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우 테루히코[西郷 輝彦]씨와 악수를 나누었을 때..
일본 사람들은 저런 식의 악수가 익숙치 않은 듯..
사이고우 씨와 함께 있던 분이
"악수가 특이하네"
라고 말하자, 사이고우씨..
왼손으로 칼을 빼내어 베는 시늉을 하며
"이럴 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을 듣고 납득.
.
.
....근데
한국인도 칼을 차고 다닌 시절이 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센고쿠(戦国) 무장 중에서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만큼이나 무사다운 화려한 의식 속에서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는 츄우고쿠(中国) 모우리(毛利) 공략에 임하여 우선 모우리 세력권의 최전선에 있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의 시미즈 무네하루를 오다(織田) 측으로 배신하도록 꾀했다. 노부나가(信長)의 서약서에 자신도 편지를 써서는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와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를 무네하루에게 사자로 보냈다. 노부나가의 서약서에는 빗츄우(備中), 빙고(備後) 2개국(国)을 항복의 조건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무네하루는 곧바로 이 서약서와 편지를 모우리의 당주 테루모토(輝元)에게 받쳤고 히데요시에 대한 답신에는 “테루모토가 나를 신뢰하여 국경의 땅을 맡겼기에 그 믿음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없소이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2개국이라는 맛있는 떡밥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무네하루에게는 모우리에게 빚이 있었다. 예전에 아들 사이타로우(才太郎)가 적에게 유괴당하였을 때 테루모토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 덕분에 아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센고쿠 난세에 있어서는 진귀한 의리의 무장이었다.
역사상 유명한 타카마츠 성 공격은 1582년에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4월 4일에 2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키타 씨(宇喜多氏)의 본거지 오카야마 성(岡山城)에 입성하였다. 타카마츠 성은 이 오카야마 성에서 12km정도 떨어진 지점인 키비 평야(吉備平野)의 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외교로 타카마츠 성을 항복시키는 것에 실패하였는데 그렇다고 이것을 힘으로 뺏기에도 어려웠다. 성안의 사기가 왕성하였으며 성은 요해였다. 작고 높은 성 주변에는 말의 발도 빠질 듯한 진창 깊은 밭으로 연못이나 늪이 많았다. 그 속에는 불과 말 한 마리 지날 수 있을 정도의 외길밖에 없었다. 함락시키는데 필시 2년은 걸릴 것이다.
히데요시는 본영 류우오우산 산(竜王山)에서 타카마츠 성을 멀리 바라보며 이 성의 공략법에 대해 생각하였는데 그 결과 이 천하의 지혜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수공(水攻)]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즉 타카마츠 성의 서쪽에 흐르는 아시모리가와 강(足守川)를 막아, 그 지점에서 성의 동쪽 이시이야마 산(石井山)의 남쪽기슭 카와즈가하나(蛙ヶ鼻)까지 약 4km에 걸쳐 제방을 쌓아 성을 이 인조호수 안에 수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공성이라기 보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거대한 토목공사 계획이었다(부대 배치 및 알기 쉽게 나온 그림이 있는 곳)
제방의 규모는 높이 7m, 밑바닥 폭이 20m나 되어 그 위는 도로가 있어 이 도로의 폭은 약 10m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단기간에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히데요시는 10여일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으로 ‘천재적인 토목건축가’라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신속함이었다. 흙은 가마니로 옮기는 방법을 취하여, 그 가마니 한 개당 무려 돈 100문과 쌀 한 되를 준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당연하게도 비젠(備前), 빗츄우(備中) 일대의 사람들은 이 짭잘한 돈벌이에 달려들었다. 이야기는 엄청난 전파력으로 각지에 전해져 흙 가마니를 쌓은 백성들의 수레가 타카마츠로 쇄도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행운이며 타카마츠 성에게 있어 불행인 것은 때마침 장마의 계절이었기에 완성된 이 인조호수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 볼 때마다 수량이 늘어갔다. 호수 한 가운데 덩그러니 뜨이게 된 타카마츠 성은 3일째에 성의 일층까지 물에 잠겼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형제를 중심으로 한 모우리의 대군이 타카마츠 성을 구원하러 도착해 있었지만 이 인조호수를 둘러싼 하시바 히데요시의 대포위망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화해 협상밖에 방법이 없었다. 모우리 씨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 恵瓊)가 히데요시의 본진으로 파견되었다. 모우리가 제시한 조건은 빗츄우 등 5개국을 할양할 테니 타카마츠 성의 모든 장병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우리 씨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했다. 히데요시의 조건은 5개국 할양 외에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이라는 것이었다.
일시 화평교섭은 좌초되었지만 안코쿠지 에케이가 성주 무네하루를 설득하여 양해를 구했다. 조건 수락의 서장이 히데요시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6월 2일이었다. [4일에 할복]이라고 정해졌다.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며 타카마츠 성으로 술과 안주를 보냈다. 이 2일 새벽에 실은 쿄우토(京都)에서 대사건이 일어나있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었다. 히데요시 쪽으로 그 급보를 가진 밀사가 도착한 것이 3일 심야. 히데요시는 앙천했다. 어쨌든 이 사실은 철저하게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우리 측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화평교섭의 와해는커녕 고립된 히데요시는 곧바로 적의 맹공을 받게 된다.
4일.
무네하루의 자인이 행해지는 날이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입장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온히 자리잡고 있었다. 작은 배가 타카마츠 성에서 배를 저으며 나왔다. 배 위에는 죽은 사람이 입는 흰 옷의 무네하루가 있었다. 죽음을 확인하는 사람이 탄 배의 앞에 오자 무네하루는 그 역을 맡은 호리오 모스케(堀尾 茂助[각주:1])와 조용히 마지막 잔을 기울이고는 흰 부채를 펼쳐 쿠세마이(曲舞) ‘세이간지(誓願寺[각주:2])’를 추었다. 적과 아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화려한 죽음의 의식이었다. 무네하루가 배를 가르자 등뒤에서 칼날이 번쩍거리며 목이 떨어졌다. 동승하고 있던 형 겟세이(月清) 이하 따르던 자들도 계속해서 무네하루의 뒤를 따랐다.
무네하루 사세구(辭世句),
이제야 이승을 떠나는 무사의
이름을 타카마츠의 이끼에 새겨두고
浮世をば今こそわたれ武士の
名を高松の苔に残して
히데요시는 이 이후 곧바로 행동을 일으켜 후에 히데요시의 대반전(大返し)이라 일컬어지는 초인적인 속도로 쿄우토(京都)로 올라가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戦)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물리친 것이었다.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 1537년생. 처음엔 빗츄우(備中) 시미즈 성(清水城)의 성주. 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에 속해 타카마츠 성(高松城) 성주 이시카와 히사타카(石川 久孝)의 딸과 결혼하여 타카마츠 성주가 되었다. 1582년 타카마츠 성에서 자인(自刃).
타카카게[隆景]가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의 후계자가 된 데에는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모략이라는 덫이 작용하고 있다.
모우리 가문[毛利家] 발전을 위해서는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의 호족 코바야카와 가문을 빼앗는 것이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당시 누타[沼田]와 타케하라[竹原]라는 두 가문으로 나뉘어져[각주:1] 있었다. 그 중 타케하라 가문의 당주인 오키카게[興景]가 병으로 죽었다. 운 좋게 모토나리의 조카가 죽은 오키카게의 부인이었다. 곧바로 모토나리는 당시 9살인 토쿠쥬마루[徳寿丸=후의 타카카게]를 후계자로 밀어 넣었다.
그 직후 이번엔 누타 가문에서 당주 마사히라[正平]가 죽었고 거기에 그의 아들인 마타츠루마루[又鶴丸]에게 눈이 머는 불행이 찾아왔다. 모토나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누타 가문의 중신 노미 씨[乃美氏]를 꼬셔놓은 상태에서 은밀히 모략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모토나리는 강제로 누타 가문을 타케하라 가문에 합병시키고는 그 당주에 타카카게를 앉혔다. 더불어 합병 반대파인 누타 가문의 가신들 하나하나를 숙청한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일련의 당주 사망사건에는 모토나리의 검은 모략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어쨌든 이런 어두운 모략에 의해 탄생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지만, 모우리 가문 발전의 방향타를 쥐고서는 전란의 세상에서 그 지모를 아낌없이 발휘하여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継], 시마 사콘[島 左近] 등과 더불어 센고쿠[戦国]의 삼대지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다.
타카카게가 죽었을 때,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일본에서 지혜로운 사람 한 명이 사라졌다. 이 인물은 모우리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뱃사공과 같았다…"
하고 회상하였다.
또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상급귀족[公卿]인 키쿠테이 하루스에[菊亭 晴季]와 바둑을 두다가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자 자기도 모르게
“이건 타카카게라도 풀 수 없겠지……”
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다.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도
“정말 그렇겠군요”
라며 끄덕였다고 한다.
거슬러 올라가 소년시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타카카게가 형인 모토하루[元春]와 각각 아이들을 데리고 편을 갈라 눈싸움을 하였을 때, 처음엔 모토하루의 돌격에 패하였지만, 두 번째는 부하를 몇 명인가 복병으로 숨겨 놓아 모토하루의 허를 찔러 승리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가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선 것은 1547년 그의 나이 15살 때에 칸나베 성[神辺城]공략전이었고, 1555년 이츠쿠시마 전투[厳島合戦]에서는 일찍부터 후년 천하 삼대지장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은밀한 상륙작전에는 아무래도 세토 내해의 수군인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 수군의 응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들과 교섭하여 현실화시킨 것이 타카카게인 것이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뿐만이 아니라 실전에서도 민첩한 기동성을 보여주었다. 별동대를 이끌고 대담하게도 적의 정면인 이츠쿠시마 신사(神社) 오오토리이[大鳥居] 가까이에 배를 대었다.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의 군사들은 설마 적측인 모우리의 군사들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수상히 여기고 있자, ‘큐우슈우(九州)에서 원군으로 온 수군이다’[각주:2]고 속이고는, 적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상륙하여 스에 군의 본진 토우노오카[塔ノ岡]의 허리쯤에 진영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의 결전에서는 스에 군의 배후에서 습격한 부친 모토나리 등의 주력과 호응하여 스에 군을 협공하였다. 타카카게 자신도 3개소의 상처를 입으면서 분전. 적 부하장수인 야마토 오키타케[大和 興武]를 포로로 잡았으며, 적 대장인 타카후사를 추격하여 자살로 몰아넣었다.
1570년 6월.
부친 모토나리가 이 세상을 떠나자 타카카게는 모토하루와 함께 테루모토[輝元]를 잘 보좌하여 [모우리의 양천(毛利の両川)[각주:3]]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그러는 한편 모우리 본가에 대한 충성심도 두터워, 조카인 테루모토가 머물고 있는 방을 지날 때는 반드시 무릎을 굽혀 예를 다하며 지나갔으며, 테루모토가 없을 때도 그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목표로 서쪽으로 진격을 해 온 오다 군[織田軍]과의 격돌에서 그의 군략가로서의 특질이 발휘된다.
1575년 오다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오사카[大坂]의 혼간지[本願寺]와 손을 잡은 모우리는 같은 해 7월 혼간지에 식량을 해상 수송하였는데, 그때 총지휘를 한 것이 타카카게였다. 모우리의 수송선단은 요격하러 나온 오다 군과 키즈가와 강[木津川] 하구에서 격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쪽은 이츠쿠시마 이래의 전통을 자랑하는 코바야카와 수군이다. 오다 측의 수군을 능숙하게 포위한 후 철포, 불화살을 쏟아 붙는 듯이 공격하여 수 백 명을 죽이는 대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각주:4]
이제 츄우고쿠[中国] 모우리의 명성은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에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모우리는 그 이전에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통해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카이[甲斐]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도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과 호응하여 오다[織田]를 동서에서 협격하고자 하는 대전략이었다.
이러던 중 오다-모우리 대결 최대의 고비가 되는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 공방전에 이르게 된다.
이 전투는 타카마츠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清水 宗治]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를 맺게 되는데,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의 변 소식이 전해지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을 숨긴 채 다음 날 무네하루를 할복시키고는 급히 쿄우토[京都]로 군사를 돌려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모우리 군에게 있어서 다시 오지 않을 반격의 기회였다. 여기서 히데요시를 추격한다면 물리치는 것은 쉬웠다. 대부분이 이 의견에 찬성하였다. 하지만 타카카게는 결사반대를 외쳤다.
타카카게 외교감각의 탁월함이 여기서 멋지게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카카게는 히데요시가 장래 반드시 천하를 쥐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추격하지 않고 히데요시에게 아케치[明智] 토벌을 성공시키면 반드시 히데요시는 모우리에게 호의를 갖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모우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정권장악은 타카카게의 이 추격반대 덕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후년 히데요시는 이때의 타카카게 배려에 깊은 감사를 하여,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이때의 은혜를 갚음과 동시에 특히 타카카게를 본가의 테루모토와 동격으로 올려, 대로(大老)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였다. 영지(領地)도 치쿠젠[筑前] 전부와 치쿠고[筑後]와 히젠[肥前]에 각각 2개군(郡)을 하사하여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타카카게가 모우리 가문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가는 히데아키[秀秋]를 양자로 받아들인 것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세자가 없는 모우리 가문에 히데요시의 양자 히데아키가 후계자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 타카카게는 경악했다. 아키[安芸] 명문가의 피가 히데요시의 친척이라고는 하여도 기껏해야 잡병[足軽]이나 맡을 인물에게 더럽혀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타카카게 필사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히데요시의 주치의인 야쿠인 젠소우[施薬院 全宗]에게 히데요시의 의향이 어떤지 묻자, 히데아키를 모우리에 보낸다는 건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때 자기 가문을 희생시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52만석의 영지(領地)를 킨고 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 님에게 물리 드리고 싶습니다"
는 요청하였다.
모우리의 분가라고는 하여도 코바야카와 가문은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때부터의 명문가였다. 이런 명문가가 히데아키 따위에게 더럽혀 지는 것 또한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타카카게에게는 이미 동생인 히데카네[秀包]를 양자로 하고 있었음에도[각주:5], 그를 분가시키면서까지 히데아키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싶다며 간청한 것이었다. 타카카게의 모우리 가문 안녕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오히로이[お拾=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자 양자 히데아키의 처우에 곤란해 있었던 히데요시는 타카카게의 신청에 굉장히 기뻐하였다고 한다. 타카카게에게는 은거료(隠居料)로써는 파격적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 3만석이 주어졌다.
이보다 앞선 1593년 1월.
타카카게는 조선에서 전군을 그 지휘하에 두고서 명(明)나라의 병력 30만을 상대로 싸웠다. 적의 대장은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던 이여송(李如松)이었다. 이 명나라 장수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를 패주시킨 기세를 타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타카카게는 이를 격파하는 대공을 세운 것이었다.[각주:6]
그러나 조선에 있던 중 병을 앓았고 귀국하여 미하라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597년 뇌혈관 장애로 졸도하여 일생을 마쳤다.
참고로 코바야카와 가문은 히데아키의 대가 되어서 자식이 없어 단절되지만,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 당시 모우리 가문의 당주인 모우리 타카치카[毛利 敬親]가 일족 중의 한 명에게 코바야카와 가문을 잇게 하였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33년 태어났다.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삼남. 부친 모토나리, 조카 테루모토[輝元]를 도와 츄우고쿠[中国]를 경략. 미하라[三原]를 본거지로 하여 세토 내해[瀬戸内海]에 강력한 수군을 편제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와 강화한 후, 히데요시의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오다와라[小田原] 정벌[각주:7]에 참가. 조선의 역에서는 1593년 명(明)나라의 대장 이여송(李如松)의 대군을 개성(開城)에서 물리쳤다. 히데요시의 양자 킨고 츄우나곤 히데아키[金吾中納言 秀秋]를 세자로 받아들였으며, 1597년 6월 20일 죽었다. 65세.
히데요시[秀吉]도 그렇게 생각한 듯 했다. 실은 이 히데야스가 마장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던 해에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태어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는 그렇게 많이 양자를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히데야스가 가지고 있던 ‘인질’로서의 정치적 효용도 과거의
것이 되고 있었다.
- 이을만한 명문가가 있다면……
하고 히데요시는 양자 히데야스를 다른 가문에 보내기로 마음먹기 시작했다. 후년, 같은 양자인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를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낸 것과 같은 것을 –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마장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 칸토우[関東]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에게서 이야기가 왔다. 유우키 씨(氏)라고 하면 카마쿠라 시대 때 부터의 명문가로, 센고쿠[戦国] 때 갑자기 생긴 벼락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현 당주는 하루토모[晴朝]라고 하며, 이 해 – 1590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공격했을 때, 하루토모는 내속(來屬)해서 토요토미 가문의 산하에
들어왔다. 그때 그는 히데요시와의 유대를 강하게 하기 위해,
“소인에게는 아이가 없어 유우키 가문은 졸자의 죽음과 함께 끊어지게 생겼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가 누군가 정해주시면 그 사람을 상속자로
하겠습니다”
하고 부탁해 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기특함을 기뻐하며,
“그러고 보니 알맞은 사람이 있네”
하며 곧바로 히데야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유우키 가문이라면 카마쿠라 때부터 무문(武門)의 명문가로 일본에서 유명했다.
이 오다와라의 진(陣)에 이에야스[家康]도 참가하고 있었다. 부르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올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항상
가신으로 대하지 않고 객장(客將)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성의를 보여 일부러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에는 이런 종류의 용무에 항상
얼굴을 내미는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 ]를 선택해 알선을 맡겼다. 요시타카는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귀가(貴家)에 있어서 정말로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고 요시타카는 말했다.
정말 그러할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이 오다와라 정벌의 종결과 함께 칸토우 250만석 이봉(移封)의 내락을 받고 있었다. 새로 이전할
곳의 수도는 꼭 에도[江戸[각주:1]]로 하시길 – 이라는 조언까지 히데요시에게 받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낳은 히데야스가 유우키 가문을 상속받아 유우키 성(城)의 성주가 된다고 한다. 유우키
성(城)은 칸토우의 북동에 위치하며, 오우슈우[奥州]에서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새(要塞)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땅에 히데야스를 둔다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의 방위에 있어서 이 보다 고마운
일은 없었다.
“예. 이보다 고마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는 감격하여 졸자에게 있어선 아무런 이의도 없다는 뜻의 대답을 했다.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곧바로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라는 자격으로 칸토우로 내려가, 에도에서 진짜 아비인 이에야스와 대면을 한 후 거기에서 오우슈우
가도(街道)를 거슬러 올라가 유우키 성(城)에 들어갔다. 거기서 처(妻)를 얻었다. 처는 유우키 가문의 당주 하루토모의 손녀로 사쿠코[咲子]라
하였다.
히데야스는 이때부터 ‘유우키 히데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석고는 5만석이었다. 전 당주인 하루토모는 은거하였고,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따로 은거료(隱居料)를 하사하였다.
득을 보았다 – 는 것이 이에야스였다. 인질인 히데야스를 실질적으로 되돌려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더구나 그를 위해서 따로 영지(領地)를 떼어 줄 필요도 없이, 다른 가문의 땅을 상속받아서 돌아온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히데야스는 복을 가져다 주는 자식일 것이다.
하시바 성[羽柴姓]에서 유우키 성(姓)을 이은 히데야스는 다이묘우(大名)로서의 입장도 바뀌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토쿠가와 가문에 속한 다이묘우였다.
- 격이 떨어졌다.
는 감정이 히데야스에게는 있었다. 거기에 조금 맘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동생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보다 끗발이 낮아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이런 노골적인 감정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있을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저 자존심 강한 히데야스의 기상으로 보건대, 이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불운한 환경에 만족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히데야스는 참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오만[おまん]의 자식은 굉장히 참을성 있는 사나이로 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런 만큼 장래가 두려웠다.
가문을 상속한 뒤 히데야스는 그에 대한 보고 겸 인사를 하기 위해서 에도에 왔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크게 환대하라고 시켰고 아예
날을 잡아서는 이 자기 아들과 대면하였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굉장히 정중하게 히데야스를 대했다.
- 유우키 쇼우쇼우님(結城 少将殿 – 이하 ‘쇼우쇼우[少将]’를 ‘소장’으로 씀 – 역자
주).
이라는 호칭으로 이 아들을 불렀으며, 무언가를 물어볼 때도 항상 미소를 띄웠다. 조심함이 있었다. - 라기보다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히데야스가 태어났을 때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대면을 꺼렸고 그 후 토요토미 가문에 양자로 주고 말았다. 더욱이 토쿠가와 가문의
자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가문을 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고 생각하여, 그렇게 생각하면서 히데야스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이 혈색이 좋고 눈이 큰 젊은이는 이에야스에 대해서도 히데타다에 대해서도
공손하여 조금도 그러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젊은이를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하여, 말 그대로 종기가 난 곳을 건드리는 듯이 조심조심하였다.
- 소장님께 예의를 다할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도 머리에 새겨질 정도로 말해두었으며, 특히 세자인 히데타다에 대해서는 그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성격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만 채워 주면 되었다. 만약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히데야스의 자존심에 상처라도
주는 행태를 보인다면 이 젊은이는 필시 이에야스가 죽은 후 히데타다를 멸하고 토쿠가와 가문을 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남이 띄워주면, 지 잘난 줄 아는 병진은 아닌 듯 하구만’
이라고도 이에야스는 관찰했다. 이 점이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다소 안심이기는 했다.
그런데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이에야스와 만남을 가진 후 자기의 영지(領地)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상경해서는 후시미[伏見]를 떠나지
않았다. 후시미에 있는 히데요시의 의향이었다. 히데요시는 히데야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으며, 어디까지나 후시미의 궁중 안에서 근시(近侍)시키고자 있었다. 히데야스도
히데야스로 칸토우에 있는 것보다 히데요시의 슬하에 있는 쪽이 편했으며 마음도 흥겨운 듯 했다.
이후, 히데야스는 예전 양아비인 히데요시의 죽을 때까지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1592년의 조선 침략 때는 히데요시를 따라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의
대본영까지 따라갔으며, 히데요시가 후시미로 돌아오면 그림자와 같이 호종하며 후시미[伏見]로 돌아왔다. 한시도 히데요시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토요토미 가문 양자들 중에서는 가장 충실한 양자였을 것이다. 하기사 히데요시가 놓지 않았다.
“소장님은 내 곁을 떠나지 마시게”
하고 히데요시는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끝에 꼭 이 말을 붙였다. 노인이 되어 심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소장 히데야스라는 젊은이가
그렇게나 귀여웠던 것인지 혹은 정치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 필시 이유는 그것들이 전부 섞여 있을 것이다.
정치상의 이유라는 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긴 것이다. 히데야스의 존재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눈에
복잡미묘하게 비쳐져 왔다.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과 토쿠가와 가문을 잇는 가교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히데요시는 죽는다.
히데요리는 남는다. 천하의 권력은 이에야스의 손에 쥐어질지도 모른다. 히데요리의 앞날은 예전 오다 가문 공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죽을까,
쫓겨날까, 약소 다이묘우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때야말로 유우키 히데야스가 일어나 히데요리의 좋은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기대했다.
어쨌든 히데야스는 칸토우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우키 성(城)은 가신에게 맡겨둔 채 그 자신은 오오사카[大坂]와 후시미에 저택을 지어
거기에 상주했다. 매일 후시미 성(城)에 등성하였다. 히데야스의 모습은 항상 궁중의 대기실에서 볼 수 있었으며, 히데요시는 그런 것을 노옹(老翁)의
천진난만함으로 기뻐했다.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히데요시가 기쁘다고 하면, 그리고 그것이 이에야스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히데야스는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말년, 병으로 인해 눕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때때로 히데야스에게 허리를 주무르게 하거나 했다. 어느 때인지,
“이것이 늙어서의 즐거움이란다”
하고 히데요시는 누워서 말했다. 젊을 때는 분골쇄신하며 일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몸의 뭉친 곳을 주무르게 한다. 이승에서 이보다 행복한
것은 없다 –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야스의 손바닥이 스쳐가고 있는 히데요시의 몸은 더 이상 육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정도로 말라
삐들어져 있었다. 히데야스는 그것에 슬픔을 느꼈다.
“오히로(お拾=히데요리)는 너의 동생이다. 오랫동안 잘 돌보아 주렴”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검게 변색된 피부가 이제는 종이와 같아, 생기가 없었다. 그 건조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말을, 히데야스는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동생이다’
라는 말을 들어도, 솔직히 말해 히데야스에게는 그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히데요리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천하의 숭경(崇敬)을 모으고 있었으며,
관위는 정사위(正四位)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였고, 양자이지만 형이라고 하는 히데야스는 아주 멀치감치 떨어져서밖에 배알(拜謁)할 수 없었다.
동생이라고 하면 한 명 더 있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 히데타다였다. 그는 틀림없이 피가 이어진 동생이었지만, 그러나 이쪽의 동생도 이미
종삼위(従三位) 츄우나곤[中納言]이며, 형인 히데야스는 그 가신 격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히데야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동생은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에 비해 형이라고 하는 자신은 현실의 위세가
너무나도 낮았다. 히데야스는 지금도 여전히 유우키 5만석의 영주이며 불과 200명 정도의 무사[侍] 밖에 거느리지 못하였다. 이것이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자신의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자신이 너무
비참했으며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히데요시라는 양아비에 대해서 골육의 정과 같은 마음을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즈음엔 함께 욕실에도
들어갔으며, 욕실뿐만 아니라 히데요시는 불이 붙은 선향(線香)을 들고 손수 히데야스의
피부를 태우며 뜸을 떠준 적도 있다. 그런 기억은 진짜 아비 이에야스와는 한번도 없었다. 이에야스라는 아비의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그 몸과
스친 적은 없었다.
지금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지금 손에 느껴지는 이 노인 쪽이 훨씬 육친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수년이 지나 히데야스가 28살 때 히데요시가 죽었다. 1598년 8월 18일이었다. 그날 밤 이후 정세는 불안정이 이어져 후시미
성(城) 밑은 밤마다 소란스러웠으며, 유언비어가 날라 다녔고, 3일이 지나지 않아 시민들은 가재를 짊어지고 도망치기 위해 거리를 내달렸다.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의 권위에 의해 억제되어있던 토요토미 가문의 파벌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공공연해졌다. 그들은 무력으로
대항하며 싸우고자 했다. 다이묘우끼리 성 밑에서 싸운다는 소문이 자주 돌았으며 더구나 이는 뜬소문이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질서가,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질서를 재건할 수 있는 인물은 어린 주군 히데요리가 아닌
이에야스여야만 한다는 자연스런 기대가 그에게 모였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정권하에서 가장 큰 다이묘우이며, 오다 가문 때부터 이어진 그 역사적
명성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가라앉히는데 충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겐키-텐쇼우[元亀-天正][각주:2]의 혼란이 다시올 것이라는 바램이나 견해가 세상의 밑바닥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코이치로우[小一郎]가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은 것은, 형제의 첫 대면을 치른지 3년 후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織田家]에서 낮은 신분인 채로 스노마타[墨俣]의 요새(砦) 수비에 임명 받았을 즈음이었다. 히데요시는 코이치로우뿐만 아니라 그 어미, 누나와 매형, 그리고 여동생인 아사히[朝日]도 요새로 불러 크게 대접하였다. 이 때 오나카[お仲]는 처음으로 히데요시의 처인 네네[寧々]와도 대면하였고, 네네의 양갓집 동생인 아사노 야헤에 나가마사[浅野 弥兵衛 長政]와도 면식을 텄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가족과 네네의 친정 쪽의 사람들과의 대면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그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접대하였고 곧이어 술자리가 끝나자,
“코이치로우는 이 요새에 남아라”
라고 이 아비 다른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나카는 될 수 있으면 막고 싶었지만 코이치로우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코이치로우는이날부터 무사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동생을 별실로 불렀고 이어서 히데요시에게 있어서 처남에 해당하는 아사노 나가마사도 불러 오게 한 후,
“둘이서 나를 도와라”
고 말했다. 옛날부터 무가(武家) 관습으로 가문의 당주가 대장이 되며, 그 동생이나 숙부가 곁에서 수족과 같은 부장(副將)이 되어 그것을 보좌하였. 말하자면 가문은 일족의 혈맹에 의해 성립되어 가는 이상 히데요시도 그런 형식을 취하고 싶었다.
“코이치로우는 언젠가는 내 대리인(名代)이 되어야 할 때도 올 것이다. 뭐든 잘 익혀두도록”
라고 말하며 이 즈음 이미 스노마타 성에 와서 히데요시의 휘하가 되어 있던 미노[美濃]출신의 군사(軍師) 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에게 코이치로우의 교육을 부탁했다. 한베에는 스노마타로 쳐들어 오는 적과 싸우는 실전 속에서 아이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쳐 주듯이 전투의 밀고 당김을 알려 주고적 상태를 보는 법, 명령을 내리는 법, 사졸들을 돌보는 방법 등 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가르쳤다.
코이치로우는 좋은 학생이었다. 언제나 조신한 태도로 그것을 들었고전투 속에서 보고 배웠다. 실제로 지휘시켜 보자, 어떤 것이든 과하지 않고 부족함 없이 한베에가 가르친 대로 행했다. 그 이상의 재능은 없었지만, 성을 지키는 것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한베에는 가졌다.
‘이것도 하나의 기량일 것이다’
고 한베에는 생각하였다. 한베에가 보건대, 독창성이 없기에 어떤 일에건 익숙해지는 것이 빨랐다. 성격이 이의(異意)를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지시한대로의 것을 한다. 더구나 그 행함이 견실했다. 마치 성을 지키기 위해서 태어난 듯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오다 군[織田軍]이 기후 성[岐阜城]을 공격할 때, 이 동생에게 진(陣)을 지키게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 전투에서 하치스카 당[蜂須賀黨]의 경병(輕兵) 소수만을 이끌고 기후 성 뒷산에서 샛길을 타고 성 안으로 잠입하였다. 출발에 앞서 코이치로우에게 미리,
“내가 이끄는 부대는 성 안으로 은밀히 잠입하여 안에서부터 성문의 빗장을 풀겠다. 그 때 신호로 장대에 매단 표주박을 높게 쳐들 테니까 그걸 보면 곧바로 밖에서 문을 열고 성안으로 들어와 나와 합류하거라”
고 사전에 계략을 설명해 두었다. 만약 이 방법이 어긋났다면 히데요시는 성안에서 자멸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코이치로우는 타이밍에 맞추어 지시한대로의 것을 멋지게 성공하였다.
“좋은 동생분을 두셨군요”
전투가 끝난 뒤 한베에가 일부러 축복할 정도였다.
한베에의 지론으로는 혈족군단에 있어서 뛰어난 인물은 형 하나로 족했고, 동생이라는 것은 형보다 능력이 뛰어나서는 안 되었다. 뛰어나면 사졸은 자연히 동생에게 달라붙어 가문 통제가 흐트러질 것이다. 또한 동생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 – 는 것이 한베에의 생각이었다. 욕심이 많으면 형의 부하인 다른 부장(副將)들과 공명(功名)을 다투기 때문에 가문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두 가지 점에서 코이치로우라는 젊은이는 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정도가 좋았다.
스노마타 즈음부터 십 수년이 흘러,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츄우고쿠[中国]로 향하였을 때, 코이치로우는 이 군단의 선봉장으로써 전쟁터에 있었고하리마[播磨]에서 빗츄우[備中]에 걸쳐 각지를 전전하며 무공을 세웠다. 그가 지휘하는 모습은 오다 군단의 다른 무장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기에 무장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크게 높아졌다.
이 시기.
타케나카 한베에는 현지에서 지병(持病)이 재발하여 자리에 누웠다. 코이치로우가 병문안을 하러 왔을 때에 한베에의 용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는 시중드는 소년에게 등을 받치게 해서는 몸을 일으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고 스노마타 때부터 순종적인 제자를 위해서 이미 가냘퍼진 숨을 쥐어 짰다.
“몸의 안전을 꾀하시길. 병법에서 궁극(窮極)의 극의(極意)는…. 그것입니다.”
한베에의 걱정은 코이치로우의 평판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오르면 자연히 마음도 거만해 진다. 오만해 져서는 다른 부장의 원한을 사게 되어참언(讒言)을 치쿠젠[筑前]님(=히데요시)에게 할 수도 있다. 공을 세우면 그것을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시길. 다른 무장들은 공명을 세워야 출세를 할 수 있지만 당신은 아무리 공이 없다고 하여도 치쿠젠님의 동생분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오셨다”
고 한베에는 새삼 코이치로우의 이 십 수년간의 발자취를 칭찬하였다. 전혀 명성을 떨치려고 하지 않았고 공은 부하에게 돌렸으며, 히데요시의 대리인[名代]이 되어도 히데요시만을 세우고 자신의 존재를 자랑하는 일이 없었다.
“잘 해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어떨지 모른다. 특히 이 하리마[播磨]부근에서의 코이치로우의 뛰어난 활약과 평판은 – 그의 인격을 바꾸어 버릴지도 몰라, 한베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림자처럼 되시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히데요시의 그림자가 되어 그것만을 만족하고 코이치로우 히데나가라는 존재를 버리라는 것이었다. 앞날을 생각하면 그걸 말고 당신께서 이 세상에 있으실 장소가 없다. 병법의 극의는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는 것에 있다. 아시겠습니까? 하고 한베에는 확실히 해 두었다.
코이치로우는 역시 이론(異論)을 말하지 않고 순순히 끄덕이며,
“좋은 말씀 감사 드립니다”
고 눈물을 담아 감사를 전했다. 이로부터 2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한베에는 숨을 거두었다. 자연히 위에 있는 것은 한베에가 이 세상에서 말한 최후의 말이 되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북부오우미[近江]세 개의 군(郡) 외에 하리마[播磨]도 하사 받아서는 이 히메지 성을 거성(居城)으로 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빗 속의 급행군을 마치고입성해서는 곧바로 욕탕(浴湯)에 들어가, 욕실(浴室)에서 온갖 군령을 내렸다. 히데요시는 이 일전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듯이 성 안에 있던 금은이나 쌀을 모두 사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한 뒤,
“성을 지키는 것은 코이치로우가 해라~!”
고 말했다. 코이치로우는 욕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것을 들었다.
‘이것은 치욕이다’
라고 생각하여, 한베에가 죽은 뒤 히데요시의 모신(謀臣)의 자리에 앉아 있는 쿠로다 칸베에[黒田 官兵衛=죠스이[如水]]에게 따지며, 이 너무도 불명예스러운 자리 배치의 변경을 원했다.
하고자 하는 주장은 당연할 것이다. 형인 히데요시가 아케치와의 일전에서 패하기라도 한다면 이 히메지 성은 적의 일격에 무너져 버릴 것이. 성 안에는 500명의 수비병밖에 없으며더구나 농성에 필요한 병량(兵糧)은 나누어 주어서 없고, 또한 그 수비 임무라는 것이 하리마[播磨]의 여러 호족들에게 받은 인질의 감시와 히데요시의 첩인 통칭 히메지도노[姫路殿][각주:1]라고 불리는 여인의 보호 정도였다. 이 천하존망의 시기에 남자로서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쿠로다 칸베에는 코이치로우의 소매를 끌고서는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말씀을 하시는군요”
라고 말했다. 칸베에가 말하기를 – 이번 일전은 천하를 판가름하는 싸움이 될 것이다. 히데요시 휘하에 있는 무장들의 8할은 오다 가문에서 파견 나온 장수들로, 이번 일전에서 히데요시를 앞세워 자기 가운(家運)을 트이게 하기 위해서 안달들이 나있다. 치쿠젠님(=히데요시)의 운은 이런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트이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은 육친이시니 참으시길. 그들과 공을 다투면 안됩니다. 공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시라는 것이었다. 평소의 코이치로우였다면 온후한 얼굴로 끄덕이며 이 도리에 따랐을 것이지만,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이 온후한 남자라도 감정을 주체 못하고,
“나는 언제나 성이나 지켜야 한다. 형이 모든 것을 거는 이 때만큼은 이 코이치로우도 야마시로[山城]의 전쟁터에서 죽고 싶다!”
고 큰소리로 외쳤다. 목소리만이 히데요시와 닮아 컸다. 그 목소리가 욕실에 있던 히데요시의 귀에도 달했다.
“코이치로우!!”
하고 역시 큰소리로 외치며,
“다 들린다! 뭐 그런 생각이 다 있느냐! 니가 그런 말을 한다면 나가하마[長浜]는 어쩌란 말이냐? 나가하마는 지금 버린 성이나 마찬가지다. 지금쯤 어머니도 내 마누라도 시뻘건 불길 속에서 타 죽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고 소리질렀다.
오우미 나가하마 성은 히데요시의 본성(本城)으로, 거기에 오나카도 네네도 살고 있었다. 적은 당연히 이 성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병가상사(兵家常事). 어머니도 네네도 아녀자지만 성벽 뒤에 몸을 기대고 지키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래도 니는 히메지의 수비가 불만인가? 아니면 히메지에서 죽을테냐?”
히데요시도 역시 흥분했는지 말을 꼬여가며 되지도 않는 논리를 내세우며 무조건 호통만 치고 있을 뿐이다. 코이치로우는 이미 그 호통소리에 압도되어 풀이 죽었다.
‘세상에 동생이라는 자리만큼 처량한 것이 없다’
고도 생각하였다. 형인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세상에 동생만큼 편리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 정도로 매도(罵倒)당하면 - 다른 무장이라면 원한을 가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갈지도 모르지만, 동생이라면 그런 점에서 안심할 수 있어 좋았다. 지금도 코이치로우는 뚱뚱한 몸을 움츠리고서는 둥그런 얼굴도 들지 않고 그냥 떨고만 있었다.
“알겠느냐?”
하고 히데요시가 못을 박자 코이치로우는 허리를 굽히며,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데요시는 히메지를 출발, 곧이어 야마시로[山城]야마자키(山崎)에서 아케치 군[明智軍]을 물리치고 오다 정권의 후계자로써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코이치로우는 히데요시의 천하 패권을 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즈가타케전투[賤ヶ岳の戦い][각주:2]에도 참가하였고, 코마키[小牧]전투[각주:3]에도 종군하였다. 또한 킨키[近畿]의 소탕전(掃蕩戰)이라고 부를 수 있는 키슈우정벌[紀州征伐]에 참가하여 평정 후, 히데요시에게서,
“코이치로우는 키슈우를 다스려라”
는 명령을 받았다. 키슈우는 노부나가 시대부터 골치를 썩여왔던 곳으로 지역 무사들의 기풍이 거칠고 독립심이 강하여, 센고쿠[戦国] 100여년 동안 그들은 연합하여 키이[紀伊]를 합의에 의해 운영하여, 한 번도 통일 다이묘우[大名]를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거기에 '잇코우종[一向宗][각주:4]의 기반이 되는 땅으로 영민(領民)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만을 절대적인 존재로 하여 지상(地上)에 있는 현세의 교주(敎主)조차 존중하지 않는 풍토가 있었고, 또한 산에는 산적이 많았으며 해안의 항구는 대부분이 해적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키이[紀伊]는 코이치로우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다스려지지 않는다’
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쓰다듬으며 가지고 있는 불평들을 끈기 있게 잘 들어주고, 계속해서 불공평을 없앤다는 점에서는, 많은 장수들이 있다고 하여도 코이치로우만이 할 수 있었다.
이 동생은 그 기대에 응했다. 1585년 3월 봉토(封土)를 받자마자 코사이가[小雑賀]에 성[和歌山城]을 쌓아 신영주(新領主)의 위용을 나타내는 한편, 부하의 잘못에는 벌을 내려 법제를 철저히 하고, 민치에 힘을 썼기에 그토록 다스리기 어렵다고들 하던 이 지역의 호족들이 이상할 정도로 잘 따라 키노카와[紀ノ川]강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히데나가의 영지(領地)인 – 북으로는 이즈미[和泉]에서 남으로는 쿠마노[熊野]에 있는 70여 만석의 산야(山野)가 아주 평온해 졌다.
‘코이치로우에게는 기묘한 품성과 재능이 있구나’
하고 그것을 명령했던 히데요시가 제일 먼저 놀랐다. 히데요시가 보건대 코이치로우는 천성의 조정가(調整家)이며 민정가(民政家)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히데요시를 또 기쁘게 한 것은 좆병진들이 많은 히데요시의 혈연 중에서도 이 코이치로우만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걸출하다는 것이었다. 장래에 그 기량과 인격을 보건대 필시 히데요시 정권의 주석(柱石)이 되어 줄 것이다.
히메지 성을 지킨 것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로 알려져 있다. 히데나가는 야마자키에 출진했었다. 그것도 최중요 위치였던 텐노우잔[天王山]산에 포진해 있었고 한다.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카네[織田 信包]의 딸인 히메지도노[姫路殿]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 것은 노부나가가 죽은 다음의 일로(내가 알기로는 노부나가의 셋째 노부타카[信孝]와 히데요시가 싸울 즈음 노부카네가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받쳤다는 설이다). 아무리 히데요시가 유력 무장이라도 노부나가의 조카를 측실로 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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