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채팅 서비스인 ChatGPT, 구글의 제미나이, 윈도우11 내장인 코파일럿..에게 일본 어삼가(御三家)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우선 쳇지티피에 한국어로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딴 소리 하고 있죠.

이이 가문井伊家은 후다이 No.1譜代筆頭라는 명칭이 따라 붙긴 하지만 어삼가는 아니죠. 

마츠다이라 가문松平家은 위 그림의 설명 그대로이긴 하지만 어삼가는 아니죠.

시바 가문斯波家은... 시바이누柴犬할 때의 '柴'를 썼네요. 발음은 같습니다만 왠지 웃기네요. 위 그림에서 설명대로 오다 노부나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장공기信長公記의 수권首巻에서 자주 나오는 부에이님武衛様는 저 시바 가문의 당주인 시바 요시카네斯波義銀를 지칭합니다. 그러니 노부나가와 관련이 있기는 하죠. 그러나 어쨌든 어삼가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시바를 斯波가 아니라 柴라니... 芝.

 

그럼 저는 시바이누斯波犬라고 하죠.


하지만, 일본어로 물어보면...

 

-----번역 시작-----
고산케[御三家]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 가문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아래의 세 가문을 지칭합니다.

1.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

  ·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직계 가문으로, 현재 아이치현 나고야(愛知県 名古屋)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손자인 토쿠가와 요시나오[義直公]가 설립하여 되어 오와리번을 통치했습니다.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은 에도시대 내내 중요한 다이묘우 가문 중 하나로 나고야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했다.
2. 키슈 도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

  ·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동생인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頼宣]가 설립하여 현재의 와카야마현을 중심으로 키슈우번을 통치했다.키슈우 토쿠가와 가문도 에도시대의 중요한 다이묘우 가문으로, 키슈우번의 지배를 통해 막부의 정책과 지방 통치에 기여했습니다.
3. 미토 도쿠가와 가문(水戸徳川家)

  ·  미토 토쿠가와 가문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가 설립한 가문으로, 현재의 이바라키현 미토시를 거점으로 미토번을 통치했다.미토번은 특히 학문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토학'이라는 학문 체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들 '고삼가(御三家)는 모두 토쿠가와 가문의 일족으로 막부에 대한 중요한 지지기반을 제공했다.또한 각 가문의 영지는 일본의 역사와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번역 끝-----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째 아들인 오와리의 요시나오를 손자, 10째 아들인 키슈우의 요리노부를 동생, 미토의 경우 미츠쿠니의 애비인 요리후사[徳川頼房]를 빼고 미츠쿠니가 설립했다는 등... 자잘한 거 말고는 대체로 맞는 듯이 보입니다.

 

참고로 작년 초인 2023년 2월에 쳇지티피에게 일본어로 어삼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결과는

 

https://www.facebook.com/valhae/posts/pfbid0jidWNoZAEqQi5sfRqLjm6v66w4NPQnSdL6Be6tks1qw3eTFNDFNnqbLZ2TyjM2tal

 

이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죠. 

 

다음은 구글의 제미나이.

 

한국어로 물어봤을 경우,

 

 

음... 이것은 안 좋네요.

마츠다이라 씨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토쿠가와를 칭하기 이전의 가문입니다. 이에야스는 초반에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를 칭하였고 이후 마츠다이라 이에야스[松平家康]를 거쳐 토쿠가와 가문으로 개성한 후에야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되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몸을 일으킨 미카와三河에는 같은 친척들인 마츠다이라가 엄청 많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열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거기에 일개 쿠니国 또는 그 이상을 영유할 정도인 마에다 가문前田家, 다테 가문伊達家, 시마즈 가문島津家 등등도 에도 막부의 정식 호칭은 각각 마츠다이라 카가노카미松平加賀守, 마츠다이라 무츠노카미松平陸奥守, 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松平薩摩守이었을 정도로 에도 시대에 마츠다이라는 너무도 많습니다. 

 

토쿠가와 고산케...는 아예 싸잡아서 미토로 한정 시켰네요.

 

토쿠가와 시미즈 번徳川清水藩...은 아마도 어삼경御三卿 중 하나인 시미즈 가문清水家과 헷갈렸나 보네요. 시미즈 말고 키요미즈 번清水藩은 에도시대 초기에 잠깐 있었다가 없어진 번이 있습니다만.. 여기에 낄 급도 아니고요.

 

그럼 제미나이에게 일본어로 물어보면...

 

 

 

-----번역 시작-----
어삼가에 대해서

 

어삼가는 에도 시대에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에 있어서 쇼우군 가문将軍家와 특히 가까운 혈연관계였던 세 가문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쇼우군 가문에 후계자가 없을 경우에 이 세 가문에서 양자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높은 지위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삼가를 구성하는 가문.

  •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형 마츠다이라 야스치카松平康親의 자손으로 오와리 번을 다스렸다.
  •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 토쿠가와 요리노부의 자손으로 키슈우 번을 다스렸다.
  • 미토 토쿠가와 가문 :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11남 토쿠가와 요리후사의 자손으로 미토 번을 다스렸다.

-----번역 끝-----

 

가격家格이라고 '가문'이라는 단어로 고풍스럽게 표현한 것이 재밌네요.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 설명에... 이에야스의 형이라고 했는데, 이에야스에게는 대놓고 형제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부제.. 그러니까 모친이 히사마츠 가문久松家에 시집가 낳은 동생들만 있었죠. 후손들이 자신이 선조는 이에야스의 배다른 형제였다고 주장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습디마만 이에야스가 살아있는 동안에 동생취급 했던 것은 저 히사마츠 가문 사람들 말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은 이에야스의 9째가 아닌 10째 입니다.

 

미토번은 틀린 곳 없네요.

 

마지막으로 윈도우 11의 코파일러.

 

먼저 한국어로

 

틀린 곳 없습니다.

 

일본어로 물어볼 시,

 

 

-----번역 시작-----

御三家고산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중 오와리(요시나오), 키이(요리노부), 미토(요리후사)의 가계를 가리킵니다. 이들 가계는 장군가 다음가는 가문으로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토쿠가와 어삼가는 에도시대에 쇼운군직을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가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오와리번(61만석)은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인 요시나오, 키이번(55만석)은 10남 요리노부, 미토번(35만석)은 11남 요리후사가 각각 번주가 되었습니다.

 어삼가御三家라는 단어는 다른 분야에서도 유력한 세 가지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예계나 산업계 등에서 「어삼가」라고 불리는 그룹이 존재합니다.

-----번역 끝-----

 

틀린 곳 없네요.

 

그래서 결론은,

  • 쳇지티피나 제미나이의 경우, 어삼가御三家에 관해서 한국어로 물어 볼 시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 수 없다.
  • 쳇지티피나 제미나이의 경우, 어삼가에 대해 일본어로 물어볼 시 크게는 맞고 자잘하게는 틀린 답변을 얻을 수 있다.
  • 윈도우 코파일럿의 경우, 한국어든 일본어 간결하지만 바른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전쟁[각주:1]말기 나는 에타지마[江田島]에 있는 해군병학교에 있었다.
 내가 재학하고 있을 때, 카야노미야[賀陽宮]와 쿠니노미야[久邇宮]라는 두 분의 왕가[宮家] 사람이 계셨다. 아무래도 그분들은 특별 취급을 받아, 일요일에는 그분들이 휴식할 수 있는 한 채의 건물이 따로 있었으며 시종무관도 있었다.
 일요일에는 나도 대개 거기로 호출되어 왕가분들을 상대하거나 하였다. 상대라고 하여도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잡담이나 식사를 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과자를 받는 정도였다.
 다른 생도들은 보통 일요일에 외출하거나 교관의 집에 놀러 갔다. 나도 때때로 외출하였지만 다른 생도들이 보기에 왕가의 상대를 하는 것 자체가 특별취급이었기에 생도들에게는 나라는 인물 역시 거리감이 있는 생도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탈도 많았다.
 상급생에게 호출되어,
 “이름을 말하라”
 고 하여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목소리가 작다며 따귀를 맞은 적도 있었다.

- 타야스 토쿠가와 가문[田安徳川家][각주:2] 11대 당주 토쿠가와 무네후사[徳川宗英]

출처: 토쿠가와 무네후사, “토쿠가와 400년의 비밀이야기”(文春文庫, 2004), 280-281쪽

  1. 2차대전 [본문으로]
  2. 8대 쇼우군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의 둘째 아들 무네타케[徳川 宗武]를 시조로 하는 가문. 요시무네 때는 쇼우군 가문[将軍家]에 후사가 없을 시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다는 어삼가[御三家]와 이러저러한 문제로 거리가 멀어진지라 요시무네는 자신의 핏줄로 새로이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어삼경[御三卿]를 만들었다. 타야스 가문은 그 어삼경 중의 필두. 가문 명칭의 유래는 에도 성[江戸城] 북측에 타야스 문[田安門] 근처에 저택이 있었기에 이리 불렀다고 한다. 10만석의 영지가 있었지만 다스리지는 않고 막부에게 위임하는 형식으로 봉록만을 받았다. [본문으로]

1642년 3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 家光]의 아들 타케치요[竹千代][각주:1]오우미[近江] 히에이잔[比叡山]에 있는 산노우 신사[山王神社][각주:2]에 처음으로 기도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자[각주:3]가 처음 성 밖을 나가는 것인 만큼 이에미츠는 그런 세자의 첫 나들이를 화려하게 장식해 줄 요량으로 어삼가[御三家][각주:4]까지 함께 가라며 그 일에 대한 처리를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 信綱]에게 맡깁니다[각주:5]. 노부츠나는 우선 어삼가의 필두 오와리[尾張]의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에게 연락합니다.

노부츠나 : 어삼가의 당주들께서도 타체치요님의 히에이잔 기도에 함께 가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요시나오 : 다이나곤[大納言]인 내가 무위무관(無位無官)인 타케치요를 뒤따라 가야 한단 말인가?

노부츠나 : 무위무관이긴 하셔도 타케치요의 아버님은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십니다.

요시나오 : 아버지를 말하자면 우리 아버지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시네.

…하고 거부하여 오와리의 요시나오는 물론 키이[紀伊]의 토쿠가와 요리노부[徳川 頼宣], 미토[水戸]의 토쿠가와 요리후사[徳川 頼房]까지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1. 후에 4대 쇼우군 이에츠나[家綱] [본문으로]
  2.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신호(神号) '토우쇼우다이곤겐[東照大権現]'이라는 이름이 나온 사상적 바탕이 된 곳...이라고 썼지만 사실 제가 철학적인 것을 알리가 없습죠. 단지 천태종(天台宗)을 믿는 텐카이[天海]가 신불습합에 따라 '산노우이치지츠 신도[山王一実神道]에 따라 이에야스를 '곤겐[権現]'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 조금 알고 있을 뿐입죠 [본문으로]
  3. 1634년 세자가 없던 이에미츠가 조금 아퍼 누워있자. 어삼가 중 하나인 오와리[尾張]의 요시나오[義直]가 군사를 이끌고 에도로 진격하였는데, 세자 없는 이에츠나가 죽으면 요시나오 자신이 쇼우군이 되고자 하여 에도 막부를 공포에 떨게 한 적도 있었기에, 이에미츠로서도, 에도 막부의 각료들에게 있어서도 세자는 절실히 필요했다. [본문으로]
  4. 사실 어삼가[御三家]라는 것이 정식으로 생긴 것은 5대 츠나요시[綱吉] 때나 가서야 생긴 것.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오와리 가문, 키이 가문, 미토 가문. [본문으로]
  5. 별명이 '지혜로운 이즈[知恵伊豆 - 노부츠나의 관직이 이즈노카미[伊豆守]였기에]'일 정도로 현명했기에, 이에미츠는 힘든 일처리를 노부츠나에게 자주 맡겼다. [본문으로]

 

2010.12.13 - [일본사 이것저것] - ckyup님께 바치는 조공 -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 에 이어서

 

☞ 링크 중 한문에 링크가 걸린 것은 위키피디아 일본판으로 점프합니다.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에 관한 이야기는 토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편찬사료들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부의 공식기록이라는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를 위시한 여러 사료들뿐만 아니라 ‘유영부녀전계[柳営婦女伝系]’, ‘옥녀기[玉輿記]’와 같이 토쿠가와 가문에 시집온 여인들에 대한 기록서에서 볼 수 있는 키요야스의 부인 케요우인[華陽院] 항목에서도 키요야스가 죽게 되는 모리야마의 변을 텐분[天文] 4년 즉 1535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와 개정 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따르면 키요야스의 미카와 군세는 당시 오와리[尾張]의 키요스[각주:1]에 있는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키요스가 노부히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기술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1535년 당시 키요스는 노부히데의 영향력 밖에 있었기 때문입죠.

 

키요스

 

키요스는 당시 오와리 하사군[下四郡]의 슈고다이[守護代] 오다 야마토노카미 타츠카츠[織田 大和守 達勝]의 거성이었습니다.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텐분 원년(1532년)까지 키요스의 서쪽 쇼우바타[勝幡]에 있던 부하격인 단죠우츄우 노부히데[弾正忠 信秀]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습죠.

이후에는 소강상태가 이어집니다만 슈고다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은 틈만나면 노부히데를 노렸으며 결국 오와리 제일의 실력자라는 노부히데가 1551년에 죽자 대놓고 노부나가에게 시비를 걸 정도로 사이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좋을 리가 없었겠죠. 당시는 하극상의 시대. 야마토노카미 가문에서 보기에 치고 올라와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예전 가신을 좋게 볼 리는 없을 터이며, 단죠우츄우 가문 쪽 역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으니까요. 노부히데의 입장에서는 미카와의 키요야스가 키요스를 공략해 준다면 그 틈에 떨어진 떡고물을 취하려 할 지언정 도우러 갈 이유는 희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쇼바타 성[勝幡城]과 키요스 성[清洲城],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위치

어쨌든 이 키요스가 단죠우츄우 가문[弾正忠家]의 영지가 되는 것은 1555년 노부나가와 노부나가의 숙부이자 노부히데의 동생인 노부미츠가 손을 잡고 모략으로 키요스를 손에 넣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각주:2]

 

그렇다면 모리야마는?

 

자 그럼 모리야마는 누구의 영지였을까요?
위에 언급한 에도 막부의 기록들에는 노부히데의 동생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성이라고 합니다만, 실은 이 모리야마도 노부미츠의 성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영지냐 하면, 바로 키요야스와 사이가 나뻤던 숙부 마츠다이라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의 영지였던 듯 합니다.

적어도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기 9년 전인 1526년에 렌가사[連歌師] 소우쵸우[宗長]의 일기에 모리야마에 있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저택에서 렌가회가 열려 거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또한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나는 1535년까지도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각주:3]

이 모리야마가 언제부터 노부미츠의 영지가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노부히데가 모리야마의 근방 나고야[那古野]를 손에 넣고 그곳에 있는 텐노우보우[天王坊][각주:4]라는 절의 토지 영유를 인정한 1538년 이후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모리야마의 변이 일어난 1535년 당시에는 나이젠 노부사다의 영지였지 노부미츠의 거성이 아니었단 말입죠.

 

썰렁한 결말

 

즉 이 모리야마의 변에서 오다 가문이 낄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마츠다이라 종가[松平宗家]의 키요야스[清康]와 그 종가에 개기는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松平 内膳 信定] 간의 싸움이었습죠. 미카와∙마츠다이라 일족[三河∙松平一族]라는 책을 쓴 히라노 아키오[平野 明夫]라는 분은 마츠다이라 가문 종가와 분가의 다툼에 더해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와 아시카가 요시츠나[足利義維] 다툼과도 관련이 있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마츠다이라 가문 내부의 싸움이었을 뿐입니다.

 

또 하나 수상한 점.

 

◀왼편에 있는 그림은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 기록된 모리야마 변에 관해 기록된 곳입니다. 모리야마에 진을 친 키요야스에게 나이젠 노부사다가 노부히데와 내통하여 키요야스의 거성을 노리고 종가를 빼앗으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키요야스가 군사를 되돌리려 할 때 사카이[酒井], 오오쿠보[大久保]의 말에 따라 우선 군사를 되돌리지 않기로 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라고만 나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에 관해선 토쿠가와실기보다 먼저 만들어진 오른편의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 그들이 누구인지 나와 있습니다.▶

 

사카이와 오오쿠보 가문의 면면들이 보이는군요.

 

사카이 사에몬노죠우 타다츠구[酒井 左衛門尉 忠次]와 오오쿠보 가문의 유명인인 오오쿠보 시치로우에몬 타다요[大久保 七郎右衛門 忠世], 오오쿠보 지에몬 타다스케[大久保 治右衛門 忠佐] 등이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이상한가 하면...

 

사카이 타다츠구 1527년생. 오오쿠보 타다요 1532년생 오오쿠보 타다스케 1537년생입죠. 그리고 모리야마 변이 일어난 해는 1535년.

 

그러니까 모리야마 변이 일어날 당시, 사카이 타다츠구는 9살. 오오쿠보 타다요는 4살, 타다스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입죠. 여담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개정미카와후풍토기의 저본인 미카와후풍토기에는 이시카와 카즈마사까지 등장한다고 합니다. 역시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모리야마의 변 당시 3살이옵죠.

이런 이유로 무라오카 소이치로우[村岡 素一郎]는 토쿠가와 이에야스 영무자설[徳川家康の影武者説]을 발표하며 모리야마의 변이 1535년 키요야스 때의 일이 아니고 1561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키요스에 있던 것은 노부나가이며, 뒤에서 획책했던 것은 나이젠 노부사다가 아니라 당시엔 이에야스와 적대적이었던 외삼촌 미즈노 노부모토[水野 信元]라고 합니다.

1561년 이에야스가 죽어 영무자가 교체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기를 바꾸려다 보니 노부나가가 아닌 노부나가의 아비 노부히데가 된 것이며, 역시 미즈노 노부모토가 아닌 나이젠 노부사다가 된 것이라고요. 그리고 죽은 이는 키요야스가 아닌 이에야스였으며 이때 세라타 지로우사부로우[世良田 二郎三郎]라는 이가 역사상의 이에야스로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무라오카의 주장대로 1561년이라면 위에 사카이나 오오쿠보의 나이도 해결이 됩지요. 사카이 타다츠구 35세. 오오쿠보 타다요는 30세. 타다스케는 25세. 확실히 이정도 나이라면 옆에서 진언할 나이는 되겠지요.

뭐 저도 무라오카 씨의 주장에는 납득을 못합니다만 그가 이에야스 영무자설을 주장하기 위해 언급한 몇몇 것에는 흥미로운 점이 몇 군데가 있긴 합죠...뭐 이건 언젠가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기로 합죠.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의 이후

 

 

의심도 받았고 또한 자기 아들이 주군까지 살해하였다.
보통 이랬다면 바로 사형이고 실제로 현지 분위기도 그러했으며 아베 오오쿠라 자신도 대역무도의 죄를 지었다며 죽으려 했으나, 야시치로우의 시체를 조사한 결과 전편에서 언급했던 결백서가 발견되었고, 거기에 키요야스의 아들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용서를 얻어 이후 그에게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이후 키요야스의 숙부 나이젠 노부사다가 종가의 히로타다를 죽이려고 할 때도 히로타다를 탈출시켰고 히로타다의 복귀를 의해서 힘을 써 실현. 히로타다가 죽은 이후 히로타다의 아들인 이에야스[家康]가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의 보호를 받을 때는 마츠다이라 가문을 대신해서 오카자키 행정관[岡崎奉行人] 중 한명으로 오카자키 주변을 다스리다 죽습니다(생몰년 불명[각주:5]).

 

아베 오오쿠라는 주군을 죽인 대역무도의 핏줄이라며 자식을 낳지 않았으나, 그의 측실이 아베 오오쿠라의 씨를 임신한 채로 시나노[信濃]에서 미카와에 와 있던 이노우에 키요무네[井上 清宗]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후에 이노우에 키요히데[井上 清秀]라는 사람이 되며, 키요히데의 자식들은 대대로 에도 막부의 요직에 취하여 후다이[普代] 명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 토쿠가와실기[徳川実紀]에는 清洲, 개정미카와후풍토기[改正三河後風土記]에는 清須 [본문으로]
  2. 신장공기(信長公記) 권수(巻首) 織田喜六郎殿御生害の事. [본문으로]
  3. 타니구치 카츠히로[谷口 克広] “오와리∙오다 일족[尾張∙織田一族]”(新人物往来社),p82 [본문으로]
  4. 사족으로 이곳은 노부나가가 어렸을 적에 공부한 절이라고 함. [본문으로]
  5. 위키에는 1549년 죽었다고 하나 1553년에도 오카자키 행정관 중 하나인 사카이 키요히데[酒井 清秀]와 함께 미카와 절들에 대한 문서가 남아있기에 1549년 사망설은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

1535년 12월 초순.
13살에 가독을 이은 뒤 파죽지세로 마츠다이라 종가[松平 宗家]의 세력을 넓히고, 종가에 개기던 서가(庶家)를 가신단으로 편입시켰으며, 후다이 가신단[譜代家臣団]을 조직화하고, 직할지 농민 지배기구의 정비, 성 밑 마을[城下町]을 만드는 등 착착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의 길을 걷던
미카와[三河]의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 清康][각주:1]는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각주:2]를 공격하기 위해 오와리의 모리야마[守山/森山][각주:3]란 곳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분열된 마츠다이라 종가와 서가와의 사이를 이간질해 미카와에 진출하려는 오다 가문[織田家]을 정벌하기 위해서 였습죠. 그렇습니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종가와 서가간에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련하면 ‘열 여덟 마츠다이라[十八松平]’라고 할 정도로 많은 그리고 독립적인 서가가 있었으며 그런 서가 중 실력자로 나이젠 노부사다(wike_jp)[松平 内膳 信定]가 있었습니다. 족보 상으로는 키요야스 아비의 동생 즉 키요야스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됩죠.

 

 노부사다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척들을 구성하는 외교에도 뛰어나, 자신의 부인은 오다 노부히데의 여동생이었으며, 노부사다의 딸들은 오와리 모리야마 성[守山城]의 성주인 오다 노부미츠[織田 信光]의 부인을 시작으로 카리야[刈谷]의 미즈노[水野], 마츠다이라 서가인 오오규우[大給], 나가사와[長沢] 가문에도 시집을 보내어 거대세력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 노부사다에게 종가라고는 하나 날뛰는 25살의 애송이 조카 녀석이 꼴보기 싫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오와리 원정에는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려서 못 나갑니다~ 하고 꾀병을 부렸습죠. 키요야스가 이끄는 미카와 군세가 이겨보았자 그 공은 전부 키요야스가 차지하게 되고 또한 그렇게 키요야스는 더 커질테니까요. 그래서 원정 참가를 하지 않는 대신 방해를 합니다. 내부의 적은 항상 있는 법입죠.

 

 키요야스를 지탱하는 유력한 가로 중에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각주:4]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내정 수완을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키요야스가 저렇게 매년 전쟁을 하는 것도 다 자기가 후방에서 지원을 잘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노부사다는 저 아베 오오쿠라와 키요야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여러 소문을 퍼뜨립니다. 아베가 오다 가문과 내통하고 있다건가, 아베가 잘난 척을 많이 한다던가 하는…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런 소문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키요야스도 평소부터 아베에게 거리낌이 있었는지 그 소문을 곧바로 믿고 아베 오오쿠라와 자주 다투게 됩니다.

 

 그런 소문과 키요야스의 행동 때문에 상처 입은 아베 오오쿠라는 모리야마의 본진에서 아들 아베 야시치로우[阿部 弥七郎]에게 말합니다.
 “만약 뜬소문 때문에 내가 죄를 받으면 후대까지 오명을 입게 된다.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내 무죄를 신께 맹세하는 기청문(起請文)을 쓰니 니가 가지고 있으렴”
 아비의 투덜거림과 기청문을 받은 야시치로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뜬소문만 믿고 공이 많은 자신의 아비를 핍박하는 주군 키요야스가 너무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12월 4일.
 키요야스의 본진을 둔 절에서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나 말이 놀라 날뛰는 헤프닝이 일어났습니다.
 말이 도망가지 못하게 병사들이 소리질렀습니다.
 “도망 못 가게 해~ 문을 어서 닫아~”

 

 이 ‘도망 못 가게 해, 문을 닫아’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야시치로우는 하필 아비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있었기에 병사들의 저 외침은 날뛰는 말이 아니라 아비를 지칭한다고 오해하였습니다. 아비를 도망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취했습니다. 아비를 구하러 찾아다니다가 시간낭비를 하느니, 어디에 있는지 뻔한 키요야스를 찾아 죽이는 것입니다. 말잡이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지휘를 하고 있던 키요야스 곁에는 부하들도 말 잡으러 갔기에 혼란스러웠고 사람도 적었습니다. 아무 제지 없이 키요야스의 뒤로 다가간 야시치로우는 칼을 뽑아 “도망치게 하지 마라”고 외치는 키요야스의 등 오른 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베었습니다. 키요야스는 그 자리에서 사망. 아베 야시치로우도 키요야스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검의 명수 우에무라 데와노카미[植村 出羽守]에게 죽습니다.
 이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토우카이도우[東海道]에서 무명을 떨치던 키요야스가 죽어, 그의 아들이며 이에야스의 아비인 히로타다는 불과 10살의 나이에 가독을 이엇고, 종가를 쓰러뜨리려는 나이젠 노부사다에게 미카와에서 쫓겨나 이세[伊勢], 스루가[駿河]를 전전하게 됩니다.

 

 이상이 모리야마의 변에 대한 통설입니다.
 ...하지만 말입죠.

미야시타 히데키[宮下 英樹]의 오케하자마 전기 2권. 나카무라 촌[中村村]의 킨스케[均介]
제가 나카무라 촌[中村村]의 킨스케[均介]처럼 현장에 직접 가서 의문을 느끼진 못 했지만, 알려진 통설에는 의문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죠.

계속~ (두둥~) 2011.03.07 - [일본사 이것저것] - ckyup님께 바치는 조공 -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 #2

 

ckyup님께 바치는 조공 -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 #2

2010.12.13 - [일본사 이것저것] - ckyup님께 바치는 조공 - 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 에 이어서 ☞ 링크 중 한문에 링크가 걸린 것은 위키피디아 일본판으로 점프합니다.모리야마의 변[森山崩れ]에

valhae.kr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할애비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애비 [본문으로]
  3. 오다 측 기록에선 守山, 토쿠가와 측 기록에선 森山. 둘다 발음은 동일. [본문으로]
  4. 위키에는 아베 사다요시[阿部 定吉]라는 휘(諱)가 있으나, 당시 기록은 그냥 '아베 오오쿠라[阿部 大蔵]라 하였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