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한국의 국회도 해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일 때는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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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우지사토[蒲生 氏郷]
1595 2월 7일 병사 40세
1556년~1595년.
오우미[近江] 히노[日野] 성주 가모우 카타히데[蒲生 賢秀]의 아들. 크리스트교를 믿어 세례명은 레오(또는 레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겼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공적으로 인하여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 성주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에는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출진하지만 갑자기 병을 나서 급사.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명장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오우우[奥羽] 지방의 통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처음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아이즈를 맡긴다고 하자 타다오키는 이런 큰 일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사퇴하였다.
오우우에는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등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호족들이 많았다. 아이즈 쿠로카와[黒川] 42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것은 이런 호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칸토우[関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검은 손길이 오우우에 미치지 않게 한다는 숨겨진 임무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선정된 것이 가모우 우지사토였다.
이세[伊勢] 마츠자카[松板]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로 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많은 전쟁을 경험한 명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姬]의 남편이라는 신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외경심(畏敬心)을 품게 하였다.
또한 우지사토만큼이나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주인도 흔치 않았다. 주된 가신들을 모아서는 술자리를 열 뿐만 아니라, 가신들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직접 뗄감을 집어 넣으며 물을 끓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충성스런 신하가 많았다.
오우우 평정에 조력
히데요시는 이런 우지사토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택하였다. 처음엔 타다오키처럼 사퇴하였지만 히데요시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우지사토는 아이즈 쿠로카와 42만석을 받아 들인 후 거실의 기둥에 기대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본 야마사키 우콘[山崎 右近]이 많은 영토를 가진 높은 신분으로 출세하여 기쁜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요? 하고 묻자 우지사토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낮은 신분이나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더라도 쿄우[京] 근처에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천하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을.... 아무리 높은 신분에 많은 영토라고 하여도 쿄우[京]에서 먼 곳에 있다면 그런 바램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나도 모르게 분한 눈물을 흘렸다"
고 대답했다지만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로 향하기 전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여 입었다. 오우우 부임은 히데요시를 대리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두려웠기에 오우슈우[奧州]로 쫓아 보냈다고 근신(近臣)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는 둘째치고 라도 우지사토는 천하인(天下人)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재능을 오우슈우[奧州] 통치에 이용하려고 한 히데요시의 날카로운 안목을 칭찬해야만 할 것이다.
우지사토의 말년은 오우우 통치에 전력을 쏟는 시기였다. 카사이-오오자키의 난[葛西大崎一揆]을 진압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야망을 좌절시켰으며,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처리하였다. [우지사토 기[氏鄕記]]에 따르면, 이때 우지사토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군법에 따라 군율을 엄격히 했다고 한다.
최후와 죽을 때 읊은 시
여기서 하나의 일화가 태어났다.
군감(軍監)으로 참전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히데요시에게,
[우지사토의 진영을 보니 예사 인물이 아닌 듯 합니다. 타이코우[太閤] 전하에게 딴 마음을 품는다면 이 이상 두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일찍 죽여야만 합니다]
고 진언하여 독을 먹였다고 한다. 이야기로써는 흥미 깊지만 우지사토 독살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지사토가 발병한 것은 1593년의 히젠 나고야 출진 중이었다. 몇 월 몇 일인가는 특정할 수 없지만 하혈(下血)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의 일화에 나오는 듯이 히데요시나 미츠나리가 짐독(鴆毒)을 먹게 하였다면 그해 안에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짐(鴆)은 중국산의 독조(毒鳥 1)로 날개를 술에 담근 후 마시게 하면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지사토가 죽은 것은 1595년 2월 7일로 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필시 하혈은 암(癌)의 징조였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사카이[堺]의 의사 소우슈쿠[宗叔]의 진찰과 투약으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달증상을 띠며 말라갔기에 히데요시도 걱정하여 당대의 명의였던 마나세 겐사쿠[曲直瀬 玄朔]에게 진찰시켰더니 2 [배에 물이 차거나 손발에 종기가 생기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1594년. 히데요시는 또 다시 9명의 명의에게 우지사토를 진찰시켰다. 안타깝게도 명의들 대부분이 포기할 정도로 상태는 악화되어 40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당시의 의학에선 어떻게 판단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직장암(直腸癌)의 병상(病狀)과 비슷하다.
그의 사세구(世辞句)가 물의를 빚었다.
끝이 있으니 (바람)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지는 것을 마음도 급하구나 꽃샘바람
누군가에게 독살되어 수명이 짧아졌다는 설이 태어났지만 명백한 오해이다. 현대의 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암의 질환이다. 우지사토는 그런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 것이라 생각한다.
코우토쿠 사(興徳寺)에 있는 우지사토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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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
1579년 8월 28일 병사 61세
1573년 ~ 1597년.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15대 쇼우군(将軍).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옹립되어 쇼우군이되었다. 노부나가와 사이가 틀어져 병사를 일으키지만 패하여 무로마치 바쿠후는 기능이 정지. 모우리(毛利)씨(氏)를 의지하여 쿄우토(京都) 복귀를 노리지만 실패하였다. 후에 출가하여 쇼우산(昌山)이란 이름을 칭했다.
칸파쿠(関白)와 쇼우군(将軍)이라는 위치
[토요토미 칸파쿠(豊臣 関白)]의 위광을 쿄우토(京都) 구석구석까지 알린 - 쥬라쿠테이(聚落第)로 천황을 초대하여 연 잔치의 열기가 여전히 식지 않은 1588년 9월 10일.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오오사카(大坂) 저택에 있었다. 하지만 오전 10시가 되기도 전에 실외의 마당까지 내려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서국(西国)에서 으뜸가는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7월 하순에 첫 상경(上京)하여 한달 정도 쿄우(京)에서의 생활을 즐기다 돌아가는 길에 히데이에에게 초대 받아 같은 저택에 머물고 있던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도 곧바로 문 밖의 다리 위에까지 나가 의관을 가지런히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오전 10시 즈음에 히데이에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칸파쿠]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요시아키라고 하면 종삼위(從三位)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으로 무문(武門)의 최고 권위(權威)였다. 이 해의 정월 13일에 모우리(毛利)씨(氏)의 영국(領國)에서 쿄우(京)로 돌아와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쇼우산(昌山)]이라는 도호(道號)와 [도우케이(道慶)]이라는 법명을 쓰는 것과 동시에 산구우(三宮)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쥰산구우(准三宮))=쥬고우(准后) 1.
그런 요시아키가 히데요시가 방문하는 자리에 예를 갖추고 맞이한 것이다.
어떠한 심경이었을까?
요시아키와 히데요시는 1568년에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기 위한 상경전(上京戰) 때 부터의 관계였지만, 그것은 쇼우군과 오다 가문(織田家)의 일개 부하 장수로서의 히데요시 - 즉 주군(主君)과 배신(陪臣 2)이라는 주종(主從)의 관계에서, 칸파쿠와 쇼우군이라는 동급으로 변하기는 했어도 주종의 관계가 뒤바뀐 것은 아니었던 만큼 주위의 시선은 아무래도 특이하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즈음 요시아키(쇼우산)는 오오사카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한편 예전 머물던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에 따로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히데요시의 방문 같은 행사에 행동을 같이 하고 있었다. 쿄우토(京都) 다이고(醍醐)사(寺) 산보우(三宝)원(院)의 몬제키(門跡 3)인 기엔(義演)에 따르면, 정월에 요시아키가 출가할 때 히데요시에게서 1만석을 하사 받아 오오사카에 저택을 세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무문(武門)의 상징적인 존재로써 토요토미 칸파쿠 정권의 권위를 세우는데 공헌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칸파쿠 히데요시의 방문에 따라 예를 올리는 모습도 그런 역할의 일환으로 자존심 덩어리와 같은 요시아키가 기분 나빠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히데요시와 그의 정권에 권위를 세워주는데 적극적으로 공헌하고 있다는 자부심 쪽이 강했음이 틀림 없다.
너무도서글픈 죽음
확실히 오오사카에 저택을 가지면서부터 요시아키는 당시 토요토미 정권 최대의 군사, 외교적 안건이었던 대륙 침공 계획 등에 남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591년 8월.
쇼우코쿠(相国)사(寺)의 로쿠온(鹿苑)원(院)의 전 원주(院主)인 사이쇼우 죠우타이(西笑 承兌)가 히데요시에게서 [카라이리(唐入り 4)]에 따른 수행을 명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 이 다음 달인 9월 18일 마키노시마(槇島)의 저택을 방문해 온 로쿠온(鹿苑)원(院)의 현(現) 원주(院主) 유우세츠 즈이호(有節 瑞保)에게 전해들은 요시아키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鹿苑日錄].
이 이야기를 들은 요시아키가 갑자기 [속세의 명예심을 드러내 종군(從軍)할 결심](오쿠노 타카히로(奥野 高廣)가 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을 하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이미 예정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다음해인 1592년 정월 5일에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진 명령을 내린 히데요시가 3월 26일을 기해서 쿄우토(京都)를 출발함에 따라 히데요시 본진의 제 2진으로 요시아키도 종군하게 된 것이다.
이 달(3월) 20일에 입경(入京)한 요시아키는 다음 날 로쿠온(鹿苑)원(院)의 남문(南門) 밖에 깃발을 휘날리며 로쿠온원(院)에 들어가 이곳을 주둔지로 삼는 한편 출진을 준비하였다.
26일 출진식에서 요시아키는 금칠을 한 보로(母衣 5)를 등에 멘 차림을 하였고, 금문(禁門)을 통과할 때에는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더욱 눈에 뛰었을 것이다.
총대장인 히데요시는 제 5진이었다. 환송에 나선 고요우제이(後陽成) 텐노우(天皇)의 좌석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예(禮)를 올렸다. 셋케(摂家 6), 신노우케(親王家 7), 몬제키(門跡)들 전부 서서 구경하여 평민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城)에 도착한 것은 4월 25일로 요시아키는 35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성의 외곽에 포진하였다.
오오사카로 되돌아 온 것은 히데요시가 오오사카로 되돌아 옴에 따른 1593년 8월 하순을 지나서라고 보여지는데, 이 원정의 장식물로써의 역할이 끝났는지 그 후의 모습은 확실치 않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597년 8월 28일.
요시아키는 종기를 원인으로 하는 병때문에 20일 가까운 투병 끝에 죽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지금까지 쇼우군이라는 자존심으로 일관해 온 생전과는 달리, 히데요시에게 장례를 주관하도록 명령받은 죠우타이(承兌)가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 8) 토쿠젠인(德善院 –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에게 관과 화장(火葬)하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 목수 두 명을 신청하여, 한 명밖에 허가 받지 못할 정도로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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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도 원이 비싸서....
첫 스캔이라 부족한 것이 많네요.
넓은 아량으로 클릭하면서 봐주세요~
안경쓰고 회의를 주도하는 인물이 하시바 히데요시
잘 모르지만 따라하는 타입이 토쿠가와 이에야스
바로 위에 수박들고 여자같이 생긴 것이 모리 란마루
총리는 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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