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

1615 5 28일 병사 60

1556~1615.

하시바 히데요시[羽柴 秀吉]을 섬겼으며 '시즈가타케 칠본창[七本槍]'[각주:1] 중 한 사람이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頼]의 후견역(後見役)이 되어 토쿠가와[德川] 측에 대한 연락창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내통자로 오해 받아 오오사카 성[大坂城]을 떠났다. 오오사카 여름의 싸움 후에 죽었다.







우직한 카츠모토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16살 때부터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기기 시작했는데, 이런 카츠모토를 히데요시는 곁에 두고 길러 키워 가신(家臣)으로 삼았다.

 1583 4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칠본창'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공을 세워 3000석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인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淸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이시다 미츠나리[石田 三成] 등과 비교하면 출세 가도에서 밀려나 히데요시 말년인 1595년이 되어서야 겨우 셋츠[摂津] 이바라키[茨木] 1만석의 다이묘우[大名]가 되었다. 그 전 해인 1594년에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신하로 선택되었다. 히데요리의 여러 신하들, 특히 측근을 감찰(監察)하는 지위였다.


 히데요시가 죽은 다다음해 세키가하라 전쟁[関ヶ原の戦い]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오오사카 성에 입성해서는 히데요리 곁을 지키며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그런 우직함을 신뢰하여 1601년 카츠모토에게 야마토[大和] 헤구리 군[平郡郡] 18천석을 가증하여 히데요리의 가로(家老)로 임명하였다. 이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카츠모토에게 있어서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이어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우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열었고, 이 일로 인하여 토요토미 가문[豊臣家]과는 뭐든지 미묘한 문제가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카츠모토에 대하여 요도도노[淀殿][각주:2]를 필두로 한 오오사카 성내의 반토쿠가와파는 무엇이든 의심의 눈초리로 카츠모토를 보게 되었다. 토요토미-토쿠가와 양 가문의 중개자로써 쌍방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부심하는 카츠모토는, 언제부턴가 오오사카 성내의 혼란과 이간을 꾀하는 이에야스의 교묘한 술책에 희롱당하게 되었다.


호우코우 사[方広寺] 종명(鐘銘) 사건


 1602 4월.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통해 히데요리 모자(母子)에게 쿄우토[京都] 호우코우 사[方広寺] 대불전(大佛殿)의 재건을 권유하였다. 히데요리도 요도도노도 죽은 히데요시의 공양과 토요토미 씨()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를 따랐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이에야스가 오오사카 성()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금은을 쓰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카츠모토가 조영(造營) 책임자라는 큰 임무에 임명받았다. 그는 이에야스와 빈번한 연락을 통해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사업을 진행해갔다.


 호우코우 사() 대불전은 1614 4월에 준공.

 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개안공양을 눈 앞에 두고 이에야스가 불만을 표했다. 종에 새겨진 '家安康' '칸토우[関東]를 저주하는 말'[각주:3]이고, [君臣豊樂子孫殷昌]이 토요토미의 번영만을 기원하는 말이라며 개안공양의 연기를 명령했다.

 카츠모토는 급히 순푸[駿府][각주:4]로 해명하기 위해서 향했다. 당초는 이 문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카츠모토를 면회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다 마사즈미[本多 正純]를 통해 오오사카 성()이 어째서 많은 수의 낭인을 모집하고 있는지 힐문하였다. 그리고,

1. 히데요리가 에도로 온다.[각주:5]

2. 요도도노가 인질이 되어 에도에서 산다.

3. 히데요리가 오오사카 성()을 나와 다른 곳과 영지를 바꾼다.[각주:6]

 라는 어느 것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요구해 왔다. 대불전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정치적 난제를 껴안게 된 카츠모토는 크게 놀랐다.


 한편 요도도노도 따로 이에야스에게 오오쿠라쿄우노츠보네[大蔵卿局][각주:7]와 쇼우에이니[正栄尼][각주:8]를 파견하였다. 이에야스는 이 둘에게 종명 문제 등 난제를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환대하며 히데요리 모자의 안부에 신경 썼기에 당연하게도 오오사카로 돌아온 쌍방의 보고는 전혀 상반되는 것이 되었다. 이에야스의 교묘한 분열 책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오오사카 성내에는 '카츠모토는 칸토우[関東]에 알랑거리는 놈'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곧이어 그 목소리는 '배신자 카츠모토를 죽여야 한다'로 변했다.


충신인가 역(逆)인가


 히데요리와 요도도노의 신뢰를 잃은 지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기에 카츠모토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오오사카 성()을 탈출하여 이바라키 성()으로 갔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칸토우[関東]에 대한 오오사카 측의 선전포고라 여기고 오오사카 정벌을 위해 여러 다이묘우[大名]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1614 10 11일. 이에야스는 순푸를 출발하여 이로인해 '오오사카 겨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된 이에야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음에 틀림이 없다.


 11 4일.

 쿄우토[京都]에 도착한 이에야스는 곧바로 카츠모토를 불러 오오사카 성() 공략에 대한 이야기 나누었다. 카츠모토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바이며 어쩔 수 없던 선택이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오오사카 성내의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카츠모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협력을 바라는데 거부할 수도 없었다.


 12 16일.

 시작된 공성 측의 대포 공격 중 한 발이 요도도노가 거주하던 곳에 떨어졌다. 거기에 다음해 여름의 싸움 때 야마사토[山里]의 성곽에 있는 히데요리 일행의 소재를 확인하여 히데타다[秀忠]에게 고한 것도 카츠모토라고 한다.


 토요토미 가 멸망으로부터 20일 후.

 카츠모토는 쿄우토[京都]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상은 깊은 죄와 자기 혐오에 빠져 자해(自害)를 했던 것이 아닐까?

  1. 시즈가타케에서 뛰어난 무공을 세운 7명의 무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 正則], 카토우 키요마사[加藤 清正], 카토우 요시아키[加藤 嘉明],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히라노 나가야스[平野 長泰], 카스야 타케노리[糟屋 武則], 카타기리 카츠모토[片桐 且元]를 지칭함. [본문으로]
  2. 히데요리의 생모. [본문으로]
  3.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안(安)자로 갈라놓았기 때문. [본문으로]
  4. 이에야스[家康]가 히데타다[秀忠]에게 쇼우군[将軍]직을 물려주고 은거하고 있던 곳. 말이 은거지 중요정책사항들은 대개 맡아서 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즉 막부의 지배하에 들어오라는 의미. [본문으로]
  6. 대략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郡山]가 유력 후보지였다고 한다. [본문으로]
  7.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모친으로 요도도노[淀殿]의 유모(乳母). [본문으로]
  8.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유모(乳母)이며, 히데요리의 창술 스승 와타나베 타다스[渡辺糺]의 모친. [본문으로]

도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98 8 18일 병사 62

1536 ~ 1598.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을 섬기며, [스노마타 하룻밤 성(墨俣一夜城)[각주:1]]등의 공을 세웠다. 빗츄우(備中) 타카마츠(高松)() 공격 중에 혼노우(本能)()의 변을 듣자마자 츄우고쿠 대반전(中国大返[각주:2])를 감행하여 야마자키(山崎)의 싸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를 쓰러뜨렸다. 후에 쵸우소카베(長宗我部), 시마즈(島津), 호우죠우(北条)()를 항복시켜 천하를 통일하였다.







현실도피의 꽃구경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는 1598년 새해가 밝자 교착상태에 빠진 조선 전선(朝鮮 戰線[각주:3])우울함에서 도피라도 하듯이 [다이고의 꽃구경(醍醐花見)]의 장소가 되는 다이고(醍醐)()의 정비에 열중했다. 1년 전부터 기획한 꽃구경이었지만 어두운 현실에서 눈을 돌려 도피하기에는 다시 없는 기회인 듯 했다.

 말년의 히데요시는 고독한 위정자(爲政者)였다.


 히데요시 스스로 다이고사()로 가서 오우닌의 난(応仁の乱) 때 황폐해진 절의 여러 건물()을 계속해서 수복(修復)하고 정원을 새로 만드는 것에도 직접 힘을 쏟는 등 진두지휘(陣頭指揮)하였다. 마치 이 꽃구경 행사가 [마지막 잔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히데요시 자신이 예지라도 한 것인지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렇게 준비의 만전을 기한 끝에 열린 3 15 [다이고의 꽃구경] 문자 그대로 호화찬란한 사상 최고의 꽃구경이 되었다.

 히데요시는 어린 히데요리()와 함께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4]), 요도도노(淀殿[각주:5]), 마츠노마루도노(丸殿[각주:6]), 산노마루도노(丸殿[각주:7])등의 정실(正室), 측실(側室)들을 시작으로, 그녀들의 시녀들이나 여러 다이묘우(大名)의 부인들과 함께 만개한 벚나무 아래를 거닐며 하루 종일 꽃구경 잔치를 즐겼다. 늙은 히데요시에게 있어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 사이에서 즐기는 꽃구경은 현세를 잊고 도원경(桃源境)에서 노니는 심경이었음이 틀림 없다.


병에 걸린 히데요시


 꽃구경이 끝난 뒤에도 히데요시는 다이고사()에 들려 절 수복에 힘썼다. 여전히 어두운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도피하고픈 듯이.


 하지만 5 9.

 천하인(天下人)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하는 천하의 명석(名石 - 藤戸石) 히데요시의 손을 떠나 다이고사()로 옮겨져 산호우()()의 정원 정면 중앙에 놓여 졌을 때 히데요시는 후시미(伏見)()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 4일 전인 5 5일.

 갑자기 병에 걸려 그 날부터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하지만 당초는 본인도 가볍게 생각하고 있던 병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전국의 절과 신사(神社)들에게 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내려졌고 조정(朝廷)에서도 임시 카구라(神楽[각주:8])를 행하여 병마에서 헤어 나올 수 있게 하는 기도가 행해졌다. 하지만 기도의 효험은 나타나질 않았고 한 때는 인사불성에 빠졌다.


비통한 최후와 유언장


 히데요시도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은 듯 하다.

 7 15일. 여러 다이묘우(大名)들에게 후계자인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서약서(誓紙)를 제출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대로(五大老), 오봉행(五奉行)을 정하여 당시 6살의 어린 히데요리를 위해 토요토미 정권 체제를 강화하는 등 죽을 때가 다 된 히데요시에게오직 히데요리의 미래만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리고 8 5일.

 히데요시는 오대로에게 보낸 이승에서의 이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언장을 써서 계속해서 히데요리를 부탁하였다.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이것 말고는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습니다.

거듭거듭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다섯 분에게 부탁합니다.

막상 다섯 분에게 말씀드리고나니 이별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현세에 미련을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던 텐카비토(天下人) 히데요시의 비통한 마지막 말이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는 그 해인 1598 8 18일 새벽. 후시미 성에서 생이 마감하였다. 향년 62.


 히데요시에게는 또한 사세구()가 있다.

이슬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지는 나의 생명이려나

무슨 일(또는 오오사카)이건 꿈 속의 꿈

 오대로에게 보낸 유언장처럼 아쉬움이 배어 나오는 서글픈 시이다.

 하지만 이 시는 히데요시의 예언이기도 했는지 히데요시는 토요토미 가문을 시작으로 토요토미 정권의 비극적인 결말까지 예견한 듯하다.


 히데요리는 히데요시가 그 후사를 부탁했던 오대로의 필두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에게 공격 당하여 토요토미 가문은는 멸망하였다. 거기에 히데요시가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던 오오사카 성()은 오오사카 여름의 전투에서 불에 타 없어졌으며 후시미 성()도 세키가하라(ヶ原)의 싸움에서 공격 받은 피해로 인하여 폐성(廢城)이 되어 없어졌다. 그리고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호우고쿠(豊国) 신사(神社) 이에야스의 파괴 명령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 일대(一代)의 힘으로 쌓아 올린 토요토미 가 영광의 흔적은 이에야스에 의해 전부 이 세상에서 말살되어 그야말로 남가일몽(南柯一夢)처럼 허무하게 없어진 것이다.

  1. 스노마타에 하룻밤만에 성을 세웠다는 전설. [본문으로]
  2. 보통보다 더 빨리 철수한 것을 이름 [본문으로]
  3. 정유재란을 말함. [본문으로]
  4. 정실 네네(ねね). [본문으로]
  5. 히데요리의 친모(親母). [본문으로]
  6. 와카사 타케다(若狭 武田)씨(氏) 최후의 당주 타케다 모토아키(武田元明)의 부인. 타케다가 혼노(本能)사(寺)의 변 때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편을 들어 후에 할복. 이에 따라 히데요시의 측실이 되었다. [본문으로]
  7. 오다 노부나가의 다섯 번째 딸. [본문으로]
  8. 신에 춤을 바치기 위해 추어진 가무(歌舞). [본문으로]

아자이 나가마사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11. 19. 09:58 Posted by 발해지랑

아자이 나가마사(浅井 長政)
1573
8 28
할복 29

1545 ~ 1573.

오우미(近江) 오다니(小谷) 성주(城主).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여동생인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동맹을 맺지만, 맹우 아사쿠라(朝倉)()를 노부나가가 공격하였기 때문에 배반. 아사쿠라 요시카게(義景)와 함께 아네가와(姉川)의 전투를 벌이나 패배. 후에 오다니 성을 공격당하여 할복했다.






부인과 자식을 사랑하는 호북(湖北)의 용장(勇將)


 아자이 가문은(浅井)초대(初代) 스케마사(亮政)가 주가(主家)인 쿄우코쿠(京極)()를 하극상(下剋上)으로 밟고 올라 와 히사마사(久政), 나가마사로 3대가 이어져 소위 [호북의 패자(覇者)]가 되어있었다. 특히 나가마사는 조부의 기질을 이어 받아 뛰어난 무략(武略)을 발휘하여 가문의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1567년.

 오와리(尾張) 키요스(淸州) 성주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이치를 처로 맞이하여 아자이 가()의 위세는 안정되게 되었다. 오이치와의 사이에 2 3녀를 두었고 이 행복이 영원이 이어질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를 받들어 상경(上京)할 때 나가마사는 망설임 없이 노부나가와 함께 롯카쿠(六角)()를 싸워 추방시켰다.


 하지만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의 이기적인 면을 꽤 뚫어 보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부인이나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여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노부나가는 나가마사의 사람 좋은 것을 이용하여 약속을 위반하였다.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 공격이었다.


노부나가와 갈라서다.


 나가마사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을 때 - 에치젠의 아사쿠라씨()는 조부 스케마사의 시대부터 친밀한 관계이니 자신한테 알리지 않고 아사쿠라씨()를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 아사쿠라씨()를 공격할 때에는 사전에 나가마사의 이해를 구하도록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은 노부나가를 싫어하여번히 쿄우()로 올라오도록 한 요청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다의 속성(属城)인 테즈츠(手筒), 카나가사키()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격노하여 나가마사에게 통보하지 않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원군과 함께 에치젠 공격을 감행했다. 1570 2월이었다.


 그야말로 오다군의 선봉이 아사쿠라의 본거지인 이치죠다니(一乗谷)를 포위하려 할 즈음 노부나가는 나가마사가 배반하여 요시카게에게 가담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옛 의리를 중요시 하는 부친 히사마사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거기에는 나가마사의 논리가 있었으며 맹목적으로 노부나가를 섬길 수 없다는 오우미(近江) 무사의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에서 철수를 명하고 쿄우()로 돌아갔다. 앞뒤로 협격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태는 같은 해 6월의 아네가와(姉川) 전투로 발전했다.

 이부키(伊吹)산에서 비와코(琵琶)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아네가와 천을 사이에 두고, 오다-토쿠가와 연합군과 아자이-아사쿠라 연합군이 싸웠다. 선전했지만 노부나가 측의 머릿수에 눌려 나가마사 측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가마사는 거성(居城)인 오다니 성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고 노부나가 진영을 공격하여 괴롭혔다.


부인과 자식을 도망시키고 철저항전


 부인과 자식을 가진 인간은 자식이 성장함과 동시에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필시 나가마사도 그랬음에 틀림이 없다. 오오기마치(正親町) 텐노우(天皇)의 명령를 바탕으로 쇼우군(将軍)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중개에 나서자 나가마사는 간단히 화의(和議)에 응했다. 성립은 1570년 12월 14.

 이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 나가마사 휘하의 무장도 있었다. 이소노 카즈마사(磯野 員昌) 등의 부하 장수들이 나가마사에게는 더 이상의 가망성이 느낄 수 없다고 단념하며 뒤를 이어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였다. 나가마사의 수동적인 모습에 실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집념이 강하다. 자신을 거역한 자를 방치해 두는 성격이 아니다. 우선 1573 8월에 에치젠을 공격하였고, 20일에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자살로 몰았다. 일족인 아사쿠라 카게아키라(朝倉 景鏡)의 배반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이 공격의 기세를 이용하여 나가마사의 오다니 성을 포위하였다.


 8 26일.

 노부나가는 오우미(近江)의 토라고젠(虎御前)산에 포진하고, 후와 카와치노카미(不破 河內守)를 사자로 하여 나가마사에게 항복을 권고하였다. 요시카게를 쓰러트린 지금 나가마사에게는 원한이 없으니 항복한다면 나쁘게는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가 거절하자 이번엔 야마토(大和) 일국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가마사는 1568년 오우미(近江) 침공부터 6년 간 노부나가의 동향을 빠짐없이 관찰해 왔다. 아무래도 목숨을 구해 줄 것 같은 상대가 아니다. 나가마사는 다시 거절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오다니성에 농성하는 무장들을 동요시켜 전투의욕을 잃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카와치노카미가 돌아가자 부인인 오이치노카타(市の方)를 설득하여 딸 세 명(챠챠([각주:1]), 오하츠(お初), 오고우(お江[각주:2]))과 함께 노부나가에게 보냈다. 아들인 만부쿠마루(万福丸)와 이쿠마루(幾丸[각주:3])는 도망치지만 만부쿠마루는 잡혀서 살해당한다.


 나가마사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고 8 28일. 성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赤尾 美作守)의 저택에서 할복하였다. 향년 29.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 많았다.

  1. 후에 요도도노(淀殿). [본문으로]
  2. 후에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2대 쇼우군(将軍)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 秀忠)의 부인. [본문으로]
  3. 갓난 아기였기에 절로 보내져 중이 되었지만 후에 호소카와(細川)씨의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오다 나가마스

일본서적 번역/전국무장의말년(了) 2006. 5. 12. 18:03 Posted by 발해지랑

오다 나가마스(織田 長益)

1621 12 13 병사 75

1547 ~ 1621.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의 동생. 출가하여 우라쿠사이(有樂). 노부나가가 죽은 뒤에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 이어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섬겼으며,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 오오사카(大坂) 겨울의 전투의 화평 교섭 등에서 활약. 후에 다인(茶人)으로 살아가며, 토우쿄우(東京) 유우라쿠쵸우(有樂町)에 그 이름을 남겼다.









다인(茶人) [우라쿠(有樂)]의 탄생


 토우쿄우(東京)유우라쿠쵸우(有樂町)라는 번화가가 있다.

 이 지명은 오다(織田) 우라쿠(有樂)가 에도(江戶) 초기에 이 곳에 저택을 지어 살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오다 우라쿠'라는 인물은 노부나가의 동생인 나가마스(長益)를 지칭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동생들 중에 에도 시대까지 살아 남은 것은 노부카네(信包)와 나가마스, 두 사람이었지만 바쿠마츠(幕末)[각주:1]까지 다이묘우로 존속한 것은 나가마스의 가계(家系)뿐이다.


 나가마스는 1547년생으로 노부나가와는 13살 차이가 난다.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은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전장에 나간 기록도 1582 카이(甲斐) 타케다(武田)씨를 정벌 할 때 노부나가의 장남인 노부타다(信忠)의 부하로 키소(木曽) 방면에서 침공한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혼노우(本能)()의 변 후, 나가마스는 오와리(尾張)나 북() 이세(伊勢)를 영유(領有)하는 조카인 노부카츠(信雄)를 섬기며, 1 3천관을 식록(祿)으로 받는 유력한 가신이 되어 검지봉행(奉行[각주:2]) 등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寛政重修諸家譜[각주:3]]에 의거하여 [혼노우(本能)()의 변 후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를 섬기며 셋츠() 시마시타(島下)() 마이타(昧舌)에서 2천석을 치교우(知行)로 받았다]라는 설(國史大辭典 등)은 잘못된 것이다.


 히데요시를 섬기게 되는 것은 1590 9월로 그 직전에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에게 오와리를 빼앗기는 등 카이에키(改易[각주:4])당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깎고 [우라쿠(有樂)]라는 호를 칭하는 것도 이 시기이다. 우라쿠 44살 때였다. 필시 셋츠 치교우를 지급 받은 것도 이 즈음이라고 추측된다.


 우라쿠는 센노 리큐우(千 利休)의 뛰어난 제자 일곱명(利休七哲[각주:5])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데, 차를 즐기게 된 것은 리큐우가 노부나가의 사도우(茶頭[각주:6])를 맡을 즈음인 것 같다. 하지만 다도(茶道)의 세계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라쿠라는 호를 칭하는 시기부터라고 한다.


 1591 2월 리큐우가 죽자 [차의 장인(宗匠)]라 불리며 히데요시가 다도회를 열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고, 다음 해인 1592년에 조선 출병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를 따라서 큐우슈우(九州)로 내려가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성에서 자주 다회를 열었다.


 또한 전년 9월에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御伽衆)'에 들어갔다. 오토기(御伽)라는 것은 주군이 심심할 때 말상대를 해주는 것을 말하며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오토기슈우'라 칭했다. 필시 우라쿠는 히데요시의 오토기슈우에 더해짐으로써 다인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 것이라 추측된다. [리큐우 류()]를 기반으로 하면서 독자적인 다풍(茶風)을 가미한 [우라쿠 류()]의 다도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1600년 세키가하라(ヶ原) 때는 우에스기(上杉)를 정벌하기 위하여 칸토우()로 내려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이어서 세키가하라 전쟁터에서도 무공을 세웠다. 싸움이 끝난 뒤 은상으로 셋츠에 가지고 있던 2천관에 더하여 야마토(大和) 3만석이 주어졌다. 다인(茶人) 다이묘우 오다 우라쿠의 탄생이다.


 세키가하라에서는 노부나가의 적류(嫡流)인 기후(岐阜) 성주 오다 히데노부(織田 秀信 노부나가의 맏손자) 에치젠(越前) 오오노(大野)성주 오다 히데카츠(織田 秀雄 노부카츠의 장남)가 서군에 속하여 카이에키 당하였기에 에도(江戶) 바쿠후(幕府) 초창기에 오다 일족 중에서 다이묘우로써 남아 있던 것은 우라쿠의 가계(家系)뿐이었다.


()로 보내는 나날


 토쿠가와 쇼우군()의 지배를 받는 다이묘우가 된 우라쿠는 에도나 순푸(駿府)에 자주 출사(出仕)하였고, 그러는 한편 오오사카(大坂) 성에도 빈번히 출입하였다. 토요토미노 히데요리(豊臣 秀)의 생모 요도도노(淀殿)의 외숙부라는 인척 관계로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1611 3월.

 히데요리가 토쿠가와 이에야스와 니죠우(二条)성에서 회견했을 때 우라쿠가 히데요리를 따르고 있는 모습은 그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흥미 깊다.그 후 토쿠가와-토요토미 양 가문의 사이가 악화되자 우라쿠의 정치적 입장도 미묘하게 되어 일설에 의하면 우라쿠는 이에야스의 첩자가 되어 토요토미 측의 비밀을 보고 했다고도 하며, 오오사카 겨울의 전투가 시작되자 오오사카 성 안에서 요도도노와 히데요리에게 이에야스를 복종하도록 계속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름의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오오사카 성을 빠져나와 쿄우토에 가서 살며 아들 나가마사(長政)와 히사나가(尚長)에게 각각 1만석씩 나누고 자신은 남은 1만석을 가지고 살았다.


 우라쿠는 항상 쿄우토에 칩거하며 다도에 몰두하면서 여생을 보내었고 1621년 12월 13 중풍으로 쿄우토 히가시야마(東山)에서 죽었다. 고죠우(五条) 강변(河原)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히가시야마의 겐인(建仁)() 세이덴(正伝)()에 묻혔다. 향년 75.

  1.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말기를 말함. [본문으로]
  2. 정확한 수확량을 측정하여 세금을 낼 양을 정하는 행정관 [본문으로]
  3. 칸세이(寛政=1789‐1801)년간에 에도 바쿠후(幕府)가 토쿠가와 일족을 제외한 다이묘우, 하타모토 등에게 족보를 제출하게 하여 각 가문의 유례를 기록한 것. 자유 제출이었던 만큼 자신들의 조상을 띄우기 위해 날조나 왜곡이 많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영지를 삭감 혹은 전부 몰수 당하고 심하면 평민으로 강등 [본문으로]
  5. 제자들 중 뛰어난 일곱 제자. 문서에 따라 다르나 주로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 忠興), 후루타 시게테루(古田 重然), 시바야마 무네츠나(芝山 宗綱), 세타 마사타다(瀬田 正忠), 카모우 우지사토(蒲生 氏郷), 타카야마 우콘(高山 右近), 마키무라 토시사다(牧村利貞)를 지칭함. 오다 우라쿠사이의 경우 아라키 무라시게(荒木 村重), 리큐우의 아들인 센노 도우안(千 道安)과 함께 십철(十哲)로 꼽힌다. [본문으로]
  6. 다이묘우를 섬기며 다도에 관한 것을 관장함 [본문으로]

삿사 나리마사( 成政)

1588년 윤 5 14 할복 53.

1536 ~ 1588.

오와리(尾張) 히라(比良) 성주. 오다 노부나가(織田 信長)를 섬기며 '검은 화살막이 부대 - 쿠로호로(黑母衣)()' 필두(筆頭)에 발탁되었다. 주로 시바타 카츠이에(柴田 勝家),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과 호쿠리쿠(北陸) 방면을 담당하였다. 후에 토요토미노 히데요시(豊臣 秀吉)에게 항복하여 히고(肥後) 국주()에 임명받았으나, 실정(政)의 책임을 지고 할복.








히데요시(秀吉), 토시이에(利家)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 시대.

 용맹으로 유명했던 삿사 나리마사는 라이벌 마에다 토시이에와 거의 같은 스피드로 출세하여 토시이에가 오다 군단의 엘리트들이 모인 '붉은 화살막이 부대 - 아카호로(赤母衣)()'에 발탁되었을 때 나리마사는 쿠로호로중 필두가 되었다.

 1576년에는 토시이에와 함께 [부츄우(府中)삼인중[각주:1]]에 임명되었으며, 1581년에는 엣츄우(越中) 60만석을 받아 토야마(富山) 성주가 되었다.


 나리마사의 비운은 1582 6 노부나가의 죽음부터 시작되었다. 혹은 다음 천하인이 되는 토요토미노 히데요시를 신출내기 출세자로 깔보는 감정이 나리마사의 말년 6년간의 운명을 결정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음 해인 1583년.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토야마성에서 움직이는 일 없이 형세를 관망하고 있던 중에 시바타 카츠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패했다. 할 수 없이 히에요시에게 둘째 딸을 인질로 받치고 항복. 히데요시도 이것을 받아들여 나리마사는 지금까지처럼 엣츄우 일국을 안도받았다.


 그러나 다음해인 1584년.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치하며 유리하게 싸움을 전개하고 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의 요청에 응하여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마에다 토시이에의 영내(領內)노토(能登) 하쿠이(羽咋)의 스에모리(末森)성을 기습하였다. 토시이에의 필사적인 반격에 패퇴하면서도 쿠리카라(俱利加羅) 고개에 병사를 배치하여 나리마사가 끈질기게 분전하고 있던 와중에 중앙에서는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려 하고 있었다.

 고립되는 것을 우려한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포기하지 말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엄동의 산길에 악전고투하면서도 돌파(‘サラサラ라 일컬어지고 있다). 하마마츠(浜松)의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나는 히데요시와 원래부터 원한이 없다]며 거절당해 허무하게 귀국한다.


키타노(北野) 대다회(大茶會) 중지


 토시이에의 원군을 요청 받은 히데요시는 호쿠리쿠에 칸파쿠()의 위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다음 해인 1585 8만의 병사를 이끌고 보무당당하게 카가(加賀)로 진입했다. 히데요시-토시이에의 대군을 앞에 두고는 용맹을 떨친 나리마사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밀고 중이 된 나리마사는 니이카와(新川)() 20만석으로 영지가 줄었지만 살아 남았다.


 그래도 1587년. 나리마사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큐우슈우(九州)평정을 끝낸 히데요시는 종군했던 나리마사에게 히고(肥後) 일국(一国)을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앞으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등,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각주:2].


 엣츄우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코쿠진([각주:3]) 영주의 세력이 강한 히고는 지금까지 나리마사가 겪어 온 것과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의 코쿠진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때 히데요시는 쿄우토(京都)의 키타노에서 큰 다회(茶會)를 열고 있었는데, 둘째날이 되어 나리마사가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10일간 열릴 예정인 다회를 중지하였다. 차 도구는 무엇이든 좋으며 빈부나 귀천을 묻지 않고 누구나 참가하라는 대 이벤트를 중지할 수 밖에 없게 된 히데요시의 분노는 컸다.


비운의 최후와 검은 백합 전설.


 새해가 된 1588년.

 히데요시가 파견한 원군으로 반란은 진정되기 시작했으나 히데요시에게 실정의 책임을 추궁받은 나리마사는 이유 설명을 위하여 오오사카(大坂)의 히데요시를 방문하려 했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아마가사키(尼崎)의 호우온(法園)()에 유폐되어, 5 14 할복하여 죽었다.

 배를 열십자로 가르고 장기를 손으로 끄집어 내었다고 한다[각주:4].

 53세였다고 한다.


 강직했지만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 했던 나리마사의 비운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검은 백합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그 중 하나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아마가사키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白山) 산에서 핀다는 검은 백합을 하야비캬쿠(早飛脚[각주:5])로 받아서, 좋게 말해 달라며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각주:6])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키타만도코로는 곧바로 다회를 열어, 초대했던 요도도노(淀殿[각주:7])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은쟁반에 담아 이 귀중하고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몇 일 지난 후.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키타노만도코로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키타만도코로는 나리마사에게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小百合[각주:8]) 히메()의 저주가 추가된 것도 있.
  1. 또 한 명은 '후와 미츠하루(不破光治)'. [본문으로]
  2. 오제 호안(小瀬 甫庵)의 [보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동시기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하시바 히고지쥬우님(羽柴肥後侍従との)'이라고 썼지만, 저 5개조의 편지에는 '삿사 쿠라노스케(佐々内蔵助)'라 적혀있기에 실존성이 의심간다는 말도 있다. [본문으로]
  3. 그 지방의 호족. [본문으로]
  4. 그 외에 오오사카 쪽을 노려보다 이빨을 너무 앙물어 서너개의 이빨이 부러졌다고도 한다. [본문으로]
  5. 지금으로 말하면 택배 같은 것. [본문으로]
  6.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ノ政所). [본문으로]
  7.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頼)를 낳았다. 이 일로 히데요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어 정실인 키타만도코로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8. '작은 백합'이라는 의미. [본문으로]