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1582 6 13일 패사(敗死) 55?

1528? ~ 1582.

미노(美濃)의 명족(名族) 토키(土岐)()의 후예.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동반하여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긴다. 후에 노부나가와 사이가틀어져, 혼노우(本能)()의 변()을 일으키지만, 직후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의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 중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에게 습격 받아 살해당했다.







어긋난 시나리오


 1582 6 13일 밤.

 아케치 미츠히데는 쇼우류우지(勝龍寺)() 안에 있었다.

 주군 노부나가의 복수전이라며 싸움을 걸어온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맞서 싸워 이김으로 쿄우토(京都) 지배의 토대를 다져놓을 수 있었던 야마자키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지금 막 도망쳐 온 것이었다. 추격해 오는 적군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이토우 쿠라노스케(内蔵(=토시미츠(利三))의 말을 들어, 오늘의 전투를 피하여 사카모토(坂本)에서 농성(籠城)을 하였다면……]

 [평소 모아두었던 군세를 (나누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면……] (太閤記)

 라는 등의 제 3자의 평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쨌든 적이 포위망을 굳히기 전에 성을 나가 본거지인 오우미(近江) 사카모토(坂本)()에서 진용을 재구축해야 하겠지만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로 급격히 불리해진 국면(局面)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우(本能)()에서 습격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궁정에 들어가 전승(戰勝)을 보고했던 것이 불과 10일전의 일은 아니었는가? [아케치의 삼일천하[각주:1]]라고 후대에 걸쳐 비웃음을 받고 있는데 당사자인 본인도 예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큰 것에 당혹하여 어째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한 결과가 된 것일까?

 직접적인 패인(敗因)은 히데요시가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츄우고쿠 대반전(大返し)]을 감행한 것과 더불어 동원한 병력이 총 4[太閤記]이라는 이 또한 예상외의 대군(大軍)으로 이 대군에는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라이벌 히데요시가 그렇게 대군을 모을 수 있었는가를 생각했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인척[각주:2]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타다오키(忠興) 부자의 협력 거부였다. 모든 것은 여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주군을 죽인다는 것이 도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문제인 것은 누구보다도 미츠히데 자신이 자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원을 요청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호소카와 부자에 재고(再考)를 촉구한 9일자 편지의 말미에도 이번 쿠데타의 의도는 타다오키, 오키모토(興元[각주:3]) 등을 위한 것으로, 따라서 쿄우토(京都) 주변을 평정한 후에는 곧바로 타다오키 등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설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호소카와 부자는 응하지 않았다.


 또한 이어서 당초 미츠히데에게 가세(加勢)했었던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츠츠이 쥰케이(筒井 順慶) 9일에는 태도를 바꾸고 곧이어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대의명분이 없는 [모반(謀反)]


 확실히 미츠히데의 반역의 배후에는 바쿠후(幕府) 즉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 그와 기맥상통(氣脈相通)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세 사다오키(伊勢 貞興), 스와 히다노카미(諏訪 飛), 미마키 카게시게(御牧 景重) 등 쇼우군()의 부하들이 아케치 측에서 전사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명백하다.

 즉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 체제의 재건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나름대로 대의명분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미츠히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오다 다이묘우(大名)들은 미츠히데의 권유를 거절했다. 특히 위에 언급한 9일자 편지에서 혼노우(本能)()에서의 일을 의도하지 않았던 일(不慮)”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세울 정도의 대의명분은 없었던 듯하다.


 어쨌든 반격의 준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미츠히데는 사카모토 성()으로 귀환을 하려 하였고 미조오 시게토모(溝尾 茂朝) 등 근신(近臣) 수 명과 함께 밤의 어두움을 이용하여 쇼우류우지(勝龍寺)()을 탈출했다. 그러나 후시미(伏見) 방면에서 야마시나(山科)에 이르렀을 때 잇키(一揆)에 습격 당하여 샛길로 피했지만 여기서 살해당하고 백성이 목을 주웠다[아사노 가문 문서(野家文書)].
 
일설에는 야마시나의 오구루수(小栗栖)에 이르렀을 때 풀 숲에 숨어있던
노부시(野武士)의 창에 찔려 약 330m쯤 간 곳에서 말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곁에 있던 신하가 목을 베어, 그 목이나 몸통을 덤불 속에 감추었다고 한다[豊鑑].


 이 말로에 대해 나라(奈良) 코우후쿠(興福)()학려(學侶)인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등은, “노부나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출세를 하였으면서도, 그 큰 은혜를 잊고 괘씸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하늘의 벌이라고 단정지었다.

  1. 노부나가를 죽인 후 쿄우토(京都)에 머물렀던 기간은 3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 타다오키의 부인은 미츠히데의 딸. [본문으로]
  3. 후지타카의 둘째 아들. [본문으로]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 忠興]

1645 12 2일 병사(病死) 83.

1563 ~ 1645.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아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 가라샤가 부인이었지만, 혼노우 사[本能]의 변()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측에 섰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부젠[豊前] 코쿠라[小倉], 그 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로 영지(領地)가 이동되었다. 말년은 산사이[]라는 호()를 칭하며 다도(茶道)와카[和歌]를 즐겼다.







은거 생활 25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부젠[豊前] 코쿠라 39 9천석 태수(太守)의 지위에서 물러난 것은 59살 때인 1621년이었다. 그 전년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사이소우류우[宗立]'라 불리고 있던 그는, 해가 밝은 이 해에 부젠[豊前] 나카츠 성[中津]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11년 후인 1632년.

 번주(藩主) 타다토시[忠利]가 히고[肥後] 쿠마모토 54만석으로 이봉(移封)되자, 이번엔 야츠시로(八代)()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은거생활 중이었다. 83세라는 당시로써는 드문 장수(長壽)를 끝마치기 까지 25년 간 은거한 것이 되는데, 그의 은거생활은 유유자적(悠悠自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다오키는 다채로운 취미를 가진 무인(武人)이었다.
 무가(武家)의 옛 전통이나 의식, 작법에 밝은 것과 와카[和歌]렌가[連歌] 등에 뛰어났던 것은 조상 대대로의 전통이었으며, 저술(著述), 그림을 그리거나, 케마리[蹴鞠][각주:1], 사루가쿠[
] 외에 도검()이나 무구(武具)의 제작, 디자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다도(茶道)는 센노 리큐우[千利休]'칠철(七哲)'[각주:2]'
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였다. 다인(茶人)의 신분인 산사이소우류우는 에도[]에 있을 때 자신의 저택에서 자주 다회()를 열어 여러 다이묘우[大名]와 교류를 맺었다.


 그런 많은 취미를 갖고 있던 타다오키이기에 은거 생활이라는 넘쳐나는 시간을 즐겼다고 봐도 좋겠지만, 그 마음을 들여다 보면 현역에서 물러난 노인에게 있을 법한 -긴장의 끈이 느슨해진 사람의 고독과 거기에서 오는 불만과 불안의 그림자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주 타다토시와의 불화설


 타다오키가 그러한 불만을 터트릴 수 있는 대상이 아들 타다토시에게 집중되었던 것은 부자의 연으로 봐서 당연하다고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타다토시는 셋째이면서 후계자가 되어 봉토를 이었기에, 은거한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이든 조심하였다. 타다오키로써는 울분을 풀 상대로써 만만한 부분도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은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는 가신들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담은 편지를 타다토시에게 보내어 추궁했다. 이것은 후에 생각 없이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한다고 반성을 했지만, 자주 투덜거리는 은거한 부친에게 아들이 질렸던 같다.


 호소카와 부자의 불화설도 있다.
 예를 들면 쇼우군[
] 이에미츠[家光]가 천연두에 걸리자 쾌유기원의 기도를 해달라는 아들 타다토시의 요청을 받았을 때, “될 수 있음 하지 않고 싶다고 떼를 썼던 것과 타다오키가 야츠시로 성() 새로운 저택에 연못을 파려고 할 때, 막부(幕府)의 눈을 의식한 타다토시가 조심스럽게 경고를 한 것에 대하여 타다오키가 안색을 바꾸어 화를 내며 되물은 것 등과 같은 부자간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예전엔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격이었다는 자부심을 버리질 못하는 은거한 부친과 교묘한 처세술을 바탕으로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당주인 아들. 서먹서먹해진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생겼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결국 [노병은 사라질 뿐]이라는 순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타다오키의 [영감탱이의 땡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터가 그립구나


 하지만 그런 부자 관계는 타다오키 79살 때인 1641, 타다토시의 죽음에 의해 뚝 끊긴 것이다. 타다토시는 첫째 타다타카[忠隆]가 어떤 이유로 타다오키에게 폐적(廢嫡)된 후[각주:3], 후계자가 될 터였던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대신하여[각주:4] 후계자가 되었다(후에 오키아키는 가문을 뛰쳐나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 토요토미(豊臣) 측에 섰기 때문에 타다오키에게 자살을 명령받는다).


 번()의 기반을 닦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던 타다토시가 56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신의 투덜거림을 들어 주지 않은채 죽어버린 것이다. 타다오키는 자신이 너무 오래 산다고 한탄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83살 때, 50을 넘어서 낳은 넷째 아들 타츠타카[立孝]도 죽어버렸다(향년 31).


 타츠오키는 그 해의 12 2일에 죽었다. 죽을 때 전쟁터가 그립구나”[綿考輯[각주:5]]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 많은 전쟁터를 질주했던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이, 이 자타가 공인하는 무인(武人)의 뇌리에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1.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2.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3. 첫째 타다타카의 부인은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전투 전에 서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등에 의한 동군 측 무장의 인질 억류 시도가 있었는데, 타다오키 부인인 가라샤는 이를 거부하고 자살한. 그러나 이 때 타다타카의 부인 치요는 가라샤와 함께 죽지 않고, 옆집에 있는 자신의 친 언니이자 우키타 나오이에[宇喜田 直家]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에게로 도망친다. 이것이 가라샤를 사랑하던 타다오키의 분노를 사서 후에 타다타카에게 이혼을 명령하지만, 타다타카는 거부하여 폐적당한다. 또한 이런 설도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이전, 히데요시 죽은 후의 혼란기에 타다오키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 치요의 오빠],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 암살을 노린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입장이 난처해진 적이 있었기에, 마에다 가문[前田家]과의 인척 관계를 없애 이에야스의 의심을 풀려고 했다는 설이 현재는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by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4. 둘째 오키아키[興秋]는 당시 에도에 인질로 있던 셋째 타다토시가 당주가 되자 타다토시를 대신하여 인질로써 에도로 가던 도중 자신이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과 인질로 받쳐지는 데 대한 울분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예에서와 같이 그 때까지의 세자(世子) 대신에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받친 아들을 막부(幕府)의 인물들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후계자로 삼는 일도 있었기에, 비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후에 그와 행동을 같이 했던 요네다 켄모츠[米田 監物]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 후 번으로 돌아와서는 대대로 가로(家老)를 맡은 점과 진위가 가려지진 않았지만, 아마쿠사[天草]에 있는 촌장[庄屋]의 족보가 오키아키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생존했었다는 설이 있다. 단지 요네다 켄모츠는 그때까지 전쟁터에서 워낙 뛰어난 무공을 많이 세운 무장이었던 점과 타다오키의 명령으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는 스파이로 들어갔기에 아무 일 없이 돌아와서 가로를 지냈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5. 호소카와 가문의 기록. [본문으로]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