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수군의 위력은 뭐라 해도 유럽에서 전래한 화포중심의 새로운 장비였다.
1578년 6월. 요시타카는 거함 7척을 이끌고, 키이의 사이가 포[雑賀浦] 앞에서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 측에 선 키이 사이가[雑賀]의 수군 500척을 ‘유럽의 화술[蛮国之火術]’로 격파하였다. 사이가의 고전적 해적(海賊)의 전법으로는 신병기 화포를 장비한 쿠키 수군에 승리할 방도가 없었다.
7척의 거함은 폭 약 13m, 길이 약 22m로, 당시의 상식을 깨는 거대함선이었다. 더구나 선체는 철을 두른 철갑선이었다.
당시 일본에 와 있어 이 배를 목격한 포르투갈의 선교사 오르간티노는, “일본 전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우리 왕국(포르투갈)의 배와 닮았다…”고 하며 배에는 대포 3문이 장착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해의 9월. 오다 노부나가도 이 7척의 신예전함을 보기 위해 친히 사카이[堺]로 향할 정도였다. 이후 11월, 쿠키 수군은 이 신예함을 거느리고, 혼간지[本願寺]로 군량을 수송하기 위해 오오사카 만[大阪湾] 키즈 강[木津川] 앞에 나타난 모우리 수군[毛利水軍] 60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요시타카는 이 전공으로 시마와 이세[伊勢]의 각지에 3만5천 석을 하사 받아, 새로이 토바 성[鳥羽城]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
하지만 이 일본 해군 역사상 획기적인 전함건조자의 명예는 임진왜란 때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된다. 요시타카는 수군의 총사령관적인 역할로 출진하였지만, 일본수군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연전연패한 것이다.
요시타카는 그 책임을 전가 받아 1597년 은퇴를 명령 받고 가독(家督)을 차남 모리타카[守隆]에게 물려주었다. 모리타카는 토바 성 3만 석을 영유하였고, 요시타카는 은거료(隠居料)로 5천 석이 주어졌다.
그러나 요시타카의 운명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이 일어나자 암전한다. 아들인 모리타카를 토쿠가와[徳川] 측에 서게 하고, 요시타카 자신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권고에 응하여 서군(西軍)에 선 것이다.
처음에 요시타카는 아들인 모리타카가 우에스기 정벌[上杉征伐]을 떠나는 토쿠가와 군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미츠나리의 사자를 두 번 거절하였지만, 쿠마노 신쿠우 당[熊野新宮党]의 호리우치 우지요시[堀内 氏善]가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요시타카] 님만 응해주신다면 곧바로 쿠키 님 밑으로 달려가겠다.”는 것을 전해 듣고, 결국 서군 가담을 수락한 것이다.
또한 다시 한번 자신의 힘으로 화려한 영광의 쿠키 수군을 다시 만들고 싶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인 모리타카는 아비가 서군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그것을 이에야스[家康]-히데타다[秀忠]에게 보고하여 자신에게 딴 마음이 없음을 맹세하였다. 이에야스는 그 뜻을 기뻐하며 모리타카에게 귀국하여 시마-쿠마노의 수군을 복속시키라 명령하였다.
모리타카가 귀국하자 이미 토바 성은 요시타카의 손에 떨어져 있어, 본뜻과는 다르게 부자지간에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역시 서로 배려하며 자그마한 싸움만 있었을 뿐이었다.
세키가하라 결전은 동군의 승리로 끝났고, 모리타카는 서군 선박의 통행을 막은 공적으로 5만5천 석으로 가증되었다.
한편 패한 측인 요시타카는 아고[英虞]의 와구 포[和具浦]에 숨어있었지만 곧이어 자살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모리타카의 가로(家老) 토요타 고로우에몬[豊田 五郎右衛門]이 독단으로 요시타카에게 자살을 강요했다고 한다. 모리타카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조명탄원이 성립된 것도 모른 채. – 때문에 토요타는 후에 모리타카의 명령으로 참수 당했다고 한다. 1 2
구키 요시타카[九鬼 嘉隆]
1542년생. 오오스미노카미[大隅守]. 처음엔 키타바타케 가문[北畠家] 휘하였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속하여 혼간지 공략[本願寺攻め]에 참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에 속하여 1600년 10월 자살. 5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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