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타 히데이에[宇喜田 秀家]
1655년 11월 20일 병사 84세.
1572년~1655년.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의 적자(嫡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천하통일에 공헌.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1 – 케이쵸우의 역[慶長の役] 2 때 공을 세워 오대로(五大老)의 3 한 사람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서군의 주력이었다. 그러나 패하여 사츠마[薩摩]로 도망 가지만 후에 잡혀서 하치죠우지마[八丈島] 섬으로 유배당했다.
영광에서 좌절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센고쿠[戦国]의 효웅(梟雄)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의 세자(世子)로, 1572년에 비젠[備前] 오카야마 성[岡山城]에서 태어났다.
시대는 신흥세력인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선봉으로 하리마[播磨]로 진출해 온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세력과 츄우고쿠[中国]의 모우리 모토나리[毛利 元就]가 패권을 놓고 싸우던 시기였기에, 그 사이에 낀 우키타 씨(氏)는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 하던 때였다. 결과적으론 히데요시 쪽에 붙게 되어 히데이에는 불과 10살의 나이로 히데요시를 후견인 삼아 가독(家督)을 상속하게 되었다.
히데요시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얻어서 지은 '히데이에[秀家]'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그의 일생은 토요토미 씨(氏)의 번영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연표(年表)처럼 그의 영달 과정을 적어보면,
1585년(13세). 시코쿠[四国]의 쵸우소카베 씨[長宗我部氏]와의 전쟁에서 데뷔 전을 장식했다.
1587년(15세). 큐우슈우[九州]의 시마즈 씨[島津氏]와의 전쟁에 종군하였고 그 싸움이 끝난 후에는 종삼위(從三位) 산기[参議]에 서임(敍任).
1589년(17세). 카가[加賀] 카나자와 성[金沢城]의 성주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히데요시의 양녀가 되어 있던 고우히메[豪姫]와 결혼.
1594년(22세). 분로쿠의 침공 4 때. 제 6군의 주장(主將)으로 바다를 건너 벽제관의 싸움에서 쿠로다 나가마사[黒田 長政]등과 함께 명나라의 장수 이 여송군을 대파하였다. 이 때의 공적으로 곤츄우나곤[権中納言]에 서임.
1600년 9월.
미노[美濃]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히데이에는 당연히 서군(西軍)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측에 1만 6천 여라는 최대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방관을 하던 장수들이 많은 서군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은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서군이 패배함에 따라 히데이에는 명예나 지위를 모두 잃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히데이에는 미노[美濃] 카스카와[粕川] 골짜기에서 이틀간 떠돈 끝에 패잔병을 노리는 노부시[野武士] 5의 한 무리에게 포위 당하지만, 두목인 야노 고로우자에몬[矢野 五郎左衛門]은 히데이에의 인품에 반하여 반대로 히데이에 일행을 자기 집에 숨겨주었다. 그리고 우키타 가문의 가보(家寶)이며 히데이에가 차고 다니던 쿠니츠구[国次]의 긴 칼[太刀]을 고로우자에몬이 토쿠가와 쪽에 바쳐서 히데이에가 죽었다고 위장했다고 한다.
이렇게 엄중한 탐색을 피하면서 시간을 번 일행은 고난의 도피행 끝에 오오사카의 우키타 가문 저택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처(妻)인 고우히메와의 재회를 기뻐할 틈도 없이 히데이에 일행은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를 의지하여 도망쳤다.
종언의 땅,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
히데이에 주종(主從)은 오오스미[大隈] 키모츠키 군[肝属郡] 타루미[垂水]의 호족인 히라노 씨[平野氏]의 집에 숨겨졌다.
그 후 1603년 9월.
시마즈 타다츠네[島津 忠恒] 6・마에다 토시나가[前田 利長]의 조명탄원 7(助命嘆願) 덕분에 사형을 면한 히데이에는 스루가[駿河] 쿠노우 산[久能山]에 유폐(幽閉)되었고, 그 후 3년 뒤인 1606년 4월 적자(嫡子)인 히데타카[秀高], 가신(家臣) 12명과 함께 하치죠우지마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히데이에 34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큐우후쿠[休福]'란 호(號)를 칭하고 있었는데 이 때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한때 50만석 넘게 영유하고 있던 비젠 8[備前]의 태수(太守)였기에 섬에서의 생활은 힘들었음에 틀림이 없다. 섬의 대관[代官] 9인 키쿠치 사콘[菊池 左近]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처(妻)인 고우히메의 친정 마에다 가문에서는 1614년 이후 1년 터울로 생활물자가 보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여 섬사람들에게 보리 한 되를 빌리지 못하면 생활할 수 없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패군의 장수가 되었을 때 죽음을 선택했다면 이러한 고생도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이에가 유배생활을 50년이나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산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담담히 살고자 하는 인생철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655년 11월 24일. 84세로 사거(死去)했다.
하치죠우지마 섬[八丈島]에 있는 히데이에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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