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1607 4 8 병사 34

1574 ~ 1607.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차남으로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의 형. 아명은 오기마루[於義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양자가 되어, 큐우슈우[九州] 정벌에서 처음 전장에 출진했다. 후에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의 양자가 되어 시모우사[下総] 유우키 성()의 성주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 에치젠[越前]을 하사 받았다.









쇼우군[将軍]이상의 성망(聲望)


 유우키 히데야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이지만 출생할 때부터 기묘한 소문이 따라다니고 있어서[각주:1] 어릴 적에는 부친에게도 푸대접을 받았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보내졌고, 그  히데요시도 또한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 양자로 보냈다.


 히데요시가 죽자 토쿠가와 쪽으로 복귀하여 세키가하라에서는 우츠노미야[宇都宮]에 진을 치고서 북방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를 방비한 것이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쇼우군의 자리는 이모제(異母弟)인 히데타다가 물려받았지만 에치젠 키타노쇼우[北ノ庄]의 영주(領主)로서 68만석을 받은 것 외에도 와카사[若狹]시나노[信濃]월경지까지 합치면 카몬(家門[각주:2]), 후다이(譜代[각주:3])중에서는 대인 75만석의 신분으로 출세했다. 카가[加賀] 100만 석인 마에다 가문[前田]에 대한 방벽이라는 중대한 역할이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부친 이에야스를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야스가 죽은 뒤 쇼우군 히데타다가 확실히 그를 제어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 듯하다. 히데타다도 형인 히데야스에게는 조심 또 조심을 하여 후시미[伏見]에 있던 히데야스가 처음으로 에도[江戶]에 왔을 때는 매사냥을 핑계로 시나가와[品川]까지 마중을 나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에도성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짧은 장년(壯年)시대


 이렇듯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히데야스였지만 불행하게도 34세라는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다.

 에치젠의 국주(国主)가 된 1600 12 그는 아직 29세였다. 그 때부터 죽을 때까지는 6년여.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때가 이미 말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실제로 에치젠에 입국했던 것은 1601 5월인데 최초로 한 일은 영지를 가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중신들에게 기분 좋게 나누어 줌으로 인해 자신의 직할령이 부족하여 부족한 분은 사도[佐渡]에서 에도로 보내지는 금이나 물자에 통행료를 메겨 징수해서 메웠다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전투는 잘해도 경제관념은 부족했던 모양이다.[각주:4]


 양부(養父)인 유우키 하루토모와 그의 식솔들을 시모우사의 유우키에서 키타노쇼우로 불러들였으며, 유우키 가문[結城)]의 사원(寺院) 등을 이전하거나 키타노쇼우 성의 개축, 정비, 새로운 혼마루[本丸[각주:5]]의 건축도 당초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한 공사들에 이에야스의 명령을 받은 여러 제후들이 협력했다고는 해도 히데야스의 고생도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사들이 모여 사는 곳[각주:6]이나, 상인들의 마을[각주:7]을 조성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26개의 마을, 인구 2 5천여의 성 밑 마을(城下町)이다. 새로운 농업, 산업 정책의 책정이나 친번(親藩[각주:8])으로서 막부를 도우는 것 등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악질적인 병에 목숨을 빼앗기다


 1606년.

 히데야스는 마츠다이라 성[松平]을 하사 받아 토쿠가와 일문으로 복귀(이설이 있다)하였으며, 유우키 가문 5남 나오모토[直基]가 잇게 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궁궐의 증축, 은퇴한 텐노우[天皇]를 위한 센토우어소[仙洞御所] 조영 공사의 총 책임자를 맡아 조정에도 그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그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궁중에서 쾌유를 빌며 신에게 받치는 춤(神楽=かぐら)이 행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던 히데야스의 육체는 이미 병마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궁궐 조영 중에도 일상생활은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공사 종료 후 막부가 히데야스를 후시미의 죠우다이[城代[각주:9]]에 임명하지만 히데야스는 곧바로 사임. 1607 3월에는 영국(領国)인 에치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윤 4 8일에 병사한 것이다.


 그의 병은 당창이라고 하는데 알기 쉽게 말하면 매독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명했던 [이즈모의 오쿠니(出雲のお)] 등 여자 카부키 배우들과 문란한 교재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을 보면 그 방면에서 감염되었다고 여겨진다.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코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보면 이 병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장남 타다나오[忠直]가 광란 끝에 카이에키[改易[각주:10]]당한 것도 부친에게서의 유전으로 여겨진다.


 오쿠니를 초대한 잔치에서 그녀에게 [너는 천하 제일의 무녀(舞女)가 되었지만, 나는 천하 제일의 무장이 되지 못하였구나]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불행한 탄생으로 만들어진 히데야스의 마음에 있던 그림자는 끝까지 지워지지 않고 증식하여 그것이 병마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1. 모친이 헤픈 여성이기에 실제로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문. [본문으로]
  2. 어삼가(御三家)와 어삼경(御三卿)를 제외한 쇼우군 가문(将軍家)인 토쿠가와(徳川)의 일문친척인 문벌. [본문으로]
  3. 주로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이에야스를 섬기던 문벌. [본문으로]
  4. 실제로 히데야스가 전투를 행한 적은 기껏해야 한 번이다. [본문으로]
  5. 성의 심장부인 천수(天守)를 둘러싼 성곽. [본문으로]
  6. 武家町 [본문으로]
  7. 町人町 [본문으로]
  8. 토쿠가와 가문의 일족친척들이 번주로 있는 번. 여기에는 어삼가(御三家)나 어삼경(御三卿)도 포함된다. [본문으로]
  9. 죠우다이[城代]는 성주의 대리를 뜻하며, 특히 후시미성의 죠우다이는 당시 토요토미 가문과 쿄우토[京都]의 감시, 서국으로 간 토요토미 가신들의 감시 등 막중한 임무와 권한이 주어졌다. [본문으로]
  10. 지위와 땅을 뺏어 평민으로 강등시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