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가신들 중에서도 용맹함으로는 첫째 둘째를 다투는 무사였다.
 나리마사가 죽은 뒤의 일이다. 나리마사가 일평생 혐오했던 정적(
政敵) 히데요시(秀吉)도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할 정도였다.
 오다와라(
小田原) 정벌 때의 일화이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부대표식(馬標)을 [금박이 칠해진 삼단 갓(三階菅笠)]으로 바꾸고 싶다며 히데요시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그 부대표식은 대단한 무용(
勇)을 자랑하던 나리마사의 부대표식이다. 아주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는 한 이것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어떤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줄 수도 있지"
 고 말했다. 우지사토는 그 말을 듣고 결사적인 활약을 펼쳐 명예로운 [삼단 갓]을 허용 받았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선조는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명장 사사키 모리츠나(佐々木 盛綱[각주:1])라고 한다. 오다 가문(織田家)에서는 늦깎이 출세를 하였다. 노부나가의 [검은 화살막이 부대(黒母衣衆)]에 발탁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이 즈음 노부나가는 옆나라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공격하였는데 나리마사는 이 전투에서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와 함께 사이토우 측의 장수 이나바 마타에몬(稲葉 又右衛門)을 쓰러뜨리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수급을 취하는 단계가 되어서 나리마사와 토시이에는 상대방이 더 잘했다며 서로 공을 미루기만 하였다. 거기를 우연히 지나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서로 공을 미루는 말싸움을 지켜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주워서는 노부나가에게로 가 본 그대로를 말했다. 노부나가는 이 세 명에게 각각의 행동에 대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각주:2].

 나리마사는 그 후 입신출세하여 시바타 카츠이에의 요리키(与力[각주:3])가 되어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았다.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주군 노부나가가 죽자 그 후 자신의 운명을 카츠이에에게 걸었다. 나리마사는 히데요시를 혐오했다. 성격도 단순하여 한 가지를 생각하면 오로지 그것만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어 정치정세를 두루 살펴보고 행동하는 요령이 부족한 듯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 후세에 나리마사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전진미답의 일본 알프스[각주:4] 돌파였다.
 히데요시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 연합군이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싸운 1584년이었다. 이 전쟁이 화해로 끝난 것을 안 나리마사는 철저항전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에게로 달려가려고 한 것이다. 당시 엣츄우에 있던 나리마사가 하마마츠에 가기 위해서는 에치젠(越前)에서 오우미(近江)를 거쳐 미노, 오와리(尾張)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거기는 전부 히데요시의 세력이 있는 적지였다. 남은 길은 중부 산악지대를 종단(縱斷)하는 직선코스였다.

큰 지도에서 일반적인 토야마(富山) 하마마츠(浜松) 루트 보기

 때는 11월[각주:5]. 엄동의 계절이었다. 몸의 반 이상이 빠질 정도로 쌓인 눈 덮인 험준한 일본 알프스를 돌파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쉽지 않다. 살아서 하마마츠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확실했다. 나리마사는 그것에 도전하였다. 나리마사 일행은 험난한 쿠로베(黒部)의 비경에 들어섰다. 자라토우게(ザラ) 고개라는 난소를 극복하여 하리노키토우게(木峠) 고개를 넘어 간신히 시나(信濃)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것도 [인기척 끊겨 지나온 곳은 모두 산과 계곡(るところ皆山谷えて人煙無し)]라는 깊은 산속에서 나무꾼의 집 한 채를 발견하는 행운도 있었다. 이 나무꾼의 안내로 길을 잃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시모스와(下諏訪)를 거쳐 12월이 돼서야 하마마츠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와 만나자 나리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하사 받아 보물처럼 여기던 작은칼(脇差)을 이에야스에게 바치며, "내 영지인 엣츄우에 히데요시가 공격해 온다면 부디 원군을 부탁 드리옵니다"
 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한편, 토쿠가와와 삿사가 한 편을 이루면 예전 타케다 신겐(
武田 信玄),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이 합쳐진 만큼의 파괴력을 가져 히데요시 따위는 단번에 멸할 수 있을 것이오 – 하며 열변을 토했다 한다.

 이에야스는 이에 대해 확답을 피했다고 한다. 나리마사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아 다음 해 1585년 히데요시가 엣츄우에 침공했을 때는 결국 이에야스의 원군은 얻지 못하였다.

 이렇게까지 히데요시에게 반항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여 히고(肥後) 전역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마사는 영내(領內) 호족 반란의 책임을 요구 받아 영지(領地) 몰수와 함께 셋츠(摂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자살을 명령 받았다.

[삿사 나리마사]
1516년생. 오와리(
尾張) 출신. 엣츄우(越中)를 하사 받지만 노부나가(信長)가 죽은 뒤 히데요시(秀吉)에 대항하다 패하여 항복. 1587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성주. 다음 해 1588년 5월 자살. 73세[각주:6].

  1.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최측근 중 한 명. 겐페이 쟁란기 때의 활약으로 후에 에치고(越後)와 이요(伊予)의 슈고(守護)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이 이야기는 [상산기담(常山記談)]과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 나오는 것으로,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의 '쥬우시죠우 전투(十四条合戦)' 항목에는 稲葉又右衛門を、池田勝三郎・佐々内蔵佐、両人としてあひ討ちに討ちとるなり(이나바 마타에몬을 이케다 카츠사부로우(나중에 코마키-나가쿠테에서 죽는 사람), 삿사 쿠라노스케 둘이서 물리쳤다)고 나온다. 저 마에다, 삿사, 시바타는 나중에 호쿠리쿠(北陸)에서 함께 활약한 무장들이라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다. [본문으로]
  3. 이 즈음 오다 가문의 경우 각 유력 부장에게 파견된 오다 씨의 직속 신하를 뜻한다. 물로 세세히 들어가면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노부나가나 노부타다가 영지를 인정하였다. [본문으로]
  4. 윌리엄 골란드(William Gowland)라는 인물이 이 산맥을 조사한 후 '일본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 알프스'란 이름이 붙기 전에는 히다 산맥(飛騨山脈 – 현 '키타(北) 알프스'), 키소 산맥(木曽山脈 – 현 '츄우오우(中央) 알프스'), 아카이시 산맥(현 '미나미(南) 알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본문으로]
  5. 일본 구력. 현재로 치면 12월 하순 쯤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6. [무덕편년집성(武徳編年集成)]과 [무가실기(武家事記)]에 따르면 1516년생으로 죽을 때 73세가 되지만,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과 [삿사 군기(佐々軍記)]에는 1536년생으로 되어 있어 죽을 때의 나이는 53이 된다. 일본어 위키는 1536년생을 채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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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07.26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에.. 73세 설도 있었습니까. 처음 알았습니다@.@

    랄까, 결국 히데요시가 할복신킨것 보면 舊怨이 남아있던걸지도 모르겠군요. 뭐 결국 가토와 고니시 좋게 만들어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마는(..)

    그건 그렇다 쳐도 저 당시에 저 계절에 일본알푸스 돌파라니.. 뭔가 저것만으로도 중세 산악사에 신기원을 세울만한 일 아닙니까(@>@!) 어째서 이런게 잘 알려지지 않은거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7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가진 책들에서는 몰년 73세의 것들이 많은데(...문제는 쇼우와(昭和) 시대의 것들이지만요 ^^) 위키는 53세설을 취하고 있더군요.

      음...어땠을까요... 아직 개인적으로 일본의 서적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인데, 김성한 작가님의 소설 '임진왜란'에는 흥미로운 해석을 하셨더군요. 삿사 나리마사를 히고에 앉힌 것이 조선침략시에 선봉장으로 쓰기 위함이었다고. 잘 생겼고 뛰어난 전술적 역량에 주변 무장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고... 인기가 있었는지 잘 생격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문의 일화에도 나와 있듯이 나리마사의 용맹함을 인정하고 있었을 정도이니 아주 무책임한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김성한 작가님의 '임진왜란'은 지금 봐도 대단합니다. 아직도 이시다 미츠나리가 임진왜란 때 주도적인 침공론자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일본에서도 있지만 저 소설에서는 시작부터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전쟁 저지를 위해서 노력하거든요...히데요시 가족들에 관한 것은 시바 선생의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을 많이 참조한 듯 싶지만요 ^^ )

      나리마사는 더군다나 무려 '가마'를 타고 넘었다고 합니다. ^^ ...아랫사람들만 불쌍한 법...
      제가 가진 책들에는 94명설과 60여명설이 있는데 94명설에는 십 수명의 동사자가 나왔다고 하며 60여명설에는 약 반 수가 죽었다고 하네요.

  2. 나라 2009.07.26 11: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 봤지만... 저 산을 겨울에 넘어가다니 후덜덜(..) 지금도 장난 아니던 걸요.
    니이가타현 눈 내리는 산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의 막막함을 생각하면..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7 12: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오~ 그 드라마에서는 나왔나 보군요...하긴 드라마에서는 토시이에의 라이벌 격인 인물로 나왔다고 하니... 괜찮은 드라마일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연이 안 닿아 보질 못했네요.

      니이가타 현에서 길을 잃었다고 하던가요? 본문에서 나온 하리노키토우게 고개(이곳은 현재 나가노 현)에서 길을 잃어 좀 돌기는 했다고 하더군요.

  3. 나라 2009.07.27 16: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뇨 제가 거기서 길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어서(...) 눈이 가득가득 쌓이는 데 정말 막막하더군요.

  4. 써니데이 2009.07.27 2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나리마사와 더불어 그 일행들이 걸어서 산을 넘는걸로 나오죠.
    이 드라마가 나리마사, 토시이에, 히데요시 세 명 주축으로 한 드라마라..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29 1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자 주인공(카라사와 토시아키唐沢 寿明), 여자 주인공(마츠시마 나나코松嶋 菜々子) 둘 다 좋아하는 배우라 보고 싶다는 생각은 정말 강한데... 띄엄띄엄 본 적만 있고 아직 전부 다는 못 보았네요.
      나리마사에게도 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졌나 보군요.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토시이에와 마츠>에서는 토시이에의 진실한 친구로서 등장하더군요.
    며칠전 아들과 함께 실종된데 이어 각성제 복용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사카이 노리코가 그 작품에서 오네(네네) 역으로 출연했었죠;;

    카라사와 토시아키를 거기서 처음 보고 얼마전 <하얀 거탑>을 감상했는데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우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던데 그의 대단한 연기력이 드러났던 명작이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4: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카이 노리코...는 예전 저 고딩 때도 한국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하기는 좀 그렇군요. 당시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이텔 같은 곳도 아직 생기기 전인지라...하여튼 이름은 알고 있던 처자였습죠. 당시는 주전법자(酒井法子)라고 그냥 한자로 읽던 기억이 나는군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조금 삐둟어진 앞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카라사와 토시아키...는...정말 재미있는 배우더군요.
      그분 부인이 또 유명 여배우로 야마구치 토모코(山口 智子)라고 있는데, 워낙 인기인들이다 보니 불화설 또한 자주 퍼지던 중 야마구치가 잠깐 수영복 입은 방송이 나와 화제가 되었고(나이에 걸맞지 않은 몸매로), 다른 방송일로 기자들에 둘러쌓인 카라사와에게 그런 것이 화제가 된다고 하자, 카라사와 왈 "아 그래요? 전 매일 밤 그 보다 더 굉장한 것을 보아서요"

      버라이어티 방송에서 카라사와 보면 얼마나 웃기고 재미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ex; smapxsmap에서 비스트로 스마프에서 멤버들과 개그대결 펼치는 거 보면 정말 웃깁니다).

      .....만 이렇게 말하는 저는 아직 그가 배우로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네요. '토시이에와 마츠'도 안 보았고 '하얍 거탑'도 안 보아서..

十三.

 요도도노(淀殿)는 분노했다. 상경하라니 마치 주인이 가신에게 보이는 태도가 아닌가? 사실 여기서 히데요리(秀)가 상경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관습에서 보건대 이에야스(家康)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요도도노는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요마사(正)나 요시나가(幸長)는 [고(故) 타이코우(太閤)가 직접 키운 무장]이라는 자격으로 끈기 있게 요도도노를 설득했다. 이 귀부인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자존심을 자극하면 안 되었기에 다소 말을 모나지 않게 하였다.
 - 지금만 조금 참으시면 됩니다
 라는 것이었다. 천하의 누구도 믿지 않는 관측이었지만 요도도노와 그녀의 시녀들에게만은 통용되었다. 이에야스가 죽고 나면 바라던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토요토미 가문은 전쟁을 피해야만 하옵니다. – 고 키요마사들은 말했다. 요도도노도 그 점이 두려워,

 "그렇다면 히데요리님이 상경하시면 이에야스의 마음을 풀 수 있다는 것인가?"

 라는 것을 몇 번이나 키요마사에게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 하고 키요마사는 몇 번이나 말했을 것이다. 상경만 하신다면 양 가문에는 평화만 있을 뿐이옵니다 - 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부하 다이묘우(大名)가 된 키요마사는 그 입장으로 보증하였다. 요도도노는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요도도노는 차츰 마음이 풀어졌다. 잠시 갸웃거리더니 뜬금없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코우다이인(高台院)님께서 히데요리님에게 해가 되실 말씀을 하시지는 않을 터이니 그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

 하고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자 예전부터 이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던 키요마사조차 가슴이 저려와 눈물을 흘리며, 졸자가!! – 감정을 주체 못하겠는지 거센 말투로 말했다.

 "졸자가 우다이진(右大臣)님의 손을 잡고 메시어 니죠우 성(二城)까지 함께 하는 이상,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다이진님의 생명은 지키겠사옵니다"

 라고 말했다. 키요마사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이에야스가 이번 기회에 히데요리를 죽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문이 오오사카 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도도노에게 전쟁이라는 자신의 생각 범위를 넘어선 커다란 위협보다도, 히데요리가 칼날에 쓰러진다는 자기나름의 현실적 상상 쪽을 훨씬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요도도노는 통통한 턱을 끄덕이면서 그제서야 승낙했다.

 이 해의 히데요리는 19살. 더 이상 소년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으며 거기에 벌써 1남 1녀의 부친이기도 했다. 정실 센히메(千)의 자식이 아니라 히데요리가 자신의 곁에 있던 시녀들에게 낳게 만든 아이들이었다.
 - 굉장히 어린아이 같다.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귀에 들어와 있는 히데요리의 평판이었지만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秀吉)보다 뛰어났다. 그러면서도 상경여부 등 자신의 몸과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중대사에 관해서는 모두 모친에게만 맡겼다.

 히데요리가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수일 후인 3월 27일이었다. 텐마(天)에서 화려한 귀족선(御座船)에 몸을 싣고 요도가와(淀川) 강을 거슬러 북상하였다. 이 히데요리의 신변을 지킴에 있어서도 키요마사는 만전을 기했다. 우선 쿄우토(京都)에서 예상치 못했던 사태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자기 가문 내에서 억센 무사 500명을 추려 상인이나 중으로 변장시켜 시내를 돌아다니게 하였으며, 거기에 300명을 후시미(伏見)에 주둔시켰고, 요도가와 강의 강변 경비를 위해서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의 부하들을 포함한 철포 1000, 창병 500, 궁수 300인 부대를 배와 함께 북상시키는 한편 자신은 신발담당 하인, 가벼운 차림의 하급무사(足軽) 30명만을 주변에 두고 있었다. 이 신발담당 하인이나 하급무사들도 실은 변장으로 모두 경험 풍부한 무사 중에서도 용사만을 고르고 골라 따르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항상 키요마사와 일컬어지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와 미리 상담하여 후쿠시마 가문의 병사 1만 명을 자신의 본거지 히로시마(広島)에서 올라오게 하여 만일을 대비하였다. 마사노리 자신은 당장 쿄우()를 제압하기 쉬운 야하타(八幡)에 숙소를 정하여 거기서 뿌리라도 박힌 듯 다른 다이묘우(大名)들처럼 니죠우 성(二条城)에 가지 않았다. 단지 이에야스 측에게는 병 때문에 거동을 못한다는 식의 말은 하였다. 이에야스 측으로서는 카토우, 후쿠시마의 거동은 불유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토우, 후쿠시마에게 있어선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를 위해 그렇게 많은 활약을 해 주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런 만큼 이에야스는 좀 과중하게 보일지 모를 경비태세를 이해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히데요리는 후시미(伏見)의 선착장에서 배를 내렸다. 키요마사와 요시나가는 히데요리의 가마의 양 옆에 찰싹 붙어 둘 다 거대 다이묘우(大名)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종자라도 되는 듯 예의 바르고 조심스럽게 더구나 말에도 타지 않은 채 걸어갔다. 후시미(伏見)에는 이에야스가 보낸 자신의 11살 난 아홉 번째 아들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 義直[각주:1]) 9살 난 10남 요리노부(頼宣[각주:2])가 마중 나와 길 위에서 인사를 올렸다. 그 요시나오와 요리노부가 각각 자신의 종자들에게 양산을 받치게 하고 있는 것을 키요마사가 보고,

 귀인에 대해서 무례하오. 당장 양산을 치우시오

 하고 주의를 주었다. 이런 키요마사의 과감한 태도도 후에 이에야스를 불쾌하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화내지 않았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카토우, 후쿠시마 양 가문은 에도 정권에 의해 멸문을 당한다.
 
어쨌든 19살 히데요리의 행렬은 입경하였다. 그 화려함은 타이코우 생전의 행렬을 방불케 하여 히데요시 행렬의 특징인
대모갑(玳瑁甲)으로 코팅된 창 천 자루를 2열 종대로, 철포대의 철포 덮개는 하나하나가 전부 호랑이 가죽이라는 화려함이었기에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토요토미 가문의 행진을 보고 타이코우가 살아있을 적의 그 눈부심을 떠올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즈음 쿄우토(京都)의 시민감정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친토요토미였기에 당시 쿄우토의 거리에는 [15살이 되었다면 앞 싸리를 묶으시오~ 묶으시오]라는 노래가 불려지고 있을 정도였다. 노래의 의미는 히데요리님이 15살이 되면 이에야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성 앞의 방책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그 히데요리가 지금은 훌륭히 자라 나이도 19살이 되어 죽은 아비와 같은 행렬을 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온 것을 – 쿄우토(京都)의 사람들은 한 편의 웅장한 연극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그 행렬을 보았을 것이다. 히데요리가 탄 가마 옆에서 황공해하면서 시종해 가는 180cm가 넘는 키요마사를 보며 그 충성스럽고 의로움에 감동하여 키요마사라는 사나이에게 더욱 깊은 애정을 품었을 것이다. 키요마사는 살아있을 때 서민들에게 경애 받아 토쿠가와 가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에도의 시민들조차 그를 의한 노래를 불렀다. [에도의 모가리에게 거칠 것은 없겠지만 밤색 제석천(帝釈栗毛=키요마사의 애마)은 피하시오].[각주:3]
 
후시미(伏見)에서 쿄우()로는 타케다(竹田) 가도를 이용했다. 도중 도로 옆에 마중을 나온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와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가 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은 이에야스 휘하 다이묘우이긴 하였지만 이 시대 이 시기의 그들 감각으로 말하자면 이에야스는 상관이긴 했어도 주군이 아닌 다소 애매한 상하관계였으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순수한 주종관계였다. 때문에 그들은 무릎 꿇고 넙죽 엎드린 예를 취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그들의 충성심은 이미 토요토미 가문에서 떠나 있었다. 가마 옆의 키요마사는 그들을 보자마자,

 "두 분도 따르시오"

 하고 말을 걸었다. 이 때문에 토자마다이묘우(大名[각주:4]) 중에서도 이에야스에게 충성하기로는 손에 꼽히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그 장소부터 키요마사처럼 예의 바르게 가마를 시종했다.
 가마는 니죠우 성의 성문을 거쳐 곧이어 현관에 다다랐다.


큰 지도에서 관련지명-요도도도_아들_13 보기

 이에야스는 현관까지 마중 나와있었다. 30여명의 다이묘우들도 전부 현관 앞 흰 모래를 깐 곳에 넙죽 엎드려 히데요리가 가마에서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키요마사가 가마 옆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곧이어 양손을 들어 가마의 문을 잡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었다.
 '어떻게 자랐는가?'
 라는 것이 이에야스의 이 날 최고 관심사로 거의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히데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사카 성 깊은 곳에서만 성장한 히데요시의 아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히데요리가 역사에 그 몸을 노출하는 것도 이번이 최초였다.

 히데요리가 나왔다.

 이에야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키가 180cm 가까이 되는 듯했다. 백설 같은 피부에 시원스런 눈매를 가진 위풍당당한 위장부(偉丈夫)로 그가 서 있는 것만으로 그 주위에서 광채를 뿜는 듯했다. 이런 훌륭한 골격은 모계 쪽 할아버지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의 판박이 같아 만약 그 머리와 심장까지 나가마사에게 물려받았다면 절대 쉽지 않으리라.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했다.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갑자기 상쾌해진 것은 이에야스의 정치적 입장에서 보면 묘했지만 그러나 좋은 골격을 가진 젊은이를 좋아하는 이에야스의 –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인간으로서의 – 말하자면 습성으로써 이에야스는 유쾌한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직접 앞장서 안으로 들어갔다. 히데요리는 키요마사를 거느리고 아직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키무라 시게나리(
木村 重成 – 히데요리 유모의 아들)에게 칼을 들게 하고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복도를 거쳐 객관의 앞을 지나 곧이어 [대면실]이라고 칭해지는 건물 끝으로 들어갔다.

 이에야스는 북을 향해서 앉았다.
 히데요리는 남을 향해서 이에야스와 대좌하는 자리에 앉았다. 쌍방 대등한 자리였다. 키요마사가 히데요리의 곁 60c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이 날 성안에서 작은 칼(
脇差
)도 차면 안되었기에 품 안에 단도를 숨기고 있었다.
 쌍방 대등한 입장이었기에 동시에 절을 하였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 – 이미
법체(
法體)가 된 코우다이인(高台院) 네네() – 가 나타나 이에야스와 히데요리 사이에 앉아 쌍방을 주선(周旋)하였다. 위계라는 점에서 말하면 종일위(從一位)인 코우다이인이 제일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안상이 나왔다. 들고 나오는 역할을 맡은 이들은 토쿠가와 가문 직속의 중신들로 이타쿠라 이가노카미(
板倉 伊賀守[각주:5]), 나가이 우콘(永井 右近[각주:6]), 마츠다이라 우에몬타이후(松平 右衛門大夫[각주:7]) 등이 예법대로 발을 바닥에 끌며 상을 내왔다. 히데요리는 사전에 키요마사에게 들은 대로 칠오삼의 상차림[각주:8]으로 나온 주안상에 한 번도 젓가락을 대지 않았고 잔도 입술에 가까이 대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았다. 대면은 말하자면 의식(儀式)으로 쌍방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곧이어 술잔을 세 번 받았을 때 키요마사가 히데요리를 향해서,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만 자리를 뜨시옵소서"

 라고 말하자,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입술을 떼어 목소리를 내었다. 굉장히 밝은 목소리로,

 "정말 오오사카의 어머님께서 기다리시겠구려. 오늘 참 경사스러운 날이었소. 그만 돌아가시길"

 하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며 이에야스가 일어나자 히데요리도 일어났다. 시종 무언이었다.
 이에야스는 다음 방까지 히데요리와 함께 갔다. 가다가 히데요리를 올려다 보며,

 "도노(殿)는"

 하고 그런 경어를 사용하여,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도노는 생각보다 훨씬 멋진 성인이 되셨소. 경사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소. 졸자는 나이를 많이 먹어 내일은 어찌 될지도 모르오."

 하고 말했다. 더 말하길,

 "졸자의 수명이 다하거든 우효우에(右兵衛=9남 요시나오)와 히타치노스케(常陸介=10남 요리노부)를 잘 부탁 드리옵니다."

 거기에는 요시나오, 요리노부라는 이에야스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히데요리는 그 쪽으로 눈길을 주고는 미소를 지으며(처음으로 표정이 변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명쾌하고 또렷또렷하게 말했다. 이 상쾌한 말투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이때만큼 히데요리에게 시샘을 느낀 적이 없을 것이다. 늙음이란 이미 그 자체로 약함을 뜻하며 젊음이라는 것은 노인에게서 보면 그 자체가 거만함이었다. 이에야스는 이 젊은이를 자기가 죽을 때까지 살려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히데요리는 쿄우토(京都)를 떠났다. 그 후 이에야스가 자기 방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찾아왔다. 이에야스의 침실에까지 올 수 있는 것은 이 늙은 모신(謀臣)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마사노부는 히데요리와 대면했을 때의 감상을 들으러 온 것이다. 어떠셨습니까? 하고 마사노부가 묻자 이에야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곧이어 툴툴대며,

 히데요리는 어리석다고 들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현명했다. 다른 사람의 명령 같은 것은 받을 것 같지 않다

 는 뜻의 말을 하였다. 마사노부는 이때 이에야스에게 가까이 가, 걱정할 거 없지 않습니까? 저에게 그 분을 어리석게 만드는 묘안이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을 했다지만 사실인지 어떤지. 마사노부의 묘안이라는 것은 칸토우()에서 센히메()를 따라 오오사카(大坂)에 가 있는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려 히데요리가 주색에 빠지도록 만들어 정신을 황폐화시키자는 내용으로 사실 그렇게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이에야스도 마사노부도 그런 것에 기대할 정도로 철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거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네~네~ 기다리시던 변명입니다.

  1.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가(御三家) 필두인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시조. 단 결국 한 번도 쇼우군 배출을 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2. 어삼가 No.2 키이 가문(紀伊家)의 시조. 후에 8대 요시무네(吉宗), 14대 이에모치(家茂)를 배출. [본문으로]
  3. 원문은 [江戸の無頼漢(もがり)にさわりはすとも、よけて通しゃれ帝釈栗毛]. 모가리(もがり)란 당시 에도에서 유명했던 공갈범을 말한다. 역자는 '帝釈栗毛'을 밤색 제석천이라고 해석하였다. 栗毛는 말의 털이 밤색을 의미하며, 帝釈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釈天)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関ヶ原) 이후부터 토쿠가와 가문을 따른 다이묘우(大名). [본문으로]
  5. 이타쿠라 카츠시게(板倉 勝重). 당시 에도 바쿠후의 쿄우토 감시관(京都所司代). [본문으로]
  6. 나가이 나오카츠(永井 直勝) – 뛰어난 전술지휘관으로 작지만 각 요소요소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본문으로]
  7. 마츠다이라 마사츠나(松平 正綱) 당시 에도 바쿠후 재정장관(勘定頭). [본문으로]
  8. 七五三の本膳. 메인에 7개의 안주, 두 번째 상에 다섯 가지 안주, 세 번째 상에 세 가지 안주로 구성된 상. 성대한 주연에 나오는 차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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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4.19 0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히데요리가 키가 180가까이 되었다니 놀랍네요 (정말 히데요시의 씨? --a).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1 0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계쪽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초년기에 험하게 살았다는 히데요시에 비해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 먹고 자란 히데요리는 키가 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60년대에만 하더라도 180만 넘어도 거구 소리를 들었지만(모 하드보일드 풍의 탐정은 6피트의 키로 엄청난 거구란 묘사가 있습죠) 지금은 그렇지도 않습죠. 어딘가에서 읽기로는 사람의 키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유에는 냉장고의 보급을 들더군요. 신선한 먹거리가 인간의 키를 늘려 주었다고요.

  2. 댓글달자 2009.04.19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인해 볼수는 없지만 십중팔구 히데요시 진짜 아들이 아닐겁니다.
    다른 여자들이 다 히데요시 씨를 못 받았는데 요도기미만 받았다는게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외모도 현저히 다르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1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예전엔 그리 생각했지만 지금은 반반입니다.

      여담으로...히데요시에게도 친자식은 있었습니다. 히데카츠(秀勝)라고...그를 너무 아쉬워 했는지 후에 양자 두 명(노부나가의 4째 아들, 살생관백 히데츠구의 동생)에게도 물려줄 정도였습죠.

      떠도는 말로는 딸도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다산이 가문 특징인 오다 가문의 여인 요도도노만이 두 명이나 히데요시의 자식을 배출한 것도 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요약하자면 애기씨가 부족한 히데요시와 임신을 쉽게 하는 몸을 가진 요도도노...유독 요도도노만 임신한 이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임신이란 생각외로 쉽기도 혹은 어렵기도 하다더군요.

  3. dameh 2009.04.22 15: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전에 니조성에 갔을때 遠侍の間에 들어간적이 있었는데 설명에 '니조성 회견'이 여기서 열렸었다는 글이 있더군요.

    왠지 이 글을 읽고 그 광경을 떠올리니 전율 비슷한게 느껴집니다. 이래서 역사라는게 해볼만한 학문인가..싶기도 합니다만;

    사실 나고야에 산다면서 나고야성은 한번도 안가본 주제에 교토이야기 하려니 좀 묘하긴 묘하군요;; 아 게으름이랄까; 잡다하게 바쁨이랄까..;; 세월만 빨리 흐르고있으니 원;;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2 16: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문에서는 御座の間(저는 '대면실'이라고 번역)라 하여 응? 이라는 생각에 검색해 보니 다메엣찌님 말씀대로군요. 이루어진 곳은 토오자무라이(遠侍)에서 행해졌네요.

      御座の間는 시로쇼인(白書院)- 저는 '객관'이라고 번역했지만 이곳은 쇼우군의 침실이었고 - 의 별칭이었군요.

      아이 참~ 시바 선생님도...
      시로쇼인을 지나 시로쇼인으로 들어간다니...

      아~ 그 전율 저도 느끼고 싶군요...
      (당분간 일본에 갈 일이 없네요. 전...)

      뭐 전 한국에 살면서 일본에 관한 것만 포스팅하는데요 뭐.... 참~ 나고야성에 가시거든 사진 많이 찍고 저 좀 공유해 주세요~~~(나고야성 뿐만 아니라 역사관련 사진은 찍으면 전부 공유해 주세요)

  4.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4.25 2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번 편에 이어서 잘읽었습니다.

    히데요리 얘기가 나와서입니다만...정실이 낳은 아들이 적자가 될수 있는것 같은데, 측실이 낳은 히데요리를 적자라 볼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딱히 경쟁자(?)가 없는 후계자라....;;; 상속은 했지만 적자라고는 부르지 않는지, 아님 그냥 그래도 적자라고 하는지 궁금하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4.26 2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른 아이가 있었다면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외동아들만 있는 상황에서 적자라는 명칭에 모친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적자는 모친의 구별보다는 우리의 '세자'...말씀하신 후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특히나...公家의 경우.
      적자의 선택은 부친의 권한이었다고 합니다. 그 부친인 히데요시가 적자라고 했으니 그것으로 끝이 아닐까요?

      ....까지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노아님께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 말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4.29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적자는 정실의 자식만.이라는 생각이었던지라 그냥 왠지 애매한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니 노부나가-노부타다의 경우도 있는게 제 고정관념이었나 봅니다;;

  5. 본다충승 2009.05.06 14: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아이를 만드는 능력에 있어서만은 망부 히데요시 보다 뛰어났다." 이 구절이 참 재밌네요.
    어삼가 도련님들과 오사카 전투의 토요토미측 중요 무장 키무라 시게나리도 등장 했네요.

< 사진 출처: http://www.nijl.ac.jp/index.html>

 스에 타카후사는 그의 주군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와 무엇이든 대조적이었다. 요시타카가 문화에 탐닉했던 것에 반해 타카후사는 그쪽 방면으로는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아 당시 유행이었던 렌가(連歌) 모임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스에 씨(氏)는 오오우치 가문의 필두 중신이며 원래는 오오우치 씨(氏)의 지족(支族)이다. 부친 오키후사(興房)의 뒤를 이은 타카후사도 오오우치 가문에서 위세가 강하여 주군 요시타카조차 회담 뒤에는 일부러 타카후사를 배웅할 정도였다고 한다.

 무장으로써도 뛰어났다. 사서는 타카후사의 인물상을 [서국(西国) 무쌍의 사무라이 다이쇼우(侍大将), 지용(智勇)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평하고 있다. 오오우치 씨(氏)의 이즈모(出雲) 원정이 실패로 끝나 전군이 철퇴하였을 때 타카후사는 부하들에게 쌀을 주고 자신을 생선의 내장을 먹으며 굶주림을 참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이즈모(出雲) 아마고 원정의 실패가 - 타카후사가 요시타카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文治派)를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처음 목표로 삼은 것은 요시타카의 총신(寵臣) 사가라 타케토우(相良 武任)였다. 비서관(祐筆)에서 출세한 문치파의 톱이었다. 신참(新參)이면서 후다이(譜代)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 등과 같은 종오위하(從五位下)에 임명 받지만 1545년 5월 타케토우는 타카후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머리를 밀고 히고(肥後)의 사가라(相良)로 물러났다. 타카후사의 행동은 노골적이 되어 주군 요시타카를 은거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이르렀다.

 이 시점까지 아직 다른 무장들은 타카후사에게 찬동하고 있지 않았다. 타카후사에 다음가는 중신 나이토우 오키모리(内藤 興盛), 스기 시게노리(杉 重矩)는 오히려 타카후사의 위험한 야망을 꿰뚫어 보고 주군에게 [스에 암살]을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화인(文化人)인 요시타카는 아무래도 타카후사 암살이라는 과감한 수단을 취할 질 못했다. 이 우유부단함이 후에 자신의 파멸을 부르게 된다.

 주군과 타카후사의 암투는 계속되었다. 요시타카도 나름대로 손은 썼다. 예전에 총애하던 사가라 타케토우를 다시 가문으로 불러들였으며,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자신의 양녀[각주:1]를 시집 보내어 끈을 강화하였다. 모략가 모토나리는 이 때 요시타카와 연락을 하는 한편, 타카후사의 밀사(密使)와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어차피 요시타카 측은 문약(文弱)한 무리였다. 대책이 허술했다. 사가라 타케토우 등은 “스에가 반란을 일으킬 턱이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3년이 지난 후 모든 정세가 주군 요시타카 측에 불리하게 되었다. 여전히 요시타카의 문화적 탐닉은 고쳐질 낌새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낭비로 인하여 가문 내의 인심은 떠나가 버린 것이다. 반 요시타카 감정은 스에 씨(氏)뿐만이 아닌 가문 전체로 퍼져있었다.
 타카후사에게 반대하고 있는 스기 시게노리도 스에의 계획에 참가하였고, 나이토우 씨(氏)도 심정적으로는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1550년. 타카후사는 휴가를 청하여 자신의 영지(領地) 와카야마(若山)성(城)으로 돌아와서는 모반 계획을 착착 짜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해인 1551년 8월 28일. 반란의 병사를 일으켰다. 스에 이하 스기, 나이토우 등의 군세 5000여가 야마구치(山口)로 침입하여 문치파의 저택을 돌아가며 약탈하였고 오오우치의 저택을 습격하였다. 오오우치 측은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 병사가 적었으며 거기에 대부분이 뿔뿔이 도망쳤다.
 요시타카 주종은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산길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 보면 동해(東海) 쪽의
센자키(仙崎) 항(港)으로 피하였지만 결국 이곳의 타이네이(大寧)사(寺)에서 자살하였다.

 타카후사는 이후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를 영유(領有)하여, 츄우고쿠(中国) 일대에 위세를 떨쳤지만, 1555년 9월 30일 모우리 모토나리와 이츠쿠시마(厳島)에서 싸워 전사(戰死)하였다.

큰 지도에서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보기

[스에 다카후사(陶 隆房)]
주군 요시타카를 멸한 후 하루카타(晴賢)라는 이름을 칭했다[각주:2]. 1539년 18살의 나이에 가독을 이어 오오우치 가문의 가로(家老)가 되었다. 1541년 모우리 모토나리와 협력하여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3])를 물리쳤다. 1551년 오오우치 요시타카를 멸한 뒤,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의 동생 하루히데를 맞이하여 오오우치 가문을 잇게 한 뒤 요시나가라는 이름을 칭하게 하였다. 1555년 이츠쿠시마에서 패사(敗死).

  1. 나이토우 오키모리의 딸. 때문에 나이토우 가문은 이츠쿠시마(厳島) 전투 때, 오키모리가 죽은 다음이기도 하여 타카후사 지지파와 모토나리 지지파로 나뉘었다. [본문으로]
  2. 요시타카의 양자로 꼭두각시로 세운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 義長)가 양자로 오기 전의 이름이 오오토모 '하루'히데(晴英)였기에 그 이름을 따서. [본문으로]
  3. 츠네히사(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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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4.17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기씨는 죽 쒀서 개 줬군요. 뭐, 스에씨도 죽 쒀서 개 줬으니…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17 0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타가 있네요 7번 째 단락 마지막 줄에 스기 시게노리 아닌가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17 15: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군의 은혜를 배반했으니 인과응보 아니려나 싶습니다. (김재규도 그랬던 것 처럼;;)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17 1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처럼 위가 없어지면 서로 싸워야죠~

    박선생님//맞습니다. 얼릉 고쳤습니다. 꼼꼼히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메엣찌님//서로 衆道관계였다고 하니 주군이 죽었다는 소식에 요시타카의 숨결과 살결이 타카후사의 뇌리에 떠오르...응?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yangkki87 BlogIcon 한베에 2008.04.21 1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줄에 오오토모 소우린의 동생 하루히데를 맞이하여 '오우치' 가문을 잇게 한 뒤로 수정해주십시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1 1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쳤습니다. 지적 감사드립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4.23 02: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들 세세하게 읽으시네요 아님 꼬투리를 잡으려고하는건지^^;;;
    저는 전자입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23 18: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저러신 분들 기억하고 있다가 반드시 후자가 될 것입니다!!! 우하하하~ 두고봅시다~~~~...^^;

아키[安芸]의 산골에 있던 미력(微力)한 소영주(小領主)에서 출발하여, 실로 10개 쿠니[]에 걸친 거대 다이묘우[大名]로 성장한 모우리 모토나리. 그는 자신의 생애를 시종일관 철저한 모략가(謀略家)로 살았다. 그의 고독한 성장 과정이 원인이었다.

 1558 8월에 장남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5살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10살에 아버지와 사별(死別)하였다. 오로지 형 오키모토[興元]만을 의지하였지만 이 형도 내가 19살 때 죽어버렸다. 이후로는 부모형제도 없고 백부, 조카 등 친척 중에서도 도와주는 친척이 없어, 단지 혼자서 오늘날까지 어떻게든 어려움을 헤치고 살아왔던 것이다……
고 술회하였다.


 모토나리는 모우리 씨[毛利氏]의 본거지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당주 히로모토[弘元]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때까지 코오리야마의 서쪽에 있는 타지히[多治比] 루가케 성[猿掛城]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모우리 가문의 부하 격인 이노우에[井上] 일족의 힘이 강하여 그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그대신 모토나리의 땅을 횡령 당하거나 하였다. 모토나리는 이때부터 20여 년간, 이노우에 씨()의 세력 아래서 인종의 나날을 보내었다. 이런 인종의 나날 속에서 옆 군()의 호족 킷카와 쿠니츠네[吉川 国経]의 딸 묘우큐우[妙玖]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1523년에는 장남 타카모토를 얻었다. 모토나리는 27살이 되어 있었다. 이해의 여름이 끝날 즈음 모토나리의 환경이 급변하였다.


 모우리 종가(宗家)인 형 오키모토가 24살에 죽고(1516), 그 뒤를 이은 오키모토의 아들 코우쇼우마루[幸松丸]도 불과 9살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후임 자리를 두고 내란이 일어났다.

 모토나리와 배다른 동생인 모토츠나[元綱[각주:1]]를 축으로 가문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 내란 때 이노우에 일족의 도움으로 모토나리가 상속자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이때 라이벌 모토츠나를 죽였다[각주:2].

 조연에서 단번에 주연에 오른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모우리 가문의 당주가 된 모토나리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옹립해 준 이노우에 일족에게는 또다시 갚아야 할 빚를 만들고 말았다. 때문에 모토나리는 여전히 긴 인종의 세월을 이어가야 했다.


 그의 고독하고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이때 배양된 것이다. 후에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 가문이 잘 되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나라에 있을지언정, 이 나라에는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모토나리의 소위 네거티브한 면인데, 포지티브한 면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13살 때였다. 가신과 함께 이츠쿠시마 신사[(神社]에 참배한 후 모토나리는 가신에게 무엇을 빌었는지를 물었다. 가신은 우리 주군이 츄우고쿠[国]의 큰 영주가 되게 해달라 빌었다고 했다. 그러자 모토나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몽둥이만큼 빌어도 바늘 정도밖에 이루어 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빌 거라면 어째서 천하를 잡게 해달라고 빌지 않은 것이냐?”

 기개와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각주:3].


 또한 17살 때 중국 명()나라 사람들이 모우리 가문에 들렸는데, 그 일행 중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모토나리의 얼굴을 살펴보고서는,

 너는 고조, 태종의 관상을 겸비하고 있다. 장래 반드시 위세를 사방에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모토나리가 당시 직면하고 있던 츄우고쿠[国]의 정세를 말하자면, 산인[山陰] 지방에는 아마고 씨[尼子氏]가 패권을 쥐고 있었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북부 큐우슈우[九州]에 걸쳐서는 오오우치 씨[氏]가 세력을 뻗고 있었다. 두 거대 세력에 끼인 소영주(小領主) 모우리 가문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고도의 외교적 수완이 필요했다.


 1531.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각주:4]와 의형제를 맺고 있었지만, 1537년에 결별하고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 義隆]에게 적자인 타카모토를 인질로 받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1541년 가을.

 아마고 씨() 3만의 병사를 이끌고 모우리의 본거지 코오리야마[郡山]로 진격해 왔을 때 오오우치 요시타카는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에게 1만의 군세를 주어 구원하도록 하였다. 아마고 군세는 이때 큰 눈을 만나 보급선이 끊겨 참패를 당하였다. 오오우치 군세도 아마고 군세를 이즈모[出雲]까지 깊숙이 추격하였다가 대패를 당했다.


 이 양 세력의 약체화는 모우리 가문이 바라던 바였다. 모토나리는 곧바로 아키 슈고[安芸守護] 타케다 씨[武田氏]를 멸하여 아키[安芸]에 군림한 것이다. 또한 이 지배 체제를 강고히 하기 위해서 모토나리는 세토 내해[瀬戸內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과 산인[山陰]국경에 있는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모략을 이용해 탈취하여,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셋째인 타카카게[隆景], 킷카와 가문에는 둘째인 모토하루[元春]를 각 가문의 당주 자리에 앉혔다. 이름만 다를 뿐 실상은 어디까지나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 세상에서는 이를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5]'이라고 불렀다.


 양 가문을 손에 넣자, 모토나리는 지금이야 말로 모우리 가문을 장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중신 이노우에 일족의 숙청이었다. 20년간 모토나리는 그들의 전횡(專橫)을 참아왔던 것이다. 그 숙청은 철저의 극에 달하여 일족의 장로 모토카네[元兼] 이하 30명 이상을 죽였다. 이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가문 내의 공포는 굉장했다고 한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일거에 장악하여 가신들에게 복종을 맹세시켰던 것이다.


 이 결집된 힘을 이용하여 모우리 가문은 유명한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에 돌입하게 된다.

 츄우고쿠[国]의 명문 오오우치 가문[内家]을 격퇴하여 더욱 크게 웅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오오우치 가문은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 요시타카를 자살로 몰아 넣고, 그 자리에 요시나가[義長]를 앉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모략전에서 모토나리는 진가를 발휘하였다.

 오오우치 씨()의 거점인 야마구치[山口]에 모우리의 밀정들을 잠입시켰다. 모토나리는 그들에게 스에[]의 부하인 용장() 에라 후사히데[江良 房栄]가 모우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유포시키게 하였다. 작은 의혹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결국 하루카타도 그런 소문을 믿고 후사히데를 죽여버린 것이다.


 1555년 봄.

 모토나리는 가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츠쿠시마 섬[島]에 미야오 성[宮尾城]을 쌓았다. 적의 대군을 작은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성을 쌓으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완성할 때까지 스에[陶] 군이 쳐들어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적측에 새어 나갈 수 있도록 모토나리를 손을 써 두었다. 하루카타가 조금 찔러보자 이외로 세찬 반응이 일어났다. 모우리의 숙장(宿) 중의 한 사람이 내응을 약속해 온 것이다.

 모든 것은 모토나리가 놓은 덫이었다.

 결국 하루카타는 모토나리의 유인에 넘어왔다. 하루카타는 2만의 대군을 500척의 군선에 태워서는 이츠쿠시마에 상륙시킨 후 토우노오카[岡]에 본진을 두고서는, 모우리의 미야오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555 9 21일이었다.

 30일 아침, 모우리 군은 은밀히 행동을 개시하였다. 비바람 세찬 날,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100척의 배로 이츠쿠시마[]로 건너 가서는 기습한 것이다.

 스에 군 2만은 4천의 모우리 군에 참패. 총대장 하루카타는 겨우 도망쳤지만 결국 섬의 서안 오오에[大江]의 바위 그늘에서 배를 갈랐다.



크게 보기                                                      <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토나리는 여세를 몰아 빙고[備後], 아키[安芸],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4개 쿠니[国]를 손안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는데, 자신이 죽은 후의 것까지 절치부심하였다.

 3명의 아들에 대한 교훈장[三子],

 '너희 셋 중에 조금이라도 사이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셋 다 멸망 당한다고 생각할 것'

 이라 써서 일치단결의 중요성을 말했으며, 세 아들에게서 서약서까지 받아 두었다.

 2차 대전 전의 일본 국정교과서에 실렸던 [세 대의 화살 교훈]은 유명한 이야기다. 한 대의 화살은 부러뜨릴 수가 있지만, 세 대를 합치면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깨닫게 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맹세케 하였다 한다. 이것은 위의 교훈장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각주:6]

 

 1570, 손자인 테루모토[輝元]를 총대장으로 하여 이즈모[出雲]의 아마고[尼子]를 공략하러 보낸 모토나리는 그 보고를 듣지 못하고 다음 해 파란만장했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년 아키[安芸] 요시다[吉田]지토우[地頭]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에 속하였고, 후에 오오우치[内] 휘하가 된다. 킷카와-코바야카와 가문을 손에 넣은 다음부터 차츰 세력을 넓혀, 스에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島]에서 물리치고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에서 패권을 확립. 후에 츄우고쿠[国] 10개 쿠니[国]와 부젠[豊前]이요[伊予]의 일부를 영유하는 거대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71 6 14일 죽었다. 75.

  1. 가지고 있던 영지(領地)가 아이오우[相合]에 있었기에 풀네임은 ‘아이오우 모토츠나[相合 元綱]’라 하였다. [본문으로]
  2. 이때 모토츠나는 아마고[尼子]의 푸쉬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과 멀어지게 된다. [본문으로]
  3. 여담으로 나이를 먹고 죽기 전에는 '천하를 지배하는 자가 아무리 영화를 자랑하더라도,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쇠하게 되어 자손까지 그 영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보다는 일본을 다섯으로 나눠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잘 보전하여 자자손손까지 이 위세를 남겨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아마고 츠네히사[尼子 経久]의 손자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小早'川']든 킷카와[吉'川']든 성에 내 천川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 [본문으로]
  6. 이 이야기가 이어져 예전 노정윤이 뛰었던 일본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サンフレッチェ広島]의 ‘산프레체’는, 일본 말로 3을 의미하는 ‘산(サン)’과 화살들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체(frecce)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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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3.27 13: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을 쓰면서 기억나는거 2가지.
    첫 번째는 모리 료센을 료카와로 착각해서 포스트를 근1년동안 방치하고 있었던거 -_-;; 하지만 전 러시아어 공부하니까 패스. 일본어 히라가나정도 밖에 못읽으니까 ㅎㅎ

    두 번째는 뜨뜻한 방안에서 귤이나 까먹으면서 노신들하고 장기나 둘나이에 다카모토가 제발 죽을때가지 전쟁터좀 뛰어주세요 해서 바리바리 뛰어다녔던 모토나리가 항상 불쌍하다고 생각했던거. 사실 모토나리도 은근히 계속 현역으로 활동하고 싶었겠지만 이렇게나 늙은 나이까지 빡시게 뛰어다닐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_-;;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7 14: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검색해보니 [료우카와]...라고 읽을 수도 있다고도 하네요.
    (부럽습니다. 러시아어!!)

    그러게 말입니다. 전쟁터라는 곳은 정말 가혹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총대장이라도 자는 곳은 방 안의 이불 위만 못할 것이며 식사, 배설물 등의 처리 등등을 생각하면 죽기 전까지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던 모토나리는 불쌍하군요.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lwk1988 BlogIcon 신사본론 2008.03.27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석에 달린 교훈장을 보니, 병X 히데아키 때문에 모리 료센에서 탈락한 고바야카와 가문이 어째 불쌍하게 여겨지네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3.28 0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좋은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히로시마 구단의 이름에 그런 뜻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
    근데.. 막부 성립 이후 킷카와, 코마야카와 가문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9 1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본론님//대신 종가를 지킬 수 있었으니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았을지...

    맹꽁서당님//처음 댓글 남겨주신 것 같군요. 환영 &amp; 반갑습니다. ^^

    킷카와 가문은 이와쿠니(岩&amp;#22269;)번을 성립시켰지만, 막부에게는 대명 취급을 받았지만, 정작 쵸우슈우 모리번에게서는 대명 급으로 대우를 안 했다고 하더군요. 세키가하라와 오오사카 농성전(사노 도우카 사건) 등으로 인해서 종가와는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하더군요.

    코바야카와 가문은 아시겠지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계승하였지만 세키가하라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히데아키가 죽는 바람에 멸문 취급당했습니다. 에도 막부가 멸망한 뒤 메이지 유신기에 당주의 아들 중 하나가 코바야카와 성을 받아 화족이 되었다고 하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4.01 2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시도 타카이에가 누구이기에 딸내미 인생이 안됐다고 얘기 한걸까요..

    13조까지 진지함 일관이다가 14조에 노인 특유의 골계미가 느껴지는 마무리라니.. 역시 꾀돌이 영감다운 맛이 있다랄까요. 잘 봤습니다.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otokanfist BlogIcon shotokanfist 2008.04.04 13: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4국으로 시작했던 오다씨나, 가신한테 눌려있던 모오리씨나 성공했으니 다행이지, 안그랬으면 정말 안습인채로 마무리할 뻔 했지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4.04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메엣찌님//분위기로 보아서는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 그때까지 적이었던 가문에게 시집을 보낸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인가...싶지만..솔직히 모르겠네요.
    여담으로 시시도 가문은 막말까지도 변함없이 모우리 가문에서 힘이 있었는지, 4개국 연합함대에 패배한 쵸우슈우 번의 사자로써 하찮은 가문 출신(150석)인 타카스기 신사쿠(高杉 晋作)는 급히 가로인 시시도 비젠노카미(&amp;#23437;&amp;#25144; 備前守)의 양자가 되어 [시시도 교우마(&amp;#23437;&amp;#25144; 刑馬)]라는 이름을 얻어 전후 처리를 맡았다고 하더군요.

    shotokanfist님//또한 그만큼 성공했기에 이렇게 역사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9. 2010.11.02 0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1.02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

      출처만 밝혀주신다면 좋습니다만... 이 전국무장 100화 - 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닌 일화들이 많이 실린 책이다 보니 주의를 요합니다.

 '살무사 도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사이토우 도우산의 평판은 굉장히 안 좋다.

 타이라노 마사카도[門][각주:1],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등과 함께 악인(惡人)의 전형적인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같은 시대에도 도우산을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낙서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인을 베고, 사위를 죽이는 것은 몸의 파멸. 옛날엔 오사다, 지금은 야마시로

主を斬り、聟を殺すは身のおわり、昔はおさだ、いまはやましろ

 미노오와리(()のおわり)미노[美濃]오와리[尾張]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 토키 요리요시[土岐 芸]가 도우산에게 추방 당하여 미노에서 오와리로 쫓겨난 것을 말하며, ‘오사다 [헤이지의 (平治)]에서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각주:2]를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 忠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야마시로는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도우산[斎藤 山城守 道三]을 말한다. 어느 쪽이건 주군을 배신한 극악인(極惡人)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잔혹한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도우산은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으며, 혹은 솥에 죄인을 넣어 그의 부인이나 부모형제에게 불을 피우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삶아 죽이게 하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기름 상인에서 미노[美濃] 일국(一国)의 태수로 출세했을 만큼 젊었을 때부터 두뇌의 명석함은 발군이었다.

 쿄우토[京都]의 묘우카쿠 사[妙覚寺]에서 수행할 때는 '배움은 부처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변설(辯舌)부루나(富樓那 석가의 제자로 변설가)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내외(內外)를 잘 깨닫고 있으니 훗날 굉장한 명승(名僧)이 될 것이다'고 촉망 받았다. 묘우가쿠 사()에서는 호우렌보우[法蓮坊]라는 이름이었다. 이 시절에 알게 된 난요우보우[南陽坊]가 훗날 도우산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난요우보우는 미노의 호족 나가이 토시타카[長井 利隆]의 동생으로, 후에 미노[美濃]명찰(名刹) 죠우자이 사[常在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이라 불리게 된다.


 도우산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쿄우토[京都]의 교외에 있는 니시노오카[西]의 낭인 마츠나미 모토무네[松波 基宗]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마츠나미 가문은 대대로 '북면의 무사(北面武士 상황(上皇)의 거처를 지키는 무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호우렌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름 상인이 되었다. 나라야[奈良屋]데릴사위로 들어가, 야마자키야 쇼우고로우[山崎屋 庄五郎]라는 이름을 칭었다.


 미노[美濃]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서 기름 행상을 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기름을 에 담아 손님의 항아리에 옮기는데 깔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일문전(一文銭[각주:3])의 구멍을 통해서 흘려 넣은 것이었다. 한 방울도 구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멍 주위에 한 방울이라도 묻는다면 공짜로 주겠다고 하였기에 그에게는 손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퍼포먼스를 미노[美濃]의 호족 나가이 토우자에몬[長井 藤左衛門]의 가신 중에 한 명이 보게되었다.

 굉장한 기술이군. 저 묘기를 무예로 살린다면 필시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가이 가문의 무사가 한 말이 도우산을 무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우산은 기름 상인을 관두고 창()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3간반(間半=약 6미터40센티[각주:4])이라는 굉장히 긴 창(=나가야리(長槍))을 만들어, 그 창 끝에 바늘을 달아서는 대나무 가지에 매단 일문전의 구멍을 뚫는 연습을 하였다. 필사의 수련 끝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이어서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야리[長槍]는 센고쿠[戦国]전투에는 필수인 것이 되었는데 도우산이 그것의 발명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철포()의 실력도 또한 굉장했다고 한다[각주:5].
 이리하여 무예가 숙달된 도우산은 예전 묘우가쿠 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난요우보우=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의 연줄로 나가이 토우자에몬 나가히로[長井 藤左衛門 長弘]를 섬기며, 마츠나미 쇼우고로우[松波 庄五
郎]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우산이 가진 다른 매력적인 면으로 나가이 씨()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다. 기름 상인이라고 하여도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야마자키 하치만 궁[山崎八幡宮]전매권(專賣權)을 가진 기름 조합(油座)에 속해있던 상인으로 대단히 큰 규모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름 조합의 상인은 관소(關所[각주:6])를 통과할 때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상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도우산은 미노 슈고[美濃守護] 토키 모리요리[土岐 盛頼][각주:7]의 동생인 요리요시[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야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요리요시를 꼬드겨 자신을 멀리하고 있던 당주인 모리요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주가 된 요리요시는 도우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애첩 미요시노[深芳野]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독선적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노신(老臣)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도우산을 천거했던 나가이 토우자에몬이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도우산은 은혜를 입었던 이 토우자에몬을 모살(謀殺)해 버린다. 이미 나가이 신쿠로우 토시마사[長井 新九朗 利政]로 이름을 바꾸고 있던 도우산은 이렇게 나가이 가문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나가이 일족의 반발을 사 공격을 받아, 주군 요리요시 밑으로 도망쳤으나 오우미[近江]의 슈고다이묘우[守護大名] 사사키 씨[木氏][각주:8]의 중재로 겨우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후 도우산은 또다시 성()을 바꾸어 사이토우 성[姓][각주:9]을 칭하였다. 쇠약해져 있던 사이토우 씨()의 양자로 들어가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藤 山城守 秀竜]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착실히 그는 출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망은 끝없이 커져만 갔다. 다음 목표는 미노[美濃]의 주인 자리였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이 또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노의 호족들이 반 히데타츠 연맹군을 조직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운 좋게 오우미[近江]의 사사키 씨(),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중재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화해하였다. 이때 히데타츠는 그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이때부터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우산의 덫이었다.

 15425. 갑자기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거성 오오가 성[大桑城]을 습격하여 주군을 추방하여 명실공히 미노[美濃]의 태수(太守)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도우산은 곧이어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딸인 노히메[]를 노부히데의 적자 노부나가와 결혼시켜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얼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받고 있던 노부나가를 한번 보자마자,

 안타깝게도 이 얼간이 집 앞에 내 자식들은 말을 메게 되겠구나[각주:10]

 라고 탄식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이 즈음의 일인데, 도우산은 멍청함을 가장한 노부나가의 얼굴에서 일찍부터 후년 천하의 패자(覇者)가 가진 재능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역시 예언은 적중하여,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興] 때가 되어 사이토우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멸문 당해 버린다[각주:11]

 

 도우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주군 요리요시의 복수를 받게 된다. 그의 부인이 된 미요시노는 도우산에게 왔을 때 이미 요리요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도우산의 적자 요시타츠[]였다. 이 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도우산의 애정은 이 장자에게는 박했고, 둘째인 마고시로우[孫四郎], 키헤이지[喜平次]에게만 쏠려 있었다.

 

 도우산은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킨카잔 성[金華山城][각주:12]에 있게 하고, 자신은 나가라가와[長良川] 강 건너편에 있는 사기야마 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

 요시타츠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65(195cm)이라는 큰 키였으며 성격도 굉장히 과격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아 날이 갈수록 험악해 져 갔다. 도우산은 요시타츠를 없애고 둘째인 마고시로우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은밀히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요시타츠가 선수를 쳤다. 꾀병을 부려 숨이 있는 동안 유언을 하고 싶다고 하여 두 동생을 성에 불러들여 죽인 것이다.

 도우산은 격노하였다. 두 아들을 단번에 잃은 실망도 컸다.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이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 4.

 결국 둘은 전쟁을 벌인다. 도우산은 63세가 되어 있었다. 젊은 요시타츠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패하여 키다이 사[城田寺]로 도망치던 도중, 요시타츠의 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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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가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이토우 가문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은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567년이었다.

 

[사이토 도산(藤 道三)]
이름은 토시마사[利政], 후에 히데타츠[竜]. 말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을 칭했다. 미노 슈고[守護] 토키 씨[土岐氏]의 가신이 되었고, 1542년 주군 요리요시를 추방하여 미노 슈고가 된다. 1556 4 20일 적자 요시타츠와 싸워 전사(戰死).

  1. 939년에 칸토우(関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텐노우(新皇)]를 자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일본 3대 원령(怨靈)] 중의 하나.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바쿠후[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부친. [본문으로]
  3. 우리 나라의 엽전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본문으로]
  4. 아시가루(足軽)가 아닌 일반 무사의 창은 1간반(약 2.7~3미터)~2간(약 3.6~4미터)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이라고 하니 이 당시는 아직 철포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말년(도우산 1556년 몰) 즈음의 이야기 일 것이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각 지방의 실력자(영주, 절, 신사 등)들이 재정 확충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領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곳이 많았다. [본문으로]
  7. 요리타케(頼武), 마사요리(政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보통 롯카쿠[六角]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9. 사이토우 씨(氏)는 대대로 미노[美濃]의 슈고다이[守護代]였다. [본문으로]
  10. 얼간이 집 ‘가서’ 인사를 올리거나 지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 [본문으로]
  11. 멸문은 당했지만, 도우산의 막내 아들인 사이토우 토시하루[利治]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 부속 가신 되어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때, 노부타다와 함께 싸우다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죽게 된다. [본문으로]
  12. 이 시대에는 이리 불렸다 한다. 후에 이나바야마[稲葉山]를 거쳐 노부나가 시대에 기후[岐阜]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또한 이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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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hyunby1986 BlogIcon 턴오버 2008.03.20 23: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우산의 아들 요시타츠나 손자 타츠오키의 이름에 '타츠'가 들어가서 왜 그런가 했더니 도우산의 본명에 '타츠'가 들어있었군요.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1 05: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확실치는 않지만...그 윗대에 '타츠(龍,&amp;#31452;)&quot;자가 없는 것을 보면 도우산 때부터 붙이기 시작했나 봅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shiroyume BlogIcon shiroyume 2008.03.21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다. ^^ 역시 도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 히데요시처럼 밑바닥부터 발발 기어오른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밑바닥이락고 생각하는 기름장수설마저도 거상이라는 가설을 담고 있네요. 동전구멍으로 기름따르는건 대망에서도 본것 같은데 여기서 보니 또 새롭네요 ㅎ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3.21 1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3년만 버텼어도 나병으로 알아서 죽을것을 뭣하러 도발해서(-_-;;)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3.21 2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hiroyume님//저 [야망의 사나이 도삼] 보시지 않으셨다면 함 보세요. 볼 만합니다. 다만 끝부분은 서둘러 끝내는듯한 인상을 받지만요.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찢어죽이거나 삶아 죽이는 것 같은 잔인한 행적은 나오지 않지만요)

    다메엣찌님//워낙 내정에 어두운 도우산이라 다른 호족들이 &quot;못살겠다 바꾸자&quot;라고 해서 도우산이 어디 간 사이를 노려 봉기했다는 말도 있지만요. ^^ (이노구치(井ノ口)등의 정비나 라쿠이치(&amp;#27005;市)등의 설치를 보면 내정에 어둡다기 보다는 그에 관련된 코쿠진(&amp;#22269;人)이나 절, 신사 등의 이권 문제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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