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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28 혼다 타다카츠 - 늙어서도 기골을 엿볼 수 있었던 용장의 마음가짐 2

혼다 다다카쓰[本多 忠勝]

1610 10 18 병사 63.

1548 ~ 1610.

통칭 헤이하치로[平八郞].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다. [삼걸(三傑)[각주:1]]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공이 많으며, 이가 도피행[伊賀越え[각주:2]]에도 따랐다.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각주:3]], 나가시노[長篠[각주:4]], 세키가하라[関ヶ原] 50여 번의 전투를 치르면서 한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무장


 혼다 가문[本多]은 사카이[酒井]나 오오쿠보[大久保]처럼 마츠다이라 씨[松平氏[각주:5]] 창업 때부터 함께 한 후다이(譜代)의 명문가이다. 그런 혼다 가문을 대표하는 것이 [천하 무쌍의 용장]이라는 헤이하치로 타다카츠이다.


 1548년에 태어난 타다카츠는 이에야스보다 6살 연하이다. 13살에 이에야스의 옆에서 처음으로 전쟁을 경험. 이후 50여 번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미카타가하라의 전투, 나가시노의 전투 그리고 혼노우 사의 변에서는 적합한 정세 판단으로 이가를 통과하여 미카와[三河]로 귀국을 진언했던 것[각주:6],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의 전투[각주:7]에서 행한 대담한 용병술[각주:8]이나 세키가하라[関ヶ原] 등에서는 보여준 활약은 특필할 만한 것이다.

 더욱이 쌍벽을 이룰 정도로 토쿠가와 가문을 대표하는 맹장 나오마사[井伊 直政]의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각주:9]. 3.9미터에 이르는 [톤보기리(蜻蛉切[각주:10]]라는 명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항상 앞장서 달려나가 용명을 날렸지만 죽을 때까지도 공적을 자랑하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타다카츠의 존재는 당시의 천하인에게도 알려져 오다 노부나가 [화실겸비의 무사(花實兼備의 武士)], 토요토미노 히데요시 [일본제일 고금독보의 용사(日本第一 古今獨步之勇士)]라 절찬했다. 또한 미카타가하라 후 '이에야스에게 과분한 것이 둘 있으니 중국산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각주:11]'라며 타케다 무사들은 타다카츠를 칭송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의 전투까지는 힘으로 영토를 얻는 시대였기에 타다카츠는 그야말로 이에야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


 이이 나오마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와 함께 토쿠가와 가문 [삼걸(三傑)]로 칭해지던 타다카츠는 1590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칸토우[関東]로 이봉되었을 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10만석에 봉해 이이 나오마사 다음[각주:12]으로, 동갑인 야스마사와 더불어 후다이에서 두 번째로 큰영지를 받았다. 무공파(武功派) 신하로써의 역할을 높게 평가받은 결과이다.


 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는 나오마사와 함께 동군 선봉군의 군감(軍監[각주:13])으로 참가하여 일시 열세가 된 동군을 질타 격려하여 진용을 바로 세워 승리로 이끄는 활약을 했다. 이 때 당시 53세였다.


 다음 해인 1601년 정월.

 타다카츠는 이세[伊勢] 쿠와나[桑名] 10만석으로 전봉(転封)하게 되었다. 토요토미 은고(恩顧[각주:14])의 유력 다이묘우가 많았던 서일본에서 에도[江戸]가 있는 동일본으로 이르는 길을 방비하는 토우카이도우(東海道) 입구의 요충지가 맡겨졌다는 것은, 토우산도우[東山道] 입구의 요충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城]에 배치된 나오마사와 같은 역할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이에야스가 무공파 유력 후다이[譜代] 다이묘우에게 기대한 것은 바쿠후 정치의 중추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서일본을 방비함과 동시에 막부(幕府)측의 선봉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에야스는 이때 타다카츠의 둘째 아들 타다토모[忠朝]에게 카즈사[上総] 오오타키[大多喜] 5만석을 주었다. 타다카츠의 가문은 5만석 가증된 것을 의미한다. 그 점에 대해당초 타다카츠에게 5만석 가증의 이야기가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를 통해서 전해졌다고 하지만 사퇴했기 때문에 행해진 처리라는 이야기가 타다카츠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는 한편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공으로 한 지역[]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가신들에게 줄 영지 배분안까지 만들었지만 결국 아무런 연락도 없어 이에야스의 사자가 왔을 때에 배분안을 불 속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필시 후다이 No.1 중신이며 지금까지의 공적을 있기에 타다카츠는 적어도 나오마사의 사와야마 18만석 이상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예측하고 있었겠지만 김치국만 마시게 된 꼴이 혼다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결과 앞과 같은 이설을 낳았을 것이다. 타다카츠라 하여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가문의 번영을 비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무공파의 면목 잃지 않다.


 세키가하라의 전투 이후. 토쿠가와 가의 중추 세력이 무공파에서 혼다 마사노부 등의 문치파(文治派)로 옮겨지고 있던 상황을 민감히 깨달은 타다카츠는 구와나 성으로 옮기자 동시에 막정(幕政)의 중추에서 물러나 남은 10년을 번정(藩政) 확립에 주력한다.


 그 즈음의 이야기로써 타다토모와 함께 성 주변에 물을 채워 둘러 친 해자에 배를 띄어 타던 중 손에 든 노로 풀 밭을 헤치자 낫으로 벤 듯이 잘렸다는 이야기나 앞서 말한 [톤보키리]의 창을 약 90센티 정도 잘라 사용했다는 이야기(그래도 3미터 정도는 되었다)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가신 중 하나가 하리마[播磨] 히메지[嬉路] 52만석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의 가신과 싸움이 일어났을 때, 끊질기게 관계자 처형을 바라는 테루마사의 사자를 향해서 "이 이상 귀찮게 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늙어서도 여전한 맹장의 면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1610 10 18일.

 쿠와나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3. 화장을 한 후에 죠우토 사[浄土]에 묻혔다.

  1.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지칭. [본문으로]
  2.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혼노우 사[本能寺]에서 죽자, 이에야스가 사카이[堺]에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이가[伊賀]라는 지방에서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고생했다는 것을 말함. [본문으로]
  3.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의 전투. 패주하던 이에야스가 바지에 똥을 지린 것으로 유명. [본문으로]
  4.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의 전투. 보통 3단철포 떡밥으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5. 토쿠가와 씨[徳川氏]의 원래 성. [본문으로]
  6. 노부나가의 죽음을 들은 이에야스는 자기도 죽겠다며 배를 가르려 했지만 타다카츠가 말렸다고 한다. [본문으로]
  7. 히데요시와 싸운 전쟁.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 오다 노부카츠[織田 信雄]와 동맹을 맺고 오다 가문을 제 것으로 만들어 가던 히데요시와 싸웠다. [본문으로]
  8. 이에야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히데요시의 직할군 3만8000을 500의 병사로 가로 막았다고 한다. 그 사이에 강이 있어 타다카츠는 그 강에서 말을 목욕시켰다고 한다. 히데요시의 병사들이 철포로 쏘아 죽이려 하자 히데요시는 "저런 용사는 살려 두어야 한단다. 언젠가 내 편이 되었을 때 쓸모가 많을테니"라면서 쏘지 못하게 했다 한다. [본문으로]
  9. 이이 나오마사가 중장갑인데 비해 타다카츠는 움직임을 중시한 경장갑을 선호했다고 한다(by wiki). [본문으로]
  10. 너무도 날카로워 세워놓은 창에 잠자리[蜻蛉 – 톤보]가 앉았다 미끄러져 반으로 잘렸다는 이야기에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함. [본문으로]
  11. 家康に過ぎたるものは二つあり、唐のかしらに本多平八. 중국산 투구[唐のかしら]란 티벳 지방의 소인 야크(Yak)의 털로 장식한 투구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미카와 무사 10의 7~8은 이 투쿠로 썼다고 한다. [본문으로]
  12. 나오마사는 코우즈케[上野] 미노와[箕輪] 12만석. [본문으로]
  13. 전투 독려, 참모, 감시, 논공행상을 위한 공적 조사 등을 행함. [본문으로]
  14.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히데요시가 직접 키운 무장을 이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