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자체가 장난꾸러기’라고 에도시대[江戸時代]의 사서(史書)에 쓰여있듯이, 마에다 케이지로우 토시타카[前田 慶次郎 利太=토시오키[利大], 토시마스[利益]라고도 전해진다 [각주:1]]는 기행(奇行)으로 유명하다.


 카가[加賀] 100만석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조카이다. 그러나 조카이긴 하지만 피가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휘하였던 오와리[尾張] 아라코 성[荒子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히사[前田 利久]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기에, 토시히사는 자기 마누라의 오빠인 타키가와 기다이유우 마스시게[滝川 義太夫 益重][각주:2]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각주:3] 마에다  가문[前田家]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이 양자로 들어온 인물이 바로 케이지로우[慶次郎]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토시히사의 셋째 동생인 토시이에를 가문 당주로 앉혀버린 것이다.[각주:4] 그리고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의 가신으로 편입된다.


 무용(武勇)도 뛰어났지만 가무음곡(歌舞音曲)도 좋아하였다. 그런 케이지로우를 토시이에는 ‘세상을 얕보는 녀석’이라며 엄히 질책하였다. 케이지로우는 그런 잔소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자리였을 지도 모를 당주자리에 앉아있는 삼촌이 맘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이거 떠나야 겠구먼”
 이렇게 맘을 정했지만, 그냥 나가기에는 재미가 없었다. 케이지로우는 궁리하였다.


 어느 날인가 케이지로우는 토시이에에게 다도(茶道)의 자리에 초대하고 싶으니 부디 참석해 주시기를 바란다며 요청하였다. 토시이에는 ‘허허~ 이제 케이지로우도 맘을 고쳐 잡았나 보군’이라며 기쁜 마음으로 케이지로우의 저택으로 갔다. 케이지로우는 겨울이니 우선 뜨거운 물로 목욕부터 하라고 토시이에에게 권했다. 추위에 떨던 토시이에는 케이지의 마음씀씀이가 더 맘에 들었다.      
 하지만 케이지로우는 한 번 맛 좀 보라는 심산이었다. 욕조에는 냉수로 채우고 욕실에는 누가 보아도 물이 뜨거운 듯이 보이기 위해서 김이 나오도록 욕실 주변에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을 여러 개 두었다. 그렇게 김이 가득 차 있기에 속은 토시이에는 욕조로 풍덩하고 몸을 던진 것이다.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든 토시이에는,
 “네 이놈 케이지로우!!”
 하고 화냈지만, 그런 토시이에를 무시한 채 뒷문에 메어두었던 명마 마츠카제[松風]에 올라타자 마자 곧바로 말달려 떠난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였다. 하지만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의 가로(家老)로 지장(智將)으로 이름 높은 나오에 카네츠구[直江 兼続]와 우정을 맺은 뒤[각주:5]에는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기게 된다. 이때 케이지로우는 코쿠조우인 횻토사이[穀蔵院 ひょっと斎]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기묘한 옷을 입고 카게카츠를 알현했다고 한다. 기인(奇人)으로 이미 유명했기에 우에스기 가문에서는 2000석[각주:6]을 하사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케이지로우는 나오에 카네츠구를 따라 데와[出羽]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 義光] 공략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당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루가 붉은 색인 창을 들고 ‘대 후헨모노[大ふへん物]’라 쓰여진 큰 깃발을 등에 지고 전투에 나선 것이다. 우에스기 가문은 유명한 무사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이들은 케이지로우의 이 등깃발[旗指物]을 보고 화를 냈다.
“신참주제에 대무변자[大武辺者=다이부헨모노[だいぶへんもの]]라는 것을 메다니 무슨 생각이냐”
고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케이지로우는 낄낄대더니,
“이거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하는군요. 여러분들은 시골뜨기다 보니 글자의 촉음(濁音)도 모르나 보네요. 이는 ‘대 불편자[大不便物=다이후헨모노[だいふへんもの]]’라 읽는 것입니다. 제가 오랜 낭인생활을 하여 가난하기에 이리 썼을 뿐이외다”
고 놀렸다고 한다.

굉장히 궁핍하여 불편하게 산다[だいふへんもの]고 쓰인 등깃발

 이때 입은 옷들도 눈에 띄었다. 검은 갑옷에 새빨간 전포[羽織], 황금색 염주를 목에 걸고, 금칠을 한 표주박을 옷깃에 주렁주렁 매달았다. 자신과 타는 말에는 자신과 똑같은 두건[頭巾]을 씌었다고 한다.


 나중에 주군 카게카츠[景勝]를 수행하며 에도[江戸]에 갔을 때, 또다시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 훈도시의 옆에 작은 칼[脇差]를 차고 들어간 것이다. 그것을 보고 같이 입장하려던 사람들도 따라서 작은 칼을 찬 채 들어갔다. 케이지로우는 욕탕에 들어갔다 나온 뒤 차고 있던 작은 칼을 꺼내어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작은 칼은 사실 대나무로 된 때주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작은 칼을 차고 온 사람들은 칼자루도 젖고 쇠에 습기가 차 고생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쟁 뒤 우에스기 가문은 요네자와[米沢]로 삭감되어 이봉 되었기에 가신들 중에는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우에스기 가문의 기풍을 사랑했던 케이지로우는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마에다 게이지로[前田 慶次郎]
마에다 가문[前田家]에서는 엣츄우[越中] 아오 성[阿尾城]에 있었지만[각주:7], 1590년[각주:8] 아이즈[会津]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섬겼고, 말년에는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강의하거나 하였다. 카게카츠[景勝]의 아들 사다카츠[定勝] 때 요네자와[米沢]에서 죽었다.[각주:9]

  1. 우에스기 가문[上杉家]을 따라 요네자와[米沢]로 옮긴 뒤에는 주로 토시사다[利貞]라는 이름을 썼던 듯. 이 ‘토시사다’를 새긴 표주박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함 [본문으로]
  2. 마스우지[益氏]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3. 또는 마스시게의 부인으로 이미 마스시게의 자식을 임신했던 여성을, 토시히사가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 여성과 결혼했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4. 1569년의 일. 사족으로 아라코의 마에다 토시히사는 후년 노부나가에게 과거 반항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당하는 하야시 히데사다[林 秀貞]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노부나가에게 개기는 히데사다의 의향에 따라 자주 노부나가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했기에, 그런 반항적인 토시히사를 경질하여 노부나가의 측근인 토시이에[前田利家]를 마에다 가문의 당주로 앉혔을 가능성도 크다. 단 이는 역자인 내 개인적인 생각이며 일본에선 아직까지 이런 주장을 하는 이는 없으니 주의요망. [본문으로]
  5. 대략 1597년 난카 겐코우[南化 玄興]라는 승려의 소개로 묘우신 사[妙心寺]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본문으로]
  6. 단 현재 남아있는 사료(慶長五年会津御在城分限帳=1600년 아이즈에 거주하는 가신 명부) 에는 외인부대[組外衆]의 필두 1000석이라 함. [본문으로]
  7. 이 당시 아오 성의 성대[城代]로 약 6000석의 지행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나오에 카네츠구와 만난 것이 1597년이라 하니 1598년이 맞을 듯. [본문으로]
  9. 생몰년에 대해서 마에다 가문의 자료에 따르면 생년은 1533년이고 야마토[大和]에서 1605년에 73세로 죽었다고 하며, 우에스기 가문 사료에 생년은 1541년이며 요네자와[米沢]에서 1612년에 70세로 죽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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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군 2012.04.26 22: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이건 소싯적 해적판 만화 비룡문(;;;) 으로 먼저 알게되었던 꽃의 케이지 아닙니까 ㅎ 즐겁게 잘 보았습니다~^^;

  2. 루리루리 2012.04.30 1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 짤에서 최훈의 삼국전투기가 생각나서 빵 터졌습니다~ ^^

 후리타 오리베[古田 織部]의 이름은 센고쿠 무장[戦国 武将]이라기 보다는 다인(茶人), 도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오리베 애호[織部好み]’라 불리는 기발한 그릇 모양과 특색있는 문양을 가진 도기(陶器)를 창시하였고, 그것이 지금 ‘오리베야키[織部焼]’라는 이름으로 명물이 되어 있다.

 오리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에게 사사 받아 후세에 리큐우 칠철[利休七哲][각주:1]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인 다인 다이묘우[茶人大名]이다. 그러한 오리베였기에 특별한 무공은 없었다. 다도를 좋아했던 히데요시[秀吉]에게 총애를 받아 히데요시의 말상대인 ‘오토키슈우[御咄衆]’까지 출세하였다.

 스승으로 섬긴 리큐우가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자살을 언도 받은 뒤 오리베의 명성은 한층 더 높아져, 오리베의 저택에는 다이묘우나 다인(茶人)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한다. 오리베가 감정을 하고 보증서를 하나 써주면 바로 지금까지 부엌 한 구석에 놓여있던 투박한 사발[茶碗]도 곧바로 천금의 가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곧이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오리베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에게 속하여,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와 통하고 있던 히타치[常陸]의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를 설득하여 서군에 참가하려던 요시노부를 중립에 서게 만들었고, 이 공적으로 인해 이에야스에게 1만석을 하사 받아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각주:2] 거기에 더해 쇼우군 가문[将軍家]의 다도사범이라는 지위를 얻어 2대 쇼우군[将軍] 히데타다[秀忠]에게 다도를 가르치는 몸이 되었다.

 이때까지 오리베의 인생은 순풍에 돛이 단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시작된다. 겨울 전투[大阪冬の陣} 때는 별일 없었다. 오히려 웃긴 일화조차 전해진다.

 어느 날 오리베는 살기등등한 진중 속에서 다도의 벗인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의 본진에 방문하였다.
 참고로 사타케 씨[佐竹氏]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의 행동으로 이에야스의 분노를 사, 전후(戰後) 아키타[秋田]로 이봉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에야스의 속한 무장으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요시노부는 최전선에 설치된 시요리[仕寄 – 대나무 묶음 등을 연달아 이은 총탄 방어용 방패와 같은 것]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리베는 그 안에 기어들어가기 위해서 투구를 벗고 들어갔고, 잠시 동안 요시노부와 쌓인 이야기를 한 뒤 차를 다리기 시작했다. 총탄이 오가는 와중에 지금으로 보면 실로 재수없는 행동이었다. 거기에 이 시요리[仕寄]의 대나무 묶음 속에 작은 차주걱[茶杓] 될 만한 좋은 대나무가 없나 하고 몸을 숙여가며 찾기 시작한 것이다. ‘싸움에 쓰이는 도구라도 다도에 쓰인다’는 오리베 류[織部流] 다도의 특색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좁은 시요리[仕寄]에서 몸을 움직였기에 오리베의 머리[キンカ頭]가 시요리[仕寄] 밖으로 삐져나와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것이 성 방어군의 눈에 띄었다. 이 빛을 향해서 철포가 불을 뿜었다. 그 중 한발이 오리베의 머리를 빗맞혔다. 오리베는 ‘꺄아~”라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지고 옆에 놓아두었던 찻잔을 닦는 수건[茶巾]과 받침으로 쓰는 헝겊[ふくさ]로 흐르는 피를 막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사타케의 군사들은 ‘다도인에 걸맞은 붕대구만’하고 낄낄대며 웃었다고 한다.

 이 다음 해인 1615년 여름 전투[大阪夏の陣] 직후 오리베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 전투도 마지막이 다가왔을 무렵, 오오사카 성 안에서 쿄우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각주:3]에게 밀고하는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의 가신(家臣) 키무라 무네요시[木村 宗喜]라는 자가 미리 오오사카 측과 의논하여 이에야스[家康], 히데타다[秀忠]가 오오사카를 향해서 후시미[伏見]를 출발하는 것에 맞추어 쿄우토[京都]에서 거병하고, 오오사카 측과 호응하여 토쿠가와 군(軍)을 협격하려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일당의 체포가 시작되어 오리베도 역시 잡히는 몸이 되었고, 오오사카 낙성 후 할복이 언도되었다. 오리베가 정말 모반을 꾸몄는지, 만약 정말로 그러했다면 무엇이 원인인지는 아직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1544년 미노[美濃]에서 태어났다고 한다[각주:4]. 이름은 시게나리 혹은 시게테루[重然], 통칭은 사스케[左助]. 나카카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매제로, 처음엔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의 휘하 무장[与力]이였고,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거쳐.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긴다. ‘다도백개조(茶道百箇条)’를 저술하였고,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 혼아미 코우에츠[本阿弥 光悦], 코보리 엔슈우[小堀 遠州][각주:5]의 다도 스승이었다. 1615년 6월 아들 야마시로노카미 시게히로[山城守 重広]와 함께 자해. 72세.

  1.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오리베[古田 織部],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 [본문으로]
  2. 이미 이전에 히데요시에게 야마시로[山城] 니시가오카[西ヶ岡]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다이묘우[大名]인 상태였다. 여담으로 '만화 헤우게모노[へうげもの]'에서 히데요시는 오리베에게 니시가오카 3만 5척석을 주며 "쿄우[京] 주변의 3만5천석은 중한 것이네"라는 대사를 한다.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일화 - 쿄우토 주변이라면 영지가 적어도천하를 바라 볼 수 있었을 것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쿄우토 주변은 적은 영지라도 무게감 있는 자리였다. [본문으로]
  3. 쿄우토 행정, 조정의 수호와 감시, 키나이[畿内]와 하리마[播磨]의 소송, 쿄우토, 나라[奈良], 후시미[伏見]의 각 봉행(奉行)를 통괄하던 직책. [본문으로]
  4. 노부나가 가신단 연구자인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씨는 '토키츠구 경기[言継卿記]'에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직할군에 속해 있다는 기록과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4촌이라는 기록에 따라 킨키[近畿] 출신이 아닌가 - 라고 추론하고 있다. [본문으로]
  5. 근대 다도(茶道)를 집성시킨 인물. 또한 그 역시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였다. 3대 쇼우군 이에미츠[家光]의 다도사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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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모반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하지만 다인(茶人)으로서도 일류인 인물이었다.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이도챠완(井茶碗)은 '아라키 코우라이(荒木高麗)'라 불리며 명물을 기록한 여러 장부에 실린 천하의 명물이었다. 무라시게에게서 이에야스(家康)의 손으로 옮겨졌고 그 후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川家)[각주:1]에 전해져 지금도 토쿠가와 미술관(川美術館)에 보존되어있다.

 소년시대의 무라시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소년 무라시게는 힘이 대단히 셌다고 한다. 부친 요시무라(義村)를 태운 바둑판의 양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려서는 방을 세 바퀴 돌았다고 한다. 겨우 12살 때의 일이다[각주:2].

 처음엔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의 가신[각주:3]이었지만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 藤孝=유우사이(幽))와 함께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 뛰어난 활약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秀) 등의 다이묘우(大名)도 무라시게에게 배속되어 있었다.

 무라시게의 모반은 1578년에 뜬금없이 일어났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츄우고쿠(中)의 모우리 씨(毛利氏)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당시 무라시게는 셋츠(津) 방면군 사령관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 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위세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라시게의 뜬금없는 모반에 노부나가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는가?"라고 놀랐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하라"고 하면서 "반역하려는 뜻을 버리고 인질로 모친을 바치도록"하고 설득의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로 보내진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각주:4], 마츠이 유우칸(松井 友閑)[각주:5],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각주:6]였다. 히데요시도 이타미(伊丹)에 있는 무라시게의 거성(居城)으로 가서 뜻을 거두도록 재촉했다. 쿠로다 칸베에(田 官兵衛=죠스이(如水))가 설득하러 갔다가 포로로 잡힌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모반의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아라키 가문의 가신이 노부나가의 적인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에 쌀을 밀매한 것[각주:7]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는 아케치 미츠히데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필시 진짜 원인은 노부나가의 잔인하고 폭군적인 성격을 무라시게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모반에 대한 것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부나가에게 가려고 했지만 가노(家老)[각주:8]들이 "잠깐 동안은 용서하시겠지만 의심 많은 분이기에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들은 것도 있어, 무라시게는 더 이상 오다 가문에서는 살아갈 길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라시게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靑磁)로 된 꽃병(花甁)이 모반의 원인이라고 한다. 노부나가가 꼭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을 무라시게가 거절하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삐졌다고 한다.

 승산이 있던 모반이 아니었다. 무라시게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무라시게의 휘하인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를 등돌리게 해서는 양도(糧道)를 끊자 무라시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각주:9]. 이런 사정을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처자식과 일족을 이타미 성(伊丹城)에 남겨둔 채 종자(從者) 5~6명만을 데리고 탈출한 것이다. 일단 아마가사키 성(尼ヶ崎城)으로 피신[각주:10]한 무라시게는 이후 하나쿠마 성(花城)[각주:11]에 갔다가 여기서 빙고(備後)로 가서 모우리 씨에게 보호를 청했다.

 무라시게에 대한 노부나가의 증오는 지독했다.
 그에 대한 보복은 이타미 성에 남겨진 무라시게의 처자에게 향해졌다. 21살의 미녀로 와카(和歌)가 뛰어났다는 무라시게의 부인을 시작으로 여관(女官) 등 122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때의 비명소리는 '하늘에도 소리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또한 여자 하인, 무라시게 부하의 어린 자식(
若党) 등 510여명을 네 채의 작은 집에 가두어서는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고 한다.

 후에 노부나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친교가 있던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아 다인(茶人)으로 섬기며 일생을 마쳤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셋츠(摂津) 출신.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를 섬기며 셋츠 이타미 성(伊丹城) 성주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 공략에 임하고 있었지만 모우리(毛利)-혼간지와 내통하여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 후에 머리를 밀고 뉴우도우 도우훈(入道道糞)이라 자칭하였다. 1586년 죽었다. 52세.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쇼우군(将軍)의 후사가 끊겼을 때 쇼우군을 만들 수 있는 가문인 어삼가(御三家)의 필두. 단 에도 시대를 통해서 쇼우군을 배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본문으로]
  2. 밥 많이 처먹는 아들에게 아비가 한 마디 하자 "무사는 힘이 쎄야 합니다"라 말하곤 그 증거랍시며로 저렇게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정확히는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의 셋츠슈고(摂津守護)인 이케다 카츠마사(池田 勝正)의 가신. [본문으로]
  4. 그의 딸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부인이었다. 참고로 이 부인은 이때 이혼하여 미츠히데의 중신 히데미츠(明智 秀満)와 재혼. [본문으로]
  5. 마츠이 유우칸은 사카이(堺)에서 노부나가의 대리인이었으며 또한 당시 노부나가의 차제구 수집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도에 밝은 무라시게와는 친분이 깊었다고 생각된다. [본문으로]
  6. 당시 노부나가 최측근 시동. 노부나가 뿐만 아니라 노부타다(信忠)에게도 신뢰 받고 있었다. 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포지션을 이어받은 것이 모리 란마루. [본문으로]
  7. 정확히는 무라시게 휘하에 있던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 清秀)의 가신이 그랬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이 말은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이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9. 1년 가까이 버텼지만 무라시게를 궁지로 몰아 넣은 타카야마 우콘, 나카가와 키요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섰기에 성을 버리게 된다. 참고로 상기의 만미 센치요(万見 千千代)는 이타미 성을 공격하다 전사. [본문으로]
  10. 이 성은 무라시게의 적남 무라츠구(荒木 村次)의 거성. 참고로 이때 마지막으로 노부나가는 무라시게에게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내놓고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거절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이때도 싸우기는 하였다. 성을 공략한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활약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를 쫓아낼 때 쓴 노부나가의 서장에도 언급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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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28 09: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콘은 지가 용서비는걸 말려놓고 반란일으키니까 나중에 배신때리네요...

  2. 맹꽁이서당 2009.03.29 0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턴오버 님 말씀대로 우콘 황당하군요. 근데 노부나가 성격을 생각해보면 맞긴 맞는 말 같습니다.
    최소한 처자들에 대한 안전판은 마련해 놓고 거사를 일으킬 것이지.. 딸 뻘 (역산해보니 무라시게는 반란시 44세군요) 미녀 아내도 버리고 갈 정도면 알수없는 속사정이 급했나 보네요.

    이름은 모릅니다만, 노부나가 말년에 배신한 중신들이 몇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노부나가의 '광기'가 모두의 눈에 비쳤나 보네요. --a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3.29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의 성격은 결과론...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라시게의 배반은 노부나가에게 가신들에 대한 불신감 생성 버튼을 누르는 결과가 아니었나 하고도 생각하고요. 우콘이 도대체 무슨 근거를 가지고 저런 말을 했는지 아직까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모친을 인질로 받치고..."..를 보면 당시까지는 노부나나가 무라시게의 인질을 받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자마인 인물에게 셋츠를 맡기면서도 당시로는 당연시 되던 '인질'을 받지 않았던 것만 해도 노부나가가 무라시게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를 옅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만큼 충격도 컸겠고요. 일본에는...可愛さ余ってにくさ百倍...라는 말이 있습죠. 사랑했던 만큼 미움도 크다는 말인데..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이타미 성에서의 도주는....
      이런 설도 있습니다.
      이타미 성은 주변 강들과 절벽의 천연의 요새에, 성 안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総構え(호우죠우 오다와라 성의 유명한 구조...이지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総構え는 이 이타미 성이라고 합니다)...로 인해서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있었다 합니다. 따라서 도망이라기 보다는 아들 무라츠구의 아마가사키 성으로 가서 육지로는 오다 가문에게 포위된 것을 피해 배편(간척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는 바다에 면한 성이었다고 하네요)으로 모우리(毛利)나 혼간지(本願寺)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었다고도 합니다. 이타미 성이 워낙 튼실하니 자기가 없어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 합니다.

      노부나가를 배신한 중신은 미츠히데가 유일하지 않나요?

      전 아직까지는 이 무라시게의 배신부터 노부나가가 가신들에게 불심감을 품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belldandy314 BlogIcon 맹꽁이서당 2009.03.29 1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다른 글에서 어느 중신이 (미츠히데 이전에)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야기를 봤었는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다 보니 그가 바로 '아라이 마사시게'인줄 몰랐네요. 중복으로 생각한 셈이지요. --a 도자마 가신들에게는 인질이 당연시 되었군요. 덕분에 새로운 사실 하나 알아갑니다. ^^

    그러고보니 센고쿠 15권 말미에서 '외부 적들'과 '내부 적들'을 따로 작성하여 X를 긋는 노부나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군요. (물론 창작이겠습니다만...) 그땐 1574년이라 아라이의 반란 이전인 셈이네요.

    PS. 요새 이 블로그의 외부 링크를 타고 다른 블로거 분들의 역사 관련 포스팅을 훝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혹시 역사 쪽으로 추천해 주실만한 곳은 없으신지요? ^^

 눈치보기의 대명사 '호라가토우게 고개[洞ヶ峠]'라는 에피소드[각주:1]로 유명한 쥰케이[順慶]는 원래 불문(佛門) 출신이다. 유식론(唯識論 – 법상종(法相宗)의 중요한 경전))에 정통하고 와카[和歌]나 다도(茶道)에도 능한 문화인이었다.

 언제나 성성이의 가죽을 테두리로 한 두건을 쓰고, 금으로 수를 놓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적주머니를 비스듬히 어깨에 걸치고 전쟁터로 향했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야마토[大和]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승병대장을 맡아온 호족이었다. 야마토에는 츠츠이 가문 외에도 오치[越智], 토이치[十市], 와카오[若尾] 등의 승병대장이 있어 츠츠이를 포함하여 '사인방(四人衆)'이라 일컬어졌는데 츠츠이의 세력이 가장 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비호아래 야마토[大和]를 지배하게 된다.

 '호라가토우게 고개'라는 에피소드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쓰러뜨린 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와 야마자키[山崎]에서 싸웠을 때 생긴 말이다. 일반적으로 유포된 이야기에는 이때 츠츠이 쥰케이가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올라가 아케치와 하시바의 싸움을 방관하다가 하시바 측이 명백히 유리해진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제서야 아케치를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진상은 이것과 꽤나 다르다.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오른 것은 아케치 미츠히데 쪽이었던 것이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은 1582년 6월 2일이었다.
 노부나가에게 히데요시의
츄우고쿠[中
国] 공략에 원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의 거병이었다. 이 당시 쥰케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등과 함께 미츠히데 휘하 다이묘우[大名]로 츄우고쿠로 출진하기 위해 거성(居城) 야마토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출진하여 쿄우토[京都]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도중 혼노우사의 변보를 접한 것이다.

 쥰케이의 입장은 미묘했다. 단순한 아케치 휘하 다이묘우가 아니었다. 친족관계였던 것이다. 미츠히데의 넷째 아들은 쥰케이의 양자로 들어와 있었다[각주:2]. 거기에 미츠히데는 츠츠이 가문[筒井家]의 은인이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빼앗겼던 야마토의 츠츠이 가문 영지(領地)를, 노부나가가 마츠나가를 정벌한 후에 미츠히데가 잘 말해주어서 영지(領地)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각주:3]

 그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쥰케이는 당초 미츠히데가 모반을 일으키자 미츠히데 측에 붙어있었다. 오다 노부타카[織田 信孝 – 노부나가의 셋째]의 출병요청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야마시로[山城] 마키노시마[槇島] 성주 이도 요시히로[井戸 良弘][각주:4]와 함께 병사의 일부를 떼내어 아케치의 오우미[近江] 평정에 참가시켰다. 그러나 쥰케이 자신은 코오리야마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이 시점부터 쥰케이의 행동은 미묘하게 변해간다. 미츠히데의 요청을 받고 카와치[河内]에 출진할 예정이었던 것을 취소시키고 더구나 성 안에 식량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벌하기 위해서 산요우
[山陽]를 맹렬히 올라오고 있다 – '
 쥰케이에게는 이미 이 정보가 들어간 듯 했다.

 6월 10일.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상경한 히데요시의 군세는 이제 쿄우토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효우고
[兵庫][각주:5]까지 와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너무도 빠른 움직임에 앙천했다. 이제 인기가 떨어진 아케치 세력은 1만 수천밖에 없었다. 쥰케이의 가세가 절실했다.

 미츠히데는 쿄우토를 나와 야마자키 하치만[山崎八幡]에 있는 구릉의 일각인 호라가토우게 고개에 진을 쳤다. 이 고개는 눈 아래로 쿄우토-오오사카[大坂] 간의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요충지였다. 야마토 코오리야마까지는 약 20여km. 미츠히데는 "가세하지 않으면 코오리야마를 공격하겠다"고까지 말하여 쥰케이에게 엄포를 놓았지만 쥰케이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미츠히데는 계속 기다렸지만 이때 쥰케이는 이미 히데요시와 서약서를 교환한 상태였던 것이다. 쥰케이의 조심스러움은 그래도 여전히 눈치를 보는 태도를 유지하게 만들어 14일이 되어 그제서야 코오리야마 성을 나온 것이다. 이때 미츠히데는 이미 오구루스[
小栗栖] 마을에서 그곳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쥰케이는 1천의 병사를 이끌고 타이고[醍醐]에 있는 히데요시의 진영으로 가서 승리를 축하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눈치를 본 태도를 책망하였지만 그대로 용서했다고 한다. 쥰케이는 이때 히데요시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츠츠이즈츠[筒井筒]라는 이름 높은 고려차완(高麗茶碗)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쓰쓰이 준케이(筒井 順慶)]
1549년 생. 대대로 코우후쿠 사[
興福寺]의 중도(衆徒)로, 환속한 후에 후지시로우 후지마사[藤四郎 藤政]라는 이름을 칭했다. 1559년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에게 츠츠이 성[筒井城]에서 쫓겨나지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도움으로 영지(領地)를 회복하고 야마토[大和]를 영유하게 된다. 1584년 죽었다. 36세.

  1. 관용어로 "洞ヶ峠を決め込む"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기회를 엿보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2.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하나[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 결국 실현까진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야마토[大和]는 무로마치 시대에도 막부가 슈고[守護]를 두지 않았던 유일한 곳으로, 이곳은 코우후쿠 사[興福寺]의 왕국이라고 할 정도로 코우후쿠 사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한 곳이었다. 노부나가도 처음엔 자신이 키웠다고 할 인재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던 반 나오마사[塙 直政]에게 야마토를 지배하게 하나, 나오마사가 전사하자, 야마토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노부나가를 성심성의껏 섬기던 코우후쿠 사의 승병 출신인 쥰케이를 야마토의 지배자로 임명한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의 판단이었지 결코 미츠히데 덕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4. 그는 부인은 쥰케이의 딸이다. [본문으로]
  5. 코우베[神戸]의 옛 이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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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dameh 2009.01.31 1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 살아남으려 애썼건만 아버지처럼 암으로 요절했고 아들대엔 카이에키 당했으니 뭐..-_-; 인생무상이라지만 참 덧없는 일인가 싶습니다(..;)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09.02.01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도 짧지만 굵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격전지 킨키에서 그 눈 높다는 노부나가의 신임으로 나라 하나 소유했을 정도면 뭐... 그럭저럭 괜찮았던 듯 싶습니다.

.

 

 1586년 정월.

 미야[宮]는 열 살이 되었다. 이 달의 14일에 히데요시[秀吉]가 신년의 축사를 올리기 위해 입궐하였다. 이 즈음 히데요시는 이미 칸파쿠[白]가 되어 있었으며, 토요토미 씨[豊臣氏]를 칭할 정도로 지반을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토우카이도우[東海道]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는 그의 휘하에 들어와있지 않은 상태였고, 큐우슈우[九州]도 또한 히데요시 세력 밖에 있었기에 그의 일상은 아직도 다망한 상태였다. 입궐하자마자 곧바로 퇴출하였고 서둘러 쿄우[]에서 물러갔다.

 

 그런데 다다음날, 다시 쿄우[京]에 나타나 뛰어들기라도 하듯 어소(御所)에 들어갔다.

 - 칸파쿠님은 어떤 것을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듯 하다. 라는 소문이 전날부터 궁정에서 떠돌고 있었다.
 
이날 미야는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몸이었지만 갑자기 입궐하라는 명을 받아 헤어스타일이 여전히 아이인 [童形]로 형과 함께 어소에 입궐하였다. 히데요시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미야는 아직 히데요시라는 이 시대를 창조한 인물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이날, 히데요시는 기이한 것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이동용 다실(茶室)을 어소 안으로 옮겨와, 그것을 코고쇼[小御所][각주:1] 내에서 조립하여, 당시의 텐노우[天皇]인 오오기마치[正親町]에게 보여주고 또한 헌상하고자 하려는 것이었다.

 미야도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서 텐노우[天皇]와 함께 코고쇼에 들어섰다. 코고쇼의 마루 위에 그 화제의 작은 건조물이 눈부신 광망(光芒)을 뿜어대며 놓여있었다.

 

 다실의 기둥도 아랫미닫이틀윗미닫이틀도 모두 두터운 금박(金箔)을 입혔고, 벽도 천정도 황금일색이었다. 창호지를 붙인 틀이나 널까지 황금이었으며, 불과 장이 깔린 타타미() 만이 황금이 아니었다[각주:2]. 어두운 진홍색의 가죽이었다. 더구나 타타미의 둘레는 녹황색 비단으로 만든 바탕에 금을 입힌 실로 작은 무늬들을 박아 넣은 것이라 그것만으로도 시선을 뺏었다.

 

 차제구(茶諸具)도 황금투성이였다. 탁자(台子), 과자를 담는 네모난 그릇(四方盆), 차 가루를 담는 그릇(なつめ), 물 끓이는 풍로(), (), 국자(柄杓), 물을 버리는 그릇(こぼし), 찻잔에 물을 보충하는 작은 그릇(水差), 보통 대나무로 만드는 차 가루를 뜨기 위한 숟가락(茶杓), 심지어는 숯을 담는 것(炭取)마저 전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일본이라는 땅이 생긴 이래, 이 지상에서 이렇게 엄청난 황금을 누가 보았단 말인가?

 

 이런 일이…’

 하고 미야는 이 한도 끝도 없는 호사스러움에 정신을 빼앗겼다. 가슴이 기묘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것은 미()가 아니다. 적어도 옛 시가(詩歌)에서 말해주는 미()가 아니었으며, 적어도 궁정 사람들의 전통적인 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자연스럽게 두근거리게 만드는 이 충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금색(金色)이 가진 힘인가? 금색에는 지금껏 품고 있던 미를 초월하는 힘이 있는 것일까?

 

 미야뿐 아니라 모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입이 조금 벌려져 있었다. 텐노우[天皇]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의도는 성공했다.

 - 히데요시는?

 하고 미야는 눈을 돌렸다. 찾을 필요도 없이 히데요시는 이 황금의 조립식 다실 옆, 조금 물러난 곳에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엎드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본디 검은색일 터인 그가 입고 있는 조복(袍衣)조차 어깨부터 소매에 걸친 곳이 반쯤 금색으로 물들어져 있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황금에는 어두움이 없다. 어두움 없는 광택, 신음을 내고 싶을 정도로 야릇한 화려함 속에 히데요시는 엎드려, 그 황금의 화신이라도 되는 듯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그 상판은 어딘가 웃기려는 듯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농담을 말할 것 같은 표정으로 보였다. 어쩌면 이 인물은 장난을 칠 생각으로 이 황금다실을 어소 안으로 가지고 왔을지도 몰랐다. 미야가 듣고 있던 세간의 소문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젊었을 즈음부터 굉장한 익살꾼이었다고 한다.

 그럴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고 미야는 어린이답게 그런 상상을 막연이 이기는 하지만 이 야릇한 풍경 속에서 하고 있었다.

 

 이때의 충격과 의문은 훗날까지 미야의 추억 속에서 살아 숨쉬었다. 익살꾼인 히데요시는 어소(御所)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서 한 마리의 개구리로 변신해서는 익살부리며 기어 나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제정신이 아니다. – 하고 미야는 훗날 생각했다. 어소는 모든 것이 청명(淸明)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청명함이 궁정사람들의 전통적인 미의식이었기에 어소의 건물이건 가구건 모두 맑고 시원시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오랜 왕실의 역사 속에서는 때때로 이 미의식에 대한 반역자도 나왔다. 예를 들면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 法皇][각주:3] 등이 그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황은 이마요우[今様=속류문학]라는 끈적끈적하고 인정미 넘치는 서민시(庶民詩)를 사랑하여 스스로도 불렀고 또한 그 가사(歌詞)의 선곡집인 [양진비초(료우진히쇼우=梁塵秘抄)]를 편집하였으며, 한편으로 지극히 강렬하게 금색을 칠한 조각을 사랑하여, 너무 사랑한 나머지 1001(座)[각주:4]의 금박을 한 목조 불상(佛像)을 만들게 하였다[각주:5]. 그러나 그 고시라카와 법황조차도 어소 안으로까지 그 취향을 가져오지 않았으며, 신도(神道)적인 청명함에는 손을 대는 일 없이, 그런 금색 불상의 무리들을 모아둔 절[각주:6]을 따로 둠으로써 어소와 격리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그런 어소에 짙은 황금의 건조물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 다도(茶道)를 하시길.

 이라는 것이 그 헌상의 이유였으며 히데요시의 의도였다. 자신이 재미있어하는 다도(茶道)를 자신만이 독점하려고 하지 않고 궁정에까지 유행시키고자 하였다. 그 의도는 좋았다. 문제는 황금의 다실이었다. 다도(茶道)에서 말하는 와비[び]라는 것은 이러한 것일까?

 미야는 훗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근본은 히데요시빠였기에, 그 비판이 그 애정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마음은 더 깊은 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였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산골 성곽[山里廓]을 만든 것은 호사스러움 속에서 한 점의 한적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다도(茶道)의 마음일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충분히 표현했다.


 그런 히데요시가 어소에 대해서는 일부러 그 반대로 하였다. 어소의 청명함 – ‘와비[び]라는 것과는 달르지만 조금은 닮은 듯한 그러한 차분함 속에는 오히려 황금의 다실을 두어 그 근방을 화려하게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대극(對極)의 재미를 반쯤 가벼운 마음으로, 즉 저 익살스러운 얼굴로 연출해 보이려 한 것이 아닐까? 미야는 그렇게 이해했다. 미야의 이해에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은, 히데요시에 대한 애정과 경의 때문일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어쨌든, 이때.

 이 코고쇼에서 미야는 히데요시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보았다. 조그만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꽉 쥔 주먹과 같이 팽팽했고, 전쟁터에서 햇볕에 탄 탓인지 색이 까맸으며, 커다란 양 눈이 있는 얼굴의 턱 아랫부분이 날카로울 정도로 뾰족하여, 어딘가 날카롭게 벼른 칼과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미야가 쳐다보고 있자 그 시선을 느꼈는지, 히데요시는 조금 얼굴을 들어 미야를 쳐다보며 갑자기 활짝 웃었다.

 웃자, 다른 얼굴이 되었다. 주름이 많았고 특히 눈꼬리의 주름은 원이라도 그리려는 듯이 아래로 아래로 움직여, 마치 늙은 농부와 같이 사람 좋은 얼굴이 되었다.

 이 얼굴이었다.

 이 얼굴을 미야는 처음부터 상상하고 있었다. 미야는 이 남자가 좋아졌다. 미츠히데를 물리친 정의로운 무인(武人)의 얼굴이라는 것은, 당연히 이러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1. 쿄우토[京都] 궁궐에 있는 건물의 하나.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쇼우군[将軍]이 입궐했을 때 휴식을 취하거나 대기하는 곳이었으며, 시대가 내려가 에도시대[江戸時代]가 되자, 텐노우[天皇]가 막부(幕府) 측의 사람들을 만날 때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본문으로]
  2. 타타미 한 장은 1m*2m. 석 장은 3m*2m 정도의 면적. [본문으로]
  3. 텐노우[天皇] 재위 1155~58. 생몰년은 1127~1192.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 義経]가 활약한 겐페이 쟁란(源平爭亂)기의 조정의 대표자. ‘법황’은 텐노우 직을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불문(佛門)에 들어간 상황(上皇)이 된 사람을 말한다. [본문으로]
  4. 불상을 세는 단위. [본문으로]
  5. 무가(武家]로서는 처음으로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된 타이라노 키요모리[平 清盛]에게 명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6. 산쥬우산겐도우[三十三間堂]라는 곳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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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19 2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귀한 황실 혈통이 완전히 히데요시 빠가 되어버렸네요. 미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인물들도 히데요시에게 매력을 느꼈던걸 보면 정말 '히데요시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봅니다.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20 0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하동문입니다 '-^)b

  3. Favicon of http://blog.naver.com/mychula BlogIcon 박선생 2008.08.20 0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의 2화와 함께 잘 읽었습니다.
    빠가 되었으니 이에야스를 싫어하게 되겠군요..;;

  4.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20 2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나름 모 가야 왕실의 피를 잇고 있지만 누가 집 주고, 돈 주고, 땅 주면 그 사람의 '빠'가 될 자신이 있습니다. 시켜만 주세요~ ...
    ...라는 마음가짐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

  5.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20 2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 사이에 한 가지 사건이 더 생깁죠.

  6. Favicon of http://blog.naver.com/dameh BlogIcon 다메엣찌 2008.08.21 14: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럽군요. 원래 지고의 삶을 누리는 사람인데다 심심할까봐 저런 이벤트도 시켜주고..;;

    여담이지만 선생은 텐노(뭐 戰前이라면 미야도 포함되는 말일테지만;)에겐 거주의 자유와 투표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없으니 다메다-_-;라고 했지만 그래도 저정도 호사가 주어진다면야(..;)

  7. Favicon of http://blog.naver.com/valhae0810 BlogIcon 발해지랑 2008.08.22 2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 것에 답답해 하여 황족의 지위를 반상하고 평민이 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지만(근래에 들어서 그랬다고 하는데 막상 생각나질 않는군요)...직접 그런 것을 겪어 보지 않은 평민인 저로써는 어떠한 심정일지 알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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