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의 장남. 부친과 함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빗츄우[備中]타카마츠 성[高松城]공략 때 데뷔전[初陣]. 부젠[豊前]나카츠[中津]성주(城主)가 되어조선 침공[朝鮮の役][각주:1]에 종군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치쿠젠[筑前] 52만석을 하사 받아, 후쿠오카 번[福岡藩]의 번조(藩祖)가 되었다.
모친과 처를 탈출시켜 준 것에 대한 은상(恩賞)
1600년 12월 11일.
쿠로다 나가마사는 부젠[豊前]나카츠 성(城)에 입성하였다. 그러나이 성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다음 해인 1601년에는 후쿠오카 성[福岡城] 축성에 착수함과 동시에영내(領內)에 6개의 지성(支城)을 쌓아, 세키가하라[関ヶ原]때 전공이 있던 중신들을 죠우다이[城代][각주:2]로 임명, 배치하였다.
쿠라테 군[鞍手郡]의 타카토리 성[鷹取城]의 죠우다이에는 모리 타헤이[母里 太兵衛]가 임명되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게서 명창(名槍) '니혼고우[日本号]'를 술내기로 따낸 일화로 유명한 타헤이는세키가하라때도 활약하였다.
나가마사가이에야스[家康]의 우에스기 토벌[会津征伐][각주:3]에 출진하자, 나가마사의 예언대로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세력은오오사카[大坂]텐마[天満]의 쿠로다 저택을 포위했다. 타헤에는밤을 기다려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부인 코우엔[幸圓]과 나가마사의 부인인 네네[栄]를 가마니 안에 넣고, 두 개의 가마니를 바구니에 담아 긴 막대 끝에 걸쳤다. 그리고 상인으로 변장하여그 막대를 어깨에 메고뒷문 쪽에 있는 목욕탕의 벽을 뚫고 탈출, 쿠로다 가[黒田家]에 출입하는 상인 나야 쇼우자에몬[納屋 小左衛門]의 집으로 옮겨 숨겼다.
부친 죠스이가 나카츠[中津]에서 파견한 배가 오오사카[大坂]포구에 도착했지만, 이시다 측의 군선이나 작은 배들, 병사들의 경비가 심해서타헤이, 쿠리야마 토시야스[栗山 利安], 미야자키 스케다유우[宮崎 助太夫]의 세 가노(家老)들은 당혹하였다.
7월 17일 밤.
타마츠쿠리[玉造]의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이시다 쪽의 인질요청을 거부하고 자살한 호소카와 가라샤[細川 ガラシャ][각주:4]와 호소카와 저택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경비하던 병사들이 타마츠쿠리로 향한 틈을 타서코우엔과 네네는 7월29일 본국인 나카츠에 무사히 도착했다.
모친과 부인을 탈출시킨 그들의 공적을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던 나가마사는새로운 영지(領地) 후쿠오카 번(藩)을 지배함에 있어서지성 주둔 제도를 택하여타헤이를 타카토리 성(城), 쿠리야마 토시야스를 아사쿠라 군[朝倉郡]마테라 성[左右良城]에 죠우다이로 각각 임명했다. 또한 가중 통제의 일환으로 '화내지 않는 모임[腹立てずの会]'이라는 것을 만들어, 중신부터 하급 무사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토론회를 열어그들의 의견을 나가마사에게 전할 수 있게 하였다.
번(藩)의 미래를 생각하며……
1623년.
55세가 된 나가마사는에도[江戸]에서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약을 복용했지만, 열격(噎膈)이 같이 생겼다. 쿄우토[京都]에 들리지 않고후시미[伏見]에서 오오사카[大坂]로 이동.치쿠젠에 귀국해서 몸을 돌보려 했지만, 이에미츠[家光]의 3대 쇼우군[将軍]취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결국 오오사카에서 2~3일 정도 머문 후 상경하여호우온 사[報恩寺]를 숙소로 정했다. 상경한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도 나가마사에게 사자[使者]를 보내병문안 하였다.
나가마사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깨달았을 때, 부하에게,
“지금 죽을 때가 되니 안타까운 것이 세 가지 있다”
고 말했다고 한다(쿠로다 가문 족보[黑田家譜]).
[첫째는 어머니 코우엔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저지른 것이며, 둘째는 적자(嫡子) 타다유키[忠之]가 아직 약관(21세)임에도뒤를 돌보아 주지 못하고 죽는 것.
셋째는 휘하의 장졸들을 데리고평소 훈련시키며,전투에 임해서는 엄숙과 절제를 지키고, 내 수족과 같이 움직이고 싶었다. 이것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 이 이외에 미련은 없다.]
호(號)인 죠수이[如水]가 더 알려져 있다. 통칭 칸베에[官兵衛].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타케나카 한베에[竹中 半兵衛]와 더불어, [하시바의 두 명의 베에(羽柴の両兵衛)]라 일컬어 졌다. 히데요시의 큐우슈우[九州]제압 후부젠[豊前]나카츠[中津]성주(城主)가 되었고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큐우슈우[九州]의 서군 측과 싸웠다.
요시타카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인 나가마사[長政]에게 유언으로 남긴 내용이 [무공담 모음집(武辺咄聞書)]에 전해지고 있다.
“나는 도박을 잘하지만너는 못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세키가하라[関ヶ原]때이에야스 공[家康公]과 지부[冶部 –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100일 정도 서로 싸우게 냅두면, 그 동안 난 츠쿠시[筑紫[각주:1]]를 제압한 후 쿄우토[京都]로 올라가천하를 잡을 수 있었을 터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가 하루 만에 끝나질 않고이에야스와 미츠나리가 100일 간 싸웠다면자신은 얼른 큐우슈우[九州]를 평정하여승기(乘機)를 타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毛利], 우키타[宇喜田]의 서군 세력을 물리치고쿄우[京]에 올라가어느 쪽이건 승자와 대결하여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 - 죽기 직전에 나가마사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10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논공행상을 행하며 공이 있는 다이묘우[大名]들에게 영지(領地)를 배분했다.
카토우 기요마사[加藤 清正]에게는 히고[肥後] 54만석, 나가마사에게는 치쿠젠[筑前] 50만 2416석이라는 큰 영토가 주어졌지만요시타카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이에야스는 요시타카의가 천하를 손에 넣으려 했던 숨겨진 야망을 꿰뚫어 보았던 것은 아닐까?
치쿠젠[筑前]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된 나가마사는부젠[豊前]나카츠 -그때까지의 영지 18만 2천석 - 에서 치쿠젠[筑前]나지마[名島]로 입성하였다.
나지마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요해(要害)였지만원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 宗茂]의 영지에 있던 조그만 요새에 불과하였고더구나 마을을 만들 땅이 좁아성 밑 마을(城下町)을 발달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나카 군[那珂郡]후쿠사키[福崎]에 새로이 성을 만들어쿠로다 씨[黒田氏]발상(發祥)의 땅인 비젠[備前]오쿠 군[邑久郡]후쿠오카[福岡]의 이름을 따와, [후쿠오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지마 성[名島城]을 없애고후쿠오카에 새로 성을 축성하기로 결정이 나자요시타카는 은거하여모든 것은 나가마사에게 맡기고, 나지마 성에서 나와다자이후[太宰府[각주:2]]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거기로 옮겨 살았다.
다자이후 텐마 궁[天満宮]경내(境內)에 세워진 초가집에서매일매일 풍류를 즐기며, 다도(茶道)나 와카[和歌], 렌가[連歌] 등의 소양을 쌓았다.
문인으로써의 풍류의 나날
예전에 “멀리 떨어진 조정[遠の朝廷=발음은 ‘とおのみかど’]”라고 불렸던 다자이후.
그곳의 초가집에서 풍류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요시타카는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에게 땅을 하사하여 살게 해서는예전에 융성했던 다자이후 렌가의 부흥을 꾀했다.
또한다자이후 덴마궁(宮)에 2천석을 기부하여아치형 다리(太鼓橋), 석등(石燈)을 만들어 받치고, 큰 칼[太刀]외에 [텐진엔기 에마키[天神縁起 絵巻[각주:3]]] 세 권과 렌가를 봉납함과 동시에궁 사무 책임자인(宮司務別当) 오오토리이 신간[大鳥居 信岩]과 친교를 맺었다.
1601년 1월 17일.
오오사카[大坂]텐마 궁[天満宮]에서 개최된 렌가회(会)에 오오토리이 신간과 함께 참여했다.
이 모임에서는중앙 렌가계(界)의 중심적 존재인 사토무라[里村]일문(一門)의 총사(総帥) 쇼우하[紹巴[각주:4]]나 쇼우시츠[昌叱[각주:5]], 마에다 겡이[前田 玄以]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 해인 1602년 1월 16일.
다자이후 덴마궁(宮)에서아들 나가마사, 신간[信岩], 렌가 사[連歌師]인 키야마 죠우인[木山 紹印]등과 렌가회(会)를 열어, 예부터 큐우슈우[九州]문화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자이후 문예의 부흥을 꾀한 것은 특필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다인(茶人)으로써도 뛰어났다.
센노 리큐우[千 利休]와 친교를 맺고 그의 다도관을 몸에 익혔으며, 다이토쿠 사[大徳寺]의 슌노쿠 화상[春屋和尙]을 참선(參禪)의 스승으로 삼아다도에도 선(禪)의 정신을 가미하여깊이를 더해 갔다.
1601년 5월.
이에야스가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개최한 잔치에 참가했던 요시타카는그곳에서 가장 큰 차 가루를 넣어 두는 단지인 [南条の葉茶壺]를 그냥 들고 나와 그 호방함에는 이에야스도 놀랐다고 한다[각주:6].
2년간의 다자이후 생활 후일부 완성된 후쿠오카 성 세번 째 성곽[三の丸]의 은거 저택으로 옮긴 요시타카는부인인 코우엔[幸圓]과 소박한 생활을 보냈다. 평생 부인 한 사람만 사랑한 그는경건한 크리스천 다이묘우[大名]이기도 했다.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SIMEONJOSUI]라 쓰여진 로마자 도장을 사용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 –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중급 공가(公家) 출신.뛰어난 학문과 정치력으로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올라가지만모함을 받아 다자이후로 좌천되어실의 속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쿄우[京]에서는 텐노우[天皇]의 아들들이 죽거나궁궐에 번개가 내려 치는 등의 사건이 이어져, 사람들은 이를 미치자네의 저주라 믿었고,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텐마 궁[天満宮]을 세워 진정시켰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 道真) – 헤이안(平安)시대의 중급 쿠게(公家)였으나, 뛰어난 학문과 정치력으로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올라가지만모함을 받아 다자이후로 좌천되어실의 속에 죽었다. 그가 죽은 후 쿄우(京)에서는 텐노우(天皇)의 아들들이 죽거나, 궁궐에 번개가 내려 치는 등의 사건을 미치자네의 저주라 믿었고,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텐마(天満)궁(宮)을 세워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