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 忠興]

1645 12 2일 병사(病死) 83.

1563 ~ 1645.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아들.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딸 가라샤가 부인이었지만, 혼노우 사[本能]의 변()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 측에 섰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 부젠[豊前] 코쿠라[小倉], 그 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로 영지(領地)가 이동되었다. 말년은 산사이[]라는 호()를 칭하며 다도(茶道)와카[和歌]를 즐겼다.







은거 생활 25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부젠[豊前] 코쿠라 39 9천석 태수(太守)의 지위에서 물러난 것은 59살 때인 1621년이었다. 그 전년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사이소우류우[宗立]'라 불리고 있던 그는, 해가 밝은 이 해에 부젠[豊前] 나카츠 성[中津]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11년 후인 1632년.

 번주(藩主) 타다토시[忠利]가 히고[肥後] 쿠마모토 54만석으로 이봉(移封)되자, 이번엔 야츠시로(八代)()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은거생활 중이었다. 83세라는 당시로써는 드문 장수(長壽)를 끝마치기 까지 25년 간 은거한 것이 되는데, 그의 은거생활은 유유자적(悠悠自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다오키는 다채로운 취미를 가진 무인(武人)이었다.
 무가(武家)의 옛 전통이나 의식, 작법에 밝은 것과 와카[和歌]렌가[連歌] 등에 뛰어났던 것은 조상 대대로의 전통이었으며, 저술(著述), 그림을 그리거나, 케마리[蹴鞠][각주:1], 사루가쿠[
] 외에 도검()이나 무구(武具)의 제작, 디자인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호소카와 가문 기록[細川家記]'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다도(茶道)는 센노 리큐우[千利休]'칠철(七哲)'[각주:2]'
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였다. 다인(茶人)의 신분인 산사이소우류우는 에도[]에 있을 때 자신의 저택에서 자주 다회()를 열어 여러 다이묘우[大名]와 교류를 맺었다.


 그런 많은 취미를 갖고 있던 타다오키이기에 은거 생활이라는 넘쳐나는 시간을 즐겼다고 봐도 좋겠지만, 그 마음을 들여다 보면 현역에서 물러난 노인에게 있을 법한 -긴장의 끈이 느슨해진 사람의 고독과 거기에서 오는 불만과 불안의 그림자가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주 타다토시와의 불화설


 타다오키가 그러한 불만을 터트릴 수 있는 대상이 아들 타다토시에게 집중되었던 것은 부자의 연으로 봐서 당연하다고 보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타다토시는 셋째이면서 후계자가 되어 봉토를 이었기에, 은거한 아버지에 대해서 무엇이든 조심하였다. 타다오키로써는 울분을 풀 상대로써 만만한 부분도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은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 않는 가신들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담은 편지를 타다토시에게 보내어 추궁했다. 이것은 후에 생각 없이 그런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한다고 반성을 했지만, 자주 투덜거리는 은거한 부친에게 아들이 질렸던 같다.


 호소카와 부자의 불화설도 있다.
 예를 들면 쇼우군[
] 이에미츠[家光]가 천연두에 걸리자 쾌유기원의 기도를 해달라는 아들 타다토시의 요청을 받았을 때, “될 수 있음 하지 않고 싶다고 떼를 썼던 것과 타다오키가 야츠시로 성() 새로운 저택에 연못을 파려고 할 때, 막부(幕府)의 눈을 의식한 타다토시가 조심스럽게 경고를 한 것에 대하여 타다오키가 안색을 바꾸어 화를 내며 되물은 것 등과 같은 부자간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예전엔 토쿠가와 이에야스[ 家康]와 동격이었다는 자부심을 버리질 못하는 은거한 부친과 교묘한 처세술을 바탕으로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당주인 아들. 서먹서먹해진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생겼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결국 [노병은 사라질 뿐]이라는 순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타다오키의 [영감탱이의 땡깡]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터가 그립구나


 하지만 그런 부자 관계는 타다오키 79살 때인 1641, 타다토시의 죽음에 의해 뚝 끊긴 것이다. 타다토시는 첫째 타다타카[忠隆]가 어떤 이유로 타다오키에게 폐적(廢嫡)된 후[각주:3], 후계자가 될 터였던 둘째 오키아키[興秋]를 대신하여[각주:4] 후계자가 되었다(후에 오키아키는 가문을 뛰쳐나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 토요토미(豊臣) 측에 섰기 때문에 타다오키에게 자살을 명령받는다).


 번()의 기반을 닦는 어려운 임무를 맡았던 타다토시가 56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신의 투덜거림을 들어 주지 않은채 죽어버린 것이다. 타다오키는 자신이 너무 오래 산다고 한탄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83살 때, 50을 넘어서 낳은 넷째 아들 타츠타카[立孝]도 죽어버렸다(향년 31).


 타츠오키는 그 해의 12 2일에 죽었다. 죽을 때 전쟁터가 그립구나”[綿考輯[각주:5]]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화려한 무구를 몸에 걸치고, 수 많은 전쟁터를 질주했던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이, 이 자타가 공인하는 무인(武人)의 뇌리에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1.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2. 리큐우 휘하의 뛰어난 제자 일곱 명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 利貞]를 이름. [본문으로]
  3. 첫째 타다타카의 부인은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代]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전투 전에 서군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등에 의한 동군 측 무장의 인질 억류 시도가 있었는데, 타다오키 부인인 가라샤는 이를 거부하고 자살한. 그러나 이 때 타다타카의 부인 치요는 가라샤와 함께 죽지 않고, 옆집에 있는 자신의 친 언니이자 우키타 나오이에[宇喜田 直家]의 부인인 고우히메[豪姫]에게로 도망친다. 이것이 가라샤를 사랑하던 타다오키의 분노를 사서 후에 타다타카에게 이혼을 명령하지만, 타다타카는 거부하여 폐적당한다. 또한 이런 설도 있다. 세키가하라[関ヶ原]이전, 히데요시 죽은 후의 혼란기에 타다오키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 – 치요의 오빠], 아사노 나가마사[浅野 長政] 등과 함께 이에야스 암살을 노린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입장이 난처해진 적이 있었기에, 마에다 가문[前田家]과의 인척 관계를 없애 이에야스의 의심을 풀려고 했다는 설이 현재는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by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4. 둘째 오키아키[興秋]는 당시 에도에 인질로 있던 셋째 타다토시가 당주가 되자 타다토시를 대신하여 인질로써 에도로 가던 도중 자신이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과 인질로 받쳐지는 데 대한 울분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모가미 가문[最上家]의 예에서와 같이 그 때까지의 세자(世子) 대신에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받친 아들을 막부(幕府)의 인물들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후계자로 삼는 일도 있었기에, 비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후에 그와 행동을 같이 했던 요네다 켄모츠[米田 監物]가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 후 번으로 돌아와서는 대대로 가로(家老)를 맡은 점과 진위가 가려지진 않았지만, 아마쿠사[天草]에 있는 촌장[庄屋]의 족보가 오키아키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생존했었다는 설이 있다. 단지 요네다 켄모츠는 그때까지 전쟁터에서 워낙 뛰어난 무공을 많이 세운 무장이었던 점과 타다오키의 명령으로 오오사카 성[大坂城]에는 스파이로 들어갔기에 아무 일 없이 돌아와서 가로를 지냈다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5. 호소카와 가문의 기록. [본문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 ]
1611년 6월 24일 병사(病死) 50세.

1562년 ~ 1611년.
시즈가타케[賤ヶ岳] 칠본창(七本槍)[각주:1]중 한 명. 히데요시[秀吉]가 큐우슈우[九州]를 제압하자 히데요시에게서 히고[肥後]의 반(半)을 하사받았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였고, 히고 일국(一国)를 영유하며 쿠마모토 성[熊本城]을 축성하였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와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회견을 성사시켰지만 곧바로 병이 나서 죽었다.



갈등으로 고심한 말년

 카토우 키요마사가 일부 지역을 뺀 히고[肥後]와 붕고[豊後]의 3개 군(郡)[각주:2]을 합하여 54만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후인 1600년 11월.

 키요마사의 "말년"은 용맹을 바탕 삼아 혁혁한 공을 세워 온 센고쿠[戦国] 무장에서 위정자(爲政者)로 변신한 이 해의 38살부터 한창 일할 나이인 50세로 죽었을 때까지인 12년간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쿠마모토에서는 키요마사를 [세이쇼우 코우(清正公 = 키요마사 공)]을 줄여 [세이쇼코 상(セイショコ さん = 키요마사 씨)]이라 부르며 키요마사의 은덕(恩徳)을 우러르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 12년 동안 키요마사가 정력적으로 기반을 닦고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이 후에 쿠마모토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지금도 그 노력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의 명성(名城)인 쿠마모토 성(城)의 축성, 가도(街道)의 정비, 관개(灌漑)의 확충, 간척(干拓) 등에 의한 경작지(耕作地)의 조성, 제사(製絲) 등의 산업 진흥 등이 그 후의 히고 쿠마모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히고 카토우 가문[加藤家]은 그 다음 대인 타다히로[忠広]의 삭탈관직[改易[각주:3]]과 함께 끊어지지만, 카토우 가문 다음으로 이봉(移封)되어 온 호소카와 가문[細川家]이 카토우 가문의 유적, 풍습을 존중한 것도 키요마사에 대한 히고 사람들의 감사와 존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군(名君) 카토우 키요마사의 말년은 정말 충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内面)에서는 토요토미 은고(恩顧)의 다이묘우[大名]이면서도, 토쿠가와 정권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적 갈등으로 고심했다고 여겨진다.

토요토미 안태(安泰)를 꾀하다

 키요마사에게는 세 명의 측실(側室)이 있었다고 한다.
 2남 1녀를 낳은 ‘혼가쿠인[本覚院 = 통칭 카와지리도노[川尻殿]]’, ‘죠우코우인[浄光院 = 통칭 키쿠치도노[菊池殿]]’, 후에 뒤를 잇는 셋째 아들 타다히로와 둘째 딸 아마[あま]의 1남1녀를 낳은 ‘쇼우오우인[正応院]’이다.

 키요마사가 죽은 뒤, 불과 12살며 셋째 아들 타다히로가 뒤를 이은 것은 이미 장남 토라노스케[虎之助]가 2살, 둘째인 타다마사[忠正]가 8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정실(正室)[각주:4]법호(法號)를 ‘쇼우죠우인[清浄院]’이라 하는데, 이에야스의 외숙부 미즈노 타다시게[水野 忠重]의 딸이다. 이에야스는 모친 오다이[於大 = 덴즈우인[伝通院]]의 동생인 이 타다시게의 딸을 양녀로 삼아서 키요마사에게 시집보냈다[각주:5].

 그리고 키요마사의 장녀인 코야[古屋 – 혼가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를 토쿠가와 사천왕[徳川 四天王][각주:6] 중 한 명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아들 야스카츠[康勝]와 결혼시켰고, 둘째 딸 아마를 후에 어삼가(御三家[각주:7])인 키슈우 토쿠가와 가문[紀州家]를 세운 이에야스의 10째 아들 요리노부[徳川 頼宣]와 결혼시켰다.

 토쿠가와 가문과 키요마사가 이런 인척(姻戚)관계로 이어진 것은,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한 책략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다. 토요토미 은고 다이묘우(大名)를 회유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키요마사가 비록 서국(西国) 큐우슈우[九州]에 있더라도, 키요마사라는 인물은 적으로 돌리면 또 이 정도로 성가신 무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키요마사는 밖에서 보면 토쿠가와와 친하며, 토요토미와는 거리가 생긴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우직한 인물은 고(故) 히데요시의 두터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은혜를 갚는 길은 겉으론 토쿠가와에게 복종하면서, 히데요리를 당주로 하는 토요토미 가문의 안태를 꾀하는 것 말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강요하는 니죠우 성[二条城]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사노 요시나가[浅野 幸長] 등과 함께 요도도노[淀殿 – 히데요리의 생모]를 설득하여 실현시킨 것은 토요토미 가문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귀국 도중에 병이 나다

쿠마모토 시[熊本城]에 있는 키요마사 동상.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회견은 1611년 3월 27일 무사히 끝났다.
 니죠우 성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온 키요마사가 침실에서 몸 안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고 잠시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慶元記[각주:8]].

 회견장에서 만약의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그 단도로 히데요리를 지킬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되지 않았다는 안심에서 흐른 눈물일 것이다.

 히데요리를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경호하며 돌려보내는 도중에 후시미[伏見]에 들렸다. 그곳에 있는 자기 저택 앞을 흐르는 강에 배를 띄우고 그 배에서 잔치를 연 키요마사는 그제서야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린 듯한 생각이 들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같은 해 5월 하순.
 귀국하던 배에서 갑자기 병이 나 병든 몸을 질질 끌듯이 하며 쿠마모토로 돌아왔다. 혀가 꼬이는 증상의 병이었는데 확실한 병명(病名)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병은 나날이 악화되어 6월 24일 숨을 거두었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가(家)가 멸망하기 4년 전이었다.

  1. 1583년 오우미[近江]에서 히데요시[秀吉]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가 싸운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후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乱]의 무대가 되는 아마쿠사[天草] 섬 등은 기독교도들이 많았기에 막부에 부탁하여 옆 지방인 붕고[豊後]의 세 개군(郡)과 교환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3. 카이에키[改易]라 읽는다.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키요마사의 정실은 야마자키 카타이에[山崎 片家]의 딸로, 키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건너가 있던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쇼우죠우인[清浄院]은 후실(後室). [본문으로]
  5. 그녀의 나이 18세. 키요마사와는 20살 차이가 난다. [본문으로]
  6.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토쿠가와가(家)를 지탱한 네 명의 공신을 지칭. [본문으로]
  7. 오와리[尾張], 키슈우[紀州], 미토[水戸]에 이에야스의 각각 9째, 10째, 11째 아들들이 임명된 가문으로, 후에 쇼우군 본가가 끊길 경우 쇼우군을 배출할 수 있는 가문. 특징 겸 우대로써 토쿠가와[徳川]라는 성(姓)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에도 바쿠후에서는 다방면에 걸쳐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본문으로]
  8. 호우죠우 츠나시게(北条 綱成)의 증손자 호우죠우 우지나가(北条 氏長)가 쓴 책. [본문으로]

소우 요시토시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1. 12. 22:42 Posted by 발해지랑
소 요시토시(宗 義智)

1615 1 3일 병사(病死) 48.

 

1568 ~ 1615.

큐우슈우[九州] 평정을 끝낸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쓰시마[馬] 일국()를 안도(安堵)받았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코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의 지휘 하에서 출진.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에 속하지만 용서받아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힘썼다.

 

 

 



바쁜 말년

 

 쓰시마의 도주(島主) 소우 요시토시[宗 義智]는 임진, 정유의 난 때는 청년 무장으로 바다를 건너가 분전하는 한편, 명 왕조 정복의 야망을 품고 있던 토요토미노 히데요시와 명-조선과의 사이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처 마리아의 부친 코니시 유키나가의 제 1군에서 선봉으로 싸우는 몸이면서, 대륙 정세에 어두운 히데요시의 명 정복 계획을 억지(抑止)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소우 씨[宗氏] 1587년 히데요시의 큐우슈우 정벌[九州征伐]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그에게서 주어지는 무리한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바탕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쓰시마의 도주로써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섬의 사활(死活)에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일찌감치 싸움을 막을 수 있는 길을 탐색한 것이다.

 

 그러한 미묘한 입장에 있었던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서군 측에 섰다.

 () 히데요시에게서 사츠마[薩摩] 이즈미 군[出水郡] 중에 1만석을 가증(加增)받았던 고마움 장인인 코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패전 후. 장인 유키나가의 목은 베어졌지만 요시토시는 용서받았다. 그는 마리아와 이혼하여 코니시 가문과의 연을 끊었다. 이 때가 요시토시 33살 때였다.

 

 그때부터 요시토시는 이에야스[家康]의 지시를 받으며 명과 일본의 관계 수복, 조선과의 국교 회복과 무역 협정 체결에 노력하다 48살 때 죽는다.

 그 노력은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조일(朝日) 외교의 기초를 쌓은 것이기에, 외교-절충으로 바뻤던 이 15년의 세월이 그의 너무 빨랐던 '말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일 국교 회복에 조력

 

 쓰시마 번[対馬藩]의 조일 강화교섭(講和交涉)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퇴한 다음 해인 1599년에 이미 착수되고 있었다.

 쓰시마는 돌이 많고 거친 땅이기에, 섬에서는 거의 쌀을 얻을 수 없어 조선과의 무역으로만 섬을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빨리 무역을 재개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아직 무역에 대해서까지는 생각이 없었지만, 쓰시마 번은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 교섭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요시토시는 이 해와 다음 해(1600)에도 강화 교섭의 사자(使者)를 조선으로 보냈지만, 그들은 잡힌 후 아직 조선에 머물고 있던 명군에 넘겨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 명군이 일본에서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가 일어날 즈음 귀국한 후부터 또다시 강화 교섭을 진행시켰지만 사태는 호전되지 않은 채 1604년을 맞이한다. 이 해에 부산에서의 무역을 허가하는 사승(使僧 유정(惟政)손 문욱(孫 文彧)이 일본 국내의 상황을 살핀다는 숨겨진 임무를 가지고 조선에서 파견되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秀忠]가 - 요시토시와 함께 상경(上京)한 이들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회견한 것은 다음 해인 1605 3월이다. 후에 요시토시는 조선과의 국교를 담당하는 입장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막부(幕府)에 인정받아 히젠[肥前] 내에 2800석을 따로 하사 받았다. 이를 보면 이에야스가 조선과의 관계 수복에 차츰 적극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는 사이 1607 1월.

 조선 사절단(정사 여우길(呂 祐吉), 부사 경 섬(慶 暹), 서장관 정 호관(丁 好寬)) 460명이 파견되어 요시토시와 함께 쓰시마에서 에도로 가서 쇼우군[軍] 히데타다를 만났다.

 외국 사절단(使節團)이 에도로 온 것은 획기적인 것으로, 토쿠가와 막부의 위세를 일본 국내에 알릴 수 있는 효과도 가져다 주었다. 히데요시로 인해 무너진 조일 관계는 이렇게 겨우 수복되어 국교가 회복된 것이다.

 

조선 무역을 재개

 

 사실을 말하자면, 요시토시는 조선 사절과 이에야스 사이에서 이에야스의 국서(國書)와 조선의 국서를 위조했던 것이다. 이유는 길어지기에 생략하지만 그런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무엇보다 쓰시마를 위해서 조일 무역 회복을 너무 갈망(渴望)한 나머지 그랬던 것이다.

 조일 무역은 1609기유약조(己酉約條)로 재개되었다. 조선과 쓰시마 번[対馬藩] 사이에서 맺어진 이 무역협정은 예전과 비교하면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요시토시는 완전 부활을 목표로 노력하던 중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 직전에 쓰시마에서 죽었다.

반쇼우 원[万松院]에 있는 요시토시의 묘(墓) - 나가사키 현[長崎県] 이즈하라 정[厳原町]


아리마 하루노부(有馬 晴信)

1612 5 6일 참형(斬刑) 46.

1567 ~ 1612.

아리마 요시사다(有馬 義貞)의 둘째 아들. 형 요시즈미(義純)에게서 가독을 상속. 시마즈(島津)()와 협력하여 히젠(肥前) 시마바라(島原)에서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를 물리쳤다. 세키가하라(ヶ原) 전투 후에도 영지(領地)를 안도(安堵[각주:1])받지만,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의 꾀에 빠져 유배지인 카이(甲斐)에서 죽었다.

(가문(家紋)은 http://www2.harimaya.com/sengoku/html/farima_k.html 에서 무단 발췌)


소년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아리마 하루노부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이에야스의 양녀[각주:2]를 아들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등 말 그대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인생이었지만 말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빼앗겼던 선조 전래의 옛 땅을 - 돈만 주면 어떻게든 찾아 주겠다는 달콤한 말에 넘어간 것이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 46세의 나이에 죽음을 명령 받는 비운에 휩싸이게 된다.


 하루노부는 형이 병으로 죽는 바람에 불과 5살의 나이로 아리마 가 14대 당주가 되었다. 하지만 부친 요시사다(義貞)가 여전히 건재하여 부친이 정치를 돌보았다. 그러나 그랬던 부친도 하루노부가 10살 때 세상을 떠나 시마바라 반도(半島)의 히노에 성(日野江)과 하라 성([각주:3])을 다스리는 소년 성주가 되었다.


 아리마 씨()는 하루노부의 부친 요시사다의 시대 때 류우조우지 타카노부(竜造寺 隆信)에게 압박당하여 아리마 가문이 누대에 걸쳐 소유하던 히젠(肥前)의 후지츠(藤津), 키시마(杵島), 소노기(彼杵) 3()을 빼앗겼다. 그 류우조우지 가문의 위협은 하루노부의 시대가 되어서도 여전했다.
 하지만 1580년에 부친처럼 기독교에 입신한 하루노부(당시 14)예수회에게서 많은 식량, 무기, 탄약 등을 원조받아 사츠마(薩摩)의 시마즈씨()와 연합하여 승리. 타카노부를 패사(敗死)로 몰아넣었다.


 또한 하루노부는 서(西) 큐우슈우(九州)에 있으면서도 일본 전국에 퍼져있던 선교사들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두각을 나타내자 재빨리 히데요시에게 줄을 댓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강성하기 시작하자 세키가하라(ヶ原)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에게 붙는 등 천하의 동향을 정확히 판단하여 가문을 지켰다.


숙원인 옛 땅 회복


 하루노부는 기독교 다이묘우(大名)였기에 히데요시가 기독교 금지령을 선포했을 때에는 선교사들을 은닉하는 등 히데요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지(領地)의 기독교화를 진행시키는 용기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이런 하루노부는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적자(嫡子) 나오즈미(直純)를 이에야스에게 보내 그의 가신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에야스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배를 보내어 향수 무역을 행했다. 그러다가 도중에 들린 마카오에서 선원이 포르투갈 사람과 싸움이 나서 쌍방에서 죽는 사람까지 나왔을 뿐만 아니라 파견했던 배까지 불에 탔다.


 하루노부는 이 소식을 듣고 보복하고자 나가사키의 항구에 입항한 포르투갈 배인 [마드레 데 데우스(Madre de Deus)] 호에 불을 질러 침몰[각주:4]시켰다. 이는 이에야스의 심중을 미리 짐작하고 하루노부가 과감히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당연히 순푸(駿府)에 있던 이에야스 거기에 당시 쇼우군(
)인 히데타다(秀忠)는 이를 기뻐하여 큰 칼(太刀)을 하사하였고 이에야스는 쿠니히메(国姫 혼다 타다마사(本多 忠政[각주:5])의 딸로 이에야스의 외증손녀)를 양녀로 삼아 나오즈미와 결혼시켰다.


 이에야스의 큰 신뢰를 얻었다고 생각한 하루노부는 기뻤다. 그래서 과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에게 빼앗겨 지금은 나베시마 번(鍋島)의 영지(領地)가 되어있는 옛 땅을 바쿠후(幕府)의 힘으로 되찾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하루노부의 흑심을 파고든 것이 이에야스 넘버 원 측근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 大八)였다.


 당시 에도()의 쇼우군()과 순푸의 오오고쇼(大御所[각주:6])는 둘로 나뉘어 정무를 행했고 그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 그의 적자(嫡子)인 마사즈미였다. 마사즈미의 가신인 다이하치는 나가사키 부교우쇼(長崎 奉行所[각주:7])에서 일한 적이 있었기에 하루노부와도 면식이 있었다.


텐모쿠잔(天目山) () 기슭에서 이슬로 떨어지다.


 다이하치에게 뇌물을 보내면 그가 마사노부, 마사즈미 부자(父子)에게 전해줄 것이고 이는 곧 옛 땅을 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며 수 차례 걸쳐 남만 무역으로 얻은 진기한 물품이나 백은(白銀) 6천냥을 다이하치에게 건냈다. 이것이 발각되어 다이하치는 순푸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각주:8]


 이에야스는 일국의 다이묘우(大名)라는 자가 뇌물을 보내어 땅을 되찾으려 했다는 것에 크게 화를 내며 영지(領地)를 몰수한 후에 카이(甲斐)로 유배시켰다. 이때 뇌물이 혼다 부자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부자는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다이하치를 재빨리 처형하고 하루노부의 입도 막기 위하여 할복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하루노부는 카이(甲斐)의 산골에 유배되었다. 이곳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가 부인이나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노부나가(信長)()에 포위되어 죽은 타케다 씨() 종언(終焉)의 땅이기도 했다. 그런 타케다 가문과 연이 있는 텐모쿠잔 세이운 사(栖雲)에는 가슴에 금빛 찬란한 십자가를 걸고 있는 허공장보살(虛空藏菩薩)이 현존하고 있다. 이는 하루노부가 조악한 작은 집을 만들어 거기서 기도를 올릴 때 마리아 상을 대신한 것이라고 한다.


 바쿠후는 하루노부에게 할복을 명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죽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여 참수를 바라여 1612 5 6일 죽음을 맞이하였다. 세례명은 [동 프로타지우].
 이에야스의 양녀를 부인으로 맞이한 아들 덕분에 영지(領地)는 아들인 나오즈미에게 주어졌고 아리마 가문은 끊기는 일 없이 존속할 수 있었다.

  1. 원래 가지고 있던 영지를 계속해서 영유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음. [본문으로]
  2.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손녀. [본문으로]
  3. 이 성은 후에 시마바라 난(乱)때 농민군이 점거하던 성이 된다. [본문으로]
  4. 실은 선장이 선원들을 탈출시키고 자침시켰다. [본문으로]
  5.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의 적남 [본문으로]
  6. 쇼우군을 은퇴한 사람을 높이 부르는 말. [본문으로]
  7. 나가사키에 있던 바쿠후(幕府)의 지방 기관. [본문으로]
  8.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에 하루노부가 마사즈미에게 물어보았다가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마사즈미가 다이하치를 조사하였고, 조사하던 중에 다이하치는 혼자 죽을 수 없다며 하루노부가 나가사키 부교우를 살해하려 했다는 말을 하였다. 하루노부는 옆에서 깐죽대던 나가사키 부교우에게 홧김에 실제로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忠]

1587 4 17일 병사(病死) 55


스미타다의 사인[花押]

1533 ~ 1587.

히젠[肥前] 히노에 성[日野江城]의 성주(城主) 아리마 하루즈미[有馬 晴純]의 아들.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서로 싸우던 양 가문의 화해(和解)를 위해서 오오무라 스미사키[大村 純前]의 양자가 된다. 또한 영내(領內)를 방문한 선교사(宣敎師)에게 세례를 받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일본 최초의 기독교 다이묘우[大名]

 

 오오무라 가문[大村家] 18대 당주인 스미타다는 1563년에 센고쿠 다이묘우[戦国大名] 중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도가 되었다.

 사실 스미타다는 히노에 성주인 아리마 하루즈미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가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 純伊][각주:1]의 딸이었다.

  17대 당주 스미사키에게는 타카아키[貴明]라는 서자(庶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타케오 성[武雄城]의 고토우 씨[後藤氏]를 잇게 하고,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일부러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하였다. 이 때문에 오오무라 가의 가신들은 분열되어 오오무라 가문 아래에 있던 열 여덟 가문이 타카아키를 따랐다.

 

 이 타카아키를 시작으로 스미타다의 정실(正室) 부인 오엔[おえん]의 친정이며 이사하야[諫早]에 본거지를 둔 사이고우 씨[西氏], 히라도[戸]의 마츠라 씨[松浦氏] 등 주변 영주(領主)에게 공격 받는 등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류우조우지 타카노부[造寺 隆信]의 위협에서 영지(領地)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들을 인질로 받치는 등 말년에 이르러도 스미타다의 기반은 굉장히 약했다.

 

 이 약소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스미타다는 외국과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으려 하였고, 1569년 포르투갈의 배를 요코세[横瀬] 포구에 입항시켰다. 또한 다음 해 31살이 된 스미타다는 이 곳에서 선교사 토레스(Cosme de Torres)에게 세례를 받고 돈 바르톨로메오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주변 호족 연합은 이런 오오무라 씨의 이권을 뺏고자 요코세 포구를 공격하고 불을 질러 없애고, 스미타다도 일시적으로 거성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미타다는 예수회 선교사, 포르투갈 상인과 끊임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것이 영토 안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미타다가 세례를 결의한 배경에는 포르투갈에게 기대어 부와 무기를 얻고자 하는 흑심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차츰 기독교에 대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다.

 

적은 인원으로 성을 지키다

 

 그러한 스미타다의 후반생을 말해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미타다에게는 4명의 측실(側室)이 있어 세자인 요시아키(善前)도 측실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부일처제로 측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미타다는 이를 무시하고 측실을 계속 두었다.

 한 편 정실 오엔은 남편이 측실을 두고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녀는 처음엔 기독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스미타다가 세례를 받은 지 7년 후에 기독교의 교리에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다.

 이 때 38살이 되어있던 스미타다는 오엔과 기독교의 서약에 따른 결혼식을 하였다. 이는 오엔의 희망에 따라, 처는 오엔 한 사람이며 측실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결혼식이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교리를 스미타다가 완전히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1573.

 스미타다는 주변 호족 연합에게 거성인 산죠우 성[三城城]까지 공격당하는 생애에서 가장 큰 위기에 빠진다. 이때 선교사는 어떠한 때라도 자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스미타다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신의 목에 지니고 있던 로사리오를 선교사와 교환하였다. 여기서도 신앙을 선택한 스미타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스미타다는 과감히 성을 나와 돌격하는 등 적은 인원으로 성을 사수하여, '산죠우 칠기 농성[三城七騎籠もり]'[각주:2]이라 일컬어지는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 스미타다는 6만의 오오무라 영민(領民)봉헌하여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또한 1580년 오오무라를 방문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에게 나가사키[長崎]와 모기[茂木]의 땅을 예수회에 기증했다. 나가사키는 이후 세계로 열린 항구로써 각광을 받게 된다.

 

하늘로 날려진 작은 새

 

 말년.

 스미타다는 사가[佐賀]의 류우조우지 타카노부의 압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세자인 요시아키를 사가에 인질로 보내게 된다. 요시아키가 인질이 된 2년 후, 동생 두 명도 인질로 보낼 수 밖에 없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강압적인 타카노부가 시마즈[島津]-아리마[有馬]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함으로 인해 스미타다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것이 51살 때이다.

 

 히데요[秀吉]가 시마즈 토벌의 군을 큐우슈우[九州]로 보낸 것은 15873월이었다. 오오무라 씨는 이 때 히데요시를 따르게 되는데 스미타다는 종군(從軍)하지 않고 아들인 요시아키가 대신해서 출진했다. 왜냐면 이때 스미타다는 후두암폐결핵을 앓고 있어, 몸이 말라 뼈와 가죽만 남아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신력은 신을 받아 들여 아름답게 빛났다고 기독교 사료는 말한다.

 

 스미타다는 의사가 하는 미신(迷信)에 바탕을 둔 치료를 원치 않았고, 신부에게 천당에 대해서 계속해서 들려주길 원했으며 그것을 들으면서 대단히 만족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카구치[坂口]의 은거 저택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미타다는 영내(領內)구류(拘留)되어 있던 포로 200명을 석방했다. 마지막으로 새장에 있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4 17일. 반년에 걸친 투병 생활 끝에 55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가 기독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1. 나중에 양아비가 되는 스미사키의 부친. [본문으로]
  2. 1500명을 상대로 7명의 무장과 70명의 여자들로 성을 지켰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