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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다죠스이'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08.03.03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1- (8)
  2. 2008.01.20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1- (13)
  3. 2007.12.30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4- (13)
  4. 2007.12.25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3- (5)
  5. 2007.12.22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2- (3)
一.

검은 백합 한 송이
라는 편지가 네네()에게 전해진 것은 1587년의 한창 더울 때였다.
근시일 내에 보내겠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낸이는 말하고 있었다.
 
정말일까?’
 
네네는 처음엔 그 목록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합(百合)이 검다니 - 그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너무 괴이했다.

 뭔가의 착오겠죠

 라고 네네는 시녀(侍女)들에게도 말했다. 그녀는 남편인 히데요시[秀吉]가 그러했듯이 세상의 괴이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네네[々], [々]라고도 쓴다. 네이코[寧子]라고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귀족이 되면서부터였다. 귀족의 여성은, 예를들면 '켄레이몬인 토쿠[門院 ][각주:1] '식으로 子자가 붙는다. 남편 히데요시가 칸파쿠()가 되었을 때, 칸파쿠의 정실(正室)은 키타노만도코로[政所]라고 불리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세간(世間)에서 그리 불렸다. 그 즈음 궁정의 공식 문서에서는,
 
[
토요토미노 요시코[豊臣 吉子]]
 
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에 대해서 그녀 자신에게 어떤 주체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吉이라는 글자가 복스럽고 좋다는 뜻에서 그 글자가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네네가 어떤 글자의 이름으로 쓰여지건 그녀가 종일위(從一位)라는 여성으로써 최고의 위계(位階) 소유자이며,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가정과 후궁, 여관(女官)들의 총지배자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목록을 헌상한 사람은 삿사 나리마사[ 成政]였다.
 
나리마사는 토요토미 가문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범죄자였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토박이 가신(家臣)이며, 노부나가[信長]에게 그 무용(武勇)과 강직(剛直)함을 사랑 받아 계속해서 승진을 거듭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군의 장수가 되었다. 노부나가 말년에는 호쿠리쿠 탄다이[北陸探題[각주:2]]였던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막하(幕下)에 배속되어 엣츄우[越中] 일국()을 소유하는 신분이 되었다.
 
노부나가가 죽어 호쿠리쿠의 시바타 카츠이에와 히데요시가 그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싸웠을 때, 나리마사는 당연하게도 카츠이에 측에 서서 히데요시에게 대항하였다. 단순히 정치상의 소속으로 그렇게 되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 인물만큼이나 극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한 옛 오다 가문의 장수도 드물었다.

 히데요시는 호쿠리쿠를 제압하고 엣츄우[越中]로 진격해 들어가 나리마사를 항복시켰지만, 이 정도로 히데요시를 싫어하는 인물의 목숨을 이외로 살려주었다. 세상은 히데요시의 도량에 놀랐는데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나리마사 자신이었다.
 
어째서 내 목숨을 살려준 것인가?’
 
라는 의문은 나리마사와 같이 단순하고 목이 뻣뻣한 인물에게 있어서는 생애 풀 수 없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보다도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였다. 자신을 혐오하는 나리마사까지 죽이지 않았다는 평판은 천하로 널리 퍼져 나가, 그것을 전해들은 여러 지역의 대항자(對抗者)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성을 열고 활을 땅에 던지며 복종해 올 것이다. 그런 효과를 히데요시는 기대했다. 이 효과를 더욱 크게 하기 위해서 나리마사에게 엣츄우의 일개 군()을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놀라 자빠졌다. 거기에 이어 큐우슈우[九州] 정복 후, 일본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히고[肥後] 50여만석을 나리마사에게 주었다.
 
어째서 이 정도로 후은(厚恩)을 받는 것인가?’
 
라고 나리마사는 생각하여, 이 인물 나름대로 겨우 답을 낸 것이 네네의 존재였던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뒤, 나리마사는 잠시 오토기슈우[御伽衆[각주:3]]로서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섬기고 있었다. 이 즈음 네네에게도 배알(拜謁)하였고 또한 선물도 보냈다.
 
이 부인(婦人)에게 허술히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이 나리마사에게 있었다. 일단 패해서 살아남은 인물인 만큼 그런 종류의 감각은 오히려 남들보다도 더 날카로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사(人事)에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모신(謀臣)쿠로다 죠스이[田 如水]나 초창기부터 선봉대장(先鋒大將)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 등이 아닌, 이 키타노만도코로라는 것을 나리마사도 알게 되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나가하마[長浜]의 꼬꼬마 코쇼우[小姓] 때부터 손수 길러 어렸을 때의 싹수부터 꿰뚫어 보아 일치감치 히데요시에게 추천한 것이 그녀라는 소문도 있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나리마사는 많이 듣고 있었다. 히데요시도 그녀의 인물 감정에는 신용을 하고 있었으며, 항상 그것을 존중하였고 그 의견을 허술히 하지 않았다. 토우키치로우[藤吉[각주:4]]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토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와 그녀의 합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네네는 명랑한 성격에 더구나 거드름 피우지 않았고 조금도 권세를 휘두르는 일 없는 부인이었지만, 그러나 단 한가지 버릇이 있다면 키타노만도코로가 되어서도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가문 내의 인물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좋아하여 인사(人事)에 끼어든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평가에 사심이 없고 적확(的確)하다는 점에서 히데요시도 그것을 존중하여 때로는 상담하거나 하였다. 자연히 그녀의 위복(威福)과 다정함을 우러르는 무장(武將)의 무리가 형성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카토우 키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거기에 그녀의 양갓집의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 요시나가[幸長] 부자 등은 그 살롱(salon)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삿사 나리마사가 자신의 기괴할 정도의 영달이 어쩌면 키타노만도코로덕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것도 이런 토요토미 가문이었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저 부인은 나 같은 놈에게 호의를?’
 
이라는 이유도 어렴풋이 알았다. 네네의 남성에 대한 호의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어, 궁중에서 사교(社交)가 뛰어난 인물보다도 전쟁터에서 무용이 뛰어난 자에 대한 평가가 후했다. 남자의 와일드함과 강직함을 사랑하였고, 예를 들어 그들이 저돌적인 것으로 인하여 실패를 하였다고 하여도 그녀는 오히려 그 실패를 미덕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언젠가 두서너명의 무사(武士) '면밀하지 못한 자이다'라는 이유로 추방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듣고 그들의 위해서 여러 번 옹호하여 결국에는 구해 준 적도 있었다.
 
그녀의 아래에 모이는 무장들의 무리는 이윽고 무단파(武斷派)라는 인상을 세상에 끼치기에 이르는 것도 거슬러올라가면 그녀의 그러한 기분에 의한 것일 것이다.

 나리마사는 그런 점에서 자신과 같은 남자가 키타노만도코로의 호감을 얻고 있다는 이유를 알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나리마사는 그녀나 히데요시와 같은 오와리[尾張]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런 점에서도 다소의 경향이 있어, 토요토미 가문에 많이 있는 오우[近江] 사람들에 대해서는 겉으로만 대하는 태도를 취하였고 자신과 같은 오와리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친근감을 보였다. 오와리 서부 카스가이 군[春日井郡] 히라 촌[比良村] 출신인 삿사 나리마사에 대해서는 - 이것만으로도 네네에게 타인(他人)이라 생각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하였을 것이다.
 
이 호의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
 
고 나리마사는 생각했다.
 
이런 경우 인사(人事)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갖고 있는 키타노만도코로와의 유대(紐帶)를 강하게 해 두는 것이 앞으로 먼 지방에서 생활하는 몸으로써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보내야 좋을지에 대해서 나리마사는 곤혹해 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물욕(物慾)이 없는 것에 더해 지금의 신분이라면 무엇을 보내건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을 것이다. 깊게 생각한 끝에 나리마사는 자신이 예전에 지배하고 있던 엣츄우[越中]의 명산(名山) 타테야마 산[立山]의 높은 곳에 검은 백합이 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진귀한 꽃은 없었다. 엣츄우에서조차 검은 백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어, 기껏해야 쿠로베[部] 계곡에 사는 사냥꾼이나 타테야마 산의 권현(權現[각주:5])을 존숭(尊崇)하는 수행자들 몇몇이 그것을 보았다고 하는 정도였다. 나리마사는 이 검은 백합을 보내고자 하여, 한때는 자신의 부하이기도 했던 엣츄우 지역의 무사들에게 급사(急使)를 파견하여 그 채집을 의뢰하였다. 진귀한 것이라고는 하여도 현지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에게 부탁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그루를 얻어서는 그것을 통에 넣어 오오사카[大坂]로 운반시켰다. 꽃은 뜨거운 날씨를 싫어하기 때문에 수송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힘이 들었다. 그것이 오오사카에 있는 나리마사 저택에 도착하자 나리마사는 곧바로 그 중 한 송이를 금(金)으로 그림이 그려진 검은 옻칠을 한 통에 꽃꽂이하여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서(秘書)인 늙은 비구니 코우조우스()에게 보내었다. 코우조우스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두지 않고 곧바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방으로 가지고 가, 그곳의 도코노마(床の間)에 놓았다.

 이것이 편지에 있던 검은 백합인가……”

키타노만도코로는 말을 입에 머금은 채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목을 쭈욱 내밀을 수 있을 만큼 내밀어 꽃에 몰입되었다. 검다……기 보다 엄밀히 말해 검보라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했던 칠흑의 꽃잎보다도 그 자연스런 색조가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빛 속에서는 선명하게 검었다. 곧이어 키타노만도코로는 통통한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므츠지쥬우[従]님은 참으로 친절하시구나

 라고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나리마사는 이 당시, 하시바 성[羽柴姓]을 하사 받아[각주:6] 므츠노카미[守]가 되어 지쥬우[従]에 임명 받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하시바 므츠지쥬우(羽柴 陸)라 통칭되고 있었다.

 오히려 무사(武士)는 이래야 하는 것이죠

 라고 목소리를 적셔서 말했다. 강직하고 굽힘이 없는 속에 이런 친절함을 가진 인물이야말로 오다 가문[織田家]의 하급 무사 가문에서 자라난 그녀의 미의식(美意識)에 걸맞는 무장상(武將像)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달리 히데요시가 총애하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오우미[近江] 계의 봉행 나부랭이들에게 이렇게 빛과 색깔을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 속으로 비교해서 더욱더 나리마사라는 인물을 중히 평가하며,

 역시 사람에게 깐깐한 오다 우다이진[織田 右大臣[각주:7]]님의 눈에 든 사람이구나

 라고 말했다. 거기에 얄밉다고 할지…… 엣츄우[越中]에서 수백 리 길의 산과 강을 오르고 건너게 한, 이 꽃을 단 한 송이만 보낸 나리마사의 생각이었다. 그 터무니없는 노력과 비용 속에서 일편의 와비[[각주:8]]를 찾아낸 나리마사는 평소,

 졸자(拙者)는 차()를 모릅니다

 라고 말했으면서도 이것은 다도(茶道)의 극의(極意)가 아닌가?

 세상에 검은 백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겠죠

 이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으면는 생각에, 이 검은 백합을 위한 다회(茶會)를 열고자 그 준비를 명했다. 그녀가 대접해야 하는 주인(=테이슈(亭主))이기는 했지만, 다회를 실제로 운영하는 접대(=시타토리모치(下取持))에는 사카이[]의 모즈야[屋]의 젊은 부인이 맡았다. 모즈야의 부인은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딸 '오킨[おきん]'을 말하며,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부인들에게 다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다회는 성공하여 큰 평판을 얻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후궁에 있는 귀부인(貴婦人)들로 당연히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부인들은 모두 이 높은 곳의 눈에서만 핀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에나 나오는 꽃에 감탄의 목소리를 내며 약속이라도 한 듯,

 눈에 복을 받을 수 있어 일생의 영광이옵니다

 라고 입을 맞추었다.

 후세(後世).
 
이 다회에는 이야기가 더 추가되었다.
 
이 이야기에는 요도도노[淀殿]를 등장시키고 있다. 요도도노도 이 다회에 손님으로 초대되었는데 미리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거기에 한 번 더 궁리하여 자신도 수하를 엣츄우[越中]에 파견하여 검은 백합을 채집시켰다. 엣츄우[越中]는 삿사 나리마사 다음의 다이묘우[大名]를 두지 않고 토요토미 가문의 직할령으로 삼고 있었다. 직할령의 지배는 오오사카[大坂]의 봉행(奉行)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 봉행들이야 말로 이시다 미츠나리,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등 요도도노를 보호자로 우러르고 있는 오우미[近江]계의 문관(文官)들로, 이 점 그녀에게 있어서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렇게 채집시킨 것이 아직 오오사카에 도착하기 전에 요도도노는 키타노만도코로가 주최한 다회의 손님이 되었다. 다른 손님들은 한 송이의 검은 백합에 이 세상의 신비에 놀라움을 보여 주었지만, 그러나 요도도노만은 예외였다.
 
조용히 그것을 지긋이 본 후 형식적으로만 찬미하였다. 이 담담한 태도가 키타노만도코로를 의아케 하였다. 원래 둔감한 것일지도 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요도도노는 검은 백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해 하지 않는 것, 그 둘 중에 하나였다.

 그로부터 3일 후.
 
일이 명확해졌다. 요도도노가 사는 니노마루[[각주:9]]의 긴 복도(長廊下)에서 꽃꽂이에 쓸 꽃을 채집하는 행사가 열려 키타노만도코로도 초대되었다. 그녀가 코우조우스를 데려 가자, 3일 전에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고 그토록 떠들썩하게 다회까지 열게 한 그 검은 백합이 다른 마타리 같은 잡초와 함께 바구니에 마구 담겨 주변을 장식하는 꽃으로 꽂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송이나 두 송이가 아닌 20, 30이나 아무렇게나 꽂혀가며,
 
-
검은 백합 같은 것은 진귀한 꽃도 아니다.
 
고 키타노만도코로의 무지함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이런 창피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그녀의 굴욕은 공개되어 버렸다. 이 문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여성들을 지배하는 사람으로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요도도노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검은 백합을 헌상하여 이런 굴욕을 맛보게 한 삿사 나리마사에게까지 증오하게 되었다. 곧바로 히데요시를 움직여 나리마사에게서 새로운 영지(領地)인 히고[肥後]를 빼앗아 결국에는 셋츠[
津] 아마가사키[尼崎]에서 할복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고 한다.
 
이 이야기를 후세 후세 사람들은 믿었지만, 그러나 사실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나리마사가 영지(領地)를 몰수당한 1587년에는 아직 요도도노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나 되지 않았나 하는 시기이며, 저 만큼의 기획을 짜서 키타노만도코로와 대항할 정도의 위세(威勢)는 당연하게도 아직 가지지 못했다.
 
또한 삿사 나리마사의 실각(失脚)은 다른 사건과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으로 검은 백합의 이야기를 빙자하기에는 너무 유치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요도도노라는 두 규벌(閨閥)의 다툼이 후에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와 운명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워간다는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높은 함축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도 또 없을 것이다.

  1.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의 딸로 부친의 의향에 따라 황실에 들어가 안토쿠 텐노우[安徳天皇]를 낳았다. 헤이케[平家] 전성기의 상징적 인물. [본문으로]
  2. '탄다이’란 그 지역의 군사, 정치, 판결권을 소유한 총책임하는 기관 혹은 인물. [본문으로]
  3. 히데요시의 말 상대 [본문으로]
  4. 히데요시가 미관말직일 때의 이름 [본문으로]
  5. 일본은 산을 신으로 여기는 산악신앙이 있어, 타테야마 산을 이자나키[伊邪那岐]의 화신이라 여겼다. 또한 일본의 신들을 불교의 부처님들의 화신이라는 신불습합(神仏習合) 사상에 따라 이자나키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이라고도 여겼다. [본문으로]
  6. 히데요시가 토요토미 씨[豊臣氏]를 칭하기 이전에 사용했던 성(姓). 유력한 인물들이나 공이 많았던 부하들에게 이 하시바 성을 하사하여 일문(一門)의 효과를 기대하였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지칭. [본문으로]
  8. 심플함 속에서 맑고 한적한 정취 [본문으로]
  9. 두 번째 성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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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秀吉]가 후시미 성[伏見城]에 있었던 어느 날. 대청(大廳)에 가기 위해서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도중에 방이 하나 있어 거기에 다섯 자루의 칼이 놓여져 있었다. 히데요시는 발을 멈추고,

 

 누구의 것인가 맞추어 볼까?”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물론 놓여져 있는 방을 보아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 가장 고귀(高貴)한 다이묘우[大名]들의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오늘 등성(登城)하고 있던 얼굴에서 추측한다면,

 

 나이다이진[大臣]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다이나곤[大納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츄우나곤[中納言]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츄우나곤[中納言]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浮田) 秀家]

 츄우나곤[中納言]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일 것이다. 이 다섯 명은 히데요시의 말년에 토요토미 가문의 [오대로(五大老)]가 되었으며,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는 다섯 명의 합의 하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체제로 되었다. 이 체제는 세키가하라(ヶ原) 일전(一戰)까지 이어졌다.

 

 ? 어느 칼이 누구의 것인지 맞추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승려 출신으로 행정관[奉行]인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가 짐짓 놀라는 척을 해 보였다.

 

 그럼 맞추어 보지

 

 라며 히데요시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그 칼의 주인을 맞추었는데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겡이 역시 놀랐다.

 

 어떻게 맞추셨는지요?”

 

 ~ 별 거 아니지

 

 하며 히데요시는 설명을 하였다.

 

 우선 에도님[殿[각주:1]]의 칼을 보게. 누가 보아도 특색이 없는 것이 특색이지. 에도님은 참된 용기를 가지신 분으로 한 자루 칼에 의지하려는 졸병의 마음을 갖고 계시지 않으시지. 그렇다면 저것이다.”

 

 카가[加賀 마에다 토시이에]는 마타자에몬[又左衛門]이라 불렸던 옛날부터 굉장한 무()를 지닌 자로, 선봉(先鋒), 신가리[殿]의 무공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저 칼자루에 가죽을 감아 놓은 실용적인 칼이야말로 그의 것일 것이다.”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망부(亡父) 켄신[謙信]이 남긴 가풍(家風)에 따라 마상(馬上) 검기(劍技)를 배웠기에 자연히 장검(長劍)을 좋아한다. 저 날이 긴 칼은 그의 것이 아니면 안 되지.”

 

 아키[安芸] 츄우나곤(모우리 테루모토)은 몸을 꾸미는데 이풍(異風)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저 특색있는 장식을 한 칼이 그의 것임에 틀림이 없다.”

 

 비젠[備前] 츄우나곤(우키타 히데이에)……”

 

 하고 손가락을 쳐들었다. 그 중 가장 나이 어리고 더구나 히데요시 자신이 양아버지 명목으로 되어있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칼을 가리키며,

 

 히데이에는 그 성격 상 무엇이든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저 황금을 박아 넣은 칼이야 말로 그 아이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영묘(靈妙)는 이를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라며 마에다 겡이는 이 이야기를 성안에 퍼트렸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내세울 만한 일도 아니었다. 인간과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것에 대해서는 역사상 비할 데 없는 천재였으며, 그렇기에 오다 가문[織田]의 짚신담당에서부터 출세해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천하를 손에 넣은 뒤 말년엔 좀 노망끼가 들었지만 그러나 이 정도의 놀이라면 씨름꾼이 세 살배기 어린애랑 팔씨름하는 것보다도 쉬웠다.

 

 히데요시는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이 즈음 그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후시미 저택에 놀러 가 차를 마시고 정원을 거닐며 심어진 동백의 꽃 핀 모양을 칭찬하거나 한 후,

 

 '노인분들~ 노인분들~'

 

 하고 박수를 쳐 정원으로 이어진 시라스[白洲]에 무릎 꿇고 있던 우키타 가문[宇喜多家]의 가로(家老)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키타 가문은 현재의 오카야마 현[岡山県]에서 효우고 현[兵庫県] 일부에 걸쳐 세토 내해[瀬戸内] 연안(沿岸) 57 4천석을 영유(領有)하고 있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였기에 가로의 숫자도 많았다. 오사후네 키이노카미[長船 紀伊守], 토가와 히고노카미[ 肥後守], 아카시 카몬[明石 掃部], 하나부사 시마노카미[花房 志摩守], 오카 에치젠[岡 越前] 10명이 넘었다.

 

 히데이에를 부탁한다~ 히데이에는 하치로우[郎]라 불렸던 아이였을 때부터 키운 내 자식이다. 거듭거듭 부탁한다~”

 

 라고 말하고, 곧이어 응접실[書院]로 돌아가던 중 뜬금없이 차석(次席) 가로인 토가와 히고노카히 타카야스[戸川 肥後守 達安]를 불러,

 

 날 업고 가시게

 

 라고 말했다. 토가와는 우키타 가문전대(前代)나오이에[直家] 때부터 산요우도우[山陽道]에 무명(武名)을 떨쳤던 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 등짝이 굉장히 넓었다. 그런 그가 몸을 낮추고 히데요시를 업고 털이 북실북실한 정강이로 계단을 올라 힘 안들이고 응접실 앞 복도까지 갔다. 왜소한 체격의 히데요시는 기뻐하며,

 

 이거 참 편하구먼

 

 하고 신이 나 떠들었는데, 이것도 히데요시 정치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키타 가문의 가로들은 자아(自我)가 강한 사람들이 많아 자기 실력을 내세워 어린 주군인 히데이에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가로 무리도 파벌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토가와 히고노카미 타카야스는 말하자면 야당(野黨)영수(領袖)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이 인물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그런 타카야스를 자신과 친하게 하고, 그 정()으로 히데이에를 섬기게 하여 우키타 가문이 융화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치로우(히데이에)만큼 귀여운 녀석은 없지

 

 라고 히데이에가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는 남들에게 자주 말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혈통이나 처의 혈통에서 양자(養子), 유자(猶子[각주:2])를 많이 만들었지만 이 피가 이어지지 않은 히데이에를 가장 사랑하고 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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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가진 가장 곤란한 점은 극단적으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혈통이 좋고 더구나 얼굴이 예쁘게 태어난 여자를 보면, 그녀가 아무리 유부녀라도 한번은 다가가 말이라도 걸어보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의 장수로 츄우고쿠[]의 모우리 씨[毛利氏]를 공략 중일 때의 이야기이다.
 
이 당시, 히데요시의 본영(本營)히메지 성[]이었다. 적인 모우리 씨히로시마 성[]이었다. 그 중간인 오카야마 성[岡山城]에 히데이에의 망부(亡父)인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가 있었다. 나오이에는 비젠[備前]미마사카[美作]를 가진 다이묘우[大名]로 처음엔 모우리 측에 서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다 측에 붙는 편이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우리 씨산요우, 산인[山陰] 10개 지역[]의 거대 영주(領主)라고는 하여도 석고로 따지면 110만석이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오다 씨킨키[近畿]를 중심으로 이미 30개지역() 이상을 제압하여 300만석이 넘는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량으로 말하면 오다 씨의 승리일 것이다.

 나오이에는 계산이 빨랐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계산에 그 만큼 충실한 사람도 없었다.

 

 우키타 가문은 산요우[山陽]의 명족(名族)이라고는 하지만, 나오이에가 어렸을 때는 몰락해 있었기에 나오이에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가문을 일으켰다. 젊었을 즈음 비젠[備前]의 다이묘우[大名]였던 우라가미 가문[浦上家] 섬기며 남몰래 뜻을 세워, 우라가미 가문의 세력가들을 계속해서 모살(謀殺)하여 결국에는 우라가미 가문의 땅을 빼앗았다. 이 정도로 악랄하고 집요한 음모가(陰謀家)는 이 시대에도 드물었다. 풍운(風雲) 속에서 기어올라온 신흥 다이묘우[大名]라고는 하여도, 그가 일생 동안 해본 전투다운 전투는 한 번밖에 없었으며 모두 치밀하기 짝이 없는 음모를 펼쳐, 필요하면 주군(主君)이건, 주군의 가문이건, 은인(恩人)이건, 처의 부친이건, 친척이건 구별 없이 죽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 나오이에와 함께 행동을 해 온 동생 타다이에[忠家]도 나오이에가 죽은 후,

 

 형만큼 무서운 사람은 없었다. 날 귀여워해 주긴 했지만 원래 속이 검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때문에 나는 항상 형과 만날 때면 반드시 옷 안에 사슬갑옷[鎖帷子]을 입고 갔다

 

 라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결국 나오이에는 오다 가문으로 넘어왔다. 실무(實務)상 오다 가문의 사령관인 히데요시를 통해서였다. 이런 그들을 중간에서 알선을 한 것이 나오이에의 영지(領地) 출신으로 사카이[] 상인인 코니시 쥬토쿠[小西 寿徳], 야쿠로우[弥九朗] 부자(父子), 아들인 야쿠로우는 이 교섭 중에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후에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어 '코니시 셋츠노카미 유키나가[小西 津守 行長]'라 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은 본편과 그다지 관련이 있지 않다.

 

 이 밀약의 인질로, 나오이에는 자신의 아들 히데이에(당시 하치로우[])를 히메지의 히데요시에게로 보냈다. 하치로우의 나이 8살 때였다. 히데요시는 히메지 성내에서 이 어린이와 대면(對面)한 후, 그 용모(容貌)가 너무도 아름다운 것에 놀라 함께 온 우키타 가문의 가로에게,

 

 이 하치로우님은 아버님을 닮으신건가? 아니면 어머님을 닮으신건가?”

 

 라고 물었다. 히데요시는 나오이에와 아직 만난 적은 없지만 나오이에가 어렸을 적에는 주군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 宗景]남색(男色) 관계를 맺어 출세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남이었다. 그러나,

 

 글쎄요……”

 

 라고 가로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무문(武門)의 남자 아이는 모친을 닮았다는 것보다도 부친을 닮은 편이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아쉽게도 하치로우는 나오이에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모친과 닮았다.

 

 황송하오나…… 모친과 닮으셨습니다.”

 

 라고 말하자 히데요시는 급빵끗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황송할 게 뭐가 있나? 그렇겠지…… 그럴 거다. 그 어머님도 저 도련님을 보건대 필시 아름다운 분이실 것이다

 

 하치로우는 오우미[近江] 아즈치 성[安土]에 있는 노부나가[信長]에게로 보내졌다. 하치로우는 둘째 아들이었지만 장남인 요타로우 모토이에[ 基家]가 전사(戰死)하여 우키타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기에 인질로써의 가치는 높았다. 아즈치 성의 노부나가도 저 권모가(權謀家)인 나오이에가 이 하치로우를 인질로 받친 것을 이외로 생각하여 그 성의(誠意)에 만족했다. 더구나 하치로우는 미동(美童)이었기에 부친뿐만 아니라 이 소년에게도 호의를 가졌다.

 

 비젠[備前]에서 온 저 아이. 맘에 드는구나. 각별히 잘 대해줘라

 

 라고 노부나가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하치로우는 소년일 때부터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밝아 1581년이 되었다.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에 있던 나오이에가 죽을 병에 걸렸다. 이미 나이는 50을 넘고 있었다. 쇠약한 상태로 보건대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이 의사의 견해였다. 그가 병에 걸렸다는 것은 모우리 씨를 상대하는 전략상 깊숙이 숨겨졌지만, 그러나 히메지 성에 있던 동맹자 히데요시에게만은 비밀리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놀랐다.

 

 나오이에가 죽는다고? 죽지 않게 어떻게든 해라

 

 고 몇 번이나 말하며 마음 속 깊이 그 불행을 탄식했다. ()이 깊은 것은 히데요시의 특성이었고, 더할 나위 없이 친절했으며 남을 먼저 생각했다. 그런 특성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따랐고 안심하며 자신의 미래를 맡겼다. 간악무쌍(奸惡無雙)하다는 우키타 나오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을 앞둔 나오이에의 바램은,

 

 숨이 있을 때 한번 하시바[羽柴]님을 만나 하치로우의 앞날을 부탁하고 싶다

 

 라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승낙했다. 히데요시의 측근들은 걱정했다. 나오이에는 유명한 모살(謀殺)의 명인(名人)으로 꾀병을 핑계삼아 히데요시를 오카야마 성으로 불러 히데요시가 가면 어디에 칼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지만, 총명한 히데요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지나친 생각이다. 저건 나오이에의 본심이지.

 라고 히데요시는 보았다. 거기에 오다 가문의 일개 무장에 지나지 않는 자기를 죽인다고 해서 나오이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카야마 성에 갈 준비를 하였다. 이런 시세(時勢)에, 이제 막 동맹자가 된 가문의 성에 스스로 간 예는 전무(全無)에 가까웠지만, 히데요시는 그것을 굳이 그렇게 하였다. 이 대책 없는 친절함이야 말로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자산인 것을 히데요시는 잘 알고 있었다. 친절은 적당히 하는 것 보다 한층 더 철저히 하는 편이 좋은 것도 이 인물은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아즈치의 노부나가에게 부탁하여, 나오이에의 외동아들 하치로우를 데려가기로 하였다.

 

 허허~ 이거 이거~”

 

 하고 모신(謀臣) 쿠로다 칸베에[ 官兵衛]조차도 이 대담함에는 눈이 휘둥그래해 졌다. 인질과 함께 오카야마 성을 방문하다니, 나오이에가 그럴 생각이 있다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오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히데요시에게는 이런 모험을 하지 않으면 이 난세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그것이 히데요시의 원칙이었기에, 칸베에의 아는 체하는 간언(諫言)은 당연히 물리쳤다. 물론 이 목숨을 건 승부처에서 하치로우의 모친에 대해서는 절세의 미녀라는 모친에 대한 것 등은 히데요시의 뇌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호색(好色)은 즐기는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고 사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1.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에야스의 본거지가 에도에 있었기에 이렇게 불렸다. [본문으로]
  2. 양자이긴 하지만 성(姓)은 바꾸지 않아도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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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를 보내는 측인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히데아키를 위해서 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였다. 우선 양아버지인 타카카게[隆景]에 대한 답례로써 빈고[備後] 미하라 성[三原城] 3만석을 주었다. 은거소(居所)로써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 끼기 전에 빨리.
 
라는 식으로, 히데요시는 일이 결정된지 3개월째가 되자 히데아키를 타카카게가 머물고 있던 빈고 미하라 성[三原城]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이 젊은이에게 될 수 있는 한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부속 가로[付家老]도 군사(軍事)에 뛰어난 다이묘우[大名] 급 부하를 둘 골라 히데아키의 무게감을 더하게 하였다. 히데아키 본인은 단지 남이 깔아 준 궤도에 타고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미하라 성에서 당주가 되기 위한 여러 의식, 행사가 끝났다. 타카카게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집안의 어른다운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오래된 가신(家臣)들은 그런 타카카게의 표정에서 씁쓸한 그림자를 찾아내어 남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저 좆병진 때문에!’
 라는 식으로 뒷담화를 하는 자도 있었으며, 성 밑에 있는 쿄우신 사[真寺][각주:1]장노(長老) 기타츠[義達] 등도 히데아키를 배알(拜謁)한 후 몰래 일기에 적었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 가문 멸망의 조짐인가? 슬프도다 슬퍼

 1597 6 12. 
 
타카카게는 66세로 죽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영토는 치쿠젠[筑前]과 그 밖의 것을 포함하여 52 2500석이라는 큰 영지(領地)였다. 그것이 히데아키의 것이 되었다.

 상속한 후 2차 조선 침공[각주:2]이 발령되어 히데아키는 새로운 운명에 태워졌다. 원수(元帥 = 총대장)에 임명된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외정군(外征軍)일 경우 순수하게 군사적으로만 따지면, 총사령관은 토요토미 가문필두(筆頭) 다이묘우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등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위대한 인물을 외정군 총사령관으로 만들면 전쟁터에서 외정군을 장악하여, 인망을 얻고, 명성을 얻어, 그 때문에 개선(凱旋) 후 국내 정치 체재를 변동시킬 위험이 있었다.
 하기는 당초 이에야스라는 안()도 조금은 나왔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찍이,

 졸자가 있는 한 주군(히데요시)에게 갑옷을 입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원정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겠다는…… 이것은 말하자면 이에야스의 아부(阿附)였지만, 그런 척을 하였다. 이번 해외 원정에 관해서 이에야스는 다른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그랬던 것처럼 속으론 반대하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적어도 한번 정도 사령관이 되겠다는 물밑 협상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이에야스의 가신 중 하나가 그런 식의 말을 하자, 이에야스는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삐쳐서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바다를 건너면 하코네[箱根[각주:3]]는 누가 지킨단 말이더냐?”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 조금 전, 아이즈[津] 91만 여석의 다이묘우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이 조선 출병 계획을 듣고,

 원숭이 녀석! 죽을 장소를 잃어 미쳤구나

 라고 측근에게 내뱉듯이 말했다. 이것이 대부분의 다이묘우가 맘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외정은 히데요시가 자신의 명예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것으로, 제후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1차 조선 침공[각주:4]으로 제후들의 영내(領內)는 피폐했다. 지금도 그로 인해 국고(國庫)가 비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가문의 인기는 이로 인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왕년의 자기자신과는 별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정세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고, 전쟁터에 가지 않은 제후들에겐 인부와 돈을 염출(捻出)시켜, 후시미[伏見]의 다른 장소에 대규모 축성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축성은 군사상의 이유가 아니라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아직 아기에 지나지 않는 히데요리[頼]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후시미 성[伏見城]에 산다는, 말하자면 팔불출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즈음부터의 히데요시는 어떤 것을 생각하건, 모든 것이 히데요리를 위해서라는 것이 생각의 출발점이 되어 있었다[각주:5]. 원숭이놈은 미쳤다고 가모우 우지사토가 혀를 찬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여러 불운 중의 하나가, 이러한 정세 속에서 원정군의 사령관이 된 것을 포함해도 좋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이묘우[大名] 42, 총 인원 16 3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후방인 부산(釜山)에 사령부를 두었다. 보좌역으로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함께 하였다.
 선봉은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였으며, 항상 우세를 점하기는 했지만 1차때와는 달리 사기가 오르질 않았고, 각 장수들 간에도 연락과 규율이 흐트러져, 위로는 다이묘우[大名] 아래로는 인부에 이르기까지 염전(厭戰) 기운이 팽배하여,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를 하였다.
 이런 전쟁터의 상황은 파견된 감찰(監察官)들에게서 곧바로 후시미[伏見]로 보고되었다. 이를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받아 정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1차 원정 때의 감찰관[메츠케(目付)]은 미츠나리였으며, 그는 그 검단(檢斷)적인 성격을 노골적으로 발휘하여 카토우 키요마사 이하 여러 장수들의 비리(非理)(바늘로 낸 구멍 정도의 규율 위반이었지만) 공격 대상으로 삼아 하나하나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미츠나리는 성격적으로 작은 과오,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전쟁터에 나간 여러 장수들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키요마사 등은 봉록을 빼앗길 위험에 처해질 정도였다. 이번 제 2차 원정에서 미츠나리는 후시미[伏見]에 있었지만, 보고서는 모두 그의 눈을 거쳐 정리된 후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갔다.
 당연히 히데요시는 원정군의 현황이 맘에 들지 않았고, 어느 장수에 대해서건 불만족스러웠다.

 원정 10개월째에 유명한 울산 농성전이 펼쳐졌다. 키요마사는 고군분투하며 성을 지켜 4만의 명나라 군과 싸웠지만 식량이 떨어졌다. 급보를 부산의 총사령부로 날려 구원을 청했다.

 킨고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라며 쿠로다 죠스이는 히데아키의 이름으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보내었고, 다방면에서 한꺼번에 진격하여 적을 역포위한 뒤 크게 싸워 적의 목을 취하길 13238급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히데아키는 처음 경험한 실전의 재미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명군 4만은 갈팡질팡하기에 바빴고 일본군은 사슴을 쫓는 사냥꾼과 같이 손쉽게 학살하고 다녔다. 히데아키는,
 
내도~’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 젊은이의 성격은 자기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제지하려던 막료(幕僚)를 채찍으로 후려갈겨 물리치고 말을 몰아서 적에게 뛰어들었다. 친위대(御馬廻りの)도 히데아키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창에 뛰어나질 못해도 좋았다. 히데아키는 미친 듯이 찔러대 13명의 적을 죽였고 자신도 피를 뒤집어 써 새빨갛게 되어서야 피로를 느끼고 이 놀이를 멈추었다.

 이 소식이 후시미에 전해졌다.
 히데요시는 울산성을 끝까지 지켜낸 키요마사를 포함한 3명의 장수[각주:6]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고 구원군인 히데아키 이하 여러 장수의 활약에도 굉장히 만족하여,

 킨고도 나름 하는구나~”

 하고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히데요시는 기뻐하였다. 기분이 좋을 때의 히데요시에게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듯한 그런 인격적 매력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몇 일 뒤에 뒤바뀌었다. 이 변화는 20세기인 오늘날에는 오히려 의학(醫學)의 영역일 것이다.

 킨고는 용서할 수 없다.”

 고 갑자기 말했다. 히데아키에 대해서 새로운 떡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전과 똑 같은 보고서였지만 그 평가가 조금 바뀌어 있음에 지나지 않았다. 바뀌게 된 것은 미츠나리의 의견이었다. 미츠나리는 생각하였다. 이 울산성 구원으로 히데아키의 인기가 오르기라도 하면 장래 히데요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다. 히데아키의 형 뻘인 관백(白) 히데츠구[秀次]가 죽어 히데요리의 해()가 하나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히데아키. 거기에 부하로서는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진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일 것이다.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 미츠나리가 가진 유일무이한 정치적 입장이었으며, 히데요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츠나리를 총애(寵愛)하여 중용(重用)하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 이외에도 요도도노[淀殿]와 그 자식에 대해, 풍토(風土)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나리는 오우미[近江] 북부 출신이었다. 요도도노는 예전에 노부나가에게 멸망 당한 북부 오우미의 다이묘우 아자이 씨[氏]의 따님으로, 즉 북부 오우미 사람에게는 신성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연히 토요토미 가문의 다이묘우 중 오우미[近江] 계열은 요도도노를 중심으로 살롱(salon)을 만들었고, 그것이 규벌(閨閥)이 되어,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음과 동시에 이 무리가 토요토미 가문의 정치면에서 주세력이 되었다.

 이에 대해, 카토우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라(加藤 嘉明) 오와리[尾張] 출신들은 같은 오와리 출신의 키타노만도코로[政所]와 어렸을 적부터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자연히 키타노만도코로를 중심으로 규벌을 만들고 있었으며, 이들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파벌과 적대하여 무슨 일이건 대립하였다.

 지금 조선에 건너간 장수들 대부분이 키타노만도코로 당()이었다. 이 당이 장래 히데아키를 추대(推戴)하여 히데요리에게 대항할지도 몰랐다.

 킨고님을 너무 띄어주는 것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미츠나리는 진언(進言)하였다. 항간에서는 칸파쿠 히데츠구의 죽음도 이 미츠나리의 참언(讒言)이었다고 믿겨지고 있었다. 미츠나리가 참언을 했건 하지 않았건 히데츠구의 몰락은 미츠나리의 정치적 견해와 히데요시의 이해(利害)가 일치되어 있었으며 그의 몰락이 히데요리의 장래를 안전하게 한 것도 틀림없었다.

 역시…… 그런가?”

 히데요시는 히데아키의 행동에 대해 미츠나리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겼다. 전군 사령관이라는 자가 손수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 외에도 성격이 거칠었고 막무가내인 점도 많았다.
 
히데아키에게 벌을 내려야 하나?’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무장으로써의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었지 도덕상의 문제이거나 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그로 인해 싸움에 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사기가 더 높아져 이겼다. 벌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벌을 내려야만 했다.
 히데아키의 행동을 살펴 보니, 양아버지인 타카카게가 정한 군제(軍制)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여, 그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장병들은 몹시 불쾌해 하고 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이 시대의 명장이었다. 가신들은 타카카게를 존경했으며, 이 때문에 코바야카와 가문의 병사들은 강했고 군법이 엄정했다. 그러나 히데아키가 거기에 들어간 뒤 의미도 없이 그 군제를 무시하고 있다. 죽은 양아버지를 존경하는 듯한 모습이 전혀 없었으며, 경건(敬虔)함이 전혀 없었다. 히데아키가 그러한 성격이라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 토요토미 가문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것이다. '놀랄 만큼 멍청하며, 또한 난폭하고 거만하다'고 한다. 놀랄 만큼 멍청하다고 하여도 히데아카의 곁에 나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도 있으면 어떤 막되먹은 짓을 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히데아키의 존재는 히데요리의 장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질 않을 것이다.

 역시…… 히데아키에게 치쿠젠[筑前] 52만석은 너무 크지

 히데요시는 말했다. 큰 영지(領地)와 많은 병사를 가진 만큼 사람들은 그를 추대하려 하겠지만 조그만 땅밖에 없다면 추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아키의 땅을 거두어들이고 에치젠[越前] 15만석 정도로 하자. 거기를 어디로 할 것인지 조사해 두어라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에게 그에 대한 사무를 맡겼다.
  1. 지금은 소우코우 사[宗光寺] [본문으로]
  2.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3. 하코네[箱根 – 맵의 한 가운데 箱根山이라 쓰여져 있는 곳. 확대나 축소해 보면 대충 위치는 알 수 있다…고 생각함]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요충지로 오오사카[大坂] 쪽에서 칸토우[関東]로 갈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있는 곳으로, 험한 곳이 많은 천연의 요해(要害)이다. 따라서 의미적으로 ‘칸사이[関西]의 세력에게서 칸토우를 지킨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을 이름. [본문으로]
  5. 역사상으론 히데요시가 성을 새로 지은 것은 지진으로 인해 그때까지 살던 성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아이를 성주로 삼는 것은, 일찍부터 아이에게 직신(直臣)을 만들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흔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2살 때 나고야 성[那古野城]의 성주가 된 것과 같이. [본문으로]
  6. 나머지 둘은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오오타 카즈요시[太田 一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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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가 히데요시소소(小小)한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생각난 듯이,

 킨고[金吾]님에게도 좋은 양갓집이 생긴다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은 만만세겠군요.”

 하고 히데요시를 찔러보았다. 양자(養子)로 보낼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죠스이가 뭔가를 꾸미기 시작한 것을 알아채었다. 거기에 동참해 주고자, 짐짓 시치미를 떼며,

 뭐 그렇췌~!”

 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선 곧바로 말을 딴 데로 돌렸다. 그 한마디만으로 죠스이는 족했다. 나머지는 양갓집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모우리 가문[毛利]이 좋겠군
 이라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천하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인 것이다. 전성기를 구축한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등장한 이후 그 영지(領地)산인[山陰], 산요우[山陽] 10개 지역[]에 이르며, 노부나가[信長]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오다 가문[織田家] 최대의 적이었다. 히데요시의 천하가 되자, 히데요시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모우리 가문은 무릎을 꿇고 토요토미 가문의 종속 다이묘우가 되었다. 마침 당주(當主) 츄우나곤[中納言] 테루모토[輝元]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킨고를 거기로 보내자
 서쪽의 거대 제후와 끈을 이어두면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토요토미 가문도 든든할 것이고 또한 모우리가문 자신들에게도 든든하니 쌍방에게 득인 것이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小早川 隆景]를 꼬시자
 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참고로 모우리 가문가정(家政)은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항설(巷說)에 말하는 [세 대의 화살]이며 죠스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모토나리가 죽기 직전에 세 명의 아들을 불러, 세 대의 화살을 건네주고는 꺾어 보라고 하였다. 한 대씩 꺾을 때는 간단히 부러졌지만 세 대를 한꺼번에 꺾고자 하니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모든 일이건 협력하라는 교훈이며 그것이 가법이 되어 있다. 이때의 삼형제가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며, 이후 모우리 씨[毛利氏]를 중심으로 킷카와-코바야카와 양 가문은 하나의 연합국가처럼 되어 있었다.

 지금은 장남 타카모토가 죽어 본가(本家)는 그의 아들 테루모토가 잇고 있다. 킷카와 모토하루도 죽어 지금 삼형제 중에서 생존해 있는 것은 종삼위(從三位) 츄우나곤[中納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으로, 이 타카카게 스스로도 큰 영토를 가진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동시에 본가인 모우리 가문의 최고 고문을 겸하고 있다.
 설득하고자 한다면 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일 것이다.

 죠스이건 타카카게건 둘 다 후시미[伏見]에 집이 있다. 죠스이의 집은 이와야마 산[岩山] 기슭에 있으며, 여기서 산을 넘은 다음 동쪽으로 가면 성 밑에서는 가장 광대한 코바야카와 저택이 있다.
 
죠스이는 집을 나섰다. 만약을 위해 이코마 치카마사[生駒 親正]라는 노인과 동행했다.
 
치카마사는 히데요시가 직접 키워낸 다이묘우[大名] 중 한 사람으로, 260석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사누키[岐] 타카마츠[高松] 17만여 석의 신분이 되어 있다.

 둘이서 산을 넘었다. 왼편에 아키야마[秋山]의 언덕에 자라고 있는 거먕옻나무의 단풍이 눈에 아플 정도로 선명했다.

Rhus succedanea L.
Rhus succedanea L. by kodamatic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거먕옻나무]

 일이 있을 때는 둘이서 가는 것이 일본인의 풍습이다. 나중에 서로가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카게는 이미 환갑을 넘기고 있었다. 온후한 인품이지만 센고쿠[戦国] 한창일 때둘째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 가문을 끝까지 지켜낸 그의 능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둘을 별실로 인도한 후 그 사이 다실(茶室)을 준비하고 곧이어 거기로 옮겨서 ()에 둘러 앉아 잡담을 하였다.

 건께~ 딴게 아니고 말이지

 라고 죠스이는 고향인 하리마[播磨] 사투리가 혀에 남은 말투로 히데아키 양자 건에 대해서 말했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과 각별한 관계가 된다는 것은 모우리 가문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이 이상 좋을 것이 없지요

 라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과연~ 이는 정말 좋은 이야기군요

 라고 타카카게는 차를 끓이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지만 속마음은 반대였다.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모우리 가문 최대의 위기다'
 하고 생각하였다.

 모우리 가문이라고 하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선조(先祖)도 모르는 벼락치기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타카카게의 망부(亡父) 모토나리가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1000관에 불과한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고는 하여도, 모우리 가문 그 자체는 옛부터 명족(名族)으로 카마쿠라 막부[(鎌倉 幕府]의 만도코로[政所][각주:1]의 최고책임자인 오오에노 히로모토[大江 ] 이래의 역력(歷歷)한 가계(家系)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가문에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르는 히데요시의 친척을 들인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성스러운 신전(神殿)에 똥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타카카게는 생각했다. 역대의 선조들은 둘째치고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남보다 더 신경 쓴 죽은 모토나리가 저 세상에서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이는 내가 어떻게 되건 막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타카카게는 결심했지만, 그러나 얼굴엔 미소를 계속 지으며,

 말씀하신 대로 모우리 본가에게 있어서 이 정도로 축하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주 테루모토가 들으면 굉장히 기뻐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고, 둘은 돌아갔다.

 이 후 타카카게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슬며시 집을 나와 후시미 [伏見城]해자(垓子) 근처에 저택을 가지고 있는 세야쿠인 젠소우[ 全宗]를 방문했다.

 세야쿠인 젠소우는 무로마치[室町] 말기의 명의(名醫)인 마나세 도우산[曲直瀨 道三]의 제자로 그 능력이 뛰어나 처음엔 궁정의(宮廷醫)였지만 지금은 히데요시의 시의(侍醫)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늙고 병든 몸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히데요시의 그림자처럼 곁을 떠나질 않고 있었기 때문에 전제군주(專制君主)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세야쿠인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자연히 여러 다이묘우들도 세야쿠인을 정중히 대했다. 타카카게도 이 시의장(侍醫長)에게 예물(禮物)을 보내어 히데요시 근처에서 일어나는 정치 쪽 정보를 얻거나 하였다.

 세야쿠인에게 물어보면 죠스이가 말한 것이 히데요시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허허~ 저는 처음 듣는 소리군요.”

 세야쿠인 젠소우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히데아키를 양자로 보낸다는 듯한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보낼지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심……’
 타카카게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히데요시의 생각이 아니라면 아직 손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좌담(座談)에서라도 "모우리"라고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 날, 타카카게는 후시미 성의 대문을 지나 성 안에 있는 -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저택이 있어서 이름 붙여진 이시다 성곽[石田廓]에 있는 미츠나리의 집을 방문하였다.

 미츠나리를 선택한 것은 그가 죠스이와는 다르게 공식적인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執政官)이며 또한 히데요시의 비서 역할도 겸하고 있기에, 때로는 히데요시의 의사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권세가(權勢家)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미츠나리를 통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지만, 미츠나리는 이미 출근하여 집에 없었다. 타카카게는 실망했다.
 
아니지.. 그렇다면……'
 하고 타카카게는 다시 생각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미츠나리에게 부탁하는 것 보다 오히려 히데요시 곁에서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는 세야쿠인 젠소우의 입에서 타이코우[太閤]의 귀에 사적인 말로 흘려 보내는 것이 빠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여 곧바로 세야쿠인 저택으로 길을 서둘렀다. 타카카게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로서는 이 이야기에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
모우리 본가'라는 계획이 쿠로다 죠스이[田 如水]가 혼자 생각하고 있다고는 하여도, 이미 이코마 치카마사가 옆에 있던 자리에서 입술을 통해 나온 말이었다. 생각이 아닌 현실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곧바로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귀로 들어가 그대로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타카카게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었다. 이쪽에서 선수를 친다.
 
-
부디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님을 저희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양자로 얻고자 합니다. 이를 허락해 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하고 타이코우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가로 향해진 총구를 분가(分家)인 자기 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소리를 치는 것과 같았다.
 
죠스이가 생각해주는 척 하는 계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것밖에 없다
 타카카게는 전쟁터에서 머리를 쓰는 듯한 심경이었다. 죠스이와는 예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의 모우리 공격군 사령관일 즈음, 빗츄우[備中]의 전쟁터에서 서로의 지략으로 무기로 불꽃튀기며 싸웠다. 그때의 인연(因緣)이 쌓이고 쌓여 좋은 마음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 억울한 것은,
 
저 킨고 좇병신 때문에
 라는 것 때문이었다.

 모우리 가문의 분가(分家)인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도 분가이긴 하지만 타카카게에게 있어선 명문가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대대로 아키[安芸] 타케하라[竹原]지토우[地頭]였던 가문으로, 카마쿠라 막부의 가문 목록[御家人帳]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전통 있는 가문이었다. 그런 명문가를 모토나리가 책략을 써 3남 타카카게가 그 가문을 이었다. 타카카게에게는 양갓집이라고는 하여도 이 명문가의 피에 히데아키의 피가 섞여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타카카게의 감정은 그에게만 있는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다이묘우에는 카마쿠라 때부터 이어지는 명문가가 몇몇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사타케 씨[佐竹氏], 모가미 씨[最上氏], 모우리 씨, 코바야카와 씨, 시마즈 씨[島津氏] 등이 그런 명문가이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토요토미 가문의 위세에 굴복하였다고 하여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 비천한 피를 경멸하고 있었다. 만약 토요토미 가문이 그들에게 사위를 보내준다고 하면 전부가 타카카게처럼 전율(戰慄)할 것이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서자(庶子)가 있었다. 그런 자기 자식을 제쳐두고 자신의 가문에 히데아키를 맞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그 감정을 죽였다.

 다행히 세야쿠인 젠소우는 아직 집에 있었다. 타카카게는 누가 보아도 자신이 히데아키를 굉장히 원하고 있는 것처럼 히데요시에게 그 말을 전해달라고 이 늙은 의사에게 부탁했다.

 졸자는 타이코우 전하의 깊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라고 우선 말했다.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있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쓰러진 직후 전선(前線)에 있던 히데요시는 정면의 적인 모우리 씨와 급히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 화친 교섭에 히데요시의 군사 쿠로다 죠스이가 활약하였다. 타카카게의 둘째 형 킷카와 모토하루는 적극 반대하였지만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인물을 꿰뚫어보고 히데요시와 싸우는 것 보다 오히려 그에게 천하를 잡게 하고 그 세력하에서 모우리 가의 안태(安泰)를 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그렇게 되었다.

 만약 그 때 화친하지 않고 모우리 쪽이 결전에 임했다면 히데요시는 쿄우[]의 미츠히데를 물리치지 못하고 어쩌면 천하를 놓쳤을 지도 모른다. 히데요시는 후에 이 사실을 알고 타카카게를 두텁게 대했다.
 모우리 가문의 분가임에도 독립된 거대 다이묘우로 만들어 치쿠젠[筑前] 1[]이라는 광대한 땅과 치쿠고[筑後], 히젠[肥前]의 각각 두 군() 4개 군()을 잘라 주었고, 관위(官位)도 종삼위(從三位) 츄우나곤[中納言]으로 하여 본가의 모우리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하였다. '깊은 은혜'라는 것은 그걸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늙고 앞으로도 얼마나 살지 몰라 이제는 타이코우 전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사 받은 이 땅들을 전하의 양자이신 킨고님에게 물려드리고 싶습니다

 세야쿠인도 이 미련 없는 태도에는 놀랐다. 다이묘우라는 자가 그 봉토(封土)를 버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츄우나곤 미치신건가? 그렇지 않음 어지간히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으신건가?’
 하고 세야쿠인은 오랫동안 침묵하며 그 진짜 뜻을 살피기 위해서 타카카게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타카카게에서는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구 세야쿠인도 고개를 숙여,

 잘 알겠사옵니다

 하고 말한 후 고개를 들어,

 그 후 츄우나곤님은 어쩔 생각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많이는 바라지 않습니다. 산요우도[山陽道] 어딘가에 조그맣게 은거할 자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은거할 곳이라면 보통 기껏해야 3000석 정도이다. 세야쿠인은 말을 잃었다.

 세야쿠인은 서둘러 성으로 등성하여 히데요시에게 전했다. 히데요시는 아이같이 기뻐했다. 이 인물의 천재성은 그런 것 즉 지금보다 나이를 덜 먹었을 때는 뭐든 다 꿰뚫어 본 상태에서 누가 보아도 아이같이 행동하여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굉장함 에 있었지만 말년의 이 시기가 되자 노쇠가 뚜렷하여, 그런 천진난만함은 단순히 소박함으로 끝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코바야카와 가문이 명문가라고 기뻐하는 것에, 보는 세야쿠인이 창피할 정도로 기뻐하며,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는다는 것은 히데아키 녀석에게도 명예다.

 타카카게 안도감에 빠졌다. 그러나 이후 바빠졌다.
 문제가 된 본가의 후계자 자리를 서둘러 메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타카카게는 무리를 하였다. 모우리 가문의 가신(家臣)으로 타네다 모토키요[種田 元[각주:2]]라는 사람이 있다. 모토나리 말년[각주:3]에 얻은 서자로, 타카카게에게 있어선 배다른 동생이 되지만 생모의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가신의 자리에 있었다. 그의 아들로 미야마츠마루[宮松丸[각주:4]]라는 소년이 있어, 그를 모우리 가문에 양자로 들였다.

 종삼위(三位) 츄우나곤[中納言] 킨고 히데아키로 보면 - 피의 존비(尊卑)라는 점에서 모우리 가문 가신의 자식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무사히 낙착(落着)되었다.
  1. 카마쿠라 막부의 정무와 재정을 담당. [본문으로]
  2. 모토나리의 넷째 아들 '호이다 모토키요[穂井田 元清]'를 말한다. [본문으로]
  3. 모토나리 54세 때. 당시 평균 수명은 50세 근처라고 한다. [본문으로]
  4. 후에 정유재란 때 일본군 우군(右軍) 총사령관이 되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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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조선 출병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16살의 곤츄우나곤[権中納言]은 이미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내려간 히데요시를 뒤따르기 위해서, 새로 하사 받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亀山城]에서 준비 중이었다.
 
참고로 히데요시는 이 행군에 특히 총애하던 요도도노[淀殿] 한 명만을 데려갔다. 많은 측실 중에서 특히 요도도노가 선택된 것은,

 “저번 오다와라 공략전[小田原の陣[각주:1]] 때 요도[淀] 녀석과 함께 하여 바라던 대로 승리를 얻었다. 요도 녀석은 이젠 전장(戰場)의 길례(吉例)이다”

 며 다른 측실의 질투를 막고자 하는 의미도 있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요도도노에게서는 자기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시가 접한 수 많은 여성들 중 요도도노만이 히데요시의 아이를 낳았다. 츠루마츠[鶴松]였다. 이 츠루마츠는 안타깝게도 일찍 죽어지만 다시 한번 임신할 수도 있는 법. 이 희망이 히데요시에게 요도도노를 함께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히데아키는 다음 해인 1593년 3월에 히젠 나고야로 향하였는데 오오사카[大坂]를 출발함에 앞서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 성으로 갔다. 17살 때였다.

 “수고하는구나”

 키타노만도코로는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누구를 만나건 계속 미소를 띄우는 이 여성이, 킨고츄우나곤 히데아키에 대해서만은 미소를 보이는 것 자체가 드물었고 이때도 역시 입술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히데아키가 가진, 살아있는 생물의 추잡함이 배어 나오는 끈적끈적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그런 주제에 히데아키에게는 뻔뻔함이 없었다. 두꺼운 얼굴로 양어머니에게 비위를 맞추면 좋을텐데, 그녀가 안 좋은 기분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자 갑자기 겁먹은 강아지마냥 꼬리를 말고 불쌍한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이 표정이 반대로 키타노만도코로의 비위를 더욱 더 상하게 만들었다.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힘이 들어가 더욱 더 찡그리는 얼굴을 만들어 버렸다.

 옆에 있던 히데아키의 수하는 조마조마했다.
 이 즈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토요토미 가문의 가신(家臣) 중 한명인 야마구치 겐바노카미 마사히로[山口 玄蕃頭 正弘]가 스승을 겸한 부속 가로(家老)가 되어 있었다. 야마구치 마사히로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히데요시가 오우미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를 하던 때부터 섬겼으며 전쟁터에서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데도 밝아 히데요시의 가장 중요한 토지 정책이었던 소위 태합 검지(太閤 検地[각주:2])의 실무 담당자로서 이름을 높였다. 백성을 잘 다스렸던 만큼 세상 물정에 밝았고 처세에 능했다.
 앞으로 나가서는,

 “키타노만도코로님. 실례입니다만 킨고님에게 여행 떠나는 석별(惜別)의 말씀이라도 받고자 합니다”

 라고 히데아키를 대신하여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이다.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 전쟁터로 떠난다고 하는데 양어머니가 이래서만은 안 되었다.

 “그런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히젠[肥前]에서는 마시는 물에 신경을 쓰시길”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당연히 이런 경우라면 통례인 여행길에 쓰라고 주는 선물도 없었다. 히데아키는 면목을 잃은 채 성을 나섰다.

 히젠 나고야에 도착한 것은 3월 22일이었다.
 히데아키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나고야 성에 입성하여 양아버지인 히데요시를
알현(謁見)했다.
 히데요시는 히데아키가 몸에 건친 갑옷의 화려함에 대단히 만족하였다.

 “출발에 앞서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받았나 보구나”

 라고 기분 좋은 듯 물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라 하였다. 히데요시는 어느 정도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기분은 어떠시던가?”

 하고 야마구치 마사히로에게 물었다. 마사히로는 정직히 그 모습을 전했다.

 “허허~ 길 떠나는 자식에게 두 마디뿐인가”

 히데요시는 웃으면서 끄덕거렸지만 내심 당혹스러웠다. 히데츠구[秀次]에게 만일의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히데아키를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로 세워야 하는데도 양어미라는 처의 태도가 좋지 않았다.
 -당신은 잘못했네
 하고 질책하는 뜻을 담은 편지를 곧바로 오오사카(大坂)의 처에게 보냈다.

킨고는 22일에 나고야에 도착하였소.
수하들도 많이 동원해 왔으며, 거기에 행장(行裝)도 화려해서 나는 칭찬을 해 주었네.
히데아키가 오오사카에 고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당신은 기분이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고 필요한 도구들도 준비해서 주지도 않았다고 하더군. 왜 그러하였는가?
당신에게는 자식이 없네. 저 아이를 귀여워하지 않고 어느 자식을 귀여워하려고 하는가?
킨고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에 따라 나는 저 아이에게 나의 은거료(隱居料[각주:3])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네.[각주:4]
그 정도로 이 히데요시가 생각하고 있을 정도이니까, 당신도 너무 구두쇠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오.
라 써서 보냈다.

 하지만 그날부터 2개월도 지나지 않았을 때 토요토미 가문의 사정이 변했다. 요도도노가 임신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뻐했다.
 이 기쁨을 곧바로 오오사카의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써 보냈지만 내용이 미묘했다.

요즘 감기에 조금 걸려서 붓을 들지 않았네.
지금은 나아져, 이 편지는 나아서 처음 붓을 들어서 쓰는 것이네
 즉, 붓으로 뭘 쓸 때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일 먼저 쓴다는 것을 말하며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라고 덧붙여서 쓰는 듯이 히데요시는 썼다.
니노마루도노[二の丸殿=요도도노]가 임신했다고 들었네.
고 남 이야기하는 듯 말했다.
경사스러운 일이긴 한데 이 히데요시는 아이가 필요하지 않네. 정말 필요하지 않아. 당신도 그런 생각으로 이 타이코우[太閤]를 이해해주시게.
하긴 이 하데요시에게 아이는 있었지. 츠루마츠[鶴松]라는. 그건 다른 집에 주었지.[각주:5]
그러니 이번 아이는 히데요시의 아이가 아니네. ‘니노마루도노’만의 아이이네
히데요시는 키타노만도코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런 말돌리기를 하였지만 물론 본심이 아니었다. 다만 이 이상한 논리의 뒤에는 당시의 미신과 관계가 있다.
- 내 아이가 아니다. 주워온 아이다
 이러면 아이가 건강히 자란다고 한다. 죽은 츠루마츠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을 버린 아이라는 뜻으로 ‘스테[捨]’라고 하였다. 이번에 태어난 아이는 머지않아 ‘히데요리[秀頼]’가 되지만, 태어났을 때는 주워 온 아이라는 뜻으로 ‘히로이[拾]’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미신을, 즉 요도도노 한 사람만의 아이라는 것을 신불(神仏)에게 강조하기 위해서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나고야 성[名護屋城]에서 내보네 야마시로[山城]의 요도 성[淀城]으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의 두번 째 성곽[二の丸=니노마루]로 거처를 옮겨 남자 아이를 낳았다. 이해의 8월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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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는 기뻐서 사람들이 ‘이제는 미치신 건가’하고 걱정할 정도로 날뛰었다.
 이 천재도 이 즈음부터는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노망기(老妄氣)가 들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원정군의 지휘를 내던져둔 채 나고야 성을 나와 오오사카로 돌아왔다. 그 사이 키타노만도코로에게 편지를 보내어,

쌓인 이야기라도 함께 하세
라고 써서 보냈으며 요도도노에게도,
거듭거듭 말하지만 히로이에게는 젖을 잘 먹이거라. 젖이 많이 나오도록 너도 밥을 많이 먹어라. 또한 여러가지 신경을 쓰면 젖이 잘 안 나오니 신경 쓰지 않도록 해라
라 써 보냈다. 거기에 한 번 더,
건강을 위해서 을 받거라. 단, 히로이에게 뜸은 필요 없다. 엄마(요도도노)가 해 주어도 안 된다.
라는 편지도 보냈다.

 히데요시가 기뻐 날뛰면 날뛴 만큼 킨고츄우나곤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이래서는 토요토미 가문에 언젠가 큰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라고 내다본 것은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였다.

 죠스이.
 통칭 칸베에[官兵衛]. 관(官)은 카게유노사칸[勘解由次官].
 히데요시가 천하를 쥘 즈음부터의 꾀주머니였다. 계략, 책략을 굉장히 좋아했다. 단지 기묘할 정도로 사리사욕이 없었다. 그에게 책모(策謀)란 사욕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주객(酒客)이 술을 사랑하는 것처럼 책모를 좋아했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일종의
선풍도골(仙風道骨)까지 느끼곤 하였다. 오오사카[大坂], 후시미[伏見] 등지에는 죠스이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많았고, '타이코우님이 세우신 공(功)의 절반은 저 절름발이님(죠스이)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토요토미의 천하가 되어서 죠스이가 얻은 것이라고는 불과 부젠[豊前] 나카츠[中津] 10여 만석으로 보잘 것 없었다.

 여담이 되겠지만 어느 사람이 히데요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히데요시는,

 “농담하지 마라”

 라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 절름발이에게 100만석이라도 쥐어주면 나중엔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장소에서도 말했다.

 어느 날 밤 측근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였다. 화제가 제후(諸侯)의 품평이 되었다. 히데요시가 갑자기,

 “내가 죽으면 누가 천하를 손에 넣을까?”

 라고 물어보았다. 물론 좌흥(座興)을 돋우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했지만 히데요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건 절름발이다”

 라고 말했다. 모두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면 쿠로다 죠스이는 기껏해야 10여 만석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런 조그만 영지(領地)로는 많은 병사를 모으기도 힘들다. 그렇게 이의(異議)를 말하자 히데요시는, '아니지~ 아니지~' 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 절름발이의 굉장함을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옛날에 그와 거친 전쟁터에서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다. 나만이 그의 굉장함을 알고 있지”

 라고 말했다.
 

 죠스이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이외라 할 수 있는 야박한 처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뛰어난 공적을 많이 세워 자신의 주군을 떨게 하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고 한다. 죠스이의 지식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옛 공을 내세워 은상을 많이 바라면 죠스이의 몸은 파멸할 것이다.
 히데요시는 천하를 손에 넣자 죠스이를 중요한 자리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죠스이라면 나의 두려움도, 진심도 알아줄 것이다’
 라는 죠스이의 총명함에 기대는 부분도 있었다. 대신하여 문관(文官)들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들이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執政官)이 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공로자들을 거북하게 여겼기에, 히데요시와 그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죠스이는 그것에 불만을 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은 하나의 시대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이 남자는 알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후 죠스이는
보신(保身)을 위해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은거를 결심. 가문도 성도 영지(領地)도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물려주었다. 아무리 히데요시라도 이때는 놀라,

 “영지(領地)로 돌아갈 생각은 마시게. 쿄우[京]에서 내 상담상대가 되어 주게”

 라 말하며 쿄우에서 생활할 수 있게 500석을 주었고 이어서 2000석으로 가증해 주었다.
 그 죠스이가,
 ‘토요토미 가문의 평온을 위해서’
 라며 계책을 세웠다.
 취미나 오락 같은 것이다.
 선조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왔던 가신(家臣)이 아니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죠스이는 히로이 – 히데요리[秀頼]의 출생으로 인해 관백 히데츠구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히데츠구의 행패는 천하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명목으로 살해당할 것이다. 죠스이는 항상 히데츠구의 바둑 상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넌지시 몸조심할 것을
간언(諫言)하였으며 또한,

 “자진해서라도 원정군의 총지휘를 맡고 싶다고 하십시오. 타이코우[太閤] 전하는 그런 모습을 가련(可憐)히 여기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었지만 히데츠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죠스이는 히데츠구에겐 가망이 없다고 단념하여 그의 저택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다음은 킨고 히데아키였다.
 ‘히로이님이 태어난 이상, 킨고는
폐물(廢物)이 될 뿐이다. 킨고를 어떻게든 해 드려야지..'
 라고 죠스이는 생각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것이었다.
 죠스이는 더이상 히데요시의 꾀주머니도 아니었으며, 또한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것을 신경써야 하는 역할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거기에 토요토미 가문의 사람들이 죠스이를 특별히 의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디까지나 이 남자만의 취미였다고 할 수 있다.
 죠스이는 그 재능을 표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 매일매일이 심심했다.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쓸데없는 참견에 나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씨[北条氏]를 정벌한 전쟁. [본문으로]
  2. 히데요시[太閤]가 통일된 규격으로 논밭(영지안의 산과 숲은 제외)의 생산량을 계산하여 세금, 부역 등을 산출 혹은 할당하게 한 것. [본문으로]
  3.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4. 다른 부분은 관백(関白) 히데츠구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본문으로]
  5. ‘죽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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