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는 소위 전투의 프로페셔널로 센고쿠[戦国]의 세상을 유랑한 사나이이다. 7번 주군을 바꾸지 않으면 한 사람의 무장이라는 말할 수 없다 – 고 일컬어지는 센고쿠의 풍조가 바로 그의 인생이었다.

 미노[美濃]의 사이토우 타츠오키[斎藤 竜興]를 시작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1],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각주: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 주군을 바꾸가며 전전하였다. 이런 식이었기에 사이조우의 행동은 언제나 조직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시바 히데츠구[羽柴 秀次]를 섬기고 있을 즈음의 일이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와 이에야스[家康]간에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가 일어나, 사이조우는 하시바 히데츠구의 선봉을 맡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선봉이었던 사이조우는 갑자기 최전선에서 철퇴를 하기 시작하여 히데츠구를 화나게 만들었다. 사이조우는,
 “오늘은 적이 대군이고 더구나 강력하기에 여기서는 일단 물러나야만 합니다. 무리하게 공격했다가는 대패로 이어질 겁니다.”
 하고 히데츠구를 설득하였지만 전투를 모르는 히데츠구는 펄펄 날뛰며 사이조우의 진언을 물리친 후 오로지 군사를 돌진시켰다. 사이조우도 또한 히데츠구의 무식과 무모함에 화가 나,
 “에이 좆병진!”
 라는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재빨리 철퇴했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말대로 히데츠구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여 히데츠구 자신도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는 전장에서 도망치는 꼴이 되었다. 더구나 도망치던 도중 사이조우를 발견하고는 사이조우의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였지만, 사이조우는 단 한마디, “싫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에 채찍질하고는 도망가 버렸다.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섬기고 있을 때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 사이조우는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명(異名)을 얻는 기발한 활약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그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동서 양군의 결전이 시작되기 전날 미노[美濃] 세키가하라 근방 아카사카[赤坂]에 체진 중일 때의 일이다. 사이조우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돌격하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뛰쳐나가 서군의 용사 유하라 겐고로[湯原 源五郎]를 죽이고 와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질책을 받아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대로 얌전히 있을 사이조우가 아니었다.

 그 뒤 아카사카에 도착한 이에야스가 장수들을 소집하여 군의(軍議)를 연 뒤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지금까지 취한 목들을 살펴 봅시다”
 라고 말하였기에 각 부대가 취한 서군 무사들의 목을 검사하게 되었다.
 사이조우가 가져 온 유하라의 목 차례가 되자 이에야스의 옆에 있던 마사노리는,
 “너는 이 단 하나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 군령을 어긴 어리석은 놈이다”
 라고 사이조우를 질타하였다. 그러자 사이조우는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였다.
 “사실 근신중인 몸이기에 매일 슬며시 나가서 적과 싸웠고 그럴 때마다 투구를 쓴 목[兜首][각주:3]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근신 중이기에 그 목을 가지고 올 수가 없기에 그런 목들에는 콧구멍이나 귓구멍에 조릿대[笹]를 끼어 넣은 채 버리고 왔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젊은 무사들이 주워와 자신의 공적으로 하였을 거라 사료됩니다.”
 사이조우의 이런 말투에 마사노리는 열화와 같이 화를 내었지만, 어쨌든 사이조우의 말대로 조사해 보자 정말 조릿대가 꽂힌 목이 17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에는 이에야스도 놀라,
 “오늘부터 ‘조릿대의 사이조우[笹の才蔵]’라는 이름을 쓰라”
 며 이명(異名)을 하사하여 이때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사이조우의 무예를 알려주는 일화로 장도[長太刀] 기술이 있다.
 젊었을 때부터 장도[長太刀]를 허리에 차고 다니며 즐겨 사용하였지만 늙자 체력적인 부담이 있었던 듯 이 장도[長太刀]를 종자(從者)에게 들게 하고 다녔는데, 어느 무사[각주:4]가 이것을 보고 놀리며,
 “이제는 칼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늙으셨구랴. 그 정도라면 실력도 뻔하겠구먼”
 라고 말하자 사이조우는,
 “이거 참 부끄럽소. 하지만 실력이라면 그쪽이 보는 것만큼 늙진 않았소. 내 함 보여드리지”
 라며 재빨리 장도를 뽑아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 무사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사이조우는 젊었을 때부터 아타고 대권현[愛宕大権現][각주:5]을 믿었기에 항상 아타고의 신통력이 영효(靈效)로운 날[縁日]에 자신은 죽을 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대로 1613년 음력 6월 24일[각주:6]에 몸을 깨끗이 하고, 갑주로 몸을 감싼 후 미첨도[薙刀]를 든 채 의자에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60세라고 한다.

가니 사이조[可児 才蔵]
미노[美濃] 혹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라고 한다. 호우조우인 인에이[宝蔵院 胤栄]에게 창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 노부나가[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2. 살생관백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본문으로]
  3. 아시가루[足軽]나 무가봉공인(武家奉公人)은 머리 방어구로 주로 삿갓[陣笠]였지만, 무사 계급이 되면 투쿠[兜]를 썼기에 투구를 쓴 목은 더 높은 전공의 대상이 되었다. [본문으로]
  4. 카헤에[嘉兵衛]라는 후쿠시마 일족의 인물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불의 신. [본문으로]
  6. 양력 8월 10일. 여담으로 블로그 주인장의 생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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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yuphy IV 2011.04.09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면 혁신에도 나오시는 분이군요. 어린 마음에 '17명밖에 못 베었는데 무력이 90대야..'라는 진삼국무쌍적인 사고로 보았는데 참 이런 일화가 있을줄이라고는...;;...

    여담이지만 생신이 저랑 가까우시군요ㅇㅇ.. 학생신분으론 8월 생일이니 좀 어정쩡한 면이 있더군요. 다 방학때라 이것 참..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4.10 0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는 등장이 좀 늦은 편이었습죠.

      이 무장은 전략, 전술 레벨에서 노는 무장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는 곳에서 뛰는 무사더군요. 정말 1:1의 싸움에서라면 피하고 싶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규피님의 생신을 기억하고 있습죠. ^^
      여담으로 저도 학생 때는 그게 참 아쉬웠어요. 학기 중이라면 선생에 따라서는 공책이나 연필을 받을 수 있었는데 방학 한 가운데다 보니..

  2. 효도롱 2012.04.26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일어 원문을 좀 보고싶은데 어디가서 찾을 수 있을까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2.04.26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戦国武将100話』란 책은 1978년에 발간된 책으로 저도 일본에 있을 때 헌책방에서 구한지라, 국내에 이 책을 가진 다른 사람이 있을 거 같지는 않군요.

      혹시 어느 부분의 일본어 원문이 궁금하신가요?
      거기에 이 책은 일화 중심의 책이다 보니 사실적으로 다른 곳이 많은 책입니다. 굳이 일본어 원문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의 정신구조인 ‘하극상(下剋上)’이 “아래(下)가 위(上)를 이긴다(剋)”는 주종역전이라는 것을 본 작품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가사회(武家社会)의 주종관계(主従関係)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관계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 정신적인 면에 주안을 두며 살펴보자.

 중세의 주종관계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맘에 안 들면 주인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 요시나가[可児 才蔵 吉長 - 1554년~1613년]’는 그 대표적인 무사라 할 수 있다. 그의 과거을 살펴보면 엄청나다. 사이토우 타츠오키[斉藤 龍興][각주:1],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각주:2],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 삿사 나리마사[佐々 成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로 주군을 바꾸었다. 센고쿠의 시대를 질주한 사나이로서 떳떳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에게 “아래가 위를 먹어 치운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위를 존중하지 않는 정신구조는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종관계가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막부(幕府)를 연 ‘쇼우군[将軍]’은 휘하에 가신(家臣)을 두었다. 이를
고케닌[御家人]이라 한다. 이 고케닌은 쇼우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지두(地頭-じとう)에 임명 받았다. 이는 어느 일정한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다. 이 지배권을 침해 당할 때에는 쇼우군이 나서서 권리를 부활시켜 주었다. 이것이 ‘본령안도(本領安堵)’. 쇼우군에게서 받은 ‘어은(御恩)’이다.

 대신 고케닌은 쇼우군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것이 ‘봉공(奉公)’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출진하였다. 목숨을 바쳐 자기 영지[本領]를 안도 받으려 노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종관계 즉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어디까지나 상호계약이었다는 것이다. 쇼우군이 ‘어은’을 해주지 않는다면 ‘봉공’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적인 ‘절대복종’이 아니라 ‘give and take’에 가까웠던 것이다. 카니 사이조우라면 ‘어은’을 받지 못했기에 당신에게는 ‘봉공’할 수 없습니다 – 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정신을 가졌던 고케닌은 발생 당시 숫자가 얼마큰 있었을까?
 1185년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가 요시츠네[義経]를 토벌하기 위해 모은 15개 쿠니[国]의 고케닌은 2096명이었다고 한다. 즉 ‘무사(武士)’는 1 쿠니[国] 당 130여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외로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즈음의 전투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경제력(병력동원력)을 과시하며, 실제의 전투는 일기토[一騎打ち]에 의한 것이었기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던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더 말하자면 병기가 되는 철(鉄)이 귀중품이었기에 일반병사들에게까지 병기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무사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국(東国)에서 이 숫자인 것이다. 이외로 무사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소빙하기가 무가사회(武家社会)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1230년, 여름에 이상기온이 찾아왔다. 6월9일에
무사시[武蔵] 카네코 장[金子荘]과 미노[美濃] 마키타 장[蒔田荘]에 눈이 내렸다. 이 보고를 받은 카마쿠라 막부[鎌倉幕府]는 동요했다. 이상기온은 곧바로 벼농사의 괴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7월에 들어서자 여러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
 ‘이본탑사장첩(異本塔寺長帳)[각주:3]’에 따르면 “일본 전국이 겨울과 같아 매우 추웠다”는 상태였던 것이다. 쿄우토[京都]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확실히 비상사태였다. 이때 막부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할 장치를 만들었다. 이즈[伊豆]와 스루가[駿河] 지역의 예를 살펴보자. 막부가 보증하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도록 도소우[土倉]에 명령하였다. 만약 백성이 쌀을 변상하지 못하더라도 막부가 대신해서 변상한다는 것이었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이 연도에 덕정령(徳政令)을 취한 다음에도 약 9000여 석의 비축미를 방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몇 백 년 정도 이어진 것이다. 비축미도 바닥을 보였다. 막부는 점점 체력을 잃었고 그에 따라 군사력도 저하되었다. 이젠 ‘본령안도(本領安堵)’같은 것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막부의 승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막부가 아무리 ‘본령안도’를 하더라도 기근으로 인해 마을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권위는 점점 떨어졌다. 그렇게 점차 일본인의 정신구조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제정책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감사의 마음에서, “또 쌀을 달라고”라는 억지스런 요구로, 나중에는 “어째서 막부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냐!?”라는 원망으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총촌(惣村)=센고쿠(戦国)의 마을’이 출현하게 된다. 이 마을은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이라는 주종관계를 몰랐다. 원래 고케닌[御家人]과는 혈연관계도 아니었다. 새로운 ‘자칭’ 무사(武士)’가 태어났다. 그들이 바로 ‘코쿠진[国人]’이며 ‘재지령주(在地領主)’로 그야말로 쿄우토의 귀족들과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미천한 자들이었다. 최대로도 하나의 쿠니[国]당 130명밖에 없었던 과거의 무사계급이 센고쿠 시대에 볼 수 있는 대군단을 편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향에 쐐기를 박듯이 1450년대의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으로 인하여 막부의 통치능력 결여가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 더 이상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은 없었다. 즉 ‘위(上)’는 없었다. 새로운 무사단이 ‘아래(下)’라고 한다면 통치능력이 없는 막부, 슈고[守護] 등 ‘위’를 물리치려는 사상이 발생하는 것도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하극상의 행동규범이 없었다면 센고쿠 시대를 살아서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오케하자마 전기[桶狭間戦記]’ 3권속에서 ‘오다 야마토노카미 노부토모[織田 大和守 信友]’[각주:4]가 “신하를 지키지 않는 주인은 주군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오와리 슈고[尾張守護]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를 쓰러뜨린 것은 센고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에 넣은 ‘서바이벌 방식’이 아니었을까?

키지마 유우이치로우[木島 雄一郎]

  1. 사이토우 도우산[斎藤 道三]의 손자. 미노[美濃]의 영유하다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난다.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셋째 아들. [본문으로]
  3. 주로 아이즈[会津]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오와리[尾張]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마타다이[守護又代 - 슈고다이[守護代]의 대리]. 오다 노부나가의 가문[織田 信長]의 가문인 '단죠우노죠우 가문[弾正忠家]'의 주가(主家)였다. 1554년 시바 요시무네[斯波 義統]의 아들 시바 요시카네[斯波 義銀]가 가신들을 이끌고 낚시하러 간 사이에 슈고[守護]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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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ne 2010.10.02 0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발해지랑님 돌아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ㅠㅠ 항상 발해지랑님 홈페이지에선 뭔갈 배우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0.10.02 0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실례했습니다. 이제부터는...아니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ps;처음 뵙는 아이디시군요. 반갑습니다. ^^

 

 에도 시대[江戸時代], 오우미[近江]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 가문[井伊家]은 대대로 대로(大老[각주:1])를 배출하는 후다이 다이묘우[譜代大名[각주:2]] 필두의 가격(家格)으로 유명했다. 막말(幕末) 즈음,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각주:3]]과 사쿠라다 문밖의 변[桜田門外の変[각주:4]]으로 잘 알려진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스케[井伊 掃部頭 直弼]가 이 가문 출신이다.

 센고쿠[戦国] 시대, 이이 가문은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라는 호칭으로 용명을 떨친 용맹무쌍한 전투집단이었다.  이이 가문의 깃발, 표식, 장병의 갑주는 물론 마갑(馬甲)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 그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무리가 전쟁터를 질주한 것이다. 이 집단을 처음으로 이이 가문에 도입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였다.

 적비대는 원래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것으로 나오마사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즉 1582년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죽은 뒤, 이에야스[家康]는 타케다의 유신(遺臣)들을 나오마사의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나오마사는 새로 타케다의 유신들을 포함한 가신단을 편성하면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군단이 적비대였다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코우슈우 군[甲州[각주:5]軍]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누구나가 이 타케다의 유신들을 원했다. 그런 타케다의 유신들이 이이 가문에 배속되게 된 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가, “젊고 신참인 나오마사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의 휘하로 배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배속해 달라고 부탁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나오마사와 결투를 벌이겠다고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타다츠구는 가당치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원래 주군께서 나에게 배속시켜 주신다는 것을 내 멋대로 나오마사에게 배속시킨 것이다. 만약 자꾸 네놈이 툴툴거리면 네놈 일족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버릴 테다”
 이 완고한 타다츠구의 태도로 인해 타케다 유신단은 이이 가문 배속이 결정된 것이다.

 나오마사는 토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인 무공파(武功派)이지만 사천왕의 다른 멤버들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들 처럼 조상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오마사의 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토쿠가와를 섬긴 신참이었다.
 이에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이이 가문은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이이노야[井伊谷]라는 곳에서 살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었지만, 부친 히고노카미 나오치카[肥後守 直親]가 누명을 쓰고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에게 살해당하자 나오마사는 도망쳐 친족의 손에 키워지던 중 이에야스가 나오마사를 발견하여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 이례적인 발탁과 그 후 이에야스의 지나친 총애로 인하여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남색(男色) 상대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신참이었지만 나오마사에 대한 이에야스의 신뢰는 두터워 토쿠가와 가문에서의 지위를 높여 갔으며, 나오마사도 또한 충실한 가신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며 자신 스스로도 후다이[譜代[각주:6]]라 여기고 있었다.

 후년 히데요시[秀吉]와 만나러 이에야스가 상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7]]를 이에야스의 성에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야스가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오오만도코로의 인질 역할은 끝나 그녀를 반환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마사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히데요시는 나오마사의 빈틈없는 호위에 기뻐하며 공을 치하. 다음 날 나오마사를 위한 향응의 자리를 만들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에게, “자네는 요전까지만 해도 나오마사와 동료였으니 함께 참석하게”라며 동석시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이었지만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었다. 카즈마사를 본 나오마사는 참석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카즈마사는 우리 주군인 토쿠가와를 조상 대대로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군을 배신하고 전하(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겁쟁이이기에 졸자는 동석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나오마사의 후다이[譜代] 의식을 강조한 일화이다.

 이어서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の役[각주:8]] 때의 일이다. 장기전으로 인해 장병들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나 사카이[堺]의 상인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여 장병들이 술잔치나 춤, 노래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활발한 진중 위안을 행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까지 쿄우토에서 불러들였고, 여러 다이묘우에게도 그들의 처첩을 부르도록 권했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떠들썩함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오마사는 한 가지 꾀함이 있었다. 빠질대로 빠진 히데요시는 불과 14~15명의 호위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슬며시 이에야스에게로 가서,
 “주군.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히데요시의 목을 취하기는 아주 쉽사옵니다”
 야심만만한 나오마사의 헌책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천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나오마사를 꾸짖으며, 어떤 일이건 성취될 때에는 때의 추세라는 것이 있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나오마사는 동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9월 15일 결전 당일 새벽. 나오마사는 흰 갑옷을 입고 짙은 안개 속에 말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정찰을 나가 낌새를 엿보다 전투가 시작되자, 말 재갈을 쥐고 있던 부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면 운명일 뿐”
 이라며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한다.
 또한 아군인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하 장수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가 막아 서자[각주:9], 정찰을 나간다고 속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고도 한다.

 이 결전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배반케 한 동군이 서군을 총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그때 패잔병 500여기를 이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동군 진영을 스치며 쏜살같이 질주하여 퇴각하였다.
 나오마사의 이이 군은 곧바로 이를 추격, 시마즈의 후군[殿]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를 전사시켰지만, 난전 속에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던 나오마사는 시마즈 군의 저격에 오른 팔을 맞아 부상 당해 낙마하였다.[각주:10] [각주:11] [각주:12]

 이때의 상처로 나오마사의 오른 팔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키가하라 전쟁 다다음 해인 1602년 7월 나오마사는 거성(居城)인 사와야마[佐和山]에서 죽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561년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만치요[万千代]. 이에야스[家康]를 섬겼으며 1582년 이에야스코우슈우[甲州] 경영에 공적을 세웠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에 종군. 1588년 텐노우[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히데요시[秀吉]의 알선으로 종오위하(従五位下) 지쥬우[侍従]가 되었다[각주:13]. 배신(陪臣[각주:14])으로서는 파격의 대우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으로 인해 코우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12만석에 봉해졌고, 후에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8만석으로 가증되었다. 1602년 42세에 죽었다.

  1. 중요 정책 결정을 할 때, 혹은 다대한 공이 있는 원로 대신을 위한 비상임 막부 최고위직...여담으로 채널 J에서 방영 중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서는 '특별 정무대신'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본문으로]
  2.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부터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를 섬겼던 가문이나, 쇼우군[将軍]이 새로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 준 가문.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안세이[安政]는 당시 일본의 연호. 1858(안세이 5년[安政五年])~1860년 나오스케가 살해당할 때 까지 일어난 옥사. 당시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쿄우토[京都]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무단 조인하고, 나오스케 주도로 14대 쇼우군[将軍]이 키슈우[紀州]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로 결정되자,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압한 사건. 덕분에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적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4. 안세이의 대옥에서 나오스케의 정적 중 중심적 존재인 미토 번은 번주의 은거, 전 번주의 장기 칩거, 가로들의 할복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에 불만을 품은 미토 번사 17인과 사츠마 번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 次左衛門]이 에도 성[江戸城]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등성 중이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살해한 사건. 여담으로 나오스케의 목을 자른 것은 주도한 미토 번사가 아니라 사츠마에서 혼자서 참가한 아리무라였다 . [본문으로]
  5. 카이[甲斐]를 달리 이리 부른다. [본문으로]
  6. 주가(主家)를 조상대대로 섬기는 가문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애미 [본문으로]
  8. 히데요시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9. 선봉은 무가의 명예였기에 함부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시마즈 요시히로의 전투기인 [유신공관원합전기(惟新公関原御合戦記)]에는 이리 쓰여 있다 한다. [본문으로]
  11.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시마즈 가문의 병사 쵸우사 히코사에몬[帖佐 彦左衛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서군이 패주한 후 아직 움직이기 전의 시마즈 군에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무엇들을 하고 있나? 요시히로를 죽여라!”라고 외쳤을 때 카와카미 타다에[川上 忠兄] 휘하의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앞으로 나아가 철포를 쏘아 나오마사를 맞추자 나오마사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맞은 것에 놀라 동요하는 동안 시마즈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고 한다.[旧記雑録後編 三] [본문으로]
  12. 덧붙여 이이 가문의 사료 [井伊家慶長記]에 따르면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쏜 총탄은 갑옷 오른 쪽 옆구리에 맞았지만 갑옷이 튼튼했기에 튕겨서 오른 팔에 맞았다고 한다. 나오마사는 이 충격에 창을 떨군 후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효우부쇼우유우[兵部少輔] 겸임. 이때 혼다 타다카츠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무가(武家)가 관직을 얻었다는 의미인 쇼다이부[諸大夫]인데 비해, 나오마사는 지쥬우[侍従]가 되어 쿠게[公家]가 되었다. 이는 당시부터 나오마사가 토쿠가와 가문 필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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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라 2009.11.18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아닌지..^^;

    나오마사가 신참이라니. 꽤 놀라운 걸요?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쿠게가 되는 기준이 뭔가요? 아무리 살펴봐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18 2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고쳤습니다. 꼼꼼히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신참치고는 후세의 영향이 막강 & 유명한 것 같습니다.

      당상가(堂上家)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쥬우[侍従]라는 관직이 종오위하(従五位下) 임에도 불구하고 궁정[内裏]에 입궐이 가능하였으며, 그런 궁정 입궐 가능한 자격을 당상(堂上)이라 하였고, 궁궐 입궐 자격이 없던 사람이 생긴 것을 쿠게나리[公家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12시부터 티스토리가 점검 들어간다고 급하게 쓰는군요. 내일 다시 정리하여 쓰겠습니다.

  2. 나라 2009.11.19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뭘요! 좋은 글 올려주시는 발해지랑님께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발해지랑님께서 자주 틀리는 맞춤법을 지적해서 올릴까 생각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저는 일본어 실력이 바닥이라, 듣는 것과 말하는 건 그럭저럭 하는데 그외엔 전혀.

    당상가가 된다는 듯이었군요.. 종오위하 관직 중 시중이 입궐 가능한진 몰랐습니다.
    승전 가능한 지위는 어느 정도인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웃!! 미리미리 말씀해주세요~ 있었음. ^^;

      원칙적으로는 종삼위[従三位]이상은 입궐이 가능했던 듯 싶습니다.(산기[参議]의 경우 사위[四位]라도 의정관이라는 위치 상 입궐이 가능했다 합니다).

      나중에 원정(院政)가 확립되면서 좀 복잡해 진 것 같습니다....이런 쪽은 아직 제 안에서 정리되지 않아서 뭐라 말씀 드릴 수 없군요.

      지쥬우[侍従]는 역할 자체가 텐노우 곁에서 시중드는 것이다 보니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일본은 환관이 없다보니 그런 조선이나 중국의 환관들이 하는 일 중 일부를 지쥬우가 했던 것 같습니다)

  3.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1.19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 나오마사가 당대에 손꼽힐만한 미남이었던 건 사실인 듯 하나, 당대에 손꼽힐만한 잔인성을 지녔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야스의 명령을 너무 '외골수'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이런 말 하기는 조금 낯부끄럽지만 (?) 나오마사가 너구리의 남색 상대라는 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듯 합니다. 워낙 초고속 승진을 한데다가 요지 중의 요지인 히코네에 둘 정도였으면 나오마사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듯 합니다. ( 에헴 ) 원래 사랑하는 사이일 수록 더 믿음이 돈독해지는 법이니깐 말입니다 ㅎㅎ

    다만, 나오마사나 사위인 다다요시가 세키가하라 이후 너무 급하게 죽은 감이 없지 않네요. 이 쪽 관련 음모론은 없으려나요? ㅎㅎ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쵸... 이이 가문 휘하에 있던 사람들은 아침에 나올 때 미리 조상들에게 인사를 했다고 하더군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신참에게 그렇게까지 우대를 한 이유를 댄다면 굉장히 유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후장파기는... 다만 다른 예가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쪼금 이해가 안가긴 합니다.

      이이 가문은 쿄우토 슈고[京都守護]였다는 말이 있더군요. 그래서 이이 가문 하급 가신이라도 말을 키워야 했었다 합니다. 쿄우토에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시는 즉시 이동할 수 있도록...그러나 사쿠라다 문 밖의 변[桜田門外の変]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살해 당하면서 막의 눈 밖에 나, 그 대신해서 설치된 것이 신선조의 상위 조직으로 유명한 쿄우토 슈고쇼쿠[京都守護職]라고 합니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타다요시와 나오마사는 친번(親藩)과 후다이[譜代]에서 각각 워낙 막중한 임무를 띈 중요 인물들이라 오히려 그들이 죽은 것이 막부에게 큰 손해였다고 생각합니다.

  4. shiroyume 2009.11.19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손이 그 유명한 막말의 이이 나오스케지요. 어찌보면 어울리는 최후. 거기다 이 이이 가문은 메이지 정부 이후에도 시장까지 하는 인물이 나오죠. 역시 중간보스 가문?
    말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네요. 자기는 죽도록 싸워봐야 20만석 가량이었는데 철부지 어린애들한테 자기 아들이라고 50만석 얹어줬는걸 보면 화가 끌어오르지 않았을지.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0 1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말년엔 젊었을 때의 날카로움이 빠져 뭐든 허허~ 하고 미소짓는 중년이었다고 합니다.

      말년의 에피소드로, 자기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코쇼우[小姓]가 나오마사의 과자를 몰래 집어 먹었는데, 그걸 문 틈으로 보면서도 "어찌할고~어찌할고~"하면서 웃었다고 하더군요.

      어떤 기분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오와리 번[尾張藩] 자체가 나오마사의 사위 타다요시[松平 忠吉]가 죽으면서 생긴 중요한 빈 공간을 급격히 메워야 했기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5.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1.20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뻘플이지만....
    천도에서 토라마사, 마사카게, 나오마사만 적비를 갖고 있던가... 암튼 맞으면 무섭더군요;;;

  6. 맹꽁이서당 2009.11.20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이 인물이 어디서 공을 많이 세웠길래 도쿠가와가 가신 중 거의 으뜸 자리를 차지했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대망에서도 그렇고 이 글 요약에서도 사실상의 첫 출전은 코마키-나가쿠테 전쟁 같은데, 그 이후 세키가하라까지 도쿠가와 가문이 전력으로 응한 전쟁은 거의 없지 않나요? 호죠가 정벌도 전투 보다는 병력 수로 압도한 경우라고 생각하구요.

    대망에서는 나오마사 첫 등장 씬에서 이에야스 첫사랑 여인의 친척 아이라고 묘사했던데, 남색설은 별로 반기지 않기에 차라리 그런 소설적 구성을 믿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4 0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마도... 노부나가 사후 공백지가 된 시나노[信濃], 카이[甲斐]를 두고 호우죠우 가문[北条家]과 싸울 때 전권대사가 되어 휴전 & 동맹을 성립시킨 공이 무지 큰 듯 합니다. 요다 노부시게[依田 信蕃]나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의 후방 교란이 있었다 하나 총체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호우죠우와의 교섭에서 이에야스가 바라던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공이 큰 듯 합니다.

      첫 출진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토오토우미[遠江] 시바하라[芝原]에서 일어난 전투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 패하여 이에야스와 몇 명들과 도망치던 중 허술한 식사를 하던 중 혼자서 먹지 않는 나오마사를 반찬투정 부린다고 생각한 이에야스가, '니도 먹어라'...라고 하자, 나오마사는 '남들이 식사하는 동안 보초를 서겠습니다. 행여 적이 오면 모두 도망가는 동안 목숨을 바쳐 모두 피할 시간을 벌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야스를 감동시켰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이에야스-나오마사 그렇고 그런 관계는 좀 믿기 힘들더군요. ^^

  7. 보통사람 2009.11.26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고보니 시마즈가문이 역전의 용사들을 많이 잡았네요...

    오오토모 소린 - 규슈전체의 60%를 영유하던 군웅.
    시마즈가문의 침공을 받은 이토가문을 구원하러 8만의 군사를 일으켰으나
    계략에 빠져 대패하고 겨우 도망침. 많은 인재들이 전사했고 패배가 알려지자
    오오토모가문의 많은 가신들이 류조지, 아키츠키 등과 내통하며 반란을 꾀하는등
    적지않은 후유증...

    류조지 타카노부 - 히젠의 곰이라 불린 군웅. 아리마 가문을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아리마 가문을 구원하러 온 시마즈군의 계략에 걸려 대패하고 전사.
    류조지가문의 많은 맹장들이 타카노부를 지키다 같이 전사.

    다카하시 쇼운 - 오오토모의 가신으로 5만의 시마즈군에 7백명은 군사를 이끌고 농성 끝에 전사

    초소카베 노부치카 - 아버지 모토치카, 소고 가문과 함께 규슈정벌에 참여했다가 대패. 아버지를
    먼저 후퇴시킨뒤 후위를 막다가 전사.

    이순신 - 노량에서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하던 중 시마즈군의 철포사격에 전사.

    이이 나오마사 - 세키가하라에서 후퇴하는 시마즈군을 추격하다가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1.26 13: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오토모 이하의 사람들은 노부나가가 살해 당하지 않았음 그냥저냥 살았을지도...(노부치카는 미묘)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코노에 사키히사[近衛 前久]의 중재로 오오토모-시마즈 간에 화평이 성립되었다고 하더군요.

      임진왜란 같은 노부나가의 조선 침략이 있었겠지만...역사의 if가 어떻게 흘러갈지...

  8. 2009.12.01 07: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9. 2009.12.02 06: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는 성인식을 치른 후 카와치(
) 2만석의 영토를 하사 받고 이때부터 외삼촌인 히데요시를 따라다니며 10대 중반 즈음부터 전투에 참가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한 군단의 대장이었다. 16살 때는 이세(伊勢)타키가와 가즈마스(川 一益) 정벌에 참가했다.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다”

 
 라고 외삼촌 히데요시는 매번 말했다. 좋은 일이라는 것은 히데요시의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긴 했다. 이 세상에서 히데요시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것이 바로 이 마고시치로우였다.
 둘째인 고키치(小吉 = 히데카츠(秀勝))도 그렇기는 했지만 이 둘째는 지능이 좀 떨어졌고 더구나 태어날 때부터 외눈이었다.
 셋째인 아이는 후에 히데토시(秀俊)라는 인물이 되지만 이 아이는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이부제(異父弟)히데나가(秀長)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탈락했다고 보아도 좋았다. 즉 히데요시의 혈통 중에 젊은 사람은 누나 오토모가 낳은 이 세 명밖에 없었다.

 
 ‘이 분이 후계자가 되신다.’
 라고 여러 장수들도 그리 생각하였다. 자연히 나이 먹은 장수들은 마고시치로우를 히데요시의 분신처럼 떠받들었다.
 이런 와중에 웃기지도 않다는 듯이 마고시치로우를 비웃는 사람이 있었으니, 히데요시의 몇 없는 친척 중에 하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였다. 오와리 키요스(淸州)의 오케야(桶屋[각주:1])의 아들로 태어나 아명(
兒名

)
이치마츠(市松)인 마사노리(正則)는 히데요시의 죽은 아비의 혈연이었던 관계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하시바 가문(羽柴)의 부엌 밥을 먹고 자라며 코쇼우(小姓)가 되었고, 이어 시즈가타케(賤ヶ岳[각주:2])에서는 공을 세워 지금은 모노가시라(物頭[각주:3])가 되어 세 개의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원래 마사노리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였으며 광인(狂人)이라 생각되어 지는 곳도 있었고 또한 히데요시의 일족이라는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남자였기 때문에 마고시치로우를 질투의 감정을 통해서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괭이질 하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남자다”

 

 누군가가 마고시치로우를 '귀족'이라 말했을 때 마사노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저 놈이 귀족인가? 옷이야 귀족하고 같겠지만 안에 있는 몸뚱이는 보급대의 짐꾼조차 버거운 놈이다”

 
 고 말했다.
 그런 험담이 마고시치로우의 귀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종류의 말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자연히 허세를 부리게 되었고 보좌하는 노장들에게까지 거만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16살 때 말이다.
 그러나 전투에 있어서는 보좌역들이 모든 것을 관리하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기에 큰 공도 없었다. 이 젊은이가 전투를 - 라기보다는 역사를 좌우할 정도의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다음 해인 17살이었을 때였다.

 
 그 전투는 후에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싸움이라고 일컬어 진다.
 때는 히데요시가 일본의 중앙 24개국을 휘하에 두었을 즈음으로 그 위세를 몰아 토우카이(東海)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
川 家康)를 제압하고자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로 진출했다. 이에야스도 본국인 미카와(三河)를 비워둔 체 오와리에 포진하여 거의 3배에 달하는 병력을 가진 히데요시군과 대치했다.
 서로 상대의 허실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았고 서로 견고한 야전진지를 구축하여 전선은 고착상태가 되었다. 이럴 경우 가벼이 군을 움직이는 쪽이 질 것이다. 적이 움직임에 따라 곧바로 대응하는 태세를 쌍방이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자중에 자중을 거듭하였지만 이럴 때 그에게 있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작전을 제안해 왔다.

 과거 오다 가문(織田家)의 동료였던 이케다 쇼우뉴우(池田 勝入[각주:4])와 테루마사(輝政) 부자(父子), 천하를 손에 넣고자 하는 히데요시에게 있어서는 기분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이케다 쇼우뉴우는 공을 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가 제안한 작전이라는 것은 -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가 비어있다. 지금 은밀히 별동대를 편성하여 이에야스 모르게 우회 행군하여 곧바로 미카와를 공격하면 이에야스는 놀라 이곳을 버리고 지 나라로 돌아갈 것이다. 이 별동대의 선봉을 자신에게 맡겨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찬동할 수 없었다. 이에야스가 알아채고 행여라도 패배라도 당한다면 이것을 계기로 전군의 사기가 떨어져 버릴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쇼우뉴우는 다음날 다시 한번 간청했다. 히데요시는 쇼우뉴우의 마음이 멀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결국 허용했다. 단 하나하나 세세히 주의시켰다.

 

 곧바로 별동대가 편성되었다.
 선봉은 이케다 쇼우뉴우, 중군은 모리 나가요시(森 長可), 호리 히데마사(堀 秀政)라는 식으로 오다(織田) 시대부터 맹장으로 유명한 장수가 선발되었고, 후군은 미요시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가 담당함과 동시에 별동대 전체의 대장도 겸했다.
 유격군 총 1 5천이 오와리 가쿠덴(樂田)의 진지를 출발한 것은 1584 4 6일 심야였다. 모노쿠루이(物狂) 언덕을 살며시 넘어 이에야스의 진지 전방을 통과, 첫째 날은 무사히 그 행동이 탐지되는 일 없이 넘어갔다.
 이에야스가 알게 된 것은 다음날인 7, 그것도 노을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에야스가 히데요시군에 밀정으로 파견했던 이가(伊賀) 닌쟈(忍者) 핫토리 헤이로쿠(服部平六)라는 자가 돌아와서 이것을 보고했다.
 히데요시의 한 부대가 움직였다는 보고에 이에야스는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해가 짐과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취한 방법은 은밀히 움직이는 적군을, 이 또한 은밀히 추격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코마키의 본영에서 9천의 병사를 히데요시군이 알아채지 못하게 빼내는 데 성공, 그 뒤 재빨른 행군으로 뒤를 쫓았고 곧이어 심야에 적 후미를 발견했다.

 

 “적 후군의 장수는 누구더냐?

 

 “미요시 마고시치로우님이십니다.

 
 고 부하 중에 하나가 답했다.
 이에야스가 히데츠구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인식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어떤 인물인가?

 
 고 적 정세를 자세히 아는 자에게 물었다. 히데요시의 양자라고 한다. 나이는 17. 다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했던 것은 이 어린 대장이 몸에 걸치고 있는 무구(武具)였다.
 마고시치로우 히데츠구는 그의 인생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수집했었는데 이 시기에는 열심히 유명한 무장의 무구를 모으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 남자의 대장으로써의 특징인 부대표식에치젠(越前) 키타노쇼(北ノ庄)에서 패사(敗死)한 오다 가문 제일의 용장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금색 마토이([각주:5])이다.
 쓰고 있는 투구는 미노(美濃)출신의 무예가 뛰어난 무사로 지금은 히데요시를 섬기고 있는 히네노 빗츄우노카미 히로나리(
日根野 備中守 弘就)의 중국 관모(官帽)모양의 투구를 억지로 청해서 손에 넣은 것이었고, 몸에 걸치고 있는 새털로 된 진바오리(陣羽織[각주:6])오우미(近江)출신의 호걸(豪傑)로 지금은 히데요시의 군중에 있는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가 항상 걸치던 것을 졸라서 손에 넣은 것이다. 말하자면 당대 영웅호걸의 전장도구들을 끌어 모아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한 분이시군

 
 이에야스는 머리를 조금 갸웃거리더니 비웃었. 이에야스가 알고 싶었던 것은 적장의 강하고 약함이었다. 선봉인 이케다 쇼우뉴우의 용맹함은 천하에 떨치고 있었으며, 중군인 호리 히데마사는 역전(歷戰)의 용사였고, 모리 나가요시는 미노 사이토우(
)()의 옛 신하출신으로 무사시노카미()를 칭하며 노부나가를 섬겨 여러 전장을 경험하면서 오니무사시(鬼武蔵[각주:7])라는 이명(異名)을 얻고 있었다. 또한 이 일족은 그의 동생 란마루(蘭丸), 리키마루(力丸)가 혼노우(本能)()에서 노부나가를 지키며 분전하다 그와 함께 죽은 것으로 유명하다.
 다들 너무 강했다. 기습의 효과는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에 있다. 이에야스는 마고시치로우의 겉모습의 기묘함을 듣고,

 

 “그 분은 분명 약할 것이다

 
 고 말했다.
 이에야스가 보건데 그 히데요시의 친척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용렬함과 무능함을 그러한 허세로 다른 사람들의 눈을 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인간 관찰을 끝낸 후 이에야스는 마고시치로우로를 공격의 중점으로  두기로 하고
포위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하쿠산(白山)
 이라는 곳에 마고시치로우군() 야영했다.
 동쪽은 고지(高地) 서쪽으로 경사졌으며, 계곡 사이에 남북으로 길이 하나 나있을 뿐으로 주변은 울창한 숲이었다. 이런 지형으로 보건대 마고시치로우는 마치 습격 당하기 위해서 야영하고 있다고 밖에 없었다.
 더구나 공격하는 이에야스 본인조차 놀랄 정도로 척후는 커녕 보초도 게을리 하고 있는 상태였다.

 

 “편한 싸움이 되겠군. 명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고 이에야스는 명령하며 야심함을 틈타 9천명을 속에 잠입시켜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을 기다렸다.

 
 아침이 되어 마고시치로우군은 일어났고 일어났지만 주변에 이에야스군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한 채 왁자지껄대며 아침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야스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은 때였다.


 이미
전투가 아니었다.
 학살이었다.
 대부분의 사졸들은 식기를 버리고 말을 버리며 맨몸으로 도망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고시치로우는 이미 대장이 아니었다. 사냥터의 동물과 같은 신경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도망가기 위해서 옆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숲에서 돌격해 오는 토쿠가와의 병사들을 보고 몸을 반대로 돌렸고 막상 갈 곳도 없어 주변을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다. 이러는 동안 그가 내린 명령은 하나밖에 없었다.

 

 “큐우베에(久兵衛) 불러라! 큐우베에를 불러라~!


 고 외쳤다.
 큐우베에는
그의 선봉대의 대장인 타나카 요시마사(田中 吉政)를 말한다.
 요시마사는 오우미(近江) 출신으로 아시가루(足軽[각주:8])부터 시작하여 출세, 여러 직책을 역임하는 동안 히데요시의 눈에 띄어 지금은 마고시치로우에게 파견된 전술 지휘관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남자였다. 남자의 부대만이 이런 혼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간신히 버티며 적을 막아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요시마사는 이상히 여겨 방어선을 철수시키고 왔다.

 

 “쇼우뉴우나 무사시에게 사태를 알려라~ 도우러 오라고 말해!

 
 하고 소리쳐댔다.
 요시마사는 어처구니 없었다.
 전령 역할이라면 츠카이반(使番[각주:9]) 대장 옆에 있다.
 제1선의 지휘관을... 그것도 방어하기에바쁜 와중에 불러서는 전령으로 삼으려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거기에명령이라는 것도 좋지 않았다.
 지금 혼란은 후군이 혼자서 막아야만 하지 리나 앞서 있는 전방의 부대를 불러, 설사 그들이 구원하러 오더라도 개미지옥과도 같은 적의 함정에 빠져 속에서 각개격파 당해 버릴 것이다. 그런 가지 이유로 요시마사는 거절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미친 듯이 외쳤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거냐? 죽인다!!”

 
 고 소리쳐댔기 때문에 어쩔 없이 부하도 없이 혼자서 말을 몰고 전방 부대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열심히 달려 호리 히데마사의 부대를 따라 잡아 후군이 무너졌다고 알리자,

 

 “큐우베에. 자네는 츠카이반이 아니다, 미요시 가문에서 지휘를 하는 신분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겁을 먹고 도망쳐 것이군

 
 하고 모두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요시마사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물러나 전장에서 이탈하면서
 ‘
장래 가능성이 있는 대장은 아니다
 며 마고시치로우에게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전투 후에 사표를 내고 낭인이 되었다.
 그 여담이지만 남자는 고향이 같았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주선으로 히데요시의 직속 신하가 되어, 기량에 걸맞게 10만석이 주어졌고 후에 세키가하라(ヶ原)에서는 이에야스측에 선 덕분에 치쿠고 야나기카와(筑後 柳川) 30여만석을 영유하게 된다.

 
 요시마사가 전령으로 떠나면서부터 마고시치로우의 군은 이상 군대가 아니었다. 모두 말을 버리고 맨발로 도망쳤다. 마고시치로우도 도망치면서 잔머리를 굴렸다. 중국 관모 모양의 투구, 금색 마토이의 우마지루시, 새털로 진바오리라는 호걸의 상징은 모두 버리고 역시 맨발로 도망쳤다. 이렇게 하면 적은 자기를 말단 무사로 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그 앞을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 언제나 자랑하던 말에 채찍질하며 조릿대로 개인표식을 비스듬히 등에 단 채 유유히 도망치고 있었다.
 카니는
미노 출신으로, 창을 쥐면 남자를 당해낼 사람이 없다고 하는 남자이다. 히데요시는 마고시치로우에게 도움 된다고 생각하여 이런 종류의 능숙한 전쟁꾼들을 많이 배속시켜 주었다.

 카니는 역시 전장에 익숙한지 도망치는 방법도 어딘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사이조우~ 사이조우~”

 
 하고 마고시치로우는 애원하는 듯이 불렀다. 물론 마고시치로우는 카니에게 아무런 용무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그가 타고 있는 말이었다.

 

 “말을 나에게 다오

 

 마고시치로우가 말하자 카니는 눈동자를 굴리며 뒤돌아서는,

 

 “비올 때의 우산이외다

 
 라고 말하고선 도망쳤다. 비가 때는 우산이 필요하다. 퇴각할 때는 말이 필요하다. 그리 쉽게 말을 줄까하는 말이었다. 카니와 같은 미노 사이토우 가문에서 오와리 오다 가문으로 말을 갈아타며 수 많은 전쟁터를 경험해 전쟁전문가들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패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의 앞길에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남자는 후에 사표를 내던지고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기게 된다.

 
 그러는 동안 마고시치로우에게 배속된 부대장 중에 명인 키노시타 토시나오(木下 利直) 도망치면서 마고시치로우를 발견하곤 자신의 말에 태워 도망치게 하였고 자신은 맨땅에 서서 개인표식을 등에서 뽑아 땅에 꽂고서는 달려드는 적병을 막았지만 전사했다. 역시 그의 동생인 스오우노카미 토시마사(周防守 利匡) 형을 도와 말 없이 맨땅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마고시치로우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둘의 마지막조차도 알지 못했다.

 
 이 붕괴는 곧바로 전방의 아군들에게도 파급되어 선봉대장인 이케다 쇼우뉴우는 아들인 모토스케(之助) 함께 전사하였고 명장이라 일컬어졌던 모리 나가요시도 적의 두터운 포위망 속에서 이마에 철포 탄환을 맞고 죽었다. 어쨌든 별동대는 전멸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이 나가쿠테(長久手) 패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외교로 고립시킨 화해하여 결국은 신종(臣從)시켜 토요토미 가문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이것이 오히려 그의 무위(武威) 나타내는 최대의 이력이 되었으며 히데요시는 죽을 때까지 이에야스에게 큰소리를 못쳤다. 또한 덕분에 히데요시가 죽은 천하를 손에 넣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약 마고시치로우의 실패가 없었다면 히데요시가 이겼고 이에야스는 패망(敗亡)하여 히데요시 정권 불안의 불씨는 꺼졌을 것이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히데요시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몰랐다. 도망친 히데요시에게 전령을 보내어,

 

 “대신할 장수를 주세요

 
 라고 하였다. 마고시치로우의 입장에서는 키노시타 형제가 죽었으니 그들을 대신할 인물이 필요하다, 히데요시 옆에 있는 인물 중에 하나를 보내주세요 - 라는 것이었다.
 이름까지 집어서 말했다. 무용(武勇) 뛰어난 이케다 켄모츠(池田 監物) 원합니다 하였다. 말투가 마치 물건이라도 바꾸자는 듯하였다.

 

 “ 놈이 인간이냐?”

 

 라고 히데요시는 뻔뻔스럽게 마고시치로우의 말을 가지고 사자 히토츠야나기 이치스케(一柳 市助 = 후에 이즈노카미(伊豆守)[각주:10])를 향해서 우선 격노하였다.

 

 “네 놈을 우선 죽이고 나중에 마고시치로우에게 배를 가르게 하겠다"


 까지 말하였다. 키노시타 형제를 개죽음 시키고 자신만 전쟁터에서 도망쳐 왔으며 거기에 그 때문에 모리 나가요시, 이케다 쇼우뉴우 부자까지 전사했다. 그것에 아무런 창피를 느끼지 못하고 도망쳐 오자마자 대신할 사람을 보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정신상태를 가진 것인가?
 '저건 그냥 바보인가
?’

 히데요시는 이 패전보다도 그 생각으로 인해 더욱 마음이 어두워졌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장래를 맡길 자신의 혈연이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 졸렬한 놈들뿐인지 예전부터 생각했다.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
동생인 히데나가(
秀長)를 제외하곤 모두 지능에 결함이 있던지 성격이 좇같았다. 처의 친척들을 둘러보아도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 중에서는 제대로 된 놈이 없었다. 적어도 마고시치로우 정도는 하고 생각하여 조금은 기대를 걸었다. 그 재능은 포기한다손 치더라도 저 가벼운 성격을 보면 자신의 뒤를 물려준다고 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권력의 자리라는 것은 하루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히데요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 젊은이를 어떻게든 제 앞가림은 하는 머리와 마음의 소유자로 만들어 그런대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후계자로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히데요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일을 꾹 참고 있었지만, 일단락한 어느 날 조용히 자신의 비서를 불러, 붓과 종이를 준비케 한 후, 눈 앞에 땀구멍이 커다란 밉상 맞은 얼굴을 한 마고시치로우가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받아 적게 하였다.

 
 [너는]이라는 말투로, 편지는 곧바로 본제로 들어갔다.

 평소 히데요시의 조카라는 것을 내세우며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동이 많다.
 
꾸짖어야 할 때가 왔다. 마음가짐도 올바르지 못하다. 반대로 역시 히데요시의 조카라고 존경 받을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앞으로는 더 이상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한 때는 죽이려고 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가엾다는 마음이 생겨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 마음을 고쳐 남들에게도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뭐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어쨌든 이번 전투에 대해서다.
 키노시타 형제를 붙여주었더니 너는 그 둘을 개죽음 시켜 버렸다. 그것을 너는 미안하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도 없이 히토츠야나기 이치스케를 보내와 이케다 켄모츠를 달라고 말해 왔다. 창피함을 느끼고 분발해야 할 때에, 그 대신할 사람을 요구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냐? 그 말을 전하러 온 놈도 얼간이여서 한 때는 내 직접 죽이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앞으로는 심사 숙고하여, 히데요시의 조카는 굉장한 인물이라고 남들에게 들을 수 있게 되어 준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그것에 만족하겠다.
 지금의 마음 가짐만 고친다면 어느 나라건 너에게 주겠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얼간이라면 아무리 목숨을 구해주어도 내 체면에 걸린 문제이기에 내 손으로 직접 베겠다. 히데요시는 사람 베는 것을 싫어하지만 너를 이 상태로 놓아두는 것은 더욱 창피해지기에 다른 사람 손을 쓰지 않고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겠다.
  누가 봐도 훈계(訓戒)의 편지임을 알 수 있듯이 똑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항목에,
 [너는 요령 좋고 잔재주가 많다
.]

 라는 말로 마고시치로우의 능력을 평하였. 요령 좋고 잔재주가 많다는 말을 제대로 인간이 들으면 내겠지만,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정도의 표현만이 간신히 마고시치로우를 칭찬할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두고 언젠가는 나의 묘우다이(名代[각주:11]) 시켜주려고 까지 생각했었지만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으로는 끝이 보였다. 이것은 하늘이 히데요시의 이름을 남기지마라, 가문이 끊어져라라고 말씀하시는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라고 계속해서 훈계를 주제로 강조했다.
 그러나 마고시치로우는 편지의 의미를 이해할 없었다. 읽고 나서는,

 

 “나는 무예도 부족하 겁쟁이다라는 뜻인가?”

 
 라고 말했다. 말한 상대는 편지를 전하러 미야베 젠쇼우보우(宮部 善祥坊), 하치스카 히코에몬(蜂須賀 彦右衛門) 사람에게 였다. 둘은 마고시치로우의 난독증 놀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하고 둘은 히데요시의 진의를 열심히 설명했다.

 

 “알고 있다!

 
 고 마고시치로우는 소리 높여 날카롭게 말했다. 정도의 독해력이라면 젊은이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단지 가지 이해할 없는 것이 히데요시의 분노였다.
 마음가짐, 마음가짐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은 자신의 부족한 무예와 많음을 질책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히데요시는 마고시치로우라는 인간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틀리다 마고시치로우는 생각했다. 억울하다.
 ‘
나는 원래 용감한 남자다
 마고시치로우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니, 믿는 습관이 되어있었다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주문을 외우는 듯이 이렇게 믿는 습관을 항상 마음속에 갖추고 있기에 군단의 대장으로써 말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용감함을 히데요시는 모른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다. 한번의 패배로 이렇게 질책 받지 않아도 되잖아? 라고 내심 생각했다. 하지만 마고시치로우는 아무리 그래도 말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조그만 목소리로 둘에게 물었다. 세상살이에 익숙한 둘이라면 히데요시의 분노를 피하여 그의 기분을 좋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무엇을 하던지, 히데요시님에게서 붙여드린 숙노(宿老)들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심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둘은 말했다.

  1. 상자나 통 등을 제조, 판매하는 가게 혹은 사람을 뜻함. [본문으로]
  2. 오다(織田)가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중급 지휘관. [본문으로]
  4.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를 말함. [본문으로]
  5. 대장 옆에 세우던 표식. [본문으로]
  6. 갑옷 위에 조끼처럼 걸쳐 있는 옷. [본문으로]
  7. 전장에서의 모습이 괴물(鬼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과 그의 관도명을 붙인 것. [본문으로]
  8. 최하층 무사(侍). [본문으로]
  9. 전령(傳令)을 말함. [본문으로]
  10. 히토츠야나기 나오스에(一柳 直末).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었든 듯 호우죠우(北条)를 멸한 오다와라 정벌에서 그가 전사하자 "칸토우를 손에 넣은 것보다 그를 잃은 슬픔이 더 크다"라고 말했다 하다. [본문으로]
  11. 대리인을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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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gayasea BlogIcon 오연 2007.06.27 09:05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