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祖父) 때부터 삼대가 기독교 다이묘우(大名)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는 로마로 [텐쇼우 소년 사절단(天正少年使節)]을 파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 등의 다이묘우(大名)와 공동으로 파견하였는데 이 소년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아리마의 히노에 성(日野江城)아래에 만든 일본 최초의 세미나리요(초등신학교[각주:1]) 출신들이었다.
 사절단을 파견한 1582년에 하루노부는 16살이었다. 이 해의 1월 28일 4명의 소년들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하기 위해 저 먼 이탈리아를 향해서 출발한 것이었다.

 하루노부는 이 사절단 파견의 3년 전에 세례를 받아 '동 프로타지우(Don Protasio)[각주:2]'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하루노부는 세미나리요에 이어 영내(領內)인 카즈사(加津佐)에 고등신학교라 할 수 있는 '콜레지오'를 세웠다. 이곳에는 후에 소년 사절단이 유럽에서 가지고 온 일본 최초의 인쇄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미나리요에서는 교리(敎理) 외에도 국어(일본어), 라틴어, 문학, 음악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회화(繪畵)나 천에 수를 놓는 자수(刺繡)까지 과목에 들어갔다.

 아리마 가문의 시조는 해적대장군으로 유명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 純友)[각주:3]라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선조인 타이라노 나오즈미(平 直純)가 스미토모의 아들이라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그런 설이 내려온 것이라 한다.
 후에
큐우슈우(九州)의 다섯 개 지역(
)[각주:4]과 두 개의 섬(島)[각주:5]을 영유(領有)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가 조부 하루즈미(晴純)때부터의 숙적이었다. 하루즈미는 히젠(肥前) 내의 4개 군(郡)을 영유(領有)하며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각주:6]에 이름을 올렸지만, 1563년 타카노부와 싸워 대패한 이래 아리마 가문(有馬家)은 류우조우지 가문 아래서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1581년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씨(島津氏)가 류우조우지 공격군을 일으켜 히고(肥後)로 진격해 왔다. 하루노부는 이 소식을 듣자 드디어 때가 왔다며 곧바로 류우조우지와의 협정을 파기하고 시마즈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전선은 고착되어 1584년에 되자 하루노부는 시마즈에 원군을 요청. 한편 류우조우지 타카노부도 5만7천의 대군을 이끌고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로 진격을 개시했다. 류우조우지 군은 무기도 풍부하여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정공법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3월 24일. 모리타케 성(
森岳) 기슭에 포진한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적을 자군 진영 깊숙이 끌어들여 적의 전열을 늘어지게 만든 뒤 복병을 이용하여 기습, 분단된 류우조우지의 대군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류우조우지 타카노부까지도 죽인 것이다.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에서도 살아남았지만 토쿠가와(川)의 세상이 되자 하루노부는 불행한 사건에 휘말려 자해하게 된다.
 발단은 1609년 12월에 일어났다. 나가사키(長崎)에 정박 중인 포루투갈의 배 '마드레 데 제우스(Madre de Deus)' 호를 하루노부가 습격하여 침몰[각주:7]시킨 것이다. 2년 전 아리마 가문의 무역선 승무원이 마카오에서 살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서양선 습격 사건이 뜻밖의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라는 사기꾼에 낚인 것이다. 오카모토는 이에야스의 모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으로 하루노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였다.
 이 오카모토가 하루노부에게 서양선 습격에 대한 은상으로 이에야스가 땅을 하사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온 것이다. 하루노부는 이 거짓말에 속아넘어가 막대한 금품을 오카모토에게 바친다. 기다려도 땅을 주겠다는 말이 없음에 오카모토를 수상히 여긴 하루노부의 문의로 거짓이란 것이 들어나지만 감옥에 갇힌 오카모토는 하루노부가 나가사키의 행정관을 암살하려 했다
[각주:8]고 고발한 것이다. 어째서인지 하루노부는 변명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 카이(甲斐) 츠루 군(都留郡)으로 귀양가 거기서 자해하였다.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567년생. 1576년 형 요시즈미(義純)의 뒤를 이어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가 된다. 1600년 세키가하라(
ヶ原) 전쟁 때 처음에는 서군에 속했지만 나중에 동군으로 돌아서 영지(領地)를 안도 받는다. 1612년 5월 자살. 46세.

참고: 아리마 하루노부의 목상()을 볼 수 있는 사이트(더 큰 이미지)

  1. 포르투갈 어. seminaryo. [본문으로]
  2. 사족으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이런 이름으로 나온다. [본문으로]
  3. 칸토우(関東)의 타이라노 마사카도(平 将門)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기에 서쪽에서 난을 일으켰다.[죠우헤이-텐교우의 난(承平天慶の乱)] [본문으로]
  4. 히젠(肥前), 히고(肥後) 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부젠(豊前) 일부. [본문으로]
  5. 이키노시마(壱岐島)와 츠시마(対馬). [본문으로]
  6. 바쿠후의 중신. [본문으로]
  7. 선원들을 탈출시킨 뒤 선장이 자침. [본문으로]
  8. 포르투갈 배를 처리할 때 제대로 못한다고 핀잔주는 나가사키 행정관에게 '이 일이 끝나면 저 놈도 죽여주마'라고 홧김에 말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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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7.04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체로 센고쿠의 기독교도들은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게 되는군요. 사족입니다만 그 당시 일본 전 인구의 3%나 되던 교세가 왜 지금은 이렇게 자유로운데도 1%에도 미치지 않느냐는 점에 대해 모리야선생께서 한번 외국인으로서 생각을 피력해보라 하시기에 '에도막부 탓이 아닐까요' 라니 '무르군!'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_-; 으헣헣..

    아.. 이거 개인적인 일 탓에 코맨트 남기는데에도 마음이 떨려서(..;)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 현대에선 기독교가 일본에서 확장을 못하는 것일까요? 궁금하군요. 가르쳐 주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 제 나이 대가 되면 그런 감정도 잘 일어나지 않아서요. 전 부럽군요.
      어떤 경험이든 그것을 나중에 뒤돌아 보았을 때 아름다운 추억이 될지 다시 생각하기 싫은 트라우마로 만들지는 앞으로의 노력 여하입니다.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2. shiroyume 2009.07.04 2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뇌물사건은 알고 있었는데 죽은 이유가 고작 저거군요. 생각해보면 양이(?)로써 포르투갈함선을 격침시킨 공로가 훨씬 더 클텐데. 하여튼 이래서 에도 바쿠후는 맘에 안들어요. 처리방식이 막말까지 음험하단 말입니다.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리마의 영지는 히데요시의 선교사 추방령 이후로 일본 전토에서 도망 온 선교사들이 숨어 살고 있었으며, 역시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네요. 그 지역은 기독교 왕국과 같았다고...기독교 다이묘우인 하루노부와 그 지역을 분리시키기 위한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운 것이 나가사키 행정관과의 다툼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에야스까..라서 어떻게든 이에야스를 깔아 뭉개고 싶지만 그가 세운 에도 바쿠후는 진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처리 방식은 '조용히 조용히...'가 모토다 보니 모략을 많이 이용하긴 하지만요. 덕분에 전란에 휩싸이지 않고 그건 그것대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Bolivar 2009.07.05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사기 사건이 결국 막정의 중핵인 혼다 마사즈미 실각의 한 원인이 되었으니 이름 자체는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5 22: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잠깐 타격은 입었을 지 모르지만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후로 오히려 라이벌 오오쿠보 타다치카(大久保 忠隣)를 실각시킬 정도로 보니.

      오히려 너무 자존심이 센 것이 자기 몸을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 것은 아니가 싶습니다. 이에야스에게 많은 신뢰를 받다 보니 이에야스의 아들이 자신을 모략에 빠뜨려 놓고 베푸는 아량을 참을 수 없었을지도.

  4. 나라 2009.07.06 15: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다는 한 성깔, 토요토미는 여색, 도쿠가와는 음험...
    그래도 도쿠가와 방식이 사람을 가장 덜 죽이긴 하니까 다행인걸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7.07 22: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셋 다 천하인인 고로 어느 면이나 특출난 것이 있었다 생각합니다.
      오다도 여색을 좋아하고..음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토요토미도 한 성깔하고 음험했으며,
      토쿠가와도 여색을 좋아하고 한 성깔했으니까요.

  5. 스펀지송 2013.11.11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우연히 이 곳에 들어와서 재밌게 읽고 갑니다.
    윗 글에 보니 중세 일본의 기독교 신자가 3퍼센트인데 현대의 자유로운 일본에서 1퍼센트도 안되는
    이유가 뭐냐? 는 말이 있네요.

    제 생각에는 일본이 2차 대전에서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게 패배했고, 특히 원폭을 맞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 때문에 반기독교 성향이 강한 듯 합니다.

  6. 스펀지송 2013.11.11 0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중세 일본에서 서양 기독교인들이 보인 사기와 만행을 봐도 일본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생길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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