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소린[大友 宗麟]

1587 5 23일 병사(病死) 58.

1530 ~ 1587.

이름은 요시시게[義鎮]. 붕고[豊後] 우스키[臼杵] 성주(城主). 선교사 하비에르를 후나이[府内]로 초대하였고 후에 세례를 받아 이토우 만쇼[伊藤 マンショ] 등 텐쇼우 견구소년사절(天正遣少年使節[각주:1])을 로마로 파견했다. 큐우슈우[九州] 6개국을 지배했지만, 미미가와 강의 전투[耳川い]에서 시마즈 씨[島津氏]에게 패하여 쇠퇴(衰退)하였다.








신앙으로 인한 부부싸움.


 센고쿠[戦国]의 시대.
 오오토모 소우린의 전성기 때에는 붕고[豊後]를 중심으로 큐우슈우[九州]의 붕고, 부젠[豊前], 히젠[肥前], 히고[肥後],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의 슈고[守護][각주:2]에 임명 받았고 큐우슈우 탄다이[九州探題][각주:3]도 병행해서 수행했다. 그러나 말년은 시마즈 씨()의 위협, 부인과의 싸움 건강 악화라는 고난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었다.


 소우린이란 이름은 불교인 선종()에 들어갔을 때 얻은 호() 원래는 요시시게라고 하였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으며 적자(嫡子)인 요시무네[義統[를 낳은 부인은 쿠니사키[東] 반도에 있는 나타 하치만 궁[奈多 八幡宮]의 대궁사(大宮司) 나타 아키모토[奈多 鑑基]의 딸이었다. 이 부인과 소우린은 자주 부부싸움을 하였다.


 젊었을 때의 소우린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남편을 죽이면서까지 남의 부인을 빼앗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그러나 나타 씨[奈多氏]라고 불린 부인과의 부부싸움 원인은 여성 문제가 아니었다. 부인은 해가 갈수록 소우린이 기독교에 빠져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소우린은 해외무역의 막대한 이익에 주목, 무역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권한을 가진 선교사와의 우호를 위해서 가신들 뿐만 아니라 혈연들에게까지 입교를 권했다.


 나타 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정은 대궁사(大宮司)를 하고 있으며 신도(神道)를 깊이 믿고 있던 나타 씨에게 있어 기독교는 사교(邪敎)였다.

 남편이 둘째 아들 치카이에[親家]에게 세례받도록 권한 것을 따졌으며, 또한 그녀는 자신의 친오빠 치카카타[親賢]와 함께 교회를 파괴하거나 선교사를 죽이려고 병사를 보내 크리스천 무사들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기에 부부 사이는 더 멀어졌다.


 선교사들은 이런 나타씨에게 이세벨이란 별명을 붙였다.

 이세벨이란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예언자를 추방한 여자였다. 프로이스의 [日本史] - 나타 씨는 행실이 좋지 못하였고 성격차이가 심했기에 소우린은 그녀를 혐오하였고 너무 고민한 나머지 병에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나타 씨의 시녀장(侍女長)은 병상에 있던 소우린을 정성껏 간호하였는데, 이 여성은 집안일을 다스리는데 뛰어났다. 소우린은 이 여자를 나타 씨의 저택에서 데리고 나와 세례를 받게 하여 '쥬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하였고 나타 씨와 이혼한 후 그녀와 결혼하였다. 1678년의 일로 소우린 49, 쥬리아 40세였다. 또한 소우린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순수하게 믿게 되어 결국 자신도 세례를 받고 [동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몰락의 시작


 이 즈음인 휴우가[日向]의 영유하고 있던 이토우 요시스케[伊東 義祐]가 사츠마[薩摩]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에게 패해 도망쳐 와서는 소우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소우린은 침략자 시마즈를 쫓아내고 휴우가[日向]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고자 했다.


 처음에 해로를 택한 소우린은 배에 인도의 부왕(副王)에게 선물받은 붉은 십자가의 깃발을 앞세웠으며, 거기에 새로운 부인인 쥬리아 그리고 선교사들과 함께 휴우가[日向]로 향했다. 도중에 육로(陸路)를 택한 소우린은 가는 곳 마다 신사(神社) 절을 파괴하였으며 길이 험한 곳은 불상으로 메우면서 진격했다.

 오오토모 5만의 병사들 대부분은 기독교도가 아닌 신불을 믿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신불을 무시하는 소우린을 불신하여 사기는 낮아만 갈 뿐이었다. 또한 소우린은 시마즈를 경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도 커서 11월.

 7(里)[각주:4]의 산과 들에 2만이 넘는 시체가 널릴 정도로 미미가와 강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가신들은 신불이 내린 벌이라며 소우린을 비난하였고 이는 오오토모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기도로 보낸 은거생활


 가독(家督)을 물려주었던 적자 요시무네도 변변치 못하여 지역 호족들의 모반이 이어졌다.

 1586. 57세의 소우린은 오오사카[大坂]로 가서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에 응하여 큐우슈우[九州]로 군사들을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마즈 씨의 압박은 계속 되어 우스키 성[臼杵城]이 포위당했다. 2문의 대포 '쿠니쿠즈시[国崩]'가 성 방어에 크게 활약했지만 성 밑 마을은 재로 변하였고 후나이[府内]도 불에 타고 파괴당했다. 이때 소우린은 전투 지휘는 물론 쥬리아 부인과 함께 영민(領民)들을 도우고자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농성에 의한 피곤으로 인하여 눈에 띌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히데요시가 큐우슈우[九州]에 와서 시마즈 씨를 쫓아 버렸다.

 그런 와중에 소우린은 자신의 남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츠쿠미[津久見]에 은거하며 쥬리아 부인과 함께 기도로 가득 찬 날들을 보낸다. 히데요시는 큐우슈우를 제압해 가는 도중에 소우린의 아들 요시무네에게 붕고[豊後]의 영지(領地)를 안도(安堵)해 주었다. 소우린은 안심했다. 또한 히데요시는 소우린에게 휴우가[日向]의 일부를 은거료(隱居料[각주:5])로 하사하려 했지만 사양하고 받질 않았다.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사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15일 후인 1587 5 23일.

 츠쿠미에서 쥬리아의 병간호를 받는 도중 58세의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렸다.

  1. 텐쇼우[天正]는 당시의 일본 연호. 이토우 만쇼, 치지와 미겔[千々石 ミゲル]의 정사(正使)와, 나카우라 쥬리안[中浦 ジュリアン], 하라 마르티노[原 マルティノ]의 부사로 구성된 사절단으로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왔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군사와 행정을 책임지던 지방관. [본문으로]
  3. 무로마치 바쿠후가 큐우슈우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의 장관. [본문으로]
  4. 리(里)는 길이의 단위, 약 4Km. 7리는 약 28Km. [본문으로]
  5.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깃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

1586 11 5일 병사(病死) 57.

1530 ~ 1586.

모우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둘째 아들. 호족 킷카와 가문[吉川家]을 상속하였다. 이츠쿠시마 전투[島の戦い]나 아마고 가문[尼子家] 평정 등에서 공을 세웠다.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함께 '모우리 양 천[毛利 [각주:1]]'이라 일컬어 졌다.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요청으로 큐우슈우[九州]로 출전하지만 코쿠라[小倉]에서 죽었다.








무패의 명장


 킷카와 모토하루는 센고쿠[戦国] 굴지의 실전적(實戰的)인 명장(名將)이다.

 1530년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의 둘째 아들로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태어나 1541 12살의 나이에 아마고 하루히사[尼子 晴久]와의 코오리야마 농성전(籠城戰)에서 처음 데뷔전을 치뤘다. 이후 싸움터를 내달리길 80회에 가까웠고 그 중 64번의 싸움에서는 승리했다[각주:2].


 명장(名將)은 명장을 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지 스에 타카후사[陶 隆房=晴賢]와는 의형제의 맺을 정도의 사이였다.

 아키[安芸] 신쇼우[新荘]에 입성하여 킷카와 가문 중흥(中興)의 시조가 되어서는 동생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와 더불어, () '카와[川]'를 짊어지고 모우리 양 천[毛利両川]의 일익을 담당하며 모우리 종가(宗家)의 융성(隆盛)을 위해 분주한 일생이었다그런 모토하루이기에 말년이 한가롭고 평온할 턱이 없었다.


은거를 바라는 나날들


 모토하루가 은거를 결심한 것은 그때까지 항상 공세에 서서 전쟁을 벌였던 것이 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城]을 둘러싼 히데요시 군()과의 대결에서는 항상 수세로 돌아서 버린 때부터이다. 공격형인 모토하루로서는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것에 정신적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혼노우 사의 변[本能寺の変]을 알지 못한 채(알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사료도 있다), 감쪽같이 히데요시의 술책에 넘어가 싸움을 멈추고 타카마츠 성장(城將)시미즈 무네하루[清 宗治]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의 실책이 모토하루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 넣었다.


 1582 12 20일.

 "늙었기에 가문을 모토나가[元長]에게 물려준다"(江譜拾遺)고 하고선 곧바로 은거해 버렸다. 모토하루 53,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은거 후, 일본의 중앙에선 노부나가[信長] 사후의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나 히데요시 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등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때 히데요시, 카츠이에 쌍방에서 자기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모토하루는 신중히 양 진영(陣營)을 관찰했다. 결국 히데요시의 확고한 자신감과 실행력이 가득 쓰여진 편지를 보고 이후는 히데요시 편에 서기로 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와의 영지(領地) 문제에서 코지마 반도[児 半島][각주:3]를 빼앗겼고, 거기에 모토하루가 가장 귀여워하고 있던 셋째 아들 츠네노부[経信]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養子)인 모토사토[元総][각주:4]를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바치는 등 굴욕적인 타협을 참으며 모우리 종가의 안태(安泰)를 위해 노력하였다.

 참고로 츠네노부는 후에 이와쿠니[岩国] 킷카와 가문의 시조(始祖)가 되는 히로이에[広家][각주:5] 그 다음 해에는 귀국을 허락 받았다. 모우리 안태를 위한 인질을 바친 셈으로 모우리 종가의 테루모토[輝元]는 츠네노부에게 오키[隠岐] 일국(一国)를 하사하는 등 공로를 인정하여 모토하루의 마음 고생에 보답하였다.


 히데요시는 키이[紀伊] 공략을 끝내자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長宗我部] 공략에 임하여 모토하루에게도 출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의 뜻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여 은거인 몸이라는 이유로 큰 아들 모토나가를 대신하여 보냈다. 모토하루를 대신한 킷카와 가문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모우리 양 천[毛利両川]은 시코쿠[四国]를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쵸우소카베[長宗我部]와 싸우던 1585 7월에는 난죠우 모토츠구[南条 元続]에게 시코쿠[四国] 침공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호우키[伯耆] 카와라야마 성[河原山城]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지만 노련한 모토하루는 곧바로 배다른 동생인 스에츠구 모토야스[元康][각주:6]에게 명령하여 이를 탈환케 하였다.


모토하루 최후



 그 후도 모토하루가 바라는 편온한 은거 생활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일 없이 결국 모토하루의 마지막 출진의 날이 다가온다.


 1586년.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는 큐우슈우[九州] 통일을 목표로 붕고[豊後]의 오오토모 소우린[大友 宗麟]을 공격하였다. 히데요시는 시마즈를 토벌하기 위해 모우리 테루모토를 대장으로 삼아 백전연마의 노장 모토하루에게도 출진을 지시하였다. 동생인 타카카게에게 이요[伊予]를 하사한 것처럼, 출진만 한다면 모토하루에게 치쿠젠[筑前] 일국(一国)을 주겠다고 하였다. 모토하루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모우리 종가를 위해서는 출진할 수밖에 없었다.


 1586 8 19일.

 모토하루는 모토나가, 츠네노부를 거느리고 아키[安芸] 신쇼우를 출발하여 사에키 군[佐伯郡]의 오가타[小方]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코쿠라 성[小倉城]을 공략했다. 모우리가 공격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마즈는 어쩔 수 없이 공격 중이던 치쿠젠[筑前] 타치바나야마 성[立花山城] 포위를 풀고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농성하고 있던 타치바나 성주(城主)인 타치바나 무네토라[立花 統虎 = 후의 무네시게[宗茂]]는 성을 나와 시마즈 군()을 추격하여 치쿠젠의 타카토리이 성[高鳥居城]을 공략하고, 이와야 성[岩屋城]과 호우만 성[宝満城]을 탈회하였다.


 이때 모토하루는 부스럼(통증이 심했다고 하며 경과를 봐서는 피부암이라 추정된다)이 나서 코쿠라 성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아들인 모토나가는 쾌유를 바라며 사찰에 명해 기도를 올리게 하였고, 테루모토도 의사를 파견하여 치료를 하게 했지만 낫는 일 없이 11 5일 코쿠라 성()에서 죽었다. 향년 57.

  1. 모토나리가 구축한 모우리 가[毛利家]의 군사-정치 조직. 모토나리의 둘째와 셋째 아들을 양자로 보낸 킷카와나 코바야카와 가문에는 '카와[川]'라는 글자가 들어갔기에 이러한 이름이 되었다 [본문으로]
  2. 위키에 따르면 76전 64승 12무승부 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3. 당시는 간척 사업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코지마 섬이었다. [본문으로]
  4. 모우리 모토나라의 9번째 아들. 후에 모우리 히데카네[毛利 秀包] [본문으로]
  5. 세키가하라에서 모우리 군단의 움직임을 막아 동군을 유리하게 한 인물. [본문으로]
  6. 모우리 모토나리의 8번째 아들 [본문으로]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613 1 25일 병사 50

1564 ~ 1613.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유형제(乳兄弟)[각주:1]인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의 아들.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부친이 죽는 바람에 오오가키[大垣]성주가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공을 세워 하리마[播磨] 하사받아, 히메지 성[姫路城]를 쌓았다. 후에 '서국 쇼우군[西 ][각주:2] 이라는 이명(異名)을 얻었다.









히메지 백만석


 이케다 테루마사의 할머니인 요우토쿠인[養徳院]이 오다 노부나가의 유모(乳母)였던 연()도 있어 테루마사는 어려서부터 노부나가를 가까이서 섬겼다. 노부나가가 죽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를 섬기며 중용(重用)받아 히데요시는 테루마사를 양자(養子)로 삼는다는 약속도 하였다[각주:3]. 그러나 나가쿠테의 전투에서 부친 츠네오키와 형인 요시스케[之助]가 전사한 후에는 이케다 가[池田]를 상속하여 미카와[三河] 요시다([吉田] 15 2천 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594 8월.
 테루마사는 히데요시의 중매로 토쿠가와 이에야[
川 家康]의 둘째 딸 토쿠히메[督姬][각주:4]를 후처로 맞이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이에야스 편에 섰고, 공을 세워 하리마 52 1천 석이라는 큰 영토를 하사받아 히메지성에 입성했다. 입국한 다음 해인 1601년부터 성을 개축(改築)하기 시작하여, 1609년에 한 층 더 호화장대(豪華壯大)한 성곽이 완성되었다.


 가정면에서도 토쿠히메와의 사이에 5명의 남자아이가 탄생. 전처(前妻)의 아들인 장남 토시타카[利隆]는 둘째 치더라도 2남 타다츠구[継]는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인 이에야스에게서 비젠[備前] 오카야마[岡山] 28 6천 석을 하사 받았을 뿐만 아니라, 3남 이하에게도 아와지[淡路], 하리마 안에 각각 영토를 하사받았기에 그런 영지들을 합쳐서 '히메지 백만석', '서국 쇼우군' 등으로 불렸다. 너무 과한 대우에 이에야스의 적남(嫡男) 히데타다[秀忠]가 질투하여,
 “
아예 테루마사에게 천하를 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라고 삐쳤을 정도였다.


 사위와 장인이 되어서부터 급속히 토쿠가와 가문[徳川家]과 관계가 깊어진 테루마사이지만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은혜를 잊는 일 없이 어린 히데요리에 대한 배려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누나가 칸파쿠[白] 히데츠구[秀次]의 정부인이라는 것도 있어 토요토미 가문과는 깊은 연으로 맺어져 있었다.
 
히데요리가 니죠우 성[
二条城]에서 이에야스와 만났을 때도 옛 토요토미 가의 무장들과 함께 히데요리를 경호(警護)했으며, 1602년 정월 궁궐에 신년인사를 할 때도 테루마사는 히데요리를 대리해서 입궐하였다.


성내에 이변(異變)이 일어나다.


 1609 5월.

 천수각(天守閣)을 완성했을 때부터 히메지 성 안에서 이변이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
천수각의 한 방에서 17~8살 정도의 시녀가 12히토에[単][각주:5]를 입고 홀로 촛불을 들고는 혼자서 앉아있었다. 젊은 사무라이가 이상히 여겨 가까이 다가가자 빗을 건내 주었다. 그 빗은 천수각의 갑옷 상자 안[각주:6]에 있던 것이었다.'


 '심야(深夜). 맹인(盲人)이 나타나서 들고 있던 비파의 통을 열어보라고 하였다. 젊은 사무라이가 열어보려고 하자 맹인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귀신으로 변신해서나는 이 성의 주인이다라고 위협했다'


 같은 해 12 13일. 한 통의 이상한 편지가 성에서 발견되었다.
 보낸이는 '하리마의 주인인 대천신(大天神) 토우센보우()' '수도(首都) 니죠우[二条]의 센마츠'이며, 받은이는 테루마사와 토쿠히메 부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50~60장에 이르는 협박문이었다. 내용은,

토오토우미[遠江]의 요린보우라는 대천신(大天神)이 큐우린보우라는 천신(天神)을 꼬셔서 테루마사 부부를 저주하여 죽이려고 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 안에 8층탑을 세우고 호마(護摩)의 비법을 익혀 기도하라.
 
또한 팔층탑안에 넣을 두루마기와 그림은 천축에서 이 나라에 전해진 두통 중 하나를 넣을 것. 한 통은 하리마 동쪽에 사는 유명한 목수인 히하라[
日原]가 몰래 가지고 있다. 호마는 온타케산[御嶽山] 산에 있는 시미즈 사[清水寺], 후나코시산[船越山] 산에 있는 루리 사[瑠璃寺] 등의 고명한 중을 스승으로 삶아 수련할 것.

등의 지시가 쓰여져 있었다. 테루마사는 몸집이 작은 사내였지만 용맹과감하고 침착한 사나이였기에 협박장을 무시했다.


 그러나 1611 12월.
 그는 갑자기 중풍에 걸렸다. 발병 당일. 테루마사는 가신의 집에 방문했다가 갑자기 쓰러져 가마로 성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 많은 까마귀들이 날아와 가마에 부딪혔다. 성에서 이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테루마사라도 어쩔 수 없었다.


 타카 군[多可郡] 엔만 사[円満寺]의 묘우카쿠() 아사리에게 악마 퇴치, 국가 수호의 기도를 부탁했다. 37일간 성안에서 술법을 행한 묘우카쿠의 진언(進言)에 따라, 천수의 귀문(鬼門)에 해당하는 북동쪽에 팔층탑을 세우는 동시에 오사카베 신사[刑部神社]를 건립하였다. 오사카베 신사는 원래 히메야마[姫山] 산에서 지방신(地方神)을 모시던 신사의 건물을 히데요시가 히메야마 산에 성을 세울 때 산 아래로 옮겼기 때문에 신의 분노를 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테루마사의 중풍은 일시 회복했다. 성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다음 해 1월에 재발하여 테루마사는 피를 토했다. 이 때도 수 많은 까마귀가 날아와서 창호지에 부딪혔다. 마당에 죽은 솔개가 두 마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아타고[愛宕][각주:7] 신자인 테루마사는 이 일울 흉한 일이 있을 징조라 생각하여 더욱 병이 깊어졌다. 이에야스가 중풍의 묘약을 보내왔지만 테루마사는 25일 오후. 숨을 거두었다.


 이에야스는,

 "그런가…… 죽었는가. 뭐든지 아타고에게 의존한다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천하를 노리고 있던 테루마사의 마음 속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같은 여인의 젖을 먹고 자란 사이. 높은 집안의 아이는 모친의 젖이 아닌 다른 사람의 젖을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노부나가는 유두를 물어 뜯는 버릇이 있었다고 하지만 츠네오키의 모친의 젖만은 얌전히 먹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칸토우[関東]의 토쿠가와 쇼우군[德川 将軍]만큼 권세와 힘이 있다는 뜻에서. [본문으로]
  3. 실제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된 것은 테루마사의 동생 이케다 나가요시[池田 長吉]. [본문으로]
  4.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우죠우 우지나오[北条 氏直] 부인이었으나 우지나오의 죽음으로 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본문으로]
  5. 귀족 여성의 정복. [본문으로]
  6. 평시에는 열지 못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본문으로]
  7. 일본의 종교인 신도(神道)에서는 불을 막는 신이지만, 신불습합 사상에 따라 불교의 승군지장[勝軍地蔵 – 지장보살의 군신(軍神)일 때의 이름]과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