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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2.15 이 남자가 죽을 때#3 -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2. 2008.02.10 오다 노부나가 6
참으로 용감하도다. 이번 생에서 그 용감함에 상을 줄 수는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상을 내리겠다.
勇鋭と言うべし。今生で恩賞を与える事はかなわぬが、願わくば来世において授けようぞ

 
혼노우사의 변(本能寺の変)이 터졌을 때, 아버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곤경에 빠졌다는 급보를 받은 후계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는 혼노우사에서 멀지 않은 묘우가쿠사[妙覚寺]에 머물고 있었다.
 
곧바로 구원에 나서려 했으나[각주:1], 도중에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각주:2] 발길을 돌려 황태자의 거처인 니죠우고쇼[二条御所]로 향했다. 노부타다는 황태자 일행을 안전하게 내보낸 후, 방어 시설조차 없는 이 고쇼에서 농성하기로 결심했다.
 
일부에서는 탈출을 권유했지만, 노부타다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렇게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다. 분명 철저히 준비했을 것이다. 만약 도망치다가 잡병들에게 붙잡혀 후세의 웃음거리가 된다면 면목이 없다."
 
노부나가의 사망 소식에 노부나가의 상경에 따라 교토 각지에 흩어져 머물고 있던 노부나가의 친위대[馬廻衆]들은 주군의 후계자를 지키기 위해 니죠우고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거처였던 고쇼는 방어에 취약했고, 급히 달려온 병력 중 제대로 된 갑옷을 갖춘 이는 드물었다.
 
노부타다를 따르는 병력은 휘하 500~600명과 노부나가 친위대 약 1천 명, 도합 1,500여 명에 불과했다. 이에 맞서는 아케치 반란군은 1만 수천 명으로 병력적인 면에서 압도적 열세였다.
 
기록에 따르면 노부타다 군은 초반에 2~3차례 적을 물리치며 용감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검성(剣聖) 가미이즈미 노부츠나[上泉信綱]의 수제자인 히키타 분고로우[疋田文五郎][각주:3] 에게서 면허개전(免許皆伝)을 받았던 검호(剣豪) 노부타다는 전장의 맨 앞에서 홀로 적병 17~18명을 베어 쓰러뜨렸다고 전해진다.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부하 시모카타 야사부로우[下方弥三郎]가 돌격해 싸우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옆구리를 베여 창자가 튀어나온 채로도 계속 싸우는 것을 본 노부타다는 이렇게 외쳤다.
 
 "참으로 용감하도다. 이번 생에서 그 용감함에 상을 줄 수는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상을 내리겠다."
(勇鋭と言うべし。今生で恩賞を与える事はかなわぬが、願わくば来世において授けようぞ)
 
이 말을 들은 시모카타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적진으로 돌격했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격전은 한 시간을 넘겨 이어졌고, 수적 우위에 서고도 노부타다의 강력한 저항에 당황한 아케치 군은 니죠우고쇼의 이웃인 코노에 저택近衛邸을 무단 침입하여 지붕에 올라가 높은 위치에서 노부타다군을 내려다 보며 철포와 활로 공격했다.[각주:4] 여기까지 이르자 철포와 화살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은 노부타다는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하였다.
 
결국 니죠우고쇼에 아케치 군의 침입을 허용하여 불길 속에 니죠우고쇼가 함락되자, 노부타다는 카마다 신스케[鎌田信介]에게 카이샤쿠[介錯]를 지시하고는 자신의 시체는 마루를 뜯고 그 밑에 숨기라 하고는 배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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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기록에서는 당시 노부타다의 활약에 대해,
 
“황태자의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엄선된 유력한 무사들이었기에 잘 맞써 싸웠지만, 1시간 이상 지나자 미츠히데 군쪽이 숫자가 많았고 잘 무장되었으며 철포도 많이 준비되었기에 그런 그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그럼에도 후계자 노부타다는 굉장히 용감히 싸웠으나 철포와 화살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다. 결국 우세하게 된 다수의 아케치 군세가 저택에 침입하여 불을 질렀기에 많은 자들이 불에 타 죽었다. 그들에 섞여 후계자 노부타다도 또한 그 외의 높은 신분의 무사들이나 병사들과 함께 같은 운명을 맞아하였다.”
 
나라奈良에 있는 승려들의 기록에서는 전해들었다며, 
 
“문 앞에서 3번 상대를 격퇴하였지만 상대는 수가 많았기에 결국 전사하였다.”
“죠우노스케 님[城介殿][각주:5] 비할 데 없는 활약을 하셨다고 한다.”
 
동시대의 전기작가 오오무라 유우코[大村由己]는 소우켄인도노추선기[総見院殿[각주:6]追善記]에서,
 
“마지막임을 깨달은 노부타다는 가장 앞서 돌격하여 달려드는 적병 17~18명을 쓰러뜨렸다. 노부타다를 따라 돌격한 부하들도 뒤쳐질 수 없다며 분전하여 적을 격퇴시켰다. 그때 미츠히데의 군에서 아케치 마고쥬로우[明智孫十郎], 스기우 산에몬[杉生三右衛門], 카나리 키요츠구[加成清次] 그 외의 강건한 무사 몇 명이 이름을 대며 달려들었다. 이를 본 노부타다는 그들의 한 가운데에 뛰어들었다. 평소 단련해 왔던 옛 검법과 지금의 검법에서 전해지는 비전의 초식, - 영걸일태도(英傑一太刀)를 극한까지 구사하여 상대하니, 아케치 마고쥬로우를 쓰러뜨렸으며, 스기우 산에몬, 카나리 키요츠구의 목을 베었다. 노부타다의 부하들도 있는 힘껏 싸워 나가 적을 물리치며 최후의 전투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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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타다의 목을 벤 카마타 신스케[鎌田信介]는 어찌저찌 묘우가쿠사를 탈출하여 고우야 산高野山에 숨었다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부름을 받고 그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동아시아 7년전쟁 때 조선으로 건너와 남원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한다. 이후 조선에서 사망.
 
노부타다에게 상찬받은 시모카타 야사부로우下方弥三郎는 이때 당시 29세. 어렸을 때부터 노부타다를 섬겼으며, 행정면에서 노부타다를 보좌하는 한편 무력면에서도 타케다 정벌전 때 크게 공을 세웠다고 한다. 

  1. 당시 직선거리로는 800~850미터, 길로 가면 약 1km, 도보로는 약 12~15분 정도, 급하게 말을 몰면 5분 이내의 거리 [본문으로]
  2. 전한 이는 무라이 사다카츠村井貞勝로, 당시 노부나가 정권하에서 쿄우토京都와 관련된 모든 행정 및 사법을 관장하는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에 일본 조정과 쿠게[公家]와 외교 창구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3. 덧붙여 히키타 분고로는 야규우 세키슈우사이[柳生石舟斎]와 세 번 대결하여 모두 이겼고 이에 야슈우 세키슈우사이가 노부츠나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본문으로]
  4. 이로 인해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힘을 빌려주었다는 의심을 산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는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織田信孝]와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의심을 사 당분간 도망다녀야 했다 [본문으로]
  5. 노부타다의 관직인 아키타죠우노스케秋田城介] [본문으로]
  6. 오다 노부나가의 계명 [본문으로]

오다 노부나가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8. 2. 10. 08:14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82 6 2자인(自刃) 49.

1534 ~ 1582.

오와리(尾張) 키요스() 성주(城主).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노(美濃)의 사이토우()()를 멸망시켰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입경(入京).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를 멸망시키지만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해 자해(自害)







최후의 상경(上京)


 1582 5 29.

 오다 노부나가는 아즈치(安土)()을 출발하여 오래간만에 상경하였다. 이보다 앞선 1 28일에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중지된 적도 있기에 작년 3월 이래 실로 1 2개월 만의 상경이 되었다.

 2년 전. 이시야마(石山) 혼간지(本願寺)를 굴복시킴으로써 더 이상 키나이()에서 노부나가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게 되었다. 안도감(安堵感)때문인지 왕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을 이 즈음의 노부나가에게서는 볼 수는 없다. 반대로 유흥(遊興)적인 면을 [신장공기(信長公記)]의 기사에 빈번히 볼 수 있다.


 1581 2월에 상경한 노부나가는 선교사에게서 데려온 흑인[각주:1]을 선물 받았고 그 직후에는 궁궐의 동쪽 마장(馬場)에서 텐노우(天皇)나 쿠게(公家)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오다 군단의 열병식(閱兵式)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조로에(馬揃)를 행하였다.


 같은 해 9.

 차남(次男) 노부카츠(信雄)를 사령관으로 하여 이가(伊賀) 정벌을 명하였고, 또한 1582 3월에는 첫째인 노부타다(信忠)를 총대장에 임명하여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정벌을 명하였지만, 노부나가 자신은 직접적으로 작전에 관여하는 일 없이 평정 후에 현지 검분(檢分) 만을 했을 뿐으로, 그 모습은 전적(戰跡地)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카이(甲斐) 원정에서 귀국했던 노부나가에게 조정(朝廷)에서 칙사가 파견되어,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각주:2])추임(推任)한다는 뜻이 전해졌지만 노부나가는 회답을 하지 않은 채 혼노우(本能)()의 변()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5 29.

 오후 12시 즈음부터 내린 비 속에서 아와타(粟田口[각주:3]) 쪽을 통해서 시죠우() 니시노토우인(西洞院)에 있는 혼노우(本能)()에 도착했다. 아와타구치에는 미리 노부나가 일행을 마중하려는 쿠게(公家)의 무리들이 다수 모여있었지만 마중할 필요는 없다는 고지를 모리 란호우시(森 乱法師=란마루(蘭丸)) 나리토시(成利)가 와서 전했기에 쿠게(公家)들도 집들로 돌아간 후 였고 또한 함께 한 수하들도 [코쇼우(小姓) 2~30] 정도였기 때문에 상경 모습은 조용했다. 상경한 시각은 오후 2시 즈음이라고도 오후 4시 즈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쪽이건 이것이 마지막 상경이 될 것이라고 노부나가 자신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상경의 주요한 목적은 츄우고쿠(), 시코쿠() 정벌이라는 양 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이즈미(和泉)의 사카이()에서 철갑선(鐵甲船)을 타고 아와지시마(淡路島)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때문에 6 4일에는 쿄우토(京都)를 출발할 예정으로 있었기에 5일간 쿄우토에 있을 예정이었다. 혼노우(本能)()의 변은 그 재경(在京) 3일째에 일어난 것이다.


상경 축하의 나날


 그렇다면 그 3일간의 모습을 살펴보자.

 5 29일 상경했던 노부나가는 아와타구치에서 첫째 아들 노부타다(信忠)의 마중을 받아 함께 혼노우(本能)()로 왔을 것이다.


 이보다 먼저인 21.

 노부타다는 토오토우미(遠江)의 하마마츠(浜松)에서 아즈치(安土)로 올라 와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함께 쿄우토(京都)에 와 있었다. 하지만 27일이 되어서 노부나가가 갑자기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자, 구경하러 오오사카(大坂), 사카이()로 내려가는 이에야스 일행과 헤어져 쿄우토 니죠우()에 있는 노부타다 전용 숙소인 묘우가쿠()()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재경 이틀째인 6 1.

 혼노우(本能)()에는 텐노우(天皇)와 사네히토 신노우(誠仁 親王)가 파견한 곤다이나곤(大納言) 칸로지 츠네모토(甘露寺 ), 곤츄우나곤(中納言) 카쥬우지 하레토요(修寺 晴豊)가 상경을 축하하는 칙사로서 방문했다. 또한 총 40명에 이르는 쿠게(公家)들을 시작으로 승려나 상인 등 다수의 사람들이 노부나가 상경을 축하하기 위해서 방문하였다.

 쿠게들과의 대면은 수 시간에 이르렀고 노부나가는 환담 중에 칸토()를 평정했을 때의 이야기와 삼일 후인 4일에 서쪽으로 출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 공략에는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다회()가 행해져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수 많은 명물(名物) 다기(茶器)피로(披露)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밤이 되자 노부타다가 방문하여, 쇼시다이(所司代[각주:4])인 무라이 사다카츠(村井 貞勝)나 코쇼우(小姓)들과 환담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안 있어 밤이 깊어져 노부타다가 묘우가쿠사()로 돌아가자 노부나가도 마지막 침상에 들었다.


 노부나가가 취침한 바로 그 즈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 3000의 군세를 이끌고 탄바(丹波) 카메야마(亀山)성(城)을 출발하여 한밤중에 쿄우토(京都)를 향해서 군세를 진군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 2일 밤이 새기 전에 카츠라가(桂川) 천을 건너 쿄우토(京都)에 들어오기 직전, 미츠히데는 그제서야 혼노우(本能)()를 습격한다는 것을 전군에 전하였고 여명(黎明)에 이르러 혼노우사()를 포위하였다.


 6 2일 여명.

 아케치 미츠히데의 군세에게 습격 받았을 때, 노부나가는 아랫 것들의 싸움으로 인한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함성과 철포(鉄砲)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모반(謀反)임을 깨달아 스스로 활과 창을 손에 쥐고 싸웠지만 물량에는 당해내지 못하여 팔꿈치를 창에 찔리자 물러나 건물에 불을 지르고 깊숙이 들어가 침실 입구를 닫고 결국 배를 갈라 죽었다.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할복했다고 하는 사람도, 건물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중략)…… 머리카락 한 올 남기는 일 없이 재로 변했다]

고 한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필사적인 탐색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의 시체는 결국 발견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처음에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노부나가는 계속 씻겨도 광택만 더할 뿐 검은 색이 없어지지 않자 그제서야 믿고서는 맘에 들어하며 '야스케(彌介)'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혼노지의 변 때 싸우다 잡혔지만 미츠히데는 '사람도 아닌 미물이 뭐 알겠냐'는 식의 말을 하며 풀어 주었고 이후 소식은 불명. [본문으로]
  2. 바쿠후(幕府)를 열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쿄우토(京都)에 들어오는 일곱 개의 입구 중 하나. 요즘으로 치면 톨게이트와 같다고 할까.. [본문으로]
  4. 이 때는 쿄우토(京都)의 행정, 치안, 여러 집단(조정, 상인, 절 등)과의 교섭 등을 맡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