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일까?’
네네는 처음엔 그 목록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합(百合)이 검다니 -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너무 괴이했다.
“뭔가의 착오겠죠”
라고 네네는 시녀(侍女)들에게도 말했다. 그녀는 남편인 히데요시[秀吉]가 그러했듯이 세상의 괴이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네네[寧々], [禰々]라고도 쓴다. 네이코[寧子]라고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귀족이
되면서부터였다. 귀족의
여성은, 예를들면 '켄레이몬인 토쿠코[建礼門院 徳子] 1 '식으로 子자가 붙는다. 남편 히데요시가 칸파쿠(関白)가 되었을 때, 칸파쿠의 정실(正室)은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라고 불리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간(世間)에서 그리 불렸다. 그 즈음 궁정의 공식 문서에서는,
[토요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
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해서 그녀 자신에게 어떤
주체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吉이라는 글자가 복스럽고 좋다는 뜻에서 그 글자가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네네가 어떤 글자의 이름으로 쓰여지건 그녀가
종일위(從一位)라는 여성으로써 최고의 위계(位階) 소유자이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가정과 후궁, 여관(女官)들의 총지배자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목록을 헌상한 사람은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政]였다.
나리마사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범죄자였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토박이 가신(家臣)이며, 노부나가[信長]에게 그 무용(武勇)과 강직(剛直)함을 사랑 받아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군의 장수가 되었다.
노부나가 말년에는 호쿠리쿠 탄다이[北陸探題] 2였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막하(幕下)에 배속되어 엣츄우[越中] 일국(一国)을 소유하는 신분이 되었다.
노부나가가 죽어 호쿠리쿠의 시바타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가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웠을 때,
나리마사는 당연하게도 카츠이에 측에 서서 히데요시에게 대항하였다. 단순히 정치상의 소속으로 그렇게 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 인물만큼이나
극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한 옛 오다 가문의 장수도 드물었다.
히데요시는 호쿠리쿠를 제압하고 엣츄우[越中]로 진격해 들어가 나리마사를 항복시켰지만, 이 정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하는
인물의 목숨을 이외로 살려주었다.
세상은 히데요시의 도량에 놀랐는데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나리마사 자신이었다.
‘어째서 내 목숨을 살려준 것인가?’
라는 의문은 나리마사와 같이 단순하고 목이 뻣뻣한 인물에게 있어서는
생애 풀 수 없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보다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자신을 혐오하는 나리마사까지 죽이지 않았다는 평판은
천하로 널리 퍼져 나가,
그것을 전해들은 여러 지역의 대항자(對抗者)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성을 열고 활을 땅에 던지며 복종해 올 것이다. 그런 효과를 히데요시는
기대했다. 이 효과를 더욱
크게 하기 위해서 나리마사에게 엣츄우의 일개 군(郡)을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놀라 자빠졌다. 거기에 이어 큐우슈우[九州] 정복 후, 일본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히고[肥後] 50여만석을 나리마사에게
주었다.
‘어째서 이 정도로 후은(厚恩)을 받는 것인가?’
라고 나리마사는 생각하여, 이 인물 나름대로 겨우 답을 낸 것이 네네의 존재였던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뒤, 나리마사는 잠시 오토기슈우[御伽衆 3]로서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섬기고 있었다. 이 즈음 네네에게도 배알(拜謁)하였고 또한 선물도 보냈다.
‘이 부인(婦人)에게 허술히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나리마사에게 있었다. 일단 패해서 살아남은 인물인 만큼 그런 종류의 감각은
오히려 남들보다도 더 날카로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사(人事)에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신(謀臣)인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나 초창기부터 선봉대장(先鋒大將)인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등이 아닌, 이 키타노만도코로라는 것을 나리마사도 알게
되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나가하마[長浜]의 꼬꼬마 코쇼우[児小姓] 때부터 손수 길러 어렸을 때의 싹수부터
꿰뚫어 보아 일치감치 히데요시에게 추천한 것이 그녀라는 소문도 있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나리마사는 많이 듣고 있었다. 히데요시도 그녀의 인물 감정에는 신용을 하고 있었으며, 항상 그것을 존중하였고 그 의견을
허술히 하지 않았다.
토우키치로우[藤吉郎 4]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토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와
그녀의 합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네는 명랑한 성격에 더구나 거드름 피우지 않았고 조금도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는 부인이었지만,
그러나 단 한가지 버릇이 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되어서도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가문 내의 인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여 인사(人事)에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평가에 사심이 없고 적확(的確)하다는 점에서 히데요시도 그것을
존중하여 때로는 상담하거나 하였다.
자연히 그녀의 위복(威福)과 다정함을 우러르는 무장(武將)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카토우 키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거기에 그녀의
양갓집의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은 그 살롱(salon)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삿사 나리마사가 자신의 기괴할 정도의 영달이 어쩌면 키타노만도코로덕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것도 이런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저 부인은 나 같은 놈에게 호의를?’
이라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았다. 네네의 남성에 대한 호의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어, 궁중에서
사교(社交)가 뛰어난 인물보다도 전쟁터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에 대한 평가가 후했다.
남자의 와일드함과 강직함을 사랑하였고, 예를 들어 그들이 저돌적인 것으로 인하여 실패를
하였다고 하여도 그녀는 오히려 그 실패를 미덕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언젠가 두서너명의 무사(武士)를 '면밀하지 못한 자이다'라는 이유로 추방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듣고 그들의 위해서
여러 번 옹호하여 결국에는 구해 준 적도 있었다.
그녀의 아래에 모이는 무장들의 무리는 이윽고 무단파(武斷派)라는 인상을 세상에 끼치기에 이르는 것도 거슬러올라가면
그녀의 그러한 기분에 의한 것일 것이다.
나리마사는 그런 점에서 자신과 같은 남자가 키타노만도코로의 호감을 얻고
있다는 이유를 알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나리마사는 그녀나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런
점에서도 다소의 경향이 있어,
토요토미 가문에 많이 있는 오우미[近江] 사람들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자신과 같은 오와리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친근감을 보였다. 오와리 서부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히라 촌[比良村] 출신인 삿사 나리마사에 대해서는 - 이것만으로도 네네에게
타인(他人)이라 생각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하였을 것이다. 타테야마[立山]
‘이 호의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
고 나리마사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 인사(人事)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와의
유대(紐帶)를 강하게 해 두는 것이 앞으로 먼
지방에서 생활하는 몸으로써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이 정도로 진귀한 꽃은 없었다. 엣츄우에서조차 검은 백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어, 기껏해야 쿠로베[黒部] 계곡에 사는 사냥꾼이나
타테야마 산의 권현(權現 5)을 존숭(尊崇)하는 수행자들 몇몇이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정도였다.
나리마사는 이 검은 백합을 보내고자 하여, 한때는 자신의 부하이기도 했던 엣츄우 지역의 무사들에게
급사(急使)를 파견하여 그 채집을
의뢰하였다. 진귀한
것이라고는 하여도 현지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에게 부탁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그루를 얻어서는 그것을 통에 넣어
오오사카[大坂]로 운반시켰다. 꽃은 뜨거운 날씨를 싫어하기 때문에
수송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힘이 들었다.
그것이 오오사카에 있는 나리마사 저택에 도착하자 나리마사는 곧바로 그 중 한 송이를 금(金)으로 그림이
그려진 검은 옻칠을 한 통에 꽃꽂이하여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서(秘書)인 늙은 비구니 코우조우스(孝蔵主)에게 보내었다. 코우조우스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두지 않고 곧바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방으로 가지고 가,
그곳의 도코노마(床の間)에 놓았다.
“이것이 편지에 있던 검은 백합인가……”
“므츠지쥬우[陸奥侍従]님은 참으로 친절하시구나”
라고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리마사는 이 당시, 하시바 성[羽柴姓]을 하사 받아 6 므츠노카미[陸奥守]가 되어 지쥬우[侍従]에 임명 받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하시바 므츠지쥬우(羽柴 陸奥侍従)라 통칭되고 있었다.
“오히려 무사(武士)는 이래야 하는 것이죠”
라고 목소리를 적셔서 말했다.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속에 이런 친절함을 가진 인물이야말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하급 무사 가문에서 자라난 그녀의
미의식(美意識)에 걸맞는 무장상(武將像)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히데요시가 총애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우미[近江] 계의 봉행 나부랭이들에게 이렇게 빛과 색깔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속으로 비교해서 더욱더 나리마사라는 인물을 중히 평가하며,
“역시 사람에게 깐깐한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 7님의 눈에 든 사람이구나”
라고 말했다. 거기에 얄밉다고 할지…… 엣츄우[越中]에서 수백 리 길의 산과 강을 오르고 건너게 한, 이 꽃을
단 한 송이만 보낸 나리마사의 생각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노력과 비용 속에서 일편의 와비[侘び 8]를 찾아낸 나리마사는 평소,
“졸자(拙者)는 차(茶)를 모릅니다”
라고 말했으면서도 이것은 다도(茶道)의 극의(極意)가 아닌가?
“세상에 검은 백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겠죠”
이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으면는 생각에, 이 검은 백합을 위한 다회(茶會)를 열고자 그 준비를 명했다. 그녀가 대접해야 하는 주인(=테이슈(亭主))이기는 했지만, 다회를 실제로 운영하는 접대(=시타토리모치(下取持))에는 사카이[堺]의 모즈야[鵙屋]의 젊은 부인이 맡았다. 모즈야의 부인은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딸 '오킨[おきん]'을 말하며,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부인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눈에 복을 받을 수 있어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라고 입을 맞추었다.
후세(後世).
이 다회에는 이야기가 더 추가되었다.
이렇게 채집시킨 것이 아직 오오사카에 도착하기 전에 요도도노는
키타노만도코로가 주최한 다회의 손님이 되었다. 다른 손님들은 한 송이의 검은 백합에 이 세상의 신비에 놀라움을 보여
주었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만은 예외였다.
조용히 그것을 지긋이 본 후 형식적으로만 찬미하였다. 이 담담한 태도가 키타노만도코로를 의아케
하였다. 원래 둔감한
것일지도 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요도도노는 검은 백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해 하지 않는 것, 그 둘 중에 하나였다.
그로부터 3일 후.
일이 명확해졌다. 요도도노가 사는 니노마루[二の丸 9]의 긴 복도(長廊下)에서 꽃꽂이에 쓸 꽃을 채집하는 행사가 열려
키타노만도코로도 초대되었다.
그녀가 코우조우스를 데려 가자, 3일 전에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고 그토록 떠들썩하게
다회까지 열게 한 그 검은 백합이 다른 마타리 같은 잡초와 함께
바구니에 마구 담겨 주변을 장식하는 꽃으로 꽂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송이나 두 송이가 아닌 20, 30이나 아무렇게나
꽂혀가며,
- 검은 백합 같은 것은 진귀한 꽃도 아니다.
고 키타노만도코로의 무지함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이런 창피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그녀의
굴욕은 공개되어 버렸다.
이 문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들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요도도노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검은 백합을 헌상하여
이런 굴욕을 맛보게 한 삿사 나리마사에게까지 증오하게 되었다. 곧바로 히데요시를 움직여 나리마사에게서 새로운
영지(領地)인 히고[肥後]를 빼앗아 결국에는 셋츠[摂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할복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고 한다.
이 이야기를 후세 후세 사람들은 믿었지만, 그러나 사실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나리마사가
영지(領地)를 몰수당한 1587년에는 아직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나 되지 않았나 하는 시기이며, 저 만큼의 기획을 짜서 키타노만도코로와 대항할 정도의
위세(威勢)는 당연하게도 아직 가지지
못했다.
또한 삿사 나리마사의 실각(失脚)은 다른 사건과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으로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빙자하기에는 너무 유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요도도노라는 두 규벌(閨閥)의 다툼이 후에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와 운명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간다는 사실을 – 사실 이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높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도 또 없을 것이다.
-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딸로 부친의 의향에 따라 황실에 들어가 안토쿠 텐노우[安徳天皇]를 낳았다. 헤이케[平家] 전성기의 상징적 인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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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의 말 상대 [본문으로]
- 히데요시가 미관말직일 때의 이름 [본문으로]
- 일본은 산을 신으로 여기는 산악신앙이 있어, 타테야마 산을 이자나키[伊邪那岐]의 화신이라 여겼다. 또한 일본의 신들을 불교의 부처님들의 화신이라는 신불습합(神仏習合) 사상에 따라 이자나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이라고도 여겼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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