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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다신겐'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08.01.12 타케다 신겐 4
  2. 2007.12.29 타케다 노부토라 5
  3. 2007.03.01 가모우 우지사토
  4. 2006.04.01 우에스기 켄신 8
  5. 2005.11.01 무라카미 요시키요 8

타케다 신겐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8. 1. 12. 00:50 Posted by 발해지랑

다케다 신겐[武田 信玄]

1573 4 12일 병사(病死) 53.

1521 ~ 1573.

카이[甲斐] 슈고[守護][각주:1]. 이름은 하루노부[晴信]. 아비인 노부토라[信虎]를 쫓아내고 가독(家督)을 차지. 시나노[信濃]를 침공하였고,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과 다섯 번에 걸쳐 카와나카지마[川中島]에서 싸웠다.[각주:2] 스루가[駿河]를 차지한 후 상락(上洛)[각주:3]을 개시[각주:4],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를 미카타가하라[三方ヶ原]에서 쳐부수지만 노다 성[野田城] 포위 중에 병으로 죽었다.








신겐의 사인



 '코우슈우 법도[甲州法度]'를 만들어, '천하 전국에 있어서는……[天下戦国……]'을 언급하며, 왕도(王道)국가 실현을 목표로 했던 타케다 신겐은 1573 4 12 53세의 나이로 시나노[信濃] 이나 군[伊那郡] 코만바[駒場]에서 불귀의 이 되어 버렸다.


 그 사인에 대해서는 철포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는 설과 병사설(病死說)이 난무하며 유포되었다.
 
철포설은 '미카타하라 전투기[三方原合
]', '무덕편년집성[編年集成]'[각주:5] 등 그 외에도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탄환에 맞은 자리라는 곳도 미간, 귀 근처, 넓적다리 등이 있어 여러가지 억측, 풍문 등이 섞여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에 대해 병사설도, '갑양군감[甲陽軍鑑]', '칸토우 칸레이 기[東管領記]'를 시작으로 많이 있는데, 사실적으로 보자면 후자 쪽이 물론 옳으며, 그 병 상태는 1570년 즈음부터 서서히 자각 증상을 느낄 정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조바심이 서상작전(西上作戰)강행(强行)으로 이어진 것이다.


 병사설의 근본 사료로써는, 미슈쿠 켄모츠[御宿 監物][각주:6]의 보고서나 '현공 불교에 대한 말씀[玄公事法語]' 등이 있다. [코우요우군칸]을 보면 품 제39에,

계유(癸酉) 2월 중순에 전장(戰場)에서 네 곳에 뜸을 뜨시고 몸에 좋은 약을 여러가지 취하셔서 몸이 나아지셨다
라고 쓰여 있지만 곧이어 악화되어 임종의 때를 맞이해 버린 것이다.


 갑양군감에는

4 11일 미시(未の刻)[각주:7]부터 신겐공 상태가 나빠지셔서 맥박이 굉장히 빨라졌으며, 또한 12일 밤 해시(亥の刻)[각주:8] 토하면서 이빨 5~6개가 빠졌다. 그때부터 차츰 약해지며, 이미 죽은 목숨이니 맥이 뛰고 있을 때 말해두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며, 후다이[譜代]사무라이다이쇼우[侍大将]들과 일문(一門)들을 불러들여, 6년 전 스루가[駿河]로 출진하기 전에 이타자카 호우인[板坂法印][각주:9]이 말하길 [카쿠()]이라는 병의 징후가 있다고 했을 때 조심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굉장히 진상에 가까운 기록일 것이다.


 미슈쿠 겐모츠의 보고서를 보아도,

폐와 간(肺肝)을 아프게 하던 것이 배로 전이되어 편안치 못하시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
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쿠마가이 가문 전기[熊谷家]'를 보면,
11일 밤. 총대장 신겐 공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공성(攻城)의 포위를 풀고 진을 물리셨다. 날이 밝은 12일 네바[根羽]에서 숨을 멈추시다(중략), 타구치[田口]의 후쿠덴 사[福田寺]에 머무시던 밤에 이빨 6개가 빠졌으며, 이 병은 곽(癨)[각주:10]이라는 풍문을 들었다
고 한다.


 이런 여러 설을 종합하여, 메이지[明治] 시대에 야마나시 현[山梨県][각주:11] 현립병원장을 역임했던 의학사(醫學士) 무라마츠 가쿠스케[村松 佑]가 병명인 '(카쿠()'이라는 것은 위암(胃癌)의 옛날식 호칭으로, 또한 '폐와 간(肺肝)'이라는 것도 오장(五臟)이라는 뜻이기에 신겐의 죽음은 필시 위암일 것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후 이 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학회에서 인정 받고 있다.


'3년간 상()을 숨기라'는 유언


 이러한 신겐의 죽음이 국내외에 끼친 영향은 거대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신겐을 마음속으로 따르던 중신(重臣)들이었으며, 동시에 신겐도 또한 통한의 미망(迷妄)에 잡혔을 것이라 생각된다.


 몇 개인가의 유언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3년간 상을 숨기라'는 것이 있다. 만약 신겐의 죽음이 적국(敵國)에 알려진다면, 그야말로 총반격을 맞이하여 타케다의 영토는 곧바로 위기와 혼란에 빠질 것이기에 적어도 3년간은 죽음을 숨기라는 것으로, 그렇기에 장례식도 치르질 않았고 형식적으로는 비밀이 지켜진 것이었다.


그러나 후계(後繼)의 비밀은 3개월 만에 깨어져, 후계자인 카츠요리[頼]도 부친의 죽음을 끝까지 숨기지만은 안았다. 오히려 갑양군감 품 제39에 기록되어 있는 유언 부분은 격조(格調) 높고 감동이 담긴 문장이 쓰여 있어, 가슴을 울리는 것이 있다.

……신겐공 고통을 참으시며 말씀하시길,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감히 우리 땅에 침입하는 놈이 없을 테니 3년간 방비를 철저히 하라며 눈을 감으셨지만, 한편으론 야마가타 사부로베에[山県 三兵衛][각주:12]를 불러, 내일은 자네의 깃발을 세타[田][각주:13]에 세우라고 말씀하시며 마음이 흔들리셨다. 그러나 조금 뒤 눈을 뜨시며 말씀하시길,

대부분은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도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다
(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하단 역자 주)’
고 말씀하셨다. 53세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내일의 이슬로 사라지셨다


 이렇게 신겐의 '3년간 상을 숨겨라'는 것은 굳게 지켜져, 많은 모순을 품으면서도 뒤를 이은 카츠요리는 1575 4 12 부친의 죽음으로부터 3년 뒤에 중신인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코우야 산[高野山]에 파견하여 법요(法要)를 치르게 함과 동시에, 다음 해인 1576 4 16일에 신겐의 장례식이 보제사(菩提寺)인 에린 사[恵林寺]에서 카이센[快川] 도사() 맡아 성대히 치러졌다.


Ps; 이 글을 쓰신 분은 우에노 하루오[上野 晴郎]. 타케다 가문 연구에 대해선 꽤나 유명하신 분 같으신데, 대부분 고어로 쓰신 글이라 그야말로 oTL. 누누이 말씀 드렸다시피 전 고어를 잘 모릅니다(--;) 전부 의역이니 실제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돌 날라오기 전에 피해야지~)

Ps2; 이 글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실 분 대환영입니다.


하단역자 주


신겐의 죽을 때 남긴 시(世辞)는 일본에서도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 같습니다.

가령 http://www5a.biglobe.ne.jp/~shici/jpn49.htm에서 본 바에 따르면,

원어는 [大底還他肌骨好 不塗紅粉自風流]인 듯하여, 윗글의 [()] 부분이 여기선 [()]로 되어 있습니다. 저 유언은 보통 한문의 문법과는 또 다르고, 중세 일본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요시다 유타카[吉田 豊]()가 현대문으로 편역한 [갑양군감(甲陽軍鑑)-間書店]에 따르면,
'
내 불후의 생명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의 육체에 전하마. 그것은 조금도 꾸밈없는 나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에'라고 합니다.
참고로 책의 부분의 이미지(그 블로그에 있는 사진입니다.)


  1.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2. 4차를 제외하고는 서로 대치한 끝에 물러났다. [본문으로]
  3.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4. 상경설과 미카와-토우토우미 제압설이 있다. [본문으로]
  5. 18세기에 저술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일대기. [본문으로]
  6. 신겐의 주치의. [본문으로]
  7. 13~15시 사이. [본문으로]
  8. 21~23시 사이 [본문으로]
  9. 당시 신겐의 주치의. [본문으로]
  10. 일본 발음으로 '카쿠’로 ‘격(膈)’과 같은 발음. [본문으로]
  11. 과거 카이(甲斐)가 현재 야마나시 현에 속해있다. [본문으로]
  12.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를 지칭. [본문으로]
  13. 동쪽에서 쿄우토[京都]에 들어갈 시에 예전엔 반드시 거쳤다는 곳으로, 깃발을 세우라는 말은 쿄우토까지 군세를 이끌고 상경(上京)하라는 뜻. [본문으로]

타케다 노부토라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2. 29. 17:30 Posted by 발해지랑
다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1574 3 5일 병사(病死) 81.


1494 ~ 1574.

타케다 가문[武田家] 18대 당주. 친족(親族), 지방 호족[人]들과 싸워 카이[甲斐]를 통일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백성과 중신(重臣)들의 원한을 사, 장남 하루노부[晴信]에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家]로 추방당하였다. 후에 쿄우토[京都]로 가서, 당시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가 되었다.

 




 



루가[駿河]로 추방과 은거

 

 난세를 산 전형적인 무장 중 하나인 타케다 노부토라는 1541 6, 아들 하루노부(신겐[信玄])에게 돌연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스루가[駿河]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손님 대접을 받았으며, 타케다 가문[武田家]에서는 생활비를 받아 측실(側室)까지 두고 아이까지 얻었다. 이는 노부토라와 요시모토의 관계가 이외로 깊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전사한 뒤 요시모토의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와 사이가 멀어져 결국 1563 69살 때 스루가를 떠나 쿄우[]에 올라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가 되었다.

 

 쇼우군의 쇼우반슈우라는 것은 매일 이야기를 나누면서 출신 혹은 관계했던 지역의 정보 등을 쇼우군에게 전해주는 역할이다. 필시 노부토라는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스루가[駿河] 등의 정보를 얻어서는 끊임없이 쇼우군에게 보고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1573년 타케다 신겐이 죽었다는 소식이 노부토라에게 전해졌다.

 노부토라는 이 해에 이미 81살이라는 고령이 되어있었지만, 필시 그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의 충격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결과, 노부토라는 이 해의 9월에 시나노[信濃] 타카토오[高遠]까지 서둘러 왔는데, 신겐에게 추방을 당해서부터 벌써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한때 자신이 다스리던 카이[甲斐]정세(情勢)가 굉장히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오 성()에서 재회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타카토오까지 왔을 때 머물던 숙소는 사위인 네즈 신페이[祢津(禰津) 神平]의 집이었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그 감추어진 면을 읽을 수 있다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노부토라의 셋째 아들은 타케다 노부카도[武田 信廉 = 쇼우요우켄[逍遙軒]]이다. 이해인 1573 그때까지 타카토오 성주(城主)였던 타케다 카츠요리[勝頼] 죽은 신겐의 후계자가 되어 카이[甲斐]로 거처를 옮겼기에 그런 카츠요리를 대신하여 노부카도가 타카토오 성주가 되어 막 부임했을 때였기에, 노부토라는 우선 타카토오 성주인 노부카도와 만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부카도와 노부토라의 관계는 형인 신겐과 노부토라 만큼 나쁘지 않았기에, 당연 둘은 타카토오 성에서 재회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증거로 노부카도가 부친의 말년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다이센 사[大泉寺]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노부카도가 부친과 만나지 않았다면 늙은 노부토라의 초상화는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필시 부친과 만난 후 그 모습을 성에서 그렸고 그 반년 후인 1574 3 5일에 노부토라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기에, 5월에 초상화에 써 넣는 글을 쵸우젠 사[寺]의 슌코쿠 화상[尚]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남긴 것이다.

 

카이[甲斐]를 다시 얻고자 했던 꿈?

 

 노부토라의 묘소(墓所)는 코우후 시[甲府市]의 다이센 사[大泉寺]에 있다.

 장례식은 1574 3 7. 손자인 타케다 카츠요리의 주도로 시나노[信濃] 류우운 사[寺]의 스님인 홋코우 젠슈쿠[北高全祝]를 불러와 경을 외우게 하여 치러졌다.

 

 타카토오까지 돌아온 노부토라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행해지고 있다.

 다시 한번 카이[甲斐]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였다. 아니다 - 단순히 고향이 그리웠고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돌아온 지 반년 만에 죽은 것을 보면 후자 쪽의 해석이 적당한 것 같다.

 

 여담으로 시나노[信濃]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옛 전장 터에는 사나다 노부유키[田 信之]가 세운, 노부토라의 둘째 아들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繁]의 명복을 비는 텐큐우 사[寺][각주:1]가 있으며, 그 반대편으로 카와나카지마 서쪽으로 이어진 산속에는 '텐큐우의 진짜 무덤[本塚]'이라는 것이 어느 개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없지만 노부시게를 모신 텐소우 사[天宗寺]가 있어 노부시게를 따르던 인물들이 모여 넋을 기렸다고 한다.

 

 이렇게 카와나카지마에는 노부시게를 기리는 곳이 많다. 노부토라는 타카토오까지 돌아왔을 때, 옛날 귀여워했던 노부시게의 이야기를 듣고 몸소 몸 무덤을 찾아가 노부시게의 넋을 기리고, 옛날을 그리워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물론 글로 적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전해 내려올 뿐으로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쿄우토[京都]에서 먼 길을 달려왔던 말년의 노부토라라면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 타카다 노부시게의 관직은 사마노스케[左馬助]였는데 사마노스케의 당명(唐名)을 덴큐우[典厩]라 하였다. [본문으로]

가모 우지사토[蒲生 氏]

1595 2 7일 병사 40

1556~1595.

오우미[近江] 히노[日野] 성주 가모우 카타히데[蒲生 賢秀]의 아들. 크리스트교를 믿어 세례명은 레오(는 레온).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겼고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공적으로 인하여 아이즈[津] 와카마츠[若松] 성주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에는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로 출진하지만 갑자기 병을 나서 급사.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명장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오우우[羽] 지방의 통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처음에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에게 아이즈를 맡긴다고 하자 타다오키는 이런 큰 일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사퇴하였다.

 오우우에는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등 그 지역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호족들이 많았다. 아이즈 쿠로카와[川] 42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된다는 것은 이런 호족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칸토우[東]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검은 손길이 오우우에 미치지 않게 한다는 숨겨진 임무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선정된 것이 가모우 우지사토였다.

 이세[伊勢] 마츠자카[松板] 12만석의 다이묘우[大名]사코노에쇼우쇼우[左近衛少将].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많은 전쟁을 경험한 명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딸 후유히메[冬姬]의 남편이라는 신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외경심(畏敬心)을 품게 하였다.


 또한 우지사토만큼이나 가신들에게 존경받는 주인도 흔치 않았다. 주된 가신들을 모아서는 술자리를 열 뿐만 아니라, 가신들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직접 뗄감을 집어 넣으며 물을 끓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충성스런 신하가 많았다.


오우우 평정에 조력


 히데요시는 이런 우지사토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택하였다. 처음엔 타다오키처럼 사퇴하였지만 히데요시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우지사토는 아이즈 쿠로카와 42만석을 받아 들인 거실의 기둥에 기대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을 본 야마사키 우콘[山崎 右近]이 많은 영토를 가진 높은 신분으로 출세하여 기쁜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요? 하고 묻자 우지사토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낮은 신분이나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더라도 쿄우[] 근처에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천하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을.... 아무리 높은 신분에 많은 영토라고 하여도 쿄우[]에서 먼 곳에 있다면 그런 바램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나도 모르게 분한 눈물을 흘렸다"

 고 대답했다지만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우지사토가 아이즈로 향하기 전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겉바지[袴]와 우지사토의 겉바지를 교환하여 입었다. 오우우 부임은 히데요시를 대리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우지사토가 두려웠기에 오우슈우[奧州]로 쫓아 보냈다고 근신(近臣)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실여부는 둘째치고 라도 우지사토는 천하인(天下人)의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재능을 오우슈우[奧州] 통치에 이용하려고 한 히데요시의 날카로운 안목을 칭찬해야만 할 것이다.


 우지사토의 말년은 오우우 통치에 전력을 쏟는 시기였다. 카사이-오오자키의 난[葛西大崎一揆]을 진압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야망을 좌절시켰으며, 쿠노헤 마사자네[九戶 政実]의 난을 처리하였다. [우지사토 기[氏鄕記]]에 따르면, 이때 우지사토는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의 군법에 따라 군율을 엄격히 했다고 한다.


최후와 죽을 때 읊은 시


 여기서 하나의 일화가 태어났다.

 군감(軍監)으로 참전했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가 히데요시에게,
 [
우지사토의 진영을 보니 예사 인물이 아닌 듯 합니다. 타이코우[太閤] 전하에게 딴 마음을 품는다면 이 이상 두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일찍 죽여야만 합니다]
 
고 진언하여 독을 먹였다고 한다.
이야기로써는 흥미 깊지만 우지사토 독살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지사토가 발병한 것은 1593년의 히젠 나고야 출진 중이었다. 몇 월 몇 일인가는 특정할 수 없지만 하혈(下血)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때의 일화에 나오는 듯이 히데요시나 미츠나리가 짐독(鴆毒)을 먹게 하였다면 그해 안에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 중국산의 독조(毒鳥[각주:1]) 날개를 술에 담근 후 마시게 하면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지사토가 죽은 것은 1595 2 7일로 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다.


 필시 하혈은 암()의 징조였음에 틀림이 없다. 우지사토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사카이[]의 의사 소우슈쿠[宗叔]의 진찰과 투약으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황달증상을 띠며 말라갔기에 히데요시도 걱정하여 당대의 명의였던 마나세 겐사쿠[曲直 玄朔][각주:2]에게 진찰시켰더니 [배에 물이 차거나 손발에 종기가 생기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고 하였다. 그래서1594년. 히데요시는 또 다시 9명의 명의에게 우지사토를 진찰시켰다. 안타깝게도 명의들 대부분이 포기할 정도로 상태는 악화되어 40세의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당시의 의학에선 어떻게 판단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직장암(直腸癌)의 병상(病狀)과 비슷하다.


 그의 사세구()가 물의를 빚었다.

 りあればかねどるものをみじかき山嵐
 끝이 있으니 (바람)불지 않아도 꽃은 떨어지는 것을 마음도 급하구나 꽃샘바람

누군가에게 독살되어 수명이 짧아졌다는 설이 태어났지만 명백한 오해이다. 현대의 의학으로도 고치기 힘든 암의 질환이다. 우지사토는 그런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 것이라 생각한다.

코우토쿠 사(興徳寺)에 있는 우지사토의 묘

  1. 가상의 새라고 한다. [본문으로]
  2. 마나세 도우산[曲直瀬 道三]의 양자. [본문으로]

우에스기 켄신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4. 1. 16:17 Posted by 발해지랑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1578 3 13 병사 49

1530~1578.

에치고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의 아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이어서 마사토라(政虎), 테루토라(輝虎)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불문에 귀의한 후 켄신(謙信).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온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를 보호하여, 우에스기의 성()과 칸토우칸레이의 역직(役職[각주:1])을 물려받았다.








다섯 번에 걸친 카와나카지마(川中島)합전


 1553 4월.

 북부 시나노(北信濃) 카츠라오(葛尾)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쫓겨 와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된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유도 없이 타국을 침략하는 신겐의 무법자적인 행동에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겠다고 일어선 우에스기 켄신(이 때는 아직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이 이후 12년간에 걸쳐 다섯 번 싸운 것이[카와나카지마 전투]이다.


 1차는 이 해인 1553 8월. 우에스기 군()은 젠코우지(善光寺)분지로 진출하지만 신겐은 시오타(塩田)성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켄신의 전력을 관찰하는 듯이 후세(布施)와 오미(麻績)에서 자그마한 전투를 하는 정도로 끝났다. 이후 2차는 1555 7, 3차는 1557 8월에 행해졌지만 두 번 다 작은 전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1561 9월. 역사상 유명한 제 4차를 맞이한다. 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하치만바라(八幡原)에서의 전투가 유일한 격전이었다.

  5차는 1564 8월에 이루어졌는데 사실상 카와나카지마의 네 개 군(郡)을 지배하고 있던 신겐은 자웅을 겨루려는 켄신의 시도를 무시하며 한달 가량 대치만 한 후 9월 중순 서로 물러난 뒤, 다시 카와나카지마에서 대결하는 일은 없었다.


정의를 위하여 동분서주


 제1차 카와나카지마 합전이 일어나기 전년인 1552년.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보호를 청하며 에치고로 온 것을 계기로 켄신은 1552 8월에 처음으로 산코쿠토우게(三国峠) 고개를 넘어 칸토우에 출진하여 누마다(沼田)성으로 입성했다. 이후 주가(主家)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14번이나 칸토우로 출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1560년부터 1571년에 걸친 12년간은 8번이나 칸토우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해를 칸토우에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면 우지야스가 농성을 풀고 칸토우로 출진하여 시모츠케(下野)의 사노 마사츠나(佐野 昌綱)나 오야마 히데츠나(小山 秀綱), 히다치(常陸)의 오다 우지하루(小田 氏治), 무사시(武蔵)의 나리타 우지야스(成田 長泰)들이 호우죠우 측으로 돌아 섰고, 켄신이 오오타 스케마사(大田 資正),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 사타케 요시아키(佐竹 義昭), 사타케 요시시게(佐竹 義重)들의 요청을 받아서 칸토우로 출진하면 우지야스는 또다시 물러나 농성을 했고 배반했던 호족들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어 진전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나 빙고(備後)() 토모()로 물러나 있던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를 협격(挾擊)하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노부나가로 돌아선 노토(能登) 하타케야마(畠山) 씨의 중신(重臣) 쵸우 츠나츠라(長 綱連)가 농성하는 나나오(七尾)성을 공략하였고, 오다의 구원군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군을 카가(加賀)의 테토리가와(手取川) 강에서 물리친 기세로 쿄우()로 진격하려 했지만,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 제패를 노리고 있다며 출진 요청을 해왔기에 우선 귀국하여 칸토우를 진정시킨 뒤 상경(上京)하기로 하였다.


최후의 대동원령


 하지만 카스가야마(春日山)성으로 돌아온 켄신에게 호우죠우 우지마사로부터 평화롭게 지내자는 요청서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를 통하여 도착했기에, 켄신은 칸토우로의 출진을 상경 원정으로 전환하여 휘하 장수의 명부를 작성하였다. [上杉謙信自筆将士書上]이라 불리는 것으로, 우에스기 군단 39명의 무장에 코우즈케(上野), 엣츄우(越中), 노토, 카가의 여러 장수를 합친 81명의 무장의 이름이쓰여 있다. 마지막에 [天正五年(1577년)十二月二十三日法印大和謙信]이라 서명되어있기에, 이것은 명백히 우에스기 군단 동원 명부라 할 수 있다. 켄신은 다음해 1 19일. 명부에 기재된 여러 장수들에게 대동원령을 내리며 눈이 녹는 3 15일을 출진하는 날로 정했다.


 그러나 출진의 날이 다가 온 3 9일 켄신은 돌연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뇌졸중이라 한다. 의원들이 열심히 고치려 했지만 보람도 없이 켄신은 혼수 상태인 채로 13일 죽었다. 향년 49. 장의는 출진의 날로 정해졌던 15일 행해졌다.

  1. 무로마치 바쿠후의 관직. [본문으로]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

1573 1 1 병사(病死) 73

1501 ~ 1573.

시나노(信濃) 카츠라오(葛尾)성주(城主). 맹장으로 이름 높아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과 싸워 토이시(戶石)성 합전(合戰)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부 시나노(信農), 에치고(越後)로 세력을 확대하였으나 후에 신겐에게 패해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도망. 이후 객장(客將)이 되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합전 등에 참가하였다.

(그림은 태합입지전V에서)






신겐(信玄)에게 두 번 패배를 안기다.


 전성기의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 義淸)는 대단히 강했다.

 부와 북부 시나노(信濃)일대의 장병을 이끌고 사카키(坂城)의 카츠라오(葛尾) 성을 본거지로 삼아 타케다 하루노부(武田 晴信 = 信玄)와 승부를 벌였다.

 1548 2월 우에다하라(上田原)의 전투에서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方) 등을 패사(敗死)시켰을 뿐 만 아니라 신겐에게도 심한 부상을 입힐 정도로 대승하였으며, 1550년의 토이시(戶石)성 합전에서도 후세 사람들에게 신겐에게 [토이시 붕괴(戶石崩れ)]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따라 붙게 할 정도로 괴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많은 승리를 이끌어 온 요시키요의 무운(武運)도 여기까지였다. 신겐의 사키카타슈우(先方衆) 사나다 유키타카(真田 幸隆)에게 토이시성을 빼앗기자 유력한 휘하의 무장들이 계속해서 신겐쪽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본거지인 카츠라오 성의 방어 체제가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나노(信濃)의 용장 요시키요도 어쩔 수 없이 1553년 4월 9 카츠라오성을 버리고 8살의 외아들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에치고(越後)의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 =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에게 의지하기 위하여 도망가게 된다.


에치고(越後)의 객장


 요시키요가 에치고로 망명한 목적은 켄신(謙信)의 원조를 받아 옛 영토를 회복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의 원인이 되었는데, 카츠라오 성을 뒤로한지 14일 후인 4 23일에는 켄신의 원군을 얻어 카츠라오성을 탈취하였고 치이사가타(小県)()의 시오다(塩田)성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주변은 이미 확고한 신겐의 영지가 되어 있었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에치고(越後)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후 요시키요는 옛 영토회복의 꿈을 계속 가슴에 품으며 도합 5회에 이르는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4번 참가하였다. 1561 9월의 네 번째가 되는 하치만바라(八幡原)의 사투[각주:1]에서는 시나노(信濃)의 병사 2000여기()를 이끌고 처음 전쟁터에 나서는 쿠니키요(国淸)와 함께 선봉으로써 용감히 싸웠는데 이때 요시키요의 나이는 이미 61세의 나이였다.


 고향 사카키(坂城)로의 복귀도 반쯤 포기하고 있던 1562년.

 신겐의 친족중(親族衆)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 梅雪)의 사자라고 하는 승() 쿠우안(空庵)이 길보(吉報)를 카스가야마(春日山)성에 가지고 왔다.

 신겐이 적자(嫡子) 요시노부(義信)를 폐하고 서자 카츠요리(勝頼)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니 만약 켄신이 요시노부를 양자로 삼는다면 바이세츠도 켄신을 따르겠으며 곧바로 시나노(信濃)는 켄신(謙信)의 것이 되고 요시키요도 옛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요시키요는 맘 속으로 크게 기대하였으나 쿠우안(空庵)의 이야기를 들은 켄신은 크게 화를 내며 쫓아버렸다고 한다.[名将言行錄]


 1564 5회째가 되는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합전에 63세라는 고령으로 참전하지 못하였고 대신해서 아들인 쿠니키요(国淸)가 출진하였다. 이 즈음의 일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上杉将士書上]에는 요시키요를 지칭해 [우에스기(上杉)()에서 그렇게 뛰어난 활약도 하지 못한다]며 호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요시키요는 켄신에게 객장(客將)으로써 계속 대우받았다.


 소령(所領)은 칸바라(蒲原)군(郡)의 야마우라(山浦)와 우오누마(魚沼)() 내에 가지고 있었으며 켄신이 만들어 준 나오에츠(直江津)의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한 켄신은 다음해인 1565 3월 그다지 활약도 하지 않는 요시키요를 네치(根知)성주로 앉히고, 쿠니키요(国淸)를 토쿠아이(德合) 성주로 발탁하였다. 네치(根知)성은 엣츄우(越中)와 시나노(信濃)의 국경 사이에 있는 성으로, 그 성의 관할로 마츠모토(松本)가도(街道)라던가, 치쿠니(千国)가도가 있어 옛날부터 소금의 운송로이면서 또한 군사상의 요지이기도 했다. 켄신이 65세라는 말년의 요시키요에게 네치성을 맡긴 것도 카와나카지마 전투 후 신겐에 대한 대비와 함께 세이와겐지(淸和 源氏) 무라카미(村上)씨의 후예이며 시나노 명문족(名門族)인 무라카미의 명예를 존중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켄신은 요시키요에게 네치(根知)의 경비를 엄중히 할 것을 명령하며 어류나 소금을 네치를 통해 시나노로 운송시켰다. 요시키요는 이런 중요한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1568 68세가 되자 스스로 노령을 이유로 켄신에게 가증(加增)받은 야마우라(山浦)와 오야마(飯山)의 소령(所領)을 쿠니키요(淸国)에게 물려준 후 다음 해인 1569년에 중이 되었고 70세에는 은거. 1572년에는 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인 1573년 정월 두 번 다시 고향의 땅을 밟아 보는 일 없이 네치 성에서 죽었다. 73세였다. 원수인 신겐(信玄)이 죽은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아들 쿠니키요의 그 후


 요시키요가 남긴 야마우라 4만관() 등은 1573 12 쿠니키요에게 안도(安堵)되었다.

 쿠니키요도 켄신과 그 후계자인 카게카츠(景勝)에게 중용되어 카게카츠가 시나노의 북부를 진압한 1583 8 카이즈(海津)성의 성주 대리(城代)가 되었다. 여덟 살에 부친 요시키요의 손에 이끌려 에치고로 도망 친 후 3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제 4차를 말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