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
오히로이(お拾い=히데요리)는 세 살이 되었다.
이 해는 1595년이다. 그 7월 15일에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모반을 꾀했다는 석연찮은 혐의로 자살을 강요 받았고 그의 처첩이나 자식들은 카모(鴨) 강변에서 끌려 나와 천민들의 손에 살해당하여 이를 듣고 본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창백해졌다.
- 믿을 수가 없다.
고 히데요시(秀吉)의 과거를 아는 노인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과거 히데요시는 그렇게나 많이 전쟁터에 나갔으면서도 아군을 쓸데없이 사지로 몰아넣는 일 없이, 적을 쓸데없이 죽이는 일 없이 될 수 있는 한 적을 항복시키고 항복시킨 후에는 그에 걸맞은 봉록과 지위, 체면을 유지시켜주었다. 이런 불살주의(不殺主義)는 책략이라기 보다는 성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난세를 진정시키는 데는 크게 힘을 발휘하여 적들도 또한 안심하고 히데요시에게 몸을 맡기는 자들이 많았다. 히데요시의 그런 성격이 - 오히로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식으로 완전히 변했다. 양자 히데츠구와 그 가족들을 마치 풀이라도 뽑아 없애듯이 멸절시키는 인물을 도저히 이전의 히데요시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육체도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히데츠구 사건보다 조금 전인 이 해의 4월 15일 밤에 히데요시는 실금(失禁)하여 이불에 엄청난 양의 오줌을 싸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고 일어나서야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쇠약해진 것에 충격을 먹었다. 이쯤부터 히데요시는 피부가 검어지고 거칠어졌으며 활력을 잃고 식욕이 없어져 자주 설사를 하였다.
- 배에 병이 있으시다.
라는 소문과 이 실금은 곧바로 성안에 퍼졌다. 후시미(伏見) 성 아래에 저택을 가진 제후들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야스(家康)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 히데요시는 얼마 남지 않았군.
이에야스는 남몰래 자신의 앞길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야스와는 다른 반응을 가진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 오우미(近江) 파벌의 관리들 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들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사실만큼이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이며 겸해서 히데요시의 비서관으로 더해서 동시에 요도도노(淀殿)와 히데요리(秀頼)를 위해서는 장래의 보좌관이 될 만한 위치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그들 측근 권력집단은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신하여 칸파쿠 히데츠구와 그 측근들 –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 들 –이 정권의 주도권을 쥘 것이다.
"그 때문에 칸파쿠(히데츠구)님은 살해당한 것이다"
라고 이에야스조차 칸파쿠 히데츠구 사건은 오우미 파벌의 중추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책모, 참언에 의한 것이라 믿었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도 믿었다. 세간도 믿었다. 특히 히데츠구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히데츠구와 친했던 다이묘우(大名)들인데 그런 다이묘우 중 대표격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도 그리 믿었다. 타다오키는 히데츠구 모반이라는 의혹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같은 벌을 받을 뻔하였다. 이때의 미츠나리에 대한 원한 – 실제로는 히데요시와 그 정권에 대한 원한이 히데요시 사후 타다오키를 이에야스 쪽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츠나리에게 있어 억울한 누명일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히데츠구님은 히데요리님의 장래를 위해서 살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히데요시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에 히데요시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것만을 온 종일 생각하였다. 자신의 노쇠를 깨닫고 겸해서 히데요리의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이 겹쳐졌을 때, 이 천성적으로 인정미 넘치는 인물이 – 더구나 이성(理性)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져버린 심신미약자가 – 빠지게 되는 함정은 하나밖에 없었다. 히데츠구를 죽여 후환을 끊는 일일 것이다.
이것과는 다른 일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후에 일어났다. 히데요시가 죽는 해인 1598년. 히데요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잠잤다가는 깨고 또 자는 노쇠인(老衰人)의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 즈음 히데요리는 자신의 늙은 아비와 같이 있지 않았고 어쩌다 쿄우(京)에서 히데요시가 옷 갈아 있을 때 이용하는 저택에 있었다. 히데요리는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불과 여섯 살이면서도 그의 늙은 아비의 희망과 주청에 의해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해 있었다. 여섯 살의 곤츄우나곤은 긴 조정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상이 수많은 시녀들에 둘러싸여서는 그 시녀들을 놀이상대로 매일 저택을 떠들썩하게 하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발육은 보통 이상이었다.
아이에게도 당연히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어 시녀 중 네 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키츠(おきつ), 오카메(おかめ), 오야스(おやす), 오이시(おいし)의 네 명으로 히데요리는 그녀들을 어려워하였고 시녀들도 히데요리의 난폭함에 애를 먹었다. 이것이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곧바로 붓을 들어 히데요리에게 편지(아직 글자를 읽지는 못하지만)를 썼다.
츄우나곤 님께.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네.
돼먹지 못한 것들이니 그 네 명을 새끼줄로 한꺼번에 묶어 이 아빠가 쿄우(京)에 갈 때까지 어딘 가에 던져놓고 있으렴. 내가 가서는 전부 때려 죽여주마.
용서할 수 없도다.
결국 죽이지 않았다. 추방시켰다. 유모인 우쿄우노다유우(右京太夫)에게도 엄중히 주의를 주며 [츄우나곤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안 죽을 정도로만 때려놓으면 좋아질 것이다]고 써서 보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에 있는 무사들 중 반이 바다를 건너 조선의 각지에서 명나라의 구원군과 조우하여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그런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고, 쿄우(京)-오오사카(大坂)의 사람들은 쌀값이 폭등하여 엄청난 생활난에 빠져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관심은 이미 히데요리밖에 없었다.
"저 아이의 존재가 천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고 당시 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그늘에서 소근거리며 히데요시와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이묘우(大名)에게는 가령 초빙을 받더라도 가지 않았다. 참고로 세이카는 후시미 성(伏見城) 성 아래에 살고 있던 전시포로인 조선인 학자('강항(姜沆)'을 말한다. – 역자 주)와 필담하며, "지금 천하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이 토요토미 정권을 저주하고 있소이다. 만약 명나라의 군사와 조선의 군사가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가는 곳마다 관용에 넘치는 선정을 펼치며 진군해 간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뻐하며 당신네 군사들을 맞이하고 다이묘우(大名)들도 당신들에게 달려가 북쪽 오우슈우(奥州) 시라카와노세키(白河ノ関 1)에 갈 때까지 파죽지세처럼 곧바로 평정되어 버릴 것이오" 2라고까지 말하였다. 명나라빠인 세이카다운 과장이 있다고는 하여도 이 정치학자가 보기에 토요토미 가문에는 더 이상 이 시세와 국정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로지 어린 후계자와 그것을 낳은 요도도노(淀殿)의 이익 지키기에만 정치가 쏠려 있는 상태이기에 모든 정치악(政治惡)은 거기서부터 나오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정치악을 조장하고 정책화하고 있는 것은 세이카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 오우미(近江) 계열의 문벌관료들이며 그들이 히데요시에게 받치는 헌책은 전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라는 것으로만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히데요리의 장래를 위해서라며 일부 다이묘우의 봉지(封地)를 바꾸거나 혹은 바꾸려고 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춘추필법을 따르자면 히데요리는 이제 여섯 살의 나이로 이 포악한 정치의 책임자인 것이다"
라고 까지 세이카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이카에겐 요도도노의 출현과 그녀가 낳은 적자의 출산에 따른 토요토미 가문의 변모야말로 이 정권과 천하의 재앙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 혼자만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6월 16일은 한 여름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카죠우(嘉祥 –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부터 시작된 명절.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음력 6월 16일에 16개의 떡이나 과자를 신에게 바친 다음에 먹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화폐로 통용되던 가정통보(嘉定通寶)의 약칭인 가통(嘉通)의 일본식 발음(かつう)이 '이긴다'는 뜻의 동사 '勝つ(かつ)'와 비슷했기에 무가에서는 특히 중히 여겼다. – 역자 주)의 날이었다. 이 1598년의 이날, 히데요시는 병상에 있었지만 등성(登城)한 다이묘우(大名)들을 인견(引見)하기 위해서 주치의의 도움을 받으며 일어나 인견의 자리에 나갔다. 일부러 쿄우(京)에서 불러들인 히데요리를 자신 옆에 앉혀두고 오늘은 좋은 날이라며 직접 과자가 담긴 그릇을 들고 다이묘우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며,
"아아~ 이렇게 슬플 수가…. 적어도 이 히데요리가 15살이 내가 살아 오늘처럼 여러 다이묘우들을 알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내 생명은 꺼져가는구나. 그것을 어찌 할 수도 없어"
하고 도중에 울먹였고 결국에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자리를 가득 메운 다이묘우들은 목을 숙이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쳐들 생각도 안 했다. 그들의 가슴 속은 제각기 복잡했을 것이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토요토미 가문은 물론 그 사후에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정변 속에서 자기 가문을 어떻게 지켜가야 할 지가 훨씬 절실했다.
이 해의 8월 18일.
히데요시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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