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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토미노히데요리'에 해당되는 글 27건

  1. 2009.02.02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7- (6)
  2. 2009.01.14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6-
  3. 2009.01.02 요도도노(淀殿), 그 아들 -5-
  4. 2008.09.29 하치죠우노미야[八条宮] -7- (7)
  5. 2008.07.13 유우키 히데야스[結城 秀康] -4- (4)

七.

 오히로이(お拾い=히데요리)는 세 살이 되었다.

 이 해는 1595년이다. 그 7월 15일에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던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모반을 꾀했다는 석연찮은 혐의로 자살을 강요 받았고 그의 처첩이나 자식들은 카모() 강변에서 끌려 나와 천민들의 손에 살해당하여 이를 듣고 본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창백해졌다.
 - 믿을 수가 없다.
 고 히데요시(
秀吉)의 과거를 아는 노인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다. 과거 히데요시는 그렇게나 많이 전쟁터에 나갔으면서도 아군을 쓸데없이 사지로 몰아넣는 일 없이, 적을 쓸데없이 죽이는 일 없이 될 수 있는 한 적을 항복시키고 항복시킨 후에는 그에 걸맞은 봉록과 지위, 체면을 유지시켜주었다. 이런 불살주의(不殺主義)는 책략이라기 보다는 성격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난세를 진정시키는 데는 크게 힘을 발휘하여 적들도 또한 안심하고 히데요시에게 몸을 맡기는 자들이 많았다. 히데요시의 그런 성격이 - 오히로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식으로 완전히 변했다. 양자 히데츠구와 그 가족들을 마치 풀이라도 뽑아 없애듯이 멸절시키는 인물을 도저히 이전의 히데요시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육체도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히데츠구 사건보다 조금 전인 이 해의 4월 15일 밤에 히데요시는 실금(失禁)하여 이불에 엄청난 양의 오줌을 싸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고 일어나서야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쇠약해진 것에 충격을 먹었다. 이쯤부터 히데요시는 피부가 검어지고 거칠어졌으며 활력을 잃고 식욕이 없어져 자주 설사를 하였다.
 - 배에 병이 있으시다.
 라는 소문과 이 실금은 곧바로 성안에 퍼졌다. 후시미(伏見) 성 아래에 저택을 가진 제후들도 그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야스(
家康)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 히데요시는 얼마 남지 않았군.
이에야스는 남몰래 자신의 앞길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야스와는 다른 반응을 가진 사람들은 토요토미 가문 오우미(近江) 파벌의 관리들 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들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사실만큼이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토요토미 가문의 집정관이며 겸해서 히데요시의 비서관으로 더해서 동시에 요도도노(淀殿)와 히데요리(秀頼)를 위해서는 장래의 보좌관이 될 만한 위치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그들 측근 권력집단은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신하여 칸파쿠 히데츠구와 그 측근들 – 키무라 히타치노스케(木村 常陸介) 들 –이 정권의 주도권을 쥘 것이다.

 "그 때문에 칸파쿠(히데츠구)님은 살해당한 것이다"

 라고 이에야스조차 칸파쿠 히데츠구 사건은 오우미 파벌의 중추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책모, 참언에 의한 것이라 믿었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
政所)도 믿었다. 세간도 믿었다. 특히 히데츠구 사건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히데츠구와 친했던 다이묘우(大名)들인데 그런 다이묘우 중 대표격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도 그리 믿었다. 타다오키는 히데츠구 모반이라는 의혹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같은 벌을 받을 뻔하였다. 이때의 미츠나리에 대한 원한 – 실제로는 히데요시와 그 정권에 대한 원한이 히데요시 사후 타다오키를 이에야스 쪽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츠나리에게 있어 억울한 누명일 것이다. 그들은 어쩌면,

 "히데츠구님은 히데요리님의 장래를 위해서 살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히데요시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에 히데요시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것만을 온 종일 생각하였다. 자신의 노쇠를 깨닫고 겸해서 히데요리의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이 겹쳐졌을 때, 이 천성적으로 인정미 넘치는 인물이 – 더구나 이성(理性)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무너져버린 심신미약자가 – 빠지게 되는 함정은 하나밖에 없었다. 히데츠구를 죽여 후환을 끊는 일일 것이다.

 이것과는 다른 일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후에 일어났다. 히데요시가 죽는 해인 1598년. 히데요시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잠잤다가는 깨고 또 자는 노쇠인(老衰人)의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 즈음 히데요리는 자신의 늙은 아비와 같이 있지 않았고 어쩌다 쿄우(京)에서 히데요시가 옷 갈아 있을 때 이용하는 저택에 있었다. 히데요리는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불과 여섯 살이면서도 그의 늙은 아비의 희망과 주청에 의해 곤츄우나곤(
権中納言)으로 승진해 있었다. 여섯 살의 곤츄우나곤은 긴 조정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일상이 수많은 시녀들에 둘러싸여서는 그 시녀들을 놀이상대로 매일 저택을 떠들썩하게 하며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보통 아이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발육은 보통 이상이었다.
아이에게도 당연히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어 시녀 중 네 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키츠(おきつ), 오카메(おかめ), 오야스(おやす), 오이시(おいし)의 네 명으로 히데요리는 그녀들을 어려워하였고 시녀들도 히데요리의 난폭함에 애를 먹었다. 이것이 오오사카(大坂)에 있는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곧바로 붓을 들어 히데요리에게 편지(아직 글자를 읽지는 못하지만)를 썼다.

츄우나곤 님께.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네.
돼먹지 못한 것들이니 그 네 명을 새끼줄로 한꺼번에 묶어 이 아빠가 쿄우(京)에 갈 때까지 어딘 가에 던져놓고 있으렴. 내가 가서는 전부 때려 죽여주마.
용서할 수 없도다.

 결국 죽이지 않았다. 추방시켰다. 유모인 우쿄우노다유우(右京太夫)에게도 엄중히 주의를 주며 [츄우나곤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안 죽을 정도로만 때려놓으면 좋아질 것이다]고 써서 보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에 있는 무사들 중 반이 바다를 건너 조선의 각지에서 명나라의 구원군과 조우하여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그런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 도탄에 빠뜨리고 있었고, 쿄우(京)-오오사카(大坂)의 사람들은 쌀값이 폭등하여 엄청난 생활난에 빠져있었지만 히데요시의 관심은 이미 히데요리밖에 없었다.

 "저 아이의 존재가 천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고 당시 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 惺窩) 등은 그늘에서 소근거리며 히데요시와 그의 신임을 받고 있던 다이묘우(大名)에게는 가령 초빙을 받더라도 가지 않았다. 참고로 세이카는 후시미 성(伏見) 성 아래에 살고 있던 전시포로인 조선인 학자('강항(姜沆)'을 말한다. – 역자 주)와 필담하며, "지금 천하는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이 토요토미 정권을 저주하고 있소이다. 만약 명나라의 군사와 조선의 군사가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가는 곳마다 관용에 넘치는 선정을 펼치며 진군해 간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뻐하며 당신네 군사들을 맞이하고 다이묘우(大名)들도 당신들에게 달려가 북쪽 오우슈우() 시라카와노세키(白河[각주:1])에 갈 때까지 파죽지세처럼 곧바로 평정되어 버릴 것이오"[각주:2]라고까지 말하였다. 명나라빠인 세이카다운 과장이 있다고는 하여도 이 정치학자가 보기에 토요토미 가문에는 더 이상 이 시세와 국정을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오로지 어린 후계자와 그것을 낳은 요도도노(淀殿)의 이익 지키기에만 정치가 쏠려 있는 상태이기에 모든 정치악(政治惡)은 거기서부터 나오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 정치악을 조장하고 정책화하고 있는 것은 세이카가 보기에 히데요시의 측근인 이시다 미츠나리 등 오우미(近江) 계열의 문벌관료들이며 그들이 히데요시에게 받치는 헌책은 전부 [히데요리님을 위해서]라는 것으로만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히데요리의 장래를 위해서라며 일부 다이묘우의 봉지(封地)를 바꾸거나 혹은 바꾸려고 하여 여러 다이묘우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춘추필법을 따르자면 히데요리는 이제 여섯 살의 나이로 이 포악한 정치의 책임자인 것이다"

 라고 까지 세이카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이카에겐 요도도노의 출현과 그녀가 낳은 적자의 출산에 따른 토요토미 가문의 변모야말로 이 정권과 천하의 재앙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 혼자만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6월 16일은 한 여름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카죠우(嘉祥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부터 시작된 명절. 전염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음력 6월 16일에 16개의 떡이나 과자를 신에게 바친 다음에 먹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화폐로 통용되던 가정통보(嘉定通寶)의 약칭인 가통(嘉通)의 일본식 발음(かつう)이 '이긴다'는 뜻의 동사 'つ(かつ)'와 비슷했기에 무가에서는 특히 중히 여겼다. – 역자 주)의 날이었다. 이 1598년의 이날, 히데요시는 병상에 있었지만 등성(登城)한 다이묘우(大名)들을 인견()기 위해서 주치의의 도움을 받으며 일어나 인견의 자리에 나갔다. 일부러 쿄우()에서 불러들인 히데요리를 자신 옆에 앉혀두고 오늘은 좋은 날이라며 직접 과자가 담긴 그릇을 들고 다이묘우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며,

 "아아~ 이렇게 슬플 수가…. 적어도 이 히데요리가 15살이 내가 살아 오늘처럼 여러 다이묘우들을 알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내 생명은 꺼져가는구나. 그것을 어찌 할 수도 없어"

 하고 도중에 울먹였고 결국에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자리를 가득 메운 다이묘우들은 목을 숙이고 숨을 삼키며 고개를 쳐들 생각도 안 했다. 그들의 가슴 속은 제각기 복잡했을 것이다. 그들은 히데요시가 죽은 뒤의 토요토미 가문은 물론 그 사후에 일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는 정변 속에서 자기 가문을 어떻게 지켜가야 할 지가 훨씬 절실했다.

이 해의 8월 18일.
히데요시는 죽었다.

  1. 링크 된 구글맵을 보면 어째서 이런 어중간 한 곳을 거론하였는지 하고 이상히 여기겠지만, 7세기 일본 율령제가 실시된 당시 일본령 최북단인 오우슈우(후대의 오우슈우의 남반부만 있었고 작았다)의 세 관문(奥州三関) 중 하나이다. 그 의미가 이어져 그냥 일본 최북단을 표현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본문으로]
  2. 원문은 日本生民之憔悴. 未有甚於此時. 朝鮮若能共唐兵弔民伐罪. 先令降倭及舌人. 以倭諺揭榜知委. 以示救民水火之意. 師行所過.秋毫不犯. 則雖至白河關可也. -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중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본문으로]

六.

 즈질적이고 너저분한 서술을 조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면 바로 그 점이 - 요도도노(淀殿)와의 이불 속에서의 일이 – 그 후의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豊臣白) 정권의 질을 바꾸어가기 때문이다. 히데요시(秀吉)는 운(運)의 신자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강렬한 합리주의와 왕성한 계산력을 동시에 가진 인물로, 운의 신자이면서 반대로 운을 믿지 않았고 만사를 마지막까지 계산하였다. 하지만 계산의 마지막 바로 전 즈음에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천운(天運)을 믿었다.
- 나는 운 좋은 사람이다.
 라는 자기신앙(自己信仰)을 히데요시는 가졌으며, 사실 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시기인 전반생은 호운(好運)에서 호운으로 이어졌다. 노부나가(信長)에게 영향 받은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만큼 명쾌한 무신론자이지는 않았지만 신과 부처를 인간생활의 장식물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신앙했다. 자기자신 중에서도 자신에게 붙어있는 천운을 믿었다.

 그 밝고 긍정정인 성격과 관련이 있는지 그의 여성취향은 살집이 두껍고 생명력이 뚜렷하며 투명한 수액(水滴)을 끊임없이 흘리는 듯한 여성을 좋아했다.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네네(寧)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이만큼이나 쌕을 좋아하는 남자가 마지막까지 네네를 계속 사랑하였던 것은 네네의 외모가 히데요시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취향이라기 보다 더욱 심오한 히데요시가 가진 자기신앙에 걸맞았기 때문에 틀림이 없었다.
- 네네는 내 행운의 여신이다.
 라고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았을까? 네네를 얻으면서부터 히데요시는 운이 트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운이 트여, 운이 히데요시의 뒤를 헐레벌떡하며 뒤쫓아 오던 시기가 이어졌다. 만약 소심한 사람이었다면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는 행운의 근원은 – 바로 네네가 아닐까?
하고 히데요시는 생각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가진 조강지처에 대한 경애의 방식, 깊음은 동시대인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부자리에서 네네와의 관계가 끊긴 다음에도 그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단순한 애정이라기 보다 히데요시에게는 네네의 존재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네네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 하고 계속 혼자서 생각했다. 소중히 함으로써 하늘의 은혜가 이어지며 막 대하면 그 은혜가 도망간다고 까지 - 히데요시는 남몰래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오다와라 공략전(小田原の陣) 때, 오오사카(大坂)의 네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요도에 있는 아이(淀の者)를 이곳으로 부르고 싶다"

 고 정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 편지라는 것이,

 "요도에 있는 아이를 부르려고 한다. 자네도 부디 (요도도노에게) 명령하여 떠날 준비 같은 것을 시켜주길 바라네. 자네 다음으로 요도에 있는 아이가 내 맘에 든다"

 고 써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네네가 제일이며 요도도노가 2번째라고 말을 돌려 네네에 대한 미묘한 마음씀씀이를 보여주었다. 더해서 요도도노만을 원정 중인 곳으로 부르는 것에 다소 신경이 쓰였는지 네네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이렇게 가필했다.

 "나는 이미 나이를 먹어버렸다. 올해 안에 자네에게 가 쌓인 이야기도 하고 싶다. 오오만도코로(모친)나 도련님(츠루마츠(鶴松))의 얼굴도 보고 싶다"

 - 히데요시는 천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권세를 가진 사람이 여전히 미천한 신분일 즈음부터의 처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씀씀이를 보이는 것은 애정 말고도 네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남몰래 일종의 신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요도도노를 얻으면서부터는,
 '이 여자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재수 좋음을, 아니 요도도노 그 자체가 재수를 불러들이는 듯한, 더 말하면 그녀는 운(運)의 신이 보낸 천사라고 식의, 그러한 실감 – 신앙이라고 말해도 좋다 – 을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전혀 별개의 것이 되는데 여성의 성기를 행운의 대상으로 하는 미신이 히데요시와 동시대인 센고쿠 무사들 사이에 습관화되어 있었다. 여음(女陰)의 그림이나 남녀가 교접하고 있는 그림을 화가에게 그리게 하여 그것을 대나무 통에 넣어서 어깨에 짊어지고는 그런 모습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그 공력에 의해 화살이나 총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졌으며 생각하지 못했던 무운과 만나 – 예를 들면 이름 있는 적의 목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서양 기사의 경우에서 말하는 mascot 신앙일 것이다.
 히데요시는 요도도노를 그렇게 보았다.
 요도도노를 이후에도 즉 조전침략 때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도 데려갔는데 이때 키타노만도코로를 시작으로 한 다른 측실들에 대하 변명으로,

 "그 아이(요도도노)는 오다와라에도 데려가 바라던 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쟁터의 길례(吉例)이다. 이번에도 데려간다."

 라고 말하였다. 주위에 대한 변명이라곤 하지만 그녀를 길례로 보는 것은 히데요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사실 엄청 큰 운을 가져다 주었다. 히젠 나고야 성에서 그녀는 두 번째 임신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칠 듯이 기뻐했다.

"이 나이가 되어 또다시!"

 하고 히데요시는 주치의인 마나세 도우산(曲直 道三)의 손을 잡고 잡은 손을 몇 번이나 흔들었다. 아비가 된 히데요시는 56살이었다.
 곧바로 요도도노를 그녀의 성으로 돌려보냈다. 1593년 8월 3일 요도도노는 요도 성(淀城)에서 히데요리(秀
)를 낳았다. 히데요시도 서둘러 치쿠젠(筑前) 본영에서 돌아왔다. 이제는 조선 침공이란 안중에 없었다.

 요도 성으로 가 오히로이(히데요리의 아명)와 만나,

 "너는 주어왔다. 주운 것이다. 내 자식이 아니다"

 고 흐물흐물하게 웃으며 얼굴을 아기의 코 앞으로 내밀었다. 주워 온 자식은 튼튼하게 자란다고 한다. 친자식이더라도 일단 버린 뒤 남에게 주워오게 하는 형식을 취한다. 주워 오는 역할에 임명된 것은 요도도노를 시종하며 요도 성에 올라와 있던 마츠우라 사누키노카미 시게마사(松浦 岐守 重政)였다.

 요도도노는 이미 산후의 쇠약에서 회복해 있었다. 이런 점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금 말랐나?"

 히데요시는 그날 밤 요도도노를 옆에 누이고 침상 안에서 그 몸을 쓰다듬었다. 예전 츠루마츠가 살아있을 적에 히데요시는 진중에서 자신이 키워 온 마음의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20일 즈음에는 반드시 돌아가마.
도련님(츠루마츠)를 안고 싶구나
그날 밤 너도 옆에서 재우고 싶구나. 모처럼이니 기다릴 것.

 이번에도 요도 성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저런 종류의 편지를 보내어 요도도노의 마음을 계속 자신에게 쏠리게 했다. 때문에 요도도노는 자신이 항상 히데요시와 함께 이부자리에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이젠 새삼 부끄러워 할 필요 없이 히데요시가 이끄는 대로 하나가 되었고 그 환락 속에 몸을 열었다.
 '이거야'
 하고 히데요시는 생각했다. 히데요시의 감동은 무엇보다 요도도노의 여성으로서의 그 부분이었다.

 "너를 얻으면서 토요토미 가문도 변하였다"

 예전엔 네네의 거기를 신앙했다. 앞으로는 그 이상으로 거대한 행운을 이 요도도노가 가져다 줄 것이다.

 "바로 이거지"

 하고 히데요시는 그 젖은 부분의 명칭을 오와리(尾張) 사투리로 몇 번이나 외쳤다.

 "오히로이(お拾い)에게도 선물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겠군"

 히데요시는 자신이 가진 것 중 제일 비싼 것을 이 갓난아기에게 주려고 생각하였다.
 오오사카 성(
大坂城)였다.

 "그 성을 오히로이에게 주마. 내 성으로써 따로 성을 만들겠다"

 라고 말하였다.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嫡子)인 이상, 이제 막 태어났다고 하여도 천하제일인 성의 주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후들에 대한 존엄과 무위를 가지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군.
 이것이 실행에 옮겨졌을 때,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는 그 측근에게 중얼거렸다. 오오사카 성을 오히로이에게 물려주고 히데요시는 새로이 자신의 거성(居城)으로써 후시미 성(伏見)를 만든다는 뜻 – 을 행정관(奉行)을 통해서 제후들에게 발표한 것이었다. 그 후시미 성 조영에 관해서는 오오사카 성을 기점으로 동 일본의 제후들에게 명해졌다.

 "이 또한 돈과 쌀의 낭비지"

 라는 목소리가 그런 제후들 사이에서 소곤거려졌다. 참고로 그 동 일본의 제후들은 바다를 건너가지 않았다. 조선으로 출정을 명령 받은 것은 서 일본의 제후들이었기에 히데요시에게 있어선 평등하게 돈을 쓰게 하기 위해서 동일본 제후들에게 공사의 분담을 명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피폐함을 알고 있던 제후들에게 있어서는 민폐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 쓸데없이……
 라고 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생각을 이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천성이 자그마한 땅 주인과 같이 검소한 이에야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지(領地)인 칸토우(
) 경영을 위해 에도(江戸)에 새로이 수도를 세웠지만, 성곽은 극히 소박하여 성은 이시가키(石垣)도 세우지 않았고 해자를 팔 때 푼 흙으로 담을 쌓았으며, 성과 건물의 현관 같은 것도 오오타 도우칸(太田 道灌) 때부터의 초가지붕을 사용하였으며, 마루도 배의 밑바닥 나무를 이용한 조악한 것이었다. 자신은 그렇게까지 아끼고 있는데 히데요시의 없어도 괜찮은 별장 같은 성곽을 위해서 막대한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갓 태어난 핏덩이에게 성 같은 게 필요하냔 말이다.
 이에야스에게는 히데요시의 광기의 징조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미친 사람 아닌가? 이에야스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자신의 측근에게,

 "오오사카 성은 오히로이의 장난감이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오사카 성은 서양 신부들이 말하길 콘스탄티노플보다 동쪽으로는 최고로 큰 성이라고 한다. 갓난아기의 장난감으로 그런 것을 주고 자신은 후시미에 성을 새로 쌓아 백성이 피폐한 것을 모른다. 미쳤나? 라고 이에야스는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五.

 이 1586년 12월에 칸파쿠(関白) 히데요시는 다죠우다이진(太政大臣)이 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하사 받음으로써 타이라 씨(平氏), 미나모토 씨(源氏), 후지와라 씨(藤原氏)라는 고귀한 성(姓)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본 귀족으로서의 위치와 체면을 확립하였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궁중에서의 예식이나 축하연회 등으로 쿠게(公家) 사회에서의 사교로 매우 바빴다. 쿄우(京)에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주거하고 있었다. 쥬라쿠테이는 이 해의 2월에 완공되었고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각주:1])와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2])도 불려와 그대로 쿄우(京)에 있었다.


 오오사카(大坂)에는 챠챠(茶々)가 있었다. 챠챠에게는 토요토미 가문 일족의 쿠게(公家) 사교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기에 사람들의 입으로 쥬라쿠테이의 화려함을 듣기만 하고 있었다.
 - 한번 보고 싶구나
 하고 유모에게도 말하였지만 이것만은 유모도 어찌 해 줄 수 없었다. 쥬라쿠테이는 친왕, 상급귀족(公卿), 몬제키(門跡[각주:3]) 그리고 위계가 높은 무장들의 사교 장소이기에 아무런 위계도 가지지 못한 몰락 다이묘우(大名)의 고아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정말 화려하겠구나”

 챠챠는 동경하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키타노만도코로는 위계를 가지고 계신가?”

 “칸파쿠의 부인이시니까요.”

 여성이면서 종이위(從二位)였다. 다이나곤(大納言) 등보다도 상석이었다.

 굉장히 화려할 것이다. 챠챠는 쿄우(京)의 번화함을 상상하였다.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피여서는 저마다의 미를 자랑하는 화원을 연상했다. 쥬라쿠테이 주변에는 끊이지 않고 음악이 울려 퍼지며 시회(詩會)나 다회(茶會)가 열리고 항상 그 중심에 히데요시와 키타노만도코로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갑자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내려왔다. 성안은 북새통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챠챠의 유모를 불렀다. 유모는 서둘러 수 많은 복도와 복도를 가로질렀다. 히데요시는 이외로 혼자 있었다.

 “여어~”

 하고 히데요시는 유모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쓰윽 쓰다듬었다. 식초라도 마신 듯한 얼굴을 하고서는 더구나 쪽팔리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알겠나? 이 얼굴”

 히데요시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도 보지 않고 아는 것 같았다. 이 얼굴을 보아라, 이 얼굴로 추측하라, 쪽 팔려서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 – 고 말했다. 유모는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유모는 이해했다. 챠챠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답답하여 참지 못하고 이렇게 오오사카로 돌아왔네. 알겠나? 내일은 쿄우(京)로 돌아간다”

 ‘내일은 쿄우에?’
 그렇다면 오늘 밤만이 기회였다. 이렇게 경황없는 명령이라니……

 “허락하마. 그 편지상자를 열어보아라”

 히데요시는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유모는 눈 앞에 편지상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송해하며 그것을 열어 안에서의 한 장의 시가 적힌 종이를 꺼냈다. 놀랍게도 연애시였다. 히데요시는 요즘 시에 열심으로 또한 현실적인 필요로 인해 쿠게(公家)의 습관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모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애에 대해서까지 쿠게(公家) 풍으로 흉내 내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사람을 꼬시는 데 있어서의 천재가 챠챠에게만은 이렇게 고풍스런 수단을 이용함으로써 챠챠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익살꾼의 단순한 장난인가?

함께 자고픈 마음이 오오사카에 다녀온 듯하다
팔베개하며 꾼 오늘 밤의 꿈.
想い寝の心や御津に通ふらむ
今宵逢ひみる手まくらの夢

 음률도 갖추어져 있었다. 히데요시 시의 첨삭은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가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시도 그런 것일까?

 “내가 만든 시다”

 히데요시는 일부러 말했다. 유모는 황송해하며 그것을 편지상자 집어넣어 뚜껑을 덮고 보라색 끈을 묶어 머리 위로 공손히 들어올렸다.

 “오늘 밤 술시(밤 여덟 시)에 건너가겠다. 이불에 있으라고 하라, 누워 있으라고 전해라”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이런 것은 쿠게(公家) 풍이라기 보다는 말 위에서 천하를 획득한 무사 정권의 우두머리다웠다.
 유모는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불러 멈추게 하고는 시동(児小姓)을 불렀다. 시동은 흰 나무로 된 작은 상을 머리 위로 받쳐들고 와서는 유모 앞에 내려 놓았다. 하사품이었다. 더구나 황금이었다. 유모는 물론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모는 히데요시의 방에서 나와 긴 복도를 건너면서 생각하였다.
 ‘전하는 3년이나 공들이셨다’
 라는 실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유모도 일찍부터 히데요시의 좋은 도우미가 되어 있었다. 다른 오우미 사람(近江人) – 예를 들어 이시다 지부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등에게서도 유모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어서 와야 함에 대해 음습한 기대가 담긴 말로 들은 적도 있었다. 어쨌든 챠챠가 가지고 있는 히데요시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도록 얼마나 신경을 쓰며 얼마나 손을 써 왔는지 몰랐다. 그것은 우선 성공하였다. 유모에게 있어 적어도 운이 좋았던 것이 챠챠는 그녀의 모친인 오이치(お市)처럼 도리가 명쾌한 뚜렷한 성격이 아닌 감정적으로 무엇이든 그렇게만 사물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런 점에서 유모는 제대로 처리해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이기에 막상 그 때가 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해’
 유모는 혼잣말하며 스스로를 고무하였다. 그것이 결국 챠챠에 대한 충성이 되는 것이며, 결코 꿈에서라도 – 챠챠를 황금에 판 것은 아닌 것이다.

 이날 밤.
 술시. 히데요시는 챠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불에 있어라, 누워 있으라고 유모에게 명령해 두었는데도 챠챠는 옷을 입은 채 촛대에 둘러싸여 앉아있었다.

 “여어~ 이 향은?”

 하고 히데요시는 순간적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자신을 쪽팔림에서 건져 올리려 하였다. 방에는 향이 피워지고 있었다. 향이 피워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히데요시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향은 여러 종류가 섞인 혼합 향(組香)인 듯 했다. 그런 쪽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코로 하나하나 맞출 수 있다.

 “향의 이름은 무엇인고?”

 히데요시는 턱을 들어 콧구멍을 벌름거렸지만 이제 막 쿠게(公家) 문화를 배우기 시작한 히데요시가 맞추기에는 무리였다.

 “어린 나물(若菜)의 향이옵니다”

 하고 챠챠는 희미하게 듣기도 힘들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답하였지만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 눈은 거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 챠챠는 히데요시에 대해서 그다지 예의가 바르지 못하였고 때때로 존대하기까지 하였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허용했다. 챠챠에 한해서는 에치젠(越前) 이치죠우다니(一乗谷)에서 만났을 때부터 계속 그런 태도를 허용해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남성이건 여성이건 히데요시는 그런 태도를 허용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도 없었다.
 히데요시의 측실은 많았다. 오다 가문(織田家)의 방계 출신인 히메지도노(姫路殿), 아시카가 바쿠후(足利幕府)의 명문가인 쿄우고쿠 씨(京極氏) 출신 마츠노마루도노(松ノ丸殿),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여동생 산죠우노츠보네(三条局) 등 많은 명문가 출신들이 있었지만 모두 히데요시 앞에서는 숨죽이고 그의 심기를 민감하게 살피며 열심히 섬겼다. 히데요시도 역시 그녀들에게 상냥하였으며 오히려 너무 상냥할 정도였다. 그녀들 또한 히데요시의 그런 상냥함에 감동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섬겼다. 하지만 이 챠챠만은 달랐다. 그 제멋대로인 성격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것 같았지만 히데요시 만큼이나 사람의 심성에 대해 정통한 사람도 그리 생각하지는 못하고 이 아가씨는 자신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어딘가에 항상 품고서는 계속 원망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반해있었던 것이다. 그 반해있음이 히데요시의 태도를 약하게 하였다.

 “이 향은 히메가 피운 것인가?”

 하고 히데요시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 말했다.

 “아니요”

 하고 챠챠는 말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챠챠라는 아가씨에게는 혼합 향을 조화시킬 수 있는 듯한 재주가 없었다. 이는 유모가 피웠다. 피웠을 뿐만 아니라, 아씨 잊지 마시옵소서. 이 혼합 향은 ‘어린 나물’이라고 하옵니다. 어린 나물이옵니다. 이와 연관된 옛 시(古歌)는 이것과 이것입니다, 하고 쪽지에 적어서는 하나하나 가르쳐갔다. 그랬을 뿐인 장치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오해했다. 고개를 가로저은 것은 챠챠의 겸손함일 것이라 생각하여 그 교양의 깊음에 탄복하였다. 이런 점 - 사랑을 하고 있는 젊은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향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른단다. 이 봄나물에는 어떠한 옛 시가 있는고?”

 “몇몇이 있사옵니다”

 하고 챠챠는 매우 부드럽게 답했다. 유모가 가르쳐 주었듯이 ‘어린 나물’에 연관된 옛 시 중 다음과 같은 것은 읊조렸다.

내일부터는 어린 나물을 캐자고 약속한 들에
어제도 오늘도 눈은 계속 내리고
明日よりは若菜摘むとしめし野に
昨日も今日も雪は降りつつ

 히데요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 내리는 눈’이라는 것은 거부하는 ‘수수께끼’인 것 같았다. 적어도 무언가의 사정으로 오늘은 어린 나물을 캘 수 없습니다, 고 챠챠는 말하는 듯했다.

 "허어~ 캘 수 없나?”

 히데요시는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쿠게(公家)의 귀공자라면 아니 적어도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무렵의 도련님들이라면 이렇게까지 수수께끼가 던져지면 여성의 방에서 물러나 나중에 시를 보내는 것이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같은 귀족이라도 말 위에서 검을 쥐고 칸파쿠(関白)의 의관을 쟁취한 전쟁터의 사나이였다. 물러나지 않았다.

 “히메! 기왕 이렇게 된 것이다”

 하고 히데요시는 오른손을 뻗쳤다. 행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뻗친 손으로 청자(靑磁)로 된 향로를 집어서는 뚜껑을 거칠게 열고 피워져 있는 불에 물통의 물을 부었다. 재가 일고 향기가 사라지며 동시에 ‘어린 나물’도 옛 시도 수수께끼도 사라졌다.
  키득, 하고 히데요시는 웃었다.
 ‘앗’
 하고 챠챠가 놀랄 정도로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에는 흠뻑 빠져버릴 듯한 애교가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곧바로 그 웃는 얼굴을 지웠다.
 곧이어 챠챠를 노려보았다.

 “귀족놀이는 이제 그만하자”

 그것은 선언이었다. 무문(武門)에는 무문만의 사랑에 대한 작법이 있을 것이다.

 “오른손을 나에게 맡기라”

 위엄을 가지고 명령했다. 항복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무문의 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오히려 히데요시에게는 더 나았다. 챠챠는 순종적이 되었다. 그 하얀 오른 손을 히데요시 쪽으로 내밀었다. 마음이 멍해지며,
 ‘무엇을 하려고?’
 하고 챠챠가 생각할 여유도 없이 히데요시는 그 손을 잡았고 잡자마자 챠챠를 무릎 위에 눕혔다.

 “챠챠야”

 하고 히데요시가 ‘히메’라는 존칭을 버렸을 때는 이미 챠챠의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자그마한 남자의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 것일까? 그대로 이불 위로 옮겨졌다. 그러나 거기서 히데요시의 힘이 다했다. 히데요시는 OTL이 되어 거친 숨을 토했고 토하고는 들이마셨다.

 “나도 늙었다”

 히데요시는 자조적이 되고 싶었을 터이지만 젊은 챠챠에게 허세도 부려야 했기에 무턱대고 큰 소리로 웃었다. 사냥감은 바로 앞에 뉘여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숨이 진정될 때까지 뭔가를 떠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난 몸은 작지만 다할래야 다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남들과는 다른 뛰어난 체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었지. 그러나 천하를 갈고 닦기 위한 큰일을 하다보니 조금 피곤해졌다. 옛날이라면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들었을 텐데……”

 ‘거짓말
 하고 챠챠는 엎드려 있으면서도 저 초로를 훨씬 넘긴 남자의 허풍이 웃겼다.

 “챠챠야 내 아이를 낳아라”

 히데요시는 OTL인 채로 고개만 쳐 들고 말했다. 토요토미 칸파쿠 가문의 아이를 낳으라고 거듭 말했다. 히데요시가 이럴 때 쓰는 상투적인 문구였으며 어느 여성에게건 그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어느 여성도 그 명령에 따르지 못했다. 히데요시의 아기씨가 드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석녀(石女)들과만 조우하였는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챠챠는 히데요시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세가 취해졌다.
 받아 들였다.
 이 순간만큼 거대한 사건은 토요토미 가문 역사 속에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자연적인 – 챠챠의 옷이 펼쳐지고 히데요시가 그 육체를 꽉 껴안았을 뿐인 단지 그랬을 뿐의 자연적인 행위가 이 순간부터 토요토미 가문의 체질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좋았다. 오우미 파벌(近江閥)이 이 이불 속에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히데요시의 이 상냥함이란…… 그것이 끝났더라도 챠챠를 놓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였다. 이 가련한 이를 위해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성(城)을 갖고 싶지 않은가?”

 하고 히데요시는 챠챠의 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히데요시는 말했다. – 바다 건너온 비단이나 면으로 된 옷 같은 것을 사라, 시녀의 수도 늘려라, 그러나 챠챠가 가져야 할 것은 성이다. 성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성을?”

 챠챠는 놀람과 동시에 자신의 정부(情夫)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천하의 지배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천하인의 선물이라는 것은 당연 성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저는 여자이기에 성은 필요 없사옵니다.”

 “사양하지 마라”

 히데요시는 말했다. 꼭 성을 주고 싶다. 그 이유로 히데요시는 쿄우(京)와 오오사카(大坂)를 왕복하니 그 중간인 요도(淀) 근방에 휴식을 위한 성을 하나 두고 싶었는데 그것을 쌓아 챠챠를 살게 하면 그녀도 기쁘고 자신도 편리했다.
 ‘단 다른 여성들에게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안 되지’
 다른 측실들은 모두 오오사카 성에서 살고 있는데 챠챠만이 [성주]가 된다면 대부분 질투할 것이다. 무엇보다 정실인 키타노만도코로가 심술내지 않도록 이것저것 이유를 만들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히데요시의 버릇으로 생각나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빨랐다. 그날부터 몇 일 내에 동생인 야마토 다이나곤 히데나가(大和大納言 秀長)를 불러,

 “요도에 성을 쌓아라”

 고 명령했다. 장소는 카츠라가와 강(桂川)과 우지가와 강(宇治川)이 합류하여 요도가와(淀川)가 되는 합류점으로, 거기에는 예부터 아시카가 쇼우군 가문(足利将軍家)의 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불과 보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폐허인 성을 부활시켜 작지만 견고한 성을 만들어라, 건물을 화려하게 지어라, 귀부인을 위한 건물로 해라, 여성 침실의 앞마당에는 꽃나무를 잊지 말도록, 화장실도 특별히 생각을 해서 만들라고 명했다.

 요도 성(淀城)은 5개월 만에 만들어져 챠챠는 오오사카에서 거기로 옮겼다. 아자이 씨(浅井氏) 일족이나 시녀를 포함하면 이 새로운 성에서 생활하는 사람 수는 남녀 200이 넘을 것이다. 챠챠는 세간에게 ‘요도도노(淀殿)’라 불렸으며 히데요시에게는 ‘요도노모노(淀の者)’, ‘요도노뇨우보우(淀の女房)’ 등으로 불리거나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도도노는,
 - 어머님(お袋様).
 이라고 세간에서 불리게 되었다. 히데요시를 위해서 첫아들 츠루마츠(鶴松)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이 츠루마츠는 2년 후에 죽었다. 히데요시는 크게 낙담하였지만 그러나 요도도노에 대한 애정은 더욱더 깊어졌다. 곧이어 조선침략이 시작되어 그 대본영인 치쿠젠(筑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도 그녀를 데려갔다. 이 나고야의 행궁에서 요도도노는 또다시 임신했다. 히데요시는 춤을 추며 기뻐했다.
 - 남자아이를 낳아라
 고 히데요시는 요도도노의 배에 손을 대고는 굉장히 진지하게 빌었다. 토요토미 가문에 아이를 낳는다는 기적을 요도도노는 별 힘 안들이고 실현해 주게 되었다. 그 해 – 1593년 8월 3일. 요도도노는 이미 요도 성(淀城)에 돌아와 있었다. 이날 히데요시의 희망대로 남자아이를 낳았다. 


 히데요리(秀頼)였다.

  1. 히데요시의 부인 [본문으로]
  2. 히데요시의 모친 [본문으로]
  3. 거대 사찰 혹은 그런 사찰의 주지가 된 황족이나 상급귀족의 자제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七.

 하치죠우노미야토모히토 친왕[八宮智仁親王]이 가진 히데요시에 대한 추억은 그 정도밖에 없다. 미야[宮]는 너무 어렸다. 히데요시가 지혜를 뽐내며 기운이 넘칠 때의 미야는 꼬꼬마나 소년에 지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력이 풍부해지기 시작할 즈음의 그 히데요시는 노쇠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하지만 미야의 정신은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 크게 성장했다. 동시에 미야의 마음 속에 있는 히데요시도 그의 사후 쑥쑥 성장하기 시작한 듯 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이 시작된 것은 미야가 24살 때이다.
 -
이에야스[家康]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라는 것은 궁정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이미 세키가하라[ヶ原] 이전부터 명확한 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 휘하의 일개 다이묘우[大名] 주제에 단독으로 궁정에 접근하여 금은(金銀) 등을 헌상하였다. 그 꿍꿍이는 장래에 무언가 일으켰을 경우를 상정하여 미리 궁정의 호의를 얻어두기 위함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 사이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율법을 어기며 자주 오오사카 정부[大坂公儀]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 감정을 대표해서 일어선 것이 오봉행(五奉行)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로, 이에야스의 죄를 꾸짖고는 오오사카[大坂]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이에야스가 바라던 바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천하의 다이묘우[大名]들은 동서(東西) 어느 쪽에건 속하게 되었다.

 미야의 시학(歌) 스승인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 幽斎]탄고[丹後] 타나베 성[城]에 머문 채 이에야스에 속했다. 유우사이는 자기 가문의 생존을 이에야스 측에 걸었다. 도박은 결과로써 성공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궁지로 몰렸다. 왜냐면 서군의 대군단이 이 타나베 성을 포위하였기 때문이다.
 
서군의 병사수는 1만 5천이었고, 농성하는 유우사이 측은 불과 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우사이의 아들인 타다오키[忠興]가 호소카와 가문의 주력을 이끌고 칸토우[東]에 있었기 때문에 유우사이 아래에 남아있던 병사는 그것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만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유우사이는 잘 싸웠다.

 “도저히 유우사이는 이길 수 없겠지. 유우사이는 죽을 것이다”

 하고 세간의 누구나가 생각했다.
 
하지만 유우사이에게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를 경탄케 할 정도의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 이상으로 이 인물에게는 지모(智謀)가 있었다. 이 사지(死地)에서 자신의 목숨을 탈출시키는 한편 세상의 비웃음 받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를 이 노인은 가지고 있었다.

 하치죠우노미야[八宮]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유우사이는 재작년이래 고요우제이[後陽成]와 이 미야를 위해서 옛 시집 전체[古今集全巻]에 걸쳐서 주석을 강의하여 작년에 완료하였다. 제1회는 70여 일을 필요로 했으며, 제2회는 40여 일을 필요로 했다. 그걸로 전부강의한 것이 되었는데, 남은 것은 거기에 ‘비전(秘傳)’이라 부름직한 것이었다.
 [
고금전수(古今)]
 
라고 세상에서는 일컫는 것으로, 옛 시집(古今集) 해석의 비전이며 게임에서 말하는 필살기이다. 이것은 문외불출(門外不出)로 만약 유우사이가 전사라도 한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소멸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유우사이의 지모가 노리는 바였다.

 “나의 죽음은 가볍다. 그러나 고금전수(古今)는 중하다. 내가 죽기 전에 그것을 하치죠우노미야에게 물려드려서 후세에 전하고 싶다”

 며 쿄우토[京都]에 있는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요청한 것이다. 그 밀사(密使)로서 유우사이의 가신(家臣)이 포위을 돌파하여 하치죠우노미야의 저택에 도착하였다.

 미야는 경악했다.
 
곧바로 입궐하여 형인 텐노우[天皇]를 배알하고서는 탄고의 전황을 알리면서 고금전수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유우사이는 황상께 전수해 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있사옵니다”

 하며 다소 왜곡하였다. 미야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전수받는다 하더라도 천하는 신경도 쓰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텐노우[天皇]가 전수를 받는다고 한다면 칙명으로 정전(停戰)을 시킬 수 있고, 칙명이라면 유우사이의 목숨도 떳떳하게 구할 수있게 된다. 유우사이는 미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야라면 그렇게 말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 텐노우[天皇]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칙사를 오오사카의 히데요리[秀頼]에게 보내어 탄고 방면의 서군(西軍)에게 정전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 칙사로서 시에 밝은 산죠우니시 다이나곤 사네에다[三西 大納言 実条], 나카노인 츄우나곤 미치카츠[中院 中納言 通勝],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烏丸 頭弁 光広] 등 3명이 내려갔다. 히데요리는 승낙했다. 칙명을 황송해하며 받드는 것이 토요토미 가문의 가법이었다.

 현지에 칙사로서 카라스마루 토우노벤 미츠히로가 임명되어 떠났으며,히데요리에게서는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前田 主膳正 義勝 – 토요토미 가문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 마에다 겡이[前田玄以]] 아들)] 사자로 임명되었다. 이들보다 한발 앞서 미야의 개인적인 사자로서 가신 오오이시 진스케[大石 甚助]라는 자가 탄고 타나베로 급행하여 양측에,
 -
칙사가 내려오신다.
 
는 뜻을 알리고 또한 유우사이와 만나서는, 미야가 유우사이의 말과는 달리 ‘고금전수’를 자신이 아닌 텐노우[天皇]가 받는 것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렸다.

 유우사이는 복잡한 연기를 하였다.
 
칙사가 성안으로 들어서자 처음엔 그 정전권고의 칙명을 사양했다. 목숨을 아쉬워하는 것 같이 보여 무도(武道)의 길을 가는 자로서 수치스럽사옵니다 – 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는 한편 칸토우[東]의 이에야스에게도 사자를 보냈다. 이에야스에게도 이에 대한 사정을 납득시켜놓지 않으면 나중을 위해서 좋지 않았다.
 
설왕설래 끝에 겨우 개성해서는, 그 성을 마에다 슈젠노카미 요시카츠에게 맡긴다는 명목으로 성을 나왔다. 동시에 포위군도 진을 풀고 떠났다.
 
유우사이는 전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탄바[丹波] 카메야마 성[城]으로 몸을 피했고, 곧이어 싸움이 동군(東軍) 측의 승리로 끝나자 우선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이에야스를 배알했다.

 이어서 쿄우토[京都]에 올라가 미야에게 ‘고금전수’를 전수하기 위해 하치죠우노미야 저택에 들렸다. 미야는 이 날의 의식을 위해서 일부러 저택 내에 방 하나를 따로 만들어 전수를 받는 곳으로 하였다. 전수의 내용은 특별한 것도 없었다. 옛 시집(古今集) 중 난해한 몇 개소나 구절 등에 대해 하나하나 메모지를 끼워 넣으며 구전(口傳)하는 것으로, 내용보다도 오히려 권위를 신비화시키기 위한 종교의례였다. 미야는 전해 내려오는 작법대로 유우사이에게 서약서를 제출하였다. 서약서에는 [천지신명에게 맹세컨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음. 만약 어기는일이라도 있을 때는 어떠한 신벌불벌(神罰佛罰)이건 달게 받겠음]이라고 쓰여있었다.

 이에야스의 천하가 되었다.
 
히데요시에 대한 빠심이 있었던 고요우제이[後陽成]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불과 3년 만에 찾아온 이 변화에 실망하여 텐노우[天皇]인 것을 그만두려고 하였다. 퇴위하여 뒤를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와 그의 관료들이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앞 시대의 히데요시나 토요토미 가문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궁정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퇴위는 토쿠가와 가문[川家]에 대한 비꼼과 같은 것이며 그러한 제멋대로인 행동은 용서할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하치죠우노미야에게 양위하신다는 것은 특히 적절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미야는 한때 히데요시의 유자였던 분으로 지금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황위에 오르시는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옵니다. – 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히데요시의 시대와는 달랐다. 히데요시가 있을때 설치되었던 ‘쿄우토 행정관[京都奉行]’은 어디까지나 궁정본위인 - 궁정의 아래에서 용무를 원활하게 하는 기관이었지만, 이에야스의 치세가 되어 설치된 ‘쿄우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는 궁정의 감시역[目付]으로, 때로는 검단관(檢斷官)과 같은 위압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 때문에 텐노우[天皇] 이하 여관(女官)에 이르기까지 일상이 어두워졌다.
 -
태양이 저문 것입니다.
 
하고 미야는 형인 텐노우[天皇]를 위로하였다. 태양은 히데요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궁정에게 있어서 히데요시의 출현은 태양이 솟아오른 것과 같았으며, 그가 살아있을 때 궁정에는 하루 종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그늘이 졌다.
 -
이에야스는 원래부터 토요토미 씨와는 다르옵니다.
 
라고도 미야는 말했다. 미야가 이에야스의 얼굴을 본 것은 몇 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나 모습은 결코 시인이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시인이었다. 시인이 아니기에 궁정의 고상함과 아름다움, 예술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면 궁정에 대한 애정도 생길 턱이 없었다.

 그 후 십 년간,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天皇]는 황위를 유지하였으며 이어서 황위를 세자인 코토히토 친왕[政仁 親王]에게 물려주었다. 고미즈오 텐노우[後水尾天皇]이다. 1615년 이에야스는 소위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陣]’ 을 일으켜, 히데요리를 포위해서는 불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쿄우토[京都]에 사람들을 보내어 아미다가미네[阿弥陀峰] 봉우리에 있는 히데요시의 묘소(墓所)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그에게 내려진 호칭인 [호우코쿠다이묘우진[大明神]]을 박탈케 하였다.
 -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미야는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 이에야스는 궁정도 그 활동을 궁궐 안으로 제약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 속박했다. [공가법도(公家法度)]가 그것이다.

 미야는 모든 것에 실망했다. 결국 쿄우토를 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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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름.
 미야는 카츠라가와 강[桂川] 근처에 오이구경(瓜見)을 하러 간다. 그러다 거기에 살 장소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에 별장을 만들어 거기에 살고 그러면서 일본 시의 아름다움 속에서 몰두하다 죽고자 하였다.
 
이 미야는 후세에 말하는 ‘카츠라 별궁(桂離宮)을 만들었다. 현재 있는 별궁의 모든 것을 만들지는 않았고 그는 원형만을 만들어 나머지는 늦은 결혼으로 태어난 적자(嫡子) 토모타다친왕[智忠 親王]에 의해 완성되었다.
 
미야가 만든 별장은, 미야의 표현에 따르면,
 -
오이 밭의 아담한 찻집[瓜畑のかろき茶屋]
 
이었다. 아담하기는 하였어도 궁정에서 그 아름다움은 평판이 자자하였다. 미야는 이 별장의 설계에 있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 ‘일본 시집(古今和歌集)거기에 미야가 좋아한 ‘백씨문집(白氏文集)등에서 발상(發想)하여, 그런 시들의 마음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여름 달이 오이 밭 위로 떠오르는 밤에는 이 별장에 히데요시를 되살려서 초대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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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는 3대 쇼우군[軍] 이에미츠[家光]의 치세인 1629년에 50살의 나이로 죽었다. 미야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모츠케[下野] 닛코우[日光]에 이에야스의 묘소인 토우쇼우 궁[東照宮]을 조영(造營)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다. 후년 사람들은 토우쇼우 궁(宮)에서 볼 수 있는 토쿠가와 가문의 미의식과 쿄우토(京都) 교외에 있는 이 카츠라 별궁에서 볼 수 있는 그것이 극과 극이라며 수군거렸다.

四.

 히데요시[秀吉]도 그렇게 생각한 듯 했다. 실은 이 히데야스가 마장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던 해에 히데요시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태어나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서는 그렇게 많이 양자를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히데야스가 가지고 있던 ‘인질’로서의 정치적 효용도 과거의 것이 되고 있었다.
 - 이을만한 명문가가 있다면……
 하고 히데요시는 양자 히데야스를 다른 가문에 보내기로 마음먹기 시작했다. 후년, 같은 양자인 킨고츄우나곤[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를 코바야카와 가문[小早川家]에 양자로 보낸 것과 같은 것을 – 히데요시는 히데야스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마장에서의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 칸토우[関東]의 명문가 유우키 가문[結城家]에게서 이야기가 왔다. 유우키 씨(氏)라고 하면 카마쿠라 시대 때 부터의 명문가로, 센고쿠[戦国] 때 갑자기 생긴 벼락 다이묘우[大名]가 아니었다. 현 당주는 하루토모[晴朝]라고 하며, 이 해 – 1590년 히데요시가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공격했을 때, 하루토모는 내속(來屬)해서 토요토미 가문의 산하에 들어왔다. 그때 그는 히데요시와의 유대를 강하게 하기 위해,

 “소인에게는 아이가 없어 유우키 가문은 졸자의 죽음과 함께 끊어지게 생겼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가 누군가 정해주시면 그 사람을 상속자로 하겠습니다”

 하고 부탁해 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 기특함을 기뻐하며,

 “그러고 보니 알맞은 사람이 있네”

 하며 곧바로 히데야스를 머리에 떠올렸다. 유우키 가문이라면 카마쿠라 때부터 무문(武門)의 명문가로 일본에서 유명했다.

 이 오다와라의 진(陣)에 이에야스[家康]도 참가하고 있었다. 부르면 이에야스는 곧바로 올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항상 가신으로 대하지 않고 객장(客將)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성의를 보여 일부러 사자(使者)를 보냈다. 사자에는 이런 종류의 용무에 항상 얼굴을 내미는 쿠로다 요시타카[黒田 孝高 ]를 선택해 알선을 맡겼다. 요시타카는 이에야스의 진영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

 “귀가(貴家)에 있어서 정말로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고 요시타카는 말했다.
 정말 그러할 것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이 오다와라 정벌의 종결과 함께 칸토우 250만석 이봉(移封)의 내락을 받고 있었다. 새로 이전할 곳의 수도는 꼭 에도[江戸[각주:1]]
로 하시길 – 이라는 조언까지 히데요시에게 받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낳은 히데야스가 유우키 가문을 상속받아 유우키 성(城)의 성주가 된다고 한다. 유우키 성(城)은 칸토우의 북동에 위치하며, 오우슈우[奥州]에서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새(要塞)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땅에 히데야스를 둔다는 것은 토쿠가와 가문의 방위에 있어서 이 보다 고마운 일은 없었다.

 “예. 이보다 고마운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하고 이에야스는 감격하여 졸자에게 있어선 아무런 이의도 없다는 뜻의 대답을 했다.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곧바로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의 자식이라는 자격으로 칸토우로 내려가, 에도에서 진짜 아비인 이에야스와 대면을 한 후 거기에서 오우슈우 가도(街道)를 거슬러 올라가 유우키 성(城)에 들어갔다. 거기서 처(妻)를 얻었다. 처는 유우키 가문의 당주 하루토모의 손녀로 사쿠코[咲子]라 하였다.
 히데야스는 이때부터 ‘
유우키 히데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석고는 5만석이었다. 전 당주인 하루토모는 은거하였고,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따로 은거료(隱居料)를 하사하였다.

 득을 보았다 – 는 것이 이에야스였다. 인질인 히데야스를 실질적으로 되돌려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며, 더구나 그를 위해서 따로 영지(領地)를 떼어 줄 필요도 없이, 다른 가문의 땅을 상속받아서 돌아온 것이다.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히데야스는 복을 가져다 주는 자식일 것이다.

 하시바 성[羽柴姓]에서 유우키 성(姓)을 이은 히데야스는 다이묘우(大名)로서의 입장도 바뀌었다. 이제는 토요토미 가문의 직속 다이묘우[大名]가 아닌 토쿠가와 가문에 속한 다이묘우였다.
 - 격이 떨어졌다.
 는 감정이 히데야스에게는 있었다. 거기에 조금 맘을 상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동생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보다 끗발이 낮아 히데타다의 지휘하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이런 노골적인 감정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며 있을까?”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의중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저 자존심 강한 히데야스의 기상으로 보건대, 이 누구의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불운한 환경에 만족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히데야스는 참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오만[おまん]의 자식은 굉장히 참을성 있는 사나이로 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런 만큼 장래가 두려웠다.

 가문을 상속한 뒤 히데야스는 그에 대한 보고 겸 인사를 하기 위해서 에도에 왔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 크게 환대하라고 시켰고 아예 날을 잡아서는 이 자기 아들과 대면하였다. 이에야스는 가신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굉장히 정중하게 히데야스를 대했다.
 - 유우키 쇼우쇼우님(結城 少将殿 –
이하 ‘쇼우쇼우[少将]를 ‘소장’으로 씀 – 역자 주).
 이라는 호칭으로 이 아들을 불렀으며, 무언가를 물어볼 때도 항상 미소를 띄웠다. 조심함이 있었다. - 라기보다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히데야스가 태어났을 때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대면을 꺼렸고 그 후 토요토미 가문에 양자로 주고 말았다. 더욱이 토쿠가와 가문의 자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가문을 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히데야스는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고 생각하여, 그렇게 생각하면서 히데야스의 안색을 살펴보았지만 이 혈색이 좋고 눈이 큰 젊은이는 이에야스에 대해서도 히데타다에 대해서도 공손하여 조금도 그러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젊은이를 화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에야스는 그리 생각하여, 말 그대로 종기가 난 곳을 건드리는 듯이 조심조심하였다.
 - 소장님께 예의를 다할 것.
 이라고 이에야스는 가신들에게도 머리에 새겨질 정도로 말해두었으며, 특히 세자인 히데타다에 대해서는 그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야스의 성격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만 채워 주면 되었다. 만약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히데야스의 자존심에 상처라도 주는 행태를 보인다면 이 젊은이는 필시 이에야스가 죽은 후 히데타다를 멸하고 토쿠가와 가문을 취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남이 띄워주면, 지 잘난 줄 아는 병진은 아닌 듯 하구만’
 이라고도 이에야스는 관찰했다. 이 점이 이에야스에게 있어서 다소 안심이기는 했다.

 그런데 히데야스는 에도에서 이에야스와 만남을 가진 후 자기의 영지(領地)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상경해서는 후시미[伏見]를 떠나지 않았다. 후시미에 있는 히데요시의 의향이었다. 히데요시는 히데야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으며, 어디까지나 후시미의 궁중 안에서 근시(近侍)시키고자 있었다. 히데야스도 히데야스로 칸토우에 있는 것보다 히데요시의 슬하에 있는 쪽이 편했으며 마음도 흥겨운 듯 했다.

 이후, 히데야스는 예전 양아비인 히데요시의 죽을 때까지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1592년의 조선 침략 때는 히데요시를 따라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의 대본영까지 따라갔으며, 히데요시가 후시미로 돌아오면 그림자와 같이 호종하며 후시미[伏見]로 돌아왔다. 한시도 히데요시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토요토미 가문 양자들 중에서는 가장 충실한 양자였을 것이다. 하기사 히데요시가 놓지 않았다.

 “소장님은 내 곁을 떠나지 마시게”

 하고 히데요시는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끝에 꼭 이 말을 붙였다. 노인이 되어 심약해진 탓인지 아니면 소장 히데야스라는 젊은이가 그렇게나 귀여웠던 것인지 혹은 정치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 필시 이유는 그것들이 전부 섞여 있을 것이다.

 정치상의 이유라는 것은, 토요토미 가문의 적자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긴 것이다. 히데야스의 존재라는 것이 히데요시의 눈에 복잡미묘하게 비쳐져 왔다. 히데야스는 토요토미 가문과 토쿠가와 가문을 잇는 가교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히데요시는 죽는다. 히데요리는 남는다. 천하의 권력은 이에야스의 손에 쥐어질지도 모른다. 히데요리의 앞날은 예전 오다 가문 공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죽을까, 쫓겨날까, 약소 다이묘우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때야말로 유우키 히데야스가 일어나 히데요리의 좋은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렇게 기대했다.

 어쨌든 히데야스는 칸토우로 돌아가지 않았다. 유우키 성(城)은 가신에게 맡겨둔 채 그 자신은 오오사카[大坂]와 후시미에 저택을 지어 거기에 상주했다. 매일 후시미 성(城)에 등성하였다. 히데야스의 모습은 항상 궁중의 대기실에서 볼 수 있었으며, 히데요시는 그런 것을 노옹(老翁)의 천진난만함으로 기뻐했다.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히데요시가 기쁘다고 하면, 그리고 그것이 이에야스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히데야스는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말년, 병으로 인해 눕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때때로 히데야스에게 허리를 주무르게 하거나 했다. 어느 때인지,

 “이것이 늙어서의 즐거움이란다”

 하고 히데요시는 누워서 말했다. 젊을 때는 분골쇄신하며 일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몸의 뭉친 곳을 주무르게 한다. 이승에서 이보다 행복한 것은 없다 – 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히데야스의 손바닥이 스쳐가고 있는 히데요시의 몸은 더 이상 육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정도로 말라 삐들어져 있었다. 히데야스는 그것에 슬픔을 느꼈다.

 “오히로(お拾=히데요리)는 너의 동생이다. 오랫동안 잘 돌보아 주렴”

 하고 히데요시는 말했다. 검게 변색된 피부가 이제는 종이와 같아, 생기가 없었다. 그 건조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말을, 히데야스는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동생이다’
 라는 말을 들어도, 솔직히 말해 히데야스에게는 그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히데요리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천하의
숭경(崇敬)을 모으고 있었으며, 관위는 정사위(正四位) 코노에츄우죠우[近衛中将]였고, 양자이지만 형이라고 하는 히데야스는 아주 멀치감치 떨어져서밖에 배알(拜謁)할 수 없었다.

 동생이라고 하면 한 명 더 있었다. 토쿠가와 가문의 적자 히데타다였다. 그는 틀림없이 피가 이어진 동생이었지만, 그러나 이쪽의 동생도 이미 종삼위(従三位) 츄우나곤[中納言]이며, 형인 히데야스는 그 가신 격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 히데야스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두 동생은 너무나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으며, 그에 비해 형이라고 하는 자신은 현실의 위세가 너무나도 낮았다. 히데야스는 지금도 여전히 유우키 5만석의 영주이며 불과 200명 정도의 무사[侍] 밖에 거느리지 못하였다. 이것이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자신의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자신이 너무 비참했으며 우습기까지 했다.

 하지만 히데야스는, 히데요시라는 양아비에 대해서 골육의 정과 같은 마음을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즈음엔 함께 욕실에도 들어갔으며, 욕실뿐만 아니라 히데요시는 불이 붙은 선향(線香)을 들고 손수 히데야스의 피부를 태우며 뜸을 떠준 적도 있다. 그런 기억은 진짜 아비 이에야스와는 한번도 없었다. 이에야스라는 아비의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그 몸과 스친 적은 없었다.

 지금 히데야스는 히데요시의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지금 손에 느껴지는 이 노인 쪽이 훨씬 육친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수년이 지나 히데야스가 28살 때 히데요시가 죽었다. 1598년 8월 18일이었다. 그날 밤 이후 정세는 불안정이 이어져 후시미 성(城) 밑은 밤마다 소란스러웠으며, 유언비어가 날라 다녔고, 3일이 지나지 않아 시민들은 가재를 짊어지고 도망치기 위해 거리를 내달렸다.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당시 히데요시의 권위에 의해 억제되어있던 토요토미 가문의 파벌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공공연해졌다. 그들은 무력으로 대항하며 싸우고자 했다. 다이묘우끼리 성 밑에서 싸운다는 소문이 자주 돌았으며 더구나 이는 뜬소문이 아니었다.

 토요토미 정권의 질서가, 히데요시가 죽는 순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질서를 재건할 수 있는 인물은 어린 주군 히데요리가 아닌 이에야스여야만 한다는 자연스런 기대가 그에게 모였다. 이에야스는 토요토미 정권하에서 가장 큰 다이묘우이며, 오다 가문 때부터 이어진 그 역사적 명성은 이 혼란스러운 세상을 가라앉히는데 충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또다시 겐키-텐쇼우[元亀-天正][각주:2]의 혼란이 다시올 것이라는 바램이나 견해가 세상의 밑바닥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에야스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1. 현 토요쿄우[東京] [본문으로]
  2. 각각 일본의 연호로 1570년~1591년까지를 지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