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인텔리 무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센고쿠(戦国)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온 무장이면서도 끈적끈적한 정치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의 행동거지에서 미적인 품위를
느낄 정도이다.
중세 굴지의 문화인(文化人) 센노 리큐우(千 利休)는 우지사토를 평하길,
“일본의 무장 중에서도 하나나 둘 있을까 말까 한 문무 겸비의 명장”
라 말하며 칭송했다고 한다.
우지사토 스스로도 자신이 명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서에 따르면
측근에게,
“토요토미 타이코우(豊臣 太閤)가 죽은 뒤 천하인(天下人)가 되는
사람은 카가(加賀)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아니면
나다”
고 단정지었다고 하다.
또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어떻게 보느냐는 물음에는,
“이에야스는 가신에게 땅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그릇이 아니기에 천하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미의식을 통한 인물감정이기에 현실과 밀착한 통찰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뜻하는 바가 웅대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히데요시에게서 아이즈(会津) 42만석의 거대한 영지(領地)에 봉해졌을 때
우지사토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반대로 변경으로 옮겨지는 원통함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2
이를 메이지(明治) 시대의 문호(文豪) 코우다 로한(幸田 露伴)은,
“내 비록 미관말직이더라도 쿄우토(京都) 근방에 있다면 여차할 때 무슨 일이라도 하여 깃발을 천하에
휘날릴 수 있을 터인데, 이제 큰 영지(領地)를 받았다곤 하여도 산과 강이 사이에 놓여진 시라카와(白河) 관문 3 저 너머 오우슈우(奥州) 데와(出羽)의 깡촌에 있어서는 평소 가지던 큰 뜻도 펼치기
힘드니…”[코우다 로한의 蒲生氏郷]
라 표현하였다. 우지사토의 눈이 항상 천하로 향해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 장재(將材)는 노부나가도 눈여겨볼 정도였다. 부친 카타히데(賢秀)가 오우미(近江)의 롯카쿠(六角)씨를 버리고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겼을 때 13살의 우지사토는 인질로 오다 가문에 오게 되었다. 우지사토를 본 노부나가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며 장래의 대기(大器)를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의 사위로 삼는다고 약속까지 하였다. 그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다음 해 14살의 데뷔전(初陣)에서는 이름있는 무사의 수급을 취하였다. 이 해 약속대로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姫)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4
히데요시도 우지사토의 인물을 높게 평가하였다.
1587년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의 일이다. 당시 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성주였던 우지사토도 출진하였다.
어쨌든 히데요시 앞에서 그의 측근들이 심심풀이로 인물비평에 열중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 때,
“우지사토는 나와 닮았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해내더군. 정말 두려운
녀석이야”
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즈(会津)의 대봉(大封)을 받을 때 있어서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이즈(会津)는 오우슈우(奥州)를 제압하는 주요지점이었다. 히데요시는 누가 적임일지 여러 장수들에게
토의하게 하였다. 10명중 9명이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를 추천하였다. 그러자 히데요시는, “네놈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어라”며
우지사토를 지명했다고 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 부임할 때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였다. 히데요시의
특기 인심장악술이었다. 자신의 전권대리인으로서 오우슈우(奥州)의 지배자가 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전해진다.
우지사토가 너무도 뛰어난 인물이었기에,
“이쪽에 두기에는 너무 무서운 녀석이다”
고 생각한 히데요시가 오우슈우(奥州)의 깡촌으로 쫓아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5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오우슈우(奥州)로 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도 하였다. 같은 자리에
아이즈(会津)와 인접한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에 영지(領地)를 가지고 있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와 그의 아들
키요히사(清久)가 있었다.
“이세노카미. 너희들은 앞으로 우지사토를 주군 혹은 부모라 생각하고 섬기거라. 앞으로 쿄우토(京都)에 올
필요 없다. 그 대신 아이즈(会津)로 출사하거라”
그리고 우지사토에게는,
“이세노카미를 자식 또는 동생이라고 여기며 돌봐주길 바란다”
고 말하였다.
우지사토는 오우슈우(奥州) 총독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것이다.
오우슈우(奥州)에서 으뜸가는 실력자로 자타가 공인하던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는 자연스레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우지사토에 대한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다. 그런 분위기를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마사무네가 세이쥬우로우(清十郎)라는 16살의 자객을 가모우 일족의 타무라 나카츠카사노쇼우(田村 中務少輔)의 시동으로
잠입시켰다. 목적은 우지사토의 암살이었다. 어쩌다 편지가 국경초소에서 발각되어 정체가 탄로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우지사토는 그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며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6
우지사토는 세례명을 ‘레온’이라고 하여 기독교에 신앙했었다. 센고쿠 당시의 지식계층은 이 서양의 종교를 신지식으로 받아들였는데 우지사토의 인텔리전트적인 면모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7
풍류의 길에도 밝아 사세구로써,
성급도 하구나 꽃샘바람
限りあれば吹かねど花は散るものを
心みじかき春の山嵐
다도(茶道)도 리큐우의 뛰어난 일곱 제자 중 하나로 꼽혔다. 8
말년의 영지(領地)는 92만석에 달했지만 안타깝게도 40세에 죽었다.
가모우 가문 자체의 명맥도 짧아 아들인 히데유키(秀行)의 대에 단절되었다. 9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郷)]
1556년
오우미(近江) 가모우 군(蒲生郡) 히노 성(日野城)에서 태어났다. 첫 이름은 마스히데(賦秀), 통칭을
츄우사부로우(忠三郎)라 하였다. 1584년 10이세(伊勢) 마츠자카(松坂) 12만석의 성주가 되었고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에서의 공으로 쇼우쇼우(少将)로 승진하여
'마츠자카 쇼우쇼우(松坂少将)'라 불렸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공을 세워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 42만석에 봉해졌다. 1591년 오우슈우(奥州) 카사이-오오사키 반란(葛西・大崎一揆) 11를 진압하여
타무라(田村), 시노부(信夫) 등 5개 군(郡)이 더해졌고, 같은 해 또다시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에 참가하여 다테 군(伊達郡)을 가증 받아
영지(領地)는 91만9320석에 달하였다. 1595년 2월 7일 죽었다. 12
- '지식인'..이라고 번역해야하지만, 왠지 네이버 지식즐~ 때문인지 뉘앙스가 좀... [본문으로]
- 46만석이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 대다수의 서적들은 1569년 8월의 이세(伊勢) 키타바타케(北畠) 공략이라고 하지만, 우지사토가 이토우 한고로우(伊藤 半五郎)에게 보낸 편지에는 1568년 9월의 노부나가 상경전 때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 이와는 반대로 우지사토에게 세례를 한 오르간티노는 우지사토가 죽자 히데요시는 히데요리를 보호해 줄 사람이 죽었다며 눈물 흘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 '常山紀談'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하다. [본문으로]
- 레오(Leo)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 리큐우 칠철(利休七哲)을 말한다. 우지사토를 제외한 나머지는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오리베'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 우지사토는 이 칠철 중 No.1으로 꼽힌다고 한다. [본문으로]
- 실제로는 업치락뒤치락 후 우지사토의 손자 타타도모(忠知) 때 완전히 끊김. [본문으로]
- '야스히데'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 상기의 키무라 이세노카미 요시키요(木村 伊勢守 吉清)가 영내 정치를 잘못해서 '카사이-오오사키의 난'이 일어난다. [본문으로]
- 정확히는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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