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님의 흑색 화살막이[黒母衣]였던 사람이다. 이 목은 니가 죽을 때까지 세운 무공 중 가장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어서 나를 죽이고 수훈을 세우거라”


1569년. 1월 3일.
토쿠가와 이에야스
[徳川 家康]는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의 마지막 거점 토오토우미[遠江]의 카게가와 성[掛川城] 공략을 위해 8000의 군사를 이끌고 오카자키 성[岡崎城]을 출발.

이에야스는 토오토우미를 가로질러 가며 호족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 같은 달 17일 카게가와 성 북쪽에 진을 치고 공성 시작.

18일. 우지자네 부하이며, 노부나가의 미노[美濃] 침공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미노 출신 히네노 빗츄우[日根野 備中]의 급습으로 이에야스 측 전선기지 중 하나인 카나마루 요새[金丸山砦] 함락. 이에야스는 지원군으로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은 토오토우미의 호족 오가사와라 우지오키[小笠原 氏興], 본거지 미카와[三河]의 군사들까지 보냈으나 다 패배하고 퇴각함. 이에야스 이에 엄청 분노.

20일. 이마가와 측. 또다시 성밖으로 나와 개김. 오가사와라 요격하러 나섰으나 패퇴. 이에야스 다시 미카와 군세를 파견하여 농성군을 패퇴시켜 성 안으로 몰아넣음.

22일 저녁. 이마가와 측. 토구가와 진영에 야습을 가하나, 토쿠가와 측은 미리 알아채고 매복을 펼쳐 큰 승리를 거둠.[각주:1]

23일 새벽. 패퇴하는 이마가와 야습군을 뒤쫓아 토쿠가와 군 성내로 돌격. 혼전.

혼전 속에서 많은 상처를 입고 다 죽어 가던 이토우 부헤에[伊藤 武兵衛] 앞에 무쿠하라 지에몬[椋原 冶右衛門]이라는 이에야스 부하가 다가와 창을 들이대자, 앉아 있던 부헤에는 벌떡 일어나,

“나는 예전 노부나가[信長]님의 흑색 화살막이[黒母衣]였던 사람이다. 이 목은 니가 죽을 때까지 세운 무공 중 가장 큰 공적이 될 것이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어서 나를 죽이고 수훈을 세우거라”

라고 외치며 칼을 던져버리고 목을 길게 내밀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같은 해 같은 달 6일.

이토오 부헤에가 죽는 순간까지 인정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미노[美濃] 기후 성[岐阜城]의 성주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옹립한 15대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머무는 혼코쿠 사[本圀寺]에 미요시 삼인중[三好三人衆]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신들에게 동원령을 내리면서 자신은 단기(單騎) 출격하였다.


카게가와 성은 그 후에도 버텨 같은 해 5월 6일 우지자네의 안전을 조건으로 개성.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장인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가 있는 사가미[相模]로 향했다.


이에야스의 직속부하[旗本]였던 무쿠하라 지에몬은 후일 토쿠가와 사천왕의 한 명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에게 파견된 가로[御附家老][각주:2]가 되어 대대로 이이 가문[井伊家]을 섬겼다. 상기의 이야기는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진 선조의 무공담이라 한다.


이토우 부헤에[伊藤 武兵衛]. ?~1569.
武兵衛는 ‘타케베에’, ‘무헤에’라고도 읽는 듯.
사가미[相模] 출신이라고 한다. 일찍부터 노부나가를 섬기다 그에게 인정받아 엘리트 친위부대인 ‘흑색 화살막이 군단[黒母衣衆]’에 발탁되었으나, 동료를 죽이고 오다 가문[織田家]을 떠나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를 섬긴다. 1569년 1월 23일. 카케가와 성[掛川城] 전투에서 토쿠가와의 무쿠하라 지에몬[椋原 冶右衛門]에게 죽었다.

  1. 여담으로 이때 공적을 세운 사람 중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가 노부나가를 섬기기 이전에 속해 있었던 마츠시타 카헤에[松下 嘉兵衛]도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다이묘우[大名]에게 막부에서 파견된 가로[御附家老]로, 격으로 따지면 동격이었다. 가문에 따라서는 막부가 파견한 감시역이기도 했다. 때문에 후대로 갈 수록 다이묘우와 동격이라 우기는 파견가로와 자신의 가신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는 다이묘우[大名] 간에 불화가 생기기도 하였으며, 직접 막부에 주청하여 벗어나길 바라는 파견가로 가문도 있었다. [본문으로]

 

 에도 시대[江戸時代], 오우미[近江]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 가문[井伊家]은 대대로 대로(大老[각주:1])를 배출하는 후다이 다이묘우[譜代大名[각주:2]] 필두의 가격(家格)으로 유명했다. 막말(幕末) 즈음,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각주:3]]과 사쿠라다 문밖의 변[桜田門外の変[각주:4]]으로 잘 알려진 이이 카몬노카미 나오스케[井伊 掃部頭 直弼]가 이 가문 출신이다.

 센고쿠[戦国] 시대, 이이 가문은 ‘이이의 적비대[井伊の赤備え]’라는 호칭으로 용명을 떨친 용맹무쌍한 전투집단이었다.  이이 가문의 깃발, 표식, 장병의 갑주는 물론 마갑(馬甲)에 이르기까지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 그 붉게 타오르는 듯한 붉은 무리가 전쟁터를 질주한 것이다. 이 집단을 처음으로 이이 가문에 도입한 것이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였다.

 적비대는 원래 타케다 가문[武田家]의 것으로 나오마사는 이를 모방한 것이다. 즉 1582년 텐모쿠잔[天目山] 산에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 勝頼]가 죽은 뒤, 이에야스[家康]는 타케다의 유신(遺臣)들을 나오마사의 가신단에 편입시켰다. 나오마사는 새로 타케다의 유신들을 포함한 가신단을 편성하면서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던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의 군단이 적비대였다는 것을 참고로 한 것이다. 그간의 사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코우슈우 군[甲州[각주:5]軍]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었다. 누구나가 이 타케다의 유신들을 원했다. 그런 타케다의 유신들이 이이 가문에 배속되게 된 데에는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가, “젊고 신참인 나오마사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그의 휘하로 배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고 이에야스에게 진언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반 정도는 자신에게 배속해 달라고 부탁하며, 만약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나오마사와 결투를 벌이겠다고까지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타다츠구는 가당치 않다는 듯이 이렇게 답했다.
 “원래 주군께서 나에게 배속시켜 주신다는 것을 내 멋대로 나오마사에게 배속시킨 것이다. 만약 자꾸 네놈이 툴툴거리면 네놈 일족을 모두 꼬챙이에 꿰어버릴 테다”
 이 완고한 타다츠구의 태도로 인해 타케다 유신단은 이이 가문 배속이 결정된 것이다.

 나오마사는 토쿠가와 사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인 무공파(武功派)이지만 사천왕의 다른 멤버들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 忠次], 혼다 타다카츠[本多 忠勝],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 康政]들 처럼 조상 대대로 토쿠가와 가문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오마사의 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토쿠가와를 섬긴 신참이었다.
 이에야스를 섬기기 전까지 이이 가문은 대대로 토오토우미[遠江]의 이이노야[井伊谷]라는 곳에서 살며 이마가와 가문[今川家]에 속해 있었지만, 부친 히고노카미 나오치카[肥後守 直親]가 누명을 쓰고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에게 살해당하자 나오마사는 도망쳐 친족의 손에 키워지던 중 이에야스가 나오마사를 발견하여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이 이례적인 발탁과 그 후 이에야스의 지나친 총애로 인하여 나오마사는 이에야스 남색(男色) 상대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신참이었지만 나오마사에 대한 이에야스의 신뢰는 두터워 토쿠가와 가문에서의 지위를 높여 갔으며, 나오마사도 또한 충실한 가신으로서 견마지로를 다하며 자신 스스로도 후다이[譜代[각주:6]]라 여기고 있었다.

 후년 히데요시[秀吉]와 만나러 이에야스가 상경하게 되는데, 그 동안 오오만도코로[大政所[각주:7]]를 이에야스의 성에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야스가 살아서 돌아옴으로써 오오만도코로의 인질 역할은 끝나 그녀를 반환하게 되었다. 이때 나오마사가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 히데요시에게로 향했다. 히데요시는 나오마사의 빈틈없는 호위에 기뻐하며 공을 치하. 다음 날 나오마사를 위한 향응의 자리를 만들어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 数正]에게, “자네는 요전까지만 해도 나오마사와 동료였으니 함께 참석하게”라며 동석시켰다. 이시카와 카즈마사는 이에야스의 고굉지신이었지만 히데요시로 말을 갈아탄 인물이었다. 카즈마사를 본 나오마사는 참석해 있던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 카즈마사는 우리 주군인 토쿠가와를 조상 대대로 섬겨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군을 배신하고 전하(히데요시)에게로 도망친 겁쟁이이기에 졸자는 동석하고 싶지 않습니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나오마사의 후다이[譜代] 의식을 강조한 일화이다.

 이어서 1590년 오다와라 정벌[小田原の役[각주:8]] 때의 일이다. 장기전으로 인해 장병들의 마음이 피폐해지는 일이 없도록,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나 사카이[堺]의 상인들을 자유로이 드나들게 하여 장병들이 술잔치나 춤, 노래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등 활발한 진중 위안을 행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측실 요도도노[淀殿]까지 쿄우토에서 불러들였고, 여러 다이묘우에게도 그들의 처첩을 부르도록 권했다.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떠들썩함이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오마사는 한 가지 꾀함이 있었다. 빠질대로 빠진 히데요시는 불과 14~15명의 호위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나오마사는 슬며시 이에야스에게로 가서,
 “주군. 지금이야말로 천하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히데요시의 목을 취하기는 아주 쉽사옵니다”
 야심만만한 나오마사의 헌책이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천명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으켜선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 일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에 따라야 한다. 이것을 명심하도록”
 하고 엄격하게 나오마사를 꾸짖으며, 어떤 일이건 성취될 때에는 때의 추세라는 것이 있음을 가르쳤다고 한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결전 때, 나오마사는 동군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9월 15일 결전 당일 새벽. 나오마사는 흰 갑옷을 입고 짙은 안개 속에 말을 채찍질하며 스스로 정찰을 나가 낌새를 엿보다 전투가 시작되자, 말 재갈을 쥐고 있던 부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싸우다 전사하면 운명일 뿐”
 이라며 적진으로 돌입했다고 한다.
 또한 아군인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의 부하 장수 카니 사이조우[可児 才蔵]가 막아 서자[각주:9], 정찰을 나간다고 속여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고도 한다.

 이 결전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를 배반케 한 동군이 서군을 총붕괴로 몰아넣었지만, 그때 패잔병 500여기를 이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義弘]가 동군 진영을 스치며 쏜살같이 질주하여 퇴각하였다.
 나오마사의 이이 군은 곧바로 이를 추격, 시마즈의 후군[殿] 시마즈 토요히사[島津 豊久]를 전사시켰지만, 난전 속에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던 나오마사는 시마즈 군의 저격에 오른 팔을 맞아 부상 당해 낙마하였다.[각주:10] [각주:11] [각주:12]

 이때의 상처로 나오마사의 오른 팔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세키가하라 전쟁 다다음 해인 1602년 7월 나오마사는 거성(居城)인 사와야마[佐和山]에서 죽었다.

[이이 나오마사(井伊 直政)]
1561년 토오토우미[遠江]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만치요[万千代]. 이에야스[家康]를 섬겼으며 1582년 이에야스코우슈우[甲州] 경영에 공적을 세웠다. 1584년 코마키-나가쿠테 전쟁[小牧・長久手の合戦]에 종군. 1588년 텐노우[天皇]가 쥬라쿠테이[聚楽第]에 행차했을 때 히데요시[秀吉]의 알선으로 종오위하(従五位下) 지쥬우[侍従]가 되었다[각주:13]. 배신(陪臣[각주:14])으로서는 파격의 대우였다. 1590년 이에야스의 칸토우[関東] 이봉(移封)으로 인해 코우즈케[上野] 미노와 성[箕輪城] 12만석에 봉해졌고, 후에 오우미[近江] 사와야마 성[佐和山城] 18만석으로 가증되었다. 1602년 42세에 죽었다.

  1. 중요 정책 결정을 할 때, 혹은 다대한 공이 있는 원로 대신을 위한 비상임 막부 최고위직...여담으로 채널 J에서 방영 중인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서는 '특별 정무대신'으로 번역되어 나온다. [본문으로]
  2. 주로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役] 이전부터 토쿠가와 가문[徳川家]를 섬겼던 가문이나, 쇼우군[将軍]이 새로 다이묘우[大名]로 만들어 준 가문. 막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3. 안세이[安政]는 당시 일본의 연호. 1858(안세이 5년[安政五年])~1860년 나오스케가 살해당할 때 까지 일어난 옥사. 당시의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가 쿄우토[京都]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무단 조인하고, 나오스케 주도로 14대 쇼우군[将軍]이 키슈우[紀州]의 토쿠가와 이에모치[徳川 家茂]로 결정되자,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탄압한 사건. 덕분에 나오스케는 자신의 정적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었다. [본문으로]
  4. 안세이의 대옥에서 나오스케의 정적 중 중심적 존재인 미토 번은 번주의 은거, 전 번주의 장기 칩거, 가로들의 할복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그에 불만을 품은 미토 번사 17인과 사츠마 번사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 次左衛門]이 에도 성[江戸城] 사쿠라다 문[桜田門] 앞에서 등성 중이던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여 살해한 사건. 여담으로 나오스케의 목을 자른 것은 주도한 미토 번사가 아니라 사츠마에서 혼자서 참가한 아리무라였다 . [본문으로]
  5. 카이[甲斐]를 달리 이리 부른다. [본문으로]
  6. 주가(主家)를 조상대대로 섬기는 가문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애미 [본문으로]
  8. 히데요시가 호우죠우 가문[北条家]를 멸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본문으로]
  9. 선봉은 무가의 명예였기에 함부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10. 시마즈 요시히로의 전투기인 [유신공관원합전기(惟新公関原御合戦記)]에는 이리 쓰여 있다 한다. [본문으로]
  11.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시마즈 가문의 병사 쵸우사 히코사에몬[帖佐 彦左衛門]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나오마사는 서군이 패주한 후 아직 움직이기 전의 시마즈 군에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무엇들을 하고 있나? 요시히로를 죽여라!”라고 외쳤을 때 카와카미 타다에[川上 忠兄] 휘하의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앞으로 나아가 철포를 쏘아 나오마사를 맞추자 나오마사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맞은 것에 놀라 동요하는 동안 시마즈 군은 퇴각을 시작했다고 한다.[旧記雑録後編 三] [본문으로]
  12. 덧붙여 이이 가문의 사료 [井伊家慶長記]에 따르면 카시와기 겐토우[柏木 源藤]가 쏜 총탄은 갑옷 오른 쪽 옆구리에 맞았지만 갑옷이 튼튼했기에 튕겨서 오른 팔에 맞았다고 한다. 나오마사는 이 충격에 창을 떨군 후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효우부쇼우유우[兵部少輔] 겸임. 이때 혼다 타다카츠나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는 무가(武家)가 관직을 얻었다는 의미인 쇼다이부[諸大夫]인데 비해, 나오마사는 지쥬우[侍従]가 되어 쿠게[公家]가 되었다. 이는 당시부터 나오마사가 토쿠가와 가문 필두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4. 원래는 중국에서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게 자신을 부를 때를 지칭한 일인칭 대명사라고 한다. 그 뜻이 이어져 일본에서는 신하의 신하를 지칭할 때 쓴다. [본문으로]
바바 노부후사는 이타가키 노부카타[板垣 信形], 하라 토라타네[原 虎胤],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 昌景]와 더불어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휘하의 용장으로 유명하다.

 

 노부후사가 젊은 무사들의 질문에 답한 전쟁터에서의 비결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노부토라[信虎], 신겐, 카츠요리[頼] 삼대에 걸쳐서 타케다 가문[武田家]를 섬기며 수 많은 무공을 세워 온 역전의 용장답게 굉장히 구체적인 내용이다.

-. 적보다 아군이 용감해 보이는 날은 앞을 다툴 것.
-. 아군이 겁을 먹고 있는 날에 혼자 나아가서는 개죽음한다.
-.
창끝이 올라간 적은 약한 적, 내려가 있는 적은 강적이다.
-.
전쟁을 많이 경험한 무사와 친해져서는 그 사람을 본보기로 삼을 것
  어느 것이나 노부후사가 실전 경험을 통해 만들어 낸 훈계라 할 수 있다. 또한 노부후사 자신 스스로도 항상 벽에 [전장상재(戰場常在)]라는 네 글자를 걸어두고서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노부후사는 '쿄우라이시 민부 카게마사[教来石 民部 景政]'라는 이름이었다.

 이 즈음 노부후사는 시나노[信濃]의 스와 신사[諏訪神社]에서 매일 참배하였는데, 실은 여기에 어떤 목적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관(神官)과 친해져 서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신관이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노부후사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카이[甲斐] 타케다 가문의 미천한 놈입니다만 군역(軍役)에 끌려가는 것이 싫어 스와 명신[諏訪明神]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의 은혜 덕분에 지금은 군역에 끌려가는 일 없이 이렇게 있습니다.”

 신관은 이 종군 기피의 겁쟁이를 눈 여겨 보았다. 당시 시나노[信濃]의 명문 스와 씨[諏訪氏]는 카이[甲斐]와 적대적인 관계였다. 신관은 이 겁쟁이를 이용하여 타케다 가문의 정보를 캐내려 하였던 것이다.


 노부후사는 조금씩 타케다 가문의 내부 사정을 흘렸다. 둘은 술을 함께 마시는 관계까지 되었다.

 어느 날, 노부후사가 술을 많이 마셔 취해 잠이 들어버리자 신관은 은밀히 그의 작은 칼[脇差] 살펴보았다. 생각했던 대로 칼날은 녹 슬어 있었다. 소지품에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신관은 완전히 노부후사를 믿게 되었다. 나중에는 병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신사에 속하도록 권하였다.

 

 노부후사의 계략은 성공이었다.

 이리하여 순조롭게 적지에 잠입한 그는 3년 동안 스와 신사령()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스와에 관한 모든 전략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이것이 타케다의 스와 공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바바 미노노카미 노부후사[馬場 美濃守 信房]로 이름을 고침 다음부터는 항상 신겐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를 멸망시켰을 때 신겐은,

 모두들 서둘러 이마가와의 저택에 가서 거기에 있는 보물들을 싹 긁어와라!”

 고 명령하였다.

 바바 노부후사는 그것을 듣자마자 단 혼자서 말을 달려 이마가와 저택으로 가서는 아군 병사들이 보물 약탈을 하러 오기 전에 저택에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노부후사는 타케다 가문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 약탈자라는 오명을 거부한 것이다.

 

 1572년 신겐이 상경하여 천하에 패()를 외치고자 하여 오다[織田]의 전선 기지인 미노[美濃]이와무라 성[岩村城]을 공격하였을 때 노부후사의 능란한 전술이 빛을 발했다.

 오다 군 1만여의 대군을, 불과 800명의 어린진(漁鱗陣)을 이용하여 농락한 것이다[각주:1]. 어린진이라는 것은 생선의 비늘과 같은 진형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 인()자 모양의 중앙부로 적 중앙을 돌파하는 전법을 말한다.

 

 이러했던 노부후사도 1575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의 패배에서 전사를 하였다.

 

[바바 노부후사(馬場 信房)]

카이[甲斐] 쿄우라이시[教来石] 출신. 노부하루[春]라고도 했다. 타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신겐[信玄], 카츠요리[勝頼] 삼대에 걸쳐 타케다 가문[武田家]을 섬겼다. 카츠요리를 받들고 싸운 나가시노의 전투[長篠の戦い]에서 패하여 전사. 62.

  1. 타케다 가문[武田家] 만세의 군기물 갑양군감(甲陽軍鑑)에만 나오는 이야기라 신빙성은 의심스럽다. [본문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
1560년 5월 19일 전사(戰死) 42세.

1519년 ~ 1560년.
스루가
[駿河], 토오토우미[遠江], 미카와[三河]의 태수(太守). 형 우지테루[氏輝]가 급사(急死)한 뒤 배다른 형인 겐코우 에탄[玄広 恵探]을 물리치고 가독(家督)을 상속하였다. 타케다 신겐[武田 信玄], 호우죠우 우지야스[北条 氏康]와 동맹을 맺고 상락(上洛[각주:1])을 개시하지만, 오케하자마[桶狭間]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에게 패하여 살해 당했다.





결전 오케하자마

 1560년 5월 12일.
 지부다이후[冶部大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자신이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2만 5천의 군세를 이끌고 순푸[駿府]를 출발하여 정서(征西)의 길에 올랐고 그날은 후지에다[藤枝]에 머물렀다.

 이때 선발 부대는 카케가와[掛川]에 도착해 있었다. 30Km에 이르는 길가엔 군마(軍馬)의 울음소리, 갑옷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나 장병(將兵)들의 노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마가와 씨[今川氏]는 아시카가 씨[足利氏][각주:2]의 한 갈래로, 코우안의 역(弘安の役 – 2차 몽골 내습) 즈음, 키라 나가우지[吉良 長氏]의 둘째 아들 쿠니우지[国氏]가 미카와[三河] 이마가와[今川]라는 땅(현 아이치 현[愛知県] 니시오 시[西尾市] 이마가와 쵸우[町])를 영유(領有)하며 이마가와 씨[今川氏]를 칭하게 된 때부터 시작된다.

 3대 노리쿠니[範国] 때, 처음으로 스루가 슈고[駿河守護][각주:3]에 보임(補任)되어, 이후 순푸를 중심으로 영지(領地) 지배를 강화해 갔다.

 요시모토의 부친 우지치카[氏親] 시대에 토오토우미[遠江]를 손에 넣었고 미카와[三河]에 침공하였다. 미카와는 이마가와 씨 발상(發祥)의 지(地)이며, 요시모토는 출진 직전에 미카와노카미[三河守[각주:4]]에 임명되었다.

 요시모토는 스루가, 토오토우미, 미카와 3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영내(領內) 안정은 그를 쿄우[京] 문화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그를 추앙한 쿄우토[京都]의 상급귀족[公家]들이나 승려, 렌가 사[連歌師]들이 빈번히 왕래하여 순푸는 번화하였다. 이 즈음 '카이도우[海道] 제일의 무가(武家)=海道一の弓取り' 이마가와 씨는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 요시모토의 출진은 상락이 목적이 아니라 미카와와 오와리(尾張) 국경의 평정에 있었다. 일만 잘 진행된다면 오와리 깊숙이 진출하여 오다 가문[織田家]의 젊은 당주 노부나가에게 철퇴를 가하고자 함에 있었다.

 요시모토의 본진은 다음 날인 13일에는 오오이가와[大井川] 강을 건너 카케가와에 입성하였고 이후 히쿠마[引馬], 미카와의 요시다[吉田], 오카자키[岡崎], 치리후[池鯉鮒]에서 숙영(宿營)을 하며 18일에는 오와리 쿠츠카케 성[沓掛城]에 입성하였다.

 다음 날에는 이른 새벽부터 마츠다이라 모토야스[松平 元康 – 훗날의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등을 선봉으로 삼아 오다 측의 와시즈[鷲津], 마루네[丸根] 요새에 공격을 개시, 정오 전에는 함락시켰다. 요시모토의 본대도 토우카이도우[東海道]의 큰길을 벗어나, 언덕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를 따라 오오타카 성[大高城]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시점에서 오와리[尾張]에 있는 이마가와 측  최전선 기지인 나루미 성[鳴海城]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확보했다고 확신한 요시모토는, 시작부터 전해져 오는 승리 소식에 기분이 좋아져 '오케하자마[おけはざま]'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우타이[謡]를 세 곡 음송(吟誦)했다고 한다. 요시모토를 따르는 군사들은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져 또한 이세 만[伊勢灣]의 해안을 따라 넓게 퍼져있던 상태라 본진에는 500명 정도의 친위대만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날 아침 일찍 키요스 성[清洲城]을 출발한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가 아츠타 궁[熱田宮]에 들러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동쪽에서 피어오르는 두 줄기 검은 연기를 보았다. 와시즈, 마루네가 낙성(落城)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노부나가는 만조(滿潮)가 된 해안가의 길을 피해, 나루미 성(城)을 우회하여 테코시가와[테고에(手越川)] 천이라 불리는 작은 하천을 따라 나아갔다.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기회는 본진을 급습하여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밀히 '오케하자마'의 산기슭까지 다가갔을 때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돌풍은 노부나가 군(軍)의 후방에서 요시모토 본진 쪽으로 불어 노보리[幟], 사시모노[指物]를 날려버렸다.

 날씨가 맑아지자마자 노부나가는 큰 목소리로 총공격을 명했다. 거듭 돌격해 오는 노부나가 군(軍)에 요시모토가 타고 있던 가마를 지키는 친위대 300여기(騎)는 차츰 밀려 무너지며 언덕을 내려가 쿠츠카게 방면으로 밀려났다. 최초로 달려든 핫토리 고헤이타[服部 小平太]를 요시모토 스스로 칼을 뽑아 대항하여 핫토리 고헤이타의 무릎을 베어 물리쳤지만, 그에 이은 모우리 신스케[毛利 新助]에게 목이 베어졌다. 요시모토 42세로 한창 일할 나이였다.

 노부나가는 그날 중에 요시모토의 목을 가지고 키요스로 개선하였다. 다음 날 수급 확인을 한 후, 키요스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남쪽의 스가구치[須賀口]라는 곳에 목 무덤을 만들어, 천부경(千部経[각주:5])을 실행케 하고, 불탑을 세워 요시모토의 넋을 기렸다고 한다. 그 후 요시모토의 수급은 나루미 성(城)을 계속 지키며 물러나지 않고 있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 元信]에게 건내져 스루가[駿河]로 보내졌다.

말년의 도전

 요시모토의 죽음은 에도 시대 이후에 창작된 책들에 의해 쿠게[公家] 문화에 빠진 교만과 방심의 인물로 그려지게 된다. 오하구로[鉄漿]를 해서 상급귀족[公家]처럼 몸을 꾸몄으며 숏다리에 허리가 길어 말에서 떨어졌다거나, 우유부단하여 도무지 센고쿠[戦国]의 무장답지 않은 인물로 그려졌다. 그런 것들은 창작된 요시모토 상(像)이다.

 그렇기는커녕 부친 우지치카가 제정한 영지(領地) 지배법인 '카나 목록[仮名目録]'을 보완한 '카나 목록 추가[仮名目録追加]'라고 하며 추가 21개조를 정하여, 토지조사[検地]의 실시나 상공업 발전 촉진, 부역(賦役)이나 전마(傳馬) 제도의 정비 등 센고쿠 다이묘우[大名]로서 최상급의 영지(領地) 경영, 시책을 착착 실시하여 영내(領內) 장악에 자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시모토는 1558년 즈음부터 후계자인 우지자네[氏真)에게 가독을 일부 위임했다. 적어도 안정된 스루가[駿河]를 맡기고 자신은 미카와[三河], 오와리[尾張]라는 신천지의 영토화를 목표로, 상락을 향한 포석을 깔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자 했던 요시모토의 의욕은 노부나가에게 산산이 부서져 한 여름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1. 상경(上京)의 다른 말. 여기서 락(洛)은 낙양(洛陽)의 “낙(洛)”이다. 여러 번 중국 왕조의 수도가 되었기에, 낙양에 간다는 말은 곧 수도로 간다는 말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2.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우군 가문[将軍家] [본문으로]
  3. 슈고[守護]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 幕府]의 지방관직 [본문으로]
  4. 이는 막부와는 별개로 쿄우토[京都]의 조정에서 내리는 관직. [본문으로]
  5. 명복을 위해서 천 명의 중이 똑 같은 경문을 한 번씩 읽는 것, 반대로 한 명의 승이 천번을 읽을 때도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천 명의 중을 모으기 쉽지 않으니 여기선 후자인 것 같음. [본문으로]

타케다 노부토라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7. 12. 29. 17:30 Posted by 발해지랑
다케다 노부토라[武田 信虎]

1574 3 5일 병사(病死) 81.


1494 ~ 1574.

타케다 가문[武田家] 18대 당주. 친족(親族), 지방 호족[人]들과 싸워 카이[甲斐]를 통일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백성과 중신(重臣)들의 원한을 사, 장남 하루노부[晴信]에게 스루가[駿河] 이마가와 가문[今川家]로 추방당하였다. 후에 쿄우토[京都]로 가서, 당시의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가 되었다.

 




 



루가[駿河]로 추방과 은거

 

 난세를 산 전형적인 무장 중 하나인 타케다 노부토라는 1541 6, 아들 하루노부(신겐[信玄])에게 돌연 스루가[駿河]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 義元]에게로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스루가[駿河]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손님 대접을 받았으며, 타케다 가문[武田家]에서는 생활비를 받아 측실(側室)까지 두고 아이까지 얻었다. 이는 노부토라와 요시모토의 관계가 이외로 깊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間]에서 전사한 뒤 요시모토의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今川 氏真]와 사이가 멀어져 결국 1563 69살 때 스루가를 떠나 쿄우[]에 올라가 쇼우군[軍]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 義輝]의 쇼우반슈우[相伴衆]가 되었다.

 

 쇼우군의 쇼우반슈우라는 것은 매일 이야기를 나누면서 출신 혹은 관계했던 지역의 정보 등을 쇼우군에게 전해주는 역할이다. 필시 노부토라는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스루가[駿河] 등의 정보를 얻어서는 끊임없이 쇼우군에게 보고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1573년 타케다 신겐이 죽었다는 소식이 노부토라에게 전해졌다.

 노부토라는 이 해에 이미 81살이라는 고령이 되어있었지만, 필시 그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의 충격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결과, 노부토라는 이 해의 9월에 시나노[信濃] 타카토오[高遠]까지 서둘러 왔는데, 신겐에게 추방을 당해서부터 벌써 3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한때 자신이 다스리던 카이[甲斐]정세(情勢)가 굉장히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카토오 성()에서 재회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타카토오까지 왔을 때 머물던 숙소는 사위인 네즈 신페이[祢津(禰津) 神平]의 집이었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그 감추어진 면을 읽을 수 있다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예를 들면 노부토라의 셋째 아들은 타케다 노부카도[武田 信廉 = 쇼우요우켄[逍遙軒]]이다. 이해인 1573 그때까지 타카토오 성주(城主)였던 타케다 카츠요리[勝頼] 죽은 신겐의 후계자가 되어 카이[甲斐]로 거처를 옮겼기에 그런 카츠요리를 대신하여 노부카도가 타카토오 성주가 되어 막 부임했을 때였기에, 노부토라는 우선 타카토오 성주인 노부카도와 만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부카도와 노부토라의 관계는 형인 신겐과 노부토라 만큼 나쁘지 않았기에, 당연 둘은 타카토오 성에서 재회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증거로 노부카도가 부친의 말년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다이센 사[大泉寺]에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노부카도가 부친과 만나지 않았다면 늙은 노부토라의 초상화는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필시 부친과 만난 후 그 모습을 성에서 그렸고 그 반년 후인 1574 3 5일에 노부토라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기에, 5월에 초상화에 써 넣는 글을 쵸우젠 사[寺]의 슌코쿠 화상[尚]에게 부탁하여 그림을 남긴 것이다.

 

카이[甲斐]를 다시 얻고자 했던 꿈?

 

 노부토라의 묘소(墓所)는 코우후 시[甲府市]의 다이센 사[大泉寺]에 있다.

 장례식은 1574 3 7. 손자인 타케다 카츠요리의 주도로 시나노[信濃] 류우운 사[寺]의 스님인 홋코우 젠슈쿠[北高全祝]를 불러와 경을 외우게 하여 치러졌다.

 

 타카토오까지 돌아온 노부토라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행해지고 있다.

 다시 한번 카이[甲斐]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였다. 아니다 - 단순히 고향이 그리웠고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돌아온 지 반년 만에 죽은 것을 보면 후자 쪽의 해석이 적당한 것 같다.

 

 여담으로 시나노[信濃]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와나카지마[川中島]의 옛 전장 터에는 사나다 노부유키[田 信之]가 세운, 노부토라의 둘째 아들 타케다 노부시게[武田 信繁]의 명복을 비는 텐큐우 사[寺][각주:1]가 있으며, 그 반대편으로 카와나카지마 서쪽으로 이어진 산속에는 '텐큐우의 진짜 무덤[本塚]'이라는 것이 어느 개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없지만 노부시게를 모신 텐소우 사[天宗寺]가 있어 노부시게를 따르던 인물들이 모여 넋을 기렸다고 한다.

 

 이렇게 카와나카지마에는 노부시게를 기리는 곳이 많다. 노부토라는 타카토오까지 돌아왔을 때, 옛날 귀여워했던 노부시게의 이야기를 듣고 몸소 몸 무덤을 찾아가 노부시게의 넋을 기리고, 옛날을 그리워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물론 글로 적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전해 내려올 뿐으로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쿄우토[京都]에서 먼 길을 달려왔던 말년의 노부토라라면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 타카다 노부시게의 관직은 사마노스케[左馬助]였는데 사마노스케의 당명(唐名)을 덴큐우[典厩]라 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