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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
1578년 7월 17일 모살(謀殺) 34세
1545년 ~ 1578년.
보통 시카노스케[鹿之助]로 알려져 있다. 아마고 카츠히사[尼子 勝久 1]를 옹립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멸망 당한 주가(主家)의 부흥을 위해서 분투(奮鬪).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츄우고쿠[中国] 평정군(平定軍)을 따르며 하리마[播磨] 코우즈키 성[上月城]을 수비하지만,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의 공격을 받아 항복. 빗츄우[備中] 아이[阿井]의 나루터에서 살해당했다.
아마고 잔당(殘黨)의 성
157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 모우리 씨(氏)가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10월이 되자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하리마[播磨]로 출진하였다.
하리마[播磨]의 코우즈키성(城)은 하리마[播磨],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의 국경 근처의 전략적 요충지로 히데요시는 이 성을 점령하여 이곳에 아마고 씨(氏)의 잔당인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입성시켰다. 그 잔당의 맹주로 옹립되어 있던 사람은 쿄우토[京都]의 토우후쿠 사[東福寺]에 출가(出家)해 있던 아마고 카츠히사였다.
코우즈키 성(城)은 천연의 요해(要害)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듯한 성이 아니다. 지금 성터를 돌아 보아도 아무런 특징도 없이 산등성이가 이어진 낮은 산이다. 지키기에 어려운 성이다.
모우리의 숙적이었던 아마고 군(軍)을 모우리 진영에 대비하여 최전선에 배치하는 것은 당시로선 상식적인 작전이었지만 얄궂기도 했다. 아마고 쪽의 장수 중의 하나인 타치하라 히사츠나[立原 久綱]는 이 성에 입성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유키모리는 여기서 싸우는 것에 의욕을 보였다.
다음 해 1578년 4월.
모우리는 3만의 군세(軍勢)를 이끌고 코우즈키 성(城)을 포위했다.
유키모리 등이 의지하고 있던 히데요시 군(軍)은 이 때 오다 측을 배신한 하리마[播磨] 미키 성[三木城]의 벳쇼 나가하루[別所 長治]를 공격하러 가 있있다.
유키모리에게서 급보를 받자마자 히데요시는 미키 성(城) 공격을 중지하고,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와 함께 코우즈키 성(城) 동쪽 2킬로 지점인 타카쿠라 산[高倉山]에 진(陣)을 세웠다. 그러나 모우리 군(軍)의 포위망은 두터워, 이것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모우리쪽은 보급로를 끊어 성을 아사(餓死)시키는 작전을 세워서는 확실히 포위망을 좁혔기에 코우즈키성(城)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히데요시는 아마고의 구신(舊臣)인 카메이 코레노리[亀井 惟矩]를 성 안으로 잠입시켜,
“포위망의 약한 부분을 돌파하여 빠져 나올 수는 없는가?”
하고 전했다. 그러나 이미 성 안의 쌀은 다 떨어지고 굶주림에 괴로워하고 있던 성병(城兵)의 전의(戰意)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히데요시는 서둘러 노부나가를 만나 전황(戰況)을 보고하며 코우즈키 성이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코우즈키 성(城)을 포기하고, 미키 성(城) 공략에 집중하라”
는 명령을 내렸다.
코우즈키 성(城)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하리마[播磨]로 돌아와서는 6월 26일, 타카쿠라 산(山)의 진을 치우고 철수했다.
아이(阿井) 나룻터의 참극(慘劇)
유키모리 등의 아마고 잔당은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 모우리와 아마고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던 코우자이 모토미치[香西 元通]도 함께 농성(籠城)하고 있었다. 유키모리는 모우리의 진영(陣營)에 사자를 보내어,
“이번 사건의 원흉은 코우자이 모토미치이니까, 모토미치의 배를 가르게 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
는 뜻을 전했다. 하지만 모우리 측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우선 맹주인 아마고 카츠히사의 할복(割腹)을 요구했다.
유키모리는 8살 연하의 카츠히사에게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면서 자살을 권했다.
“무운이 다하여 이제는 여기까지 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저도 여기서 함께 배를 갈라야만 합니다만 다년(多年)간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조금 더 이 생명을 빌리고 싶습니다.”
카츠히사는 이 대답을 듣고 답했다.
“법의(法衣)를 두르고 이름도 없이 일생을 끝냈을 터인 몸이면서, 자네들의 충성으로 한 성(城)의 주인으로써 아마고의 깃발을 세워 싸울 수 있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후회나 원망은 없다. 아니, 후회라고 한다면 아마고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7월 3일.
카츠히사는 시 한 수 남기고 죽음의 자리에 앉았다. 26세였다.
카츠히사의 형 우지히사[氏久], 코우자이 모토미치도 성 안에서 배를 갈랐다.
1578년 7월 5일.
코우즈키 성(城)은 항복하였고, 유키모리는 포로가 되어 빗츄우[備中] 마츠야마[松山]에 있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의 본진으로 호송되게 되었다. 그러나 킷카와 모토하루는 도중에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우리 가문[毛利家]의 중신(重臣) 아마노 모토아키[天野 元明]의 가신(家臣)인 쿠리야 히코에몬[栗屋 彦右衛門], 야마카타 사부로베에[山県 三郎兵衛]의 감시를 받으며, 빗츄우[備中] 타카하시[高梁]에 흐르는 타카하시가와 강에 있는 아이(阿井)의 나룻터까지 왔다. 유키모리는 배를 기다리며 나룻터 한 구석에 있는 돌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 때 등 뒤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키모리가 알아채는 것과 동시에 암살자는 베어왔다.
순간 유키모리는 눈 앞의 강(川)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암살자의 칼은 유키모리의 어깨에서 등까지 굉장히 깊은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암살자로 선택된 사람은 카와무라 신자에몬[河村 新左衛門]으로 카와무라도 따라 뛰어들어 물 속에서 유키모리와 뒤엉켰다. 후쿠마 히코에몬[福間 彦右衛門], 미카미 아와지노카미[三上 淡路守]도 카와무라를 돕기 위해 달려 들어 유키모리를 뒤에서 잡고 눌러서 죽였다.
7월 17일.
초추(初秋)는 이름뿐인 무더운 날이었다고 한다.
34세의 생애(生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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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 武吉]
1604년 8월 22일 병사 72세.
노시마[能島] 무라카미 씨[村上氏] 제 5대 당주. 가독(家督) 종가(宗家)에게서 가독을 빼앗았다. 세토 내해[瀬戸內海]의 수군(水軍)을 이끌었다. 이츠쿠시마 섬 전투[厳島の戦い]에서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편에 서 스에 하루카타[陶 晴賢]와 싸웠고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지배 하에 들어가 치쿠젠[筑前], 부젠[豊前]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도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를 도왔다.
노시마[能島] 퇴거[退去]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수군성(水軍城) 노시마를 뒤로 하고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로 자리를 옮긴 것은 1585년 가을이었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모우리 공략(빗츄우[備中] 원정)시에 3번에 걸쳐 항복을 권했지만 이에 따르지 않았고, 모우리 씨[毛利氏]가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뒤에도 히데요시의 사이카[雑賀] 공략 요청에 응하지 않았으며, 1585년 6월 시코쿠[四国] 정벌에도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명령하여 그를 본거지에서 쫓아낸 한 것이다.
노시마[能島]는 쿠루시마[來島] 해협의 무시[務司], 나카토[中途]의 두 성(城)과 함께 노시마 무라카미 씨[能島村上氏]가 세토 내해를 항행하는 선박에게 세키제니[関銭 –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한 바다의 세관(稅關)이었기에, 이곳을 잃었다는 것은 해적중(海賊衆 1)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다는 의미가 되었다.
더구나 3년 후인 1588년 7월 8일.
히데요시는 해적 금지령을 발포하여 타케요시 부자(父子)가 이 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둘을 죽이려고 하였다. 다행히 이때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와 히데요시의 복심(腹心)인 토다 카츠타카[戸田 勝隆]의 주선으로 사형은 면하게 되지만, 그 대신 아키[安芸] 타케하라에서도 쫓겨나 아카마가세키[赤間関 – 시모노세키[下関]]부터 동쪽 - 즉 세토 내해에서의 거주를 금지 당한다.
타케요시는 어쩔 수 없이 이요[伊予]에서 치쿠젠[筑前]으로 전봉(転封)을 명 받은 타카카게를 따라 치쿠젠[筑前] 나지마[名島]로 거처를 옮겼고, 곧이어 부젠[豊前] 미노시마[箕島]로 이주 당한다. 부젠[豊前] 미노시마는 히데요시의 복심인 쿠로다 칸베에 요시타카[黑田 官兵衛 孝高]의 영지(領地)로 위험 분자 타케요시를 칸베에의 감시하에 두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노림 수였다.
1591년.
히데요시는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2]을 앞두고 타케요시를 나가토[長門] 오오츠 군[大津郡]으로 이주 시켰다. 이 곳은 모우리 씨[毛利氏]의 영지로 주어진 석고(石高)는 1만석이라고 하지만, 예전에 본거지였던 세토 내해와는 멀리 떨어진 한국 동해(東海)측의 벽지(僻地)였다. 이럴 정도로 히데요시는 무라카미 타케요시라는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재기(再起)를 꿈꾼 야망(野望)
타케요시가 나가토 오오츠 군에서 아키[安芸] 타케하라로 돌아 온 것이 1598년 가을. 이해 8월 18일에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타카카게는 그 전해인 6월 12일 미하라 성[三原城]에서 병으로 죽었기에 아키[安芸] 타케하라는 모우리 테루모토의 영지가 되어 있었다.
이때 타케하라의 친카이잔 성[鎮海山城]에서 살고 있던 타케요시는 아들인 모토요시[元吉]와 함께 이요[伊予] 노시마로 복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세토 내해 중앙부의 지배권을 회복하여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천하 형세는 그런 타케요시의 바램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히데요시의 죽음에 의해 생긴 절호의 기회를 모우리 테루모토가 놓쳤고, 그의 우유부단으로 인하여 천하는 수군을 적대시(敵對視)하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600년 여름.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를 눈 앞에 두고 타케요시의 몸은 장시간 잠들고 있었던 바다 무사의 피가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그의 계획은 무라카미 수군의 온 힘을 다해서 오오사카 만[大坂灣]으로 출동. 오오사카 만(灣)에서 이세 만[伊勢灣]에 걸친 해역을 봉쇄해서 동군을 견제하고, 예전의 라이벌이었던 쿠키[九鬼] 수군과 협력하면서 서군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3.
하지만 서군의 총수(總帥) 모우리 테루모토는 그런 무라카미 수군에게 이요[伊予] 마사키 성[松前城] 공략을 명했다. 그 때문에 무라카미 수군 세력은 둘로 나뉘어 오오사카로의 출동은 빗츄우[備中] 카사오카[笠岡]의 무라카미 카게히로[景広 4]과 타케요시의 둘째 아들 카게치카[景親]가 담당하고, 타케요시 자신은 장남인 모토요시나 인노시마[因島] 무라카미 수군의 무라카미 요시타다[村上 吉忠] 등을 이끌고 이요[伊予] 미츠카하마[三津浜]로 출동한 것이다.
고난 속에서 죽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오오사카로 출동한 수군 부대는 거의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올렸지만, 이요[伊予]에 상륙한 무라카미 수군의 육전대(陸戰隊)는 부대장이며 타케요시의 장남 모토요시를 포함하여 후루미츠[古三津]에서 전멸 당하였다. 항복한다고 속임수를 쓴 적의 야습에 당한 것이었다.
우치노뉴우[內入] 겐세이 사[元正寺]에 있는 타케요시의 묘(墓).
때문에 타케요시는 세키가하라[関ヶ原]의 패배에 따라 영지(領地) 대부분을 잃은 모우리 씨를 따라, 스오우오오시마[周防大島]로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주한 곳은 스오우오오시마 동부의 우치노뉴우[内入]였다. 한 때 일본 최강의 해상군단(海上軍團) 총수(總帥)로 천하인(天下人) 히데요시에게조차 공포심을 안겼던 바다의 효장(驍将)도 지금은 불과 120명의 부하를 거느린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패사(敗死)한 장남 모토요시의 뒤를 이은 것은 불과 7살의 손자 모토타케[元武]로, 둘째 아들 카게치카가 자신의 부하 300명을 이끌고 모토타케를 보좌했지만, 모우리 씨에게 하사받은 영지는 다 합쳐서 3000여 석에 지나지 않았기에, 농부가 되어 밭을 가는 것 말고는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에 절망한 부하들은 계속해서 새로 취직할 자리를 찾아 섬을 떠났다.
이런 고난 속에서 타케요시가 노시마의 바다를 추억하며 죽은 것은 1604년 8월 22일.
향년 72세(79세라는 설도 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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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624년 7월 13일 병사(病死) 64세.
1561년 ~ 1624년.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칠본창(七本槍 1) 2필두(筆頭)로 이름을 드높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여 승리. 아키[安芸], 빙고[備後]를 하사받지만, 막부(幕府)에 의심 받아 히로시마 성[広島城] 무단 개수(改修)를 이유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滅封)당했다.
마사노리의 인물상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가 쓴 [번한보(藩翰譜) 3]에 따르면 마사노리는, 4
'몹시 사납고 거칠어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던가, '악행을 일삼아 아키, 빙고의 토민(土民) 등 모두 학정에 괴로워하여 맘 편할 날이 없었다'고 혹평을 하고 있다.
확실히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성격이기에 영민(領民)이나 가신(家臣) 중 겉으로는 뺀질 대면서 뒤로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명령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용서 없이 귀나 코를 베는 등 잔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하지만 그가 영내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세심하고, 공정한 토지조사[検地]와 토산품의 개발, 상업 무역의 진흥 등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또한 그가 개명(開明)적인 것은 히로시마 성(城) 아래에 기독교 교회를 설립하여 가신이나 영민중에 입신, 세례하는 사람이 매년 천명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시 마사노리는 5예수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굉장히 평판이 좋았다. 1609~10년의 [일본 예수회연보]에는,
물론 이것은 자기 영토의 항구에 스페인, 포르투갈의 상선을 입항시켜 해외무역을 활발히 하려는 타산(打算)에서 생겨난 결과겠지만, 그가 개명적이며 상업활동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카이에키[改易 6]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明渡)
1619년 6월 2일.
바쿠후가 갑자기 마사노리를 카이에키한 것은 그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어기고 수해(水害)를 입은 히로시마 성(城)을 무단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구실로 속으로는 그가 옛 토요토미[豊臣]의 유신(遺臣)이었다는 것이 바쿠후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7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의 카토우 가문[加藤家]처럼 진심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어차피 카이에키를 벗어날 순 없었을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카이에키가 전해졌을 때 취한 마사노리의 태도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 때 가신들의 대응이다.
1619년 6월 2일.
마사노리는 카이에키를 전하는 사자(使者)에게 절을 하며,
“내리신 말씀은 알겠습니다. 오오고쇼[大御所]가 살아계시다면 마사노리도 할 말이 있지만, 당대(當代 8)에게는 이제 와서 할 말도 없습니다” 9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마사노리의 가신들은 히로시마 성(城) 접수를 하기 위해 온 여러 장수들에게,
“이 성은 주군 마사노리가 지키라고 명령받은 성이니 아무리 쇼우군[将軍]의 명령이라 하여도 건넬 수는 없소. 억지로라도 건네 받으려면 창으로 뺏어보시길”
이라 말하며 농성(籠城)하다 죽을 각오를 선명히 하였다.
그 때문에 접수사(接收使)는 에도[江戸]에 억류되어 있던 마사노리에게 이 뜻을 전하여 마사노리가 직접 쓴 편지를 얻어 겨우 개성(開城)을 승낙시켰다고 한다. 더구나 성을 건넬 때도 흐트러짐 없었고, 넓은 마루에는 10혈판(血判)으로 된 농성을 맹세하는 무사 2000여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어 그 각오가 단단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을 건넨 후 그러한 가신들은 모두 다른 다이묘들에게 초대되어 임관될 수 있었다고 하니, 마사노리가 평소부터 얼마나 가신들에게 존경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봉(移封)후의 선정(善政)
히로시마 49만 8천석에서 감봉 당한 마사노리는 시나노 카와나카지마 2만석과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을 합한 4만 5천석이 주어졌다. 11
1619년 7월.
근신(近臣) 30여명을 이끌고 임지로 향하여 타카이노 촌[高井野村]에서 1624년 7월까지 6년 정도 지냈다. 죽은 것은 1624년 7월 13일. 향년 64세였다.
마사노리는 이 곳에 오자마자 영내(領內)를 순시하며, 당시까지 햇볕이 잘 들거나 그늘이 어느 정도 드는지 또는 물길이 좋고 나쁜 것만으로 연공을 차등 부과하고 있던 농지에 생산력이 좋고 나쁨까지 고려한 새로운 토지조사[検地]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오부세[小布施]의 하천 개수 공사를 하여 지금도 '타이후[大夫]의 천냥 둑[千両堤]이라는 사적이 남아있다. 즉 현재 오부세 정[小布施町] 우에하라[上原]에 있는 천냥 둑은 여기를 지나던 마츠가와 강[松川]이 몇 갈래로 나뉘어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던 것에 둑을 쌓아 흐름을 바뀌게 하여 피해를 없앤 둑이다.
마사노리의 4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가 죽자 그의 우오누마 군(郡) 2만 5천석을 바쿠후에 반상하였고, 남은 카와나카지마 2만석도 그가 죽은 후 몰수당했다.
'토쿠가와짓키[徳川実紀]]에 따르면, 마사노리가 죽은 후 가신이 바쿠후의 검시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유골을 화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2
어째서 검시관을 기다리지 못했는지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설도 있어 그의 마지막은 수수께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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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97년 6월 12일 병사(病死) 65세
1533년 ~ 1597년.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셋째 아들. 형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와 함께 모토나리, 테루모토[輝元]를 보좌. 히데요시[秀吉]가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포위하자 교섭에 임했다.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1] 때는 조선에 출병. 벽제관[碧蹄館]의 싸움에서 명(明)나라 군과 싸워 이겼다.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었다. 2
모우리 가문의 안녕을 지탱하는 인물
권모술수로 가득 찬 센고쿠[戦国]시대에 죽을 때까지 모우리 종가(宗家)의 안녕을 생각하며 부친 모토나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 것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이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조카인 테루모토를 보좌한 명참모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나누어 다음 셋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2) 모토나리가 죽은 후 둘째 형인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의 중진(重鎭)으로 활약했던 시기.
(3)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토요토미 정권의 정치가로 활약했던 시기.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し 3]때는 히데요시 군을 추격하지 말자고 모우리 군에선 단 혼자서 주장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이로인해 후에 토요토미 정권의 중신(重臣)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제 6군의 사령관으로 1만여의 장병을 이끌고 활약했다.
특히 벽제관의 전투에서는 이 여송(李 如松)장군이 이끄는 명(明)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염전기운이 만연하여 의기소침해 있던 일본군의 사기를 높인 의미는 크다. 킷카와 모토하루가 걸핏하면 성급해졌던 것에 비해 타카카게는 형에 뒤지지 않는 용맹함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상황을 멀리 내다보는 주도면밀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595년 8월.
치쿠젠[筑前]의 나지마[名島]로 돌아와 있던 타카카게는, 후계자가 없던 모우리 테루모토에게 자신의 외조카인 하시바 히데토시(羽柴 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모우리 가문의 후계자로 앉히려고 하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저지하여, 모우리 종가의 피를 지키기 위해 대신 히데아키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에게 은거를 신청한 타카카게는 그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코바야카와 씨의 본거지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에 은거하였다. 히데요시가 3만여석의 은거료(隱居料 4)를 하사하여 타카카게의 공로를 치하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내 정치(領內 政治)와 교양(敎養)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日本史)]에서 타카카게를,
1595년 11월.
미하라로 온 타카카게는 우선 은거할 성(城)으로 미하라 성(城)의 개수(改修)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를 행했다.
붓츠우 사[仏通寺]의 재건 공사에서는 “손이 많이 가긴 하겠지만 앞을 내다봐서”라며 절을 세울 땅의 선정부터 건축공사까지 세세히 지시를 내렸다. 또한 교량(橋梁)공사에 있어서도 건축 용재는 오래된 배를 재이용하는 쪽이 내구성이 높다고 하여 세토[瀬戸]와 온도[音戸]에 계류되어 있던 아타케 선[安宅船]을 모으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렇듯 민정의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쏟았다.
말년의 타카카게는 무라사키노[紫野]의 다이토쿠[大徳寺]의 오우바이 원[黄梅院]의 암주(庵主)인 교쿠센 소우슈우[玉仙宗秀]에게 사사(師事)받으며 참선(參禪)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실한 선종(禪宗)의 신자로 오우바이 원(院)을 시작으로 미하라의 베이산[米山寺 5], 쿄우신 사[匡真寺], 다이젠 사[大善寺], 치쿠젠 하카타[博多]의 쇼우후쿠 사[聖福寺] 등 타카카게가 정재(淨財)를 한 곳은 여러 곳에 이른다.
또한, 유학(儒學)을 좋아한 타카카게는 치쿠젠 나지마에 나지마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의 육성에 힘쓰는 등 문무 양쪽에 주목할 점이 많다.
타카카게의 죽음
베이산 사[米山寺]에 있는 타카카게의 묘(미하루 시[三原市]
1597년 봄 즈음 부터 아프기 시작한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세번에 걸친 상경 요청에 대해서도 병 조리를 이유로 나중에 찾아 뵙겠다며 연기를 요청했다. 죽기 직전에는 코다마 나리히데[児玉 就英]의 가독 상속이 아무 문제없이 행해지도록 테루모토에게 부탁했다.
이것을 최후의 업무로 같은 해 6월 12일. 65세의 생애를 마쳤다.
타카카게의 죽음은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듯 유언도 남기질 못했다.
[마치 자기에게 죽음이 갑자기 찾아온 듯이 앙천했다]고 테루모토는 그 죽음에 놀라 모우리 가문의 대들보를 잃은 슬픔과 앞으로의 의지할 데 없는 불안함을 절절히 기록했다.
그 3년 뒤에 일어난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투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으로 추대 받았으면서도 택해야 할 길을 잘못 택해, 영지 대부분을 잃은 것을 보면 타카카게의 죽음이 얼마나 모우리 씨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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