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년 6월 2일 자인(自刃) 49세.
1534년 ~ 1582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洲)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斎藤)씨(氏)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浅井),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씨(氏)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사(寺)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년 5월 29일.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성(城)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월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년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畿内)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그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년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 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え)를 행하였다.
같은 해 9월.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년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씨(氏)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지(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 2)에 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사(寺)의 변(變)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월 29일.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구치(粟田口 3) 쪽을 통해서 시죠우(四条)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사(寺)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들 2~30인]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中国), 시코쿠(四国)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堺)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월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월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사(寺)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일.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堺)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二条)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妙覚)사(寺)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월 1일.
혼노우(本能)사(寺)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権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経元), 곤츄우나곤(権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勧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우(関東)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茶会)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가 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 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寺)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는 1만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월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사(寺)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寺)를 포위하였다.
6월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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