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의 불행은 재능도 없으면서 히데요시(秀吉)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칸파쿠(関白)까지 출세한 것에 있다.
 히데츠구는 오와리(
尾張)의 성()도 없는 일개 농민의 자식에 지나지 않았지만 모친이 히데요시의 누나[각주:1]였다. 그런 관계로 출세하기 시작하여 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의 양자가 됨에 따라 예가 없을 정도의 승진을 이룬 것이다.

 18살에 종사위하(四位下)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에 임명되었으며, 21살 때는 정삼위(正三位)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하였다. 24살 때,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죽자 칸파쿠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바랄 수 없다고 본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쥬라쿠테이(楽第[각주:2])를 히데츠구에게 주고 히데요시 자신은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가 이후 타이코우(太閤[각주:3])라 불리게 된다.

 하지만 2년 후인 1593년 히데요시에게 오히로이(おい – 후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난 것이다. 히데요시는 히데츠구에게 칸파쿠를 물려준 것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히데요시의 그런 감정을 히데츠구도 느낄 수 있었다.
  히데츠구가 여기서 깨끗하게 '칸파쿠'라는 직책을 히데요시에게 반환하였다면 비극의 인물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맛본 권력의 맛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때 일본 전국을 5분할하여 그 중 4/5는 히데츠구에게, 1/5을 히데요리로 나누는 계획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장래 히데요리의 부인으로 히데츠구의 딸을 맞이하여 토요토미 가문(
豊臣家)을 잇게 하는 방안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히데츠구는 그러한 히데요시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오히려 자포자기와 같은 행위를 거듭하게 된다. 히데요시가 칸파쿠의 직책을 거두어 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강박관념이 그를 난행으로 몰고 갔다.
 철포(
鐵砲) 연습을 핑계로 쿄우토(京都) 교외 키타노(北野) 근방에 가서 밭일을 하던 농부를 표적으로 쏘아 죽였고, 또한 활의 표적으로 지나가던 사람을 멈추게 한 후 맞추어 죽였다. 나중에는 살인에 맛을 들여 밤중 시내에 나가 돌아다니다 마주친 사람을 계속해서 칼로 죽였다. 자신의 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다 – 그 손맛이 죽였다. 히데츠구는 이렇게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 수백 명을 죽였다고 한다.

 히데츠구의 난행은 끝이 없었다. 오오기마치 죠우코우(正親町上皇)가 죽었다[각주:4]고 하는데도 사슴사냥을 하고 싶다고 억지를 부렸다.

죽은 상황에게 공양하기 위해서 사냥을 하니, 이것을 살생관백이라고 한다
御所のたむけのためのなれば、これをせっしょう関白という[각주:5]
 는 낙서마저 나왔다.

 히데츠구는 그 다음으로 성지(聖地)라 일컬어지는 히에이잔(比叡山)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금녀의 구역인 히에이잔에 여성들까지 함께 데리고 올라가 사슴사냥을 한 것이다. 히에이잔은 물론 살생이 금지된 땅이었다. 스님들이 멈추어달라고 사정을 하자 오히려 더욱 흥분하여 원숭이, 너구리까지 잡아 그렇게 사냥해 온 것들을 본당() 네모토 중당(根本中堂)으로 가지고 들어와 대놓고 요리해 먹은 것이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승려들이 쓰고 있던 소금이나 식초통에 사냥한 개나 사슴의 시체를 던져 넣었다.[각주:6]

 이런 난폭한 행위들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잠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히데요시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 있으니 히데츠구가 조정에 막대한 헌금을 한 행동이었다[각주:7]. 1595년의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이것을 모반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판단하였다. 파견된 힐문사(詰問使)에게 히데츠구는 결백을 주장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용서하지 않았다. 결국 칸파쿠, 사다이진(左大臣)이라는 요직()을 박탈당했다. 히데요시와의 면담도 거부당하여 코우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당한 뒤 그곳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다.

 히데츠구의 가족들에 대한 히데요시의 처치는 잔혹의 극을 달했다. 처첩과 자식들 모두 쿄우토 산죠우 강변(三条河原)으로 끌려가 히데츠구의 목 앞에서 사형당했다. 2~3세의 아이까지 모친의 면전에서 살해되었으며 그 모친도 곧바로 목이 베어져 죽음을 당했다.

[도요토미노 히데쓰구]
1568년생. 처음엔 '미요시 야스나가(
三好 康長)'의 양자가 되어[각주:8] '미요시 마고시치로우(三好 孫七郎)'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585년 오우미(近江), 야마토(大和)에서 43만석[각주:9]. 1591년 칸파쿠(関白)가 되었다. 1595년 추방당하여 자살. 28세.

  1. 즈이류우인 닛슈우(瑞龍院日秀). [본문으로]
  2. 히데요시가 자신이 세운 정권의 권위와 상징을 위해 쿄우토에 세운 정청(政廳)겸 주거지. [본문으로]
  3. 은퇴한 칸파쿠에게 붙여주는 경칭. [본문으로]
  4. 1593년. 1586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에게 양위한 상태였다. 여담으로 히데요시는 이 오오기마치가 양위하고 살 집(센토우고쇼(仙洞御所))을 마련한 공로로 칸파쿠(関白)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원어로는 'せつせう'라고 되어 있는 듯... 살생(殺生)과 섭정(摂政)의 발음은 둘 다 셋쇼우(せっしょう). 그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섭정관백을 살생관백으로 말장난한 것. [본문으로]
  6. 히에이잔 측의 기록에는 없는 말이라고 한다. 야마시타 토키츠네(山科 言経)의 일기인 [토키츠네 경기(言経卿記)]에 따르면 히데츠구는 당일 쥬라쿠테이(聚楽第)에서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뭐 이 헤이케모노가타리 듣는 것도 향락에 속하는지라 상황 붕어의 자숙하는 분위기에서 해선 안 될 행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이 뿐만 아니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가 이른 것에 따르면, 뭔 일이 있을 시에는 관백인 자신(히데츠구)을 따른다는 서약서를 비밀리에 제출하라고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8. 그전(3살 즈음)에 '미야베 케이쥰(宮部 継潤)의 양자가 된 적이 있다. 양자가 되었을 당시 미야베는 오우미(近江) 아자이 가문의 유력 무장이었는데, 히데요시는 미야베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며 안전보장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조카를 양자라는 이름의 인질로 보냈다.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반환되었다. [본문으로]
  9. 그 후 오와리와 이세 등에 100만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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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Gyuphi IV 2009.08.01 11: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저 히데츠구의 고뇌라는것도 납득이 갈만도 합니다. 칸파쿠직을 다시 내어준들, 잠재적 경쟁자일 조카를 갓난아기인 친자식이 있는데 가만히 내버려둘리도 없잖겠습니까..랄까, 애시당초 신뢰로 형성된 관계라면 모를까 저 센고쿠에 그런관계따위 있을리가 없죠.

    히데요시가 1592년 전에 죽었다면 어땠을까 싶긴 하군요. 뭐 느슨한 연합체이긴 하겠지만 도요토미 정권 비슷한게 에도바쿠후를 대신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2 1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군상 56, 센고쿠 무심전, 토요토미노 히데츠구 항목을 쓴 오오노 노부나가(大野信長)씨는 마지막에 흥미로운 해석을 해 놓았더군요.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이며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를 히데요시가 평하며 한 말인...
      "남자였다면 칸파쿠를 물려줄 텐데..."라는 것을 들어, 히데요시는 가장 사랑하고 평가하는 인물에게 주는 칭호였다고(...문제는 저는 아직 히데요시가 고우히메에게 한 저 '칸파쿠 운운'하면서 천하를 준다는 말을은 고우히메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했는지 본 적이 없어서...뭐..임진왜란에서 대성공해서 히데요시가 중화황제가 되었을 시 일본 칸파쿠(즉 일본총독)으로 임명할 생각을 가졌다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은 있지만요)

      흥미롭군요. 1592년 히데요시 사망이라...
      아마... 히데츠구의 정권이 주욱 이어졌다고 쳤을 때... 히데츠구 인생의 유일한 패전이었다는 코마키-나가쿠테는 아마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처럼 말타고 달려드는 이에야스와 젊은 나이지만 중후한 히데츠구가 그것을 맞받아 치는 이야기도 생겼을 것이고...

      히데요시의 갖은 성공 뒤에는 어린 나이의 천재 군략가 히데츠구가 활약했다고 나온다던가..

      이에야스의 신격화가 진행되지 않았을 테니 이에야스를 똥싸개로 만든 타케다 신겐도 그냥 지방군벌 찌질이 레벨, 그에 이은 우에스기 켄신도 신경질 졸 부리는 약탈방화범...정도로 인식될지도요.

      (저런 것으로 IF전기를 써도 재미있겠군요 ^^ )

  2. 나라 2009.08.02 2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친구는 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3 0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운이 없는 편이라 생각합니다.

      코마키-나가쿠테에서 본전만 찾았더라도 이에야스는 코너로 몰렸겠고, 그랬다면 히데요시의 위상도 더 높아짐과 동시에 동국의 방파제로서의 히데츠구의 가치도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츠루마츠의 죽음도 어쩌면 운이 없다고 볼 수 있죠. 츠루마츠가 살았다면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한 보호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겠지만, 츠루마츠의 죽음으로 준비도 없이 단번에 No.2 이후는 뭐...

      가장 운에서 버려진 것은 역시 히데요리의 탄생. 속 좁아져 자기 아들밖에 안 보이는 권력자의 눈에 No.2는 단순한 방해물밖에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뭐 머든 결과론이지만 말입죠.

  3. 나라 2009.08.03 07: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적으로는 히데요리가 탄생했을 때에 관백을 반납하고 머리를 낮췄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아니면 오슈의 제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_-;;)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들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그것땜시 나중의 비극이 생긴 것 같습니다.

      우선 절대로 없었을 것 같군요.
      오우슈우에서 조선까지 가는 동안(즉 일본 내에서의 이동 만으로) 어마어마하게 드는 쌀과 돈을 생각하면...
      거기다가 오우슈우의 무장들은 카사이-오오사키의 난, 쿠노헤의 난에서 이미 병역을 치루었기에 임진왜란 때는 면제가 된 것 같더군요. 굳이 갈 필요 없는데 간 다테 마사무네가 특이하다면 특이 케이스....하긴 임진년 초기에는 우에스기 패거리들도 건너가서는 금방 돌아온 애들이고.

  4.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08.03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다 히데요시 때문이다 랄까(...)
    물론 살생관백이라 불려질만큼 히데츠구가 저지른 일은 옹호할수 없지만... 히데요리에 정신이 팔려서 마무리가 흐지부지한것이...
    그냥 조용히 불러서 히데츠구 너님 다음 칸파쿠로 히데요리는 어떻냐 나중에 물려주면 안되겠냐 하고 좋게좋게 협상해서 끝났으면 나중에 이에야스 러쉬가 와도 토요토미씨 멸망까진 안갔을텐데 싶네요.

    그나저나 구레나룻이 뭔가 인상적이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4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살생관백으로 유명한 여러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소스를 시작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려 오오타 규우이치(太田牛一)의 [태합님 군기에 대해서(太閤さま軍記のうち)]...것도 '그랬다!'가 아닌...'~라고 하더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며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이럴 때마다 느끼는 비애.. 원본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죠. '누가 그러더군요'는 식으로 쓸 수 밖에 없어 안타깝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히데츠구가 악행을 저질렀을지 어땠을지...개인적으로 청개구리파인지라 남들이 대세적으로 그렇다는 것을 비틀어 보는 경향이 있는지라 전 히데츠구 무실설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 히데요리도 히데츠구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눈치는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히데츠구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구렛나루 하면 가모우 우지사토(蒲生氏郷)도 한 구렛나루 합죠.... 그러고 보니 우지사토는 엄청 미남이라고 하며 히데츠구도 잘 생겼다는 이야기도 보이더군요...그렇담 센고쿠 미남의 조건 중 하나는 구렛나루?

  5.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는지요 ^^

    여기 오면서 <역사군상>이란 책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어떤 책인가 싶으면서도 머릿 속에 대충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제가 생각했던게 그거였네요. 꼭 사고 싶지만 일본어와 비용의 압박이 심하군요 -ㅅ-;;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 잘 지내시죠? 전 덕분에 (돈 없는 거, 애인 없는 거, 집 나간 고양이 생각하는 거 빼 놓고는)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진 편입죠. 예전엔 고문을 그대로 쓰고 해석도 안 해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요즘엔 그래도 해석도 써 주고 루비(한자 위에 발음 써 주는 거)도 달려서 읽기는 많이 편해졌습니다....만 그 대신이랄지.. 가끔 황당한 주장을 실어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8.08 15: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황당한 주장이라면 학설같은건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08 16: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제가 또 말을 실수했네요. 그냥 잊어주시길. ^^; 료우마에 관한 것에서 료우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었다는 글이 워낙 인상에 남아서 실수를 저질렀네요.

  6. shiroyume 2009.08.08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양반... 전에는 히데요시한테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대망의 영향인지...)

    역시 생각해봐도 설사 히데요리가 안태어나도 붙잡혀 죽었을 듯. 어째 우리의 고려의 막장군주 충혜왕과 겹쳐지는건 -_-;

    그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양자가 되었을라나.

    저는 팩트를 중요시하는편이라 시바료타로를 재밌게 읽긴 하지만 링크걸어놓은걸 보니 확실히 뭐라고 해야하나...가독성은 떨어지는군요. 한국에서 인기가 없었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일본은 문화적성향상 디테일도 중요시 여기지만 한국은 가독성이 있고 흐름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최악의 사서로 평가받는 이문열 삼국지가 잘 읽히는건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주 무능하거나 알려진대로 좆병진이었다면 내버려 두어도 인심은 알아서 떠날 것이며 또한 자멸할 터이니 죽일 필요까진 없었겠죠. 아주 뛰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능력과 인덕이 있었기에 히데요시는 자신이 일군 업적을 빼앗길까 두려워 한 것이고 그렇게 참혹히 관련된 사람들을 죽인 거 아닐까요?

      츠루마츠 죽은 시점에서라면 히데아키처럼 처의 친족보다는 히데츠구의 친동생이며 역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히데카츠(秀勝)가 되었을지도...무엇보다 히데요시의 친아들 히데카츠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이니까요.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야 제가 번역해서 그런 거고요. ^^;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역사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제대로 번역작업하시는 분이 하셨다면 정말 좋은 글이 나왔을 듯.

  7. 1 2009.08.10 0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료마가 프리메이슨의 꼬봉이라는 글 굉장히 구미가 땅기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블로그에 소개해주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8.10 16: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야~ 그런 글을 올렸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지는 분들이 있을까봐 피하고 싶군요.

      우리나라에 들어온 료우마의 인식이야 시바 선생의 '료마가 간다' 정도일텐데 그런 상황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유포시킬 엄두가 나지 않는군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불가능합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가지 덧붙이자면 음모론은 거의 대부분이 구라입니다. 있는 사실을 빼놓고 주장하고픈 사실들만 나열해서는 독자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료우마의 프리메이슨 꼬붕설은 그런 류의 하나입니다.

      일본어 아신다면 '신 역사군상 시리즈④ - 유신창세 사카모토 료우마' 150~152페이지를 참조해 주십시오.(몇 일전 들린 교보문고에 저 책은 아직 몇 권 더 있더군요)

  8. agger 2009.10.08 0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히데츠구의 여타 능력은 솔직히 잘 모르겠으나 정치적인 식견이 없었기에 죽음을 자초한것이라고 생각..
    자신의 입지가 불안해졌을때 알아서 기었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드는군요
    아니면 아예 요도도노에게 굽신굽신 하면서 히데요리의 후견인 비슷하게 가겠다는 정치적 움직임을 보여주거나..하튼 히데요시에게 안심을 주는 퍼포먼스를 보여줬어야 했는데..그런 부분이 안타까움..

    개인적으로는 히데요시를 참 좋아하고 그런 모습을 닮고 싶은데(말년빼구요 ㅋㅋ) 히데츠구가 죽은 시점이 도요토미가의 몰락?을 예견한 분수령이 된거같아서 아쉽게 느껴지네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08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확실히 히데츠구에게는 히데요시를 안심케 할 만한 뭔가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런 일을 했는데도 히데요시가 부족했다고 느겼을 수도 있고요)

      히데요시가 히데츠구에게 붙여준 가신단의 면면들을 보면 확실히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단지 역시 히데요리가 태어난 것이 토요토미 가문 그리고 히데츠구에게는 마이너스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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