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쿄우토[京都]의 다이토쿠 사[大徳寺]에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미츠나리의 유골을 조사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미츠나리의 골격은 여성과 착각할 정도로 얇았다고 한다. 마치 히로사키 시[弘前市] 스기야마 가문[杉山家][각주:1]에 전해지는 미츠나리 초상화[각주:2]처럼, 섬세하고 여성적인 풍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체형의 사람은 고지식하며 비사교적, 유모어가 부족하고, 섬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보통 자연이나 책 등을 사랑하는 지능형으로, 인간에 대해서는 냉담냉혹 한 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이시다 미츠나리와 관련된 일화의 대부분에서 그런 특징을 옅볼 수 있다.

 미츠나리는 뛰어난 재치로 인해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었다.
 미츠나리의 출신지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근처에 있는 절에 심부름하는 아이[寺小姓]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나이는 15~16 즈음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당시 오우미[近江] 나가하마 성[長浜城]의 성주로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가 매사냥을 하던 도중 목이 말라 이 절에 목을 축이러 온 것이다.
 미츠나리가 접대를 맡았다. 곧바로 차를 끓여 히데요시에게 권했다. 첫 번째로 내온  차는 커다란 찻잔에 미지근한 차를 7~80%를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맛있게 전부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뜨거운 차를 찻잔의 반 정도 담아서 내왔다. 히데요시는 이것도 다 마시고 난 뒤 한잔 더 바랐다. 미츠나리는 아주 뜨거운 차를 작은 찻잔에 조금만 담아 내온 것이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의 이런 재치가 맘에 들어 절의 주지에게 청하여 미츠나리를 데리고 와 곧바로 시동으로 삼았다. 이렇게 히데요시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 미츠나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재능을 발휘하며 차츰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어갔다.[각주:3] [각주:4]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히데요시가 미츠나리를 호출하여 지금까지의 공적에 대한 포상으로 500석을 가증(加增)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500석 대신에 우지[宇治], 요도[淀]의 양 천 기슭에 자라는 백성들이 맘대로 베고 있는 갈대의 예초권(刈草權)을 저에게 주신다면, 1만석에 상당하는 군역(軍役)을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청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미츠나리의 청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양 천의 천기슭 수십 리 안에 있는 갈대를 베는 것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각주:5] 

 미츠나리 의 이러한 이재(理財)의 재능도 히데요시는 맘에 들었다. 더구나 미츠나리의 경우 그런 재능을 사욕이 아닌 히데요시에 대한 멸사봉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언제나 미츠나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은 주인에게서 받은 봉록을 전부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긴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훔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 써버리고서 남에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고 단언하였다.

 이에 관한 일화로 용장(勇將)으로 이름 높은 시마 사콘[島 左近]을, 미츠나리는 자신의 봉록의 절반 가까이를 들여 가신으로 삼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각주:6] 
 미츠나리는 뛰어난 무사에게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도록 힘썼던 듯 하다. 그것도 히데요시에 대한 봉공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츠나리 자신의 주변은 실로 꾸밈이 없고 수수했다. 후에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패하여 거성인 사와야마 성[佐和山城]도 함락되었는데, 공격군의 병사가 성 안을 돌아보자 방은 모두 초벽(初壁)만 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대부분 판자만 덧댄 채였다. 마당에 정원수(庭園樹)도 없었다고 한다.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도 굉장히 착실하였으며 다방면에 이르렀다. 밤중에 폭풍이 들이쳤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이미 성의 파손상태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다. 즉 미츠나리는 이런 경우 철야를 해가며 성 안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원래 이런 역할을 해야 할 담당관은 10시 즈음이나 되어서야 보고하러 오는 꼴이었다.

 이상과 같은 미츠나리의 근무태도는 결코 히데요시에게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주 히데요시에게 격한 말투로 간언(諫言)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츠나리는 1585년 7월 히데요시가 관백(関白)에 임명되어 토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칭하게 되었을 때, 관백의 제대부(諸大夫) 12명[각주:7] 중 한 사람에 선정되어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에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토요토미 정권의 오봉행(五奉行)[각주:8] 중 한 사람으로 행정의 중책을 짊어지지만,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으로 순식간에 No.1 실력자가 된다.

 미츠나리의 치적을 간단히 살펴보면, 히데요시가 중요시했던 사카이[堺]의 총독을 1586년부터 1588년까지 맡았으며,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각주:9] 때의 병참, 하카타[博多]의 부흥, 시마즈 요시히사[島津 義久]와의 외교절충에 힘 썼으며,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각주:10], 히데요시의 오우슈우 정벌[奥州征伐][각주:11]에 출진,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조선침략에서는 침략군의 운송과 병참, 무기 보급 등의 지휘를 취하였으며 감찰[軍監]까지 맡았다. 거기에 관백 히데츠구[秀次] 사건[각주:12], 태합검지[太閤検地][각주:13]에도 참여하는 등등 히데요시가 행한 중요정책 전반에 미츠나리는 중요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했기에 히데요시도,
 “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자는 미츠나리뿐”
 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미츠나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데요시 정권의 No.1 실력자였다.
 코우야 산[高野山]의 모쿠지키 상인[木食 上人]은,
 “미츠나리는 오봉행 중 제일인자인 듯이 행동하며,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고 말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는,
 “태합의 고굉지신으로, 그 위세는 비견할 자가 없다”고 말하였고,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는 가신인 코다마 모토카네[児玉 元兼]가 가지고 있는 명도(名刀)를 미츠나리가 원하였는데, 제출이 늦어져[각주:14] 미츠나리의 기분이 상하면 큰일이라며 빨리 제출해 달라고 코다마 모토카네에게 부탁할 정도였다.  

 그러했기에 미츠나리는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을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여 평판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미츠나리를 극도로 증오하는 무리가 있었다.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등 창 한 자루로 돌격하며 출세한 히데요시의 아이들, 즉 무공파 무장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미츠나리는 아무런 무공도 없는 주제에 히데요시의 맘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난체하며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 건방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했기에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오대로(五大老)[각주:15]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천하제패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자, 저 무공파 장수들은 미츠나리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이에야스와 손잡고 미츠나리 등 문치파와 격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 3월, 문치파의 좌장적 존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가 죽자, 무공파 칠장[각주:16]은 미츠나리를 습격하고자 하였다. 미츠나리는 이때 하필이면 이에야스에게로 도망쳐 난을 피할 수 있었는데[각주:17], 이런 모습에서 당시의 정치상화 속에서 고립된 미츠나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각주:18]. 이 사건으로 미츠나리는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으로 은거를 강요당해, 천하는 이에야스의 독무대가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関ヶ原の戦い]은 대단원이었다. 대다수 토요토미 은고[豊臣恩顧][각주:19]의 다이묘우는 미츠나리가 내건 ‘토요토미 가문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만으로 더 이상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츠나리의 중대한 오산이었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패하여 도망치다 잡혔다. 그 뒤에 몇 개의 일화가 전해진다.
 의복이 더러워져 있었기에 이에야스가 입던 옷을 주었을 때, 그것을 미츠나리에게로 가지고 온 자가,
 “이것은 우에사마[上様]가 하사하신 것”
 이라고 하자,
 “히데요리[秀頼]님 말고 우에사마는 따로 없을 터”
 라고 말하며 그 옷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잡힌 미츠나리를 내려다 보며 욕을 하였을 때,
 “무운 다하여 네 놈을 이러한 처지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고 대답했다고 한다.

 10월 1일. 로구죠우 강변[六条河原]의 처형장에 끌려갈 때, 미츠나리는 너무도 목이  말라 경비하는 자에게 따스한 물을 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장 따스한 물을 구할 수 없어 경비무사는 대신으로 하라며 곶감을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미츠나리는, 곶감이 가래병에 좋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경비무사는 지금 죽으러 가는 주제에 몸에 좋지 않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미츠나리는 말했다.
 “큰 뜻을 품은 자는 목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목숨을 아껴 어떻게든 그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1560년 오우미[近江] 사카타 군[坂田郡] 이시다 촌[石田村] 출생.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눈에 띄어 코우가[甲賀] 미나구치[水口] 성주가 되면서부터[각주:20] 출세하여 종오위하(従五位下) 지부노쇼우유우[治部少輔]가 되었고 오봉행(五奉行)의 한 명으로 선정된다. 1595년 오우미 사와야마[佐和山] 19만 4천석에 봉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를 참모로 삼아 서군(西軍) 8만을 이끌고 싸우지만 패하여 사형당했다. 41세.

  1. 미츠나리의 둘째 아들 이시다 시게나리[石田 重成]가 히로사키 번[弘前藩]으로 도망간 뒤 시게나리의 아들 요시나리[吉成] 때부터 스기야마 씨[杉山氏]를 칭함. [본문으로]
  2. 위에 있는 초상화. [본문으로]
  3.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작자미상의 일화 모음집 무장감장기(武将感状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며, 미츠나리의 첫째 아들 시게이에[重家]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미츠나리는 18살 때 히데요시가 히메지[姫路]에서 츄우고쿠[中国] 방면을 담당했을 때부터 섬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사족으로 후세의 군기물 ‘이시다 군기[石田軍記]에는 히데요시가 미츠나리의 후장을 파려고 시동으로 들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5. 갈대는 지붕을 만드는데 쓰이거나, 물건을 가리는 발(簾)을 만드는데 쓰였기에 거의 필수품으로 여겨지던 것이라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미츠나리는 후에 이때 얻은 돈으로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백 기(騎)의 무사를 이끌고 와 히데요시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고금무가성쇄기(古今武家盛衰記)’에 실린 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水口城] 4만석일 때 2만석을 떼어 주었다고 하나, 미츠나리는 미나구치 성의 성주가 된 적이 없었으며, 시마 사콘은 미츠나리가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9만석의 영주일 때 얻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본문으로]
  7. 나카무라 시키부쇼유유우 카즈우지[中村 式部少輔 一氏], 이코마 우타노카미 치카마사[生駒 雅楽頭 – 이 당시엔 마사카츠[政勝]라 하였음], 오노기 누이도노스케 시게카츠[小野木 縫殿助 重勝], 아마고 쿠나이쇼우유우 하루히사[尼子 宮内少輔 晴久], 이나바 효우고노스케[因幡 兵庫助], 츠게 사쿄우노스케[柘植 左京亮], 츠다 오오이노카미[津田 大炊頭], 후쿠시마 사에몬다이후 마사노리[福島 左衛門大夫 正則], 이시다 지부노쇼우유우 미츠나리[石田 治部少輔 三成], 오오타니 쿄우부우쇼우유우 요시츠구[大谷 刑部少輔 吉継], 후루타 효우부쇼우유우 시게츠네[古田 兵部少輔 重恒], 핫토리 우네메노카미[服部 采女正]. [본문으로]
  8. 주로 마에다 겐이[前田 玄以],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나츠카 마사이에[長束 正家]를 이름. [본문으로]
  9. 히데요시의 전쟁금지령[惣無事令]을 어긴 시마즈 가문[島津家]을 정벌하려 한 전쟁. 1587년 개전. [본문으로]
  10. 1590년 역시 전쟁금지령을 어긴 호우죠우 가문[北条家]을 정벌한 전쟁. 오다와라[小田原]는 호우죠우 가문의 성(城). [본문으로]
  11. 1591년 1월의 오오사키-카사이의 난[大崎・葛西の乱]과 9월의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九戸政実の乱]. [본문으로]
  12. 사실 미츠나리는 히데츠구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미츠나리는 칸토우[関東] 사타케 령[佐竹領]의 검지(検知)하기 위해 출장간 상태였다. [본문으로]
  13. 일종의 토지조사. 정확한 수확량을 선출하여 세금과 부역할 양을 정하였다. [본문으로]
  14. 살생관백 히데츠구[秀次]도 이 칼을 노리고 있었기에, 모토카네는 어느 쪽을 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기에 늦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5.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16. 일반적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케다 테루마사[池田 輝政],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를 말한다[関原始末記], [徳川実記]. 다만 그 인물 구성은 기록마다 틀려 '전국무장의 말년과 최후 -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잠깐 이름이 나온 이타자카 보쿠사이[板坂 卜斎]의 메모[板坂卜斎覚書]에는 이케다 테루마사가 빠지고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있으며, 미츠나리를 습격한 무장 일곱명에게 보낸 편지인 [윤3월5일자 이에야스의 편지(閏三月五日付家康書状)의 수신인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우 요시아키가 빠지고 대신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正],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7. 실제로는 이런 적 없다. 오오사카[大坂]에서 공격받은 미츠나리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 義宣]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도움으로 후시미 성[伏見城] 안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피했고 여기서 농성했으며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연계하여 무공파 칠장 및 이에야스를 협격하려 하였다. 다만 동료였던 마시타 나가모리[増田 長盛]가 주저하는 사이 협격 모의는 실패하고, 이에야스와 화해를 하는 조건으로 책임을 지고 미츠나리는 봉행에서 물러나 은거를 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사실 이 사건은 미츠나리 하나만 노린 사건이 아니라, 봉행파 다수를 노린 사건이었으나 은거를 하며 봉행직에서 물러난 것은 미츠나리 한명 뿐이라, 후세에 미츠나리만 공격받은 양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9.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어 다이묘우가 된 무장들. [본문으로]
  20. 미츠나리가 미나구치 성주가 된 적은 없다. 시마 사콘[島 左近]을 등용할 때 미나구치 4만석 중 2만석을 떼어 주었다는 일화 때문에 퍼진 낭설로, 당시(1590) 미나구치의 성주는 나카무라 카즈우지[中村 一氏]였다. [본문으로]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는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에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뛰어난 무용(武勇)의 장수이지만, 센고쿠[戦国] 무장 특유의 연극적 행동이나 허세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노련(老鍊)한 느낌을 준다.

 반 단에몬[塙 団右衛門]이라고 하는 요시아키의 가신이 있었다. 그는 소위 호걸형 무사였기에 주종간에 다툼이 많았다. 어느 날 오오사카 성[大坂城]에서 카토우 키요마사가, 저렇게나 유명하고 뛰어난 무사를 어째서 우대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었다고 한다. 보통 자기 부하의 무명(武名)이 높으면 기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를 선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단에몬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때 한 부대의 지휘관으로 출진했지만, 지휘관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필마단기로 돌격하여 가장 먼저 적진에 돌입하였으며(一番槍), 적의 목을 베어 오는(一番首) 수훈을 세웠다. 그러자 요시아키는,
 “네 녀석은 지휘관을 맡기엔 부족한 놈이다”
 고 차갑게 질책하여 단에몬을 화나게 하였다. 결국 단에몬은 요시아키에게서 떠났다[각주:2]. 즉 요시아키는 단에몬과 같은 스탠드플레이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시아키 자신도 떠들썩하게 남의 주목을 끄는 행동을 싫어하였다.

 요시아키가 얼마나 침착했는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요시아키의 부하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장난 삼아 불에 달구어진 불쏘시개를  거꾸로 세워 나중에 온 사람이 그것을 쥐다 뜨거움에 놀라는 것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거기에 요시아키가 지나치게 되었다. 부하들은 만약 요시아키가 불쏘시개를 쥐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말하는 타이밍을 놓쳐 누구 하나 말하지 못하던 중 결국 요시아키가 아무 생각 없이 불쏘시개를 잡았다. 요시아키의 손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태연히 그 불쏘시개로 땅바닥에 한 일(一)자를 그리고 잠시 떠들다 갔다고 한다. 더구나 나중에 어떠한 문책도 없었다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 침략의 본거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에 여러 장수들이 주둔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서 포획한 호랑이를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가던 중 호랑이가 그들을 뿌리치고 날뛰었다. 구경하던 다이묘우[大名]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빴지만, 그런 소동 속에서 요시아키 단 한 사람만이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사라지자 그제서야 눈을 뜨며, “뭔 일 있었나?”하고 입을 열었다 한다.

 히데요시[秀吉]가 죽은 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요시아키 한 사람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를 정점으로 하는 문치파가 이에야스[家康] 타도를 획책하였고 키요마사, 마사노리 등 무공파가 미츠나리를 죽이고자 행동을 일으켜 일촉즉발의 긴박한 공기가 떠돌 때도 요시아키는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 저택을 방문하여,
 “세상이 소란스러운 듯 합니다만 이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지금까지 곁에 두고 있던 50기(騎) 중 20기를 제 본거지인 이요[伊予]로 돌려보냈습니다. 남은 인원은 이에야스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바칠 생각입니다”
 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도 요시아키는 냉정침착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의 배신으로 인해 서군(西軍)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동군(東軍)은 앞다투어 가며 도망치는 적을 쫓아갔기에 진형이 흐트러져 각 무장의 본진을 지키는 방비가 부실해졌다. 하지만 요시아키의 부대만큼은 질서정연했다. 요시아키의 지시가 구석구석 잘 전해져 일사불란한 방비태세를 유지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적이 패주하자 요시아키는 출진할 때 몸에 걸치고 있던 화려한 갑주를 재빨리 벗어버리고 평범한 갑주로 갈아입었다. 이는 결사의 각오를 한 적병이 적어도 대장만이라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나중에 이를 전해 들은 이에야스는,
 “사마노스케[左馬助=요시아키]는 정말 빈틈이 없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기 전초전인 기후 성[岐阜城] 공성전에서 승리하였을 때, 승리를 알리고자 칸토우[関東]의 이에야스에게 보고하기 위해 사자(使者)를 고르려 했으나 아무도 사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막 결전이 시작되려는 때에 사자가 되어 전쟁터에서 이탈해 버리면 공적 세울 기회를 잃기 때문이었다. 이 때 요시아키는 가신 한 명을 지목하여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칸토우에 사자를 보내는 것은 긴급을 요하는 일이며 이것 역시 공적이라 할 수 있다. 부디 가주지 않겠는가?”
 하며 간절히 부탁했다고 한다.

 역시 세키가하라 때의 일이다.
 요시아키 진영에 잠입한 닌쟈[忍者]가 잡혔을 때 요시아키는,
 “이자도 자기 주군의 명령에 죽음을 각오한 용사이다. 지금 여기서 이자를 죽여도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며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요시아키는 적이라 하더라도 용사를 인정하는 도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공적으로 인하여 요시아키는 이요 마츠야마[松山] 20만석에서 아이즈[会津] 40만석의 가증되었지만 요시아키는 이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요시아키를 위해 50만석을 주려고 하였지만 이에야스의 모신(謀臣)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너무 많다며 막았다고 한다. 이를 들은 요시아키는 곧바로 마사노부에게 가서 이유가 뭐냐며 따졌다. 마사노부의 답변은 이러했다.
 “당신은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에 많은 은혜를 입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무나도 많은 봉토를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에게 받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의 화근거리가 될 수도 있기에 그렇게 처리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리 요시아키라도 이에는 반론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각주:3]

 이에야스는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히데타다[秀忠]를 병상(病床)으로 불러 여러 다이묘우들에 관해 자신이 가진 인물평을 전해 주었는데 요시아키에 대해서는,
 “우직하고 의리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사사로운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불만을 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부분을 잘 판단해서 처리하도록”
 하고 말하였으며 또한,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부추김을 받는 다면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모반을 일으키는 법이다.”
 고 말하며 감시의 눈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말을 남겼다 한다.

 카토우 요시아키의 가문은 아들인 아키나리[明成] 때 아이즈 42만석을 몰수당하여 단절을 맛보게 된다.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563년생. 통칭 마고로쿠[孫六], 사마노스케[左馬助]. 미카와[三河] 출신으로 일찍부터 히데요시[秀吉]를 섬기며 시즈카다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의 공으로 3000석을 하사 받았다. 1585년 아와지[淡路] 1만5천석, 조선침략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참전. 1597년에는 거제도에서 조선 수군의 배를 탈취했다[각주:4].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 이요 마츠야마 성[伊予松山城]를 축성. 후에 아이즈 42만석으로 이봉(移封). 1631년 9월 12일 죽었다. 69세.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떠날 때 성문에 ‘결국 시골 좁은 천에 머물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를 높이 나는 갈매기 처럼 유유히 떠난다[野水江南遂に留まらず、高く飛ぶ 天地の一閑鷗]' – 즉 요시아키는 그릇이 작아서 대인배인 나님은 떠나마..라는 뜻일 것임. 아마... - 라는 시를 붙이고 갔기에, 이에 분노한 요시아키는 단에몬이 다른 가문에 취직 못하도록 타 다이묘우에게 편지를 돌렸다(이를 奉公構라고 한다). 그래서 단에몬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에 밑에 있었으나 얼마 안가 그곳에 있지 못하고 쿄우토[京都]에 가서 탁발승을 하다가 나중에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陣] 때 오오사카 성에 입성하게 된다. [본문으로]
  3. 전후 처리과정에서 이에야스가 논공행상을 주도하게 된 배경에는 이에야스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대리인과 후견인이라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키가하라 이후 동군이 영토를 하사 받은 것은 이에야스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 아닌 히데요리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다. [본문으로]
  4. 元凶(원균..이라고도 읽는다)의 칠천량 해전을 말한다. [본문으로]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明]
1631년 9월 12일 병사(病死) 69세.

1563년 ~ 1631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에서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각주:1]]의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활약하였다.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平定], 조선침략[朝鮮の役[각주:2]]에서는 수군을 이끌고 참가.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이요[伊予] 마츠야마[松山], 이어서 아이즈[会津] 와카마츠[若松]를 영유(領有)했다.



영광의 시즈가타케 칠본창

 카토우 요시아키는 어렸을 적부터 기마술(騎馬術)이 뛰어났기에,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자 그 재능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측근인 카토우 카게야스[加藤 景泰]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83년 4월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분전하여 칠본창(七本槍)의 한 명이 되어 '히데요시가 키운 무장[秀吉子飼いの武将[각주:3]]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천하 평정이나 조선 침략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요 마츠야마 시대

 수많은 전공을 세워 1595년 아와지[淡路]의 시치 성[志知城] 1만5천석에서, 이요[伊予] 마사키[正木=마츠마에[松前]] 6만석에 봉해져 7월에 마사키에 입성했다. 그 후 조선에서의 공적을 평가받아 가증(加增)되어 10만석을 영유(領有)하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의 세키가하라[関ヶ原の戦い]에서는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로서 동군에 참전하여 활약하였고, 전투가 끝난 후인 11월에 이요 마츠마에 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1603년 마츠야마 평야의 카츠야마 산[勝山]에 성을 쌓아 이전(移轉)하였다. 카츠야마를 마츠야마로 개명하고 번도(藩都[각주:4])에 어울리는 성 밑 마을[城下町] 경영에 힘썼다.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大坂冬の陣],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夏の陣]의 승리로 인해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세상이 되었다. 1622년 9월에는 토쿠가와 가문의 세자 이에미츠[家光[각주:5]]가 처음 갑옷을 걸치는 의식[具足始め]을 집행하였고, 1626년에는 히데타다[秀忠], 이에미츠가 상경하였을 때 함께 따라가 지쥬우[侍従]에 임명받았다. 요시아키는 노련한 무장이었기에 쇼우군 가문[将軍家]도 그를 우대하였다.

말년에 아이즈[津] 영전(榮轉)

 요시아키는 성 밑 마을 마츠야마의 기초를 쌓았지만, 마츠야마로 이전한지 25년 후인 1627년 2월 10일(3월이라고도 한다), 므츠[陸奥] 아이즈[会津] 43만 5천석으로 영전하게 된다. 아이즈는 오우슈우[奥州[각주:6]]의 요충지였기에 지용겸비의 무장을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쇼우군[将軍]이 중의(衆議)를 모으자 토우도우 타카토라[藤堂 高虎]가,
 “
변경의 중요지인 아이즈를 맡길만한 인물은 요시아키 이외에는 없습니다”
 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모우 타다사토[蒲生 忠郷][각주:7]가 죽은 뒤 아이즈의 영주(領主)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노신(老臣)들이 모인 회의 석상에서 요시아키를 추천한 것인데, 타카토라와 요시아키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유명했기에 그 이유를 묻자 타카토라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적인 일, 아이즈에 관한 것은 공적인 일이다. 사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 요시아키 이외의 적임자는 없다”
 고 말했다고 한다. 요시아키도 타카토라의 이 추천에 감격하여 그 후론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이때 요시아키는 아이즈가 오우우[奥羽] 2주[각주:8]의 요충지이며, 자신은 늙었고 또한 가신들도 노련했던 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도저히 그런 중책(重責)을 맡을 자신이 없다며 완고히 사퇴(辭退)했지만, 쇼우군은 요시아키와 같이 군법(軍法)과 민정(民政)에 밝은 노련한 용장이야말로 적임이라고 말하자 요시아키도 그 명령에 따랐다고 한다.

 한편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막부의 온미츠[隠密[각주:9]]의 보고에 따른 전봉(転封)이라는 설도 있다.
 온미츠를 이요[伊予]에 파견하여 마츠야마 성을 조사하였고, 또한 마츠야마 번(藩)의 동향 및 농민의
피폐(疲弊)한 모습 등을 보고받은 막부에 다른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마츠야마 번(藩)의 확립에 계획적인 정책을 실시해 왔던 요시아키에게 있어서는 지금껏 노력이 공염불이 되었다.

 1627년 5월 4일.
 아이즈 와카마츠 성에 입성하여 시라카와[白川] 가도를 고치는 등 도로, 교통망을 정비 하였고, 산업을 육성하여
아이즈누리[会津塗]라고 하는 칠기(漆器)나 아이즈혼고우야키[会津本郷焼[각주:10]] 등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시모리[石盛]의 금산(金山)이나 카루이자와[軽井沢]의 은산(銀山) 정비를 시작으로 광산(鑛山) 개발 등을 양성하여 번정(藩政)의 기초를 쌓기 위해 힘썼다.

 요시아키는 몸소 아이즈 외곽으로 나가 농지를 돌아보았고 또한 농민들에게 정보를 모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렇게 번정 확립에 힘 쏟은 요시아키는 1631년 9월 12일에 에도 사쿠라다[桜田]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하였다.

  1. 1583 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임진, 정유의 난을 말함. [본문으로]
  3. 그 무장이 어렸을 적부터 키운 무장. 주로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를 이를 때는 반드시 붙는 대명사와 같은 존재. [본문으로]
  4. 번의 수도. [본문으로]
  5. 에도 막부 3대 쇼우군[将軍] [본문으로]
  6. 므츠(陸奥)의 별칭. [본문으로]
  7. 가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의 손자. [본문으로]
  8. 즉 므츠(陸奥)와 데와(出羽). [본문으로]
  9. 첩보활동을 하던 하급 무사. [본문으로]
  10. 아이즈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도자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