맛보기[地獄責め][각주:10]' 등의 고문이 행해지는 식의 학정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난이 발생되기 16년 전에 이미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미노오도리'라는 잔인한 방식으로 가혹한 연공 징수를 거두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미노오도리'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행위로 여겨졌지만, 원래는 연공 미납 농민에 대한 처벌 행위였다. 위정자()를 선택할 수 없는 농민들의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마츠쿠라 시게마사, 시게츠구 부자(父子)에 의한 대관 지배가 길어졌다면, 한 때 기독교 농민이 많았던 야나가와 영내(領內)에서 '야나가와-시마바라의 난'이 있어났을 지도 모른다.

 

야나가와 재 부임과 시마바라 출진(出陣)

 

 1620 11 27.

 쇼우군[軍] 히데타다[秀忠]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에게 예전에 그의 영지(領地)였던 야나가와의 영주가 될 것을 명했다.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에 섰기 때문에 영지를 몰수당했던 무네시게는 여러 지역을 방랑한 끝에 이에야스[家康]를 섬기었고 그 후 무츠[奥] 타나쿠라[棚倉] 3만석을 하사받았다. 야나가와에는 20년 만에 가보는 것이었다. 나이는 이제 54세가 되어 있었다.

 

 부인이나 가신 106명을 이끌고 타나쿠라를 출발. 에도에 들린 후, 쿄우토[京都]를 거쳐 오오사카에서 배로 세토 내해[瀬戸 内海]를 배로 타고 서행(西行). 코쿠라[小倉]에서 오래만에 치쿠고 로[筑後路]를 남하. 1621 2 28일에 야나가와 성[梁川城]에 입성하였다. 과거 야나가와 성에서 물러날 때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던 영민(領民),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대관 지배에 고통을 받았던 농민들은 무네시게의 야나가와 부임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시작부터 적자였고, 1636년 시점에서 번의 채무금은 5100 칸메(貫目)에 달하였기에, 같은 해 막부에게 5만 냥(3150 칸메)을 빌렸다. 거기에 다음 해인 1637년에는 시마바라로 출진해야 함에 따라 500 칸메가 더 들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영민에게 '미노오도리'를 시키는 일 없이, 번사(藩士)[각주:11]의 땅을 거두어 들이고 봉급으로 대신하거나, 아리아케[有明] 해안의 간척을 추진하여 재원의 증가를 꾀했다.

 

 같은 해인 1637년 가을.

 아마쿠사, 시마바라에서 대규모 기독교-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막부에게 출진을 명령받은 아들 타다시게[忠茂][각주:12] 11 16일에 에도를 출발. 12 6일에 야나가와에 도착.

 다음 7일에는 5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배로 시마바라로 출진했다.

 다음 해인 1638 1 1일에 3회째의 하라 성[城] 총공격에서 막부 군()의 총 사령관인 이타쿠라 시게마사[板倉 重昌]가 전사. 막부는 총 사령관으로 노중(老中)[각주:13]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를 파견. 무네시게도 1 13일에 에도를 출발, 2 7일에 시마바라에 도착하였다. 72살이라는 늙은 나이에 참전이었다.

 

 2 28.

 바쿠후 군의 총공격으로 하라 성은 낙성.

 무네시게는 일단 야나가와로 돌아온 뒤 다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에게 보고하였다.

 

 다음 해인 1639 4 3.

 가독(家督)을 적자(嫡子)에게 타다시게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여 '류우사이[斎]'라는 호를 칭했다. ()를 좋아하여, 다인(茶人)들과의 교류를 즐겼다.

 '류우사이 공의 말씀 기록[公御咄之]'이라는 29개조의 유훈을 남기고, 1642 11 25일. 시모가야[下谷]의 야나가와 번 저택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76세였다.

  1.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삭감. [본문으로]
  2.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후 숨어있던 서군의 주모자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잡은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3. 요시마사의 둘째 아들. 야나가와 번[柳川藩藩)의 지번(支藩) 후쿠시마(福島) 3만석의 번주(藩主). [본문으로]
  4. 이곳 저곳 분산된 곳을 합쳐 2만석. [본문으로]
  5. http://valhae.tistory.com/script/powerEditor/pages/%EC%97%90%EB%8F%84%20%EC%8B%9C%EB%8C%80%EC%97%90%20%EB%AF%B8%EB%85%B8[%E7%BE%8E%E6%BF%83]%EB%8A%94%20%EC%A0%84%EB%9E%B5%EC%A0%81%20%EC%9A%94%EC%B6%A9%EC%A7%80%EB%A1%9C%20%EC%9D%B8%EC%8B%9D%EB%90%98%EC%96%B4%20%EB%A7%89%EB%B6%80%EC%9D%98%20%EC%A7%81%ED%95%A0%EC%A7%80%EC%9D%B8%20%EC%B2%9C%EB%A0%B9(%E5%A4%A9%E9%A0%98)%EC%9D%B4%20%EB%A7%8E%EC%95%98%EA%B3%A0,%20%EA%B7%B8%EB%9F%B0%20%EC%A7%80%EC%97%AD%EC%9D%98%20%ED%96%89%EC%A0%95%EC%9D%84%20%EB%A7%A1%EC%95%98%EB%8B%A4. [본문으로]
  6. 영주를 대신하여 그 지역의 행정을 맡아 봄. [본문으로]
  7. 마을의 대표자 겸 세금 징수나 행정을 맡는 한편 마을 주민의 요청을 대변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8. 몸통이 삼각형으로 된 다리를 붙인 말 형태의 고문틀에, 양 다리에 돌을 매단 사람을 앉혀서 그 무게가 가랑이 사이에 집중되게 하여 고통을 주는 고문법, 현재는 SM플레이 등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가 오스만투르크의 전쟁 포로들에게 행했다고 하는 그 고문. [본문으로]
  10. 유황이 들어간 뜨거운 물을 몸에 뿌리는 고문. [본문으로]
  11. 번에 소속된 무사.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 [본문으로]
  12. 무네시게의 동생 타치바나 나오츠구[立花直次]의 넷째아들. 즉 양자. [본문으로]
  13. '로우쥬우'라고 읽는다. 에도 막부의 수상 격으로 4~5명이 1개월 당 한 명씩 돌아가면서 정무를 맡았으며, 중요한 일은 전원의 합의에 따라 결과를 도출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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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26 04: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카이에키 당했는데도 영지를 다시 받았군요.
    중국만 하겠습니까만 고문들이 어째 무시무시하네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26 0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쵸... 하타모토(旗本)로 가문을 남긴 쪽은 좀 있다고 합니다만, 다이묘우(大名)로 된 것은 무네시게가 유일하다고 하더군요. 인품이 굉장히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이여송을 물리치 것으로 대표되는 무략이, 그를 부활하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하더군요.

    고문이야 세계 어디든 잔인하겠지요.
    여담이지만 "장군의 새디즘"이라는 일본의 옛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의 에피소드 2개 중 첫번째가 당시의 일을 그린 것이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7.10.26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치바나..ㅎㄷㄷ 무려 도우세츠의 양자이름값을 하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26 2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우세츠는 무네시게를 양자로 입적할 때, 하나의 테스트를 했는데...
    죄인을 가신에게 머리를 베라고 하고, 그를 피가 튀기는 위치에서 지켜보게 하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동맥의 맥박도 평상시와 다름 없었기에 무네시게의 대담함에 만족했다고 하더군요.

    도우세츠는 무네시게를 양자로 입적한 뒤에, 스파르타 교육을 시켰다고 하던데, 그 중에 하나로...
    밥을 먹다가 생선 가시를 입 안에서 고르고 있던 무네시게에게 소리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생선의 뼈를 입 안에서 고르다니!! 그게 타치바나 가문을 이을 남자가 할 짓이란 말이더냐! 생선을 머리부터 먹어라, 이빨로 전부 부셔서 먹으란 말이다! 타치바나 가문을 이어야만 하는 남자가 생선 뻐도 먹지 못해서는 앞 길이 막막하구나!".. 라고...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26 2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정한 스파르타 교육이네요;;
    아, 이여송을 이 사람이 물리쳤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27 0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 자세히는 대다수가 한성에서 농성하자는 와중에 유격하자는 무장이 둘이었는데 하나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타치바나 무네시게 였다고 하더군요. 타치바나 무네시게는 선봉부대의 선봉부대였다고 하더군요. 가장 큰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사족으로... 타치바나 가문의 벽제관 전투 기록에서, 물리친 명군과 조선 연합군의 수는 15만명이라고 하더군요.(당시 조선에 와 있던 명군 총 병사는 약 4만 3천명). 불릴대로 불렸더군요.
    조선 측의 기록(어느 것인지 기억이 안나네요..--;)에는 위력 정찰에 나섰던 명군 4000 정도의 기병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기습으로 혼란된 상태에다가, 눈이 녹아 진흙창이 된 논에서 기병의 특징을 살리지 못한 끝의 패전이었다고 하네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7.10.27 1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엄청나게 뻥튀기를 했네요^^;
    그래도 (실속은 없지만) 대국인 명의 부대를 공격해서 이겼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0.29 02: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씀하신 대로, 당시 중화 사상에 근거한 천하의 슈퍼 파워를 이겼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7.11.08 2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관없는 소린데, 구루지마 가도 서군 편에 섰지만 에도 시대에 다이묘로 복귀했다네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09 08: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지식 고맙습니다. 찾아보니 정말 그러네요. 장인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노력으로 복귀했더군요.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7.11.12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니와 나가시게(丹羽 長重 -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도 서군 측 -> 가이에키 후 다이묘우군요...역시 함부로 단정지으면 안 되나 봅니다. 제가 모르는 또 누군가가 있을테니... 흑.. 쪽팔리네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ttl00013 BlogIcon 라빈스텐 2008.08.31 09: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네시게 불멸의 이순신에 노량해전에 나올뻔햇지만 아쉽게도 캐스팅 않되서 않나왓더군요..
    대사에 보면 무네시게의 대사 부분이 잇??인죠..
    어?w든 요놈도 이순신에게 호되게 당한인물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8: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네시게가 이순신 장군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혹시 출전을 알 수 있을까요?

  14. 손님 2011.04.13 09: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네시게가 노량해전에서 고니시를 구출했기 때문에 나올 가능성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니시는 노량해전에서 따일뻔 했죠. 육전파트도 다뤘었다면 아마 백퍼 나왔을겁니다.
    울산왜성 전투에서 가토를 구한것도 무네시게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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