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 家政]

1636 12 30일 병사(病死) 81.

1559 ~ 1638.

하치스카 마사카츠[蜂須賀 正勝]적남(嫡男). 키노시타 토우키치로우[木下 藤吉郎]를 섬기며 아네가와 전투[姉川の戦い]에서 데뷔전. 시코쿠[] 공략의 전공(戰功)으로 아와[阿波] 일국()을 하사 받았다. 조선 침략 시에는 위기에 빠진 아사노 요시나가[野 幸長]를 구출하는 활약을 하였고 은거 후에도 적자 요시시게[鎮]를 보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과 이에마사

 

 1600 9월.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토요토미 계[豊臣系] 무공파(武功派) 다이묘우[大名]의 유력 무장으로 여겨지던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 아직 14살인 적자 요시시게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川 家康]의 동군에 종군시키는 한편 자신은 영지를 히데요리에게 반환하고 아와[阿波]를 나와서 은거. 머리를 깎고 '호우안[蓬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코우야 산[高野山]에 올랐다[각주:1].

 이것이 효과를 발휘해 아와[阿波] 일국은 요시시게에게 새로이 주어졌다.[각주:2]

 

 이에마사는 아와[阿波]로 돌아와서 카츠우라 군[勝浦郡] 나카다 촌[中田村]의 은거소(코마츠시마 시[小松島市])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센고쿠(戦国).

 1605년 아와 군[阿波郡] 이치바 쵸우[市場町]에 호우안의 서명으로 마을 법률을 반포하는 등, 요시시게의 뒤에서 번()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쇼우군 토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秀忠]나 이이 가문[井伊家] 등 - 토쿠가와 가문[徳川家]의 중신(重臣)과 연락을 자주 하여 하치스카 가문[蜂須賀家]과 토쿠가와 막부(幕府)와의 파이프를 강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614 8월.

 은거소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에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히데요시의 목상(木像)을 받든 호우코쿠 신사[神社]를 세웠다. 이 해 10월에 오오사카 겨울 전투[大坂 冬の陣]이 일어났기에 이 사실은 이에마사를 이야기하는데 있었서 굉장히 흥미롭다.

 

편히 쉬려던 여생이……

 

 어쨌든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 夏の陣]에서 토요토미 씨가 멸망하여 천하가 토쿠가와의 것이 되자, 요시시게는 전공(戰功)에 의해 아와지[淡路] 일국()이 더해져 25 7천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1618년.

 요시시게도 착실히 성장하여 농민정책을 중심을 한 '벽서 23개조[壁書二十三条][각주:3]라는 국법을 제정하여 번정(藩政) 확립에 힘썼다.

 이에마사도 안심했을 것이다. 번정은 전부 요시시게에게 맡기고 편히 여생을 즐기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이에마사를 쉬게 나두질 않았다.

 1620 2 26일.

 하치스카 요시시게가 35살이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토쿠시마 성[城]에서 병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4월에 그 뒤를 센마츠마루[千松丸 = 타다테루[忠英]]가 이었지만 아직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이에마사는 나카다 촌()의 은거소에서 토쿠시마 성의 서측 성곽[西丸][각주:4]으로 옮겨 와, 어린 번주(藩主)를 후견하여 1629년 병으로 누울 때까지 사실상 이에마사가 통치를 계속 하게 된 것이다.

 

 그때 가노(家老)[각주:5]나 모노가시라[物頭][각주:6] 등 주요 가신들에게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번주가 어린 동안에는 모노가시라가 모든 것을 처리할 것.

 주인이 어린 동안에는 각자가 자기 할 일은 확실히 할 것.

 공공(公共)의 일은 밤낮없이 봉사할 것.

 어떤 일이건 사사로운 감정을 넣지 말 것.

 

 등의 지시를 내렸다.

 또한 에도[戸] 루스이야쿠[留守居役][각주:7]에게도 에도 저택의 운영에 대해서 4개조의 지시를 내렸다.

 

 이에마사는 하세가와 에치젠[長谷川 越前]이나 외손자인 하치스카 야마시로[蜂須賀 山城][각주:8]를 가로(家老)로 삼아 센마츠마루를 보좌시켰다.

 참근교대(交代)[각주:9] 할 때에도 이에마사가 같이 갔다.

 이에마사는 번정의 확립에 큰 역할을 이룸과 동시에 노련함을 무기로 바쿠후가 흠잡을 만한 일이 없도록 노력했다.

 

 1623년에는 쿠니부교우[奉行]를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정비를 꾀했고,

 1627 7월에는 요시시게의 '벽서 23개조'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이서 7개조(裏書七)'를 제정하였다.

 센마츠마루는 1623년에 아와노카미 타타시게[阿波守 忠鎮]라 이름을 바꾸고, 다음 해 봄에는 타다테루(忠英)라 고쳤다.

 

 그 후에도 이에마사는 신전(新田)개발이나 염전(鹽田)개발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매년 에도에 가서는 막부와의 파이프를 더욱 강고히 했으며 죽기 직전까지 이에마사가 가신들에게 영지를 배분하는 문서를 쓰는 등 번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에마사의 언행을 기록한 [존어집(尊語集)]에는,

 어린 타다테루의 늦잠을 고치라고 한 말이나, 가신들이 타다테루가 자신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상담하러 왔을 때, '어렸을 때는 그런 법이다'라며 타다테루를 감싸는 듯 하다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에 인사를 올리러 온 타다테루에게 정원에 있는 개나 참새를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것을 보여준 뒤 새나 동물도 이렇게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으니 부하에게 정을 주고 위엄을 가지고 가르치면 충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말한 부분이 보인다.

 

 1638 12 23일.

 토쿠시마 성[城] 서측 성곽에서 죽었다 81.

 번정의 확립을 자신의 눈으로 끝까지 지켜본 일생이었다.

코우겐 사[興源寺]에 있는 이에마사의 묘 - 토쿠시마 시[徳島市]


  1.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겠다는 의미. [본문으로]
  2. 이에마사는 서군 편에 섰다, 혹은 병에 걸렸었기에 오오사카[大坂]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본문으로]
  3. 벽서(壁書)란 법령을 적은 종이나 나무를 벽에 붙인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4. 에도시대 때. 보통 서측 성곽[西の丸]은 다이묘우[大名]가 은거하며 머무는 곳이었다. [본문으로]
  5. 가문의 수상(首相) 격 [본문으로]
  6. 중급 관리자. [본문으로]
  7. 에도[江戸]에 있는 번(藩)의 저택의 책임자. [본문으로]
  8. 하치스카 야마시로의 증조부는 코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 죽은 이케다 츠네오키[池田 恒興]이다. [본문으로]
  9. 참근(参勤)은 쇼우군에게 봉사한다는 의미, 교대(交代)는 봉사를 쉬고 자기 영지로 돌아가 정무를 맡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1년 터울로 에도와 자기 영토를 왔다 갔다 했으며 처자식은 인질로 에도에 항상 남겨 두었다. [본문으로]
모리 데루모토[毛利 輝元]

1625 4 27일 병사(病死) 73.

 

1553 ~ 1625.

모우리 타카모토[毛利 隆元]의 장남. 할아버지인 모토나리[元就]가 죽은 뒤 가독 상속. 츄우고쿠[国] 지방에 120여 만석을 영유(領有)하며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오대로(五大老)[각주:1] 중 한 명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이 되지만 패하여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 국[]으로 감봉(滅封). 쵸우슈우 번[長州藩]번조(藩祖)가 되었다.

 

 




 


은거와 오오사카[大坂]의 전투

 

 테루모토는 1553 1 20일에 아키[安芸]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에서 모우리 타카모토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타카모토의 급사(急死)로 인하여 할아버지인 모토나리의 후견(後見)을 받아 11살에 성인식을 치렀다.

 젊어서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등을 상대하며 성장했다.

 

 히데요시의 말년에는 오대로(五大老)라는 중직에 임명되어 츄우고쿠[国] 지방 9개국() 120만석의 거대 다이묘우[大大名]로 군림하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쟁[ヶ原の役]에서는 서군의 총사령관이면서도 중요한 때 움직이지 않았다.

 

 테루모토는 세키가하라[ヶ原]에서 지자마자 머리를 깎고 '겐안소우즈이[幻庵宗瑞]'라는 호를 칭하였다. 스오우[周防], 나가토[長門] 2개국()으로 감봉 되어, 번(藩)의 수도를 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북쪽 해변의 땅 하기[萩]로 하는 이봉(移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테루모토의 말년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쉬기에는 일렀다.

 

 오오사카 공성전[大坂の役]에서는 토쿠가와 씨[徳川氏]에 대한 충성과 히데요시가 죽을 때 말한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라는 유언 사이에서 고심한 끝에 토요토미 가문[徳川家]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는 의미로 극비리에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 秀頼]에게 사노 도우카[佐野 道可]라는 인물을 파겼하였다.

 사실 사노 도우카라는 것은 위명(僞名)으로 정체는 필두(筆頭) 노신(老臣)인 시시도 모토츠구[宍戸 続]의 동생인 나이토우 모토모리[藤 元盛]였다.

 테루모토는 도우카에게 병량(兵糧) 1만석()[각주:2]을 대신한 황금(黃金) 500매를 주고서는 그의 가족과 자손은 확실히 뒤를 돌보아 줄 테니 걱정 말라며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입성시켰다.

 , '만약 토요토미 쪽이 이겼을 때는 모우리 씨[毛利氏]에게 10개국()을 줄 것'이란 약속을 히데요리와 맺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측이 패배하여 오오사카 성이 낙성(落城)되고, 토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뒤에도 도우카가 살아 남았기에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도우카가 모우리의 가신(家臣)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테루모토는 모른다고 잡아떼면서 쿄우토[京都]에 숨어있던 도우카를 잡아서는 할복(割腹)시키고, 목을 이에야스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또한 테루모토가 뒤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도우카의 장남인 모토요시[元珍]와 둘째인 아와야 모토토요[粟屋 元豊]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는 두 아들까지 죄를 주고 싶지 않다며 귀국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테루모토는 둘 다 아비 도우카와 마찬가지로 배를 가르게 하여 막부(幕府)에게 자신은 무죄라는 것을 주장했다.

 충신을 죽여서 가문을 지킨다.

 모우리의 그런 전통으로 이후에도 바쿠후에게 카이에키[改易][각주:3]당하는 일 없이 메이지 시대[明治時代]를 맞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토쿠가와의 천하가 되자 테루모토도 그다지 위기감 느끼는 일 없이 - 은거생활은 주로 모우리 종가(宗家)안태(安泰)를 위해 힘썼다.

 

 우선은 1616.

 테루모토의 딸과 킷카와 히로마사[吉川 正][각주:4]와의 결혼이었다. 킷카와 가문[吉川家]에 시집 보내기에 앞서 테루모토는 제멋대로이고 성질이 급한 딸에게, 

 모우리 가문과 킷카와 가문과의 강한 유대를 위해서이니 불만이 있더라도 뭐든 참아야 하느니라 

 라고 아비답게 간절히 타이르고 거기에 결혼 지참금[化粧料]으로 5천석을 주어서 시집 보냈다. 

 결혼으로 인해 이와쿠니 령[領] 킷카와 가문과의 결속이 두터워지자, 1617년에는 둘째 아들인 나리타카[就隆]에게 스오우[周防] 토쿠야마[山] 3만석을 나누어 주어 '토쿠야마 번[徳山藩]'을 만들었다.

 

 1600년에는 모우리 히데모토[毛利 秀元]의 '쵸우후 번[長府]' 3 6천석을 창설.

 나중의 일이지만 1653년에 히데모토의 둘째 아들 모토토모[元知]의 '키요스에 번[藩]' 1만석이 세워져, 종가(宗家) 보좌를 맡는 모우리 삼가(三家)가 만드는 등 영국(領國) 경영을 강화해 갔다.

 

 1617년에는 쵸우후의 모우리 히데모토의 딸 쇼우키쿠코[松菊子]를 토쿠야마의 나리타카와 결혼시켜 쵸우후 번[長府藩]과 토쿠야마 번[徳山]의 결속도 강화시켰다.

 

 1619.

 2대 쇼우군[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川 秀忠]의 상락(上洛)[각주:5]이 있었다.

 테루모토는 히데타다와 만나기 위해서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락.

 간신히 히데타다의 숙소인 니죠우 성[城]에 입성했다. 테루모토의 몸을 걱정한 히데타다의 배려로 가마를 타고 현관까지 왔고, 야규우 무네노리[柳生 宗矩], 카미오 모리요[神尾 守世], 전의(典醫)[각주:6]인 마나세 마사츠구[曲直瀨 正紹] 등의 도움으로 입장하여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의 손에 이끌려 겨우 히데타다와 대면할 수 있었다. 

 전 병이 들어 약해졌습니다. 앞으로 모우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라는 뜻을 전한 후 영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 마자 테루모토의 큰 아들로 초대 하기 번주(藩主)인 모우리 히데나리[秀就]에게 가문의 번영과 조심해야 할 것에 대해서 타이르고 20개조에 이르는 유훈(遺訓)을 남겨 히데나리에게 반성과 자숙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쇠약한 몸을 쉬는 일 없이 1625 4 27일.

 향년 73세로 하기 성[萩城]에서 병으로 죽었다.

옛 텐쥬 원[天樹院]에 있는 테루모토 부부의 묘 - 하기 시[萩市]


  1.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 利家], 모우리 테루모토[毛利 輝元],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본문으로]
  2. 1석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약 150Kg. 즉 1만석이면 쌀 1500톤. [본문으로]
  3.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4. 세키가하라 때 서군이던 모우리 가문을 혼란에 빠뜨려 전후 감봉으로 몰아 넣었던 킷카와 히로이에[吉川 広家]의 아들. [본문으로]
  5.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궁중 의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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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1624년 7월 13일 병사(病死) 64세.

1561년 ~ 1624년.
어렸을 때부터 히데요시를 섬겼고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각주:1]]에서는 칠본창(七本槍[각주:2]) 필두(筆頭)로 이름을 드높였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동군(東軍)에 속하여 승리. 아키[安芸], 빙고[備後]를 하사받지만, 막부(幕府)에 의심 받아 히로시마 성[広島城] 무단 개수(改修)를 이유로 시나노[信濃] 카와나카지마[川中島]로 감봉(滅封)당했다.





마사노리의 인물상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각주:3]]가 쓴 [번한보(藩翰譜)[각주:4]]에 따르면 마사노리는,
'몹시 사납고 거칠어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를 죽이는 것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던가, '악행을 일삼아 아키, 빙고의 토민(土民) 등 모두 학정에 괴로워하여 맘 편할 날이 없었다'고 혹평을 하고 있다.
 확실히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성격이기에 영민(領民)이나 가신(家臣) 중 겉으로는 뺀질 대면서 뒤로는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이나 명령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용서 없이 귀나 코를 베는 등 잔혹한 형벌로 다스렸다.

 하지만 그가 영내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세심하고, 공정한 토지조사[検地[각주:5]]와 토산품의 개발, 상업 무역의 진흥 등에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또한 그가 개명(開明)적인 것은 히로시마 성(城) 아래에 기독교 교회를 설립하여 가신이나 영민중에 입신, 세례하는 사람이 매년 천명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시 마사노리는 예수회 선교사들 사이에서 굉장히 평판이 좋았다. 1609~10년의 [일본 예수회연보]에는,

우리 성교(聖敎)를 보호하는 신도(信徒)가 아닌 제후 중 제일은 아키, 빙고 양국(兩国)의 영주(領主)인 후쿠시마 타이후[大夫]님이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올해는 한층 더 명확히 그 뜻을 보이고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자기 영토의 항구에 스페인, 포르투갈의 상선을 입항시켜 해외무역을 활발히 하려는 타산(打算)에서 생겨난 결과겠지만, 그가 개명적이며 상업활동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카이에키[改易[각주:6]]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明渡)

 1619년 6월 2일.
 바쿠후가 갑자기 마사노리를 카이에키한 것은 그가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각주:7]]를 어기고 수해(水害)를 입은 히로시마 성(城)을 무단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구실로 속으로는 그가 옛 토요토미[豊臣]의 유신(遺臣)이었다는 것이 바쿠후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의 카토우 가문[加藤家]처럼 진심으로 토쿠가와 가문에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한 어차피 카이에키를 벗어날 순 없었을 것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카이에키가 전해졌을 때 취한 마사노리의 태도와 히로시마 성(城) 명도 때 가신들의 대응이다.

 1619년 6월 2일.
 마사노리는 카이에키를 전하는 사자(使者)에게 절을 하며,
 “내리신 말씀은 알겠습니다. 오오고쇼[大御所[각주:8]]가 살아계시다면 마사노리도 할 말이 있지만, 당대(當代[각주:9])에게는 이제 와서 할 말도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마사노리의 가신들은 히로시마 성(城) 접수를 하기 위해 온 여러 장수들에게,
 “이 성은 주군 마사노리가 지키라고 명령받은 성이니 아무리 쇼우군[将軍]의 명령이라 하여도 건넬 수는 없소. 억지로라도 건네 받으려면 창으로 뺏어보시길”
 이라 말하며 농성(籠城)하다 죽을 각오를 선명히 하였다.

 그 때문에 접수사(接收使)는 에도[江戸]에 억류되어 있던 마사노리에게 이 뜻을 전하여 마사노리가 직접 쓴 편지[각주:10]를 얻어 겨우 개성(開城)을 승낙시켰다고 한다. 더구나 성을 건넬 때도 흐트러짐 없었고, 넓은 마루에는 혈판(血判)으로 된 농성을 맹세하는 무사 2000여명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어있어 그 각오가 단단했는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성을 건넨 후 그러한 가신들은 모두 다른 다이묘들에게 초대되어 임관될 수 있었다고 하니, 마사노리가 평소부터 얼마나 가신들에게 존경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봉(移封)후의 선정(善政)

 히로시마 49만 8천석에서 감봉 당한 마사노리는 시나노 카와나카지마 2만석과 에치고[越後] 우오누마 군[魚沼郡] 2만 5천석[각주:11]을 합한 4만 5천석이 주어졌다.

 1619년 7월.
 근신(近臣) 30여명을 이끌고 임지로 향하여 타카이노 촌[高井野村]에서 1624년 7월까지 6년 정도 지냈다. 죽은 것은 1624년 7월 13일. 향년 64세였다.

 마사노리는 이 곳에 오자마자 영내(領內)를 순시하며, 당시까지 햇볕이 잘 들거나 그늘이 어느 정도 드는지 또는 물길이 좋고 나쁜 것만으로 연공을 차등 부과하고 있던 농지에 생산력이 좋고 나쁨까지 고려한 새로운 토지조사[検地]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오부세[小布施]의 하천 개수 공사를 하여 지금도 '타이후[大夫]의 천냥 둑[千両堤]이라는 사적이 남아있다. 즉 현재 오부세 정[小布施町] 우에하라[上原]에 있는 천냥 둑은 여기를 지나던 마츠가와 강[松川]이 몇 갈래로 나뉘어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던 것에 둑을 쌓아 흐름을 바뀌게 하여 피해를 없앤 둑이다.

 마사노리의 4만 5천석은 아들 타다카츠가 죽자 그의 우오누마 군(郡) 2만 5천석을 바쿠후에 반상하였고, 남은 카와나카지마 2만석도 그가 죽은 후 몰수당했다.

 '토쿠가와짓키[徳川実紀][각주:12]]에 따르면, 마사노리가 죽은 후 가신이 바쿠후의 검시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유골을 화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째서 검시관을 기다리지 못했는지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설도 있어 그의 마지막은 수수께끼이다.

  1. 1583년 히데요시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와의 싸움. [본문으로]
  2.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사.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3. 에도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학자. [본문으로]
  4. 6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츠나토요[徳川 綱豊]가 고우후[甲府] 번주(藩主)였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명해 여러 다이묘우[大名] 337개 가문의 유래를 모아 계보를 만든 것. [본문으로]
  5.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함. [본문으로]
  6.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 [본문으로]
  7. 에도 막부가 다이묘우[大名]나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 등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법. [본문으로]
  8.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말함. [본문으로]
  9. 2대 토쿠가와 히데타다[德川 秀忠]를 말함 [본문으로]
  10. "활을 보라. 적이 있을 때는 중요하게 쓰이지만, 평화로운 시대가 되면 보자기에 쌓여 창고에 보관된다. 나는 활이다. 지금은 치세(治世)이니 카와나카지마[川中島]라는 창고에 보관되어 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본문으로]
  11. 이 곳은 아들 타다카츠(忠勝)의 것 [본문으로]
  12. 토쿠가와 바쿠후의 공식 기록서.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이다. [본문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 隆景]

1597 6 12일 병사(病死) 65


1533~ 1597.
모우리 모토나리
[毛利 元就]의 셋째 아들. 킷카와 모토하루[吉川 元春]와 함께 모토나리, 테루모토[輝元]를 보좌. 히데요시[秀吉]빗츄우[備中] 타카마츠 성[高松]을 포위하자 교섭에 임했다. 분로쿠의 역[[각주:1]] 때는 조선에 출병. 벽제관[碧蹄館]의 싸움에서 명()나라 군과 싸워 이겼다.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는 오대로(五大老)의 한 사람이었다.[각주:2]









모우리 가의 안녕을 지탱하는 인물


 권모술수로 가득 찬 센고쿠[戦国]시대에 죽을 때까지 모우리 종가(宗家)의 안녕을 생각하며 부친 모토나리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 것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뿐이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형 킷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조카인 테루모토를 보좌한 명참모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는 크게 나누어 다음 셋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 코바야카와 가문을 상속하여 부친 모우리 모토나리 아래서 부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시기.

(2) 모토나리가 죽은 후 둘째 형인 모토하루와 함께 모우리의 중진(重鎭)으로 활약했던 시기.

(3)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토요토미 정권의 정치가로 활약했던 시기.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의 츄우고쿠 대반전[大返[각주:3]]때는 히데요시 군을 추격하지 말자고 모우리 군에선 단 혼자서 주장하여 히데요시의 신뢰를 얻어 이로인해 후에 토요토미 정권의 중신(重臣)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6군의 사령관으로 1만여의 장병을 이끌고 활약했다.

 특히 벽제관의 전투에서는 이 여송(李 如松)장군이 이끄는 명()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염전기운이 만연하여 의기소침해 있던 일본군의 사기를 높인 의미는 크다. 킷카와 모토하루가 걸핏하면 성급해졌던 것에 비해 타카카게는 형에 뒤지지 않는 용맹함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상황을 멀리 내다보는 주도면밀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595 8월.

 치쿠젠[筑前]의 나지마[名島]로 돌아와 있던 타카카게는, 후계자가 없던 모우리 테루모토에게 자신의 외조카인 하시바 히데토시(羽柴 秀俊 = 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모우리 가문의 후계자로 앉히려고 하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저지하여, 모우리 종가의 피를 지키기 위해 대신 히데아키를 자신의 양자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히데요시에게 은거를 신청한 타카카게는 그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코바야카와 씨의 본거지인 빙고[備後] 미하라[三原]에 은거하였다. 히데요시가 3만여석의 은거료(隱居料[각주:4])를 하사하여 타카카게의 공로를 치하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내 정치(領內 政治)와 교양(敎養)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日本史)]에서 타카카게를,

사려 깊은 생각을 가지고 지역을 평온히 다스렸기에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그 지역에는 오랜 기간 시끄러운 일이나 반란이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타카카게가 영내 통치에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었다는 것은 외국인의 눈에도 특필할 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595 11월.

 미하라로 온 타카카게는 우선 은거할 성()으로 미하라 성()의 개수(改修)와 성 밑 마을(城下町)의 정비를 행했다.

 붓츠우 사[]의 재건 공사에서는손이 많이 가긴 하겠지만 앞을 내다봐서라며 절을 세울 땅의 선정부터 건축공사까지 세세히 지시를 내렸다. 또한 교량(橋梁)공사에 있어서도 건축 용재는 오래된 배를 재이용하는 쪽이 내구성이 높다고 하여 세토[瀬戸]와 온도[]에 계류되어 있던 아타케 선[安宅]을 모으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렇듯 민정의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쏟았다.


 말년의 타카카게는 무라사키노[紫野]의 다이토쿠[]의 오우바이 원[]의 암주(庵主)인 교쿠센 소우슈우[玉仙宗秀]에게 사사(師事)받으며 참선(參禪)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실한 선종(禪宗)의 신자로 오우바이 원()을 시작으로 미하라의 베이산[米山[각주:5]], 쿄우신 사[], 다이젠 사[大善], 치쿠젠 하카타[博多]의 쇼우후쿠 사[聖福] 타카카게가 정재(淨財)를 한 곳은 여러 곳에 이른다.

 또한, 유학(儒學)을 좋아한 타카카게는 치쿠젠 나지마에 나지마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의 육성에 힘쓰는 등 문무 양쪽에 주목할 점이 많다.


타카카게의 죽음

베이산 사[米山寺]에 있는 타카카게의 묘(미하루 시[三原市]


 1597년 봄 즈음 부터 아프기 시작한 타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세번에 걸친 상경 요청에 대해서도 병 조리를 이유로 나중에 찾아 뵙겠다며 연기를 요청했다. 죽기 직전에는 코다마 나리히데[玉 就英]가독 상속이 아무 문제없이 행해지도록 테루모토에게 부탁했다.


 이것을 최후의 업무로 같은 해 6 12. 65세의 생애를 마쳤다.

 타카카게의 죽음은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듯 유언도 남기질 못했다.

 [마치 자기에게 죽음이 갑자기 찾아온 듯이 앙천했다] 테루모토는 그 죽음에 놀라 모우리 가문의 대들보를 잃은 슬픔과 앞으로의 의지할 데 없는 불안함을 절절히 기록했다.


  3년 뒤에 일어난 세키가하라[ヶ原]의 전투에서 서군(西軍)의 총사령관으로 추대 받았으면서도 택해야 할 길을 잘못 택해, 영지 대부분을 잃은 것을 보면 타카카게의 죽음이 얼마나 모우리 씨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손실이었는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임진왜란을 말함. [본문으로]
  2. 타카카게가 죽은 후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 景勝)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본문으로]
  3. 노부나가[信長]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한 혼노우 사[本能寺]의 변 때 통상보다 더 빨리 철수한 것을 이름. [본문으로]
  4. 은거한 사람에게 주는 쌀 또는 그 만큼의 이익이 나는 영지 [본문으로]
  5. 코바야카와 가문의 묘나 위패가 있는 곳 [본문으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

1602 10 18일 병사(病死) 21

1582~1602.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1]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木下 家定]의 아들. 처음은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이어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 隆景]의 양자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가 승리할 수 있도록 서군을 배신하여 빈고[備後], 빗츄우[備中], 미마사카[美作] 50만석 다이묘우[大名]가 되지만 곧 젊은 나이에 죽었다.









역사를 바꾼 선택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이름을 단번에 알린 것은 다름 아닌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 하지만 히데아키는 그 2년 뒤인 21살의 나이에 죽어버렸다. 따라서 히데아키에게 있어서 말년은 그 2년간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전날 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서로 자기 진영에 끌어들이기 위한 모략 싸움이 활발히 펼쳐졌다. 하지만 결전 당일인 9 15, 히데아키는 고민 끝에 아군인 서군을 배반하고 동군에 내응을 결심하여 머물고 있던 마츠오 산[松尾山]을 내려와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 吉継]의 진영을 급습한 것이다. 히데아키의 배반에 당황한 서군의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은 연달아 무너져 결국 서군이 괴멸된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 전투로 인해서 동군의 총대장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覇權)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직접적인 승리의 요인은 히데아키의 결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10 15일 논공행상에서 히데아키는 큐우슈우[九州]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에서 서군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 秀家]의 영지였던 비젠[備前], 미마사카 57만석으로 가증(加增) 이봉(移封)되어 오카야마 성[岡山城] 거성으로 삼았다.


 하지만 비젠의 오카야마 성으로 옮겼을 즈음부터 히데아키의 운명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는 예전보다 더 술을 즐기기 시작하였고 그것도 날이 갈수록 더 마시게 되어, 쿄우토[京都]에서 죽은 타이코우[太閤] 히데요시를 공양하며 여생을 보내고 있던 양어머니 키타노만도코로를 걱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히데아키는 1582년 키타노만도코로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히데요시 부부의 양자가 되어 토요토미 가문[豊臣家]의 후계자로 길러졌다.

 히데요시 부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히데아키는 당대 제일의 문화인으로 알려진 쇼우고인 도우쵸우[聖護院 道澄]에게 글자를 배우거나 와카[和歌] 그리고 케마리[蹴鞠][각주:2]를 할 때의 손 움직임, 축이 되는 발의 움직임 등도 단번에 습득할 정도로 똑똑한 소년이었기에 기대를 받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1593년에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피를 이은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히데아키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 이것은 히데아키가 토요토미 가문의 후계자 후보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친족으로 중히 여겨 1597년 조선 재출병[각주:3] 때에는 총대장으로 파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코바야카와 가문에 양자로 보낸 히데아키를 불쌍히 여긴 히데요시는 살아 생전에 히데아키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내가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어떠한 것이건 들어주길 바란다고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보낸 히데아키 자필(自筆) 돈 차용증.


매사냥 직후의 급사(急死)


 1602년 초두에 히데아키는 이름을 히데아키라[秀詮]로 개명하였다.

 이는 전년에 일어난 - 히데아키에게 간언(諫言)한 스기하라 키이노카미 시게마사[杉原 紀伊守 重政]를 죽인 사건이나, 숙노(宿老)인 이나바 마사나리[稲葉 正成][각주:4]를 쫓아 낸 사건 등 가문 내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나아가겠다는 의미에서 개명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 히데아키는 쿄우토[京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고모 겸 양어머니인 키타노만도코로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고 어떤 때는 황금 50(500)이라는 거금을 키타노만도코로에게 빌리기도 했다. 사용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등 혼란 속에서 술에 빠져 평판이 좋지 못한 히데아키를 키타노만도코로는 죽은 히데요시와의 약속을 지키면서 마지막까지 뒤를 돌봐준 것이라 생각된다.


 히데아키가 죽은 것은 키타노만도코로에게서 거금을 빌린 불과 반년 후인 10 18일. 향년 21살이었다.

 사인(死因)에는 여러 설이 있어 확실치 않지만 세키가하라 전투[ヶ原の戦い]에서 동서 양군의 내응 공작에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결국 아군을 배신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여 양심의 가책과 주위의 비난에 견딜 수 없어 미쳐 죽었다고도 한다.


 죽기 직전인 10 15일.

 매사냥을 하러 나갔던 히데아키는 해가 저물어서 성으로 돌아왔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한 채 눕자마자 인사불성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숨이 중간에 멈추기도 하여 놀란 측근들이 쿄우토[京都]에 파발을 보내기도 했다. 17일에 잠깐 눈을 떴지만 다음 날 새벽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히데아키가 죽기 3일 전인 15일에 형인 키노시타 토시사다[木下 俊定]도 급사하였기에 그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1. 히데요시의 정실(正室) 네네[寧々]를 말함. [본문으로]
  2. 과거 일본에서 행해진 축구의 리프팅과 같은 경기. 여러 명이서 사슴 가죽으로 된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발등으로 서로 주고 받는 경기.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이름. [본문으로]
  4. 아직 이 때의 성은 하야시[林]였다. 코바야카와 가문을 떠난 후 미노[美濃] 이나바 시게미치[稲葉 重通 – 이나바 잇테츠[一鉄]의 서장자(庶長子)]의 사위가 되어 성을 ‘이나바’로 바꾸었다. 여담으로 이때 결혼한 것이 후에 카스가노츠보네[春日局 – 3대 쇼우군[将軍] 이에미츠[家光]의 유모]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