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

마에다 도시이에[前田 利家]

1599년 윤 3 3 병사 62

1538 ~ 1599.

오와리[尾張] 아라코[荒子] 성주 마에다 토시마사[前田 利昌]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전공을 세웠고, 혼노우지의 변[本能寺の変] 후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을 따르며 오대로(五大老)가 된다. 노토[能登], 카가[加賀]에 영지를 받아 '카가 백만석[加賀百万石]'의 기초를 쌓았다.









히데요시의 말벗


 토요토미노 히데요시가 출생 후 1년 뒤인 1538년에 태어난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보다 1년 더살아 1599년에 62세로 죽었다. 히데요시와 산 시간이 거의 겹치는 토시이에의 인생은 좋건 나쁘건 히데요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말년 히데요시 정권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1591년부터 토시이에의 존재는 무게감을 더해 갔다.


 1591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토요토미노 히데나가[豊臣 秀長]가 병사했으며, 센노 리큐[千 利休]가 할복하였다. 정권의 중추에 있던 두 사람을 잃고 계속해서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일찍 죽어버리는 불행을 맛 본 히데요시는 토시이에를 오토키슈우[伽衆]에 임명하여 공과 사에 걸쳐 상담 상대로 하였다. 이 때 토시이에 54.


 다음 해인 1592년.

 히데요시의 조선 출진에 토시이에는 병 8천을 이끌고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으로 출진. 길어지고 있던 진중 생활에 살기(殺氣) 어린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사이를 중재하고 가난한 시골 다이묘우의 뒤를 보아주는 등 남을 잘 살펴주는 인품을 발휘했다. 이때 함께 했던 측실인 치요가 임신하여 후에 3대 번주가 되는 4남 토시츠네[利常]를 낳았다.


깊어지는 히데요시와의 친밀도


 토시츠네가 카가 카나자와[金沢]에서 탄생한 1593년.

 히데요시에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자아이 후의 히데요리[秀頼]가 태어났다. 이 히데요리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히데요시는 칸파쿠[関白]을 물려주고 있던 조카 토요토미노 히데츠구[豊臣 秀次]와 그의 일족, 파벌을 멸하였다. 그 직후 모든 다이묘우는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 히데요리는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온 천하에 인식되었다.


 히데츠구와도 친했던 토시이에였지만 히데요시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고 반대로 히데요리의 후견인[=傳役]에 임명되었다. 그것도 모든 다이묘우[大名] 중에서 유일하게 항상 수도권[上方]에 머물면서 후견을 맡는 큰 역할이었다. 육친조차 믿지 않던 독재자도 토시이에의 '의리'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히데요시의 측실이나 양녀가 된 토시이에의 딸들과의 2, 3중으로 엮어진 연도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은 그러한 친밀함을 우려하여 이에야스나 토시이에 둘 다 야심이 많기에 언젠가 둘이 손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츠나리의 예언은 반은 적중했지만 반은 빗나갔다.


 1598 8월.

 어린 히데요리의 장래를 걱정하며 이에야스, 토시이에 등 대로와봉행(五奉行)들에게 계속해서 후사를 부탁한 히데요시가 죽자 곧바로 야심을 들어낸 이에야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토시이에였다. 이때 토시이에도 또한 병들어 있었다. 조선과의 평화 교섭으로 일본에 와 있던 명()심유경(沈惟敬)에게 지속성의 독을 히데요시와 함께 마시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소문이 퍼지는 등 병증의 악화가 매우 빨랐다.

 이 때문에 토시이에는 이미 가독(家督)을 토시나가[利長]에게 물려준 은거료 15천석의 신분이었지만, 히데요시가 죽자 유언을 무시하며 여러 다이묘우와 혼인을 맺으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를 나타냈다. 다이묘우들도 양 쪽으로 나뉘는 큰 소동으로 발전했지만, 마에다 가문[前田家]과 연을 맺고 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각주:1]들의 노력으로 겨우 수습될 수 있었다.


의리 있는 사나이의 평범한 죽음


 1599년 정월.

 토시이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후시미[伏見]의 이에야스를 만나 화해를 의한 회담을 가졌다.


 3 8일에는 이에야스의 답례 방문이 이어졌다.

 토시이에는 괴로운 숨소리로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리고 토시나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자, 이에야스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실은 이때 이에야스를 죽이고자 했지만 가신들이 반대했다고도 토시나가가 그러한 일을 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토시이에에게는 이미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3 15일. 죽음이 가까워 짐을 안 토시이에는 자잘하고 상세하게 유산 분배를 하였다.


 3 21일.

 머리맡으로 정실인 마츠를 불러 토시나가에게 보내는 '유훈 11개조[遺戒十一箇条]'를 필기시켰다. 앞으로 3년간 토시나가는 본거지 카가[加賀]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병사 1 6천을 카가[加賀]와 오오사카[大坂]에 둘로 나누어 주둔시키고 모반의 징조가 있으면 합류해서 싸우라며 마지막까지도 히데요리를 걱정하였다.


 10일 후.

 점점 더 중태에 빠졌다. 마츠가,
 
"당신은 예전에 싸움터에 나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지옥에 갔을 때를 대비해 이것을 입어주세요"
 라며 준비한 경문이 쓰여진 수의를 입으라고 하자 토시이에는,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터에 나가 적을 죽이긴 했지만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힌 적은 없다. 때문에 난 죄가 없다. 죄가 없는 내가 지옥에 떨어질 이유도 없다. 만약 지옥의 염라대왕이나 도깨비들이 날 얕보고 괴롭힌다면 나보다 먼저 그곳에 간 우리 가문의 용사들을 이끌고 그 곳을 정벌하겠다"
 
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틀 후인 윤 3 3일.

 마츠와 토시나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센고쿠 무장[戦国武将]치고는 드문 평범한 죽음이었다.

  1. 타다오키의 아들 타다타카[忠隆]와 토시이에의 딸 치요[千世]는 부부. [본문으로]

우에스기 켄신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4. 1. 16:17 Posted by 발해지랑

우에스기 켄신(上杉 謙信)

1578 3 13 병사 49

1530~1578.

에치고 슈고다이(守護代) 나가오 타메카게(長尾 為景)의 아들. 첫 이름은 카게토라(景虎), 이어서 마사토라(政虎), 테루토라(輝虎)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불문에 귀의한 후 켄신(謙信).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온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를 보호하여, 우에스기의 성()과 칸토우칸레이의 역직(役職[각주:1])을 물려받았다.








다섯 번에 걸친 카와나카지마(川中島)합전


 1553 4월.

 북부 시나노(北信濃) 카츠라오(葛尾)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淸)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에게 쫓겨 와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된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유도 없이 타국을 침략하는 신겐의 무법자적인 행동에 하늘을 대신해 벌을 주겠다고 일어선 우에스기 켄신(이 때는 아직 나가오 카게토라(長尾 景虎))이 이후 12년간에 걸쳐 다섯 번 싸운 것이[카와나카지마 전투]이다.


 1차는 이 해인 1553 8월. 우에스기 군()은 젠코우지(善光寺)분지로 진출하지만 신겐은 시오타(塩田)성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켄신의 전력을 관찰하는 듯이 후세(布施)와 오미(麻績)에서 자그마한 전투를 하는 정도로 끝났다. 이후 2차는 1555 7, 3차는 1557 8월에 행해졌지만 두 번 다 작은 전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1561 9월. 역사상 유명한 제 4차를 맞이한다. 이 카와나카지마(川中島) 하치만바라(八幡原)에서의 전투가 유일한 격전이었다.

  5차는 1564 8월에 이루어졌는데 사실상 카와나카지마의 네 개 군(郡)을 지배하고 있던 신겐은 자웅을 겨루려는 켄신의 시도를 무시하며 한달 가량 대치만 한 후 9월 중순 서로 물러난 뒤, 다시 카와나카지마에서 대결하는 일은 없었다.


정의를 위하여 동분서주


 제1차 카와나카지마 합전이 일어나기 전년인 1552년.

 칸토우칸레이(関東管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 憲政)가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에게 쫓겨 보호를 청하며 에치고로 온 것을 계기로 켄신은 1552 8월에 처음으로 산코쿠토우게(三国峠) 고개를 넘어 칸토우에 출진하여 누마다(沼田)성으로 입성했다. 이후 주가(主家)의 실지(失地) 회복을 위하여 14번이나 칸토우로 출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1560년부터 1571년에 걸친 12년간은 8번이나 칸토우에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새해를 칸토우에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켄신이 에치고로 돌아가면 우지야스가 농성을 풀고 칸토우로 출진하여 시모츠케(下野)의 사노 마사츠나(佐野 昌綱)나 오야마 히데츠나(小山 秀綱), 히다치(常陸)의 오다 우지하루(小田 氏治), 무사시(武蔵)의 나리타 우지야스(成田 長泰)들이 호우죠우 측으로 돌아 섰고, 켄신이 오오타 스케마사(大田 資正), 유우키 하루토모(結城 晴朝), 사타케 요시아키(佐竹 義昭), 사타케 요시시게(佐竹 義重)들의 요청을 받아서 칸토우로 출진하면 우지야스는 또다시 물러나 농성을 했고 배반했던 호족들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어 진전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쫓겨나 빙고(備後)() 토모()로 물러나 있던 쇼우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沼)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와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를 협격(挾擊)하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노부나가로 돌아선 노토(能登) 하타케야마(畠山) 씨의 중신(重臣) 쵸우 츠나츠라(長 綱連)가 농성하는 나나오(七尾)성을 공략하였고, 오다의 구원군인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군을 카가(加賀)의 테토리가와(手取川) 강에서 물리친 기세로 쿄우()로 진격하려 했지만, 시모우사()의 유우키 하루토모에게서 호우죠우 우지마사(北条 氏政)가 칸토우 제패를 노리고 있다며 출진 요청을 해왔기에 우선 귀국하여 칸토우를 진정시킨 뒤 상경(上京)하기로 하였다.


최후의 대동원령


 하지만 카스가야마(春日山)성으로 돌아온 켄신에게 호우죠우 우지마사로부터 평화롭게 지내자는 요청서가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를 통하여 도착했기에, 켄신은 칸토우로의 출진을 상경 원정으로 전환하여 휘하 장수의 명부를 작성하였다. [上杉謙信自筆将士書上]이라 불리는 것으로, 우에스기 군단 39명의 무장에 코우즈케(上野), 엣츄우(越中), 노토, 카가의 여러 장수를 합친 81명의 무장의 이름이쓰여 있다. 마지막에 [天正五年(1577년)十二月二十三日法印大和謙信]이라 서명되어있기에, 이것은 명백히 우에스기 군단 동원 명부라 할 수 있다. 켄신은 다음해 1 19일. 명부에 기재된 여러 장수들에게 대동원령을 내리며 눈이 녹는 3 15일을 출진하는 날로 정했다.


 그러나 출진의 날이 다가 온 3 9일 켄신은 돌연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뇌졸중이라 한다. 의원들이 열심히 고치려 했지만 보람도 없이 켄신은 혼수 상태인 채로 13일 죽었다. 향년 49. 장의는 출진의 날로 정해졌던 15일 행해졌다.

  1. 무로마치 바쿠후의 관직. [본문으로]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1573 8 20 할복 41

1533년 ~ 1573년.
아사쿠라씨 제 5대 가주. 에치젠(越前), 카가(加賀), 노토(能登)의 잇코우잇키(一向一揆)와 싸웠다. 후에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과 대립.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와 손을 잡고 아네가와(姉川) 천에서 싸웠으나 패배. 본거지 이치죠우다니(一乗谷)를 노부나가에게 공격 받아, 친족인 카게아키라(景鏡)에게 배반당해 할복하였다.









이치죠우다니의 망명객


 1533년.

 에치젠의 센고쿠 다이묘우 아사쿠라 타카카게(朝倉 孝景)의 장남으로 태어난 요시카게는 1573 41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문가 아사쿠라에게 몰락의 징조가 나타난 것은 난을 피해 에치젠으로 도망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이치죠우다니를 떠나 오다 노부나가의 기후(岐阜)로 향한 1568 7월로 볼 수 있다. 이 때 요시카게는 36세였다.


 오히려 요시카게 자신은 가장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전년인 1567 11월에 에치젠 츠루가(敦賀)에서 이치죠우다니로 온 아시카가 요시아키(이 때는 아직 義秋)가 아사쿠라 저택으로의 비공식적인 방문이 성사 되었으며, 새해가 밝은 1568 요시아키의 추천으로 요시카게를 낳은 모친의 위작이 이위(二位)에 서임되었다. 또한 봄에는 경치가 뛰어난 객관(客館)인 난요우(南陽)()로 요시아키를 초대하여 화려한 연회를 열어서는 화려하게 핀 벗나무를 주제로 요시카게는 참석한 귀족(公家)들과 함께 시와 노래를 즐겼다. 이어 아사쿠라 저택에서 요시아키(義秋)는 성년식을 치르고 [義昭]로 개명했다. 그리고 5월에는 공식적인 방문이 실현. 요시카게는 최고의 명예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요시카게와는 달리 굉장히 정치적이며 야심가이기도 했다. 풍류를 즐기기 위하여 일부러 에치젠까지 내려올 리가 없었으며 아사쿠라 가()의 무력 지원을 받아서 쿄우()로 올라가 쇼우군()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8개월 정도 머물고 있는 동안, 요시카게에게 움직일 마음과 준비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요시아키는 결국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노력으로 새로운 지원자가 되어 준 노부나가에게로 향했다.


노부나가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다.


 1568년.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상경을 이루고 천하를 향한 발판을 마련했다. 반대로 요시카게는 요시아키를 놓쳐 귀중한 기회를 잃게 되었다. 오히려 그 당시 요시카게는 세력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일족끼리의 다툼이 방해를 하였다. 오오노(大野)()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와 츠루가(敦賀) 군(郡)의 지배를 맡고 있는 아사쿠라 카게츠네(朝倉 景恒)와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으며, 이 둘의 중재에 요시카게는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요시아키가 떠나기 직전, 요시카게의 적자 쿠마키미(阿君)가 독살당하는 괴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진상은 확실치 않지만 요시아키를 둘러쌓고 요시카게와 사이가 틀어져 버린 아케치 미츠히데 쪽의 책모는 아닐까 하는 말이 있다.


 다음 해인 1569년.

 쇼우군 요시아키의 어소(御所)를 만들기 위해 노부나가는 여러 나라의 다이묘우들에게 쿄우로 와서 건설에 참가하기를 원했다. 요시카게에게도 상경의 재촉이 있었으나 회의 결과 무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노부나가와의 적대 관계가 명확히 되어 1570년에 아네가와 전투라는 결과가 되었다.

 아사쿠라 요시카게 군() 1 5천과 아자이 나가마사 군() 5 ~ 6천이 아네가와를 사이에 끼고 오다-토쿠가와(德川) 연합군 3 4천과 대치하였다. 일반적으로는 격전 끝에 아사쿠라-아자이측이 대패배를 당했다는 듯이 알려져 있지만 양 측 다 많은 전사자를 내며 물러났으며 나가마사도 오다니(小谷) 성을 지킬 수 있었으니 우선은 비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요시카게보다도 노부나가가 위기에 빠진다.

 권력을 나누어 주지 않는 노부나가가 원망스러운 쇼우군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아사쿠라, 아자이, 이시야마 혼간지(石山 本願寺), 잇코우잇키(一向一揆), 히에이잔(比叡山), 마츠나가(松永), 미요시(三好) 등의 세력과 카이(甲斐)타케다 신겐(武田 信玄)까지도 참가하는 강대한 노부나가 포위망이 형성된 것이다. 요시아키의 생각을 받들어 요시카게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배반당한 요시카게의 최후


 하지만 노부나가군과 몇 번이나 싸우면서도 요시카게는 한 번만 더 밀면 되는 곳에서 철군하는 등 승기를 놓쳤다. 한 편 각개 격파로 포위망을 뚫고 위기를 탈출한 노부나가는 1573오우미(近江)로 쳐들어 온다. 오다니성 구원을 위하여 달려온 요시카게였지만 이미 노부나가군의 신속한 공격으로 두 개의 지성(支城)이 함락되어 오다니성도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알고 구원을 중지하고 퇴각하였으나 추격해 온 노부나가 군과 오우미 토네사카(刀禰坂)에서 조우하여 요시카게군은 대패하였다.


  5 ~ 6기(騎)와 함께 이치죠우다니로 도망 온 요시카게는 사촌인 요시아키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에치젠 오오노로 도망가 토우운(洞雲)()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기대하고 있던 헤이센(平泉)() 중도(衆徒)의 지원을 얻지 못하였고, 더구나 카게아키라의 꼬임으로 로쿠보우켄쇼우(六坊賢松)()로 거처를 옮긴 상태에서 배반한 카게아키라의 군세에 포위되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음을 알게 된 요시카게는 8 20일 오전 10시경,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쓰러진 40년 인생.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七転八倒 四十年中
 無他無自 四大本空

 이라는 사세구를벽에 피로 쓴 후,배를 열십자로 그어죽었다.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1611 6 4일 병사(病死) 65

1547 ~ 1611

시나노[信濃] 우에다 성[上田城] 성주. 처음엔 타케다 씨[武田氏]를 섬겼지만 타케다 씨 멸망 후 자립한다.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서군(西軍)에 속해 우에다 성에서 농성하여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괴롭히지만, 서군의 패배로 인하여 항복 개성(開城)하였다. 코우야 산[高野] 자락의 쿠도야마[九度山]에 유폐되었다.










하산(下山)하고 싶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 대한 의리를 갚기 위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에서는 우에다 성[上田城]에서 농성하며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농락하였지만, 서군의 패배 후 아들 노부유키[信之]의 구명 운동으로 목숨을 건진 사나다 마사유키[真田 昌幸], 유키무라[幸村 = 노부시게[信繁]] 부자가 시나노 우에다에서 16인의 동반자들과 함께 유배지인 키이[紀伊] 코우야 산으로 향한 것은 1600년 10월 13이었다. 당시 마사유키는 54, 유키무라는 34세였다.


 코우야산에 도착한 마사유키 일행은 사나다지방의 숙방(宿坊[각주:1])인 렌게죠우 원[華定院]에 일년 넘게 체제하였으며 곧이어 쿠도야마에 완성된 사나다 저택으로 옮겼다. 죄인이라고는 해도 유배 생활은 완전 자유로 등산이나 사냥, 수영, 뱃놀이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러한 유배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마사유키의 마음 속에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꿈만을 키워갔다.


 1603년 3월 15신코우 사[信綱寺]로 보낸 편지에, 3년 후의 여름에는 혼다 마사노부[本多 正信]가 이에야스[家康]에게 잘 말하여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거나, 또한 몇 년도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편지의 전후로 생각되어지는 가신 쇼우츠 신고로[称津 神五郞]에게 보낸 정월 3일의 편지에도 '새해도 되어 우리들에게 곧 하산의 명령이 내려질 것 같다' 근거 없는 기쁨을 전하며 하산의 명령을 계속 기다렸다.


고향에 돈을 요구.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산의 명령이 내리지 않은 채 세월만이 흘러갔다.

 이에야스조차도 두려워 한[각주:2] 무장의 의지도 차츰 꺾여 갔다. 더욱이 동반자나 하인들을 포함한 유배생활은 대가족이었기에 돈이 많이 들었다. 생활비는 노부유키[信之]가 보내주는 돈과 렌게죠우 원[連華定院]에서 바치는 적은 세금, 거기에 감시역인 와카야마 성[和歌山城]의 성주(城主)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 長晟]에게서 매해 보내지는 50석뿐이었다. 이것만으로는 대가족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마사유키는 자주 노부유키에게 돈을 요구했다.


 연도는 불명이지만 정월 5일의 편지에 셋째 아들 마사치카[昌親]에게서 40냥 중 20냥을 확실히 받았지만, 빚이 많아 살림을 꾸려나갈 수 없어 힘드니 남은 20냥도 하루속히 보내주길 바라며 빨리 보낼 수만 있다면 5~6냥도 좋다고 할 정도로 마사유키는 빚에 찌들린 힘든 나날들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었다.

 마사유키의 계속된 돈 요구나 재촉에 노부유키는 그때마다 보내주었고 또한 정월이 되면 돈과 물품을 보냈으며 편지도 왕성히 오고 갔다. 편지의 왕복이야말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안이었을 것이다.


약해져 버린 과거의 지장(智將)


 노부유키쪽에서의 편지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면서 마사유키는 차츰 늙어가는 자신에 대한 한탄을 내뱉게 되었다.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말년이라고 여겨지는데 첫째 아들 노부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가오는 세월의 파도로 인해 무엇을 해도 끈기가 없어 지쳐만 간다고, 왕년의 지장(智將)이 이제는 완전히 체념한 듯한 약한 소리를 내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최후의 말년에는 자주 병이 걸려, 1609년 혹은 1610년 즈음으로 추정되는 4 28일자 우에다[上田]의 유우안 호우인[夕庵法印]과 가로(家老) 오오쿠마 호우키노카미[大熊 伯耆守]에게 보낸 편지에, 노부유키의 병이 쾌유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자신의 병이 재발했다고 하며 다음에는 발이 빠른 말을 한 마리 보내주길 바란다고 적혀 있다. 말은 병중의 위로로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것도 병으로 인하여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약해진 마음을 지탱하기 위해 또는 과거 말을 탄 자신의 용맹했던 모습을 생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11년.

 1611 6 4일.많은 무공(武功)과 무명(武名)을 남겨둔 채,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真田 安房守 昌幸]는 저승으로 여행을 떠났다. 향년 65.

  1.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절의 숙박소. [본문으로]
  2. 여담으로 후에 이에야스가 토요토미 가문을 멸하기 위해 일으킨 오오사카 공방전에서 마사유키의 아들 유키무라가 오오사카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이에야스는 손을 걸치고 있던 창문이 소리가 날 정도로 떨며 '아비냐 아들이냐?'라고 두번이나 물을 정도로 당황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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