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두 명이었다는 놀랄만한 이설(異說)을 발표한 사람이 있다. 사의(史疑)라는 책을 저술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이다. 토우카이 지방[東海地方]의 지방관리로 근무하던 중 미카와[三河]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년 천하를 손에 넣은 이에야스는 세라타 모토노부[世良田 元信]라는 양아치들의 두목이었다고 한다. 그는 진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의 부하가 되어 불시에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이런 이설이 나올 정도이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선조 역시 확실치 않다. 닛타 겐지[新田源治][각주:1]의 자손을 자칭하고 있지만 이는 나중에 날조된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토쿠가와 가문의 시작은 코우즈케[上野] 닛타 군[新田郡]에 살던 토쿠아미[徳阿弥]라는 행각승()으로, 이 스님은 떠돌던 중 미카와에 와서 서부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의 호족 타로우사에몬[太郎左衛門]의 사위가 되어 환속, 이름을 마츠다이라 타로우사에몬 치카우지[松平 太郎左衛門 親氏]라고 했다 한다.[각주:2]
 후년 이에야스가 쇼우군[将軍]이 되었을 때 아시카가 겐지[足利源氏][각주:3]의 명문 키라 씨[吉良氏][각주:4] [각주:5]의 족보를 물려 받은 것[각주:6]도 이런 애매한 선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족보사칭이다.

 

화제를 돌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는 두견이[ほととぎす]에 비유하여,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가 노부나가[信長], ‘울게 만들겠다’가 히데요시[秀吉], 마지막으로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식으로 정권의 자리를 획득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에도 시대[江戸時代] 후기 턴포우[天保] 연간[각주:7]에 그려진 풍속도에는 갑주를 입은 남자들이 떡을 만들고 있는 장면이 있어, 절구공이를 들고 막 찧으려고 하는 것이 노부나가, 그 옆에서 떡을 만들고 있는 것이 히데요시, 그리고 최상석에 가만히 앉아서 떡을 먹는 것이 이에야스이다. 이에야스의 천하쟁취를 비꼰 그림으로 그 때문에 만든이인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 芳虎]는 막부(幕府)에 체포되어 60일간 수갑이라는 형(刑)과 절판이라는 벌에 처해졌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에야스의 유훈(遺訓)이라 알려진[각주:8]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가 그의 생애를 관철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보다 8살, 히데요시보다는 5살 어리다. 조부 키요야스[清康]의 시대부터 미카와 오카자키[岡崎] 성주가 되었지만, 동쪽의 이마가와[今川], 서쪽의 오다[織田]라는 강력한 세력에 끼어 약소세력의 비애를 맛보고 있었다.
 조부 키요야스가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부터 마츠다이라 가문은 고난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린 이에야스는 인질로 바쳤고, 그로 인해 이에야스와 마츠다이라 가문은 인종의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2년간 마츠다이라 주종(主從)은 고난 속에서 허덕이지만, 이 시기에 이에야스의 참을성 강한 성격이 만들어진다.

 1560년 5월 19일.
 오다 노부나가의 전격작전으로 인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죽어, 덕분에 이에야스도 인질생활에서 해방된다. 이에야스는 19살이 되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관계를 끊고 오다와 동맹을 맺어 미카와 통일을 이룬다. 1563년, 그때까지 모토야스[元康]에서 이에야스[家康]로 개명한다.

 막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찰나 본거지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적이 봉기한다. 영내에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9]가 봉기한 것이다. 미카와에 있던 이마가와 잔당에 더해 대대로 마츠다이라 가문을 섬기던 미카와의 무사들까지도 반기를 들었다.
 이를 반년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는데, 강화 조건의 실시에서 이에야스는 일찌감치 후년의 뻔뻔한 정치성을 발휘한다. 잇코우 종[一向宗][각주:10] 사원의 안전을 보장했으면서도 막상 반란이 진정되자 잇코우의 절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약자와 맺은 약속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지만, 강자에게는 어디까지나 의리를 지키는 정책이 일찍이도 이때부터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즈음 강자 노부나가에게는 자신의 적자(嫡子) 노부야스[信康]에게 노부나가의 딸과 결혼시켜 충성의 뜻을 나타내었고, 나중에는 그 노부나가가 명령에 따라 자기 아들 노부야스를 죽이기까지 한다.(이 부분은 졸역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아 처자식을 죽였다?"를 참조 삼아 보시길.)

 이에야스는 조심성 있는 성격이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서면 그의 호방함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1572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2만 군세와 싸운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그런 모습을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는 센고쿠 최강인 코우슈우[甲州]의 군세가 상대. 더구나 상경(京)하려는 대군이었다. 이에야스의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맞서 싸워 실제로 참패하였다.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퇴각해 온 이에야스는 일부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안팎으로 화톳불을 대낮같이 밝히게 하였다. 적에게 공격해 볼 테면 하라는 대담한 전술이었다. 뒤를 쫓아 온 코우슈우의 병사들은 어떤 함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결국 공격을 단념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 본인은 뜨슨 물에 밥을 말아 세 그릇을 비우고는 코를 크게 골며 잤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타케다의 맹장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는, “토쿠가와 군의 전사자는 모두 우리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죽었다”고 신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야스는 패하기는 했지만, 토우카이 No.1 무장[각주:11]이라고 일컬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전쟁터에서 이에야스가 지휘하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다. 처음엔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주먹을 쥐고 말 안장 앞부분을 두드리며 공격하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너무도 세게 두드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피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야스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였다고 한다.

 천하에 대한 야망이 이에야스의 마음 속에서 형태를 띄기 시작한 것은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각주:12] 때부터 일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태두로 그 꿈은 잠시 접어 둔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대놓고 정권획득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바친 서약서를 어기고 여러 다이묘우[大名]들과 그들의 자식에게 자신의 양녀를 시집 보냈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여러 다이묘우의 영지를 가증시켜 많은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에게 보낸 편지는 실로 179통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서군을 격파하였고,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에서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확인 사살하여 토쿠가와 정권을 반석에 올려 놓은 것이다.

 말년의 이에야스의 풍모를 전해주는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50세 전후부터 비만 체형이 되었고 아랫배가 나와 혼자서 훈도시를 조이지 못하여 시녀(侍女)에게 조이게 할 정도였다. 신장은 5척 1~2촌(약 155~158)정도였다고 한다.

 이에야스가 굉장히 건강을 생각했다는 것은 유명하다. 매사냥이 이에야스 건강의 원천인 듯 죽을 때까지 매사냥을 행한 횟수는 천 번을 넘는다.

 이에야스의 측실은 10명 이상 있는데 다이묘우 등 고귀한 집안의 딸들을 동경했던 히데요시와는 반대로 이에야스의 측실에는 하층계급의 딸이나 미망인이 많았다. 말년까지 정력은 절륜했던 듯 소위 토쿠가와 어삼가(御三家)[각주:13]의 오와리 가문[尾張家]의 9남 요시나오[義直]는 59살 때, 키이 가문[紀伊家]의 10남 요리노부[頼宣]는 61살 때, 미토 가문[水戸家]의 11남 요리후사[頼房]는 62살 때의 아들이다. 

 건강을 소중히 한 이에야스는 의사 이상으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화제국방(和剤局方)[각주:14]’이라는 의학서를 항상 옆에 끼고서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조제할 정도였다. ‘만병원(万病圓)’이라 이름 지은 약을 특히 잘 만들었다고 한다.[각주:15]

 1616년 4월. 죽음을 앞둔 이에야스는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와 측근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할 일을 세세히 지시하였다. 유체나 위패의 위치는 물론 닛코우[日光]에 작은 묘소를 세우는 것까지 지시하였다. 죽기 이틀 전에는 죄인(罪人)을 시험 삼아 베게 한 명도(名刀) 미이케덴타[三池典太]를 베갯머리에 가지고 오게 한 뒤, 이불에서 일어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허공을 내리쳤다. 그리고 당장 죽을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확실한 말투로, “나는 이 칼을 가지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다”고 외쳤다.

 그 다음 날, 신류우인 본슌[神流院 梵舜]을 불러 “쿠노우[久能山]의 내 묘소에, 내 몸을 서쪽으로 향하게 해서 안치하라”고 했다고 한다. 즉 서방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6] 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대로(大老)를 불러, “히데요리[秀頼]를 부탁 드립니다. 부탁 드립니다”고 유언한 안쓰러운 모습에 비하면, 실로 냉정한 최후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1542년생.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적자. 아명 타케치요[竹千代], 이름이 처음엔 모토노부[元信], 다음엔 모토야스[元康]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전사를 기회로 독립하자, 1568년 즈음 미카와[三河]를 평정.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후 미카와, 토오토우미[遠江],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남반부를 영유. 히데요시[秀吉]와의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결전을 피해 화해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7] 후인 1590년 칸토우[関東] 6개 지역에 242만석을 하사 받아 에도 성[江戸城]를 거성(居城)으로 하였다. 1603년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 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1616년 4월 7일 죽었다. 75세.

  1. 오우슈우[奥州]를 무대로 펼쳐진 전구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삼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대활약한 미나모토노 하치만타로우 요시이에[源 八幡太郎 義家]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義国]의 첫째가 코우즈케[上野]의 닛타[新田]라는 곳을 영유하면서 닛타라는 성을 썼다. [본문으로]
  2. ...는 에도막부가 편찬한 책(朝野旧聞褒藁)에 따른 말이고, 후세 아직까지 권위를 인정 받는 와타나베 요스케[渡辺 世祐]라는 사람의 논문에 따르면 - 토쿠아미에게 조상을 묻자, 토쿠아미는 "뭐 우리네라고 하는 것들은 동서남북을 떠돌며 여행하는 사람들로, 어디건 상관없이 유랑하는 자이기에 그런 것을 물으면 창피합니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무사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에, 떠돌이라는 것이 창피하다고 한 것이다.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닛타 겐지와 마찬가지로 요시쿠니[義国]가 아시카가 장[足利庄]을 영유하며 그의 둘째 아들 요시야스[義康]가 영유하며 이후 아시카가 씨가 된다. 사족으로 닛타와 아시카가 양 쪽의 선조인 요시쿠니는 아시카가 시키부다이후[足利式部大夫]라고 칭한 것을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 중 적류는 아시카가 인 듯. [본문으로]
  4. 아시카가 씨 3대 당주 요시우지[義氏]가 카마쿠라 중기 미카와의 키라 장[吉良荘]을 하사 받아, 아시카가의 땅을 물려 준 적남 야스우지[足利 泰氏]를 제외한 서장자 나가우지[吉良 長氏 - 사족으로 이 나가우지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선조이다], 셋째 요시츠구[吉良 義継]에게 부터 시작하는 가계. 키라 장은 야하기가와 강[矢作川]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형인 나가우지는 서쪽을 영유하여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를 칭했다. (동생 요시츠구는 처음엔 동쪽인 토우죠우 키라시[東条吉良氏]가 되나 후에 오우슈우[奥州]의 남조 측을 정벌하기 위해 오우슈우로 가 오우슈우 키라 씨[奥州吉良氏]의 선조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초기 잠깐 활약하나 몰락). [본문으로]
  5. 후에 나가우지의 손자 미츠요시[吉良 満義] 때 미츠요시와 그의 적남 미츠사다[吉良 満貞]가 무로마치 막부 초반 혼란기에 각지를 전전하여 비운 사이 본거지인 키라의 동쪽을 미츠사다의 동생 타카요시[吉良 尊義]가 횡령하여 토우죠우 키라 씨[東条吉良氏]가 성립. 후에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이 토우죠우 키라 씨의 5대 당주 키라 요시후지[吉良 義藤]가 동족이며 예전 종가집인 사이죠우 키라 씨[西条吉良氏]와 싸우다 전사. 그 뒤를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 5대 당주 나가치카[松平 長親 - 이에야스의 고조부가 된다]의 셋째 아들 마츠다이라 요시하루[松平 義春]가 잇고 이때부터 토우죠우 마츠다이라 씨[東条松平氏]가 된다. [본문으로]
  6. 센고쿠 시대 키라 씨는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압박에 대항하기 위해 동서 양 가문은 키라 요시야스[吉良 義安] 때 합병. 요시야스의 부인은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 또한 요시야스는 후에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의 포로가 되어 있던 시기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만나 친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7. 1830~1844년 사이. [본문으로]
  8. 이 말은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미토 코우몬[水戸黄門]으로 유명한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 光圀]가 한 말을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어떤 놈(이케다 마츠노스케[池田 松之介])가 이에야스의 글을 흉내 낸 것을 또 딴 놈(타카하시 테이슈우[高橋 泥舟])가 각지의 이에야스 사당[東照宮]에 바친 것이라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9.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10. 혼간지[本願寺]의 종파인 쟁토진종(浄土真宗)의 별칭. [본문으로]
  11. 海道一の弓取り. [본문으로]
  12. 1582년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살해한 사건. [본문으로]
  13.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본문으로]
  14. 중국 북송(北宋) 휘종 대에 만들어진 중국의 의약서. [본문으로]
  15. 여담으로 죽기 전 이에야스는 이 만병원에 굉장히 의지하였다. 이에야스의 전의(典醫)인 카타야마 소우테츠[片山 宗哲]가 말리자 신경질내며 그를 시나노[信濃]의 타카시마[高島]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까지는 토쿠가와의 부하가 아니었던 가문. [본문으로]
  17. 히데요시가 칸토우[関東]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한 1590년의 전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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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iroyume 2009.10.19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왠만큼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승려가 마쓰다이라가의 선조인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정설이 아니라 그냥 추측 중에 하나라는 것과 50세부터 비만이라는건 원래부터 비만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인 듯.
    이 양반도 보면 만만찮은 간웅인데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생애가 격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뭍히는 듯 그러고 보면 불같다고 생각하는 노부나가도 여자(네네에게 보낸 편지) 자상한 면이 있는 한편 느긋하다고 생각하는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당시 제장들에게 열라게 편지써보낸 것과 같은 것이겠죠. 소하찌씨는 저런 이에야스를 어떻게 그럴듯 하게 미화를 잘 시켰을까나. -_-;
    떡에 관한 일화는 아는데 저 그림을 본건 처음입니다. 어째 우리나라의 솥단지 얘기가 생각나는건......

    즐거운 한주 되세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시 야마오카 선생의 소설의 영향이 큰 듯 합니다. 그런 인물은 다시 찾기도 힘들 정도로 성인군자로 나왔을 정도다 보니.

      개인적으로 그 소설 초반의 노부나가는 정말 멋진 듯 합니다.

      우리나라의 솥단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비슷한 이야기 인가요?

      흰꿈님도 좋은 한 주가 되시길 바랍니다.

  2. 나라 2009.10.19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득 궁금한게 생겼는데... 저 일본식으로 중간에 머리 깎는 습관은 언제 생긴 건가요?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야마가와[山川] 출판사의 일본사 사전에 따르면 중세(카마쿠라 시대~센고쿠 시대) 귀족부터 시작되었다고 나오며, 일본 위키 해당항목[さかやき]를 보면 1176년에 그 기록이 보인다고 하네요.(즉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날뛰기 몇 십년 전부터 나왔다는 말입죠)

      생성 초반엔 전쟁터에서 투구를 쓸 때 후끈거리고 답답한 것을 막기 위해서 했는가 봅니다만, 나중엔 무가의 일상 생활에서도 하게 되어, 특히 무가에서는 성인식 때 이발역[理髪役]을 맡은 사람이 머리를 밀고나 잘라 줌으로써 아이에서 성인이 되었음을 외견 상으로도 알 수 있게 됩죠.

  3. Favicon of http://zardizm.tistory.com BlogIcon NØA 2009.10.19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떡 치는 (...이라고 하니 어감이 요상하군요;;) 얘기는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림에 미츠히데도 들어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처음 보기도 하고...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0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론 꽤 유명한 그림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어쩐지 그래서 미디어위키에도 없었군요.(즉 저 그림은 와세다 전자 도서관에서 무단으로 다운 받은 것! 우하하하)

      그러고 보니 몇 달전에 떡집 사장이 수 십명의 여성들을 농락했다고 자극적인 제목을 달던 몇몇이 떠오르는군요.
      (떡집사장이 떡은 안치고 떡을...이라는 식으로 ^^)

  4. 나라 2009.10.20 17: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소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5. ckyup 2009.10.20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대망에서의 너구리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상식이 되었나 봅니다 - 무조건 대의를 위해서만 행동하는 성인군자..... 좋은글 또 감사합니다, 몰랐던걸 알게되었군요. 떡반죽하는 히데요시 그림이 참 재밌네요. 물론 또 대망 이야기지만..., 삼국지와 비교해보면 삼국지의 주군들은 거의 모사나 군사들의 머리에 의지하는면이 많지만, 대망에서보면 가장 똑똑한 군사도 주군들의 머리를 따르지 못하더군요, 특히 히데요시. 그리고 대망이 뻥이 덜 심해요 - 군사숫자에서 비교해보면 확실하죠, 삼국지는 갑자기 급하게 정찰나가도 한 5천 끌고 나가죠.

    암튼 좋은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연재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무래도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이미지가 가장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동물도 태어나서 처음 본 생물을 어미로 여긴다고 하는데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망과 삼국지의 차이는 작자의 인식 차이라 생각합니다.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곳을 대규모 군사 움직임에서 찾느냐 인물의 심리에 중저을 두느냐의 차이 아닐까요?

      정찰나가도 오천...^^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순간 박장대소하였습니다.

  6. 맹꽁이서당 2009.10.21 1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디어 너구리 영감이군요. [삼국지 연의]가 수많은 독자들에게 촉한정통론을 심었듯이 (머리가 굵어지면서 위나 오에도 관심이 가긴 하지만, 맘 깊은 곳에서는 역시..) [대망]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노부나가나 히데요시가 평화를 정착시켰으면 이에야스는 역사속에서 다테 마사무네 정도의 위상이 아니었을까, 아님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정도 나이(세키가하라 직전?)에 죽었다면 전국시대가 더 이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나이 먹으면서 조조 쪽으로 옮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제갈량에 대한 동경은 지워지질 않더군요(유비는 많이 인식이 변했지만요)

      노부나가가 살아서 천하통일 했을 시에는...음... 개인적으로는 오다 가문 휘하의 무장들이 너무 쟁쟁해서 이에야스가 나올 자리나 있었을지...뭐 IF의 이야기는 각자 다들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이거다..라고 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야스가 죽더라도 그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마에다 토시이에 혹은 모우리 테루모토 정도가 이에야스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7. Favicon of http://royalhouse.tistory.com BlogIcon Cavalier 2009.10.21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천하인이 있는가 하면, 저런 천하인도 있고.
    천하를 얻기 위한 사람은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뭐 천하만 손에 넣으면 조상 바꾸기야 쉬울테니까요. 사람들이 믿건 안 믿건 대놓고 반론을 하지는 못할테니까요.

  8. Favicon of http://liquer.tistory.com BlogIcon 2009.10.21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금 사이언스 채널에서 [전사]란 제목으로 이에야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주더군요. 이에야스가 딱히 나쁘진 않게 나오는데 결말이 좀 씁쓸했던것도 같습니다. '미츠나리는 죽고 히데요리는 반란을 일으켰다 죽고 이에야스의 가문은 250년간 일본을 지배했다.' 식으로 -_-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2 14: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호~ 사이언스 채널에서도 그런 것을 하나 보군요. 뜬금없겠지만 히스토리 채널 없애버린 중앙일보에게 갑자기 분노가 이는군요. ^^;

      이에야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하고 말하고 싶군요. ^^ 뭐 일본 사람들도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섭정가문[摂家]의 상하구별을 못하는 사람들 많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듯.

  9. shotokanfist 2009.10.25 15: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전사라는 프로그램을 문장으로 정리해서 동명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누가 책을 줘서 읽어봤습니다만, 번역상의 오류가 많았는지 (설마 원저자가...) 기본적인 연도나 인명, 사실관계에 오류가 많아서 읽으면서 좀 황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프로그램 자체는 호평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못봤는데, 평이 좋더군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10.26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검색해 보니....
      전사들(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이기는 기술') Heroes and villains

      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것인가 보군요.... 설명에 인문경영서다...라는 부분이, 좀 슬프게 느껴지는 군요. 그냥 인문서라고 해도 될 것을 꼭 경영서라는 부분을 붙여야 한다는 점이 조금 아쉽군요.

      이야~ 어쩌면 윌리엄 아담스의 수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숨기진 역사를 쓴 것일 수도...(물론 그럴리 없겠지만요 ^^ )

 사카이 가문[酒井家]은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혈연관계인 명문가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로부터 거슬러 올라가길 7~8대 전의 일이다. ‘토쿠아미[徳阿弥]’라는 이름의
행각승(行脚僧)이 미카와[三河] 서쪽 사카이 향[坂井鄕]에 흘러 들어와 마을 촌장[庄屋]의 신세를 지다 어느덧 그 집의 사위가 되어 아이를 만들었다. 이 아이가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각주:1].

 이 토쿠아미가 사카이 향을 떠나, 이번엔 역시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향[松平郷] 촌장[庄屋]의 사위가 되어 역시 아이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에야스의 조상이라 전해지고 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사카이 가문과 마츠다이라 가문(후에 토쿠가와 가문)은 밀접한 관계였다. 타다츠구의 부인도 이에야스의 숙모[각주:2]이다.

 토쿠가와 가문 후다이[譜代] 중에서도 최상급의 문벌이었다. 타다츠구 역시 이에야스가 어렸을 때부터 가로(家老)의 지위로 내정을 총괄하고, 전투에 나서면 선봉을 담당하는 등 중책을 맡았다.

 1564년. 이에야스는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3]를 평정하며 동부 미카와로 진출,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중요거점 요시다 성[吉田城]을 함락시켰다. 타다츠구의 노력으로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타다츠구는 이 공으로 인해 미카와 동부의 지배를 일임 받으며 요시다 성주가 되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중에서는 처음으로 성주에 임명된 것이다[각주:4]
.

 1567년에 행해진 가신단 편성을 보아도, 타다츠구는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와 더불어 '선봉군 대장[惣先手侍大将]'이라는 지위[각주:5]로, '이에야스 직속군 선봉대장[旗本先手侍大将]'인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기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보다 상위에 있었다.[각주:6]

 그랬던 것이 – 1590년, 이에야스가 칸토우[関東]의 주인이 되었을 때 지위가 역전되었다. 타다츠구는 이 시기 이미 은거하여 가독(家督)을 아들인 이에츠구[家次]에게 물려준 상태였지만, 사카이 가문은 시모우사[下総] 우스이[臼井]에 3만석밖에 하사 받지 못했던 것이다. 타다츠구보다도 아래에 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는 12만석. 혼다 타다카츠,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각각 10만석에 봉해졌다. 타다츠구는 참을 수 없었다. 명문가인 사카이 가문이 신참인 이이 가문[井伊家]보다 아래에 놓인 것이다. 타다츠구는 마음을 정하고 이에야스를 만나 자기 자식 이에츠구에게 가증(加增)을 부탁하였다.
 “너도 니 자식이 소중한가?”
 뜬금없는 이에야스의 말이었다. 처음에 타다츠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머리를 들자, 이에야스는 꾸짖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타다츠구는 그제서야 그 뜻을 알았다.
 ‘그때를 말하는 것이다’

 1579년.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에 따라 살해 당한 사건을 말이다. 그때 노부나가에게 그 둘의 살해를 직접 명령 받은 것이 다름아닌 이 타다츠구였던 것이다. 어째서 노부나가에게 노부야스의 무죄를 주장하고 조명(助命)을 탄원하지 않았던 것인가? – 이에야스는 그 통한을… 여태껏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타다츠구는 다음에 이을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 사카이 타다츠구에게는 의외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새우잡기[海老すくい]'라는 춤을 추게 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1575년,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싸운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전날 밤. 토쿠가와 진영의 사기는 가라앉아있었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 죽어 현재 없다고는 하여도, 상대는 이름 높은 코우슈우 군단[甲州軍團]이었다. 너무도 강적이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무언가 떠올려 타다츠구를 불렀다.
 “’새우잡기 춤’을 추어 주지 않겠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타다츠구의 춤이 시작되자 그 절묘한 손동작, 몸동작에 모두 순식간에 빠져들어, 그 자리는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걸로 코우슈우의 병사들에 대한 공포심은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칸토우[関東]의 패자(覇者)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와의 주연(酒宴)에서도 이것을 추어, 너무나도 뛰어남에 우지마사는 사다무네[貞宗]의 명도(名刀)를 타다츠구에게 주었다 한다.

[사카이 다다쓰구(酒井 忠次)]
1527년 미카와[三河]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사에몬노죠우 타다치카[左衛門尉 忠親]’. 토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각주:7]] 중 한 명. 1586년 히데요시[秀吉]에게 재경료(在京料[각주:8]) 천석을 얻고 종사위하(從四位下)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 취임. 1588년에 은거, 1596년에 죽었다.

  1. 이때 아들을 둘 낳아, 첫째의 가문이 대대로 사에몬노죠우[左衛門尉]를 관도명(官途名)으로 하였기에 ‘사에몬노죠 가문[左衛門尉家]’이라고 하였으며, 둘째의 가문은 우타노카미[雅楽頭]를 관도명으로 하였기에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라고 한다. 타다츠구는 '사에몬노죠 가문' 출신. [본문으로]
  2. 이에야스의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의 딸로, 이에야스의 부친 히로타다[広忠]의 배다른 여동생. [본문으로]
  3. 혼간지[本願寺] 문도들을 바탕으로 한 그 지역 무사, 농민들의 반란. [본문으로]
  4. 정확히는 사카이 가문 중 우타노카미 가문[雅楽頭家] 출신인 사카이 마사치카[酒井 正親]가 1561년 니시오 성[西尾城]의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이 첫 번째. 타다츠구가 요시다 성주에 임명 받은 것은 1564년. [본문으로]
  5. 미카와[三河]를 동서로 나누어 서부의 이시카와 카즈마사, 동부의 사카이 타다츠구가 각각 휘하에 속하는 마츠다이라 일족, 호족 등을 통솔하였다. [본문으로]
  6. 한국 국군의 편제로 비교하자면, 타다츠구는 군단장, 타다카츠나 야스마사는 대대장급. [본문으로]
  7.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등 네 명을 일컬음. [본문으로]
  8. 쿄우토[京都]에 머물면서 생활하라고 주는 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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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4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구리놈 흉악한게 지가 지 아들 죽여놓고 덤탱이를 사카이 타다쓰구에게 다 씌워버린게 참..ㅡ,.ㅡ 그리고 새우퍼담기 춤이라기보다는 새우잡이 춤이 더 매끄럽지 않을까 합니다 ㅎㅎ;; 그 한국의 병신춤이랑 비슷하더군요 ㅎㅎ;;;;;;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4 0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 하더라도 사천왕중 제일 장수했으니 그나름 괜찮은 삶 아니었나 싶네요. 저는 일단 장수를 최고의 복으로 보는지라..(30만석 받아도 40대에 죽긴 싫습..=_-;)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4 0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쳇.. 다메님!! 그렇게 콕 꼬집어서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쳇쳇쳇!!!!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4 22: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ㅎ; 고의가 아니었지 않지 않지.. (흡!)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5 2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님//확실히 말씀하신 것이 더 부드럽군요. 단어 뜻에 집착을 하는 버릇이 있다보니..^^

    다메엣찌님//역사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거나... 소설로는 양 웬리(얀 웬리가 익숙하지만..)...등 짧고 굵게 사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저는... ^^(보통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얇고 길게 연명들 하더군요... 데헤~)

    아...근데 이에야스의 부하 중에서는 이이 나오마사의 18만석이 최고 아닌가요? 어련하면(...실제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가모우 우지사토가..."히데요시가 죽은 뒤, 천하를 잡는 것은 마에다 토시이에 아니면 나다. 이에야스는 부하한테 아낌없이 영지를 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잖여~"...라고 할 정도니까요.

    ps;에~ 혹시... 고의가 아니라고...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좋지 않냐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6 0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에야스는 후다이가신들이 비대한 영지를 갖는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ㅎㅎ 후다이가신은 커녕 도자마들도 가이에키하기 바빴는데 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러고보니 이이 나오마사의 사와야마 18만석이 생각해보니 후다이슈 중에서는 최고영지였군요 ㅎㅎㅎ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6 22: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뭐 덕분에 그 후엔 태평성대... 과연 이에야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9.27 1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이가 30만석은 아들내미 나오타카대의 일이군요.
    井伊 直孝(いい なおたか)
    その後、大老格に任ぜられるなど(直孝が大老職に就いたかどうかは議論が分かれている)徳川氏における家康時代最後の宿老として徳川家光に仕え、最終的には徳川氏の譜代大名の中でも最高となる30万石(最終的には35万石)
    최종적으로 35만석이라니ㅎㄷㄷ;; 아이즈 츄나곤과 아키 츄나곤을 넘어서는 영지(~~;;)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9 2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아직도 이이 가문에 대해 너구리 옹께서는 어디가 그리 맘에 들었는지 아직까지 이해가 잘...
    이유는 여러가지 있다곤 합니다만, 어느 하나 저에겐 아직 '아~ 그래서~'라고 할 만한 것이 없더군요.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9 23: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타케다 신겐과 고사카 마사노부를 생각하시면..ㅎㅎㅎ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nagoomo BlogIcon 볼리바르 2008.09.30 0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쿠보, 사카이 두 사람은 훗날 천하인 이에야스와 연극을 관람하던 차에 아비를 위해 아들이 죽는 대목에 이르러 이에야스가 "저것을 보아라, 보아라" 하니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하고 시바 료타로의 책에서 언급하더군요.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30 19: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님//그들과 같이 러브레터라도 있었음 뭔가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 머리 속에서는 너구리公이 후장파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더군요.

    볼리바르님//그런 에피소드가 있는 반면에, 노부야스의 묘소는 개장은 커녕 돌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면 이에야스에게는 노부야스에게 깊은 불신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부야스를 그리워한 몇몇 에피소드 다음에 노부야스의 묘를 이제는 옮겨야(돌봐야) 겠다...고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는지...

  적자 노부야스[信康]의 죽음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가 말년이 되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론할 정도로 슬픈 사건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입으로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카와(三河) 지방의 사람들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지"

 라 하며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노부야스를 자해(自害)로 몰아넣은 것은 역사상 유명한 '츠키야마도노 사건[築山殿事件]'에 의해서였다. 진상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1579 7 16. 이 날 이에야스는 가신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를 오우미[近江] 아즈치(安土)성(城)으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좋은 말을 헌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노부야스의 자해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노부야스가 생모 츠키야마도노와 함께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측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노부야스의 부인이며 노부나가의 딸인 토쿠히메[徳姫]가 은밀히 그에 대한 것을 부친 노부나가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시대에 결혼한 부인으로, 그녀는 출신이 이마가와의 일족 세키구치 교우부노쇼우 치카나가[口 刑部少輔 親永]의 딸이었기에 콧대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어떤 사서에서는 츠키야마도노를 히스테리성의 여성이었다고 하며, 이에야스는 그 엄청난 질투심에 넌더리가 나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로 거성(居城)을 옮겼을 때, 데려가지 않고 노부야스의 오카자키 성[岡崎城]에 남겨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이[甲斐]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내통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쩌다가 츠키야마도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카이[甲斐]에서 온 중국인 의사에게 진찰받던 중 그와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는 이 의사를 매개로 해서는 타케다 카츠요리와 내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노부나가-이에야스를 물리칠 방도를 카츠요리와 함께 꾀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

 

 진상은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두려워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노부나가는 노부야스라는 존재가 장래 오다 가문에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느낀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와 자신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를 비교해 보면,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노부야사가 월등했다. 오다 가문은 이 노부야스에게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의 싹은 일찌감치 뽑아 두는 것이 좋다 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는 17살 때 이미 그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1575년 토쿠가와 군이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타케다 카츠요리의 군과 싸웠을 때의 일이다.

 카츠요리의 대군을 피하여 퇴각을 하려고 하였을 때, 노부야스는 나서서 신가리[殿]를 맡았다. 아군 퇴각의 무사안전을 위해 최후미에 위치하며 적의 추격을 막는 임무로, 역전의 무장이라도 극히 어렵다는 큰 임무이다.

 더구나 이때 타케다 군은 10만의 대군이었다[각주:1]. 하지만 노부야스의 말은 기특했다.

 장래에 있을 큰일을 위해서 지금은 연습을 해 두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나이로 타케다의 대군과 대치하며, 적이 오오이가와 강[大井川]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세키가하라[ヶ原] 결전 시, 이에야스는 정말 나이 먹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니. 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피곤할 것도 없었을 텐데하고 용감한 노부야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부야스는 또한 육친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바로 다음 동생인 오기마루[於義丸-후에 히데야스[秀康]]가 정식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노부야스의 힘이 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오기마루에 대한 애정이 없어 좀처럼 자신의 아들로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부야스는 직접 오카자키 성[岡崎城]으로 3살 먹은 오기마루를 데려가 여러 노력을 기울여 이에야스와 만나게 하였다. 이에야스도 노부야스의 열의에 져, 오기마루를 자신의 아이라고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한 반면 노부야스에게는 포학한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춤을 좋아하여 자주 그런 무리들을 초대하였는데, 어느 날 옷이 맘에 들지 않고 더구나 춤 실력도 떨어지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노부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아이를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고 한다.

 매사냥의 결과가 신통찮은 것을 만난 승려 탓으로 하여, 그 승려의 목에 끈을 묶어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각주:2]


 1579 8 29.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우선 츠키야마도노를 토오토우미[遠江] 토미츠카[塚]에서 살해했다.

 이에야스로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곧바로 토쿠가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다. 자신의 힘은 아직 노부나가에 비해 미약했기에 자기 가문 보전을 위해서는 부인과 적자의 목숨도 뺏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해의 9 15.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하는 이에야스의 사자가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 성[二俣城]에 도착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天方 山城)와 핫토리 한조우(服部 半) 두 사람이었다.

 노부야스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실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키려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부친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시 가부장 권력의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노부야스는 조용히 핫토리 한조우에게 자신의 카이샤쿠[介錯][각주:3]를 명했다.

 한조우는 흘러 넘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로 대신하였다.

 카이샤쿠의 칼이 번뜩이며, 여기에 21살의 생명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 信康)]

1559이에야스[家康]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 모친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지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 독립함에 따라,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인질이 된다. 1567년 오카자키[岡崎]로 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결혼하고 오카자키 성주가 되지만, 노부나가에게 자해를 명령 받는다.

이 글은 거의 전체가 사실과 다른 글입니다. 필히 밑에 트랙백과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타케다 가문의 동원력은 무리를 해도 3만정도로 10만 가까이 동원하기에는 무리다. [본문으로]
  2. 승려는 불살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에, 승려 주변에 있는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사냥 결과가 신통치 않다며 툴툴대는 노부야스를 부하가 달래려고 말했다가 지나가던 승려가 그 짜증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배를 가르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어야 했기에, 믿을 만한 사람에 더해 단번에 목을 자를 수 있는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맡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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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5 2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조에 대해서는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만.
    다른 말들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시점의 문제이지.
    "...그 잣대는 우리 나라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까?" 라며 비꼼을 당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틀린 말을 쓴 것입니까? 무라시게의 경우는. 이미 노부나가가 엔라쿠지를 불태우고 쇼군을 내?는 폭정을 한 이후가 아닙니까?. 노부나가의 여러가지 폭압적인 태도에 두려움을 느꼈고 사소한 사건으로 배반했다..는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고. 그럴 경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지 관리를 엉망으로한 노부나가의 문제가 아닙니까?

    미츠히데의 반란역시. 쇼군이나 사찰등은 제쳐놓고서라도. 사쿠마, 하야시 같은 후다이 가신들을 별 것 아닌 이유로 내?고, 나이 50이 넘은 미츠히데의 영지를 빼앗아 전봉시키고... 주변에서 보기에도 얼마나 틈이 벌어졌기에 '높으신 분'으로부터의 편지가 왔겠습니까?. 이건 잔인한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행동거지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잣대란 비교할 대상이 있기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한국사와 중국사를 비교하여 제 기준의 잣대를 만들었기에. 그 잣대를 일본인에게 비교한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비꼼을 당하는군요....
    한정된 공간이기에 많은 예를 들기 뭐합니다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5 23: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권력과 병권을 잡고도 그저 신하를 자처한 주공단의 예. 춘추,전국 시대에는 상대 임금은 핍팍하는 것이 아니다. 라며 풀어준 예들이 있고. 전한 말의 악인으로 꼽히는 왕망도 선양을 받아서 황제가 되었지. 누구처럼 ?아내어 황제가 된것이 아니며. 후한의 화제는 생모에게도, 의모이자 생모의 원수인 두태후에게도 효행을 하여 미덕으로 남았습니다.
    '유교'가 없었거나. 국가의 기본 방침이 '황로술 =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 후한 대 까지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은 더더욱 예를 찾기가 힘듭니다. 유교가 보급된 이후에는 수양제, 형제를 죽인 이세민 정도를 제외하면 더더욱 찾기 힘들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닌의 난 이후 전국시대 기껏해야 백년 정도에. 부하가 주군을 배반하고 죽이는 사건은 그야말로 비일비재 하였으며.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일이나, 아들이 아비를 죽이거나 추방하는 일 역시 드물지 않지 않았습니까? 일족을 죽이는 일은 뭐 수두룩 하고요. 모가미 요시아키, 가이 소운, 다케다 하루노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토 요시타츠 등. 거기에 인질을 희생하는 행동을 한 다이묘들까지 추가 한다면 더욱 범위는 늘어나겠죠.

    전국 역사를 잘 아시는 것은 훌륭하십니다만. 최소한 임진왜란 7년만 공부하셨어도 아실텐데요?.. 화약 한통을 얻기 위해 여성 50명이 노예로 팔려가고, 공을 세우기 위해 민초들의 목과 귀가 잘리고, 사찰과 서고가 불에 타고. 책과 보물과 도공들을 약탈해가는...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설과 생각을 취사 선택하고, 그렇게 해서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전국시대에 대한 정보량이 많으시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만. 저에게는 실망스럽군요. 이후 블로그 잘 운영하시기 바랍니다.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6 0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략쿠지는 당시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고 엔락쿠지에는 아사이와 아사쿠라 군사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노부나가로서는 당시 정권의 중심지였던 교토를 막을 수 있는 방어망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엔락쿠지는 점거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엔락쿠지 침공하기 전에는 미리 내 편을 들면 포상을 내리겠고 적어도 아사이 아사쿠라 잔당들을 숨겨주지 말 것을 청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무라시게가 쫓겨난 것이랑 쇼군이 쫓겨난 것이랑 제가 알기로는 시간 간격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무라시게가 1578년에 배반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1575년에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쇼군이 당시 오다가의 적대 다이묘들에게 궐기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아나요?
    덧붙여서 말하자면 엔하운스 님의 방식대로 줏대를 적용하면 한국사의 경우에는 태종의 경우는 자기를 계속 지지했던 왕후쪽 친척을 몰살시켜버렸고, 이성계나,견훤은 자기 자식에게 쫓겨났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한 고조 유방도 항우를 물리치는 데 일익을 하였던 한신이나 팽월을 팽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주원장의 공신 척살은 대대로 유명하죠. 그 잣대는 이 쪽에서는 댓수 없는지요?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이 아비나 자식도 몰라보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고 이건 세계 역사상 대대로 벌어졌던 일에 지나지 않는데, 딱히 일본이라서 인성이 낮다고 무시하는 것을 진짜 가소롭기 그지없네요. 그리고 전국시대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경우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경우도 나름 합리적인 이유나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이토 요시타츠는 생모에게 토키씨라는 것을 알자. 도산을 죽일려고 했습니다. 가이 소운의 경우는 주가를 위해서 자식을 죽였다는 것을 볼 때는 중국에서 보는 효와 충의 관점에서 오히려 충에 가깝지 않나요? 오히려 엔하운스님이야말로 취사선택하는 설이네요.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이상의 답글은 없고.. 지난 시간은 이틀.
    대충 정황을 보니. 세컨 정도로 짐작가는군요. 욕을 하곤 싶지만, 욕을 먹긴 싫다. 이건가요?
    아니시라해도 상관없으니 말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일단, 반박은 쉽지요. 암만 무식한 자라고 해도. 열마디 말 중 한 마디의 꼬투리를 잡아서 물고 늘어지면 그뿐이니까요.
    중국 역사 5천년과 한국 역사 5천년을 통털어서 일본역사 백년과 비교하고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시군요.

    뿐만아니라. "세컨아뒤에 아나요?, 가소롭기 그지없다." 면서 말을 택함에 언뜻 노기까지 보이시는군요.
    인터넷에서의 시점에 따른 단순한 의견 차이가 발해님에게는 그렇게까지 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만..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칼 구스타프 융의 저서 '인격과 전이'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충족되지 못한 명예욕. 자존감을 가진 사람일수록 무의미한 것. 에 몰두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남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채운다고 합니다.

    정말로 아무 의미도 없는 블로그에 이렇게 열중하시고, 남을 가소롭게 여기며 분노하시는 것을 보니
    자신의 망상에 비하여, 세상에게서 받는 대우 자체가 그다지 좋지않으신 분처럼도 보이는군요.

    도경에 이르기를 대인은 스스로 도를 깨우치고, 중인은 들으면 깨우치며. 소인은 가르쳐주어도 깨우치지 못한다. 라고 합니다.
    대인이나 중인으로 보이지는 않으니.. 아마 제 덧글을 보시고 분노하여, 제 글을 지우거나 반박하는 답글을 다실 게 뻔합니다만...

    좌전에 현명한 새는 나무를 가리는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다지 현명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언뜻 고목으로 보였으나 썩어서 속이 텅빈 나무에 앉아서는 안될법이지요. 제가 이 시간부로 확실히 이 블로그에 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답글을 다시더라도 제가 볼 일은 없을 겁니다.
    편지로 보내시거나, 쪽지로 보내시면 스팸메일과 같이 잘 처분하겠습니다.
    역시 무의미한 일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시면 그쪽의 울분이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asterist BlogIcon 엔하운스 2008.08.27 1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마디 덧붙이자면. 잘난체 하는 것 같아 문자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만.. 가소롭다기에 얄량한 문자를 조금 덧붙여 보았습니다.
    뭐, 인터넷 검색이면 10초만에 주해본까지 찾을 수 있을 좌전, 도덕경, 융. 공부는 했지만 별로 대단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환절기인데 쓸데없이 스트레스받고 감기걸리지 마시고 몸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블로그따위와 넷질보다야 몸이 재산아니겠습니까? 그럼 안녕히 계시지요.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27 2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지 자랑에 편협한 시각, 저 혼자 발끈해서는 무식하게 지껄여대는 꼴이라니
    남의 블로그에 와서는 뭔 짓이지? 자기야말로 자존감을 채우는 거? 이거 완전 자위행위
    안 온다면서 답글 확인하러 또 오겠지^^;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kjw791 BlogIcon 허공 2008.08.28 0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하지만, 전 세컨이 아닌데 어떡하시나? -.-;; 단지 발해지랑님 블로그를 애독하는 독자일 뿐인데. 성급하게 세컨아뒤라고 하는 그 성급함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반박을 하면 제대로 해보세요. 괜히 어려워 보이지만 실은 공허하기 그지 없는 문자 쓰지 마시고 그리고 임진왜란도 귀찮아서 반박안했는데, 내전도 아니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입장에서 조선에서 뜯어낼 것 뜯어내는 것이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거 아닌가요? 뭐, 중국이나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는 안 그럴것 같습니까? -.-;;
    오히려 엔하운스님이야 말로 아무 의미도 없이 남을 헐뜯고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상한 문자를 써서 남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자신감을 채우는군요.
    자아비판 하시는거 보니 안스럽군요. Ellis의 REBT 상담이나 받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10.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8.28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E 세컨이래 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 아주 그냥 자폭하는 구나 ㄲㄲㄲㄲㄲㄲㄲㄲ

  11.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31 19: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엔하우스님//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이중잣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이렇게까지 장문의 글로 변명을 하시는 분이라면 적어도 저와는 대화가 통할 분이 아닌 것 같군요. 나름 답변 리플은 빼먹지 않으려 합니다만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허공님//저와 동일인물로 되시다니....지못미 허공님...

    박선생님//저도 어렸을 때, 누군가와 언쟁이 붙으면 무시 받지 않으려고 여러 지식을 늘어놓았었죠. ^^;

    본다충승님//저도 잠시 웃을 수 있었습니다.

  12. Favicon of http://blog.naver.com/deadsushi BlogIcon 리더쉽 2008.09.01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괜히 고상한척 하네 ㅋㅋ
    꼭 저런사람들이 별거 없더군요

  1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2 1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더쉽님//그래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신 편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허당님//달아주신 리플을 멋대로 삭제하여 미안합니다만, 그런 말씀은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1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님 왜 남의 댓글 삭제 하고 ㅈㄹ인가요?? 헐. 편들어줘도 ㅈㄹ이네. 하여튼 일빠 새끼들.

  1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3 12: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빠 들이 영어 써가면서 ㅈㄹ은 ㅋㅋ

  16.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0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욕썰 싸지르구선 가만 냅두는 사람은 없단다. 혐한찌질이 레벨 녀석이 편들어 주어도 하나도 안 고맙단다. 하여튼 혐한찌질이 레벨주제에...

  1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좆병신 ㅈㄹ하네 일빠새끼가 왠 발해??? 발해도 독도처럼 뺏고 싶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님 미친듯

  18.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04 2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극일을 하려면 먼저 지일을 해야 한단다(뭐 이건 일본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건 통용되는 것이지).
    예전에 니 조상중에도 다른 나라 것은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이 있었겠지. 그 결과는 알지? 멀리 보면 너는 그렇게 우리나라를 약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지... 역시 너는 혐한찌질이같은 놈이다.

  19.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8 1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해님 왠만하면 로그인안한사람은 덧글 못달게 설정을 바꿔놓으시는게..-_-;

  20.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9 23: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그렇게 해 놓았는데, 근시일 내에 다시 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21. 늙은친구 2010.05.17 2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머 워낙 여기서 눈팅 많이 하다가 가는 편이라 여기저기 보곤 햇었는데 몇년이나 지나서 댓글 쓰는 것도 우스워서 몇번 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솔직히 까놓고 애기하자면 엔하우스님의 의견에 주관적으로 비꼬아서 블로그 주인장?이신 분이 일을 시작은 한게 맞네요..

    물론 그 이후에 반박이 반박이 아니라 조롱조가 되서 보는 사람들이 욱하는 기분도 알겠고 내용 자체가 적절한 예를 들기보다 현학적으로 빠져서 웃기다는 부분도 있겠지만 남의 의견에 토론조로 부드럽게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자기 의견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 비꼬기 시작한 것은 까칠하신 성격 같으신 엔하우스님만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드네요...

    결론적으로 얘기드리면 부드럽게 상식적인 선에서 얘기햇으면 이렇게까지 안 됬을듯 하네요.그리고 엔하우스님의 반박문은 참 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답답하군요.

    마지막으로 댓글을 안 지워서 몇년후에 이렇게 이상한 인연으로 남기게 해준 블로그 주인장님의 아량도 대단합니다 ㅎㅎ.

    하여간 글 같은 거 써서 먹고사는 부류라 자료나 이야기등등 찾아다니는데 꽤 흥미롭게 봤네요...

    머 마지막으로 흥이 나서 쓰긴 햇는데 누가 볼래나 몰겟군요 ㅋㅋㅋㅋ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는 평생에 걸쳐 결코 잊지 못할 억울한 일이 하나 있다.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 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명령에 따라 아들인 노부야스[信康]와 마누라 츠키야마도노[築山殿]를 자신의 입으로 사형선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맹자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손으로 마누라와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이에야스에게도 엄청난 고뇌가 뒤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른 노부야스, 츠키야마 살해사건'은 어딘가 이상하다.
 우선 사건의 개략을 살펴보자.


 1560년 5월.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물리쳤다. 그리고 3년 뒤 천하통일을 목표로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는다. 동맹의 증거로써 노부나가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의 결혼이 성립된다.

 그리고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 거성이었던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아들 부부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새로이 지은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0년 정도 흐르자... 이에야스의 처 츠키야마도노가 등장하여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 아들 노부야스 부부는 금슬이 좋아 사이에 딸 두 명을 두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토쿠가와 가문의 장래를 걱정한 츠키야마가 노부야스에게 미녀를 보낸다. 노부야스는 그 미녀에게 빠졌을 뿐만 아니라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서 유행하던 풍류춤[風流踊り]에도 흠뻑 빠져버린다.
 거기에 츠키야마도노도 타케다[武田] 측의 스파이 겐케이[減敬]를 통해서 타케다 측과 내통할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츠키야마도노의 모친은 노부나가가 죽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여동생이다. 노부나가에게는 처음부터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그 때까지 무시 받고 있던 토쿠히메의 역습이 시작되었다(이번에는 노부야스의 부인 토쿠히메의 등장인 것이다). 토쿠히메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편지에 적어 그것을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를 통해서 애비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편지는 12개조로 되어 있어 그 중의 2~3개를 거론해 보면,

-. 요즘 오카자키 성 밑 마을에는 춤이 유행하고 있는데 노부야스는 그 춤에 빠졌을 뿐만 아니고 춤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활로 싸 죽였다.
-. 노부야스는 토쿠히메에게 딸려 온 시녀 코지쥬우[小侍從]를 자주 고자질한다고 입을 찢어 죽였다.
-. 츠키야마도노는 타케다의 스파이 겐케이라는 의사와 밀통하고 있으며 오다 토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을 망하게 해달라며 부탁하고 있다.
 이 편지를 읽은 노부나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사실관계를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카이 타다츠구는,
 "12개 중 10개는 사실이옵니다"
 며 인정해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노발대발했다. 화를 냄과 동시에 이것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노부나가에게 는 적자로 노부타다[信忠]가 있다. 그러나 기량이 노부야스보다 훨씬 떨어지기에 내심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타다와 노부야스의 시대가 된다면 노부타다는 노부야스의 쨉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호기로 삼아 노부야스를 죽인다면.... 이라고 생각하여,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의 사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앙천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있어 시국이 어려운 이 때에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깰 수도 없어 눈물을 삼켜가며 부인 츠키야마를 죽이고, 다음에 아들 노부야스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이상이 사건의 개략이다.....

◎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에게 기대고 있었다?!

 이 사건은 거의 정사로 취급 받고 있으며, 이 사건을 근거로 만들어진 토쿠가와 이에야스 관련의 소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고뇌하는 이에야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말로 이상한 점이 많다. 그 이상한 점을 거론해 본다.

 우선, 이에야스에게 노부야스의 죽음을 명한 노부나가인데, 아무리 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라고는 하여도 이때 이에야스가 어쩌면 반항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반항까지 안 가더라도, 부인과 아들의 죽음까지 명령하는 노부나가와는 더 이상 같이 못 해 먹겠다며 동맹을 파기해 올 것이라고 생각을 안 했을까??
 그랬다면 정말로 곤란한 것은 노부나가였을 터인 것이다. -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당시 상황은 이에야스보다는 노부나가가 힘든 때였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天下布武)]를 선언해, 무(武)의 의한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는 이에야스 이외에 모두 적들뿐이었다.
 그 때문에 에치고[越後]의 우에스키[上杉]에게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毛利]에게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탄바[丹波]에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이세[伊勢]에는 타키가와 가즈마스[滝川 一益] 등 장수들을 각지에 파견하고 있었다.

 이것 외에도 '나가시노 전투[長條合戦]'에서 타케다 측과 싸워 한번은 이겼다고는 하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는 살아 남아 반격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거기에 에치젠[越前]의 잇코잇키[一向一揆]가 힘을 길려왔지, 칸토우[関東]에서도 호죠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이렇게 노부나가의 주위가 모두 적 투성이로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있다. 당시 노부나가에게 적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를 다스리기에도 바빴다. 부하인 시바타 가츠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의 불화를 시작으로, 우군으로 편입한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배반, 이어서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도 배반...이란 상태였다.
(상기는 세세히 따지면 오류가 있다. 그냥 대세가 그런 분위기였다…는 정도로 하자 – 역자 가필)

 노부나가에게 있어, 정말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에야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에야스에 대해 딸이 푸념을 했다는 정도로 '처와 아들을 죽여라'며 잔인하고 위험한 명령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덧붙여 노부야스의 기량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면서 호기라 생각해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이상하다. 딸인 토쿠히메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부야스는 춤에 빠진 얼간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을 죽이는 바보인 것이다. 기량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그 정도라면 가만 놔두어도 자멸할 터이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는 그런 춤에 빠진 노부야스보다 바보였던 것일까?

 이에야스가 둘을 죽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죽인 날짜도 이상한 것이다.
 위에서 적은 개략에서는 자세히 적지 않았지만, '둘을 죽여라'하고 노부나가가 명령한 것이 1579년 7월16일. 그리고 이에야스가 자객을 풀어 츠키야마도노를 죽인 것은 8월29일인데, 이 사이 한달 반이나 걸린 것이다. 시간이 너무 걸린 것은 아닐까?
 노부나가의 성격으로 본다면 말한 것은 곧바로 실행시켰어야 할 터이다. 더구나 그 이유가 [타케다와의 내통]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한달 반 동안이나 그대로 놔두고 있었던 것일까??
 더불어 이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를 한꺼번에 죽이지 않은 것도 이상한 점이다. 최종적으로 노부야스가 자인을 명령 받은 것은 츠키야마도노의 죽음에서 또 보름 정도 지난 9월 15일인 것이다.

◎ 이에야스에게 있어 처와 아들은 방해물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에는 이상한 점이 많은데 이 [이상함]은 사건에서 노부나가를 빼버리면 부드럽게 연결되어 간다.
 처음부터 노부나가의 명령 따위는 없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창작인 것...이라고 해 보는 것이다.

 노부나가가 명령했다......고 쓰여 있는 것은 [徳川実紀[각주:1]], [改正三河風土記[각주:2]], [武徳編年集成[각주:3]] 등 전부 후세의 것으로, 또한 이에야스를 신군(神君)으로 쓰고 있는 자기네들끼리의 것들뿐이다. 이에야스에게 불리한 것들은 쓰여 있지 않다.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았다는 것은 창작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 자신의 뜻으로 죽였다...... 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에야스 스스로 사랑하는 처와 귀여운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사실 이에야스는 더 이상 츠키야마도노와의 사랑 같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1570년.
 이에야스는 그때까지의 거성인 오카자키 성을 노부야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신축한 하마마츠 성으로 옮겼다. 이때 츠키야마도노는 하마마츠로 가지 않고 노부야스와 함께 오카자키에 남아있었다. 이후 7년간 이에야스는 츠키야마도노와 별거 상태였던 것이다. 사랑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츠키야마도노와 노부야스는 이에야스의 영지(領地) 왼쪽 반인 오카자키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른쪽 반인 하마마츠 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고....
 당시 노부야스는 21살로 이에야스는 36세. 가신들은 자연히 좌와 우로 나뉘어져 있었다. 결국,노부야스를 맹주로 하는 [오카자키 파]와 이에야스를 맹주로 하는[하마마츠 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다. 파벌이 생겼던 것이다.

 적으로부터의 공격보다도 내부 분열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기선을 제압해 오카자키 파의 중심인물 츠키야마도노를 죽였다. 그리고 오카자키 파 면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주요인물들을 확인해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에 오카자키 파의 중핵인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한 것이다. 귀여운 아들이라고 할 틈은 없었다. 파벌을 형성하여 영지를 둘로 나누려 했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기에, 귀여워했던 만큼 미움도 그 만큼 커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도 파벌항쟁 과정에서 아들 요시노부[義信]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다테 마사무네[伊達 正宗]도 동생 코지로우[小次郎]를 참살하였다.

 덧붙여 주요인물로 확인된 [오카자키 세 행정관(岡崎三奉行)]인 고우리키 키요나가[高力 淸長], 혼다 시게츠구[本田 重次], 아마노 야스카게[天野 康景] 등의 가신은 오카자키 파에 속하였기에 사건 후 푸대접을 받았고, 오카자키 파의 필두가로(筆頭家老)였던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 數正]는 참을 수 없어 토쿠가와 가문을 떠나 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것이다.
(이 부분은 오버. 대부분 이후에도 중요한 일들을 맡았으며 카이에키나 푸대접 등에는 각각의 사정이 있었다. - 역자 가필)

 이에야스를 신군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들끼리의 책이었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토쿠히메의 푸념, 노부나가의 잔인한 명령 등이 창작되어 눈물을 꾹 참으며 신군 이에야스는 사랑하는 처와 아들을...... 이 된 것이다.

 츠키야마와 노부야스의 살해는...... 이에야스 본인의 의사였던 것이다..

ps; 이 글은 1994년에 발간된 고토우 쥬이치[後藤 寿一]의 [뭔가 이상하잖아! 일본사(なんかヘンだぞ!日本史)]에 있던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예전에 하이텔 전클에 올렸던 것을 조금 손 봐서 올립니다. 조금 오버기가 있지만 그냥 그런 흐름이었다고 생각해 주시길... 세세하게 파고드면 양이 너무 많아져요~(그래서 그런 능력이 없어서 번역해서는 올리는 것입니다. --; )

  1. 에도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19세기 전반 즈음 편찬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토쿠가와 가문의 역사를 기록. 19세기 전반 편찬. [본문으로]
  3. 이에야스의 전기. 18세기 중반에 작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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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zinil2 BlogIcon zinil2 2008.06.29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글이네요. 읽고 나서 끄덕끄덕합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9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2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zinil2님//처음 댓글 달아 주신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

    맹꽁서당님//덧붙여 비교적 예전에 생겼던 기록에는,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죽이고 싶다고 청하자, 노부나가는 [いかようにも存分次第 - 맘대로 하셔]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한 노부야스가 반역의 생각을 가졌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며, 그 기록들에서는 이에야스 쪽에서 청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노부야스를 오카자키에서 쫓아낼 때는, 오카자키에서 일하던 소위 오카자키 파들에게 등성을 금지시키고, 직접 끌고온 하마마츠의 하타모토들로 성을 점거했다고 하더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30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이 마쓰다이라 노부야스는 제법 당대엔 인기가 있었던 듯 싶습니다. 생존설까지 뜨는걸 보면..(;)

    뭐 위키에도 이런 내용이 있긴 하던데 세키가하라에서 노부야스를 떠올리는 이에야스의 모습도 있고 해서 진위가 불분명하다.. 뭐 이런식으로 얘길 하더군요. 여기 관한 괜찮은 원서를 시간날때 한번 찾아보곤 싶지만서리..(요새 이런저런 공부 준비로 바빠서;;)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30 0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카와(오카자키)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순리대로 라면 노부야스가 쇼우군이었을 테니까요)

    http://ja.wikipedia.org/wiki/%E5%BE%B3%E5%B7%9D%E5%AE%B6%E5%BA%B7%E3%81%AE%E5%BD%B1%E6%AD%A6%E8%80%85%E8%AA%AC

    참고로 이 이에야스 영무자 설의 노부야스 항목의 묘소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더군요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mansukizzang BlogIcon 본다충승 2008.07.01 15: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쌍한 노부타다... 괜히 노부야스랑 비교 되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노부나가가 죽였다는 설이 인정받고 있겠죠? ㅎ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7.02 0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부타다의 굴욕?? ^^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가다 그런 것에 대해 다룬 책들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는 대세가 노부나가 명령설인 것 같습니다.

  8. Favicon of http://blog.naver.com/xjapan1231 BlogIcon 나오 2008.09.28 1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카자키슈와 하마마츠슈 간의 권력다툼의 희생양이라고 하죠 노부야스는.. 그리고 지금은 노부야스에 대한 모반(타케다와의 내통)사실자체도 그리 신빙성이 없고 말이죠.. 무엇보다 고도쿠가 노부나가에게 보낸 12조항 자체도...ㅡㅡ;;;;;;;;;;;;; 여튼 너구리놈 잔악하기 그지없는게 나중에 이것또한 신군전설의 하나로 그 죄를 모두 노부나가와 사카이에게 뒤집어씌운..ㅡㅡ;;

  9.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9.29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약 토쿠가와 가문이 천하를 잡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을 것 같습니다.
    (전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죽인 이유 중에 가장 웃긴 것이....노부타다보다 노부야스가 뛰어나서 죽이려고 했다는 거 더군요)

  10. 골룸 2009.10.28 11: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하이텔 전클이라... 추억의 이름이네요...

二.

 이로부터 몇 년이 흘러 토쿠가와 가문의 가정에도 많은 변동이 있었다. 변동 중에 최대의 흉사(凶事)는 적자 노부야스[信康]가 기후[岐阜]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지시로 인하여 그 생모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자결를 강요 받아 죽은 것이다.
 1579년이었다.
 이유는 노부야스와 관련된 정치상의 의혹이었다. 비밀리에
카이[甲斐]의 타케다 가문[武田家]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았다. 당시 토쿠가와 가문에 있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았지만, 그러나 노부나가는 믿었다. 이에야스에게 처와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노부나가는 토쿠가와 가문 적자의 기량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듣고 오다 가문 장래에 불안을 느꼈다. 그를 죽이는 것으로 노부나가는 자기 자손의 안전을 꾀했다 – 는 설도 있다.

 노부나가의 진짜 의중은 모르겠지만 그 명령은 명쾌했다. 그의 산하(傘下) 다이묘우[大名]인 이에야스에게 있어 따르던지 반항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반항하기에는 이에야스가 너무 약소했다. 동쪽에는 타케다 씨(氏)가 있어 그 무력이 여전히 토쿠가와 가문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타케다 씨(氏)의 군사적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종전대로 오다 가문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가문을 보전해 가기 위해서는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죽였다. 그들을 죽인 것은 부친이며 남편인 이에야스의 마음이 아니라, 이에야스가 필사적으로 키우고 있던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이었다. 그 권력의 의지에는 이에야스 자신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노부야스의 죽음은 1579년 9월 15일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二俣]에서 행해졌고, 그의 모친이 죽은 것은 그 전달 25일 토오토우미 토미츠카[冨塚]에서 행해졌다. 노부야스 21세였다. 미카와[三河]의 백성들은 이 불행에 통곡하며,

[참으로 분하고 억울한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또 나오기 어려우니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
 라고 쑤군대며 자해한 젊은 주군을 아쉬워했다.

 이때 얻은 이에야스의 상심은 천하를 얻은 말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아물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다만 이에야스의 성격은 참을성이 매우 깊기에 이런 슬픔을 충분히 견뎠다. 비통한 나머지 흐트러지는 일 없이 평소대로 군무(軍務)도 정무(政務)도 막힘이 없었다. 죽이라고 명령한 노부나가보다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견딘 이 인물 쪽이 더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는 순서를 가지고 말하자면 오기마루(於義丸)가 그 자리에 앉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이에야스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은 듯 했다. 오기마루가 장래 토쿠가와 가문을 짊어질 정도로 똑똑한가, 아니면 우둔(愚鈍)한지를 판별해 보려는 것 조차 이에야스는 흥미가 없는 듯 했다. 때때로 사쿠자[作左]가 이에야스 앞으로 나아가서는 - 오기마루님의 일상을 지켜보건대 필시 뛰어난 명장이 되실 기량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 말을 해보곤 했지만 이에야스는 말려들지 않았다.

 “여섯 일곱 먹은 아이의 행동으로 장래의 기량을 점칠 수는 없다”

 고 말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키우며 교육하고 있는 사쿠자에게는 그렇게 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사쿠자가 보건대 결국은 히데야스의 생모 오만[おまん]에게 문제가 있는 듯했다. 이에야스는 그 부자대면 후 오만을 하마마츠 성[浜松城]으로 불러들여 방을 하나 내 주었지만, 그러나 오만과 다시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에야스와의 애정을 이어갈 정도의 매력이 오만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 배에서 나온 아이에게도 정이 잘 가지 않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 즈음, 실은 어린 과부를 사랑하고 있었다. 오아이[お愛]라는 이름이었다. 그 오아이가, 노부야스가 죽은 해의 8월. 눈썹이 엷은 남자 아이를 낳았다. 모친인 오아이는 그래도 18살로 젊었으며,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에야스는 그녀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 자연히 그 핏덩이에게도 깊은 정을 보냈다. 아기이름을 나가마루[長丸]라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야스는,

 “타케치요(竹千代)라고 불러라”

 고 말했다. 이것로 사태는 매듭지어졌다. ‘타케치요’라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 대대의 관례로써 후계자인 아이에게 붙이는 아기이름이었다. 이에야스도 꼬꼬마일 즈음은 타케치요라 불렸으며, 먼저 죽은 노부야스도 꼬꼬마일 때는 타케치요였다. 그렇다고 하면 이 핏덩이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世子)라는 것이 될 것이다.

 다섯 살 연상의 형 오기마루는 무시되었다.
 - 동생을 세우고, 형을 무시하면 나중에 가문 내란의 불씨가 되지 않을까?
 하고 그리 속삭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모르는 척 하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에야스는 그러한 것에 가장 신경을 쓰는 인물이였기에 은밀히 여러모로 궁리하여 오기마루를 어떻게 할 지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음 해, 또 오아이에게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셋째이면서도 오츠기마루[於次丸[각주:1]
]라고 이름 지었다. 세자의 다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장남일 터인 오기마루는 또다시 무시되었다.

*********************************************************************************************************

 세월이 흘렀다.

 이에야스의 운명이 180도로 변한 것은 1582년 6월 오다 노부나가가 쿄우[京]의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자신의 부하 장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에게 살해 당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의 머리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사라졌다. 남겨진 오다 정권을 이을만한 인물은 자기라고, 이에야스는 당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더 빨리 미츠히데를 물리친 것은 오다 가문의 엘리트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였으며, 히데요시는 그 기세를 타고 정권을 손에 넣으려 했다. 당연 그 반대파와의 사이에서 권력 쟁탈의 내홍(內訌)이 일어나 히데요시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싸웠고, 결국에는 오다 가문의 호쿠리쿠[北陸] 총독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를 물리침으로 인해 정권 탈취 전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이 쟁란(爭亂)의 밖에 있었다. 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밖에 두었다. 이에야스는 오히려 이 난을 틈타서 자기 영지(領地)를 늘리는 것에 방침을 두고 토우카이[東海] 지방의 이삭줍기에 전념했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때 이에야스는 본국인 미카와 말고는 불과 토오토우미를 가진, 양 지역을 합쳐 60만석 정도의 다이묘우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 눈깜짝할 사이에 스루가[駿河],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세 지역을 주워 총 130만 석으로 땅을 늘렸다. 그 동원병력은 가볍게 3만4천을 넘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토우카이의 패왕(覇王)’이라 말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히데요시는 쿄우[京]에 정권을 확립하였다. 그 지배영역은 킨키[近畿], 호쿠리쿠[北陸], 산인[山陰], 산요우[山陽]의 일부를 포함한 6백30만석에 가까웠다.

 당연히 양자는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信雄]에게 요청을 받아들이고 그의 동맹자가 되어 히데요시를 고발(告發)하는 입장으로 도전했다.
 히데요시야말로 오다 정권을 도둑질한 자이다 – 라는 입장이었다. 명분으로써는 유리했다. 곧이어 양군은 노우비[濃尾[각주:2]]
평야에서 대치하였고, 1584년 늦은 봄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군의 이동을 탐지하여 그것을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에서 크게 물리쳤다. 하지만 기껏해야 국지적 승리로 전쟁 자체에는 영향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의 이루어가는 과정 중이었기에 여기서 이에야스와 결전을 벌이기 보다 오히려 외교로 꼬셔서 자신의 막하(幕下)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우선 오다 노부카츠를 회유(懷柔)하였다. 이에야스는 고립되었다. 거기에 그 이에야스를 히데요시는 회유했다. 이에야스는 그 권유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상 싸우면 압도적 다수인 히데요시의 군세에 멸망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9월에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사이에 강화(講和)가 성립되었다. 히데요시가 내민 조건 중에 하나는 이에야스에게 인질을 받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질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 고 이에야스는 처음에 그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전투의 승리자가 인질을 받치고 적에게 평화를 구걸하는 것은 고금동서에 예가 없었다. 히데요시는 곧 그 말을 고쳤다.
 - 양자를…
 이라는 것이었다. 인질이건 양자건 자신의 아이를 받친다는 그 내용에 변함은 없었지만, 그러나 양자 결연이라고 한다면 세간에 대해 이에야스의 체면이 선다. 이에야스는 즉석에서 승낙했다.

 거기서 이에야스는 오기마루를 토요토미 가문에 바치기로 한다. 타케치요는 그 동생이면서 세자이기 때문에 보낼 수 없었다.
 - 이제서야 오기마루의 쓸모가 생겼군.
 이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했을 것이다. 오만이 낳은 오기마루는 이러한 외교상의 재료로 사용되기 위해 토쿠가와 가문에서 키워진 듯한 것이었다. 나이도 11살이 되어 있었다.

  1. ‘츠기(次)’는 ‘다음’이라는 뜻. 이에야스의 네째 아들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 [본문으로]
  2. 미노(美'濃')와 오와리('尾'張)에 걸쳐있기에 이런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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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서당 2008.06.29 07: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
    흠.. 이 글에도 노부야스를 노부나가가 죽인 것으로 나와 있네요. [기초지식] 포스트 이후 내내 궁금했는데, 언제 한번 그 속사정을 시원하게 알고 싶군요. ^^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29 07: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사는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
    오늘 내에 예전에 그에 대해서 번역한 것이 있으니 찾아서 올리겠습니다.
    (뭐 이에야스가 죽였다는 설도 세부에는 차이가 있으니, 어디까지나 그 중 하나입니다만..)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6.30 0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노부야스는 생존설까지 있는걸 보면 참 인기도 좋았던듯...
    이번에도 잘 보고 갑니다. 히데타다는 어떻게 보면 참 자리를 거저먹은 듯..기량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술적 재능은 GG였는데도..(뭐 그것도 운이라면 운이겠습니다만..)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6.30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시 당시엔 눈썹 엷은 놈은 태어나면서 부터 히키마유(引眉)하기 편해서 키슈(貴種)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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