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분수령이 대전투의 승패를 배반이라는 행위로 결정짓게 한 인물 – 때문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는 ‘사상 최대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秀吉]의 부인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각주:1]로 태어났지만, 히데요시 부부에게 자식이 없었기에 양자가 되어 키타노만도코로의 손에 키워졌다. 이 즈음에는 히데토시[秀俊]라는 이름을 썼다.

 1588년. 히데요시는 쥬라쿠테이[聚楽第]에 고요우제이 텐노우[後陽成 天皇]의 행행(行幸)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는데, 7살의 히데아키도 이 영광스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즈음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각주:2] 하지만 다음 해인 1589년에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도노[淀殿]가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히데요시는 이 첫 아들에게 츠루마츠[鶴松]라는 이름이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불과 3년을 살았을 뿐이었다. 히데요시는 츠루마츠 사망이라는 충격을 잊으려는 듯 조선 침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도 또한 히데요시의 총애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조선 침략이 한창이던 1593년, 요도도노는 또다시 남자아이(히데요리[秀頼])를 낳았기에 히데요시의 히데요리에 대한 눈먼 사랑이 시작되어, 우선 관백(関白)인 히데츠구[秀次]를 실각시켰다. 히데아키의 신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는 히데요시의 의중을 헤아려, 히데아키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각주:3]

 정유재란 때 히데아키는 일군의 대장으로 출진하였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의 농성으로 유명한 울산성(蔚山城)에 대규모 구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의 일이었다. 도망치는 명나라 군사를 쫓아 총대장인 히데아키가 직접 창을 꼬나 쥐고 휘두르며 짐승을 쫓는 사냥꾼처럼 학살하고 다녔다고 한다. 대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다.

 다음 해인 1598년. 돌연 히데아키는 귀국 명령을 받았다. 히데아키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히데요시에게 출두하였다. 필시 조선에서의 활약에 대한 칭찬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히데아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은 의외로 조선에서의 경거망동을 질타하는 히데요시의 노호였다. 히데요시는 “네 녀석과 같은 놈을 대장으로 삼다니 내 눈이 삐었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부 큐우슈우[九州] 33만 6천 석을 삭감하여, 에치젠[越前] 15만석의 이봉이라는 가혹한 결정까지 내렸다.
 히데아키는 이 사태가 모두 군감(軍監)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참언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론 내렸다. 하지만 지금은 뾰족한 수도 없었다.

 이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였다. 온화한 얼굴로 히데아키의 불평을 들어주고서는, 히데요시에게도 가 히데요시의 분노가 풀리도록 노력하였다.

 1598년 8월. 히데요시가 죽었다. 이에야스의 조처로 감봉에 따른 이봉을 피한 히데아키의 처우도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흐지부지해졌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쥐고자 계획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이러한 히데아키에게 은혜를 입힌 형태가 되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히데아키가 배반한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의 결전 당일, 마츠오 산[松尾山]에 진을 치고 있던 히데아키는 시간이 흘러도 어느 편인지 확실히 나타내지를 않고 지켜만 보았다. 애간장이 탄 이에야스는 철포대에게 명령하여 히데아키의 배반을 재촉하는 철포를 쏘게 하였다. 이때서야 비로서 히데아키는 병사들을 움직여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부대를 공격한 것이다. 알려진 대로 이것이 세키가하라의 승패를 갈랐다.[각주:4]

세키가하라 포진도. 왼쪽 중간 마츠오 산[松尾山]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싸움이 끝난 후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때 서군을 배반한 공적으로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에 51만석을 하사 받아 오카야마 성[岡山城]의 성주가 되었지만, 2년 뒤인 1602년에 21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계속 배반자라는 비난을 받아 정신이 병들었다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망령에 괴롭힘을 받아 미쳤다는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츠키오카 요시토시[月岡芳年]의 괴제백선상(魁題百撰相)에 나오는 금오중납언(金吾中納言) 히데아키[秀秋]에게 원령(怨霊)이 되어 나타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1582년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 밑 마을에서 태어났다. 1584년 히데요시[秀吉]의 양자가 된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5]에 출진. 이때 미노[美濃] 오오가키 성[大垣城]의 성주로 관직은 쇼우쇼우[少将]였다. 이어서 우코노에츄우죠우[右近衛中将], 산기[参議]
[각주:6] 겸 곤츄우나곤[権中納言]으로 이례적인 스피드로 승직하였다. 1594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1.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본문으로]
  2. 이때 다른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는 텐노우[天皇] 나아가서는 텐노우의 대리인인 히데요시에게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였는데, 다이묘우들이 서약한 대상이 히데아키였다. [본문으로]
  3. 히데츠구의 실각이 나중(1595년)이며, 히데아키가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간 것은 1594년의 일. [본문으로]
  4. 지금까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合戦] 때 히데아키가 서군이었다는 시각이었으나(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 히데아키가 동군이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伏見城] 공격군의 총대장이었던 것도 있어), 근래에 들어서는 동군으로 참전했다는 시각도 있다. 정황증거로 마츠오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서군 이토우 모리마사[伊藤 盛正]를 쫓아내고 차지한 점, 이후 행해진 서군 군의(軍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 말단인 시마즈의 사츠마 병사들 역시 히데아키를 동군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런 동군으로 참가한 히데아키가 참전을 주저했던 것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내건 당근인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関白)직과 킨키[近畿] 근방에 2개국 가증에 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5.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6. 1590~92년 사이의 관직이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본문으로]

 1912년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徳寺]에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미츠나리의 유골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골격은 여성과 착각할 정도로 얇았다고 한다. 마치 히로사키 시[弘前市] 스기야마 가문[杉山家][각주:1]에 전해지는 미츠나리 초상화[각주:2]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풍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형의 사람은 고지식하며 비사교적, 유모어가 부족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자연이나 책 등을 사랑하는 지능형으로, 인간에 대해서는 냉담냉혹 한 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관련된 일화의 대부분에서 그런 특징을 옅볼 수 있다.

 미츠나리는 뛰어난 재치로 인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미츠나리의 출신지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근처에 있는 절에 심부름하는 아이[寺小姓]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는 15~16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로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매사냥을 하던 도중 목이 말라 이 절에 목을 축이러 온 것이다.
 미츠나리가 접대를 맡았다. 곧바로 차를 끓여 히데요시에게 권했다. 첫 번째로 내온  차는 커다란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7~80%를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맛있게 전부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뜨거운 차를 찻잔의 반 정도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이것도 다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아주 뜨거운 차를 작은 찻잔에 조금만 담아 내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이런 재치가 맘에 들어 절의 주지에게 청하여 미츠나리를 데리고 와 곧바로 시동으로 삼았다. 이렇게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미츠나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재능을 발휘하며 차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갔다.[각주:3] [각주:4]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호출하여 지금까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500석을 가증(加增)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우지[宇治], 요도[淀]의 양 천 기슭에 자라는 백성들이 맘대로 베고 있는 갈대의 예초권(刈草權)을 저에게 주신다면, 1만석에 상당하는 군역(軍役)을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미츠나리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양 천의 천기슭 수십 리 안에 있는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각주:5] 

 미츠나리 의 이러한 이재(理財)의 재능도 히데요시는 맘에 들었다. 더구나 미츠나리의 경우 그런 재능을 사욕이 아닌 히데요시에 대한 멸사봉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미츠나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은 주인에게서 받은 봉록을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긴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 써버리고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 단언하였다.

 이에 관한 일화로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島 左近]을,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의 절반 가까이를 들여 가신으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각주:6] 
 미츠나리는 뛰어난 무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도록 힘썼던 듯 하다. 그것도 히데요시에 대한 봉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츠나리 자신의 주변은 실로 꾸밈이 없고 수수했다.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패하여 거성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도 함락되었는데, 공격군의 병사가 성 안을 돌아보자 방은 모두 초벽(初壁)만 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판자만 덧댄 채였다. 마당에 정원수(庭園樹)도 없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도 굉장히 착실하였으며 다방면에 이르렀다. 밤중에 폭풍이 들이쳤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이미 성의 파손상태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즉 미츠나리는 이런 경우 철야를 해가며 성 안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역할을 해야 할 담당관은 10시 즈음이나 되어서야 보고하러 오는 꼴이었다.

 이상과 같은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주 히데요시에게 격한 말투로 간언(諫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에 임명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칭하게 되었을 때, 관백의 제대부(諸大夫) 12명[각주:7] 중 한 사람에 선정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토요토미 정권의 오봉행(五奉行)[각주:8] 중 한 사람으로 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No.1 실력자가 된다.

 미츠나리의 치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중요시했던 사카이[堺]의 총독을 1586년부터 1588년까지 맡았으며,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때의 병참, 하카타[博多]의 부흥,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와의 외교절충에 힘 썼으며,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히데요시의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1]에 출진,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서는 침략군의 운송과 병참, 무기 보급 등의 지휘를 취하였으며 감찰[軍監]까지 맡았다. 거기에 관백 히데츠구[秀次] 사건[각주:12],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13]에도 참여하는 등등 히데요시가 행한 중요정책 전반에 미츠나리는 중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했기에 히데요시도,
 “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자는 미츠나리뿐”
 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츠나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데요시 정권의 No.1 실력자였다.
 코우야 산[高野山]의 모쿠지키 상인[木食 上人]은,
 “미츠나리는 오봉행 중 제일인자인 듯이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는,
 “태합의 고굉지신으로, 그 위세는 비견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고,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는 가신인 코다마 모토카네[児玉 元兼]가 가지고 있는 명도(名刀)를 미츠나리가 원하였는데, 제출이 늦어져[각주:14] 미츠나리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라며 빨리 제출해 달라고 코다마 모토카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츠나리를 극도로 증오하는 무리가 있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등 창 한 자루로 돌격하며 출세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즉 무공파 무장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츠나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주제에 히데요시의 맘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난체하며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 건방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오대로(五大老)[각주:15]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천하제패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저 무공파 장수들은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격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 3월, 문치파의 좌장적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자, 무공파 칠장[각주:16]은 미츠나리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미츠나리는 이때 하필이면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 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각주:17], 이런 모습에서 당시의 정치상화 속에서 고립된 미츠나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각주:18]. 이 사건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를 강요당해, 천하는 이에야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은 대단원이었다. 대다수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각주:19]의 다이묘우는 미츠나리가 내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만으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츠나리의 중대한 오산이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패하여 도망치다 잡혔다. 그 뒤에 몇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의복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입던 옷을 주었을 때, 그것을 미츠나리에게로 가지고 온 자가,
 “이것은 우에사마[上様]가 하사하신 것”
 이라고 하자,
 “히데요리[秀頼]님 말고 우에사마는 따로 없을 터”
 라고 말하며 그 옷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잡힌 미츠나리를 내려다 보며 욕을 하였을 때,
 “무운 다하여 네 놈을 이러한 처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고 대답했다고 한다.

 10월 1일. 로구죠우 강변[六条河原]의 처형장에 끌려갈 때, 미츠나리는 너무도 목이  말라 경비하는 자에게 따스한 물을 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장 따스한 물을 구할 수 없어 경비무사는 대신으로 하라며 곶감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곶감이 가래병에 좋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경비무사는 지금 죽으러 가는 주제에 몸에 좋지 않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미츠나리는 말했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년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출생.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눈에 띄어 코우가[甲賀] 미나구치[水口] 성주가 되면서부터[각주:20] 출세하여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가 되었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선정된다. 1595년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 19만 4천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참모로 삼아 서군(西軍) 8만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하여 사형당했다. 41세.

  1. 미츠나리의 둘째 아들 이시다 시게나리[石田 重成]가 히로사키 번[弘前藩]으로 도망간 뒤 시게나리의 아들 요시나리[吉成] 때부터 스기야마 씨[杉山氏]를 칭함. [본문으로]
  2. 위에 있는 초상화. [본문으로]
  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작자미상의 일화 모음집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시게이에[重家]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8살 때 히데요시가 히메지[姫路]에서 츄우고쿠[中国] 방면을 담당했을 때부터 섬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후세의 군기물 ‘이시다 군기[石田軍記]에는 히데요시가 미츠나리의 후장을 파려고 시동으로 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갈대는 지붕을 만드는데 쓰이거나, 물건을 가리는 발(簾)을 만드는데 쓰였기에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미츠나리는 후에 이때 얻은 돈으로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백 기(騎)의 무사를 이끌고 와 히데요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고금무가성쇄기(古今武家盛衰記)’에 실린 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2만석을 떼어 주었다고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8.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1591년 1월의 오오사키-카사이의 난[大崎・葛西の乱]과 9월의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본문으로]
  12. 사실 미츠나리는 히데츠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츠나리는 칸토우[関東] 사타케 령[佐竹領]의 검지(検知)하기 위해 출장간 상태였다. [본문으로]
  13.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14. 살생관백 히데츠구[秀次]도 이 칼을 노리고 있었기에, 모토카네는 어느 쪽을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에 늦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6.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7.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사실 이 사건은 미츠나리 하나만 노린 사건이 아니라, 봉행파 다수를 노린 사건이었으나 은거를 하며 봉행직에서 물러난 것은 미츠나리 한명 뿐이라, 후세에 미츠나리만 공격받은 양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어 다이묘우가 된 무장들. [본문으로]
  20.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주가 된 적은 없다. 시마 사콘[島 左近]을 등용할 때 미나구치 4만석 중 2만석을 떼어 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퍼진 낭설로, 당시(1590) 미나구치의 성주는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였다. [본문으로]

 닛코우[日光]에 가면 토우쇼우 궁[東照宮][각주:1]에 있는 돌로 만들어진 오오토리이[大鳥居]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는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가 저 먼 큐우슈우[九州]에서 거대한 바위를 옮겨와 건조한 것이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힘들었을 듯한 이런 공정을 나가마사는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에도[江戸]에서 닛코우로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돌기둥 하나를 배 한 척에 싣고, 그 배의 양쪽에 굵은 밧줄을 연결한 배 두 척이 끌게 하였다. 육로로 옮겨지자 슈라구루마[修羅車]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나 큰 목재를 옮기는 수레에 싣고 수 마리의 소로 끌게 하였다. 닛코우로 가는 길은 흑토(黑土)라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두꺼운 널빤지를 200여 미터정도 빈틈없이 깔아가며 옮겼다.
 
오오토리이를 조립하는데도 고생하였다. 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상부에 돌을 얹어야 했는데, 나가마사는 근처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쌀, 보리, 메밀, 콩을 채운 가마니를 사 모은 뒤 이 가마니를 쌓아 발판으로 삼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돌을 끌어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천 명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였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호쾌한 기술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나가마사는 덩치가 컸기에 전쟁터의 모습은 괴물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가신(家臣) 시마 사콘[島 左近]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사'라고 경외 받았는데, 어느 날 갑주를 입고 살기를 풍기는 사콘을 보고 사콘의 부인조차 공포에 떨었다. 그러자 사콘은 "참 겁도 많으시군. 쿠로다 카이노카미[黒田 甲斐守=나가마사]가 갑주 입은 것을 보면 아예 기절하시겠구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터에서의 활약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는 나가마사의 부친 쿠로다 죠스이[黒田 如水] 때부터 쿠로다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나가마사는 전투에서 언제나 이 마타베에와 치열한 공적다툼을 벌였다. 가신들이 목숨을 아까지 않는 이런 무모한 모습에 간언하자,
"아버지(죠스이)가 안 계시다면 아들 타다유키[忠之]에게 선봉을 맡기고 나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겠지만, 아직 아버지는 건재하시다. 만약 내가 전사하더라도 우리 집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
 라고 말했다 한다.

 부친 죠스이의 교육 방침으로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형제처럼 자랐지만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욕하여, 둘은 어렸을 때부터 끝없이 싸웠다.[각주:2]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마타베에는 나가마사가 강 한가운데서 조선 장수[각주:3]와 필사적으로 격투하고 있는 것을 방관만하며 도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각주:4].
  나가마사에게는 마타베에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전의관(全義館)에 포진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마굿간에 침입하여 말을 잡아먹은 사건이 일어났다. 가신 칸 마사토시[菅 政利][각주:5] [각주:6]가 퇴치하고자 달려들었지만 호랑이는 더욱 날뛰었다. 마사토시가 위험에 처하자 마타베에가 달려들어 호랑이의 미간에 두 번 칼질을 퍼부어 겨우 잡았다고 한다. 나가마사는 마타베에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부대의 대장이라는 자가 축생과 싸우다니 이 무슨 짓이더냐?"하고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각주:7]

 1606년 결국 나가마사와 마타베에는 헤어진다. 나가마사가 노[能]를 관람하는 자리에서 마타베에의 아들 모토노리[基則]에게 작은 북[小鼓]을 치게 만든 것에 분노[각주:8]하여 마타베에는 1만6천석의 가록(家祿)을 버리고 쿠로다 가문을 떠났다.[각주:9]

 나가마사는 무용일변도인 외견과는 달리 굉장히 뛰어난 정략가(政略家)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죽은 뒤의 혼돈스런 정치정세 속에서 토쿠가와 정권수립을 위해 암약한 것이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토벌군을 일으켜 시모츠케[下野]의 오야마[小山]까지 갔을 때 이시다 미츠나리의 거병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여기서 토쿠가와 가문의 운명을 나누는 사상 유명한 오야마의 군의[小山の軍議]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야스를 따라온 다이묘우[大名] 대부분이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의 다이묘우였다. 거기에 미츠나리는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명령에 따라 토쿠가와 타도의 병사를 일으켰다고 하였다. 토요토미 계열의 다이묘우의 향배가 이에야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이때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존재가 급격히 클로즈업 된다. 히데요시가 손수 키운 맹장(猛將)이며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런 사내가 토쿠가와 편에 선다고 표명한다면 다른 장수들도 전부 이에 따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가마사는 이런 흐름을 민감히 캐치하여 이에야스에게 부탁받기 전에 마사노리의 진소(鎭所)를 방문하였다. 나가마사는 다음과 같이 마사노리를 설득했다고 한다.
  "미츠나리놈은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고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천하를 쥘 심산이다. 생각해보게나. 어리신 히데요리님에게 거병의 의지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마사노리는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무공파 다이묘우[武功派大名]의 대표격인 인물로, 문치파인 미츠나리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나가마사는 마사노리의 그런 증오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사노리는 나가마사의 교묘한 설득에 넘어가 단번에 미츠나리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켜 미츠나리와 싸우는 것을 맹세한 것이다.

 다음 날 열린 오야마 군의는 마사노리가 발언한 말에 따라 장수들은 전부 토쿠가와 측에 서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의 행동이 굉장히 기뻤는지 애용하던 투구와 말을 한 마리 주었다. 나중에 나가마사에게 치쿠젠[筑前] 52만 3천석이라는 거대한 영지를 준 것도 이 오야마 군의에서의 공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각주:10]

 정계의 막후 모사라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나가마사였지만 그의 부친 죠스이의 기량에는 결국 이르지 못했다. 나가마사는 항상, "나는 14살 때부터 여러 번 공적을 세웠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칭찬해 주지 않았다.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의 아들]는 천하의 누구나가 그의 무용을 칭송한다. 이는 요시나가의 부친 나가마사에게 특별한 무공(武功)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나가의 이름이 빛나는 것이다" 라고 하며 은근히 너무나 위대했던 아비를 갖았다는 것에 한탄하였다고 한다. [각주:11]

 그렇다고 하여도 부친 죠스이의 영향은 커 영지경영에 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친의 방식을 지켰으며, 임종할 때에도 아들 타다유키에게 오로지 죠스이의 노선을 지키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1568년생. 요시타카[孝高=죠스이[如水]]의 아들. 1589년 가문을 이어 부젠[豊前]의 6개 군(郡)과 카와치[河内] 탄보쿠 군[丹北郡][각주:12]을 영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출진하여 김해성(金海城) 공략. 1597년 정유재란에서는 직산(稷山)에서 1만의 명나라 군을 격파[각주:13].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부젠 18만석에서 치쿠젠[筑前] 52만석[각주:14]이 된다. 1623년 8월 4일 죽었다. 56세.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神社). [본문으로]
  2. 여담으로 쿠로다 죠스이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를 설득하러 갔다가 잡혀 유폐되었을 때, 마타베에의 백부 2명이 쿠로다 가문을 떠나는데, 마타베에도 함께 쿠로다 가문을 떠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를 섬긴다. 그러나 나가마사가 마타베에의 기량을 아까워해 다시 불러들였다. 오히려 죠스이는 배신자의 핏줄이기에 가까이 쓰지 말라고 하여, 나가마사는 쿠리야마 시로우에몬[栗山 四郎衛門]의 요리키[与力]로 삼아 100석만 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이응리(李應(応)理)라고 하는데 누군지 모르겠음. [본문으로]
  4. 당신의 주군이니 구하라고 하는 코니시[小西] 부대 사람의 말에 "내 주군이라면 저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오" 라고 고토우 마타베에는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나가마사는 간신히 이기고 나왔는데, 마타베에는 태연히 부채질하면서 구경하고 있었기에 벙쪄했다 한다. [본문으로]
  5. 菅은 '스게'라고도 읽는다. [본문으로]
  6. 사족으로 이 칸 마사토시는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島 左近]을 부상(혹은 사망)당하게 하는 철포대의 지휘관이었다. [본문으로]
  7. 물론 칸 마사토시도 함께 혼났다. [본문으로]
  8. 모토노리는 원래 작은 북을 잘 쳐 나가마사가 시킨 것이기는 했지만, 무사인 자신이 연극배우[能楽師]의 흥을 위해서 치는 것에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비인 마타베에에게 일러 일이 발생. [본문으로]
  9. 마타베에의 영지는 오오쿠마 성[大隈城]였는데, 이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興元]의 영지와 인접한 곳이었다. 쿠로다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는 호소카와 가문이 부젠[豊前]에 오기 전 영주인 쿠로다 가문이 치쿠젠으로 이동하면서 연공(年貢)을 싹슬이 가져가는 바람에 호소카와는 초기 영지경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만큼 쿠로다 나가마사를 미워했다. 나가마사 역시 자꾸 항의하는 호소카와 가문에 화가 나 가신들에게 호소카와 가문과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호소카와를 감시하고 압박을 주라고 배치한 마타베에가 오히려 호소카와와 친하게 지내자 나가마사가 자주 화를 내었기에 이런 불화가 쿠로다 나가마사와 코토우 마테베에 양측에 쌓인 면도 있다. [본문으로]
  10. 거기에 세키가하라 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가 배신하도록 암약한 것도 나가마사였다고 한다. 전투가 행해질 때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지 않자 초조해진 이에야스는 나가마사에게 사자를 보내 히데아키가 배신을 하는 것이 확실한지 다그칠 정도였다. 즉 히데아키는 나가마사가 담당했다. 여담으로 다그치는 이에야스의 사자에게 나가마사는, “히데아키가 배신할지 어떨지 내가 지금 그걸 어케 알어!! 싸우기 바쁜데 짜증나게 할래?”…라고 했다고 한다. 보고를 들은 이에야스는 짜증이 확 나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물어뜯어 피 철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그러나 효심은 깊어, 시즈가타케[賤ヶ岳]의 전초전인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 盛政]의 강공 때 사쿠마 군세의 공세에 놀란 죠스이가 죽음을 각오하며 부하 쿠리야마 시로베에[栗山 四郎兵衛]에게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하여 쿠리야마는 나가마사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은채 나가마사와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나중에 쿠리야마에게 이동지를 묻다가 사정을 알아챈 나가마사는 “아무리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아들이 아비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서 전장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덧붙여 이 시즈가타케에서 수급을 얻어 450석을 하사 받음. [본문으로]
  12. 전부는 아니고 쿠로다 나가마사의 시즈가타케 활약 450석 +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때 후방을 노리던 네고로[根来], 사이카[雑賀]를 격퇴하여 2000석 + 쿠로다 죠스이 가족 재경료 500석. [본문으로]
  13. 직산 전투를 말하는 것인데, 명나라 기병 4000에 쿠로다 5000의 격돌. 몇 차례 접촉은 있었으나 서로 물러났음. [본문으로]
  14. 치쿠젠 전부, 히젠[肥前] 2군(郡), 치쿠고[筑後] 2군을 포함하여 정확히는 52만2천4백여석. [본문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키운 무장들[秀吉の子飼い] 중에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와 함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무장이다. 둘 다 맹장(猛將)으로 유명한 것에 더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된 방식과 토쿠가와 정권하에서 멸문하게 되는 운명 등 둘은 비슷한 경력을 걸었다. 단지 키요마사 쪽은 아들 타다히로[忠広] 때 삭탈관직 당하지만, 양쪽 다 토요토미 은고의 토자마 다이묘우[外様大名[각주:1]]였기에 막부(幕府)가 판 함정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키요마사와 같은 오와리[尾張] 출신이다. 나이도 마사노리가 한 살 연상 혹은 동갑이라고 한다. 히데요시와는 아비 측의 연으로 어렸을 적부터 히데요시를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가 나무통 직공의 아들로 부친이 히데요시의 아비와 아비 다른 형제라고 하지만 속설이기에 확증은 없다.

 어쨌든 그 즈음에 이치마츠[市松]라 불렸던 마사노리는 츄우고쿠[中国] 공략군의 사령관으로 하리마[播磨]의 히메지 성[姫路城]를 본거지로 하였던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히데요시도 또한 모친 쪽 연으로 데려온 카토우 토라노스케[加藤 虎之助 =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이 이치마츠를 자신의 팔다리로 만들기 위해 곁에 두고 가르쳤다.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기대대로 용맹한 무장의 재능을 보이게 된다.

 1578년 하리마 미키 성[三木城] 공략 때 18살의 나이로 데뷔하여 공적을 세웠고, 그 후에도 톳토리 성[鳥取城],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각주:2]]에서 공을 세워 명성을 높여갔으며,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의 용장 하이고우 이에요시[拝郷 家嘉]를 쓰러뜨려 소위 ‘칠본창(七本槍[각주:3])’이라 용명을 얻는 수훈을 세워, 상으로 혼자서만 5000석을 하사 받아, 칠본창 중 다른 멤버들이 3000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세운 공적이 다른 멤버들을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마사노리는 히데요리를 따라 각지를 전전. 임진왜란 때도 조선에 출진했지만 1594년에는 귀국하여, 다음 해인 1595년 히데요시에게 칸파쿠[関白] 히데츠구[秀次]가 코우야 산[高野山]에서 할복을 명령 받았을 때 검시관에 임명되었다. 전쟁터의 마사노리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편으로 인정이 깊은 성격이기도 했다. 특히 은혜를 입은 토요토미 가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히데요시의 애미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가 병에 걸렸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호했다고 하며, 히데츠구가 배를 갈랐을 때는 그 가엾은 운명에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그 후 마사노리는 히데츠구의 영지였던 오와리 키요스[清須] 24만석으로 가증(加增) 받았는데, 이때 마사노리는 어렸을 적에 자신을 귀여워 해주던 지모쿠 사[甚目寺]라는 절의 늙은 비구니를 찾아, 예전 은혜를 갖는다며 먹을 것을 계속 보냈다. 더구나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히로시마[広島]로 옮기게 되자, 새로 오와리의 영주가 되는 마츠다이라 타다요시[松平 忠吉[각주:4]]의 가로(家老)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종래대로 늙은 비구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 후 떠났다 한다.

 인정가(人情家)이기도 한 마사노리는 그런 만큼 격정가(激情家)이기도 했다.
 히로시마로 옮겼을 때의 이야기로, 어느 날 측근 중 하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 이에 화가 난 마사노리는 이 측근을 굶겨 죽이고자 성 한 켠에 가두어 놓고 식사반입을 금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마사노리가 그 측근의 생사를 살펴보자 어찌된 일인지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냐고 열화와 같이 화내며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다도의 자리에서 시중드는 중[茶坊主]이, 자기가 그러했다며 그 측근은 예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측근이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억지로 먹였다고 하며, 측근을 대신해서 자기가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사노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중은 물론 유폐했던 측근까지 죄를 용서하였다.

 이러한 마사노리의 격정은 토요토미 정권의 행정관[奉行]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 문치파에 대한 격렬한 증오로도 나타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600년. 마사노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따라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토벌군에 종군하였는데, 이시다 미츠나리 거병 소식에 따라 열린 대책회의인 ‘오야마 군의[小山軍議]’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이에야스는 이미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나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 등 유력 다이묘우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는 하였어도, 진중에 있던 다이묘우들 대부분은 토요토미 가문에게 은의를 느끼는 다이묘우였으며 게다가 오오사카[大坂]에 처자를 두고 있었다. 히데요리[秀頼]의 명령을 바탕으로 한 미츠나리의 거병이었기에 다이묘우들이 동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츠나리와 한편이 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소. 즉각 오오사카니 돌아가시길.”
 자리에 있던 다이묘우들은 이것저것 재보고 눈치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츠나리의 거병은 히데요리 공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불과 8살의 어린 주군께서 그러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소. 즉 미츠나리 놈의 잔꾀일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마사노리는 나이후[内府=이에야스]와 함께 할 생각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마사노리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다른 다이묘우들도 잇따라 이에야스에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죽은 히데요시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고 또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생각함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마사노리가 이시다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이미 천하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이에야스의 앞길을 크게 넓혀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에서도 마사노리는 최전선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고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리한 동군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무장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것을 마사노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전투 직후 어느 사건을 너무도 강인하게 해결하고자 하여 마사노리의 앞날에 중대한 화근을 남기게 된다.

 세키가하라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사노리는 쿄우토[京都] 치안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연락할 일이 있어 사자(使者)인 사쿠마 카에몬[佐久間 加右衛門]를 쿄우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히노오카[日ノ岡]의 검문소를 점거하여 왕래하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던 토쿠가와의 직속 신하[旗本] 이나 즈쇼노카미[伊奈 図書頭] 휘하의 부하들과 말싸움을 하다가 이나의 부하들에게 사쿠마는 몽둥이에 맞고 쫓겨나 버린 것이다. 사쿠마는 마사노리에게 돌아와 사정을 보고하고 난 뒤, 마사노리의 허락을 받고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마사노리는 이때,
 “반드시 이나 즈쇼의 목을 자네의 무덤으로 가져오겠네”
 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쿠마의 자결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게 사쿠마의 목을 보내고선, 이나 즈쇼의 목을 달라며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재촉하면서 토쿠가와 측의 어떠한 타협안도 거부하여 결국 이나 즈쇼의 배를 가르게 하였다.

 어쨌든 마사노리는 세키가하라에서의 전공으로 아키[安芸], 빙고[備後] 2개 지역 49만8천2백석이라는 큰 영지를 얻게 되지만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시세가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뒤에도 오오사카의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여, 1608년에 히데요리가 천연두를 앓았을 때는 급거 히로시마에서 오오사카로 달려가 막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간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이 일어나지만, 마사노리는 겨울과 여름 양 전투에서 에도 성 잔류[留守居]를 명령 받았기에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았다. 물론 토요토미 가문을 소중히 여기는 마사노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막부의 처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토요토미 측이 은밀히 마사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마사노리는,
 “이에야스는 야전이 특기로 공성전은 잘하지 못한다. 오오사카 성[大坂城]은 돌아가신 타이코우[太閤] 전하[각주:5]가 세우신 천하제일의 성이니 이를 굳게 지키면 낙성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사자(使者)에게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오오사카에 있는 후쿠시마 가문[福島家]의 비축미(備蓄米)도 맘대로 쓰라고 했다 한다. 직접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내심 히데요리[秀頼]를 위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오사카 공성전으로 토요토미 가문은 멸망하여 토쿠가와 정권의 기반이 강고히 다져지자, 토요토미 가문과 끈이 강했던 다이묘우들에 대하여 매서운 숙청정책이 시작되었다.
 1617년 마사노리는 법도(法度)에 따라 홍수로 파손된 히로시마 성[広島城] 보수공사를 해도 되는지 막부에 요청하여, 노중(老中)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각주:6]]에게,
 “뭐 조금 정도 보수하는 것이라면 괜찮겠죠”
 라는 구두 언약을 믿고서 정식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채 보수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결국 이것을 ‘모반의 징조’라는 생트집에 잡혀, 1619년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 4만5천석[각주:7]으로 감봉되었다.

 더구나 마사노리가 죽었을 때 막부의 검시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유체를 화장하였다는 이유로 후쿠시마 가문은 모든 영지를 몰수당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561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清須]에서 태어났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5000석을 하사 받았으며, 1585년 이요[伊予] 이마바리[今治]에 10만석, 1595년 오와리 키요스 24만석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 공적을 세워 히로시마 49만8천200석이 되었지만, 1619년 실각, 4만5천석으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 1624년 죽었다. 64세.

  1.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후 토쿠가와 가문의 부하가 된 다이묘우. [본문으로]
  2.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죽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와 히데요시가 싸운 전투. [본문으로]
  3.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4.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의 넷째 아들. [본문으로]
  5. 히데요시를 말한다. [본문으로]
  6.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의 아들. [본문으로]
  7. 이 중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영지. [본문으로]

十四.

 참고로 이 다음해부터 다 다음해에 걸쳐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와 유대가 깊었던 다이묘우(大名)가 계속해서 죽었다. 아사노 나가마사(野 長政) 65세, 호리오 요시하루(堀尾 吉晴) 69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正) 53세,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50세, 아사노 요시나가(幸長) 38세 등이었다. 그들이 살아있었다고 하여도 – 가령 그것이 키요마사라고 하더라도 – 히데요리(秀)를 끝까지 보호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인물은 없었고 또한 막상 일이 벌어지면 자기 가문 보전이 우선이었기에 봉토와 자신을 따르는 가신단의 운명을 걸면서까지 위험한 도박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소위 '종명사건(鐘銘事件)'이 일어난다. 주조를 마친 호우코우 사(方寺)의 범종에 세이칸(韓)이라는 중이 지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이 글 중에 [국가안강(家安康)][군신풍락(君臣豊)]이라는 구절이 있어 이에야스(家康)가 말하길 자긴 이름 가운데에 안(安)자를 새겨 갈라 놓은 것은 목과 몸통이 떨어지라는 저주를 담은 것이라고 하였다. '군신풍락(君臣豊)', '자손은창(子孫殷昌)'은 토요토미(豊臣)를 왕(君)으로 하여 자손(子孫) 번창(繁昌)을 즐(樂)긴다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며, '그러니 히데요리님이 역심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하여 오오사카(大坂)측에 엄중히 따졌다.

 오오사카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하지만 요도도노(淀殿)와 그녀의 시녀단은 당황하면서도 이 오해만 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풀 생각에 몰두하였다. 곧바로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순푸(駿府)의 이에야스에게 보내는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불안했는지 카츠모토가 떠난 10일정도 후에 요도도노는 자신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오노츠보네(大卿局)를 정사(正史), 쇼우에이니(正尼)와 니이노츠보네(二位局)를 부사로 하여 파견하였다.

 그 두 사절단이 각각 돌아와서 보고한 것이 정반대였다.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말하는, '오오고쇼(大御所=이에야스)의 생각은' – 요도도노는 물론 오오사카 성의 부엌에서 물 긷는 하녀조차도 충격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순푸의 의향은 세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요도도노를 칸토우(東)에 인질로 보내라는 것. 두 번째는 히데요리의 영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 마지막으로 히데요리가 직접 칸토우로 와서 용서를 비는 것. 이것 말고는 이에야스의 분노를 풀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카츠모토가 순푸에 갔다 왔다고 하여도 직접 이에야스와 만난 것은 아니었다. 카츠모토는 거듭 청했지만 이에야스가 만나주지 않았기에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이에야스 측근으로 승려이자 책사인 텐카이(天海)등과 만나 겨우 이에야스의 의향이라는 것을 전해 듣고 왔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조금 늦게 간 노시녀단들과 허물없이 만났다. 기분이 좋으신 이 '순푸의 오오고쇼(大御所)'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며 종명사건 등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행동하여 반대로 노시녀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야스가 말하길,

 "히데요리님은 쇼우군(軍=토쿠가와 히데타다(川 秀忠)의 사위이기에 나에게는 손자와 마찬가지인 분. 거기에 요도도노는 쇼우군의 부인되시는 분과 자매관계이시니만큼 내가 그분들을 해칠 이유가 없지 않소?"

 라는 것이었다. 노시녀들은 기뻤다.


 양측의 보고를 받은 요도도노에게 이에야스와 직접 만나고 온 노시녀들의 보고야말로 진실이었고 그에 비해 카츠모토가 가져온 말은 굉장히 기괴했다. 카츠모토는 칸토우의 책략에 놀아난 것이거나 아니면 꿍꿍이가 맞아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요도도노를 인질로 한다거나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에서 나가라니 말이 되기나 하단 말인가?
 이제 요도도노의 감정은 카츠모토를 이대로 둘 수는 없다는 데까지 왔다. 곧바로 히데요리의 측근그룹을 모아 논의하게 하였고 그들은 카츠모토를 할복하게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우선 실행에 앞서 카츠모토를 소환했다. 카츠모토는 자신에게 처해진 위험을 눈치채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일족과 부하들과 함께 오오사카 성에서 무장한 채 빠져 나와 자신의 거성(居城)인 셋츠(
津) 이바라키 성(茨木城)에 처박혀 굳게 지켰다.
 이러는 일들이 벌어지는 사이. 이에야스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대로 요도도노들이 놀아나는 것을 보고 통쾌하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어리석은 자의 무모함에 소름까지 돋았을 것이다. 오오사카에서 물러난 카츠모토는 곧바로 칸토우에 부하를 보내어 이에야스에게 붙었다. 이 시대는 가문보전이 최우선이었기에 에도시대가 되어서야 이론화되고 정리된 충의사상을 카츠모토에게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카츠모토가 요도도노를 떠난 뒤에도 이에야스의 시나리오는 이어지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카츠모토가 전한 [칸토우의 요구]야말로 틀림없는 외교상의 정식 요구이며 절차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에야스는 말했다. 그것을 오오사카는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요구를 전한 카츠모토를 할복까지 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칸토우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그렇게 이에야스는 이유를 만들었다.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만들어졌다. 이에야스는 틈을 주지 않고 오오사카 토벌의 군령을 내렸다.

 이에야스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토요토미 가문은 당황만 할 뿐이었다.
 당황하면서도 사정이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 방어 준비를 해야 했기에 대규모 낭인을 모집하였다. 모병담당은 오오노 하루나가(大野 治長)였다. 하루나가가 카츠모토 퇴거 뒤의 토요토미 가문 재상이 되었다.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왕성할 때부터의 가신이었지만 오오노 하루나가는 말년의 히데요시를 잠깐 섬겼을 뿐 히데요시와의 인연보다는 다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하루나가는 요도도노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의 아들이었다. 하루나가에 이은 No.2로 군직(軍職)의 중추에 앉은 것이 히데요리의 유모의 아들인 키무라 시게나리(木村 重成)였다. 오오사카 성은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모르는 요도도노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의 파벌이 중추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여성들과 그녀들의 자식 밑으로 수많은 낭인들이 모여들었다. 세키가하라(
ヶ原)에서 몰락한 다이묘우(大名) 혹은 다이묘우의 일족이 옛 가신들을 이끌고 입성하는 경우가 가장 많아 쵸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 盛親)[각주:1], 사나다 유키무라( 行村), 모우리 카츠나가(毛利 勝永)[각주:2], 고토우 모토츠구(後藤 基次)[각주:3], 센고쿠 소우야(仙石 宗也)[각주:4], 오오타니 다이가쿠(大谷 大)[각주:5], 마시타 모리츠구( 盛次)[각주:6], 히라츠카 사마노스케(平塚 左馬助)[각주:7], 호리우치 우지히로(堀)[각주:8], 아카시 타케노리(明石 全登)[각주:9] 등이 그 주된 얼굴들이었다. 이들 낭인들에 토요토미 가문의 직신(直臣)들을 합치면 성 안의 인수는 12만 이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 중 여성의 수가 1만 정도 되었다. 여성들 대부분이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시녀들에 속하였기에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이 성의 특성을 상징하는 듯했다.

 한편 이에야스가 다이묘우들에게 명령을 내려 동원한 인수는 35만이 넘었다. 세키가하라의 배는 되는 규모로 하나의 성을 공격하는 인원으로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였다. 동원에 앞서 이에야스는 '쇼우군()에게 역심을 품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다이묘우들에게 제출하게 하였다. 옛 토요토미 계의 다이묘우들 역시 전부 제출하였으며 이는 물론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단 이에야스는 마사노리에게 불안감을 느껴 출진대신 에도 성(江) 수비를 명했다. 이에야스가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마사노리는 49만 8200석의 봉토를 버리면서까지 토요토미 가문과 함께 할 정도로 순박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는 개전에 앞서 히데요리에게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호의를 보였다. [토쿠가와를 따르십시오]라는 편지였다. [결코 칸토우를 거역하려 하지 마옵소서. 요도도노를 에도에 인질로 받치십시오. 또한 소인에게 도움을 바라지 마십시오. 만약 우다이진(右大臣=히데요리)님께서 오오사카 성에서 농성이라도 하신다면 소인은 에도의 쇼우군과 함께 오오사카를 공격하겠습니다]고 마사노리는 사자(使者)의 입을 통해 말했다. 요도도노는 격노하여 사자를 쫓아버렸다. 그녀는 정치적 고려보다도 인질로 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그녀는 마사노리의 사자를 쫓아버리기에 앞서 말했다.

 "나는 노부나가공(信長公)의 조카이네. 죽은 타이코우(太閤=히데요시)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조차 싫었는데 이제 또 이에야스와 이불을 같이 쓰라니! 생각만해도 불쾌하네"

 라 말했다. 사자는 정신이 선녀가 있다는 먼 별나라로 가는 듯 했다. 이에야스가 요구한 에도에 인질로 오라는 말은 이불을 같이 쓰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야스가 아무리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40이 넘고 자존심만 센 아줌마에게 손을 뻗칠 사람도 아니었고 그런 종류의 취향도 없었다. 그러나 요도도노는 이런 식으로 뭐든 자신의 육체를 매개로 해서만 생각을 하였기에 자신도 모르게 저런 격한 말투로 나오지 않았을까? 원래부터 요도도노에게는 정치적 즉 냉철한 이성과 예리한 고려를 필요로 하는 사고(思考)가 불가능하였으며 또한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자 한 적도 없었다. 단지 운명이 그런 사고를 필요로 하는 장소에 그녀를 배치하였을 뿐이며 또한 그녀는 그곳에서 그때그때 생겨난 감정에 충실히 따르고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오오사카 포위를 완료하였고 자기 자신도 직접 출진하여 그의 직할대가 10월 22일 오우미(近江) 쿠사츠(草津) 북쪽 나가하라(永原)에 도착했을 때, 미리 오오사카 성안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들여보냈던 마에니와 한뉴우(前庭 半入)가 돌아와 보고하였다. 그의 첩보에 따르면 오오사카의 장수와 병사들은 요도도노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한다. 요도도노가 직접 군령을 내리기에 만사가 혼란스럽고 또한 오해를 불러 실무가 이루어지질 않아 의욕을 잃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럴 테지"

 이에야스에게 이것만큼 기분 좋은 첩보는 없었다. 예로부터 성은 바깥의 무력으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불화로 인해 무너진다고 하기에 공격군의 총수에게 이보다 나은 소식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었나?"

 하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그 실례를 듣고자 하였다. 마에니와 한뉴우는 상세히 열거하였는데 요는 무장보다 요도도노의 시녀가 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뉴우의 말에 따르면 요도도노와 그녀의 유모인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모집된 낭인들을 신용하지 않아 감시로써 통솔코자 하였다. 이 때문에 요도도노와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여성이면서도 금과 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갑주를 두르고 역시 화려한 갑주에 나기나타(薙刀)를 든 시녀들과 성의 이곳 저곳을 순시했다고 한다. 낭인들 대부분은 바다 건너 조선과 세키가하라 등 여러 전쟁터를 전전했던 자들이었기에 이 감시가 오히려 사기를 저하시키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한술 더 떠 히데요리는 기묘한 인물이라고 한뉴우는 말했다. 농성하는 무장들과 병사들은 여성들에게 감독 받는 것을 꺼려하며,

 "우리들은 히데요리공에게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달려 온 사람들이오. 그런데도 히데요리공은 거처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시질 않아 존안도 알 수 없소. 이러한 대장은 고금에 예가 없소"

 고 모두 떠들어대며 '부디 저희들 앞에 모습을'이라고 오오노 하루나가에게 졸랐다.
 때문에 히데요리는 단 한번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것도 각 부대별로가 아니었다. 우선 무사 신분 이상인 사람들을 주성곽(本丸)의 대청(
大廳)과 그 앞마당에 발 디딜 틈 없이 집결시킨 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히데요시 이래 토요토미 가문의 부대 표식(馬標)인 황금 표주박이 세워져 그것을 열석한 자들이 올려다 보게 하였다. 열석한 무장들은 그것을 보고 왕년을 떠올리며 용기를 북돋았다. 그때 히데요리가 나타나,
 - 모두 수고.
 단지 그 한마디를 조그맣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뿐이었다.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모습도 볼 수 없었기에 웅성대고 중얼거리며,

 "이래서는 저 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없다"

 고들 말하며 어깨를 떨구었다.
 그 뒤에도 해산하지 않고 더 나와 줄 것을 요구하자,

 "어머님께서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는 답변이 되돌아 왔다.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의 안전을 생각하여(낭인들 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섞여있을지도 모르기에) 절대 거처에서 내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나이 22이나 되는 토요토미 가문의 당주가 모친이 하는 말만 듣고 총사령관으로서 해야 마땅한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은 뭐라 말해야 한단 말인가?
 - 우둔하신 분.
 이라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렇지 않네. 저분의 서체를 본 적이 있는데 엄청난 필적(筆跡)이었지. 그러니 우둔하신 분이 아닐세, 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히데요리님은 핏덩이였던 시절부터 주위는 전부 여성들뿐이었고 또한 여성들의 손에 의해 커오셨다. 그것도 고급 귀족(公卿)식으로 자라셨다. 더구나 성의 바깥이라는 것을 아시지 못한다. 이에야스와의 대면을 위해서 니죠우 성(二条城)에 갔을 때를 제외하곤 아주 어리실 적에 스미요시(住吉)의 바닷가에 놀러 가신 것이 유일한 것이라 한다. 여러 특이한 성장환경 때문에 많은 무사들 앞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하신, 말하자면 기형적인 남성이 되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데요리 옹호론자조차 히데요리가 직접 격려해주길 바랬다.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조차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으며 그런 주장을 사나다 유키무라, 고토우 모토츠구 등 낭인대장이 오오노 하루나가에게 요구했다.
 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의 아들은 당연히 자신의 모친에게 청했다. 모친은 요도도노와 상담했다.
 - 안 된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라는 것이 절대 변하지 않는 답변이었다. 그녀에게는 에도의 인질이 되지 않겠다는 것과 히데요리를 건물 깊숙이 숨겨 놓고 무사들 앞에 내보이지 않겠다는 것이 같은 비중이었다. 그 방침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녀는 오히려 죽음을 선택할지도 몰랐다. 아니 선택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는 다른 노시녀들인 쇼우에이니(正栄尼), 니이노츠보네(二位局), 아이바노츠보네(饗庭局), 아챠노츠보네(
阿茶局), 아코노츠보네(阿古局) 등과 상담한 끝에 대신할 수 있는 자를 내보내 무사들을 납득시키기로 하였다. 성안에,
 - 사에몬님(
左衛門)
 라는 존귀한 인물이 있었다. 오다 우라쿠(
織田 =노부나가의 동생)의 적자였다. 우라쿠는 요도도노의 혈연이었기에 자신의 아들과 함께 오오사카 성에 살고 있었으며 오다 가문이라는 존귀한 가문 출신일 뿐만 아니라 관위가 종사위하(四位下)에 전(前) 지쥬우()였다. 그런 우라쿠의 아들인 사에몬[각주:10]이라면 성 안의 무사들도 기뻐할 것이다. 요도도노의 노시녀들의 생각으로 무사나부랭이들은 히데요리의 존귀함에 동경하고 있으니 히데요리가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그에 버금가는 존귀한 젊은이를 내보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에몬님. 성 안을 돌아봐 주지 않겠습니까?

 하고 요도도노는 친족이었기에 편안함을 가지고 부탁하였다. 사에몬은,

 "귀찮아요. 귀찮아"

 하며 응석을 부리듯이 목을 저었지만 결국 히데요리의 대리인으로서 순찰을 맡게 되었다. 선척적으로 경솔한 인물이었다. 거기에 부친 우라쿠가 토쿠가와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정신으로 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담으로 우라쿠와 그의 아들 사에몬 나가마사(左衛門 長政[각주:11])는 후에 토쿠가와의 다이묘우가 되어 야마토(大和) 시바무라(芝村) 1만석을 영유하였고 그 가계(家系)는 메이지(明治) 시대까지 이어진다.

 순찰은 매일 1회였다. 사에몬의 무장은 금색 비늘을 붉은 실과 보라색 실로 엮은 화려한 갑주를 입고 말을 탄 무사 7~8기를 이끌고서 순찰을 돌았지만 차츰 귀찮아져 총애하는 유녀(遊女)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 이름이 시치쥬우로우(七十朗)라는 유녀로 갑주, 두 자루의 칼, 등 뒤에 매는 풍선 같은 화살막이 등을 모두 새빨간 색으로 물들인 여성을 데리고 일곱 군데의 초소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어느 날 밤, 불침번을 서고 있던 무사가 졸고 있던 것을 발견한 사에몬은,

 "시치쥬우로우! 죽여라!"

 고 들고 있던 나기나타로 졸고 있는 무사의 목을 베도록 명령했다. 시치쥬우로우는 명령대로 하였다. 유녀에게 목이 베인 무사의 불운도 그러했지만 이런 사에몬의 방식에 다른 낭인들이 분노하여 자신들의 대장에게 불만을 표했다. 그 7명의 대장 – 사나다 유키무라, 고토우 모토츠구, 쵸우소카베 모리치카 들은 오오노 하루나가에게 이를 항의했다. 하루나가도 이것만큼은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사에몬에게 간언(諫言)하자,

 "그 아이는 히데요리님에게 보내는 사자(使者)로 쓰고 있소"

 하고 강변했기에 하루나가도 그 이상 말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는 그 자란 환경 탓으로 남성을 향해 뭔가를 말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좋아하지 않아 여성을 상대로 말하는 편이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나왔다. 그 유녀는 그런 히데요리를 생각하여 전령으로 쓰고 있다. 때문에 그녀를 데리고 다닌다는 오다 사에몬의 말에 하루나가도 그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히데요리라는 인물은 일족인 오다 사에몬에게조차 그런 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 이에야스는 전날 밤 마에니와 한뉴우의 보고를 듣고 처음에는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니죠우 성에서 보았던 저 위풍당당한 미장부는 몸만 크고 안은 소문대로 '우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쳤다.

 소위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冬)은 이에야스에게 있어 포위와 공갈과 외교만으로 끝났다. 이에야스가 성을 조금 찔러보았지만 농성중인 낭인무리들은 이외일 정도로 강하여 첩보와는 달랐다. 추측하건대 낭인들은 자신들을 직접 지휘하는 장수로 뛰어난 무장을 만날 수 있었기에 토요토미 가문의 내부사정에 실망하면서도 막상 전투에서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하면 그들 낭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성을 버린다 하여도 그들에게 편안한 여생이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었고 그 때문에 승패가 어느 쪽으로 갈리건 이곳을 죽을 장소로 각오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에야스는 강화 협상을 제안했다.

 이에야스는 야전의 명인이라 일컬어지고 있었지만 공성(攻城)은 서툴렀고 자기자신도 꺼려했다. 그 이에야스의 약점을 세상도 알고 있었고 오오사카 측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이 강화 제안을 일축했다. 완고히 거부한대에는 이에야스가 먼저 강화를 제안한 것을 보고 승리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가 변했다. 왜냐하면 이에야스가 예전 토요토미 가문의 가로(
家老)인 카타기리 카츠모토 (그는 주인을 바꾸어 이에야스의 진영에 있었다)에게,
- 요도도노는 성의 어느 쯤에 있는가?
 라는 것을 물었다. 카츠모토는 성 내부를 그림으로 그려 가리켰다. 이에야스는 이번 공성전을 위해서 네덜란드 상인에게 대포(
佛郞機) 3문을 구입해 두었었고 그것을 전면에 배치하여 12월 16일 아침 일제히 발사시켰다. 그 중 한발이 텐슈(天守)의 기둥 중 하나를 부수었으며 거기에 또 한발이 요도도노가 살고 있는 건물의 시녀들 거소에 떨어져 찻장을 가루로 만들었다. 요도도노는 그곳에서 매일 아침 높은 신분의 시녀들과 함께 아침 차를 마시는 것이 일과였는데 때마침 그러던 중이었기에 여성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였고 요도도노도 그 소동에 휘말려 공포를 느껴 결국 이에야스의 신청에 굴복하여 강화를 받아들였다.

 이에야스가 제시한 강화조건은 오오사카 성 외부 해자(垓子)를 메우자는 것으로 요도도노 모자도 그것을 승낙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작업에 곧바로 수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눈깜짝할 새에 외각 해자를 메웠을 뿐만 아니라 성안에 침입하여 두 번째 성곽(), 세 번째 성곽()의 내부 해자도 메웠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토담이나 망루도 부수었다. 요도도노는 그 소식에 놀라 항의하기 위해 오타마노츠보네(お玉局)라는 시녀를 보냈다. 오타마는 성안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일컬어지고 있었으며 나이도 어리고 영특했다. 그녀는 작업현장에 가서 감독자인 나루세 하야토노쇼우( 隼人正[각주:12])와 안도우 타테와키(安藤 帯刀[각주:13])라는 이에야스의 부하 장수와 만났지만 그들은 즈질스런 말들을 하며 오타마를 놀려 그녀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게 만드는 한편 작업을 계속 진행해 나갔다. 오타마는 어쩔 수 없이 쿄우()에 올라가 이에야스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에게 항의하였다. 마사노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야토노쇼우, 타테와키 녀석들은 무례한 놈들이군요. 반드시 혼내겠습니다."

 고 말하여 오타마를 돌려보냈지만 그러나 마사노부들은[각주:14] 이에야스가 쓴 시나리오의 배우이기도 하여 단순히 연극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오사카의 여성들은 단지 놀림감일 뿐이었다.

 다음 해 봄. 화의가 결렬되었다.
 이에야스에게는 예정된 결렬이었다. 그는 다시 60여주의 다이묘우(
大名)들을 전부 모아 대군을 일으켜 그들을 오오사카에 집결시켰다. 상기의 책략 – 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린애 눈속임 – 으로 오오사카 성은 벌거숭이나 마찬가지인 이상 자신이 서툴러하는 공성전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토요토미 가문은 불과 3일 동안 치른 전투로 무너졌다.
 낭인들과 그 낭인출신의 여러 무장에게 있어서는 이 괴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이 벌거숭이가 된 이상 성을 버리고 성밖 출진이라는 자살적 전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투의 스페셜리스트들은 해자가 메워진 다음부터 자신들의 운명에 절망하였지만 그 절망이 성밖의 여러 전장에서 엄청난 활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전쟁 역사상 이 소위 여름의 전투만큼 수 많은 전사자를 낸 싸움이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 낭인들의 괴물과 같은 활약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 시텐노우지(
四天王寺) 방면의 전투에서는 몇 번에 걸쳐 이에야스의 직할군이 패주하였다. 그 방면 지휘관이었던 사나다 유키무라 등도 이 절망적인 상황에 단념하고 있었으면서도 일시적으로 찾아온 국지적 승리에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여,

 "지금 히데요리 공이 출진하신다면!"

 하고 목마른 자가 물을 떠올리는 심정으로 열망하여 여러 번 후방 오오사카 성에 사자(使者)를 보냈다. 유키무라가 보기에 진두에 히데요리의 부대 표식인 황금 표주박만 뜬다면 막부군의 옛 토오토미 계열 다이묘우(大名)나 사졸들은 그것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기세가 눌릴 것이다. 그 틈을 계속 밀어붙이면 만에 하나라도 활로가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전선에서의 출진요청에 대해서도 요도도노는 반대했다. 위험하다 – 고 하였다. 유키무라가 보낸 급사가 수 차례에 이르렀을 때 오오노 하루나가는 결국 요도도노를 통하지 않고 히데요리 앞에 나아가 직접 결단 내리라고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이외로 히데요리는 선선히 출진하겠다고 하였다.
 - 말을 내오라고 하신다
 라는 것이 친위기마병이나 참모, 전령 등 친위대에게 전해졌기에 그들은 크게 사기가 올라 히데요리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 성문 안쪽에 도열하였다. 그 친위대의 군용(
軍容)은 히데요시 때부터 전해지는 것으로 황금 표주박의 큰 부대 표식, 황금 종이를 잘게 나눈 작은 부대 표식, 검붉은 후키누키(吹貫) 10개, 대모갑 코팅의 창 천 자루 거기에 히데요리의 말로 타이헤이라쿠(太平)라는 이름의 위풍당당한 말에 나시지(梨子地)의 안장이 얹혀져 이끌려 나오는 이 광경에, 타이코우(太閤)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며 잡병들 중에는 소리 높여 우는 병사조차 있었다.

 그들은 기다렸다.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당사자 히데요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요도도노가 그것을 알고 막았다고도 하며 히데요리의 출진과 함께 성안의 내응자가 봉기한다는 소문을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가 듣고 제지했다고도 하는데 어쨌든 히데요리는 결국 나오지 않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선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가 전사했다.

 그 뒤 막부군이 성안에 난입하여 성은 사실상 낙성되었다. 하지만 요도도노와 그 아들의 모습이 없었기에 이에야스는 성안을 탐색시켰다. 밤이 되어 모자가 측근들과 함께 화제 속에서[각주:15] 운 좋게 제 모습을 간직한 식량창고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카타기리 카츠모토가 이에야스에게 보고하였다. 이 모자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에야스도 이 추태에는 할 말을 잊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하고 이에야스는 생각했다. 부하 무장들은 죽었고 성이 함락되었으며 성안은 전부 막부군에게 점령당하였는데 성주와 그 모친만이 창고에 처박혀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미의식으로 보면 정상이 아니었다.

 이에야스는 그 창고를 포위하고 어쨌든 날이 밝는 것을 기다렸다. 이 광경은 이제 전쟁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창고에 숨어든 쌀도둑을 포졸들이 포위하고 있는 듯한, 그러한 정도로까지 전락되었다. 이러는 동안 요도도노는 마지막 행동에 나섰다. 오오노 하루나가를 창고 밖으로 내보내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이에야스에게 빌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묵살했다.
 날이 밝았지만 창고는 침묵을 지켰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이에야스의 마음에 자비심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포위하던 병사들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총을 들어 일제히 쏘아댔다. 이에야스의 의사였다. 탄환은 벽을 뚫지는 못했지만 그 총성은 이에야스의 의사를 창고 안으로 전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공격군의 사졸들도 창고 안에 있는 존귀한 분들이 일본의 관습대로 자해하여 그 마지막을 장식해 주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총성으로 창고 안 사람들은 절망한 듯했다.
 곧이어 흰 연기가 내부에서부터 피어 오르는 것을 밖의 사람들은 보았다. 창고 안의 존귀한 분들이 그제서야 자살을 결심하고 완료했을 것이다. 흰 연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화염으로 변하였고 그 화염은 점점 커져 지붕을 기우뚱하게 하더니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 불탄 자리에서 남녀 20명 정도의 유골이 재가 되어 나타났다. 그 36㎡의 불탄 자리가 토요토미 가문 최후의 장소가 되었다. 1615년 5월 8일 정오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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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리에게는 사세구(辭世句)가 없다. 사세구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이나 마음 속을 추측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23년의 생애 속에 남기지 않았다. 히데요리는 그림자와 같이 살았으며 죽었다. 그 죽음도 아마 다른 사람이 그 손을 잡고 힘을 가해 불문곡직하며 죽음으로 인도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 광경도 잔인했을 터이지만 그 죽음은 이후 역사에 시로도 노래로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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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이 가문은 멸망했다. 이렇게 훑어보니 토요토미 가문의 영화(榮華)는 히데요시라는 천재가 낳은 한 겹의 환영(幻影)과 같다는 생각조차 든다.

  1. 시코쿠(四国)에서 날렸던 쵸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 元親)의 네째 아들. 입성 전에는 쿄우토(京都)에서 서당(寺子屋 - 우리네의 서당과는 조금 다르지만)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원래 성은 모리(森). 오와리(尾張) 출신으로 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毛利)와는 혈연적인 연관은 없지만, 히데요시가 모우리(毛利)라는 성을 쓰게 만들었다(여기에는 그의 영지가 코쿠라(小倉)라는 모우리 씨를 견제하기 알맞은 곳이며 그런 곳에 둔 만큼 모우리 씨의 감정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었기에 삭탈관직. [본문으로]
  3. 보통 고토우 마타베에(後藤 又兵衛)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세키가하라 때 실질 부사령관 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의 부하 장수였지만, 고토우 모토츠구를 필생의 라이벌로 여긴 쿠로다 나가마사의 이지메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왔지만 역시 나가마사의 방해 공작으로 다른 가문에 취직 못하고 거렁뱅이짓을 하다가 입성. [본문으로]
  4. 만화 '센고쿠'의 주인공 센고쿠 히데히사(仙石 秀久)의 둘째 아들 겸 적남(嫡男). 원래 이름은 센고쿠 히데노리(仙石 秀範)였으나 세키가하라(関が原)에서 부친과 달리 서군편에 서서 폐적. 당시 쿄우토(京都)에 있는 서당(寺子屋)에서 글자 이쁘게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함.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의 참모장 격이었던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아들 혹은 동생. 세키가하라에서는 눈이 멀었던 아비를 대신해 꽤 활약. 전후 이곳저곳 도망다니다 입성. 오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는 그의 누나의 남편 즉 매형인 사나다 유키무라의 부대에 속하여 활약하다 전사.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소위 다섯 행정관(五奉行) 중 하나인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의 아들. 겨울의 전투 까지만 해도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이며 어삼가(御三家) 필두 요시나오(義直)에 속해 있었으나 무슨 생각인지 여름의 전투에서 망해가는 오오사카 측으로 돌아서서 전투 중 사망. 즉 이 당시는 아직 토쿠가와 측에 있었음. [본문으로]
  7. 세키가하라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부대에 속하여 활약한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 為広)의 아들. 그에 대해선 이름(諱)조차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아무 기록이 없다. [본문으로]
  8. 키이(紀伊)의 호족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 氏善)의 적남. 또한 이르을 신구우 유키토모(新宮 行朝)라고 한다. 개전 전에는 키이를 영유한 아사노 가문(浅野)에 속했으나 너무 박한 연봉에 박차고 나와 떠돌다가 키이를 준다는 약속에 입성. 엄청난 달변가였는지 성안의 사기를 높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고 함...마치 그의 선조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 行家)처럼.. [본문으로]
  9.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편에서 뚜렷한 무사관을 펼치던 히데이에를 가볍게 무시한 그 무장. [본문으로]
  10. 오다 우라쿠의 둘째 아들이자 적남 오다 요리나가(織田 頼長). 급격히 변하는 성격은 그의 큰아버지 노부나가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는 사에몬이 아니라 사몬(左門)이다. [본문으로]
  11. 오다 우라쿠의 넷째 아들. 상기의 인물과는 다른 인물이다. 오다 우라쿠의 영지를 이어받는다. [본문으로]
  12. 나루세 마사나리(成瀬 正成). [본문으로]
  13. 안도우 나오츠구(安藤 直次) [본문으로]
  14. 해자를 메우는 담당관은 상기의 안도우 나오츠구, 나루세 마사나리 그리고 마사노부의 아들인 마사즈미(本多 正純)이다. 본문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내부해자도 메우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다. 다만 외부해자만 막부가 메우기로 하고 내부는 오오사카 측이 메우기로 하였지만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막부가 밀고 들어가 메우는 김에 담, 문, 망루 등도 무너뜨렸기에 오오사카가 분노하게 된다. [본문으로]
  15. 화제는 성안에 있던 사람이 마구간에 불을 질렀고 그것이 번졌다고 한다. 오후 4시 즈음이라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