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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년 1월 3일 병사(病死) 48세.
1568년 ~ 1615년.
큐우슈우[九州] 평정을 끝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쓰시마[対馬] 일국(一国)를 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지휘 하에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지만 용서받아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썼다.
바쁜 말년
쓰시마의 도주(島主) 소우 요시토시[宗 義智]는 임진, 정유의 난 때는 청년 무장으로 바다를 건너가 분전하는 한편, 명 왕조 정복의 야망을 품고 있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와 명-조선과의 사이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처 마리아의 부친 코니시 유키나가의 제 1군에서 선봉으로 싸우는 몸이면서, 대륙 정세에 어두운 히데요시의 명 정복 계획을 억지(抑止)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소우 씨[宗氏]는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그에게서 주어지는 무리한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바탕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쓰시마의 도주로써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섬의 사활(死活)에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일찌감치 싸움을 막을 수 있는 길을 탐색한 것이다.
그러한 미묘한 입장에 있었던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서군 측에 섰다.
고(故) 히데요시에게서 사츠마[薩摩] 이즈미 군[出水郡] 중에 1만석을 가증(加增)받았던 고마움과 장인인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패전 후. 장인 유키나가의 목은 베어졌지만 요시토시는 용서받았다. 그는 마리아와 이혼하여 코니시 가문과의 연을 끊었다. 이 때가 요시토시 33살 때였다.
그때부터 요시토시는 이에야스[家康]의 지시를 받으며 명과 일본의 관계 수복, 조선과의 국교 회복과 무역 협정 체결에 노력하다 48살 때 죽는다.
그 노력은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조일(朝日) 외교의 기초를 쌓은 것이기에, 외교-절충으로 바뻤던 이 15년의 세월이 그의 너무 빨랐던 '말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일 국교 회복에 조력
쓰시마 번[対馬藩]의 조일 강화교섭(講和交涉)은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퇴한 다음 해인 1599년에 이미 착수되고 있었다.
쓰시마는 돌이 많고 거친 땅이기에, 섬에서는 거의 쌀을 얻을 수 없어 조선과의 무역으로만 섬을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빨리 무역을 재개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아직 무역에 대해서까지는 생각이 없었지만, 쓰시마 번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 교섭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요시토시는 이 해와 다음 해(1600년)에도 강화 교섭의 사자(使者)를 조선으로 보냈지만, 그들은 잡힌 후 아직 조선에 머물고 있던 명군에 넘겨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명군이 일본에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가 일어날 즈음 귀국한 후부터 또다시 강화 교섭을 진행시켰지만 사태는 호전되지 않은 채 1604년을 맞이한다. 이 해에 부산에서의 무역을 허가하는 사승(使僧 – 유정(惟政)과 손 문욱(孫 文彧)이 일본 국내의 상황을 살핀다는 숨겨진 임무를 가지고 조선에서 파견되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秀忠]가 - 요시토시와 함께 상경(上京)한 이들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회견한 것은 다음 해인 1605년 3월이다. 후에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국교를 담당하는 입장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막부(幕府)에 인정받아 히젠[肥前] 내에 2800석을 따로 하사 받았다. 이를 보면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관계 수복에 차츰 적극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는 사이 1607년 1월.
조선 사절단(정사 여우길(呂 祐吉), 부사 경 섬(慶 暹), 서장관 정 호관(丁 好寬)) 460명이 파견되어 요시토시와 함께 쓰시마에서 에도로 가서 쇼우군[将軍] 히데타다를 만났다.
외국 사절단(使節團)이 에도로 온 것은 획기적인 것으로, 토쿠가와 막부의 위세를 일본 국내에 알릴 수 있는 효과도 가져다 주었다. 히데요시로 인해 무너진 조일 관계는 이렇게 겨우 수복되어 국교가 회복된 것이다.
조선 무역을 재개
사실을 말하자면, 요시토시는 조선 사절과 이에야스 사이에서 이에야스의 국서(國書)와 조선의 국서를 위조했던 것이다. 이유는 길어지기에 생략하지만 그런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무엇보다 쓰시마를 위해서 조일 무역 회복을 너무 갈망(渴望)한 나머지 그랬던 것이다.
조일 무역은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로 재개되었다. 조선과 쓰시마 번[対馬藩] 사이에서 맺어진 이 무역협정은 예전과 비교하면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요시토시는 완전 부활을 목표로 노력하던 중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 직전에 쓰시마에서 죽었다.
반쇼우 원[万松院]에 있는 요시토시의 묘(墓) - 나가사키 현[長崎県] 이즈하라 정[厳原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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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 5월 26일 병사(病死) 66세
1549년 ~ 1614년.
부친 타카노부[隆信]와 함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큐우슈우[九州] 정벌군을 따랐으며, 조선의 역[朝鮮の役]에서는 1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수군 부대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영지(領地)인 히라도[平戸] 외 이키[壱岐] 등도 영유(領有)하며 초대 히라도[平戸藩] 번주(藩主)가 되었다.
적남(嫡男)의 갑작스런 죽음
히젠[肥前] 히라도 번주 마츠라 시게노부는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의 다음 해인 1601년에 53세에 은거하여, 적남(嫡男) 히사노부[久信]에게 히라도 번(藩)을 잇게 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때 시게노부는 아들 히사노부를 쿄우토[京都] 후시미 성[伏見城]을 수비하도록 출진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현해탄에 배를 띄어놓고서는 거의 마지막까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2, 전쟁이 끝난 뒤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게서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사태는 급변하여 1602년 가을 갑자기 후시미[伏見]의 마츠라 저택에서 번주 히사노부가 급사(急死)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시게노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 히사노부의 급사에 관하여 번의 기록인 『가세전(家世伝)』에는, '후시미(伏見)에서 치질에 걸려 8월 29일 죽다. 향년 32'라고 쓰여져 있으며 또한 다른 가보(家譜)에는 '할복'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주저하면서 어느 쪽에 붙을지 망설이던 부친 시게노부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심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또는 며느리이며 히사노부의 부인 쇼우토우인[松東院]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인은 마츠라 씨[松浦氏]와 오오무라 씨[大村氏]가 서로 다투었던 시기에 양 가문의 화해를 하기 위해서 마츠라 가문에 시집 온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의 딸로 이름은 ‘소노’였다.
소노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며(세례명: 도나 메시아), 시집올 때 배교(背敎)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부인이 된 쇼우토우인은 첫째 아들을 비밀리에 세례 받게 하였고, 히사노부의 세례마저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게 열심인 모습은 곧바로 선교사들간에 널리 알려져,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의 부인 가라샤 타마코[ガラシャ 玉子]와 함께 칭송받았다 4. 또한 시아버지인 시게노부의 계속된 개종 요구에도 “신을 버리는 것 보다 천 번의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저항하며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프로이스의 일본사[フロイスの日本史]』
이러한 사정이 번주 히사노부의 할복에 영향을 끼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히사노부가 죽은 다음 해인 1603년 손자인 타카노부[隆信]를 데리고 순푸[駿府]로 가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를 알현하고나서야 3대 번주로 인정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성[居城] 카메오카 성[亀岡城] 불타오르다.
3대 번주 타카노부의 뒤를 봐주면서 주로 남만무역(南蠻貿易)에 전념했다 5.
이미 부친 타카노부[隆信] 6 때부터 '하비에르'나 '루이스 프로이스'를 히라도에 초대하는 등 무역 기반을 닦아 놓고 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609년에 네덜란드의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
1613년에는 영국 배도 입항하여 성 밑 마을[城下町]에 상관(商館)을 설치하였다.
특히 네덜란드는 일본 무역의 거점이 1641년에 나가사키[長崎]로 이전되기 전까지 7 30여 년간 히라도에서 사키카타 쵸우[崎方町]에 부두(埠頭)를 만들고 상관이나 주택을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일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즈음 히라도에는 남만인(南蠻人)들에 더해 8 수 많은 상인들이 모였기에 서국(西国) 9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되어 번영의 극을 달했다.
그러나 1613년 10월 3일 밤.
시게노부는 갑자기 자기 손으로 1599년에 새로 축성한 거성 카메오카 성[亀岡城] 10에 불을 질러 무너뜨렸고, 다음 해인 5월 26일에 의사 타케노 소우후우[武野 宗楓]의 간병을 받는 중 66세의 생애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가세전[家世伝]』
이 사건은 자살한 아들 히사노부의 망령에 괴로워하다 미쳤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사건의 진상(眞相)은 무역 이익을 독점하던 것과 나아지지 않고 있던 기독교 금지령에 있지 않았을까?
혹독한 기독교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히라도 번[平戸藩]에는 이키츠키[生月] 등 영내(領內)의 섬들에 많은 신도들이 숨어있었고, 쇼우토우인과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에야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히라도 번이 계속해서 압력을 받았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시게노부는 남만무역의 유지와 기독교 개종의 유예(猶豫)를 조건으로 거성을 불에 태워 없애고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하극상의 센고쿠 시대부터 근세 초기의 혼란기까지 살아 남은 마츠라 시게노부.
기독교 덕분에 철포(鉄砲), 오오츠츠[大筒]나 막대한 무역 이익을 손에 넣어 11 히젠[肥前] 서부(西部)의 패권을 쥘 수 있었지만, 그 기독교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신, 히라도의 상징이었던 카메오카 성[亀岡城]까지 잃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이쿄우 사[最教寺]에 있는 시게노부의 묘 - 히라도 시[平戸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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