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 노부야스[信康]의 죽음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가 말년이 되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론할 정도로 슬픈 사건이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입으로 노부야스에게 죽음을 명령했던 것이다.

 미카와(三河) 지방의 사람들도,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정도의 주군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지"

 라 하며 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노부야스를 자해(自害)로 몰아넣은 것은 역사상 유명한 '츠키야마도노 사건[築山殿事件]'에 의해서였다. 진상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1579 7 16. 이 날 이에야스는 가신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를 오우미[近江] 아즈치(安土)성(城)으로 파견하였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좋은 말을 헌상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부나가는 사카이 타다츠구에게 노부야스의 자해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노부야스가 생모 츠키야마도노와 함께 카이[甲斐] 타케다[武田] 측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노부야스의 부인이며 노부나가의 딸인 토쿠히메[徳姫]가 은밀히 그에 대한 것을 부친 노부나가에게 일러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야스의 부인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시대에 결혼한 부인으로, 그녀는 출신이 이마가와의 일족 세키구치 교우부노쇼우 치카나가[口 刑部少輔 親永]의 딸이었기에 콧대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어떤 사서에서는 츠키야마도노를 히스테리성의 여성이었다고 하며, 이에야스는 그 엄청난 질투심에 넌더리가 나 토오토우미[遠江] 하마마츠[浜松]로 거성(居城)을 옮겼을 때, 데려가지 않고 노부야스의 오카자키 성[岡崎城]에 남겨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이[甲斐]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와 내통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쩌다가 츠키야마도노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카이[甲斐]에서 온 중국인 의사에게 진찰받던 중 그와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는 이 의사를 매개로 해서는 타케다 카츠요리와 내통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노부나가-이에야스를 물리칠 방도를 카츠요리와 함께 꾀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신빙성은 거의 없다.

 

 진상은 노부나가가 노부야스를 두려워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노부나가는 노부야스라는 존재가 장래 오다 가문에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느낀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와 자신의 적자 노부타다[信忠]를 비교해 보면,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노부야사가 월등했다. 오다 가문은 이 노부야스에게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의 싹은 일찌감치 뽑아 두는 것이 좋다 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노부야스는 17살 때 이미 그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1575년 토쿠가와 군이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타케다 카츠요리의 군과 싸웠을 때의 일이다.

 카츠요리의 대군을 피하여 퇴각을 하려고 하였을 때, 노부야스는 나서서 신가리[殿]를 맡았다. 아군 퇴각의 무사안전을 위해 최후미에 위치하며 적의 추격을 막는 임무로, 역전의 무장이라도 극히 어렵다는 큰 임무이다.

 더구나 이때 타케다 군은 10만의 대군이었다[각주:1]. 하지만 노부야스의 말은 기특했다.

 장래에 있을 큰일을 위해서 지금은 연습을 해 두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어린 나이로 타케다의 대군과 대치하며, 적이 오오이가와 강[大井川]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후에 세키가하라[ヶ原] 결전 시, 이에야스는 정말 나이 먹어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니. 아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피곤할 것도 없었을 텐데하고 용감한 노부야스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부야스는 또한 육친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바로 다음 동생인 오기마루[於義丸-후에 히데야스[秀康]]가 정식으로 이에야스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노부야스의 힘이 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오기마루에 대한 애정이 없어 좀처럼 자신의 아들로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노부야스는 직접 오카자키 성[岡崎城]으로 3살 먹은 오기마루를 데려가 여러 노력을 기울여 이에야스와 만나게 하였다. 이에야스도 노부야스의 열의에 져, 오기마루를 자신의 아이라고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한 반면 노부야스에게는 포학한 이야기도 전해내려 오고 있다.

 춤을 좋아하여 자주 그런 무리들을 초대하였는데, 어느 날 옷이 맘에 들지 않고 더구나 춤 실력도 떨어지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노부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아이를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고 한다.

 매사냥의 결과가 신통찮은 것을 만난 승려 탓으로 하여, 그 승려의 목에 끈을 묶어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다가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각주:2]


 1579 8 29.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우선 츠키야마도노를 토오토우미[遠江] 토미츠카[塚]에서 살해했다.

 이에야스로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 명령에 거역하는 것은 곧바로 토쿠가와 가문의 멸망을 의미했다. 자신의 힘은 아직 노부나가에 비해 미약했기에 자기 가문 보전을 위해서는 부인과 적자의 목숨도 뺏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해의 9 15.

 노부야스에게 할복을 명하는 이에야스의 사자가 토오토우미[遠江] 후타마타 성[二俣城]에 도착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天方 山城)와 핫토리 한조우(服部 半) 두 사람이었다.

 노부야스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확실히 말했다.

 아버지에게 모반을 일으키려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부친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당시 가부장 권력의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노부야스는 조용히 핫토리 한조우에게 자신의 카이샤쿠[介錯][각주:3]를 명했다.

 한조우는 흘러 넘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어 그 임무를 맡을 수 없었다.

 아마가타 야마시로로 대신하였다.

 카이샤쿠의 칼이 번뜩이며, 여기에 21살의 생명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마츠다이라 노부야스(松平 信康)]

1559이에야스[家康]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다. 처음엔 모친 츠키야마도노[築山殿]와 함께 순푸[駿府]에 있었지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서 독립함에 따라,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인질이 된다. 1567년 오카자키[岡崎]로 와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딸 토쿠히메[徳姫]와 결혼하고 오카자키 성주가 되지만, 노부나가에게 자해를 명령 받는다.

이 글은 거의 전체가 사실과 다른 글입니다. 필히 밑에 트랙백과 함께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타케다 가문의 동원력은 무리를 해도 3만정도로 10만 가까이 동원하기에는 무리다. [본문으로]
  2. 승려는 불살이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기에, 승려 주변에 있는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사냥 결과가 신통치 않다며 툴툴대는 노부야스를 부하가 달래려고 말했다가 지나가던 승려가 그 짜증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배를 가르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어야 했기에, 믿을 만한 사람에 더해 단번에 목을 자를 수 있는 무예가 출중한 사람이 맡았다. [본문으로]

 사시모노[指物]라는 것은 무사(武士)가 전쟁터에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자 등에 매다는 작은 깃발을 말한다. 그 사시모노에 토리이 스네에몬[鳥居 右衛門]의 모습을 그리게 한 사람이 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부하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히사[落合 左兵次 道久]였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처형당한 스네에몬을 보고 사시모노의 그림으로 처형대 위의 처참한 모습의 스네에몬을 그린 것이었다.

 이 사시모노는 대대로 오치아이 가문의 자손에게 전해졌고, 현재 토우쿄우 대학[東京大学] 사료 편찬소에 보존되어 있다.[각주:1]

 그럴 정도로 토리이 스네에몬의 용기는 센고쿠[戦国]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 것이었다.

 

 1575 4.

 토쿠가와 측의 나가시노 성[長篠城]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남은 군량은 불과 4~5. 성은 25천의 타케다 군에게 물샐틈없이 포위당해 있었다. 남아있는 계책도 없어 이제는 성안에 있는 병사 모두가 뛰쳐나가 옥쇄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나가시노 성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平 信昌][각주:2]는 당시 24. 예전에는 부친 사다요시[貞能]와 함께 타케다 씨[武田氏]에 속해있었지만, 신겐[信玄]이 죽은 후 토쿠가와 측으로 말을 갈아탔다.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군사를 일으킨 것이 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배후에는 토쿠가와-오다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군세가 제 시간에 맞추어 와주기만 한다면…'

 그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버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쨌든 이에야스에게 이 어려운 상태를 하루라도 빨리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타케다 군의 엄중한 포위를 뚫고 사자를 보내야 했다.

 처음에 성주 노부마사는 오쿠다이라 지자에몬[平 次左衛門]이라는 수영을 잘하는 자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였었다. 그런데 지자에몬은 거부했다. 성안에서 탈출한 다음에 만약 성이 함락당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후세에까지 도망자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른 자들도 그러한 이유로 사자의 임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노부마사는 결심했다. 자기 한 사람 배를 갈라 개성한다면 가신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그 각오를 성병 모두에게 털어놓았다. 토리이 스네에몬이 자원한 것은 이 때였다. 이때 스네에몬 36.


 스네에몬이 성을 빠져나온 것은 14일 밤이었다. 운 좋게 가랑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이었다. 그럼에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타케다 군의 눈을 피해 빠져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장실의 하수구를 이용하였다. 암벽을 내려오면 칸사가와 천[川]이었다. 천바닥으로 잠수하였다. 강 건너편에 닿아 올라서자 방울 달린 줄이 장치되어 있었다. 조심스레 그것을 잘랐다

 

 다음 날인 15일 새벽.

 간보우도우게 고개[鴈峰峠]에 한 줄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탈출 성공 시에 피우기로 했던 약속한 신호였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었다. 이에야스와도 만났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와도 만날 수 있었다.

 

 16.

 간보우도우게 고개에서 두 번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구원 결정의 신호였다.

 스네에몬은 구원의 군세가 온다는 것을 성의 모두에게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었다. 노부나가는 위험하게 타케다의 포위진을 돌파하면서까지 성에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다 군과 동행하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또다시 적지에 잠입한 것이었다.

 스네에몬은 나가시노 성()의 건너편인 시노바노[篠場野]라는 곳까지 도착했다. 이제 성은 눈 앞이었다.

 

 그러나 피어오르는 연기를 의심하였는지 타케다 측의 경계는 한층 더 삼엄해져 있었다. ()을 두르고, 바리케이트[鹿垣]를 설치하여 바닥에는 모래까지 뿌려 발자국까지 확인하려 하였다.

 스네에몬은 이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되었고 거동이 수상한 자라 하여 타케다 측에 잡혀버렸다. 타케타바[竹束][각주:3]를 든 타케다의 아시가루[]로 변장하였다가 각반의 형태가 다른 다는 것을 검문 받아 잡혔다고도 한다.

 

 어쨌든 카츠요리 앞으로 잡혀온 스네에몬은 숨기지 않고 밀사의 임무를 진술하였다.

 이때 카츠요리[頼]는 오히려 스네에몬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가신으로 맞이하여 중하게 쓰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리고 하나의 임무를 명하였다.

 나가시노 성[長篠城]의 정면에 처형대를 세우고 거기에 묶인 스네에몬이 성안의 병사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 노부나가의 원군은 오지 않는다. 이젠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스네에몬은 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목숨만 구해주신다면 어떤 일이건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땅까지 주신다니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형대가 높이 세워졌다. 기둥에 묶인 스네에몬에게 초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 앞의 나가시노 성벽에 많은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타케다의 군사들도 숨을 죽이고 처형대 위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스네에몬의 입이 열렸다. 큰 목소리였다.

 노부나가님은 이미 오카자키[岡崎]에 와 있으시다. 이에야스님도 노다[野田]까지 군을 진출시키셨다~”

 카츠요리를 시작으로 타케다의 군사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스네에몬의 목소리는 한번 더 나가시노 벌판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성안의 모두들~ 반드시 3일안에 원군이 온다!”

 타케다 측에 혼란이 일어났다. 병사들이 처형대로 달려갔다. 몇 자루나 되는 창이 스네에몬의 몸을 찔러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1575 5 21.

 타케다 카츠요리의 25천의 대군은 오다-토쿠가와 연합군에게 나가시노 성밖의 시타라가하라[原]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타케다 군은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 바바 노부하루[馬場 信春], 사나다 노부츠나[ 信綱] 등 신겐 때부터 활약해온 용장들을 다수 잃었으며, 카츠요리 자신도 겨우 도망쳤다.

 

[토리이 스네에몬(鳥居 右衛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信昌]의 부하로 미카와[三河] 이치다[市田]에서 태어나 이름을 카츠아키[勝商]라 하였다고 한다. 나가시노 성터 부근의 스네에몬 처형장터에는 석비가 서있다.

  1. 위에 있는 그림을 말한다. [본문으로]
  2. 이때는 아직 사다마사[貞昌]. 후에 노부나가[信長]에게 이름글자 ‘노부[信]’를 하사 받은 다음부터 노부마사[信昌]라는 이름을 쓴다. [본문으로]
  3. 철포 탄환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묶은 것. [본문으로]

 노부나가의 성격은 크게 나누어 두 개의 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합리적인 근대(近代)에 대한 동경과 잔혹한 살육에 대한 의지가 그의 몸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프로이스(Luis Frois)는 직접 노부나가와 회견하였는데, 당시의 일을 로마 교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전략)…키가 크고 말랐으며, 수염이 적고, 목소리는 대단히 크며…(중략)… 전술이 뛰어나고, 대부분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에 따르는 것이 드물다…(후략)]

 고 쓰면서, 최하급의 병사와도 친근감 있게 이야기를 하는 대장(大將)이라 말하고 있다. 독선적인 성격이지만 뛰어난 군단지휘자의 풍모를 방불케 한다

 

 노부나가는 중세의 무거운 쇠사슬을 끊어, 일본에 근세의 여명기를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동시대의 영웅인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이나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차별화 되는 것은 이 근대적인 합리성일 것이다. 신겐이나 켄신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신불(神佛)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노부나가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노부나가는 무신론자였다.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납득한 것도 노부나가였다. 이보다 백 년 뒤, 에도 바쿠후(幕府)의 어용학자 하야시 라잔(林 羅山)은 지구가 둥글다는 설에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얼마나 시대에 앞선 근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코우베()코우베 시립박물(市立博物館)에는 노부나가가 애용하던 세계지도 병풍이 있다.

 

 너무 합리적인 나머지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냉혹한 면이 있었다. 쓸모 있는 자는 히데요시와 같이 그 출신에 구애 받지 않고 계속 출세시켜 주었지만, 한번이라도 무능이라는 낙인을 찍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가로(家老)로써 힘써온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 信盛)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혼간지(本願寺) 공략에서 아무런 활약이 없었다는 이유로 고우야(高野)산(山)으로 추방 당하였고 말년에는 길가에서 굶어 죽는 비참함 죽음을 맛보게 하였다.

 

 1571 9.

 노부나가는 히에이잔(比叡山)산(山)을 포위하여 건물, 석탑, 승가가람(僧伽藍摩)을 전부 불태움과 동시에 남녀노약을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어서 1574년 키소카와() 강 하구(河口)나가시마(長島) 잇코우잇키(一向一揆[각주:1])를 토벌했을 때는, 퇴성(退城)을 허용한 듯이 속여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일제 사격하고 성에 불을 질러 2만여 명의 남녀를 태워 죽였다. 에치젠(越前)의 잇코우잇키 정벌에서는, 그 시체들로 인하여 후츄우(府中)의 마을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부 불교도에 대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증오가 표출된 것이다[각주:2].

 반대로 기독교에는 관대하여 오히려 보호하였다.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가 발령한 선교사 추방령을 해제하였고, 쿄우토(京都)에 교회당을 세우는데 원조까지 하였다.

 

 노부나가에게도 익살스러운 인간적인 측면이 있었다.

 별명을 붙이는 것이 장기로, 히데요시에게는 [원숭이([각주:3])]라던가, [대머리생쥐(げネズミ[각주:4])]라고 붙였으며,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는 [대머리(キンカ)[각주:5]]라고 붙였다.

 

 따스한 인간성을 나타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히데요시의 마누라 네네(ねね)에게 보낸 것이다.

 […(전략)네네님 정도의 미인을 저 대머리생쥐 히데요시는 두 번 다시 얻지 못할 테니까, 네네님도 지금부터는 마님다운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질투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게…(후략)]

 히데요시가 여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네네가 노부나가에게 호소하자 그 답변으로 보낸 편지이다. 그 외에도 냉철한 무장의 이미지와는 상상할 수 없는 인간미 넘치는 일면이 있었다.

 스모우(相撲[각주:6])를 아주 좋아하여, 1578년에 아즈치(安土)성(城)에서 열린 스모우 대회에는 주변에서 300여명이 모였고, 이 중에서 23명의 우수 씨름꾼을 선발하여 승자에게는 부채 등의 상품을 내렸다.

 

 오다(織田) 가문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가문은 말류(末流)이다.

 오다 가문은 아시카가 쇼우군(足利 )을 보좌역인 시바(斯波) 가문의 오와리(尾張) 슈고다이(守護代[각주:7])였다. 이 오다 가문에 오와리 위쪽 4개군()이세노카미(伊勢守) 가문과 아래쪽 4개군()을 지배하는 야마토노카미(大和守) 가문이 있어, 노부나가가 태어난 가문은 이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섬기는 세 행정관(三奉行[각주:8]) 중의 하나였다. 아시카가 쇼우군에서 보면 부하(斯波)의 부하(오다 종가(領家))의 부하(織田 大和守)의 부하(織田 正忠)에 지나지 않는다[각주:9].

 그러나 당시의 하극상 풍조를 타고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信秀) 시대에는 오와리(尾張) No.1 실력자로 올라선다.

 

 부친이 죽었을 때, 노부나가는 아직 16살로 세간에서 [최강 찌질이(うつけ)]로 불리며 얼간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라 그 풍모를 설명하자면, 반바지(半袴)에 나시(なしの浴衣)이며 헤어스타일은 챠센마게(茶筅), 머리를 묶는 끈(元結)은 빨간색이나 짙은 녹색 등의 강렬한 색을 좋아하였으며, 큰 칼(太刀)의 칼집은 붉은색. 무구(武具)도 새빨간 색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였고 걸어 다니며 밤, , 오이, 떡 등을 칠칠 맞게 흘려가면서 먹었다. 거기에 남의 어깨에 매달려 다니거나 하여 행동거지에 예절이 없는 것을 말하면 끝이 없었다.

 

 부친 노부히데의 장례식 날도 제대로 차려 입지 않고 나타나, 부처님 상 앞에 나아가서는 갑자기 향을 움켜쥐고는 부친의 위패에 집어 던지고서는 돌아갔다고 한다. 이 폭거에 교육을 담당한(傅役)인 노신 히라테 마사히데(平手 政秀)는 노부나가의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배를 가르고 죽었다.

 

 오케하자마()의 일전이 그런 노부나가의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한 첫 번째 도약대였다.

 1560 5 19일 심야. 노부나가는 갑자기 나각(法螺貝)을 울리게 하여 병사를 동원하면서, 손수 코우와카마이(幸若舞[각주:10]) [아츠모리(敦盛)]를 춤추었다.

 [인간 오십년, 하천(下天)과 비교해 보니, 몽환(夢幻)과 같도다(人間五十年、下天のをくらぶれば、夢幻のごとくなり).]

 이 부분을 세번 춤추었다 한다. 춤이 끝나자 뜨뜻한 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뒤 질풍과 같이 달려 나갔다고 한다.

 

 적은 스루가(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대군단을 이끄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이다. 오와리 절반만 소유한 오다 씨()같은 것은 가볍게 물리치고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였다. 오다 가문의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였다. 이마가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습 전법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오다 군()덴가쿠하자마(楽狭)에서 쉬고 있는 이마가와 군의 허를 찔러 습격, 결국 대장 요시모토의 수급을 베고 승리의 함성을 울려 퍼지게 한 것이었다(누누이 말씀 드렸듯이 저는 아케치 님의 “[說] 오케하자마(桶狹間) 진상정면공격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 역자 주)

 

 1575 5나가시노(長篠)의 전투는 일본 전투 사상 획기적인 전투였다. 근대 전법을 구사한 오다 군이, 그때까지 센고쿠(戦国) 최강을 자랑하던 타케다(武田) 군단을 괴멸시킨 것이다. 노부나가는 철포 3000정을 끊임없이 타케다의 병마(兵馬)에 집중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각주:11].

 

 아즈치(安土) 7층루의 장대한 성을 쌍은 것은 1579년이다. 아즈치는 쿄우토(京都)와 가깝고 비와코(琵琶湖) 호수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호쿠리쿠(北陸)와 통하며, 남쪽으로는 이세(伊勢)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7층의 텐슈카쿠(天守閣)의 내부는, 카노우(狩野)파의 벽화로 장식되었고, 최상층은 금박(金箔)을 입혔다고 한다.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성안의 어느 것이나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건물이라고 절찬하였다.

 

 희대의 영웅 노부나가는 1582 6 2. 갑자기 일어난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혼노우(本能)()에서 쓰러졌다.

 이날, 모리 란마루(森 蘭丸)의 보고로 모반의 군세가 아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노부나가는 단 한마디 [是非に及ばず 할 수 없군, 어쩔 수 없군한국어로 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 역자 주]라고 말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노부나가는 손수 활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깨닫자 건물 깊숙이 들어가 문을 닫고 자인(自刃)했다.

 

 그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적에게 자신의 시체를 보여지는 것에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1534년 노부히데(信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죽은 후 오와리 절반을 통일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에서 물리치고 미카와(三河)의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맹을 맺어 오와리를 통일. 1564미노(美濃)를 공략. 1568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옹립하여 쿄우토(京都)에 입경한다.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 등 여러 가문을 물리치고 혼간지(本願寺)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를 항복시켜 천하 제일의 실력자가 되지만, 패업(覇業)을 목전에 두고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모반으로 인하여, 쿄우토(京都) 혼노우(本能)() 에서 자인했다. 49.
  1. 혼간지(本願寺)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농민 폭동군. [본문으로]
  2. 증오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과격한 행동은 에도 시대의 혼간지(本願寺) 측이 왜곡했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원숭이(일본 발음으론 사루(さる))라고 붙게 된 것은, 1591년 쿄우토(京都)에 낙서가 되어있길.. “말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무 아래 있는 어느 칸파쿠를 보더라도(末世とは別にはあらじ、木下にさる関白をみるにつけても)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무 아래’는 키노시타(木下)로 히데요시가 하시바(羽柴) 성을 쓰기 전의 성이다. [본문으로]
  4.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칭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정말로 대머리였다기 보다는, 미츠(光)의 아랫부분과 히데(秀)의 윗부분이 결합되어 ‘대머리 독(禿)’이 되었고, 그와 같은 뜻인 ‘キンカ頭’로 부르지 않았나 싶다. [본문으로]
  6. 일본 씨름 [본문으로]
  7. 여러 지역을 가진 슈고 혹은 바쿠후(幕府)의 중요 직책을 가지고 있을 경우 그 지역에 가지 않은 채 가신 혹은 친척에게 대신 그 지역을 통치시켰고 그런 사람을 슈고다이(守護代)라 하였다. [본문으로]
  8. 오다 이나바노카미(織田 因幡守), 오다 토우자에몬(藤左衛門), 오다 단죠우노죠우(織田 弾正忠)의 세 가문. [본문으로]
  9. 이세노카미 가문(伊勢守)이 오다 가문의 종가라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10. 단한 춤을 추며, 옛 무장들의 영웅담을 읊는 것. [본문으로]
  11. 3000의 철포와 3단 철포는 없었다는 것이 대세이다. 자세한 사항은 검색해 보시길.. [본문으로]

 '살무사 도우산'이라는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사이토우 도우산의 평판은 굉장히 안 좋다.

 타이라노 마사카도[門][각주:1],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 久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 등과 함께 악인(惡人)의 전형적인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같은 시대에도 도우산을 비난하는 아래와 같은 낙서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인을 베고, 사위를 죽이는 것은 몸의 파멸. 옛날엔 오사다, 지금은 야마시로

主を斬り、聟を殺すは身のおわり、昔はおさだ、いまはやましろ

 미노오와리(()のおわり)미노[美濃]오와리[尾張]를 말하는 것으로, 주군 토키 요리요시[土岐 芸]가 도우산에게 추방 당하여 미노에서 오와리로 쫓겨난 것을 말하며, ‘오사다 [헤이지의 (平治)]에서 주군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 義朝][각주:2]를 죽인 오사다 타다무네[長田 忠致]를 지칭하는 것이다. ‘야마시로는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도우산[斎藤 山城守 道三]을 말한다. 어느 쪽이건 주군을 배신한 극악인(極惡人)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했던 것이다.


 잔혹한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

 [도우산은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거열형(車裂刑)에 처했으며, 혹은 솥에 죄인을 넣어 그의 부인이나 부모형제에게 불을 피우게 하여 사람들 앞에서 삶아 죽이게 하였다.]


 적수공권(赤手空拳). 일개의 기름 상인에서 미노[美濃] 일국(一国)의 태수로 출세했을 만큼 젊었을 때부터 두뇌의 명석함은 발군이었다.

 쿄우토[京都]의 묘우카쿠 사[妙覚寺]에서 수행할 때는 '배움은 부처의 가르침에 통달하였으며, 변설(辯舌)부루나(富樓那 석가의 제자로 변설가)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며, 내외(內外)를 잘 깨닫고 있으니 훗날 굉장한 명승(名僧)이 될 것이다'고 촉망 받았다. 묘우가쿠 사()에서는 호우렌보우[法蓮坊]라는 이름이었다. 이 시절에 알게 된 난요우보우[南陽坊]가 훗날 도우산이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난요우보우는 미노의 호족 나가이 토시타카[長井 利隆]의 동생으로, 후에 미노[美濃]명찰(名刹) 죠우자이 사[常在寺]의 주지(住持)가 되어 '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이라 불리게 된다.


 도우산의 전반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쿄우토[京都]의 교외에 있는 니시노오카[西]의 낭인 마츠나미 모토무네[松波 基宗]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마츠나미 가문은 대대로 '북면의 무사(北面武士 상황(上皇)의 거처를 지키는 무사)' 집안이었다고 한다.

 호우렌보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속하여 기름 상인이 되었다. 나라야[奈良屋]데릴사위로 들어가, 야마자키야 쇼우고로우[山崎屋 庄五郎]라는 이름을 칭었다.


 미노[美濃]의 성 밑 마을(城下町)에서 기름 행상을 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손님을 모으기 위해서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다. 기름을 에 담아 손님의 항아리에 옮기는데 깔때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일문전(一文銭[각주:3])의 구멍을 통해서 흘려 넣은 것이었다. 한 방울도 구멍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멍 주위에 한 방울이라도 묻는다면 공짜로 주겠다고 하였기에 그에게는 손님들이 잔뜩 모여들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 퍼포먼스를 미노[美濃]의 호족 나가이 토우자에몬[長井 藤左衛門]의 가신 중에 한 명이 보게되었다.

 굉장한 기술이군. 저 묘기를 무예로 살린다면 필시 뛰어난 무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이 나가이 가문의 무사가 한 말이 도우산을 무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도우산은 기름 상인을 관두고 창() 수련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3간반(間半=약 6미터40센티[각주:4])이라는 굉장히 긴 창(=나가야리(長槍))을 만들어, 그 창 끝에 바늘을 달아서는 대나무 가지에 매단 일문전의 구멍을 뚫는 연습을 하였다. 필사의 수련 끝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고 이어서 백발백중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나가야리[長槍]는 센고쿠[戦国]전투에는 필수인 것이 되었는데 도우산이 그것의 발명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철포()의 실력도 또한 굉장했다고 한다[각주:5].
 이리하여 무예가 숙달된 도우산은 예전 묘우가쿠 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난요우보우=니치운 상인[日運上人]의 연줄로 나가이 토우자에몬 나가히로[長井 藤左衛門 長弘]를 섬기며, 마츠나미 쇼우고로우[松波 庄五
郎]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우산이 가진 다른 매력적인 면으로 나가이 씨()에게 접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말들도 있다. 기름 상인이라고 하여도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던 것이 아니라야마자키 하치만 궁[山崎八幡宮]전매권(專賣權)을 가진 기름 조합(油座)에 속해있던 상인으로 대단히 큰 규모의 가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기름 조합의 상인은 관소(關所[각주:6])를 통과할 때도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상인이었던 것이다.


 곧이어 도우산은 미노 슈고[美濃守護] 토키 모리요리[土岐 盛頼][각주:7]의 동생인 요리요시[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그의 야망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는 요리요시를 꼬드겨 자신을 멀리하고 있던 당주인 모리요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당주가 된 요리요시는 도우산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애첩 미요시노[深芳野]까지 자신의 부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독선적 행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노신(老臣)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특히 도우산을 천거했던 나가이 토우자에몬이 가장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그러자 도우산은 은혜를 입었던 이 토우자에몬을 모살(謀殺)해 버린다. 이미 나가이 신쿠로우 토시마사[長井 新九朗 利政]로 이름을 바꾸고 있던 도우산은 이렇게 나가이 가문을 완전히 빼앗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나가이 일족의 반발을 사 공격을 받아, 주군 요리요시 밑으로 도망쳤으나 오우미[近江]의 슈고다이묘우[守護大名] 사사키 씨[木氏][각주:8]의 중재로 겨우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후 도우산은 또다시 성()을 바꾸어 사이토우 성[姓][각주:9]을 칭하였다. 쇠약해져 있던 사이토우 씨()의 양자로 들어가 사이토우 야마시로노카미 히데타츠[藤 山城守 秀竜]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착실히 그는 출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망은 끝없이 커져만 갔다. 다음 목표는 미노[美濃]의 주인 자리였다.


 그의 독선적인 행동이 또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노의 호족들이 반 히데타츠 연맹군을 조직하여 공격해 왔다. 그러나 운 좋게 오우미[近江]의 사사키 씨(), 에치젠[越前] 아사쿠라 씨[朝倉氏]의 중재로, 큰일이 터지기 전에 화해하였다. 이때 히데타츠는 그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머리를 밀고 불문에 들어가 이때부터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우산의 덫이었다.

 15425. 갑자기 도우산은 요리요시의 거성 오오가 성[大桑城]을 습격하여 주군을 추방하여 명실공히 미노[美濃]의 태수(太守)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도우산은 곧이어 이웃나라 오와리[尾張]의 오다 노부히데[織田 信秀]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딸인 노히메[]를 노부히데의 적자 노부나가와 결혼시켜 평화협정을 맺었다.

 당시 얼간이라는 말을 들으며 무시를 받고 있던 노부나가를 한번 보자마자,

 안타깝게도 이 얼간이 집 앞에 내 자식들은 말을 메게 되겠구나[각주:10]

 라고 탄식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이 즈음의 일인데, 도우산은 멍청함을 가장한 노부나가의 얼굴에서 일찍부터 후년 천하의 패자(覇者)가 가진 재능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역시 예언은 적중하여, 도우산의 손자 타츠오키[興] 때가 되어 사이토우 가문은 노부나가에게 멸문 당해 버린다[각주:11]

 

 도우산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는 주군 요리요시의 복수를 받게 된다. 그의 부인이 된 미요시노는 도우산에게 왔을 때 이미 요리요시의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도우산의 적자 요시타츠[]였다. 이 설의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도우산의 애정은 이 장자에게는 박했고, 둘째인 마고시로우[孫四郎], 키헤이지[喜平次]에게만 쏠려 있었다.

 

 도우산은 요시타츠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킨카잔 성[金華山城][각주:12]에 있게 하고, 자신은 나가라가와[長良川] 강 건너편에 있는 사기야마 성[鷺山城]에 은거하였다.

 요시타츠는 한센병을 앓고 있었고 65(195cm)이라는 큰 키였으며 성격도 굉장히 과격했다고 한다.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아 날이 갈수록 험악해 져 갔다. 도우산은 요시타츠를 없애고 둘째인 마고시로우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은밀히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요시타츠가 선수를 쳤다. 꾀병을 부려 숨이 있는 동안 유언을 하고 싶다고 하여 두 동생을 성에 불러들여 죽인 것이다.

 도우산은 격노하였다. 두 아들을 단번에 잃은 실망도 컸다. 이리하여 아비와 아들이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 4.

 결국 둘은 전쟁을 벌인다. 도우산은 63세가 되어 있었다. 젊은 요시타츠의 적수는 되지 못하였다. 패하여 키다이 사[城田寺]로 도망치던 도중, 요시타츠의 가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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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츠의 아들 타츠오키가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이토우 가문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은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1567년이었다.

 

[사이토 도산(藤 道三)]
이름은 토시마사[利政], 후에 히데타츠[竜]. 말년에 불문에 들어가 도우산[道三]이라는 이름을 칭했다. 미노 슈고[守護] 토키 씨[土岐氏]의 가신이 되었고, 1542년 주군 요리요시를 추방하여 미노 슈고가 된다. 1556 4 20일 적자 요시타츠와 싸워 전사(戰死).

  1. 939년에 칸토우(関東)에서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텐노우(新皇)]를 자임하였으나 진압당하였다. [일본 3대 원령(怨靈)] 중의 하나. [본문으로]
  2. 카마쿠라 바쿠후[鎌倉 幕府]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 頼朝]의 부친. [본문으로]
  3. 우리 나라의 엽전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본문으로]
  4. 아시가루(足軽)가 아닌 일반 무사의 창은 1간반(약 2.7~3미터)~2간(약 3.6~4미터)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일본에 철포가 전래된 것은 1543년이라고 하니 이 당시는 아직 철포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 말년(도우산 1556년 몰) 즈음의 이야기 일 것이다. [본문으로]
  6. 당시는 각 지방의 실력자(영주, 절, 신사 등)들이 재정 확충을 위해서 자신의 영지(領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곳이 많았다. [본문으로]
  7. 요리타케(頼武), 마사요리(政頼)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8. 보통 롯카쿠[六角]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9. 사이토우 씨(氏)는 대대로 미노[美濃]의 슈고다이[守護代]였다. [본문으로]
  10. 얼간이 집 ‘가서’ 인사를 올리거나 지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의미. [본문으로]
  11. 멸문은 당했지만, 도우산의 막내 아들인 사이토우 토시하루[利治]는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고 후에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信忠] 부속 가신 되어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때, 노부타다와 함께 싸우다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죽게 된다. [본문으로]
  12. 이 시대에는 이리 불렸다 한다. 후에 이나바야마[稲葉山]를 거쳐 노부나가 시대에 기후[岐阜]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또한 이 성이 있는 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
1616년 4월 17일 병사(病死) 75세.

1542년 ~ 1616년.
미카와
[三河] 오카자키[岡崎] 성주(城主)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 広忠]의 아들.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각주:1]를 기회로 이마가와 씨[今川氏]에게 독립.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 오대로(五大老) 필두(筆頭)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승리하여 에도 막부[江戸 幕府]를 열었으며, 토요토미 씨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손 안에 넣었다.




취소된 은거소(隱居所)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75세라는 장수(長壽)를 누리며, 생애(生涯)의 꿈이었던 천하 제패를 확립한 후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주위 사람들의 눈에는 미련 따윈 없는 대왕생(大往生)으로 보였을 것이다. 단지 직접적인 사인(死因)이 식중독에 의한 쇠약이었던 것이 본인에게는 조금 아쉬웠을 지도 모른다.

 1615년 4월.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소원이던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자, 순푸[駿府]로 되돌아와 본격적인 은거 생활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한다. 어느새 74살이 되어 있었다. 그 당시도 이미 쇼우군[将軍] 자리는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순푸에서 은거를 하고 있었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오고쇼(大御所)로서 쇼우군[将軍]보다 더 강한 권력을 쥐고 정치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가장 신경 쓰이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을 멸망시켜 이제는 더 이상 표면적으로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 대항하는 다이묘우[大名]도 없게 되자, 평범한 노인의 심정에 가까워졌던 듯 하다. 그래서 순푸 성(城)을 10째 아들인 요리노부[頼宣][각주:2]에게 물려주고 이즈[伊豆] 미시마[三島]의 근교인 이즈미가시라[泉頭]에 은거할 곳(隱居所)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마음의 변화가 생겼는지 건설은 중단되었고 결국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은거할 수 없던 은거

 다도(茶道)나 매사냥, 바둑 등 취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무엇보다 즐겼던 취미는 역시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면서 그때그때 자신의 정치이념에 따라 수정을 한다거나 보강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죽은 뒤에도 히데타다 이하 토쿠가와 가문의 후계자들이 대대로 정권을 유지해 갈 수 있게 해 두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것이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완승한 뒤 다이묘우 통제를 위해서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각주:3]), 텐노우[天皇]나 귀족[公家]을 통제하는 [궁중 및 쿠게 에 대한 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한 [오산과 십찰, 제산에 대한 법도(五山十刹諸山法度[각주:4]] 등의 반포되었다. 이런 법들은 쇼우군 히데타다의 이름으로 공포(公布)되기는 하였지만, 이는 이에야스의 지시로 그의 측근들이 만든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평범한 노인과 같은 은거 같은 것은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진심으로 속세에서 벗어날 생각 같은 것이 없었을 지도 모르며, 있다고 하여도 예전부터 바래왔던 정치이념의 실현과 토쿠가와 정권의 토대(土臺)를 굳건히 하기 위해선 유유자적한 은거 생활은 즐길 수 없었다. 이즈[伊豆]의 시골에서 은거하려다 관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에야스의 추종자들 중에는 정치나 군사 전문가들 외에도 취미나 교양이 풍부한 문화인들이나 상인들이 있어 그들과의 교류를 차마 끊을 수 없었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즈[伊豆] 은거 대신 측근 중의 하나인 텐카이[天海]에게 권고 받아 염불을 매일 외는 것 만은 실행하였다.

도미 튀김이 목숨을 앗아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추종자들과의 교류가 남은 생명을 줄였다고 말할 수 있다.

 1616년 1월 21일. 그는 순푸[駿府] 근교의 타나카[田中]에 매사냥을 하러 간 날 밤. 격심한 복통을 일으켰다. 식중독이었던 듯하다. 타나카까지 문안 인사를 하러 온 어용상인(御用商人) 챠야 시로우지로우[茶屋 四郎次郎]의 추천으로 도미 튀김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 챠야 시로우지로우는 토쿠가와 가문의 어용상인으로써 이에야스와 깊은 친분을 나누었던 시로우지로우(四郎次郎)의 아들 쪽이다[각주:5]. 본명은 마타시로우[又四郎]였지만 부친이 죽은 뒤 이름을 계승하였다.

 그는 요즘 쿄우토[京都] 부근에는 도미를 비자나무의 기름으로 튀긴 후 마늘을 갈아서 곁들여 먹는 것이 유행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곧바로 도미를 가져오게 하여 유행하는 것과 같이 튀겨 먹었다. 굉장히 맛있었는지 참도미, 옥돔을 다섯 마리나 먹었다고 한다. 이래서는 건장한 사람이라도 위에 무리가 간다. 하물며 체력이 약한 노인에게는 버틸 수 있는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 이후, 25일에 순푸[駿府]로 돌아온 이에야스의 병상(病狀)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확실히 나쁜 쪽으로 진행되었다. 에도에 있던 히데타다도 2월 2일에 순푸[駿府]로 달려와 병문안을 하였다.

 이에야스는 손수 약을 만드는 취미가 있어 이 때도 [만병단(万病丹)], [은액환(銀掖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던 자신이 제조한 약 이외에는 복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태는 더욱더 악화되어 간 듯하다. 결국 그도 죽을 때가 된 것을 깨달아, 4월이 되자 측근인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나 텐카이[天海], 곤치인 수우덴[金地院 崇伝]들을 불러 유언을 전했다.

 유체를 순푸[駿府] 가까이에 있는 쿠노우산(久能山) 산에 묻어줄 것, 장례식은 에도의 조우죠우 사[増上寺]에서 행할 것, 위패(位牌)는 미카와(三河)의 다이쥬 사[大樹寺][각주:6]()에 둘 것, 일주기(一週忌) 후에는 닛코우[日光]에 작은 암자를 세우면 거기에서 칸토우[関東]의 수호신이 되겠다는 등이었다.

 그리고 4월 17일 오전 10시 즈음. 75세의 나이로 순푸 성[駿府城]에서 파란 많던 생애의 막을 내렸다. 유체는 그날 밤에 이슬비를 맞으며 쿠노우 산(山)으로 보내졌다.

  1. 1560년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오와리[尾張]에 침공해 온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를 오케하자마란 곳에서 물리쳐 이긴 전투.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사망. [본문으로]
  2. 후에 쇼우군 가문[将軍家]에 후사가 끊겼을 시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토쿠가와 어삼가(徳川御三家)의 하나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紀州徳川家]의 시조. [본문으로]
  3. 한 다이묘우[大名]의 영지(領地) 내에는 성을 하나만 세울 수 있게 하는 것. 이에 따라 각 다이묘우는 방어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단 몇몇(ex. 다테 센다이 번[伊達仙台藩] 소속인 카타쿠라 가문[片倉家] 등)의 예외는 있었다. [본문으로]
  4. 오산, 십찰, 제산 등은 각각 다섯 개의 거대 사찰과 10개의 큰 사찰 및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각 지역의 절 등 사찰의 격식을 말한다. [본문으로]
  5. 2대째인 형이 젊은 나이에 죽어서 가문을 상속한 동생이다. 또한 챠야 가문[茶屋家]의 당주는 ‘시로우지로우[四郎次郎]’란 이름을 계승했다. [본문으로]
  6. 쇼우군[将軍]들의 위패는 대대로 이곳에 두는데, 위패는 관에 들어가기 직전의 키와 같다고 한다. 위패에 따르면 이에야스가 키는 159cm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