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가와 카즈마스(川 一益)는 전성기의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휘하에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니와 나가히데(丹羽 長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무장이었다. 군사적 능력이 특히 뛰어나 '나아갈 때도 타키가와, 물러날 때도 타키가와(進むも川、退くも川)'라 일컬어져 전쟁터에서 가장 용맹함을 필요로 하는 선봉이나 그 이상으로 어려운 철퇴시의 방어군 대장을 항상 맡았다.

 혼노우(本能)사(寺)의 변이 그때까지 상승기류를 타고 있던 카즈마스의 운명을 바꾸었다. 이 즈음 카즈마스는 코우슈우 평정(甲州平定)[각주:1]칸토우(東) 마야바시(厩橋)에 진주하여 그곳 경영에 힘쓰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은 10일이나 걸려 카즈마사에게 전해졌지만 그 소식에 곧바로 아케치 토벌군을 일으킬 수 있는 정세가 아니었다. 코우즈케(上野)를 점령하고 있다고는 해도 주변은 모두 적지로 더구나 강대한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씨(北
氏)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카즈마스는 변보를 들었을 때 이를 막료에게 전했다. 더구나 부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점령지역인 코우즈케의 지역무사(地侍)들에게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 것이다. 같은 소식을 부하들에게 엄중히 함구령을 내린 히데요시와는 대조적이다. 거기에 카즈마스는 인질마저 지역무사들에게 돌려보냈다. 코우즈케의 무사들은 이에 감격하여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고 말하며 상경하려는 카즈마스를 따라 힘을 보태겠다고까지 말하였다.

 코우즈케 세력의 협력은 얻었지만 타키가와군의 상경은 참담했다. 처음엔 코우즈케의 군사들을 이끌고 코우즈케-무사시(武)의 접경인 칸나가와(神流川) 강에서 호우죠우군과 싸워 한번은 이겼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대패하여 간신히 시나노(信濃) 코모로(小諸)로 도망쳐서는 키소(木)를 거쳐 겨우 본거지인 이세(伊勢)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질풍과 같은 기세로 군을 되돌려 곧바로 아케치 미츠히데를 물리친 히데요시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각설하고, 노부나가 사후 혼란기의 판단이 그의 운명을 그르쳤다. 오다 가문의 부대장으로서는 유능하였지만 그 오다 가문이라는 우산이 치워지자 정치적 판단이라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카즈마스에게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단지 오다 가문에서 자신보다 상석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바타 카츠이에 측에 선 것이다.
 시바타 공략에 앞서서 히데요시는 카즈마스의 거성(居城) 이세(伊勢) 나가시마 성(
長島城)을 공격했다. 6만의 대군으로 성에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겠다는 듯한 맹렬한 공세에도 끝까지 버텼지만 정작 시즈가타케에서 시바타 군이 패하자 성을 열고 항복하였다.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카즈마스의 투지는 사라져 예전 그토록 절찬 받던 용장의 모습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히데요시가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와 싸운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에서 카즈마스는 히데요시 휘하로 출진하였지만 왕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추태를 보이고 만다. 토쿠가와 측의 오와리(尾張) 카니에 성(蟹江城) 성주 마에다 타네토시(前田 種利[각주:2])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어 무혈점령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노부나가의 차남)에게 공격 당하자 곧바로 항복한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배신한 마에다 타네토시의 목을 바치라고 하며, 이에 응하면 카즈마스의 목숨은 살려준다고 하였다. 이에야스의 조건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사의 수치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카즈마스는 승복한 것이다.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비겁자의 낙인은 피할 수 없었다.

 카즈마스는 당시 병에 걸려 남이 부축해 주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병이 허탈한 그의 마음을 더욱 약하게 했을 것이다. 말년엔 히데요시에게 얼마 되지 않는 땅을 받아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다 세상을 떠났다.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 一益)]
1525년생. 오우미(近江) 코우가(甲賀) 출신으로 낭인 생활을 하던 중 노부나가(信長)의 눈에 띄어 그를 섬겼다. 1574년 이세(伊勢) 나가시마(長島) 농민반란군(一揆)을 평정한 후 나가시마 성주가 되었다. 1583년 카츠이에(勝家)와 동맹을 맺고 히데요시(秀吉)와 싸우다 패했다.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い) 후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에 은퇴해 살다 1586년 죽었다. 62세.

  1. 타케다 카츠요리를 멸한 전쟁. [본문으로]
  2.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첫째딸 코우(幸)의 남편인 마에다 나가타네(前田 長種)의 부친. 계보상 거슬러 올라가면 이 타네토시 쪽이 토시이에의 가문보다 격이 높다고 한다(즉 토시이에 가문이 방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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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hyunby1986.tistory.com BlogIcon 턴오버 2009.03.19 05: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혼노지의 변 당시 나이가 상당히 많았네요. 시바타 카츠이에와 비슷한 연배군요.
    (트랙백을 따라가보니 3살 아래였군요)

    말년에는 용장의 이미지는 어디가고 마음 약해지고 판단력 흐려진 노인이나 다름없었네요...

  2. dad 2011.01.14 1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동관령에 오른 건 노부나가가 그만큼 믿을수 있었던거 같긴 한데...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져버렸는데 관동관령의 의미 같은게 그래도 남아 있었던건가요?

    • Favicon of http://valhae.kr BlogIcon 渤海之狼 2011.01.14 1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노부나가와는 공사(公私)로 가까웠다고도 합니다.

      노부나가가 카즈마스에게 내린 임무를 신장공기(信長公記)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関東八州の御警固
      관동팔주의 수호장.



      東国の儀御取次
      동국의 총독

      이라고 하였지 관동관령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죠.

      그럼 관동관령을 내렸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후세의 사람들이 비슷한 유형의 직책(이름)을 생각하다 보니 무로마치 막부의 관동관령이 있기에(마침 다스리는 지역도 비슷) 그 말을 따다 붙인 것입니다.

      지금 집이 아니라 언제 쯤부터 타키가와에게 관동관령이라는 단어를 붙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집에가 찾아보고선 다시 보충해서 댓글 달겠습니다.

    • dad 2011.01.17 1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막부 역직이랑은 상관이 없는건가 보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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